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53화
153화
주문한 음료 등을 기다리며 강혁이 말했다.
"보기 좋구나."
"…예?"
이세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보기 좋은 표정이야."
강혁의 말에 이세라가 해맑게 웃었다.
'이건 아저씨니까.'
이세라는 몇 년 전 강혁을 처음 만났을 때 가식적인 모습을 간파당했었다.
언제나 타인의 눈치를 보며 만들어낸 가면을 강혁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자기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해주었다.
이세라는 강혁의 말에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이세라는 강혁의 앞에서 연기하지 않은 본모습을 보여 주었었다.
그리고 오늘 이세라는 다시 한 번 그의 앞에서 순수한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 있었다.
거짓 없는, 꾸밈없는 자신의 모습을.
"그건 그렇고 어떻게 된 거니?"
강혁의 말에 이세라가 말했다.
"자세한 이야긴 좀 그렇고 좋은 집안에 입양되었다는 것만 말씀드릴게요."
"그렇구나? 그럼 여기서 사는 거야?"
강혁의 물음에 이세라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요? 어떻게 여기 계신 거예요?"
"음, 아저씬 회사 일 때문에 온 거란다."
"오호, 유능하신가 봐요. 미국까지 출장을 다 오고."
"하하, 그래?"
이세라는 살짝 볼을 붉히며 강혁을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이세라의 눈에도 오랜만에 만난 강혁은 상당히 멋져 보였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봐주었던 아저씨가 외모도 상당했다.
그래서인지 유독 활발한 표정을 지으며 미국 생활을 이것저것 말해주었다.
"부잣집으로 입양이 된 건 좋지만 미국 유학생활이 쉽지는 않아요."
"오? 유학생이구나. 부모님은 같이 온 거니?"
강혁은 이세라의 말에 살짝 놀라며 궁금한 점을 물었다.
"으응, 그게 좀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요."
이세라는 강혁의 질문에 어물쩍 넘어갔다.
"그, 그래?"
더 꼬치꼬치 묻기가 그래서 강혁은 슬쩍 학교생활을 물었다.
"친구는 많이 사귀었니?"
"뭐, 대충… 그런데 사실 좀 신경 쓰이는 아이가 있긴 해요."
"응? 신경 쓰이는 아이?"
"예, 솔직히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은데……."
이세라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자꾸만 귀찮게 하는 아이가 있어요."
마침 주문한 음식들이 나와서 이세라는 딸기 파르페를 입에 한 입 물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서 강혁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유라와 같은 나이 또래라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게 사실은 좀 복잡해요."
"그래?"
강혁은 빙긋이 미소 지으며 이세라를 바라보았다.
멀리 미국에서 새로 친구를 사귀려니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이세라처럼 타인에게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는 아이라면.
강혁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으음, 그래도 자신을 좋아해주는 친구라면 소중히 여기면 좋을 텐데."
"소중히 여기라고요?"
"음."
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흐흥. 그럴까요?"
이세라는 뭔가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 애도 이 아저씨처럼 내 본모습을 알아봐 준 아이였지.'
이세라는 자신의 요청에 선뜻 소중한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유학을 온 미국에서 갑자기 마주쳤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자신을 기억하고 반갑게 다가온 유라를 이세라는 개인적으로 불러냈었다.
"미안하지만, 난 불쌍한 입양된 아이로 여겨지고 싶지 않아."
"아, 미안해. 세라."
이세라의 말에 이유라는 무슨 뜻인지 알고 당황했다.
자신은 어차피 처음부터 입양된 아이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세라는 경우가 달랐다.
"지금 이름은 유라야."
"응?"
"새 부모님이 붙여준 이름이야."
"아, 그렇구나. 우연이네?"
이유라의 말에 이세라는 살짝 마음의 가책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모른 척 해주면 좋겠어."
"아, 알았어. 세… 아니 유라."
"그럼 비밀을 지켜줄 것으로 믿어. 제니."
"그래, 걱정마."
유라는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하고는 찡긋 윙크를 했다.
볼에 살짝 보조개가 들어간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이세라는 피식 웃을 뻔했지만 끝까지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새로 전학을 온 학교의 아이들은 모두들 이세라를 한국에서 온 재벌집 딸로 알고 있었다.
세라의 화려한 용모도 한 몫 해서 동양에서 온 프린세스라며 떠들썩했다.
그런 분위기였으니, 제니 아니 유라도 이세라가 처한 상황을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세라는 같은 보육원 동기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할 것이다.
"너도 여기서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너도 내 비밀을 지켜주길 바래."
"응, 걱정마. 세라……."
유라가 본명을 말하자 이세라는 사나운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 유라."
"…조심해. 앞으로 절대 세라라고 하지마. 알겠지?"
"아, 알았어. 유라."
"음."
딱딱한 표정으로 한번 유라를 쳐다보고는 이세라는 돌아서 나왔다.
'아이, 미움 받았네.'
이유라는 이세라를 보고 너무 반가웠는데 외면당하자 자신의 이마에 꿀밤을 때렸다.
잠시 지난 일을 생각하던 이세라는 강혁을 바라보았다.
"음, 아저씨 말을 들어볼게요."
"그래?"
이세라의 말에 강혁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보육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구해주고 싶었던 아이다.
어린 나이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자신을 감추고 철저하게 연기를 했던 아이라 마음이 갔었다.
그런데 나름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그럼 전 그만 가봐야 해서요."
"오, 그래? 알았어."
강혁은 이세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딸기 파르페도 맛있었어요. 초코파이 아저씨."
"내 이름은 강혁이야."
"강혁?"
"그래."
"그럼 바이, 강혁 아저씨."
이세라는 강혁에게 인사를 하고는 가게를 나섰다.
그런 이세라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강혁은 자신을 자책했다.
'아차, 이런 바보. 어느 학교인지 물어볼걸.'
강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미 이세라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모습이 사라져서 어리둥절했다.
'하아, 어디로 간 거지?'
강혁은 찾아보고 싶었지만 아직 계산을 하지 않았기에 다시 가게로 들어갔다.
"흐흥, 흐흥."
커다란 승용차의 뒷좌석에 어린 이세라와 40대 중반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이세라는 기분이 좋은지 연신 콧노래를 불렀다.
"호호, 기분이 좋은가 봐요? 유라 아가씨?"
40대 중반의 여성이 이세라를 보며 물었다.
"응, 그럴 일이 있어."
"그런데 대체 어디 있다가 오신 거예요. 잠시 구경하러 간다고 해놓고서는 사라져서……."
"뭐, 그리 늦지는 않았잖아?"
"그렇긴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해주세요."
"알았어. 김씨 아줌마."
김씨 아줌마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이세라의 보호자 겸 가정부였다.
"그건 그렇고. 초코파이는 도착했어?"
"아, 도착했어요."
"지난번에는 잘못 가져왔었잖아? 어디 회사인지 확인했어?"
"예, 이번에는 정확히 확인했어요. 오리안 겁니다."
"흐흥. 잘했어. 아줌마."
이세라의 반응에 김씨는 빙긋이 웃었다.
이전에 한국에서 초코파이를 가져다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로떼 회사 제품을 구해 줬더니 한입 베어 먹고는 화를 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오리안 제품이 아니고서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런지 물어봤지만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무튼 어린 고용인의 기분이 좋아 보이니 김씨도 한결 마음을 놓였다.
그런데 이세라는 대체 어떻게 어린나이에 유학을 오게 된 것일까?
사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미국 유학 자체는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어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도 최고의 가정교사가 붙어서 숙제와 언어를 도와주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이세라는 사실 머리가 매우 좋았다.
지능검사에서 150이 넘게 나와 고모인 이소윤을 기쁘게 해주었다.
이세라의 미국 유학행은 사실 그녀가 적극적으로 요구한 측면도 있었다.
신상현의 접근을 끊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날은 마침 세라의 지능검사 결과가 나온 날이었다.
검사를 측정한 담당자가 결과지를 직접 가지고 저택으로 왔다.
"우리 유라가 머리가 이렇게 좋다고?"
"예, 이사님. 조카님은 상위 1%에 해당되는 지능지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서 천재가 나왔구나."
지능검사를 담당한 직원의 말에 철의 여인이라 불리던 이소윤 이사도 싱글벙글이다.
하나밖에 없는 조카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그런 아이가 머리까지 좋으니 장래가 크게 기대가 되었다.
"유라에게 최고의 교육 환경을 마련해 줘야겠어."
이소윤의 두 눈에 파란 불꽃이 솟구쳤다.
평생 처녀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당연히 부모가 되어 본 적이 없는 터라 어떻게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할 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세라의 지능검사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지능검사 담당자가 돌아가자 이소윤은 이세라를 불렀다.
"고모, 부르셨어요."
이세라는 예의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이소윤을 대했다.
"어서 와라, 유라야."
회사 일로 바빠서 오랜만에 유라를 대하는 이소윤 이사였다.
혹시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원하는 것은 없는지 이것저것 물었다.
그리고 지능검사 결과를 알려주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검사결과를 들은 이세라가 웃으며 대답했다.
"응? 알고 있었다고?"
"뭐, 정확히 150이라고는 몰랐지만 제가 머리가 좋은 건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 우리 유라가 누구 핏줄인데 당연하지."
이소윤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서 말인데 유학 계획. 앞당기면 안 될까요?"
"응? 유학가고 싶은 거니?"
이소윤의 말에 이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 가능하면 바로 가고 싶어요. 이제 영어도 잘한다니까요."
이세라는 오랜만에 만난 고모에게 한껏 애교를 떨며 유학을 가고 싶다는 점을 어필했다.
안 그래도 바빠서 자주 챙겨주지 못하는 조카를 미국으로 보내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라의 계속적인 요구와 애교 공격에 마지못해 미국으로 보내게 된 것이다.
이세라가 이렇게 집요한 요구를 하게 된 것은 신상현 때문이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걸려오는 전화는 이세라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예 한국을 떠나버리는 것을 선택한 이유였다.
그런데 기껏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왔는데 전학 첫날 하필 진짜 이유라를 만났다.
늑대를 피했더니 호랑이를 만난 격이었다.
일생 다시는 이유라를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이세라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껏 학교에서 진짜 이유라를 만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혁과의 만남 이후 이세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유라야!"
교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던 이세라를 누군가 뒤에서 다가와 껴안았다.
이세라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학교에서 얼음 공주라고 불리는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건 한 명밖에 없었다.
이세라는 고개를 돌려 눈에 쌍심지를 켰다.
"제니!"
"에헤헤!"
이유라가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볼에 작은 보조개가 예쁘게 피었다.
이세라는 부들부들 떨었다.
너무 깜찍한 모습에 그만 안아버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화를 내며 말했다.
"떨어져!"
이세라의 몸에서 냉기가 풀풀 풍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