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54화
154화
"에헤, 또 혼났네."
이유라는 귀여운 손으로 이마를 툭 치며 저 멀리 걸어가는 이세라를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유라의 절친인 릴리가 다가와 그녀의 팔짱을 꼈다.
"제니, 또 혼났구나?"
"릴리."
"어휴, 쟤는 싫다는데 넌 왜 그러니?"
"그게……."
"하긴 학교에서 유일한 한국인이니. 네 마음도 이해는 가."
릴리의 말에 유라는 그저 싱긋이 웃었다.
단지 그게 다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같은 보육원에서 한때는 한 자매처럼 지냈던 사이였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이세라는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그렇게나 자신을 좋아했던 세라였는데.
세라가 갑자기 보육원에서 사라졌을 때 이유라는 너무 놀랐었다.
그날이 가기 전에 누군가가 이세라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한동안 이유라는 너무나 이세라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세라에게 준 십자가 목걸이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지금도 유라는 세라에게 목걸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있었다.
'보육원 출신이란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할 건데…….'
"우리도 어서 가자. 지각하겠어."
릴리의 말에 유라 역시 웃으며 교실로 향했다.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다.
다음 수업은 이동 수업이었다.
거의 같은 수업을 받는 릴리와 떨어지는 몇 안 되는 수업이었다.
"그럼 다음 수업 때 보자고 제니."
릴리는 유라의 귀여운 볼살을 꼬집으며 말했다.
"아얏."
"키히힛."
릴리가 재빨리 도망쳤다.
유라는 피식 웃으며 다음 수업 장소로 이동했다.
복도를 따라 쭉 걷다가 왼쪽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오랜만이다? 제니."
"어엇? 안녕, 라일라? 그리고 신디, 클로와."
유라보다 키가 한 뼘 정도는 더 큰 여자애들이 팔짱을 끼고서 유라를 노려보았다.
"내가 잘 있을 것 같아? 제니?"
"라, 라일라. 그건 내가 정한 게 아니잖아. 앰버 여사님이……."
"네가 꼬드겼겠지. 그게 아니면 왜 앰버 여사님이 너 같은 입양아를 뽑았겠냐고?"
"그래 맞아. 제니. 누가 봐도 라일라가 너보다 선배고 훨씬 잘하잖아."
라일라의 옆에 서 있던 주근깨에 붉은 머리를 한 신디가 고압적으로 말했다.
"신디 말이 맞아. 너 같은 간사한 아이는 혼이 좀 나야 해. 안 그래?"
셋 중 가장 뚱뚱하고 팔뚝이 굵은 클로와가 제니에게 다가섰다.
제니의 얼굴이 하얗게 변할 때였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거기서 뭐하고 있는 거니?"
"가자."
라일라가 재빨리 두 친구들을 끌고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유라는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라일라와 신디, 그리고 클로와는 모두 앰버 여사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재능이 있어서 앰버 여사의 학생이 된 케이스가 아니었다.
모두 부모님의 영향력과 돈으로 레슨을 받게 된 경우였다.
앰버 여사가 직접 재능을 알아보고 제자가 되는 것을 허락받은 제니와는 다른 경우인 것이다.
세 사람 역시 그런 사정을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 유라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있었다.
이번에 지역에서 열리는 피아노 대회에 제니가 대표로 나가게 된 것에도 분노하고 있었다.
특히 화가 나 있는 사람은 라일라였다.
그녀는 만일 제니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앰버 여사의 제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아이였다.
사실 세 사람 중에는 그래도 제일 피아노 실력이 나은 편이었다.
"너 제니지? 혹시 무슨 일 있었니?"
제니에게 다가간 여선생님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캐롤라인 선생님, 전 괜찮아요."
"그, 그래?"
제니는 재빨리 말하고는 교실로 뛰어갔다.
그런 이유라를 캐롤라인은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이유라는 선생님들 모두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살피는 학생이었다.
남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사실 그녀에게는 비밀스런 후원자가 있고, 매년 엄청난 기부를 학교에 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은 선생님들만 알고 있었고,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다.
캐롤라인은 팔을 허리에 가져가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음, 어디로 갔지?"
사실 캐롤라인은 제니가 여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신고를 받고 급히 온 것이었다.
그런데 신고한 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교실로 돌아갔나보네. 그 애 이름이… 그렇지 유라였던가?"
캐롤라인은 전학 온 지 한 달 정도 된 동양인을 떠올렸다.
급한 얼굴로 자신에게 달려왔었다.
그걸로 봐서는 꽤나 제니란 학생을 아끼는 모양인데 사라지고 없었다.
"흠, 할 수 없지."
캐롤라인은 어깨를 으쓱한 후 사라졌다.
한편 캐롤라인이 사라지자 몸을 숨기고 있던 이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흐흥, 라일라, 신디, 클로와라?"
이세라의 표정을 본 사람이 있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그 나이의 아이가 지을 표정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면서도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었다.
다음 날.
릴리는 교실 복도에서 이유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 시간에 서로 다른 수업을 들었던 것이다.
"제니!"
"릴리!"
유라가 웃으며 걸어왔다.
그런데 걷는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어? 왜 그래? 제니?"
"응, 아무 것도 아냐."
"아무 것도 아니긴. 너 넘어졌니?"
릴리는 유라의 무릎이 까져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놀랐다.
"아무 것도 아니야. 릴리."
"무슨 소리야. 절뚝거리면서. 같이 보건실에 가자."
릴리는 유라를 부축했다.
어쩌다 다쳤는지 묻자 유라는 서둘러 오다가 넘어졌다고 한다.
"이런 덤벙이. 이 엄마는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릴리가 짐짓 엄마가 짓는 표정을 흉내 내며 말했다.
유라는 웃으며 릴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릴리 엄마. 죄송해요. 다음부턴 숙녀답게 조신하게 다닐게요."
"어휴, 넌 정말이지. 아직도 청방지축이구나. 아무래도 예절교육부터 다시 해야겠군."
"맘, 그것만은 제발."
"흥, 앞으로 학교 마치고 집에 오면 걷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자구나."
릴리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가릿 부인이 널 아주 엄격하게 교육시켜 줄 거다."
릴리는 그러고는 머리 위에 책을 몇 권 올리고는 걷는 흉내를 냈다.
그러다 책을 떨어뜨리자 쌍심지를 켜고는 화를 내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릴리의 연기에 유라는 까르르 웃었다.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해?"
"물론이지. 넌 우리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해."
"히히히."
릴리의 말에 유라는 배시시 웃었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흥, 릴리 앤더슨. 저런 입양아가 뭐가 좋다고 싸고도는지 모르겠어."
"그러게 말이야. 라일라."
신디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조금 전엔 잘했어. 클로와."
라일라가 웃으며 클로와를 칭찬했다.
"흐흐, 그런데 아쉬워. 땅을 짚을 때 손가락을 다쳤어야 했는데."
클로와가 말했다.
클로와는 셋 중에 제일 통통한 체형이었는데, 커다란 입에 심술궂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일라는 나름 셋 중에는 미형의 체형과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흠이라면 입술이 얇고 눈꼬리가 올라가 사나워 보인다는 것이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 클로와."
신디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때는 더 세게 밀어버리라고. 클로와."
"나만 믿어. 라일라."
클로와의 말에 라일라와 신디가 서로를 바라보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이들은 서로 히히덕거리며 교실로 걸어갔다.
세 사람이 사라지자 이세라가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재밌네.'
이세라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클로와, 다음 수업 마치고 여기서 만나자."
라일라와 신디가 말했다.
"알았어. 다음 시간에 보자고."
클로와가 말했다.
좀처럼 서로 떨어지지 않는 세 사람이지만 클로와가 좋아하는 쿠키 조리 실습수업이 있었다.
라일라와 신디 두 사람은 스포츠 수업으로 이동하고 클로와만 조리실습실로 이동했다.
클로와는 복도를 돌아서 계단으로 올라갔다.
라일라와 신디는 서로 새로 산 옷에 대해 수다를 나누었다.
신디가 라일라에게 이번에 새로 찾은 옷가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복도를 쿵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디의 수다를 듣던 라일라가 그 소리에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엇!"
라일라가 두 눈을 끄게 떴다.
라일라의 반응에 신디도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복도에 클로와가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상태에서 정신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복도에 피가 흥건히 고여 있다.
머리가 복도에 크게 부딪히며 상처를 입은 모양이었다.
라일라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호호호, 자업자득이야.'
클로와의 머리 뒤로는 흥건하게 피가 고여 있었다.
이세라는 바닥에 떨어져 정신을 잃은 클로와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남이 볼세라 복도에서 재빨리 사라졌다.
"사고가 났다고요?"
"예, 교장선생님. 클로와란 학생이 그만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딘 모양입니다."
"저런?"
"바로 병원으로 가서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지만 머리를 심하게 부딪혀서 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요? 그런데 발을 헛디딘 정도로 그렇게 크게 다칠 수 있나요?"
"글쎄 말입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당시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 없어서."
"허허. 그것 참."
"일단 클로와 학생이 깨어나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교무 처장의 말에 허드슨 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 조지 침례 병원.
클로와는 긴급 수술 후 성 조지 침례 병원에 입원했다.
담당의사는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난 클로와를 진료했다.
"깨어났구나? 클로와."
"여긴 어디? 당신은 누군가요?"
"난 너의 담당의사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니?"
의사의 말에 클로와는 기억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그래? 그런데 왜 그러니? 추워?"
"그…그게 갑자기 소름이 돋아서."
"흐흠."
요한은 실내 온도를 살펴보았다.
'적정 온도인데?'
요한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클로와가 다시 물었다.
"저기…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이런, 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구나."
"…예."
클로와는 당시의 기억을 떠오려 보려고 시도했다.
그러다 부르르 떨었다.
뭔가 모를 무서운 기분이 들며 머릿속이 안개가 낀 듯 뿌옇게 변했다.
"클로와, 넌 어제 학교 계단에서 미끄러졌어. 그래서 복도에 머리를 크게 부딪혔단다. 기억 안 나니?"
의사의 말에 클로와는 다시 한 번 기억을 해보려고 노력했다.
"음… 아무 것도 기억이 안 나요."
"그…그래? 어디 한 번 보자."
클로와의 담당의사인 요한은 손가락만 한 의료용 플래시를 켜서 클로와의 동공을 확인했다.
그리고 차트를 보았다.
"음, 다른 이상은 없는데?"
요한은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클로와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인 것 같다. 드문 일은 아니야."
"그, 그래요?"
"그래,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기억이 날 거다."
의사의 말에 클로와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