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12화
112화
"크흠, 내…내일은 그럼 쇼핑을 가는 걸로 할까?"
승호는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급히 말을 돌렸다.
승호의 말에 다나와 에밀리의 얼굴이 돌변했다.
"물론이지. 승호! 내일은 쇼핑이야. 너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에밀리의 말에 다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얼굴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건 아멜리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벌써부터 표정이 달러져서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스토커나 기자들 때문에 승호에게 미안해했던 것들에 대해 서는 잊은 얼굴이었다.
'훗, 이거면 된 건가?'
돌변한 친구들과 아멜리아의 기뻐하는 표정에 비로소 승호는 마음이 놓였다.
"제이슨, 휴가 간다고?"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군인이 동년배의 갈색머리 남자에게 말했다.
"그래, 로버트. 휴가 신청했어."
갈색 머리의 청년이 대답했다.
청년의 이름은 제이슨으로, 미국 본토를 떠나 한국으로 배치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넌 한국에 아는 곳이 많겠군."
"뭐, 서울은 모두 내 영역이지."
로버트가 웃으며 대답했다.
"후훗, 서울은 좋은 곳이야. 즐기라고."
"물론이지. 아주 화끈하게 즐겨볼 생각이야."
제이슨의 말에 로버트가 양손가락으로 제이슨을 가리키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잇~
"잘해보라고. 제이슨. 너무 심하게 놀다가. 애인한테 들키진 말고."
"사실은 애인이 친구들과 함께 한국에 놀러 왔어.
"그래? 이 자식. 애인이 한국까지 왔다니. 정말 널 사랑하나 보구나."
"물론이지. 그녀는 세상에서 날 가장 사랑한다고. 그렇고말고."
"부럽다. 이 자식아."
로버트는 제이슨의 어깨를 한 대 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멜리아~ 역시 우린 운명이었어. 본토를 떠나니 네가 여기까지 찾아왔잖아.'
로버트가 밖으로 나가자 제이슨은 포켓에서 아멜리아의 사진을 꺼내며 미소를 지었다.
'넌 날 사랑해. 아멜리아. 내가 그걸 깨닫게 해줄게.'
제이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챙겨 부대 밖으로 나갔다.
* * *
"여기에 없다고?"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한 수지의 말 때문에 기자들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기자들 중 누군가가 입술을 깨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쩌긴 돌아가야지?"
"뭐라도 안 들고 가면 데스크에서 지랄할 텐데."
"조금만 더 버텨보자."
"난 돌아갈래."
기자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웅성거리고 있을 때, 이진주는 발길을 돌렸다.
"어이― 이 기자, 가는 거야?"
이진주를 잘 아는 동료 기자 하나가 그녀가 돌아서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이진주는 이 바닥에서 나름 이름 있는 기자였다.
동료 기자들은 이진주가 간다는 말에 모두 그녀 쪽을 쳐다보았다.
"여기 죽치고 있다고 일이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지. 난 간다. 잘들 해봐."
이진주의 뒷모습을 보며, 기자들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저 불여우가 그냥 간다고?'
'역시 여기 있어봐야 허탕만 치는 걸까?'
'갔는데, 나중에라도 나타나면 나만 X되는 것 아냐?'
기자들은 각양각색의 고민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유능한 기자는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 법이지.'
이진주의 삐삐에는 뭔가 급한 연락이 필요할 때 남기는 번호가 올라와 있었다.
동료들의 눈을 피해 공중전화기를 찾은 그녀는 자신에게 연락을 보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기자님?
"맞아, 무슨 일이야? 뺀돌이."
―아이씨, 그렇게 부르지 말라…….
"알았어, 알았어. 그래 무슨 일로 전화하라고 한 거야?"
―듣고 놀라지나 마세요. 우리 호텔에 아멜리아 패닝이 왔어요.
빙고―
이진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호실은?"
―1103호실이요.
"혼자야?"
―아니요. 경호원들이 잔뜩 붙어 있고. 친구로 보이는 여자 둘, 그리고 남자 하나도 같은 방.
"남자도 같은 방이라고?"
―적어도 따로 방을 얻진 않았어요.
"짐은? 남자 짐도 있어?"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알았다. 수고했어."
―말로만 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알았어. 알았어. 섭섭하지 않게 쳐줄게."
―역시 우리 누님 화통하시다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옙, 맡겨만 주십쇼.
연예부 기자가 된 후, 이진주는 유명 호텔에서 일하는 호텔종업원들을 정보원으로 많이 포섭해두었다.
이진주가 특종을 많이 잡아내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
"자아, 위치는 알았고. 그런데 경호원들이라… 쉽지는 않겠네."
잠깐 고민하는 이진주였다.
그런데 최승호가 따로 방을 잡지 않았다는 말이 걸렸다.
'혹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생각인건가? 대체 언제?'
이진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좋아, 그러면 시간이 좀 있겠군."
그녀는 자신의 차에 올라탄 후, 어딘가로 향했다.
* * *
"뭐라고요?"
"예,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정말이에요. 기자님."
이진주는 홍수진의 말을 믿어야 할지 망설였다.
홍수진은 삼양백화점 붕괴 사건에서 살아남은 직원 중 한 명이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의하면 사건이 일어나기 전, 미리 붕괴 사고를 예견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선뜻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런데 홍수진이 너무 진지하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눈빛이며 표정이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이진주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왔다.
그중에는 거짓 제보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름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터라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홍수진은 거짓말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뜻 홍수진의 말을 믿기에도 어려웠다.
당시 사고 이후, 이진주는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후속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언젠가 사회부로 다시 돌아갔을 때, 탐사기사 형식으로 낼 생각이었다.
다시는 이 땅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없도록 기사로 사회의 경종을 울리고자 한 것이다.
그것이 조금이나마 당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이진주 나름의 속죄였다.
그런데 오늘 믿기 힘든 말을 들었다.
당시 사건이 일어나기 전 붕괴 시점까지 거의 정확히 맞춘 사람이 있었다니?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 사람 인상착의가 어떻게 되었죠?"
이진주의 물음에 홍수진은 자신이 기억하는 강혁의 인상착의를 말해주었다.
"키는 엄청 컸어요. 한 190 정도는 되는 것 같았어요."
'190이라? 이건 중요한 정보야.'
동양인으로 키가 190이 넘는 사람은 매우 드문 시기다.
이진주는 홍수진이 말한 것을 수첩에 적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수입 고급 양복을 입고 있었어요. 브랜드는 베르사체예요."
남성 수입 양복점에서 일했던 터라 홍수진은 강혁이 입었던 옷의 브랜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돈은 좀 있는 남자라는 건가?'
"그렇군요. 또 다른 거는요?"
"몸이 탄탄한 것이 운동을 한 것 같았어요."
"근육질이었나요?"
"…음? 막 울퉁불퉁한 그런 근육은 아니지만… 상당히 단련된 듯한 몸매였어요."
"수진씨, 그 사람이 당시에 했다는 말을 기억하는 대로 다시 해주시겠습니까?"
"음, 잠깐만요. 그러니까……."
홍수진은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자신이 겪었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이진주는 홍수진의 설명을 들으며 그녀의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녀가 꾸며낸 이야기인 것 같지 않았다.
'아냐, 이진주 정신 차려.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이진주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중요한 제보 감사드립니다."
이진주는 취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홍수진에게 악수를 청했다.
"안 믿으시죠?"
홍수진이 빤히 이진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 아뇨. 그렇지 않아요."
"알아요. 믿기 힘들다는 거. 하지만 모두 사실이에요.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나 애라는……."
홍수진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이 사람이 정말 거짓말을 한 걸까?'
이진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을 나가는 홍수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 *
새벽 힐튼호텔.
이진주는 정보원이 알려준 정보를 토대로 힐튼호텔 로비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최승호가 따로 방을 구하지 않고 같은 방에 있었다는 말을 근거로 대기를 타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날 새벽,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는 최승호의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호텔에서 나오는 사진을 찍은 것이라 나름 수확이 있는 셈이었다.
이 사진 하나로 독자들에게 야릇한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었다.
'흐흐, 하나 건졌다.'
이진주는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는 일단 철수했다.
지금 당장은 아멜리아 일행이 있는 곳을 아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또 다른 일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내일 하루는 종일 이들을 따라다닐 생각이었다.
오전 11시.
최승호가 호텔에 다시 나타났다.
이진주는 승호의 등장에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그렇게 호텔 로비에서 대기하기를 30분여 분이 지났다.
'나…나왔다.'
아멜리아 일행이 승호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로 걸어나왔다.
찰칵― 찰칵―
이진주는 소형 카메라를 이용해서 몰래 그들이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몰래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때 그녀의 옆을 누군가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멜리아 일행을 쫓아가는데 정신이 팔려 미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엇? 어디 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조금 전까지 목에 걸고 있던 소형 카메라가 사라졌다.
이진주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카메라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뭐, 뭐야? 이게 어찌된 일이지?'
―회수완료.
스타크래프트 밴에 아멜리아 일행과 함께 앉아 있는 독거미 류수정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귀신같은 자식'
통신기로 들려온 최요한의 말은 잠복하고 있던 기자의 카메라를 회수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류수정은 짐짓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했다.
최승호나 아멜리아 등이 걱정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밴이 출발한 지 몇분 후, 운전 중인 캐리 박과 류수정의 귀로 통신이 왔다.
―차가 따라 붙었다. 회색 소나타.
팀장인 박정철의 목소리였다.
캐리 박은 사이드 미러로 차를 확인했다.
―조금 전 그 여자야. 따돌려.
―라져.
엑셀을 힘껏 밟더니 기가 막힌 핸들링이 이어졌다.
육중한 스타크래프트 밴에서 나온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신속함으로 차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차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조금 전까지 앞서가던 차들을 쏜살같이 뒤로 보냈다.
"뭐… 뭐야? 들켰나?"
이진주도 질 수 없다는 듯 엑셀을 밟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심 속 도로였다.
차량의 홍수 속에서 낼 수 있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마찬가지 환경 속에서 육중한 차체의 스타크래프트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젠… 젠장? 대체 저 차 운전하는 놈 누구야? 얼굴 한번 보고 싶네?"
이진주는 기가 막혔다.
저렇게 크고 육중한 차체를 가지고, 저런 운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