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13화
113화
#30장 상상의 나래
"저것 봐. 아멜리아야!"
"헐, 헐리웃 여배우가 한국엔 왜?"
비록 경제 성장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던 때였지만, 한국은 여전히 변방 취급받던 시기였다.
영화 홍보를 와도 딱 일본까지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가던 시기다.
아멜리아 같은 유명인이 한국을 찾았다는 사실에 백화점에 온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하지만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 때문에 가까이 접근은 하지 못하고 멀리서 구경했다.
"그런데 혹시 최승호 아냐?"
"맞다 맞아, 최승호다. 최승호."
구경하던 사람들이 최승호를 알아보고 수근거렸다.
"하아, 최승호잖아? 그… 그런데 최승호가 대체 아멜리아 패닝과 어떻게 함께 있는 거지?"
여친과 함께 쇼핑을 하러 온 한 남자가 최승호와 아멜리아 무리를 발견하고 놀라고 있었다.
"오빠, 왜 기억 안 나? 테러 사건 때 최승호가 구해줬잖아."
여친의 말에 남자가 감탄성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 그럼 혹시 두 사람 사귀나?"
"그럴지도 모르지. 생각해봐. 아멜리아 같은 헐리웃 스타가 뭐 볼 거 있다고 한국에 왔겠어."
"그… 그렇지? 사실이면 진짜 대박인데?"
90년대 후반, 한국의 위상은 아시아의 네 마리 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다.
싱가폴, 홍콩, 대만과 경쟁하던 시기라 서울 한복판에 헐리웃 스타의 출현은 상상하기 힘든 때였다.
한국인이 헐리웃 여배우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 자체가 의외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그런 시기라 최승호라는 존재는 매우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 그런데 친구들도 모두 미모가 장난이 아니지 않아?"
"정말 그래. 어쩌면 최승호가 사귀는 사람은 저 두 사람 중에 있는 것 아냐?"
구경꾼들은 최승호와 아멜리아, 에밀리, 다나가 함께 쇼핑하는 모습을 보며 각가지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었다.
"승호, 이것 좀 봐. 어때 어울려?"
에밀리가 화려한 금발을 휘날리며 가까이 다가오더니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잘록한 허리가 강조된 맵시있는 여름 원피스였다.
원래 치어리더로 활동하며 몸매가 웬만한 모델 뺨치는 에밀리다.
특히 인형같은 얼굴에 눈웃음이 매력적이었다.
"어어, 에밀리. 진짜 예쁘다. 어울려."
승호는 에밀리의 넘치는 매력에 순간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고 있는지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에밀리의 매력은 가끔씩 승호의 방어를 무력화시킬 정도였다.
"그래? 정말이지?"
승호의 말에 에밀리는 즐거워했다.
"승호, 여기 좀 봐줘. 난 어때. 어울려?"
도도하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
그러면서도 품위 있는 다나의 멋스런 옷맵시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우와, 멋져. 다나."
"후훗, 이걸로 사야겠다."
다나와 에밀리가 새로운 옷으로 갈아 입기 위해 사라졌다.
잠시 후, 움직이기 간편하면서도 나름 멋스런 옷을 고른 아멜리아가 나타났다.
"흠, 조금 어색하긴 한데……."
"…아멜리아."
승호는 아멜리아가 나타나자 순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앞의 두 사람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치장되지 않은, 꾸미지 않은 순수한 아름다움이 그곳에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을 10대 리즈 시절의 청순미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응? 왜 그래?"
"아니, 저기… 예, 예뻐서."
"……! 그…그… 그래?"
승호는 진심으로 순수하게 우러나오는 감탄이 터졌다.
평소 아름답다, 예쁘다는 말을 밥 먹듯이 듣던 아멜리아 패닝이었다.
그녀에게 예쁘다, 아름답다는 말은 사실 가장 식상한 말이기도 했다.
마치 식은 스프처럼 끌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런데 승호가 말하자 뭔가 달랐다.
'예쁘다고? 정말일까?'
아멜리아는 자신이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것을 느켰다.
'우우, 내가 왜 이러지?'
아멜리아는 자신이 왜 승호의 말에 부끄러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생 들어왔던 말이 아니었던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마치 태어나 처음으로 듣는 말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마치 세상에서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말한 유일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아멜리아는 승호의 감정이 마치 자신의 영혼에 와서 닿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아멜리아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갈…갈아 입고 올게."
"그…그래."
조금 전의 상황에 급 달아오른 두 사람은 순간 모두 얼굴을 붉혔다.
그때 에밀리와 다나가 새로운 옷을 입고 나타나 아멜리아는 황급히 사라졌다.
최승호도 급히 얼굴을 수습했다.
'이런 바보 같으니, 혹시 눈치챘을까?'
승호는 조금 전 아멜리아에게 예쁘다고 말했을 때, 그동안 고이 숨겨왔던 감정이 흘러나온 것을 느꼈다.
입을 열자마자 몸 안에 담아 두었던 무언가가 넘쳐 버렸다.
결코 들키고 싶지 않았던 마음을 그만 당사자에게 조금이지만 들켜버린 것 같아 창피했다.
"승호, 이상해?"
"……? 뭐…뭐가?"
"얼굴이 빨개? 혹시 열 있는 거 아냐?"
에밀리가 의아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아, 아냐. 난 괜찮아."
최승호가 급히 얼버무렸다.
이날 대한민국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떠들썩했다.
최승호와 아멜리아 패닝 이야기로 언론 지상이 도배가 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진주의 사진으로 아멜리아 일행이 힐튼 호텔에서 묵고 있는 것도 알려졌다.
최승호가 새벽에 호텔에서 나오는 사진도 찍혀 최승호의 집에도 다시 기자들이 진을 쳤다.
힐튼 호텔 측에서는 투숙객들의 편의를 위해 일체 기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다.
결국 양쪽 모두에서 인터뷰를 한 줄도 따지 못한 언론도 많았다.
그들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분홍빛 가십거리 기사들로 도배를 했다.
지난 테러 사건 이후, 최승호와 헐리웃 스타 아멜리아가 사귀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은 단순한 학교 친구 사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진짜 사귀는 사이는 최승호와 에밀리라는 소문도 돌았다.
에밀리의 페이스북에 올려져 있는 많은 사진들이 근거로 대두되었다.
사진 중에서 상당량이 에밀리와 최승호가 함께 찍혀 있는 사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 두 사람은 다른 친구들과도 같이 찍혀 있었기에 설득력을 잃었다.
여기에 다나의 정체가 드러나며 화제성이 더욱 상승했다.
미국 10대 기업의 하나인 아메리카 헬스 그룹의 상속녀.
다나 무어.
한 사람만으로도 매력이 넘치는 미인들이 모두 셋이나 최승호와 연관이 되었다.
이를 놓칠 언론이 아니라고 할까?
세 미인과 최승호와의 연분 맺기에 재미를 들인 언론은 세 사람과 승호에 대해 별의별 소설을 다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또 먹혔다.
네 사람의 연애관계에 대해 다룬 망상에 가까운 방송들이 모두 시청률이 급상승한 것이다.
이에 호응하듯 각종 방송에서 네 사람을 가지고 몇 날 며칠을 우려먹었다.
그 와중에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는 아멜리아 일행과 최승호의 사진들이 페이스북에 대량으로 올라왔다.
방송에서 다뤄진 네 사람의 사진들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너도나도 페이스북에 가입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페이스북의 가입률이 한국에서 기록적으로 상승했다.
이 와중에 아멜리아의 전 세계적인 인기가 페이스북 보급에 또 한몫을 하게 된다.
한동안 대입시험 때문에 학교생활에 열중했던 아멜리아였다.
언론에 노출이 거의 되지 않던 상태가 몇 년간 이어졌었다.
그런 상태에서 한국 언론에 아멜리아가 등장하자 해외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에서 방영된 뉴스들이 외국 언론에서도 등장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한국인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들에 관심을 보였고, 페이스북의 가입률 또한 덩달아 상승했다.
* * *
도쿄 공항.
강혁의 전용기가 도쿄 공항에 착륙했다.
매끈한 연청빛 동체의 게이트가 열리며 말쑥한 백인 신사가 비행기 탑승구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그의 뒤로 젊은 남녀들이 칼처럼 각이 선 양복을 입고 뒤를 따랐다.
그들의 손에는 검은 슈트케이스들이 들려 있었다.
백인 신사가 지상에 도달하자 그의 앞에는 양복을 입은 십여 명의 일본인들이 줄을 서서 도열했다.
그런데 앞에 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연배가 있어 보인다.
그들이 뒤에는 상대적으로 젊은 일본인들이 서 있었는데 모두 나이든 일본인들의 하급자처럼 보였다.
"윌슨 사장님, 일본 방문을 환영합니다."
일단 나이든 일본인들이 윌슨을 향해 억지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올리브 윌슨과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이 되어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굴욕적인 미소를 띠며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이들은 모두 한 기업의 사장이거나 은행장들이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올리브 윌슨이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그들을 돌아보았다.
일본인들이 일제히 그에게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일단 저희가 식사 장소로 모시겠습니다. 윌슨 사장님."
"그렇게 하죠."
윌슨이 앞장서자 그 뒤를 일단의 일본인들이 줄지어 뒤따랐다.
윌슨은 그들을 힐끗 바라보며 남몰래 입가에 비웃음을 지었다.
도쿄 긴자의 유명 일식당 '일미'.
윌슨은 일본의 은행장과 기업 사장들이 안내한 스시 집에 들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 수상이 미국의 대통령을 접대한 유명한 식당이었다.
잠시 후, 윌슨의 앞에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엄청난 회 요리들이 쫙 깔렸다.
자신을 따라 온 회사 직원들도 다른 방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즐겁게 식사를 마친 월슨의 표정을 살피며 마이니치 은행장 사이토 이치로가 물었다.
"윌슨 사장님, 우리 은행들에게 투자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저희 회사 특허를 사준신다고 들었습니다."
사이토가 선수를 치자 스텔라케미파 사장 미야모토가 급히 끼어들었다.
스텔라케미파는 일본의 대표적인 불화수소 생산 기업이었다.
"하하, 우선 하나씩 합시다. 하나씩."
윌슨이 일본식 청주 사케를 입가에 가져가며 웃었다.
술 향기를 음미하며 한 모금, 목구멍으로 넘긴 윌슨은 여유로웠다.
그는 슬쩍 무릎을 꿇고 있는 일본인들을 바라보았다.
'자… 그럼 어디 돈을 벌어보자고. 윌슨.'
"그럼, 먼저 은행들부터 시작해보죠."
윌슨이 말에 자리에 모여 있던 은행장들이 안도의 한숨을 살짝 쉬었다.
그에 반해 거래 은행의 부도 위험에 덩달아 자금이 말라 버렸던 회사의 사장들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자, 너무 걱정 마세요. 미리 말씀드린 대로 저희는 여러분들에게 투자할 의도가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윌슨 사장님."
윌슨이 사장들을 안심시켰다.
'물론이지. 앞으로 황금알을 낳을 거위들이신데.'
"그…그럼. 전액 엔화로 지분을 매입하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뭐, 불만이라도?"
"아, 아닙니다. 저희는 그렇게 해주신다면 좋지요."
강혁의 사주를 받은 솔라스의 환투기 공격으로 엔화의 가치가 폭등한 때였다.
은행장 입장에서는 입에 웃음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현재 골든타워가 매입해서 보유하고 있던 엔화는 엄청난 양이었다.
모르는 것이 약이란 속담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윌슨이 자신들의 은행을 파산지경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의 하수인이란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수혈 받고 있는 엔화 역시 원래 당신들의 돈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윌슨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