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55화
155화
#41장 인연과 악연 사이
일주일 후.
클로와는 여전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부모님과 학교 선생님 모두 클로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지만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클로와 사건은 단순한 사고로 처리되었다.
클로와는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따라 입원생활이 길어졌다.
항상 셋이서 한 몸처럼 움직이던 라일라와 신디는 클로와가 사라지자 풀이 죽었다.
그래서 이유라에 대한 괴롭힘도 동시에 줄어들었다.
"나이스 로우―숏 서브, 신디!"
신디의 경기를 지켜보던 라일라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두 사람이 선택한 스포츠 수업 중이었다.
신디가 라켓으로 친 셔틀이 네트 위로 낮게 날아가 서비스 코트 앞쪽에 떨어졌다.
상대의 실수를 유도해 점수를 얻은 것이다.
라일라와 신디는 배드민턴 클럽을 다니고 있었다.
아직 어리지만 둘 모두 스포츠 활동에 열심이었다.
라일라의 게임이 먼저 끝나 신디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신디의 게임도 끝나자 두 사람은 스포츠 음료를 마시며 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저기 봐. 제임스야."
제임스는 두 학년 위로 상당히 잘생긴 남자아이다.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아서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제임스 역시 배드민턴 클럽을 다니고 있었다.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와의 시합이 막 끝난 모양이었다.
"역시 제임스. 난 널 못 당하겠어."
갈색 곱슬머리 남학생이 제임스에게 다가가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커트. 지난번보다는 더 나아졌던데. 그건 그렇고 너 물 없냐?"
"응? 안 가져 왔어? 기다려봐."
커트는 가방 안을 뒤졌다.
"조금밖에 안 남았는데?"
"그거라도 줘봐."
제임스는 커트에게 받은 음료를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곧 물이 모두 떨어졌다.
제임스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라일라와 신디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간이 원형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이온음료를 들고 갔다.
라일라와 신디가 이온음료를 들고 제임스와 커트의 뒤에 섰다.
라일라가 제임스에게 말을 붙이려고 할 때였다.
"어이, 거기! 예쁜이―"
제임스가 갑자기 소리를 높이며 코트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라일라는 놀라 제임스가 누굴 향해 손을 흔드는 것인지 바라보았다.
'저, 저 애는?'
라일라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제니와 릴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침 코트 옆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제임스가 외치는 소리를 못 들은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수다를 떨며 지나고 있었다.
"어이, 거기 블루 스카이 치마 입은 예쁜 여학생―"
마침 제임스의 간절한 외침이 들렸는지 릴리가 고개를 돌려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제니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그래?"
릴리가 손으로 뒤편을 가르켰다.
제니가 고개를 돌려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제니, 저 사람. 제임스 클락이야."
"알, 알아."
두 사람 모두 제임스 클락을 알고 있었다.
또래 여자애들 중에서 제임스를 좋아하지 않는 아이들이 없었다.
"저… 말인가요?"
"그래, 너. 블루 스카이 치마."
"무, 무슨 일이죠?"
"미안한데… 거기 물통에 물 좀 마실 수 없을까?"
"아, 예. 드릴게요."
제니는 어깨에 크로스로 예쁜 딸기 무늬의 물통을 메고 있었다.
코트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제임스를 불렀다.
"저기 제임스 선배, 이거 마시세요."
"응?"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제임스가 몸을 돌렸다.
예쁘장한 여자애 한 명이 수줍은 표정으로 이온음료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아, 미안. 난 물이 더 좋아서."
제임스가 라일라에게 윙크하더니 몸을 돌려 가까이 다가온 이유라와 릴리에게 향했다.
"예쁜이, 위로 물통을 던지면 받을게."
유라가 물통을 던졌다.
제임스는 가볍게 물통을 받아 들더니 물통을 열어 물을 마시고는 다시 건네주었다.
"예쁜이 고마워. 이름이 뭐니?"
"이 애 이름은 제니에요. 선배."
릴리가 재빨리 말해주었다.
"전 릴리예요."
"제니, 릴리. 둘 다 이름도 얼굴도 예쁘네. 또 보자."
제임스가 웃으며 두 아이들에게 윙크를 날렸다.
제니와 릴리는 물통을 받아들고는 재빨리 코트에서 멀리 벗어나 서로 까르르 웃었다.
초등부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제임스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두 살 위라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너무 허들이 높아 보였던 것이다.
한편 제임스가 제니의 물을 마시고, 이름까지 알려주는 것을 다 지켜보고 있던 라일라와 신디,
둘은 망연자실했다.
라일라는 멍하니 이온음료를 들고 있었다.
그때 제임스의 친구 커트가 말했다.
"고마워, 이건 내가 마셔도 되지."
커트는 재빨리 라일라의 손에서 이온음료를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뭐라 하기도 전에 뚜껑을 열고 마셨다.
"캬― 맛있네."
라일라와 신디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황당함과 치욕에 몸을 떨었다.
두 사람은 제임스와 커트가 자신들을 상대도 해주지 않자 재빨리 코트를 벗어났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제니와 릴리에게 풀었다.
그런데 릴리는 자신들과 같은 유력 가문의 딸이고 부모들끼리 잘 아는 사이였다.
결국 모든 화풀이는 제니에게로 돌아갔다.
"제니, 용서하지 않겠어."
라일라가 씩씩거렸다.
"감히 우리들을 앞에 두고 제임스 선배와 노닥거리다니."
신디 역시 화가 잔뜩 났다.
"신디, 우리 다음 시간 제니 그 애랑 같은 수업이지?"
신디는 라일라와 눈이 마주치자 독한 표정을 보였다.
"혼내주자!"
신디의 말에 라일라가 하얀 이빨을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니? 너 옷하고 머리가 왜 그래?"
릴리는 깜짝 놀랐다.
이동 수업을 마치고 다시 만난 제니의 옷이 흙투성이에다가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헤헤, 조지 오웰 건물에서 여기로 뛰어오다가 굴렀어."
"이런 칠칠치 못하게."
릴리는 손으로 제니의 옷에 묻은 흙과 먼지를 털어 주었다.
그리고 가방에서 빗을 꺼내어 예쁘게 머리를 만져주었다.
"제니, 넌 크면 틀림없이 엄청난 미인이 될 거야."
릴리의 말에 제니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정말?"
"물론이지. 제니. 넌 이 엄마의 말을 못 믿는 거니?"
릴리가 짐짓 엄마 흉내를 내자 유라는 릴리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뇨, 엄마. 그럴 리가요. 제니는 무조건 엄마 말을 믿어요."
"그래, 네가 앞으로 이 엄마 말만 잘 들으면 제임스 같은 멋진 남자애와도 사귈 수 있을 거야."
"정말? 내가 제임스 선배랑?"
"흐흣, 이 계집애. 말로는 관심 없다고 해놓고서. 사실은……."
릴리가 제니의 허리를 간질이자 제니는 꺄르르 웃음보를 터트렸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멀리서 이세라가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그렇게 있더니 이내 고개를 돌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꺄아앗!
비명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사람들이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과학 실험 중 알코올 램프의 불이 여자아이의 머리에 옮겨 붙은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대체 어떻게 불이 옮겨 붙은 것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과학 선생님이 재빨리 교실에 비치된 소화기를 여자아이의 얼굴에 분사했다.
하얀 가루가 뿜어져 나와 신디의 머리카락에 붙은 불을 순식간에 껐다.
"헉헉! 다행이다."
과학 선생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하마터면 큰 사고가 일어날 뻔한 것이다.
과학 교사 해롤드는 머리카락이 반쯤 타버린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신디,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모, 모르겠어요. 잠시 뒤로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머리에 불이 붙었어요."
같은 조에 앉아 실험을 하던 사람은 새로 전학을 온 동양인인 이세라뿐이었다.
"유라, 혹시 어떻게 된 건지 아니?"
"예, 선생님. 신디가 부주의하게 고개를 돌릴 때 머리카락이 알코올 램프에 닿았습니다."
"그, 그래?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구나."
이세라의 설명을 들은 신디도 얼굴이 핼쑥해졌다.
알고 보니 자신의 잘못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뒤로 고개를 돌렸다고 머리카락이 알코올 램프에 닿은 것은 이상했다.
'알코올 램프가 저렇게 가까이 있었나?'
신디가 울먹거리며 의아해할 때 해롤드가 말했다.
"이만해서 다행이다. 넌 지금 바로 양호실로 가서 어디 다친 데가 없는지 살펴봐라."
"예, 선생님."
"선생님, 제가 따라갈게요."
라일라가 손을 들었다.
"그렇게 해."
해롤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자. 모두들 하교하거라."
"예, 선생님."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망연자실한 과학 교사 해롤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아이들은 조금 전 일어난 일을 화제로 삼으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릴리, 오늘은 먼저 집으로 갈래? 난 다른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응? 제니 무슨 일이니? 같이 가줄 수 있는데."
"아냐, 혼자 할게. 혼자 해야 하는 일이야."
제니의 말에 릴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제니가 벌써 엄마 품을 떠나려고 하다니 이 엄마는 기쁘면서도 슬프구나."
릴리가 양손을 가슴에 모으고는 눈을 반짝거리며 엄마 흉내를 냈다.
"어휴, 그런 거 아니야. 진짜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래."
"흐흥, 좋아. 그 거짓말 믿어주지."
릴리는 웃으며 유라의 어깨를 한 대 치고는 학교 건물을 빠져나갔다.
제니, 아니 유라는 그런 릴리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아 나섰다.
'내가… 내가 멈춰야 해.'
유라의 두 눈이 결연한 빛을 띠었다.
"흐흑흐흑."
반쯤 타버린 머리카락을 거울로 보며 신디는 울먹거리고 있었다.
이미 한바탕 울음을 터트린 이후였지만 여전히 진정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런 신디를 라일라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위로해주고 있었다.
"괜찮아, 신디. 머리카락은 금세 자랄 거야. 안 다친 것만 해도 어디야."
라일라의 위로에 차츰 신디도 울음을 멈춰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해. 분명히 고개를 돌려도 머리카락이 닿을 거리에는 램프가 없었는데."
"그래, 그래. 신디. 진정해."
라일라는 한편으로 신디를 위로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라일라의 머릿속으로 함께 실험을 하던 동양인인 이세라가 떠올랐다.
'이름이 유라? 설마 그 아이가?'
하지만 라일라는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짓을 일부러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자신들은 이제 겨우 11살이었다.
아무리 못된 아이들도 머리에 불을 붙이는 그런 엄청난 일은 하지는 않는다.
까딱 잘못하면 생명이 위험해지지 않는가?
게다가 유라는 자신들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아이였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라일라가 한참 신디를 위로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가 났다.
라일라는 고개를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문은 닫혀 있었다.
만일 누군가가 열었다면 벌써 들어왔다는 뜻이다.
'보건 선생님이신가?'
조금 전 보건 선생님은 신디의 상태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교장실로 갔다.
라일라가 신디를 다시 위로하고 있을 때였다.
약품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이세요?"
"……."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