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34화
134화
강혁이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자 낯선 중년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 강 회장이신가요?"
서툰 영어가 중년 남자에게서 흘러나왔다.
"존 강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강혁이 북경어로 대답하자 중년 남자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중국어를 잘하시는 군요?"
인터폴과 국제협력으로 파견 나갔던 시절 익힌 중국어였다.
절대기억능력은 강혁에게 외국어를 싶게 익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시진풍이라고 합니다."
강혁과 악수를 나눈 중년 남자는 흥미로운 눈으로 강혁을 바라보았다.
"절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면서요?"
시진풍의 얼굴에는 궁금한 것이 잔뜩 쌓여 있는 표정이었다.
"그렇습니다. 시진풍 씨."
강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두 사람이 앉은 자리에는 따뜻한 차가 놓여 있었다.
시진풍은 차를 입가에 가져가며 물었다.
"한국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시진풍의 말에 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절 어떻게 아시는 건지 궁금하군요?"
객가의 사람이 자신에게 접근했을 때 시진풍은 사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자신이 푸젠성의 부서기이기는 하지만, 중앙 정계에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무명이었다.
그런데 객가 사람이 자신을 보고 싶다고 했을 때는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중앙정계로 진출하는 것을 도와주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시진풍은 자신에게 건네진 초대장에 대해 알아본 후 꿈에 부풀었었다.
말레이시아의 황룡그룹과 홍콩의 리 가문의 결혼식에 초대된 것이었다.
두 집안이라면 객가 내에서도 큰 힘을 가진 가문이었다.
물론 자신은 공개적으로 결혼식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만나기 위해 두 가문의 결혼식에 불렀다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대목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을 자신을 만나려는 사람은 객가인이 아니었다.
한국인이면서 미국에서 큰 성공을 했다는 젊은 기업인이었다.
사실을 알았을 때 시진풍은 하마터면 크게 화를 낼 뻔했다.
나중에 그 한국인이 첸 가문의 은인이면서 객가인 전체가 큰 신뢰를 보내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서야 화가 풀렸다.
시진풍은 당혹스러운 가운데서도 눈 앞의 젊은 사내에게 흥미가 돋았다.
'이제 겨우 스물 대여섯 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 눈빛이 장난이 아니군.'
첸 가문의 장로를 만난 자리에서 시진풍은 강혁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들었다.
황룡그룹의 회장 헨리 첸과 동남아 객가인들의 은인.
거대한 화교 네트워크 전체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자.
어떤 한국인이 그런 일을 이뤘나 봤더니 이제 겨우 스물 중후반의 나이다.
사실 시진풍은 강혁이 문을 열고 들어 올 때 당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 이상으로 너무 젊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자는 어떻게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자신을 만나보고 싶어 한 것일까?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강혁이 입을 열었다.
"시 대인. 대인은 앞으로의 중국이 어떤 중국이 되시길 바랍니까?"
"……?"
강혁이 불쑥 내뱉은 말은 시진풍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건 대체 왜 묻는 겁니까?"
시진풍은 눈 앞의 젊은 한국인의 질문에 더 혼란스러웠다.
'뭐야? 이 자식?'
황당한 소리에 시진풍이 얼굴을 지푸렸다.
하지만 강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전 세계 사람들의 멸시와 저주를 받는 중국."
"……?"
강혁은 시진풍의 눈 앞에 왼손을 올렸다.
"전 세계 사람들의 존중과 존경을 받는 중국."
오른손을 올렸다.
"시 대인께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중국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크흠, 당연한 걸 묻는 군요. 당연히 이쪽을 택할 것이요."
시진풍은 강혁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강혁은 피식 웃었다.
"왜 웃는 것이요?"
강혁은 두 손을 내리고 쏘듯이 시진풍을 바라보았다.
"두 개의 중국 중 어느 중국이 되느냐는 시 대인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
강혁의 말에 시진풍은 깜짝 놀랐다.
잠깐 온 몸이 얼어붙은 듯했다.
'이… 이 자식 뭐야?'
시진풍은 강혁의 말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비밀한 야망이었다.
반드시 이루겠다고 아버님의 영정에 두고 피눈물로 맹세했던 일.
'아버님의 아들이 중국의 주석이 되겠습니다.'
원래 시진풍의 아버지는 마오쩌둥과 함께 했던 1세대 혁명 동지였다.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한 후, 중앙당에서 상당한 위치에 올랐던 고위층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반역자를 미화했다는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오지로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시진풍은 이때 토굴에서 7년을 생활할 정도로 고된 가난을 겪었다.
이복누이는 반동의 딸이라는 이유로 홍위병에게 심하게 맞은 후 인생을 비관하며 자살했다.
당시 온가족이 극심한 박해를 경험해야 했다.
그런데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오랜 고생이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덩샤오핑이 집권한 후 실각한지 17년만에 시진풍의 아버지를 정계에 복귀시킨 것이다.
지금의 시진풍은 당당한 태자당의 한 사람이었다.
태자당이란 중국의 당, 정, 군, 재계의 고위층 자녀들의 모임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친목과 혈연으로 얽힌 권력층 자녀들의 인적모임으로 시진풍의 뒷배가 되어 주었다.
중앙정계와는 아직 인연이 없는 시진풍이었지만, 그의 야망은 컸다.
청소년기에 겪어야 했던 좌절은 시진풍에게 무너지지 않는 권력에 대한 야망을 품게 해주었다.
그가 훗날 가혹한 독재자가 된 배경이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모를 개인적인 맹세를 이 한국인이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게다가 내가 마음을 먹기에 따라 중국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아직은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야망이 미래에 이뤄진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한들 이 자가 어떻게 미래를 안다는 말인가?
그리고 전 세계의 멸시와 저주를 받는 중국이라니?
그런 미래를 내 손으로 만들어 버리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너무나 많은 의문들이 시진풍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스린 시진풍이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요."
시진풍의 말끝이 살짝 떨렸다.
강혁이 시진풍의 답변에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네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진풍은 순간 섬뜩했지만 표정을 관리하며 말을 이었다.
"말해 보시오.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제 눈에는 보이거든요. 당신의 미래가?"
"허, 헛튼 소리!"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입니다."
강혁은 입가에 차를 가져갔다.
시진풍 역시 떨리는 손을 진정시켜가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휴우, 미래가 보인다라? 그래 내 미래에서 뭘 봤다는 건지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차를 탁자에 내려놓은 강혁은 지긋이 시진풍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미래에 중국의 주석이 될 겁니다."
"……!"
강혁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시진풍은 놀라는 한편으로 가슴이 뛰었다.
"무… 무슨 근거로?"
"저에 대해서 들은 것이 없습니까?"
"……?"
그러고 보니 시진풍은 강혁이 황룡그룹의 회장인 헨리 첸의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의 은인이라고?'
이제 겨우 20대 후반에 불과한 젊은이였다.
그런데 미국에서 투자회사를 운용하면서 큰 부를 이루었단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전적들.
시진풍은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이 녀석의 말이 사실일까?'
"후, 그것 참. 내가 존 강 회장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는 뭐죠?"
"제 말을 믿는다면 당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내 꿈?"
"위대한 중국."
"……!"
강혁은 마치 시진풍의 마음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 그걸 어떻게?"
"3년 전 시 대인은 아버님의 영정에서 맹세 하셨죠. 주석이 되어 위대한 중국을 만들겠다고."
"……!"
강혁의 말은 시진풍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다.
'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누구도 모르고 오직 자신만이 아는 사실을?'
강혁을 바라보는 시진풍의 눈이 쉴새없이 흔들렸다.
사실 강혁은 알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 시진풍에 대해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야기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다행히 주석이 된 후, 미화되거나 꾸며 낸 일화가 아니라 사실인 모양이다.
"어떻게 아는 거요?"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미래가 보인다고."
"휴, 믿기 힘들지만 존 회장이 어떤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인가보군요."
목이 탄지 시진풍은 차를 입가에 가져갔다.
그런 시진풍의 모습을 보며 강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제 쐐기를 박아 볼까?'
"믿기지 않겠지만 제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건 사실입니다."
"으음."
시진풍은 다시 입가에 차를 가져갔다.
"그래서 내 결심에 따라 중국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맞습니다. 제 눈에는 보입니다. 세계의 존경을 받는 중국과 세계의 멸시를 받는 중국이……."
"…으음."
강혁의 말에 시진풍은 이제 눈에 띠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존경받는 중국이 될 수 있겠소?"
강혁에게 묻는 시진풍의 얼굴에는 진심이 엿보였다.
"제가 도와드리죠. 시 대인."
강혁의 말에 시진풍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시진풍이 덥석 강혁의 손을 잡았다.
"내 존 강 회장만 믿겠소. 날 도와주시오."
'빙고! 드디어 물었군.'
강혁은 마침내 듣고 싶었던 말을 듣게 되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강혁은 시진풍에게 앞으로를 위한 몇 가지 조언을 주었다.
첫째, 절대 부패한 돈을 받지 않을 것.
미래에 중국의 주석이 되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조언이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시켰다.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강혁이 도움을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둘째, 절대 남의 나라의 역사나 문화를 가지고 조작을 시도하지 않을 것.
만일 그런 일을 시도하면 하늘의 노를 받아 중국의 미래가 어두워진다고 말했다.
강혁의 말에 시진풍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당연한 이야기요. 존 회장. 대체 어떤 인간이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요."
"그래요?"
"날 믿으시오. 그런 짓을 시도하거나 제안하는 인간이 있다면 내 측근이라도 목을 칠거요."
"흐흠."
강혁이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하늘에 대고 맹세하지. 만일 그런 짓을 하면 나 시진풍은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다."
시진풍의 말에 강혁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회귀 전 당신은 그런 짓을 했으니 사람이 아니라 개돼지였군.'
강혁은 속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그 두 가지만 잘 지키면 됩니다."
"존 회장, 내가 진짜 주… 주석이 된다는 말이지요?"
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제 말만 잘 들으면 반드시 주석 자리에 오를 겁니다. 그리고 중국을 위대하게 만들겠지요."
강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미래에 최소한 전염병을 전 세계에 퍼트리거나, 남의 나라 역사를 뺏어가려는 시도만 안 해도 욕은 안 먹을 거다.'
강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시진풍은 오늘 자신이 귀인을 만났다는 눈빛이었다.
"내가 중국의 주석이 된다라. 하아~"
벌써부터 꿈을 이룬 듯이 얼굴이 몽롱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