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125화 (125/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25화

125화

이연주는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었어.'

의류상가 직원인 이연주는 야간근무를 위해 직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 27살이었다.

또래 여자들은 한참 멋을 부릴 나이지만 이연주는 항상 검소하게 생활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평소 절약하고 살아서였다.

올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지 8년차였다.

얼마 전에는 평소 마음이 있었던 거래처 직원과 장래를 약속한 사이로 발전했다.

사랑을 시작한 이연주는 요즘 온 세상이 핑크빛이었다.

비록 직장일이 힘들기는 해도 요즘 같기만 하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연주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한참 골목길을 지나갈 때였다.

저 앞에서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다가왔지만 이연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연주는 머릿속으로 오늘 야간근무 중에 해놓아야 할 작업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상 블라우스는 진열하고, 재고는 창고에 넣어두라고 하셨는데…….'

푸욱―

이연주는 뭔가가 자신의 살을 꿰뚫고 들어오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다시 몸을 찔렀다.

칼이었다.

허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사… 살려… 줘―'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사람처럼 주저 없이 찌르고는 그대로 달아났다.

이연주는 손으로 피가 나오는 부위를 눌렀다.

"인수야, 바다 당구장에 짜장 세 그릇 배달이다."

"예, 사장님."

배인수는 철가방에 막 나온 따끈한 짜장면을 넣고 배달을 나서려고 했다.

드르륵―

문이 열리며 온 몸에 피가 흥건한 한 젊은 여인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사… 살려… 주세요."

여성의 허리 부근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허리 부근의 피가 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어어?"

배인수는 깜짝 놀랐다.

"사, 사장님! 나와 보세요. 빨리요!"

"왜 이리 호들갑이고?"

"사장님, 피! 피!"

배인수는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뭔 헛소리고?"

주방에서 나온 곽 사장은 홀로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눈앞에 옷 절반이 피로 물든 젊은 여성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곽 사장이 뛰어가 이연주의 팔을 잡아 주었다.

"사… 살…려… 주……."

이연주의 두 눈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며칠 전 자신에게 반지를 내밀며 청혼했던 연인의 모습을 끝으로 이연주는 정신을 잃었다.

'경수… 씨…….'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봐요!"

곽 사장은 정신을 잃고 쓰러지려는 이연주를 잡아주며 정신없이 소리쳤다.

"이봐요? 괜찮아요? 정신 차려요?"

이연주를 향해 정신없이 소리를 지르던 곽 사장은 어느 순간 그녀가 이미 숨을 멈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헉! 죽… 죽었어."

중국집 북경루 앞에는 노란색 폴리스 라인이 쳐졌다.

골목길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렸다.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들은 모여든 경찰들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래?"

"누가 죽었다나봐."

"뭐? 아는 거 있으면 좀 얘기해봐."

"그게 젊은 여자가 여기 골목길에서 칼에 찔려 죽었다네."

"어머머, 세상에. 어머머 세상에."

찰칵! 찰칵!

감식반이 카메라를 들고 사건의 최초 발생지로 추정되는 장소의 이곳저곳을 찍었다.

중국집으로 이어지는 핏자국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이다.

강력반 반장 마동태는 예리한 눈으로 현장을 관찰했다.

"반장님, 피해자 신원이 확인됐습니다."

"그래?"

"예, 이름은 이연주. 나이 27세. 이곳 상가에 있는 의류점 라라 직원입니다."

"다른 건?"

"사장 말로는 오늘 저녁 근무였다고 하고, 가게로 가는 길에 일을 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치정이나 원한 관계가 있는지 알아봐."

"예, 반장님."

마동태의 지시에 허준우 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에 나와 있는 형사들은 대부분 치정이나 원한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범행이 지나치게 잔인했기 때문이다.

범인이 피해자에게 흉기로 찔렀던 자리에는 말라버린 피로 얼룩져 있었다.

마동태 반장은 현장을 확인한 후, 다시 피해자의 사체가 있는 중국집으로 향했다.

아직 사체는 현장에 그대로 있었다.

반장의 눈에 사체를 살펴보고 있는 강혁이 보였다.

"강혁?"

마동태 반장이 강혁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미동도 없이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상처부위를 살펴보았다.

'저 녀석. 살인사건 현장은 처음 일 텐데? 왜 저렇게 침착하지?'

강혁이 강력반에 들어온 후 첫 번째 살인사건이었다.

그런데 묘하게 침착하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런 현장이 익숙해보였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마동태는 고개를 흔들며 강혁에게 다가갔다.

"왜 살펴보니 뭐 좀 알겠어?"

마 반장의 말에 그제야 강혁이 고개를 돌렸다.

"반장님~"

마반장이 빙긋이 웃었다.

파출소에 있던 강혁을 강력반으로 데리고 온 것은 마 반장이었다.

그것도 다른 반장들과 치열한 대결 끝에 데려온 것이었다.

마 반장이나 다른 강력반 반장들이 강혁에게 눈독을 들인 것은 첫째로 눈썰미가 좋다는 점이었다.

특히 강혁은 기억력이 뛰어난지 순찰 도중 수배범들을 많이 잡았다.

강력반으로 옮긴 후에도 수배범이나 소매치기는 기가 막히게 잡아냈다.

그거 하나하나가 3반의 실적으로 돌아와 반원들이 특히 강혁을 좋아했다.

"말해봐. 뭐 좀 알겠냐?"

마 반장은 큰 기대 없이 말했다.

보통의 막내라면 시체를 보고 기겁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역겨운 피 냄새에 오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에 반해 강혁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상처 자국을 살피니 그 모습이 대견해서 물어 본 것이다.

"자상을 보면 범인은 피해자의 복부를 위에서 아래로 찔렀습니다. 이렇게요."

강혁은 칼을 쥔 시늉을 하며 동작을 시연했다.

"그래?"

"예, 반장님. 피해자의 신장이 160에 못 미친다고 보면, 이 각도에서 팔을 이렇게 썼으니……."

"……."

"신장이 160후반이거나 170초반으로 보입니다."

"……?"

마 반장은 강혁의 설명에 눈을 끔벅거렸다.

자상의 위치만으로 범인의 신장을 계산한다?

가능한 이야기지만 자신은 미처 생각 못한 이야기라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범인은 피해자의 오른쪽에서 찔렀을 겁니다. 스치듯 지나가다가 갑자기 푹 찌른 거죠."

강혁은 피해자의 오른쪽 옆구리에 있는 자상의 각도를 설명했다.

"흐흠, 그럴 듯한데?"

현장에 있던 강혁의 선배 형사들은 어느새 강혁의 설명에 빠져들고 있었다.

"상대는 이번이 첫 범행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강혁의 설명은 여러 가지 의문점을 함축하고 있는 말이었다.

"무슨 말이지?"

마 반장이 질문할 때, 강력3반의 백곰 문환일 형사가 물었다.

커다란 덩치에 순한 얼굴이지만, 유도 2단으로 강력3반 최강의 힘캐다.

"살인의 전문가라기에는 여러 번 찔렀습니다."

"……."

"그 자리에서 즉사하지 않은 피해자는 30여 미터를 걸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

"범인이 전문가라면 피해자는 거기서 죽었겠죠."

강혁은 중국집 바깥 골목을 가리켰다.

마 반장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 귀엽지 않은 막내야."

문 형사가 강혁의 뒤통수를 툭하고 쳤다.

"그러게 말이야. 가르치는 재미가 없네. 짜식."

최 형사가 웃으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소주 한잔?"

문형사가 손가락으로 소주잔을 만들어 마시는 시늉을 했다.

"술은 범인을 잡고나면 한다. 잘 들어."

마 반장이 강력반 팀원들 모두를 향해 말했다.

"범인 잡기 전까지는 집에 들어갈 생각 마."

"예! 반장님."

마 반장의 말에 팀원들은 모두 씩씩하게 대답했다.

강력3반의 형사들의 눈빛이 번쩍거렸다.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의 원한을 반드시 갚아줄 것이라 다짐했다.

아직 27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다.

강혁은 자연스레 죽은 아내를 떠올렸다.

'…유라야.'

현장검증이 끝나고, 피해자의 사체는 검시실로 옮겨졌다.

하얀 천에 덮여 가게를 나가는 피해자를 향해 강혁은 명복을 빌었다.

마 반장과 강력반 형사들이 모두 가게를 나갔다.

홀로 남은 강혁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강혁은 회귀 전 강력반에 들어온 후 일어난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이때 이런 살인 사건은 일어난 적이 없었어.'

강혁은 달력을 살펴보았다.

9월8일. 이날 강혁은 야근으로 강력반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 먹었고, 새벽 2시경 주취로 들어온 사내를 유치장에 가두었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하루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 대해 전혀 아무런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발생한 사건과 판박이처럼 닮은 사건이 있었다.

'2004년도에 일어난 서울 서남부 지역 연쇄살인사건과 유사하다.'

서울 서남부 사건의 첫 번째 살인사건이 공교롭게도 바로 중국집에서 일어났었다.

당시에도 젊은 여성이 피해자였다.

당시의 희생자 역시 골목길에서 지나가던 행인이 갑자기 찌른 칼에 맞아서 중국집으로 피신했지만 사망했다.

이번 사건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12여 건의 살인사건이 더 일어났다.

범인의 이름은 남정규.

2004년에 등장한 희대의 연쇄살인범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97년도다.

남정규가 등장하기에는 이른 시기인 것이다.

단순한 우연일까?

지금 수사의 방향은 치정이나 원한관계에 의한 범행으로 모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혁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기억 속에 없는 범행. 그리고 기억 속에 있는 범행.

모두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만일에 범인이 정말로 남정규라면 큰일이었다.

남정규는 살인을 위해 하루에 10km씩 마라톤으로 체력을 단련한 인물이었다.

잡혔을 때 한 말이, 자신은 1000명을 죽이려고 했는데 벌써 잡혀서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살인도구 역시 흉악했다.

범행 초기에는 칼을 사용했고, 후기에는 망치 등의 흉기로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잡히지 않고 범행을 계속하기 위해 CCTV가 있는 곳에서는 결코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범행 현장에 족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신발 밑창을 아예 뜯어버렸다.

잡혔을 무렵에는 살인중독에 빠져 스스로도 살인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있었다.

반드시 사건이 발생한 초기에 잡아야 하는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가 맞지 않았다.

지금쯤 남정규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 시기의 남정규가 무엇을 하고 어디에 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강혁의 고민이 더 깊어갔다.

'흐흐, 강 형사님. 제가 보낸 선물은 잘 받으셨나 모르겠네요.'

TV에서는 중국집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여성에 대한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신상현은 소파에 앉아 뉴스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상현아, 뭐가 그리 재미있어서 그렇게 웃는 거니?"

거실의 한쪽에서 명상 음악을 틀어놓고 요가를 하고 있는 최영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옛 친구 생각이 나서요. 어머님."

"어머? 친구? 어떤 애니? 우리 집에 초대하는 건 어떠니?"

"좋죠. 하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어머니."

"그래?"

최영혜는 아쉬워했다.

자신의 집에 온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친구 이야기를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좋은 친구니?"

"좋은 친구냐고요?"

신상현의 최영혜의 질문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주 기이한 미소였다.

"최고의 친구죠. 어머니."

신상현의 눈 속에 광기가 피어올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