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57화
157화
강혁은 박 대통령의 전화를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국가부도 사태라는 미증유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고, 박 대통령이 택할 길을 정해져 있었다.
대한민국은 결국 I.M.F은행에게 돈을 빌리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박 대통령에게 한 번은 전화가 걸려 올 것이라고 믿었다.
―예, 대통령님 말씀하시지요.
"결국 존 회장 말처럼 되었어요."
―죄송합니다. 대통령님.
"하하, 그게 어디 존 회장 때문이요? 나 내가 부덕한 탓이지."
―아닙니다. 대통령님은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허허. 그래도 알아주는 이가 하나는 있어서 다행이구려."
―아닙니다. 대통령님.
박 대통령은 강혁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이제 대한민국의 경제는 존 회장의 손에 달렸소."
―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다시 살려보겠습니다.
"존 회장만 믿어요."
―예, 대통령님.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전에 부탁한 대로 태우그룹 건은 움직이지 않겠소."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전화를 끊은 강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미 몇 달 전부터 강혁은 박 대통령에게 외환위기로 인해 닥칠 미래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강혁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어김없이 다가왔다.
이미 여러 기업들이 도산으로 넘어갔다.
11월 7일에는 주가가 사상 최대로 폭락했다.
4일 전에는 달러당 환율이 1,000원을 넘어갔다.
환율 사상 처음으로 달러당 환율이 1,000원을 넘어간 날이다.
박 대통령은 그제야 환율 위기를 제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박 대통령은 강혁이 한 말들이 모두 사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만일 그 말이 맞다면 정말 큰일이었다.
강혁은 박 대통령에게 환율 위기로 인해 벌어질 일들을 상당히 과장해서 말해준 상태였다.
사실 정권이 교체되면서 2년 만에 빚을 갚지 않았다면 실제로 벌어졌을 일들이었다.
아무튼 박 대통령은 강혁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마음속 깊이 후회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강혁의 말을 전적으로 따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한다면 기적적으로 2년 만에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강혁은 박 대통령에게 기업 순위 1―3위를 오가는 태우그룹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말라고 부탁했다.
태우그룹은 어떻게든 도산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한 것이다.
대신 자신이 어떻게든 회사를 인수해서 정상화시키겠다고 한 것이다.
또한 I.M.F총재를 구슬려 대한민국 정부와의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대신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할 것을 부탁했다.
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죽을 때까지 무덤으로 가져가겠다고 약속했다.
결론적으로 강혁은 몇 년 후에나 무너지게 될 태우그룹을 조기에 인수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강혁의 계획에 태우그룹의 인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태우그룹은 자동차부터 반도체까지 제조업이라면 없는 것이 없었다.
여기에 건설, 호텔 등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어발 기업이었다.
"이제 한국 내에서도 내 기반이 확실하게 다져지겠군."
전화를 끊은 강혁은 기대어린 표정을 지었다.
회귀 전 도산했던 2000년까지 대한민국의 4대 그룹의 일원으로 군림했던 대기업이었다.
외환위기에 닥쳐 몸조심하기는커녕 쌍용이라는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서 몸을 불렸다.
오일쇼크 때의 위기를 기회 삼아 도박을 한 것이지만 사실 큰 착오였다.
결국 2000년 태우그룹은 한국 경제에 큰 상처를 입히고 도산했다.
강혁은 그렇게 되기 전에 그룹 인수를 시도할 생각이었다.
한국은행이 돕지 않는다면 태우는 이번 파고를 넘지 못하고 몇 년 일찍 도산하게 될 것이다.
강혁은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 부지런히 밑작업에 들어갔다.
* * *
"음, 당신이 윤정우로군."
"예, 회장님. 영광입니다."
30대 초반의 윤정우는 어린 신상현 앞에 바싹 몸을 엎드렸다.
아직 14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엄청난 총기와 미래를 보는 예지력이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윤정우는 석 달 전, 자신 앞으로 누군가가 건넨 쪽지를 보고 엄청나게 놀랐다.
그 쪽지에는 외환위기와 그로 인한 국가부도 사태를 정확히 예언하고 있었다.
당시 윤정우는 고려증권에서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다만 예민한 감각에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다.
하지만 확실한 뭔가가 없었던 윤정우는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갔다.
그런 그에게 건네진 쪽지는 해머로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윤정우는 한동안 자신에게 쪽지를 보내준 사람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결국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윤정우는 더 이상 쪽지의 주인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그 쪽지에 쓰인 것이 사실일지 나름대로 파고들었다.
결국 윤정우는 스스로 앞으로 다가올 외환위기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격적으로 회사를 나왔다.
동료들은 모두들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하루아침에 그만두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과 함께 회사를 세웠다.
미래로 금융 회사.
처음에는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자신이 거래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위기에 대처할 방법을 설명하는 투자설명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윤정우를 믿어주었다.
회사는 시작하자마자 좌초하는 듯했다.
그때 상어턱을 가진 사내가 그를 찾아왔다.
쥐눈과 상어턱, 어딘지 모르게 피 냄새가 나는 그를 윤정우는 본능적으로 두려워했다.
다행히 그와 함께 온 안경 낀 사내가 윤정우를 상대했다.
김 실장이라고 불러 달라던 그는 회사에 엄청난 금액의 돈을 투자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김 실장을 보낸 이는 바로 자신에게 쪽지를 건네 준 사람이었다.
윤정우는 신상현을 만나기 전 몇 차례나 크게 놀랐다.
처음에는 쪽지를 건넨 사람이 이제 겨우 중학생이 된 애송이란 사실에 놀랐다.
두 번째는 그 애송이를 자신은 명함도 못 내미는 엄청난 권력자들이 따른다는 사실에 놀랐다.
세 번째는 오늘 그를 대면하고 놀랐다.
'이…이분이 정년 14살이 맞는 거야?'
대화를 나눠보니 상당한 경제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결코 14살짜리가 아니다.
윤정우는 왜 그 권력자들이 눈앞의 애송이를 신처럼 여기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돌아가도록 해요. 그리고 알겠지만 오늘의 만남은 절대 비밀입니다."
"예, 미륵불님."
처음 회장이라고 불렀던 명칭은 만남이 끝날 때쯤엔 미륵불로 바뀌어 있었다.
윤정우의 눈은 경외와 존경,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면담이 끝나고 윤정우가 돌아가자 백발 노집사가 들어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도련님."
"음, 맛있군."
신상현은 노집사가 건네준 커피를 마시면 고개를 끄덕였다.
기묘한 모습이었다.
이제 겨우 중학생인 아이가 커피를 마시며 백발의 노인에게 하대를 한다.
"저런 애송이를 굳이 도련님이 만나주실 이유가 있습니까?"
노집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까지 신상현을 직접 만나서 그의 수하가 된 자들은 모두 큰 권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흐흐흐, 지금은 애송이지만 앞으로 용이 될 이무기야."
"용이 될 이무기라고요?"
"그래. 이 외환위기를 바탕으로 큰 기업을 일으킬 인물이야."
"흠. 그런 젊은이가?"
노집사는 신상현의 말에 놀라고 있었다.
사실 윤정우는 강혁과 신상현의 회귀 전 역사에서 신화를 남긴 인물이었다.
국가부도 사태를 정확히 예견하고, 남들과 반대로 투자하여 큰돈을 벌어들인 인물이다.
그가 창업한 미래로 금융그룹은 당시 위기를 바탕으로 성장한 회사였다.
회귀 전 국가부도의 날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한 배우의 모델이 된 인물이기도 하다.
신상현이 삼강그룹의 후계자가 되었을 때 그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그때 당시의 무용담을 들은 것이 이번에 그를 자신의 밑에 두게 만들 수단이 되었다.
실제 실물 경제에 대해서 신상현은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윤정우 같은 사람은 반드시 거둬야 할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건 그렇고. 아직도 못 찾은 거야? 할아범?"
"그게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힘들 것 같더군요."
"흠? 그래?"
"그렇습니다. 도련님."
"……?"
"아무래도 국가 권력 기관에서 하는 일이라 조사원들도 더 파고 들기 힘들어 보이더군요."
"흠, 그렇단 말이지."
신상현은 미국으로 연수를 간 강혁의 행방을 조사하도록 시켰다.
문제는 연수원에 들어간 것까지만 확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로는 어떤 소식도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도대체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F.B.I연수원 내부로 사람들을 보내거나, 출입하는 사람에게 접근해 보았지만 정보가 없었다.
나중에는 진짜 연수원에 들어간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다만 정식으로 연수원에 등록된 명단과 사진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입소한 것은 분명했다.
"이렇게 행방을 알 수 없는 경우에는 특수 임무를 맡았을 거라는 정도만 알 수 있었습니다."
노집사가 말했다.
신상현은 노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지만 할 수 없지."
"그런데 도련님. 왜 일개 형사에게 그렇게 신경 쓰시는지 모르겠군요?"
노집사의 말에 신상현이 크게 웃었다.
"크하하핫."
"……?"
"아, 미안해. 할아범."
"아닙니다. 도련님. 필시 곡절이 있겠지요."
"아아, 물론이야. 있지, 있고 말고. 하지만 노집사가 상상하는 건 절대 아닐 거야."
"……?"
신상현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왜 신경 쓰냐고?'
신상현은 자신의 심장이 위치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싸늘한 금속성 물체가 파고드는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할아범, 그거 알아? 심장에 칼이 꽂히는 느낌말이야. 그거 X같다고.'
신상현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 영웅을 가지고 노는 느낌말이야. 크하핫.'
신상현의 입가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강혁 형사님, 지금은 놓아 드리지요.
신상현은 음습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올 테니 말입니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할까? 내가 드린 선물은 잘 잡아드셨는데 말이죠.'
신상현은 자신이 풀어 놓은 연쇄살인범들을 떠올렸다.
게다가 그들이 다가 아니었다.
신상현은 전국의 숨은 범죄자들과 사이코패스 살인마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을 조정해서 자신이 원하는 자들은 단순 강도 살인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누군가가 조정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저 자신들이 원해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생각할 것이다.
신상현은 그저 그들에게 적당한 계기와 환경만 만들어주면 되었다.
그러면 그들은 자신들의 살인본능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갑자기 신상현이 껄껄 웃었다.
그의 손에 점점 많은 권력들이 쥐어지고 있었다.
이제 그의 꿈이 이루어질 날도 그리 멀지만은 않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