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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129화 (129/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29화

129화

"시연아, 이제 고마 집에 들어가라. 내는 여기서 버스 타면 된다."

"엄마도 참. 버스 올 때까지만 기다렸다가 갈게."

"참마로 뭐 하러 기다리노. 날도 추운데 어여 들어가라."

"이 정도 가지고 뭐가 춥다고 그래?"

모녀 사이로 보이는 두 사람이 버스정류장에서 옥신각신한다.

말로는 서로 타박하지만 서로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대화였다.

잠시 후 버스가 서자 파마머리에 나이 든 여성이 버스에 올라탔다.

"어여 조심해서 들어가라."

"엄마도. 조심해서 가. 집에 도착하면 전화 주고."

"그래, 알았다. 너도 후닥 들어가라. 어여."

걱정하는 엄마의 말에 박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정엄마가 집으로 돌아가자 박시연은 밤바람에 옷을 여미고 버스정류장을 나섰다.

박시연은 막 결혼한 신혼 새댁이었다.

오늘은 남편이 야근이라 늦게 들어오는 날이다.

깨가 쏟아지는 신혼의 달콤함에 남편이 박봉의 월급쟁이지만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오빠가 오면 피곤할 텐데 마실 거라도 준비해 둬야지.'

박시연은 골목 슈퍼에 들러 맥주를 산 후 집으로 향했다.

동네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한참을 이어지는 곳이었다.

군데군데 조명이 망가진 곳도 있어서 박시연은 발밑을 조심했다.

골목을 다시 돌았다.

마주 보이는 곳에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가 걸어왔다.

박시연은 별다른 생각 없이 집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스치듯 지나갔다.

복부에 뭔가가 찔러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빨간 피가 솟구치며 박시연은 손으로 복부를 감싸 안았다.

챙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맥주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후후."

바닥에 쓰러진 박시연을 내려다보며 남정규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둠 속에서 기묘하게 일그러진 미소가 나타났다.

"죽엇!"

쓰러진 박시연의 등을 향해 다시 칼로 내리찍었다.

칼날이 푹하고 피부를 뚫고 들어가자 피가 치솟았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피 냄새가 평소와 달랐다.

등에 꼽힌 칼을 뽑아 든 남정규는 칼을 살펴보았다.

"무…물감?"

칼을 치켜든 남정규가 놀란 표정을 짓는 사이 어둠 속에서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퍼억!

북이 터지는 듯한 타격음과 함께 남정규는 복부를 얻어맞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커어억!"

복부에 느껴지는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들자 눈앞에 조금 전 피를 흘리며 쓰러졌던 여자가 보였다.

"개자식!"

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발차기가 뺨을 향해 날아들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턱을 얻어맞은 남정규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짝짝짝!

"잘했어. 역시 흑장미."

"훗, 팀장님."

박정철이었다.

그 뒤로 조금 전 버스 위에 올라탔던 노부인이 모습을 보였다.

"언제까지 그 모습으로 있을 거야?"

흑장미의 말에 가발을 벗고, 얼굴에 쓴 옅은 피부를 벗겨내자 신소희의 얼굴이 보였다.

"희유,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네."

어디선가 나타난 최요한이 신소희의 손에 들려 있는 피부를 만져보며 놀란 표정을 보였다.

할리우드의 특수 분장팀이 울고 갈 정도로 정교한 변장술이었다.

"회장님이 힘 좀 썼지."

박정철이 말했다.

강혁은 실제로 거금을 들여 할리우드의 특수 분장팀을 지원 스탭으로 삼고 있었다.

게다가 상당한 자금을 들여 분장팀을 지원해 기술 개발을 독려하고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회귀 전 보았던 영화 미션임파서블에서 구현하고 있는 변장술 수준의 기술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로 회장님의 말이 맞았어요."

전 정보경찰이었던 신소희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지리적 프로파일링이라고 했던가?"

신소희가 놀란 표정을 보이자 흑장미 류수정이 기억을 되살리며 말했다.

강혁은 알파팀에게 남정규가 저지를 다음 범행 장소를 짚어 주었다.

회귀 전 21세기 경찰들은 지리적 프로파일링 기법을 도입해서 범인검거에 활용하고 있었다.

범행을 저지른 장소로부터 범인의 주거지가 있는 곳을 추측하는 수사기법이었다.

현재 남정규의 범행 장소는 지속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강혁은 살인현장이 남정규의 주거지로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중이라고 추측했다.

본인도 깨닫지 못하고 있겠지만 점점 범행 장소와 주거지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고 있는 중이었다.

거기다 기묘하게도 회귀 전에 저지른 남정규의 범행과 일치하는 점들이 많았다.

강혁은 그 점을 확인하고 다음 범행의 장소를 거의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잔인한 살인의 희생자였던 사람과 유사한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는 데서 착안해 알파팀의 작전을 입안했다.

남정규를 쉽사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럼, 이동하지."

박정철의 지시에 따라 알파팀 요원들이 이동하자 어디선가 청소용역업체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일부는 주변을 정리했고, 일부는 남정규의 손목과 발목을 결박하고 어딘가로 데려갔다.

*     *     *

"젠장, 또 도망을 쳤나? 그럴 애가 아닌데?"

하동일은 파마머리를 뻑뻑 긁었다.

요즘 자기 밑에 있는 여자애들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하동일은 흔히 말하는 포주다.

마사지 업체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매춘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일하러 간 애들이 도망을 쳤는지 연락이 끊어지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하동일은 부쩍 예민해지고 성질이 늘어났다.

남아 있는 애들도 동요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게다가 애들 사이에 이상한 말이 돌고 있었다.

연락이 두절된 애들이 사실은 도망간 것이 아니라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하동일도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화를 내며 입단속을 시켰지만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제기랄, 애나가 한 말이 사실일까?"

애나는 자기 밑에 있는 여자 중에서 제일 잘 나가는 아이였다.

연락이 끊어진 여자 중에 애나와 친하게 지낸 언니도 있었다.

애나의 말로는 절대 말없이 사라질 언니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객 중에 살인마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그때부터 돌았다.

하동일은 삐삐로 연락이 오면 전화를 해서 원하는 장소로 여자를 보내는 방식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어떤 고객인지 모르고 보낸다는 것이다.

매춘업이라 고객을 가려서 보낼 수는 없었다.

하동일이 고민할 때 마침 삐삐가 다시 울렸다.

삐삐를 확인한 하동일은 인근 전화박스에 가서 전화를 걸었다.

"…….예, 거기로 보내면 되죠?"

전화를 끊은 하동일은 애나를 불렀다.

"갔다 와."

"어딘데? 오빠."

"여기."

하동일은 종이에 적은 주소를 보여주었다.

"여기 싫은데."

"왜에?"

"은실이 언니. 여기 인근 갔다가 안 돌아 왔잖아."

"또 그 얘기야? 은실이 그년 도망친 거라니까."

하동일이 언성을 높이자 애나는 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왜 너도 도망가고 싶냐?"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내가 갈 데가 어디 있어."

"은실이 그년도 갈 데 없다고 했다가 사라졌잖아."

"언닌… 그럴 사람 아니었는데."

"됐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갔다 와."

애나는 금발로 물들인 머리에 헤어밴드를 다시 고쳐 쓴 후 주소지를 받아 들었다.

하동일은 애나에게 왕복 차비를 건넸다.

"갔다 와."

"알았어."

애나가 차비와 연락처를 받고 집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잠깐 실례 좀 하겠습니다."

하동일은 순간 당황했다.

"젠장!"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도망쳤다.

하동일은 경찰의 단속에 대비해서 집 안에 탈출구를 만들어 둔 것이었다.

애나는 당황하며 물었다.

"누…누구시죠?"

박정철은 도망가는 하동일을 굳이 쫓지 않았다.

다만 놀란 표정을 한 애나에게 물었다.

"요즘 여기 여자분들이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는데요."

"형, 형사신가요?"

박정철의 말에 애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서울 기동수사대 김경록 형사라고 합니다."

박정철은 가짜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애나는 박정철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지금은 어디로 가시는 길이죠."

"…영업 뛰러 가는 중이었는데… 사실은 은실이 언니가 실종됐던 곳이랑 가까워서……."

박정철은 애나에게서 주소지를 받아 들었다.

제대로 된 집주소는 아니고 인근의 장소였다.

"그 장소를 그대로 쓸 줄은 몰랐는데?"

강혁은 박정철이 보내온 주소지를 보았고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 2004년도에 유호철이 매춘부들을 살인하고 암매장할 때 사용했던 장소 중 하나였다.

유호철의 살인행각은 처음에는 매춘부들이 아니라 부유층 노인들을 대상으로 시작됐다.

그러다가 매춘부들을 불러들여 성매매를 하고는 납치 및 강간살인을 저질렀다.

나중에 체포된 유호철이 알려 준 곳을 파보니 십여 구의 토막시신들이 발견되었다.

"박 팀장님, 놈이 맞습니다. 작전 실행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강혁의 말에 박정철은 팀원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유호철은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지자 집을 나섰다.

10여 분 정도 걸어간 곳에 금발로 염색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멀리서 봐도 몸매가 쭉 빠진 것이 예뻤다.

유호철은 입가를 쭉 찢으며 다가갔다.

"너 예쁘구나. 이름이 뭐야?"

"장미예요."

"이름도 예쁘네? 따라와."

유호철이 앞장서자 장미가 뒤를 따랐다.

10여 분 정도 걷자 오래된 낡은 주택이 하나 나왔다.

동네에서 외진 곳에 위치해서 인근에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유호철이 문을 열었다.

"들어와."

장미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따라 들어갔다.

덜컹.

문이 굳게 닫혔다.

두 사람은 거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유호철이 뒤를 돌아보며 장미를 향해 본색을 드러냈다.

"어서 옷을 벗어. 암캐야."

험악한 표정으로 장미를 향해 위협을 가했다.

그때였다.

"꺄악!"

비명소리가 들렸다.

유호철은 회심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의 기대와는 다른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비명을 지르던 장미의 발이 사라졌다.

퍼―억!

유호철은 낭심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다.

너무 빨라 보이지도 않았던 발차기가 급소를 가격한 것이다.

"커어억!"

유호철은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는데 장미의 발차기는 끝나지 않았다.

번쩍 높이 치켜든 발차기가 유호철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콰―앙!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강력한 발차기에 유호철은 그 자리에서 기절했다.

"흥! 개자식―"

흑장미는 머리에 쓴 가발을 벗어던진 후, 숨겨둔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했다.

"잡았어요."

잠시 후.

청소용역업체 복장을 한 사람들이 나타나 유호철을 결박한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정규는 머리에 얼음물이 부어지자 잃었던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흔들며 물기를 떨쳐낸 남정규는 자신에게 얼음물을 부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남정규는 두 눈을 끄게 떴다.

눈앞에 거대한 몸집의 흑인이 보였다.

상의는 흰 셔츠를 입고 하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남정규는 자신이 완전히 결박되어 의자에 묶여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 누구야 당신?"

남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 볼 뿐이었다.

하지만 남정규는 알 수 있었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어떤 일말의 가책도 없이 쉽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신이 드나?"

어디선가 웅웅 울리는 소리와 함께 한국말이 들렸다.

매우 위압적이며 공포스러운 목소리였다.

"누… 누구야? 너?"

남정규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글쎄,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남정규."

"뭐, 뭘 원하는 거야?"

"별거 아니야. 좀 물어 볼 게 있어서 말이지."

강혁은 선팅 된 유리 너머로 남정규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체 넌 어째서 지금 살인행각을 벌인 거냐? 남정규.'

강혁은 의혹에 싸인 표정으로 남정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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