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26화
126화
이수애(30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서울에 사는 시아버지 서민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시아버지 서민국의 72세 생신이었다.
의사인 남편과 지방에서 살고 있어 생신을 챙겨드리지 못해 불편한 마음에 일찍 전화를 건 것이다.
띠리리리릿! 띠리리리릿!
'전화를 안 받으시네? 어쩐 일이지?'
이수애는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오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시간이라면 시아버지 서민국이 평소 일어나 있을 시간대였다.
나이를 먹을수록 아침잠이 없기도 하고, 평소 자기관리에 철저한 서민국이었다.
평생을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체력단련에도 힘써서 일흔이 넘어서도 젊은이처럼 건강했다.
지금 시간대라면 아침운동을 갔다 올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수애는 전화를 서너 번 다시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하다? 왜 아무도 안 받으시지?'
시어머니라도 받으실만한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아침 시간에 생신날 아무런 언질도 없이 어딘가를 갔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전화선이 이상해졌나?'
이수애는 처음에는 전화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하루 종일 전화가 걸리지 않자 마음이 불편했다.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 무슨 일이야?
"자기, 아무래도 오늘 퇴근하면 바로 아버님, 어머님 찾아뵙자."
―응? 아무리 빨라도 저녁 10시는 되어야 도착할 텐데?
"오늘 생신이신데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되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듣고 보니 아내의 말처럼 뭔가 이상했다.
전화기에 이상이 있었어도 지금쯤이면 고쳐져야 했다.
오늘은 아버지의 생신이 아닌가? 아들 내외의 전화통화를 기다릴 분이었다.
답답해서 먼저 전화를 거셔도 거셨을 양반이었다.
―알았어. 퇴근하는 대로 운전해서 서울로 올라가자.
이수애는 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시부모님과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큰일이야 있겠느냐마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남편인 서준우도 내심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연신 엑셀을 밟았다.
시부모님 댁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였다.
서민국은 평생을 대학교수로 지냈는지라 나름 재산이 있어 마당이 있는 저택에서 살았다.
차를 주차시킨 서준우는 대문 앞으로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딩동!
아무런 반응이 없자 서준우는 아내 이수애와 눈을 마주쳤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을 눌렀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당신, 열쇠 가지고 있지 않아?"
서준우의 말에 이수애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에서 열쇠를 찾았다.
"여기 있어."
열쇠를 건네받은 서준우는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자 저택에는 불이 꺼져 있어 어두컴컴했다.
서준우는 제일 먼저 전원 스위치를 찾아 불부터 켰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어서 이수애는 안방을 찾았다.
"아버님, 어머님. 저희들 왔어요."
안방 문을 열자 캄캄한 방 안에서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무슨 냄새지?"
이수애는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방 안이 환하게 밝아 왔다.
"꺄―악!"
이수애는 방 안을 보고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여보, 왜 그래?"
서준우는 아내의 비명소리에 놀라 안방으로 달려왔다.
"헉!"
방 안에서 보이는 광경에 서준우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했다.
이불과 방바닥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노부부는 잠옷 차림으로 누워 있는데 머리가 짓이겨져 있었다.
서준우는 아내 이수애처럼 넋을 잃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심 형사."
마 반장은 강력3반에서 베테랑에 속하는 심 형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면식범에 의한 원한 살인인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지?"
마 반장의 생각도 일치했다.
집 안에는 방을 뒤진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귀금속이 그대로 있었다.
게다가 출입문이 잠겨 있었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었다.
"원한 관계거나,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한 살인."
마 반장의 말에 심 형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강혁 역시 사건현장을 살펴보고 있었다.
'부검을 해봐야겠지만, 저항한 흔적이 없다.'
강혁은 라텍스 장갑을 낀 손으로 사체를 살폈다.
'면식범에 의한 살인으로 판단하겠군.'
강혁은 살짝 고개를 들어 마 반장과 심 형사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살폈다.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할지는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금품이 도난당하지도 않았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도 없다.
'면식범이거나, 가족 갈등에 의한 살인.'
생각할 수 있는 건 이 두 가지다.
하지만 강혁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일주일 전에 발생한 은하동 중국집 살인사건 때 받았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유호철. 그 녀석의 첫 번째 살인사건과 너무 흡사하다.'
유호철은 남정규와 비슷한 시기에 서울에서 활동한 연쇄 살인범이었다.
대부분 부유층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둔탁한 둔기로 두부와 안면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던 것도 일치한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범행시기이다.
남정규와 마찬가지로 2004년에 범행을 벌였다.
남정규보다 먼저 살인행각을 벌였고, CCTV 때문에 잡혔다.
하지만 지금은 97년도였다. 7년 가까이 빠른 셈이다.
역시 단순한 우연일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강혁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뭔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미 은하동 중국집 살인사건은 미궁에 빠져들고 있었다.
피해자인 이연주는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치정관계도 아니었다.
그녀는 지방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온 이후 가게와 집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최근 거래처에서 알게 된 남자와 사귀기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혐의점이 없었다.
강혁 역시 이연주의 남자친구인 고경수를 만나보았다.
몇 가지 질문에 고경수는 거짓 없이 대답했다.
고경수는 이연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반드시 범인을 잡아달라며 오열했다.
강력3반은 고경수나 이연주의 주변 사람을 범인으로 의심했다.
지나치게 잔인한 살인방법.
여기에 주목한 수사팀은 원한관계로 보고 면식범이거나 치정에 의한 살인에 주안점을 두었다.
하지만 수사에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혐의점을 둘 만한 사람이 없어 수사는 난항에 빠졌다.
강혁은 이번 사건 역시 미궁으로 빠져드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었다.
삼주 후.
"하아, 어디서 잘못된 거지?"
마 반장과 강혁3반의 형사들은 화이트보드 위에 붙여 놓은 사진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가족 갈등에 의한 살인은 전원 알리바이가 확인되었다.
주변에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았지만 그럴 만한 사람도 전무했다.
화이트보드에는 저택에서 발견된 몇 가지 단서들이 적시되어 있었다.
[증거1. 희미한 구두 뒤꿈치 자국.
증거2. 지문.
증거3. 모발 일부.]
위 단서들을 가지고, 주변 인물들을 탐문하고 지문을 대조했지만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 반장과 형사들은 용의자가 발견되지 않자 한숨만 쉬었다.
사건이 본격적으로 미궁에 빠져든 것이다.
화이트보드를 보는 강혁의 얼굴은 잔뜩 굳어졌다.
사건이 자꾸만 강혁이 의심하던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으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97년도였다.
살인 사건의 범인을 추측할 때 범행에 대한 동기가 뭔지를 중요시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상징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최불암씨가 연기했던 드라마 수사반장의 모델이었던 형사 최중락.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일어난 수많은 사건들을 해결했던 전설적인 수사관이다.
이 최중락 형사가 후배 수사관들에게 남긴 말이 있다.
[모든 살인 사건에는 피해자가 죽을 만한 이유가 있다. 이걸 찾으면 범인을 잡는 거다.]
최중락 형사의 이 말은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살인수사의 정석이었다.
한마디로 사건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면 누가 죽였는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연쇄살인범에게는 적용하기 어려운 말이다.
동기가 없는 살인.
원한이나 금품에 의한 것이 아닌 살인.
그것이 바로 사이코패스에 의한 연쇄살인의 특징이었다.
이런 살인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동기와 전혀 다른 의미의 동기가 존재하는 것이다.
만일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동기만을 생각한다면 이런 종류의 살인사건은 해결할 수 없다.
강혁은 잠시 F.B.I 연수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강혁은 당시 F.B.I 요원이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교육생들과 함께 콴티코에서 강의를 들었다.
전설적인 수사관이자 범죄학 박사인 D.스캐너 박사가 프로파일링에 대해서 강의했었다.
강혁은 당시의 일을 떠올리자 자신도 모르게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시리얼 킬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나?"
범죄학 박사 스캐너는 빼곡하게 들어선 강의실의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강혁 역시 강의실에 앉아 있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거기 손 든 친구 말해보게."
자신을 지목하는 스캐너 박사를 향해 강혁이 입을 열었다.
"예, 스스로의 환상에 사로잡혀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스캐너는 흡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한국에서 온 친구. 혹시 누가 한 말인지도 알고 있나?"
"전설적인 F.B.I 수사관 로버트 레슬러가 처음 사용했던 용어입니다."
"잘 알고 있군."
스캐너는 대답을 하며 오랜 추억을 떠올리는 듯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그 친구가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었지."
잠시 추억에 잠겼던 D.스캐너 박사는 그날 수업을 마친 후 강혁을 따로 연구실로 초대했다.
그때부터 강혁은 스캐너 박사와 개인적인 친분을 나눌 수 있었다.
스캐너는 강혁의 과잉기억증후군에도 상당한 호기심을 내비쳤다.
그 덕분에 강혁은 범죄학의 일선에서 활약하는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다질 수 있었다.
잠시 옛 생각에 잠겨 있던 강혁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종종 기억 속에 들어가면 시간의 흐름을 잊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강혁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다행이야. 별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군.'
주변을 둘러보자 마 반장과 선배들은 끙끙거리며 서류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었다.
그동안의 탐문 기록들과 국과수의 검시 기록들이다.
강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장님!"
"왜 그래? 강 형사."
"경찰청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응? 거긴 왜?"
"다른 관내에 비슷한 사건이 없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비슷한 사건?"
강혁의 말에 책상에 앉아 있던 선배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강혁을 돌아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야야, 막내야."
형사들은 이미 사무실을 빠져 나간 강혁을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저… 저… 다들 너무 잘한다 잘한다하니까 막내가 저 모양이 아닙니까?"
심 형사가 마 반장을 보며 한마디 했다.
심 형사는 마 반장보다 한 해 선배였다.
그래서 평소 마 반장도 심 형사에게는 한 수 양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하, 심 형사. 화 풀어. 내가 나중에 따로 한마디 하지."
마 반장의 말에 심 형사는 그제야 인상을 찡그리며 사건서류를 들여다보았다.
"우리 막내가 저래 보여도 생각 없이 행동하는 놈은 아닙니다. 심 형사님."
"뭐야?"
사건 서류를 들여다보던 심 형사가 말이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강력반에 새로 합류한 나경필이었다.
파출소 근무를 그만두고 강혁을 따라 강력팀으로 온 것이다.
"사수였다고 편드는 거냐?"
"뭐, 전혀 그런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한번 지켜보세요. 뭐라도 하나 물고 올 겁니다."
"훗, 사실이라면 좋겠군."
나경필의 말에 마 반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막내 녀석 거기 간다고 자료나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요? 짬밥이 너무 낮아서."
문형사가 마 반장에게 물었다.
"으음, 그렇군."
마 반장이 뒷머리를 끄적였다.
심 형사와 문 형사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마 반장은 서울지방경찰청에서 근무할 만큼 끗발이 있는 동기나 선배가 없었다.
"허탕 치고 돌아오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문 형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둬. 허탕 치고 오든 자료를 받아내든."
심 형사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내가 서장님한테 부탁드려볼게."
마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