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38화
138화
"흐흐흐."
흑표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만들어졌다.
상의를 벗어 던진 흑표는 상당한 장신에 온몸이 근육질이었다.
식스팩으로 무장된 상체는 상당히 근사했는데, 군데군데 흉터 자국이 있었다.
"몇 살이지?"
천려시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흑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억지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서방님에게 제대로 대답을 해야지 응? 오빠가 배를 갈라줘야 대답할 거야?"
흑표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진득한 살의가 가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살기어린 흑표의 표정에 천려시는 가늘게 몸을 떨며 대답했다.
"스…스물하나예요."
"크큭. 내가 어린 신부를 얻었구나."
흑표의 말에 천려시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더니 또르르 뺨으로 흘러내렸다.
그 모습이 마치 영롱한 진주가 알알이 굴러내리는 듯 보였다.
절세가인이 가늘게 몸을 떨며 눈물을 흘린다.
그런데 그런 모습조차도 너무나 아름답고 가련해 보였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반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모습이다.
흑표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이년은 사람이 아니라 요물이로구나.'
경국지색이란 네 글자가 저절로 떠올랐다.
'흐흐흐, 어쨌든 네년은 이제 내 것이란 말이지.'
흑표는 내심 크게 만족하며 커다란 손으로 천려시의 몸을 덮쳐갔다.
그러자 천려시가 크게 반항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흑표의 음심을 크게 돋우는 역할을 했다.
흑표의 두꺼운 손이 천려시의 드레스를 잡아 뜯었다.
뿌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옅은 천이 뜯겼다.
"꺄악―"
비명소리와 함께 천려시의 아름다운 상반신이 반쯤 드러났다.
빙기옥골 같은 피부와 은밀한 속옷이 드러나자 흑표는 음탕한 미소를 머금었다.
"크크, 참으로 죽이는 년이로다."
찢겨진 드레스 사이로 엿보이는 고혹적인 미인의 나신이 흑표의 음심을 격발시켰다.
기분이 한껏 좋아진 흑표는 한바탕 껄껄거리며 웃고는 천려시의 나신을 덮쳐갔다.
"싫어―"
천려시는 이 순간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스물한 살.
꿈 많은 처녀였다.
언젠가 천신 같은 멋진 낭군을 만날 수 있기를 수없이 많은 날 동안 기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설마 자신이 이처럼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천려시는 이 순간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을 생각했다.
"……?"
그 순간 천려시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을 향해 덮쳐오던 흑표의 몸이 멈췄던 것이다.
흑표의 눈동자는 천려시의 등 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도자기를 보고 있었다.
도자기 위에는 낯선 남자가 군용 단도를 들고 접근하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날카로운 단도가 흑표의 목을 따려고 다가왔다.
너무나 은밀해서 우연히 도자기 위에 비친 강혁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흑표는 죽는 순간까지도 강혁의 접근을 몰랐을 것이다.
그만큼 강혁의 접근은 은밀했다.
"누구냐?"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리던 흑표는 단도가 간격에 들어오자 팔을 크게 뒤로 휘둘렀다.
파―앙!
팔과 팔이 세차게 부딪히며 단도가 강혁의 손에서 날아가며 벽에 꽂혔다.
강혁은 주저하지 않고 흑표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퍼―억!
흑표의 얼굴이 휙 하고 옆으로 날아갔다.
강혁의 주먹이 흑표의 얼굴을 세차게 갈긴 것이다.
쿠―웅.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흑표의 몸이 옆으로 크게 나가떨어졌다.
"이 쉑―"
짧은 욕설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흑표가 입가에 난 피를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순간 문 쪽을 향했다.
원래 그곳을 지켜야 할 부하를 찾는 것이다.
"소용없어. 이미 죽었으니까."
강혁이 북경어로 나직하게 내뱉었다.
흑표는 사늘한 강혁의 눈빛을 보며 상대가 자신과 같은 부류라는 것을 깨달았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런 빌어먹을? 이런 놈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문을 열고 자신에게 접근할 때까지 발자국 소리 하나 못 들었다.
비록 천려시의 미모에 혼이 빠져 있었다고는 해도 특수부대 출신인 자신이 몰랐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
"흥, 얌전히 숨어 있을 것이지. 내 앞에 나타난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휘익!
흑표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강혁의 왼쪽 턱을 노리고 휘어져 들어갔다.
'흐흐, 놈. 죽여주마.'
흑표는 군대에 있을 때 산타로 군단 챔피언을 한 적도 있었다.
주먹으로는 누군가에게 져본 적이 없었다.
그의 눈빛이 붉어졌다.
사람을 죽일 때는 항상 그랬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흑표의 주먹이 강혁의 얼굴을 박살낼 듯이 날아갔다.
쏜살처럼 날아든 주먹에 강혁은 고개를 가까스로 틀었다.
주먹이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콰앙!
흑표의 주먹이 벽에 부딪히자 객실 벽이 그대로 움푹 파였다.
손을 빼자 시멘트 부스러기가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가까스로 일격을 허용하지 않았던 강혁의 이마에 땀이 고였다.
쇄애액!
허공을 가르며 발차기가 횡으로 날아들었다.
강혁은 몸을 아래로 숙이며 발차기를 피했다.
퍼―억!
객실 화장대가 그대로 박살이 났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흐흐흐."
흑표가 강혁을 바라보며 기이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열려 있는 문 쪽으로 뛰어갔다.
강혁은 깜짝 놀라 부서진 화장대 옆에 놓여 있는 의자를 힘껏 발로 찼다.
파아앙!
탁자의자가 바닥에서 쭉 미끄러지더니 흑표를 앞질러 객실 문을 닫아버렸다.
'이런?'
흑표는 의자를 치우려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강혁의 발차기가 등 뒤로 날아들었다.
휘릭!
흑표는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렸다.
강혁이 문 앞에 섰다.
'시간을 끌면 불리하다.'
강혁은 최대한 빨리 그리고 은밀하게 놈을 죽여야 했다.
그에 비해 흑표는 최대한 난장을 쳐서 부하들을 불러들이려는 것 같았다.
'속전속결.'
탁! 하고 바닥을 치는 소리와 함께 강혁이 몸을 날렸다.
'음!'
흑표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머리 위로 두 개의 주먹이 연이어 날아들었다.
마치 두 개의 도끼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형상이었다.
그런데 완전한 곡선도, 완전한 직선도 아닌 애매한 궤도였다.
원도 아니다.
그렇다고 직선도 아니다.
흑표는 곤혹스러웠다.
지금까지 이런 애매한 각도로 날아드는 주먹은 받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큭!'
흑표는 급히 먼저 떨어져 내린 주먹을 향해 팔을 뻗어 막았다.
그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팟, 파앙―
팔과 팔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막, 막았다!'
속으로 좋아하던 흑표는 이내 당혹감에 물들었다.
처음 공격을 막았던 팔을 강혁이 어느새 잡아끌고 있던 것이다.
그 바람에 흑표의 몸이 앞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연속적으로 떨어지던 두 개의 도끼 같은 주먹은 모두 지금을 위한 것이었다.
강혁은 단숨에 흑표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기름에 튀긴 콩이 튀어 오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헉?'
흑표는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자신의 손을 잡아당겼던 주먹이 반동을 이용하여 물살을 거스르는 잉어처럼 튀어 오른 것이다.
간격을 좁히며 뛰어들던 강혁의 왼 주먹이 창처럼 날카롭게 목을 파고 들었다.
위에서 풍차처럼 내리치던 연격이 순식간에 변화하며 아래 방향에서 창처럼 찌른 것이다.
꽤애―액!
비명 소리가 객실 안에 울려 퍼졌다.
목을 찔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퍼억!
발등이 막을 새도 없이 급소를 차올렸다.
커―어억!
흑표는 마치 작살에 맞은 잉어처럼 부들거렸다.
허보.
목을 찔러 들어간 강혁의 다리는 허보를 취하고 있었다.
앞발의 뒤꿈치를 살짝 들고 호랑이처럼 발끝으로 섰다.
굳이 강한 힘이 필요 없었다.
가벼우면서도 경쾌한 발놀림이면 충분하다.
부들거리는 흑표를 향해 금강역사처럼 머리 위로 올린 팔을 내리 꽂았다.
쇄애액!
팔이 팔꿈치로 변화하며 흑표의 목덜미를 내리쳤다.
콰아앙!
팔꿈치와 목덜미가 부딪히며 뿌드득 하는 소리가 났다.
흑표의 목이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온몸의 체중이 실린 팔꿈치 치기에 단숨에 목이 부러진 것이다.
"커―헉!"
흑표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어이없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였다.
강혁은 그 자리에서 숨진 흑표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흑표의 얼굴 표정은 죽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이 옷 입어요."
천려시는 강혁이 벗어준 상의 양복으로 급히 몸을 감쌌다.
"고…고마워요."
천려시는 몸을 가리고서야 자신을 구해주러 온 강혁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인사를 하려 고개를 든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순간 강혁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눈처럼 하얀 피부.
호수처럼 맑은 눈빛.
붉은 입술.
절세가인 천려시가 눈앞에 있었다.
강혁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머?'
천려시 역시 얼굴이 붉어졌다.
두근두근.
가슴이 세차게 요동쳤다.
'내가 왜 이러지?'
천려시의 옥 같은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강혁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이 사람… 왠지 안아주고 싶어.'
천려시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강혁을 향한 애처로운 마음이 돋아났다.
그의 선한 눈빛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슬픔이 천려시의 모성을 건드린 것이다.
강혁은 잠시 천려시의 미모에 정신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비디오테이프로 수도 없이 돌려 보았던 그녀지만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저기… 성함이……."
"…강… 아니, 존 강입니다."
순간 자신의 본명을 말해주려던 강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영어 이름을 말해 준 후 재빨리 문가로 다가가 상황을 살폈다.
아직 아무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좋아, 시간을 벌었다.'
강혁은 흑표의 시체를 침대 밑에 감췄다.
"절 따라 오세요."
강혁의 말에 천려시는 얼굴을 붉힌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 최대의 위기였다.
혀를 깨물고 죽으려고까지 생각했던 순간 자신을 구해준 이 남자.
꿈 많은 소녀시절부터 기다려왔던 천신 같은 대장부가 아닌가?
천려시는 그토록 원해왔던 남성을 마침내 만난 것 같았다.
'마치 영화 속 이야기가 실제가 된 것 같아.'
급박한 상황이었지만 천려시의 마음은 도화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아니 이런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더욱 감정의 변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혁은 천려시를 데리고 객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녀를 자신이 찾아 놓은 은신처로 데리고 갔다.
"여기에 있으면 한동안은 안전할 겁니다."
강혁은 천려시를 두고 일어서려 했다.
천려시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잠깐만요."
바깥으로 나가려던 강혁이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강혁은 깜짝 놀랐다.
천려시가 갑자기 자신의 얼굴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이다.
"……!"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입가에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졌다.
"잠시만… 이대로……."
천려시가 부끄러운 듯 속삭였다.
1분여 남짓 되었을까?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천려시는 강혁에게서 얼굴을 떼며 부끄러운 듯이 속삭였다.
"제 생명을 구해주신 보답이에요. 부디 다치지 마시고, 무사히 다시 만나요."
강혁은 코끝을 아리는 향기에 잠시 정신이 없었다.
당돌한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를 탓할 수는 없었다.
강혁은 천려시의 아름다운 콧등을 손가락으로 살짝 터치하며 말했다.
"무사히 다시 만날 테니까. 걱정 말아요."
강혁이 씩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천려시는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볼을 감싸 안으며 배시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