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45화
145화
다음 날 강혁은 비행기에 올랐다.
천려시에게는 전화로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렸다.
강혁의 말에 천려시는 놀라기는 했지만 각오는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다.
급히 달아오른 마음은 식는 것도 빠른 법.
강혁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천려시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에 대해서는 잊고, 좋은 남자를 만날 것이다.
'그래도 날 좋아한다면? 그때는?'
강혁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 미래는 결정되지 않았다.'
강혁은 잠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유라와 경아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유라를 위한다면 천려시나 다른 사람과 맺어진다 해도 좋았다.
하지만 경아를 생각한다면 유라를 떠날 수 없었다.
결국 반복되는 도돌이표다.
'운명이 날 어떻게 인도하는지 두고 보자.'
비행기가 홍콩을 떠날 때 강혁은 마음을 완전히 정했다.
앞으로 어떤 여성이 다가와도 무조건 내치기보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자고 말이다.
그 편이 모두를 위해서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해. 놈을 없애야 한다.'
비행기 안에서 강혁은 다시 한 번 다짐했다.
미래가 어떻게 되든 자신의 사람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배제시켜야 한다.
강혁에게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회장님, 여기 아이스 레몬 티입니다."
"고마워, 이리나."
강혁은 이리나가 가져온 레몬 티를 반갑게 받아 들었다.
강혁이 잔을 입에 가져갈 때였다.
"회장님, 저 사과드릴 것이 있어요."
"응? 사과라니?"
"저… 사실 어젯밤에 회장님 뒤를 쫓아갔었어요."
"……응?"
강혁은 이리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다.
'근처에 있었나?'
"두 분이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강혁은 레몬 티를 내려놓았다.
"이리나,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사실은……."
이리나는 고개를 들고 똑바로 강혁을 바라보았다.
두 뺨에 홍조가 일었다.
'저 표정은?'
강혁은 이리나의 눈빛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감정이 애절하게 전달되었다.
'……이리나.'
"사실은 저 유람선에 있을 때,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
"제일 먼저 생각났던 것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었어요."
"……!"
"제일 먼저 생각난 건 회장님이었어요."
"……이리나."
"사랑하고 있어요. 회장님."
"……!"
너무나 직접적인 고백에 강혁은 순간 당황했다.
"회장님에게 제 마음을 밝히지 못한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됐어요."
"……으음."
이리나의 절절한 고백에 강혁은 나지막한 신음을 터트렸다.
강혁은 이리나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하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만일 살아난다면 꼭 고백하자고… 그래서……."
"그랬군."
강혁은 약간의 침묵 뒤에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이리나의 고백에 당황스러웠지만 그 마음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천려시를 통해 이리나와 안젤라의 마음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이리나의 절절한 고백을 눈앞에서 듣고 나니 새삼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이리나를 통해 강혁은 그동안 딸의 장성한 모습을 겹쳐보았다.
그래서 더 특별하게 생각해왔었다.
하지만 그게 알게 모르게 이리나에게 상처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미안했어."
강혁의 말이 방아쇠가 되었다.
"회장님―"
이리나가 강혁의 품으로 몸을 던져왔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흩날렸다.
이미 사랑한다는 고백에 감정이 수도꼭지를 튼 것 마냥 흘러넘치는 상태였다.
강혁의 미안했다는 말에 꽁꽁 싸매두었던 감정이 터진 댐처럼 터져 나왔다.
"이리나―"
반짝거리는 금발머리가 콧가를 간지럽혔다.
"회장님은 바보! 바보! 바보!"
이리나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강혁의 상의에 흩날렸다.
강혁은 그동안 이리나의 가슴앓이가 손에 잡힐 듯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옆에서 힘들어 했을 이리나를 생각하자 마음이 저려왔다.
강혁에게 이리나는 딸처럼 여기던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하필 본인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강혁은 언제나 그녀가 결혼하게 될 때 신랑에게 자신이 데려다 주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비록 이리나의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시지만 말이다.
"저 다 들었어요. 잊지 못하는 분이 계시다고요?"
"음… 맞아."
대답하는 강혁의 얼굴에 깊은 고뇌가 떠올랐다.
두 사람 사이에 대체 어떤 과거가 있었던 것일까?
어떤 아픔이 있기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도 두려운 것일까?
얼마나 사랑하기에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다른 어떤 여자도 멀리한 것일까?
이리나는 강혁이 너무도 불쌍했다.
그동안 강혁과 함께하면서 의문스러웠던 것들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자신을 혹사시켰던 것일까?
이리나는 자신의 영혼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강혁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흘러넘쳤다.
"저라도 이용해주세요. 아니 저도 이용해주세요."
"……!"
"저라도 도움이 된다면 회장님의 아픔을 덜어 드리고 싶어요."
"……!"
이리나의 마음은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딸처럼 생각했던 이리나였다.
강혁은 이리나의 미래를 생각해 고개를 내저으려 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이리나의 커다란 두 눈이 금세 눈물로 적셔졌다.
"……이리나?"
"전 그 정도 자격도 없는 건가요? 그분은 거절하지 않았잖아요."
이리나의 얼굴에서 깊은 좌절감과 고통이 드러났다.
만일 안 된다고 말한다면 이리나가 어느 정도의 고통을 느낄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리나… 이렇게까지 나를?'
강혁은 이리나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과 잘되기를 바랐다.
딸의 행복을 바라는 아빠의 마음처럼.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어디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인가?
'이것도 운명인 것인가?'
강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리나, 괜찮겠어?"
강혁의 말에 이리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난 여전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또 너 외에도 자신을 봐달라는 여자가 있어."
강혁은 조용히 이리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리나는 강혁의 말을 듣고 눈물 젖은 얼굴에 미소를 띠웠다.
"어떤 결과가 기다릴지는 모르지만 전 제 마음을 속일 수가 없어요."
"……!"
"사랑해요. 회장님."
"……이리나."
"키스해줘요."
이리나가 품에 안긴 채 강혁을 올려다보았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이리나를 안고 있는 팔 전체에서 느껴졌다.
거절했다가는 큰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강혁은 이런 식으로 자신을 공략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낭패감에 젖은 얼굴로 이리나를 바라보던 강혁은 할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회장님.'
강혁의 손이 품에 안겨 있는 이리나의 금발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리나가 이렇게 어리광을 부릴 줄은 몰랐는데"
요정처럼 아름다운 아가씨의 어리광이었다.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바라보며 날렵한 턱을 살짝 올려 잡았다.
이리나의 볼이 금세 홍조로 물들었다.
'……아, 회장님.'
강혁은 천천히 다가가 이리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맞춤에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강혁의 입맞춤은 정중하면서도 버터처럼 달콤했다.
이리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랫동안 숨겨왔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는 것 같았다.
손을 뻗쳐 강혁의 단단한 어깨를 잡았다.
'이리나.'
강혁은 자신을 안아오는 가냘픈 팔을 느꼈다.
입술을 떼자 이리나가 말했다.
"회장님, 사랑해요."
조명에 반사된 이리나의 머리카락이 황금물결처럼 빛났다.
요정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미소지었다.
강혁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설다.
'예쁘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웠나?'
강혁은 마치 처음 깨달은 듯 이리나의 미모에 눈이 부셨다.
'회장님?'
강혁이 잠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더니 다시 다가왔다.
이리나는 감동에 떨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강혁이 조금 전과 달리 거칠게 자신의 입술을 탐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깊은 속에서부터 마음이 찌르르 울렸다.
'아아, 회장님.'
이리나는 곧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마음속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거친 입맞춤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한동안 뜨거운 입맞춤이 계속되자 반쯤 혼이 나가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조심스레 자신을 안고 있던 손이 움직였다.
늘씬한 몸 여기저기를 거칠게 매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리나는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이 몸을 내맡겼다.
손이 닿는 곳마다 몸이 뜨거워졌다.
마치 용광로 속에 던져진 것 같았다.
이리나의 모든 것을 느끼겠다는 듯이 강혁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하아― 회장님."
이리나는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 순간 강혁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아차? 내가 또?'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잃었던 강혁은 비로소 제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아연실색했다.
상황을 살피자 이리나는 황홀한 표정으로 반쯤 정신을 놓고 있었다.
온몸이 녹아내리기라도 한 듯이 힘이 빠진 상태였다.
자신의 만행을 증명하듯이 목덜미와 가슴골 여기저기에 키스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입고 있던 옷도 이리저리 구겨져 있었다.
'설마 내가 한 짓인가?'
강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부드러운 여체의 감촉이 생생했다.
강혁은 크게 당황했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강혁은 문득 자신이 이런 상태가 된 것이 두 번째라는 것을 떠올렸다.
'미치겠군. 대체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거지?'
"이…이리나?"
강혁의 말에 이리나가 정신을 차렸다.
"하아, 회장님."
이리나의 얼굴은 한껏 풀려 있고, 눈가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얼굴 전체가 발그레한 홍시처럼 익어 있었다.
강혁은 차마 이리나에게 자신이 잠시 정신을 잃었노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리나는 강혁의 품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엉망이 된 옷을 바로 했다.
그리고는 살짝 눈을 흘겼다.
그런데 그게 또 너무나 매력적이다.
강혁은 순간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이, 이렇게 능숙하신지는 몰랐어요."
"……!"
이리나의 말에 강혁은 크게 당혹스러워했다.
하지만 명백히 자신이 저지른 일이었다.
결국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강혁을 바라보며 이리나가 배시시 웃었다.
금발이 황금물결처럼 일렁거리며 요정 같은 얼굴이 꽃처럼 화사하게 피어났다.
강혁은 새삼 이리나가 얼마나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인지를 깨달았다.
꿀―꺽.
'내가 전설 속의 요정을 옆에 두고 있었구나?'
강혁은 이리나의 미모에 놀라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비행기가 공항에 내렸다.
이리나의 얼굴은 한결 밝아 있었다.
강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근래에 보지 못했던 밝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좋은가?'
강혁은 이리나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리나 같은 여자라면 얼마든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잊지 못하는 여인이 있고, 또 자신이 좋다고 열렬하게 고백한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강혁은 갑자기 시작된 여난에 당혹스러우면서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천려시도, 이리나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떠날 수도 있었다.
아니면 두 사람 중 한 사람과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다시 유라와 함께 하는 미래도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강혁은 유라와 딸 경아를 떠올렸다.
가슴이 저려왔다.
순간 갑자기 정신을 잃었던 일에 대해 떠올렸다.
'유라야, 혹시 네가 한 일이니?'
강혁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물음을 던져 놓고는 비행기 문 앞에 섰다.
비행기의 문이 활짝 열렸다.
강혁의 얼굴로 햇살이 비쳤다.
"회장님, 어서 가요."
이리나의 말에 강혁은 그녀를 한번 본 후, 활주로를 향해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