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52화
152화
"괜찮아. 괜찮아. 안젤라."
"존―"
안젤라가 강혁을 힘껏 끌어안았다.
마크를 잃은 충격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강혁은 안젤라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진정시켜야 했다.
안젤라는 강혁의 품 안에서 얼굴을 파묻고는 계속 그의 이름을 외쳤다.
"존― 존― 존―"
한참을 그렇게 울부짖던 안젤라는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강혁을 껴안았던 팔을 풀었다.
"이제 진정이 돼?"
"흑, 존―"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방울방울 달렸다.
강혁은 안젤라의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안젤라의 내면에 남아 있는 상처가 여과 없이 드러난 것이다.
"괜찮아, 안젤라. 난 괜찮으니까."
"우윽― 존."
강혁은 안젤라의 로맨틱한 단발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강혁의 손가락이 안젤라의 버터 같은 뺨을 매만졌다.
안젤라가 뭔가를 갈망하는 눈으로 강혁을 바라보았다.
"…안젤라?"
"키스해줘. 존."
"……!"
어떤 감정이었을까?
알 수 없는 분위기에 이끌려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풍성한 잎을 가진 초록의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어둑해지는 밤하늘 아래 센트럴 파크를 배경 삼아 두 사람의 겹쳐진 그늘이 땅거미처럼 늘어졌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서로를 위로하듯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래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서로의 상처를 잘 알기에.
애틋한 마음이 가시도록 서로를 보듬고, 애무와 키스가 끝없이 이어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입맞춤이 끝나자 안젤라가 행복한 듯한 표정으로 강혁을 올려다보았다.
"존―"
"안젤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조금 전 키스를 하면서 깨달았어."
"……?"
"존의 상처를 보듬을 때 나도 위로 받았거든."
안젤라가 손을 뻗어 강혁의 뺨을 매만졌다.
"나라도 괜찮다며 존의 힘이 되고 싶어. 힘들면 언제든 날 만나러 와줘."
"…안젤라."
강혁은 안젤라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했다.
알 수 없는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정체불명의 감정이 솟구쳤다.
안젤라는 물빛 같은 눈망울로 강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얇고 긴 팔을 뻗어 강혁의 목을 감싸 안았다.
"존, 약속해줘."
"……?"
"언제든 힘들 때면 날 찾아준다고."
강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귀밑머리와 귓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안젤라. 그래도 괜찮은 걸까?'
'나라도 괜찮다면 존.'
무언의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서로를 감싸 안았다.
안젤라와의 만남을 뒤로 하고 강혁은 한동안 미친 듯이 일을 처리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밀렸던 업무를 파악했다.
올리브 사장에게는 새로운 업무를 맡겼다.
특허 및 기업 인수 회사인 골든 브릿지의 업무 진행 상황도 파악하고, 더불어 새로운 업무도 맡겼다.
마블을 인수했으니, 영화사도 알아보도록 한 것이다.
인수가 쉽지 않으면 새로운 영화사의 설립도 계획해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앨런 머스크와 함께 스페이스X와 전기자동차 회사 테슬라의 설립을 진두지휘했다.
회귀 전 앨런 머스크가 해당 사업을 시작했던 때보다 몇 년이나 앞선 시작이었다.
그렇게 딱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한 강혁이 스티브를 불렀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강혁은 스티브에게 목적지를 알려주었다.
"…오랜만에 방문하시는군요."
"응, 그렇지."
"이번에는 만나실 건가요?"
스티브의 말에 강혁은 말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오랫동안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유라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로는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양부모를 통해 몇 번이나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받았지만 말이다.
모두 신상현으로부터 유라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강혁은 이번에도 먼발치에서 그녀를 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아니."
"알겠습니다. 회장님."
스티브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더 이상 되묻거나 하지 않았다.
그에게 강혁의 말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 충직한 전직 특수요원은 강혁을 유라에게 데려가기 위해 재빨리 차로 이동했다.
유라는 올해 11살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 4학년이다.
양부는 미국 유수의 기업으로 성장한 야후의 프로그래머였다.
나름 넉넉한 집안 환경에서 귀여움을 듬뿍 받으며 자라고 있었다.
여기에 모든 학비와 피아노 레슨비 등을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자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에서 유명한 사립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사실 유라의 양부모 재력으로는 힘에 부칠 정도로 유명한 사립학교였다.
이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가 지역에서 힘 좀 쓰는 유력자 가문의 아이들이었다.
―오, 존 회장님. 오랜만에 연락을 주시는군요.
"하하, 죄송합니다. 교장 선생님."
―아이고, 죄송은요. 회장님이 저희 학교 측에 기부하신 돈이 얼마인데요.
"우리 제니는 잘 지내고 있나요?"
―그럼요. 제니는 상당히 우수한 학생이라서 학교 측에서도 기대가 크답니다.
"그래요?"
―담임인 바바라 선생님의 평가도 좋아요. 품행방정하고, 성격도 좋아서 친구들도 많죠.
허드슨 교장 선생님의 말에 강혁은 빙긋이 웃었다.
'…유라야.'
강혁의 아내였던 이유라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보육원에서 자랐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강혁은 유라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했던 그녀는 첫 만남에 자신과 사랑에 빠졌다.
40살이 넘어가는 노총각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앞으로 그녀에게는 얼마든지 좋은 남자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 한편이 아파왔다.
'나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유라가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닐까?'
강혁은 쓰린 마음을 다스리며 교장과의 전화를 끊었다.
"회장님, 어떻게 할까요?"
"교내로 들어가도록 해요."
강혁의 지시에 차가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제니!"
머리를 뒤로 앙증맞게 묶은 어린 소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친구를 돌아보았다.
입가에 보조개가 귀엽게 들어간 동양인 소녀였다.
"왜 그래, 릴리."
"히힛!"
릴리라고 불린 여자아이가 유라의 얼굴을 향해 젖은 손을 흔들었다.
물방울 몇 개가 유라의 뽀얀 얼굴에 떨어졌다.
"앗! 차거."
제니가 웃으며 도망가는 릴리의 뒤를 쫓았다.
강혁은 그런 유라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후훗, 유라야.'
만으로 18살. 청순가련했던 젊은 시절의 유라가 떠올렸다.
강혁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느덧 강혁의 기억은 멀리 그녀를 처음 만났던 장소로 이동했다.
복지관 문화 센터의 홀 안에서 혼자서 건반을 두드리던 그녀의 하얀 손가락.
마음을 애잔하게 감싸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연주.
드뷔시의 달빛.
순수함이 사람의 형체를 갖췄던 것 같았던 유라.
강혁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내가 널 잊을 수 있을까? 유라야?'
조심스럽게 다시 눈을 뜬 강혁은 유라가 친구들과 함께 노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런 강혁을 스티브는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스티브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보고 싶어 하면서 왜 직접 만나지는 않는지?
강혁과 유라는 대체 어떤 관계인지?
스티브는 강혁의 아이가 아닌가 의심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강혁이 너무 젊었다.
이런 스티브의 안타까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혁은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에잇!"
유라가 깔깔 웃으며 친구의 얼굴에 가볍게 물방울을 뿌렸다.
웃는 유라의 볼에 보조개가 살짝 들어갔다.
'엇!'
강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유라의 웃는 표정에서 딸 경아의 모습을 본 것이다.
세상에서 오직 강혁만이 기억하는 딸의 모습을.
강혁은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아빠! 어서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딸아이가 가장 먼저 달려와 안겼다.
몸을 던지며 강혁의 품 안으로 뛰어들던 경아의 웃는 얼굴.
작고 귀여운 보조개가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강혁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회장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 아니야. 스티브. 난 괜찮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확연히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강혁이 몸을 돌려 스티브에게 말했다.
"스티브, 여기서 기다리게."
"어디 가시려고요?"
"음, 좀 걷다가 오겠네."
"회장님, 전 신경 쓰지 마시고. 얼마든지 다녀오세요."
스티브를 뒤로 하고, 강혁은 학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설마하니 경아를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엄마이니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어린 유라에게서 경아를 보게 될 줄이야.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경아를 보고 싶다는 마음의 열망이 더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혁은 유라의 행복을 위해, 그녀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강혁은 하염없이 상념에 빠져 걸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자신이 다운타운가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긴?"
여러 상점들과 가게들이 있는 것을 보니 학교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것을 깨달았다.
강혁은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휴우, 유라. 그리고 사랑하는 내 딸 경아야.'
강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맑디맑은 하늘이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강혁은 이제 그만 유라를 놓아주려고 했다.
그녀에게 있을 수 있는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자신 같은 아저씨가 아니라 또래의 멋진 남자와 행복을 찾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런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경아. 내 딸 경아.'
비명에 죽은 딸 경아가 너무나 보고 싶었다.
강혁은 자신의 욕망과 유라의 행복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마음을 정할 수 없자 강혁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거리를 걸을 때였다.
강혁은 자신의 옆을 스쳐지나가는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몸을 뒤로 돌려 강혁이 여자아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기 미안하지만 잠깐만……."
강혁은 급히 소녀에게 한국말로 말을 걸었다.
"뭐죠? 한국인인가요?"
몸을 돌린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강혁을 바라보며 한국말로 대답했다.
"혹, 혹시 나 기억 못 하겠니?"
강혁의 말에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가 어리둥절하다가 환하게 웃었다.
"혹시, 초코파이 아저씨?"
"맞아, 기억하는구나."
강혁은 눈앞의 소녀를 보고 매우 반가워했다.
유라의 안전을 확인하러 간 보육원에서 만났던 아이 이세라였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저씨?"
"하하,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넌 대체 어떻게 여기 있는 거니?"
"후훗, 말하자면 긴데?"
"여기서 이러지 말고. 가까운 곳에……."
강혁의 눈에 한 가게가 들어왔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 등을 파는 곳이었다.
"저기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강혁의 말에 이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저씨."
이세라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고 순순히 강혁의 말을 따랐다.
두 사람은 가게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뭘로 하시겠습니까?"
강혁은 메뉴판을 살펴본 후 이세라에게 물었다.
"뭘 시켜줄까?"
"음, 딸기 파르페요. 그리고 사과 와플."
"오케이. 딸기 파르페, 와플 1개씩하고 아메리카노 한 잔."
"주문 받았습니다. 손님."
여종업원이 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