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56화
156화
라일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라일라가 일어나 보건 선생님을 찾아보려고 할 때였다.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문이 활짝 열렸다.
"헉헉, 얘들아. 괜찮니?"
"제니?"
라일라는 문을 열고 들어온 이유라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체 왜 갑자기 제니가 나타난 걸까?
"너희들 빨리 나와."
"응? 무슨 말이야?"
제니가 갑자기 보건실로 난입하더니 두 사람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난 것인지 두 사람을 끌고 보건실 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보건실 문이 닫혔다.
"……."
보건실 칸막이 뒤로 마스크를 쓴 이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에는 마취제가 묻은 수건과 가위가 들려 있었다.
"칫!"
세라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헉헉, 너 대체?"
라일라는 자신들을 끌고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온 유라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이유라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자신도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공포감에 짓눌리려 할 때 나타난 것이 유라였다.
솔직히 라일라는 유라의 등장에 놀랐지만 동시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자신이 주도해서 괴롭혔던 아이지만 라일라는 그래서 더 잘 알고 있었다.
유라가 얼마나 착하고 순수한 아이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라는 믿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 안심했던 것이다.
사실 유라를 향한 라일라의 마음은 매우 복잡한 것이었다.
단순히 미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사실 가장 사귀고 싶은 친구가 유라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유라는 종종 자신의 어두움과 못난 면을 거울처럼 비추었다.
그래서 더 괴롭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니의 등장은 라일라를 안심시켜주었다.
그런데 돌연 자신들을 끌고 건물 밖으로 나온 것이다.
라일라는 숨을 헐떡거리며 물었다.
"너, 혹시 뭔가 알고 있는 거니?"
"헉헉, 그건 아니야. 하지만 왠지 이래야만 할 것 같았어."
"뭐? 그게 뭐야?"
라일라는 유라의 황당한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신디 역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유라 역시 정확한 답변을 해줄 수가 없었다.
이세라를 찾아다니다가 보건실에서 두 사람을 보는 순간 돌발적으로 행동한 것이었다.
"설명하기는 어려워."
"……."
"하지만 너희들을 보건실에서 보는 순간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
유라의 말에 라일라와 신디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보건실에 있을 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너희들 보건실로 돌아갈 거니?"
유라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그러자 둘 다 화들짝 놀랐다.
"아, 아무튼 알았어. 이유 같은 건 됐으니까."
라일라와 신디는 이제 와서 다시 보건실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왠지 자신들이 큰 위기에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유라에게 인사를 하는지 마는지 허둥대며 학교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두 사람을 보며 유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등 뒤에서 여자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를 모르겠네?"
이세라였다.
유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세라를 바라보았다.
천사처럼 예쁜 아이.
이세라가 그곳에 서서 자신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 천지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생물을 바라보는 얼굴 표정이었다.
"세… 유라야. 헤헤."
"흥!"
유라가 헤헤거리며 웃자 이세라는 다시 인상을 썼다.
이세라가 다시 몸을 돌려서 걸음을 떼자 유라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허리를 안았다.
"떨어져!"
"헤헤."
딱―하는 소리와 함께 유라가 이마를 매만졌다.
"아야!"
"흥! 모처럼 내가 구해줬는데 대체 왜 그런 거야."
유라는 세라의 말에 볼을 복어처럼 부풀렸다.
"역시 네가 그런 거구나."
"뭐야?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
"그게… 어렴풋이."
"흥!"
이세라는 차가운 눈으로 이유라를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세… 아니 유라야."
유라가 쪼르르 다가가 물었다.
"뭐야?"
"대체 왜 그런 거니?"
"몰라서 묻는 거야?"
"…혹시 알고 있었니?"
딱―하는 소리가 났다.
"아야야."
유라는 다시 이마를 잡고는 아픈 표정을 지었다.
"이 바보야. 대체 왜 당하고만 있었던 거야."
"아야, 역시 알고 있었구나."
이마를 부여잡은 유라가 슬픈 눈으로 세라를 바라보았다.
"난 괜찮으니까. 앞으로는 그러지마."
유라의 말에 세라가 다시 묘한 표정으로 유라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나 때문에… 세라 네가 망가지는 건 싫어."
"……!"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이세라는 두 눈을 몇 번이나 끔벅거렸다.
"우린 친자매나 마찬가지잖아."
"……."
이세라는 유라의 말에 약간 충격을 받았다.
유라가 한 말은 사실 이세라가 그녀에게 해 준 말이었다.
그녀에게서 십자가 목걸이를 뺏기 위해서.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는거야?"
"물론이지. 헤헤."
"흥!"
이세라는 헤헤거리며 웃는 이유라의 볼을 손으로 잡았다.
"아―야!"
'역시 이상한 애야. 마치… 그래 그 아저씨 같아.'
볼을 잡은 이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아, 우섰다(웃었다). 헤헤."
웅얼거리며 웃었다고 말하는 유라의 말에 이세라는 재빨리 볼을 놓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봐."
"…세… 아니 유라."
"이젠 안 그럴 테니까. 안심하고 가도 돼."
세라의 말에 유라는 그제야 안도하는 한편, 여전히 자신을 밀어내는 모습에 아쉬웠다.
몸을 돌려 발을 떼려는 유라를 힐끗 바라보며 이세라는 무거운 입술을 뗐다.
"안 물어보니?"
"응? 뭘?"
유라의 말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세라가 뭔가 결심한 듯 물었다.
"십자가 목걸이 말이야. 소중한 거라며?"
"아? 그거?"
유라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건 세라… 아니 유라 네 거야."
"응?"
"우린 자매 같은 사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내가 빌려준 거니까. 앞으로도 소중히 간직해줘."
"……."
유라의 말에 이세라는 정말 놀란 표정으로 유라를 바라보았다.
"……. 유라, 그……."
"응?"
유라는 미국에서 재회한 후 한 번도 불러주지 않았던 자신의 본명까지 말하는 세라를 의아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만큼 세라는 당황하고 있었다.
뭔가 말하려던 이세라는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물었다.
"넌, 지금 행복하니?"
"응? 응! 난 지금 정말 행복해."
이유라의 얼굴에 빙긋이 웃음꽃이 피었다.
이세라는 그 표정을 보며 마음이 녹는 느낌이었다.
'맞아, 이 느낌. 그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아.'
유라의 천진한 미소는 단단히 싸맨 마음의 벽을 단번에 무장 해제시켰다.
알 수 없는 기묘한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느껴졌다.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럴게. 소중히 여길게."
그런 이세라를 유라는 빙긋이 웃으며 바라보았다.
"도련님. 여기 있습니다."
백발의 노집사가 신상현의 앞에 여러 장의 사진을 건네었다.
신상현은 책상 앞에 건네받은 사진을 쭉 펼쳤다.
한동안 신상현은 싱글벙글 웃으며 사진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때의 표정과 흡사했다.
"그런데 여기에 동양인이 한 명 더 있군."
신상현은 백인 천지인 곳에 이세라와 함께 찍힌 이유라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예, 알아보니. 입양아라고 합니다."
"그래? 서로 친한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합니다."
노집사가 애매하게 말했다.
신상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린 이유라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흐흐, 도망 가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신상현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얼굴은 여전히 어렸지만 말하는 모양이나 말투는 훨씬 나이든 어른의 그것이다.
그 기묘한 부조화는 백발의 노집사로 하여금 항상 두려움과 경이를 품게 했다.
"도련님, 이 아가씨는 왜 쫓으시는 건가요?"
백발의 노집사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상현의 지시로 사람을 시켜 미국까지 사진 속 여자아이의 뒤를 쫓았다.
지시에 따라 마침내 찾아낸 사람은 아직 11살에 불과한 어린 여자아이였다.
멀리서 망원렌즈로 찍은 여자아이는 예쁘기는 하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이였다.
왜 신상현이 이 여자아이에게 집착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아범."
"예, 도련님."
"이 아이는 말이야. 내 미래의 약혼자야."
"……?"
신상현의 말에 백발의 노집사는 깜짝 놀랐다.
"이…이 아이는 TG그룹의……."
"맞아, 상속자지."
노집사는 이 여자아이가 신상현이 그린 원대한 그림의 한 조각이라는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신상현이 보여주는 그림은 정말로 크고 원대한 것이었다.
만일 그가 그린 그림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대한민국은 신상현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신상현은 제국을 세우고 있었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자신만의 대제국을.
일주일 후.
클로와가 드디어 퇴원을 했다.
여전히 당시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걸 문제 삼는 사람은 없었다.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온 클로와는 다시 만난 라일라와 신디를 끌어안고 울었다.
"얘들아, 정말 보고 싶었어."
"어휴, 클로와 왜 이러니? 우리도 자주 면회를 갔잖아."
라일라가 클로와에게 안긴 채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전처럼 학교에서 만나고 싶었다고."
클로와가 울먹이며 말했다.
"누가 들으면 몇 달은 못 만난 줄 알겠다."
머리를 짧게 자른 신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 신디를 바라보자 클로와는 울컥하는 마음에 끌어안았다.
"신디."
"어휴, 이 울보."
복도 한가운데서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옆을 이세라가 지나갔다.
"왜 그래?"
라일라가 클로와에게 물었다.
"어, 모, 모르겠어. 갑자기 한기가 들어."
"너도 그래? 나도 갑자기 얼음장처럼 추워지는데 왜 이렇지?"
신디가 말했다.
"넌 아무렇지도 않니?"
클로와가 라일라에게 물었다.
"그…그게? 사실은 난 좀 뭔가 기분이 이상했어."
"기분이 이상하다니?"
"뭔가가 공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가 갑자기 사라졌어."
"그, 그래?"
세 사람은 모두 겁을 집어먹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 것이다.
"우, 우리 이제 누구 괴롭히는 거 하지 말자."
신디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클로와가 제일 먼저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아무래도……."
"저주?"
라일라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거야."
라일라도 아이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이제는 안 그러는 거지?"
클로와가 라일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괴롭힘은 라일라가 먼저 선동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알, 알았어. 이제 우린 괴롭힘에서 손 떼는 거야."
라일라의 말에 두 사람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얘들아, 이제 들어가야지?"
지나가던 생물 선생님이 세 사람에게 말했다.
"예, 선생님."
라일라를 비롯해서 모두 교실로 들어가자 복도 너머에서 이세라가 나타났다.
숨어서 세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던 것이다.
'흐흥, 당분간은 안심해도 되겠는데?'
이세라는 피식 웃으며 목에 걸어 놓은 십자가 목걸이를 매만졌다.
* * *
97년 11월 14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대통령님. 이젠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습니다."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인 임경렬의 말에 박영삼 대통령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임경렬은 외환위기 사태의 해결을 위해 급히 임명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다른 방법은 없다고 하니 대통령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설마 자신의 치세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국가 부도라니?
해마다 기록적인 경제 성장률을 자랑하던 대한민국이 아닌가?
단군 이래 가장 잘산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국민들의 자부심에 똥칠을 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 자부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대로 간다면 수많은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도산당할 위험에 처해있었다.
"알겠어요. 그 길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요."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임경렬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대통령에게 인사를 한 후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대통령 집무실에는 긴 침묵이 돌았다.
이제 대한민국은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박영삼 대통령은 긴 한숨을 쉬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존 회장. 나 대통령이요."
―예, 대통령님.
태평양 너머 멀리 미국에 있는 전화기 너머로 젊고 강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야흐로 국가부도 사태라는 미증유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강혁의 강직한 목소리를 듣자 박대통령은 뭔가 모를 희망을 가져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