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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137화 (137/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37화

137화

그것은 회귀 전의 일이다.

강혁이 경찰이 되어 파출소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동기의 꼬드김에 함께 본 영화였다.

스크린 속에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눈으로 가득 들어오는 설산 위 허공에서 하강하는 천려시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였다.

하얀 날개옷을 나부끼며 눈발을 맞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고혹적이었다.

기다란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미소를 지으면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남자라고 이름 붙여진 생물은 누구나 그녀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절대가인 천려시.

단 한 편의 영화로 전 아시아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은 환상의 여인이었다.

강혁 역시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운 절대적인 미모에 빠져 천려시 앓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극장에서 영화가 내려간 후, 비디오로 나온 설산천녀를 몇 번이나 돌려 봤는지 모른다.

이유라를 만나기 전 강혁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았던 유일한 여자가 바로 천려시였다.

사실 그 시절에는 강혁만이 아니었다.

당시 젊은 남자들 중 천려시의 미모에 가슴앓이를 하지 않은 남자들이 드물었다.

천녀유혼으로 한 시절을 구가했던 왕조영의 신화를 초월했다는 평까지 들었다.

영화계 최고의 화제 중 하나가 천려시의 다음 영화가 언제 나오냐였을 정도였다.

수없이 많은 감독들이 그녀에게 자신의 영화에 나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만큼 천려시는 뭇 감독들의 판타지였다.

그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려던 천려시는 어느 날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믿지 않았지만 은퇴 선언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첫 주연작이 은퇴작이 되고 만 것이다.

천려시의 등장이 충격적이었던 것만큼 그녀의 은퇴 소식도 충격이었다.

중화권 소식이 한국에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두고 한국에서도 수없이 많은 말들이 돌았다.

어느 나이 많은 중국 재벌과 결혼해서 은퇴했다는 소문부터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는 말까지.

각종 설이 난무했지만 보다 정통한 소식이 전해진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천려시는 어떤 사건으로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아 연예계를 은퇴했다.'

강혁은 연예계 소식을 전하던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어떤 사건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시기는 분명… 비슷하다.'

강혁은 자신의 회귀 이후, 역사가 미묘하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끄응, 설마?'

강혁은 차마 첸을 따라가지 못하고 눈을 천려시에게 고정시켰다.

"하아? 이거,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군."

너무 충격적이라 한동안 제대로 턱을 다물지 못하던 흑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천하에 가장 재주 있는 화공이 만일에 걸쳐 공을 들여 그린 그림 속의 천녀가 세상에 모습을 보이다.

바로 절대가인 천려시를 향해 일컫는 말이다.

백옥같은 피부와 붉은 입술.

가느다란 눈썹은 초승달처럼 희었다.

크고 맑은 눈동자 속에는 은하가 담겼고.

오똑한 콧날은 그린 듯 아름다웠다.

그림 속의 천녀가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사람.

그녀가 바로 천려시다.

흑표는 세상에 그녀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천려시의 아름다움은 너무나도 절대적이었다.

그녀의 별칭이 절대가인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도 천려시와는 비교될 수 없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수없이 많은 여배우들이 그녀를 몰래 질시하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었다.

"흐흐흐, 이거 내가 오늘 보물을 훔치러 왔다가 진짜 보물을 얻겠구나."

흑표가 눈짓을 보내자, 천려시를 붙잡고 있던 흑의인이 웃으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러자 그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만류했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

"넌 뭐야?"

"저, 저는 매니저입니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젓가락처럼 가는 몸.

얼굴에는 둥근 안경을 썼고, 머리는 일대일 가르마로 기름을 발라 단정하게 정돈한 남자였다.

남자의 이름은 진오.

천려시의 매니저이자 그녀의 이종사촌이었다.

"죽기 싫으면 저리 꺼져!"

흑의인이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진오는 코를 부여잡고 뒤로 나자빠졌다.

"오, 오빠."

"흐흐흐, 넌 따라와."

흑의인이 천려시를 잡아끌자 진오가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쳤다.

"안 돼요. 그러지 마세요."

"안 된다고?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 못하고 있군."

천려시를 끌고 나가던 흑의인이 진오를 향해 총을 쳐들었다.

"허억!"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며 진오에게서 몸을 띄웠다.

푸타타타타―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총소리와 함께 총구멍에서 불을 뿜었다.

삽시간에 넘어져 있던 진오의 가랑이 사이에 총알 세례가 퍼부어졌다.

"크흐흐흣!"

흑의인이 웃음을 터트리며 진득하게 살기를 흩날렸다.

"허―허억!"

진오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그의 가랑이 사이가 흥건하게 젖었다.

"오…오빠!"

천려시는 놀란 입을 다물지 못 했다.

하마터면 진오가 죽을 뻔한 것이다.

"따라와!"

흑의인이 천려시를 끌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천려시는 슬픈 사슴 같은 눈망울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평소 자신에게 호감을 드러내었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나같이 애절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그녀의 눈빛을 외면했다.

그들 가운데는 평소 그녀가 원한다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것처럼 말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위선자들―'

천려시는 크게 실망하고 좌절했다.

"흐흐흐."

흑표는 스산한 눈으로 천려시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 내렸다.

"얼굴만 예쁜 게 아니구나. 몸매도 환상적이야. 이런 여인이 세상에 있다니?"

흑표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대장,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흐흐, 그런 걱정은 집어넣어라. 너도 알지 않느냐?"

"하긴. 흐흐흐."

흑표와 흑의인은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지 서로 마주보고 스산하게 웃었다.

강혁은 멀리서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입술모양을 읽는 독순술로 확인하고 있었다.

'이상하군? 경찰이 곧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저런 여유라니?'

강혁은 자신을 흑표라고 밝힌 남자와 흑의인 사이의 대화를 통해 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홍콩 경찰이라? 혹시?'

홍콩은 97년 7월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지금의 홍콩은 중국에 반환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공무원들은 이런 일에 제일 민감하다.

'저 놈들은 원래 중국 특수부대 출신들이다. 그렇다면 윗선과 닿아 있는 건가?'

강혁은 생각보다 홍콩 경찰이 빨리 움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그렇다면 낭패군. 아무래도 스티브와 첸 회장 경호팀을 움직이는 것이 더 빠르겠어.'

강혁이 생각에 잠긴 사이 흑표가 천려시를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대로 뒀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강혁은 잠시 첸과 천려시 사이에서 갈등이 일었지만 판단은 빨랐다.

무대 장치 사이에 숨어 있던 강혁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앗!"

천려시는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흑표가 침대 위로 그녀를 던졌기 때문이다.

"흑, 제발 이러지 말아요."

천려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할지 예감하고 몸을 떨었다.

"흐흐흐. 눈물짓는 모습마저도 예쁘구나."

흑표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스키 마스크를 벗어던졌다.

그제야 천려시는 흑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아!"

천려시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스키 마스크를 벗어던진 흑표의 얼굴은 평범했지만 입술이 얇고 눈빛이 살모사와 같았다.

그녀는 흑표의 얼굴을 보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이름이 뭐지?"

흑표의 물음에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흐흐, 대답하지 않으면 네년의 오빠라는 놈은 내년 오늘이 제삿날이 될 것이다."

매서운 눈빛으로 천려시를 노려보며 스산하게 내뱉었다.

천려시는 오들오들 떨며 입을 열었다.

"천… 천려시라고 해요."

"천려시라 좋은 이름이구나."

흑표는 그녀를 앞에 두고 상의를 벗어 던졌다.

천려시는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렸다.

"크흐흐. 이 어르신이 오늘 네 서방 노릇을 해주마."

흑표가 천려시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무대 천정에서 내려온 강혁.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반대쪽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복도를 살짝 살펴보자 문 앞에 흑의인 한 명이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강혁은 방탄조끼를 벗고, 총도 한쪽에 내려놓은 후 양손을 들고 복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응? 뭐야?"

양복 차림의 강혁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흑의인은 깜짝 놀라며 총구를 겨누고 위협했다.

"넌 뭐야? 왜 여기 혼자 있지?"

강혁은 흑의인을 향해 양손을 번쩍 들고는 말했다.

"하하, 죄, 죄송합니다. 전 피로연에 참석한 사람인데… 잠시 객실에서 쉬다가……."

"뭐야? 다 찾은 줄 알았는데? 한 명 놓친 건가?"

흑의인은 총으로 강혁을 겨누고는 방 안을 향해 소리쳤다.

"대장, 여기 한 놈 숨어 있던 녀석을 발견했어요."

"그래? 데리고 올라가!"

흑표가 방 밖을 향해 소리쳤다.

"따라와!"

"예, 예. 어르신."

강혁은 양손을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

흑의인이 그런 강혁을 뒤에서 총으로 위협하며 홀이 있는 쪽으로 몰았다.

강혁이 양손을 높이 쳐들자 양복 소맷자락이 내려가며 손목시계가 노출되었다.

처음엔 별 생각이 없이 강혁을 위협하던 흑의인이 시계를 보고는 눈빛이 변했다.

"이봐. 잠깐 거기 멈춰봐."

"예? 왜 그러시죠?"

"흐흐, 멋진 시계를 차고 있군."

"아아, 예. 롤렉스죠. 진품입니다."

롤렉스란 말에 흑의인의 눈에 탐욕이 돌았다.

"시계를 풀어서 이리 줘."

"아, 예. 알겠습니다."

강혁은 손을 내리고 손목에서 시계를 풀었다.

그리고 흑의인에게 시계를 내밀었다.

흑의인이 시계를 받아들기 위해 총구를 내리고 한 손을 폈다.

그 순간 강혁의 손에서 시계가 흑의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퍼―억!

시계가 얼굴을 직격하는 순간, 강혁의 발등이 흑의인의 낭심을 차올리면서 머리끝을 향해 손바닥이 날아갔다.

손바닥이 이마를 밀어붙이자 흑의인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커다란 머리가 뒤로 넘어가는 순간 강혁의 양손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부드득―

기묘한 소리와 함께 흑의인의 머리가 순식간에 위아래가 뒤집혔다.

목뼈가 부러지며 흑의인의 숨통이 끊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일체의 낭비가 전혀 없는 효율적인 움직임이었다.

707특임대 시절 괴물들만 모아놓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검은 악마라 불렸던 강혁다운 솜씨였다.

당시에도 강혁의 목돌리기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강혁이 흑의인의 목을 돌린 수법은 용형 팔괘장의 절명수였다.

정식 명칭은 사자장구(獅子壯口) 수법으로 사자장(獅子掌)이라고도 한다.

턱과 이마의 끝 부분에 양손바닥을 대고 빠르게 서로 교차하며 순식간에 머리를 돌려버린다.

낭심과 이마를 시간차로 공격하는 당랑의 절기와 합쳐 사용하는 강혁의 특기였다.

죽어 나자빠진 흑의인을 강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오늘 내가 크게 살계를 여는구나.'

강혁은 흑의인의 시체를 숨겨 놓고 흑표가 있는 방으로 소리도 없이 다가갔다.

발뒤꿈치를 들고 발 앞부분의 부드러운 족장 부위로 고양이처럼 걷는 신법이다.

일명 흑야묘보(黑夜猫步).

강혁의 큰 몸에서도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강혁의 할아버지가 만주의 무술가에게서 배운 잡기 중의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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