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58화
158화
1998년 대통령 집무실.
새로 정권을 인수받게 된 김중현 대통령은 전임 박 대통령과 비밀리에 회동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민주화 운동 당시 함께 했던 옛 동지였다.
지금은 서로 다른 정치 진영에 몸을 담게 되었지만 서로 옛정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새 대통령에게 큰 짐을 지워주게 된 박 대통령으로서는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서로 덕담을 주고받은 후 중요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I.M.F와 한국 정부의 협상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해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김중현 대통령은 전임 박 대통령의 말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믿기 힘드시겠죠. 하지만 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박 대통령의 말에 잠시 대통령 집무실 안에는 긴 침묵이 흘렀다.
정적을 깬 것은 김중현 대통령이었다.
"이번 I.M.F와의 협상에서 갑자기 미국 측이 협상 태도를 바꾼 것이 의아했는데……."
"그것도 역시 존 회장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허허, I.M.F 총재가 그 친구 말을 듣는다는 말입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김중현 대통령의 반문에 박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측에서 확실하게 확인한 내용이니 믿어도 됩니다. 대통령님."
"하아, 하늘이 우리 민족을 버리지 않으셨군요. 그런 친구가 존재하다니."
김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 정부와 I.M.F 총재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인이 있다니 얼마나 든든한 이야기인가?
만일 박 대통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 정부로서는 천군만마와도 같았다.
고압적이며 강압적이던 I.M.F협상단은 협상 초기에 마치 식민지 점령군처럼 행세했다.
한국 정부와 한국은행을 향해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들을 제시했었던 것이다.
그 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한국은 미국의 경제 식민지가 될 판이었다.
그렇게 살얼음판을 걷는 듯하던 협상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급진전했다.
I.M.F협상단이 갑자기 전향적으로 한국 정부의 요구들을 들어 준 것이다.
그에 대한 반대급부도 크게 요구하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 뼈를 깎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한다는 것과 부채비율 조정에 대해서 합의했다.
나름대로 선방한 협상이 된 것이다.
사실 이렇게 협상이 진행된 것은 강혁의 입김이 컸다.
다른 건 몰라도 비정규직을 대대적으로 양산해서 취업 지옥이 되는 미래는 막아야 했다.
"그런데 대통령님이 아셔야 하는 건 이게 다가 아닙니다."
"……?"
"아니,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박 대통령의 말에 김중현 대통령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더 중요한 내용이라고요?"
"그렇지요. 그리고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건 반드시 대통령 본인과 최측근만 아셔야 합니다."
"허허, 대체 뭔데 이렇게 뜸을 드리시는 겁니까? 어서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십시오."
김중현 대통령의 타박에 박 대통령이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박 대통령의 말이 이어질수록 김중현 대통령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해갔다.
처음에는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설명이 진행될수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존 회장이 이미 국가부도 사태를 예견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이 존 회장이 예언자라고 했다고요."
"그렇습니다."
"허허, 그것 참. 20세기가 끝나가는 마당에 예언자라?"
믿을 수도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는 그런 표정이었다.
박 대통령 역시 그런 그의 심정을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전임자로서 말씀드리면……."
"……."
"그냥 믿으세요. 믿으셔야 합니다."
박 대통령의 얼굴에는 회안이 짙게 깔려 있었다.
"만일 존 회장 그 친구의 말을 믿었다면 이런 사태까지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으음!"
박 대통령의 말에 김중현 대통령의 얼굴 표정이 서너 차례 변했다.
강혁이 국가 부도 위기를 이미 여러 달 전에 예언했다는 박 대통령의 말.
그리고 미국 대통령이 전해주었다는 예언자라는 말.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과장된 것일까?
앞으로는 자신이 직접 겪으면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대통령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김현중 대통령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전 국민이 지혜를 모아야만 했다.
이런 마당에 강혁 같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든 힘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친구가 지금은 미국에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곧 한미정상회담을 하시게 될 텐데, 그때 만나 보시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현중 대통령은 전임자를 바깥까지 배웅해주었다.
청와대를 떠나는 박 대통령의 등을 바라보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자신이 대한민국호의 선장이 되었다.
자신도 퇴임하게 되는 때가 어김없이 돌아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지금 박 대통령과는 달리 부강한 대한민국을 다음 대통령에게 반드시 물려주고 싶었다.
김 대통령은 고개를 돌려 청와대 본관 건물을 돌아보았다.
햇살이 처마에 부딪혀 사방으로 흩어졌다.
김 대통령은 새로운 희망과 무거운 책임감을 안고 본관으로 발걸음을 뗐다.
* * *
"흠,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스파이더맨 판권을 돌려받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골드브릿지 사원인 빌리 크루즈가 팀장인 하워드에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판권을 소유하고 있는 소니 측에서 거액의 돈을 불렀던 것이다.
"회장님의 특별 지시야.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어서 보고해."
팀장의 말에 빌리는 어깨를 으쓱한 후, 전화를 걸었다.
"그래? 알았어. 회장님이 기뻐하시겠군."
골드브릿지 사장인 톰 밀러는 전화를 받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강혁이 스파이더맨 판권을 되사들이는데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원래 마블의 인기 캐릭터인 스파이더맨은 마블이 재정위기에 빠지면서 소니에 팔려나갔다.
그런데 이번에 강혁의 지시로 다시 사들인 것이다.
처음 팔 때보다 훨씬 고가에 다시 사들였지만 강혁은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톰 밀러는 강혁에게 전화를 걸어 판권을 되사들인 것을 보고했다.
―뭐라고? 톰? 인수에 성공했다고? 역시 자네야. 잘했어. 마블 애들한테 보냈다가는 모두 망쳤을 거야.
강혁은 쾌재를 불렀다.
소니는 판권을 사놓기만 하고 영화화 계획은 계속 미뤄지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제대로 된 협상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골드브릿지 사원들에게 일을 진행시켰는데 훌륭히 성공시킨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거래의 이면에는 강혁의 강력한 인맥이 한몫했다.
만일 그들이 움직이지 않았다면 억만금을 줘도 판권을 팔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스파이더맨 영화를 만들겠다는 소니의 의지는 강했다.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군.'
강혁은 곧 전화를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강혁과 연을 맺게 된 유대계 인사들이었다.
솔라스를 필두로 금융계와 영화계에 걸쳐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강혁을 도왔다.
이런 대내외적인 입김이 있었기에 비싼 값을 치렀지만 판권을 되살 수 있었던 것이다.
―존 회장, 오랜 만이군.
"솔라스씨, 덕분에 판권을 되살 수 있었습니다."
―아? 그 이야긴가? 내가 제럴드에게 잘 말해두긴 했지.
제럴드는 소니 영화사의 실세 중 한 명이다.
그는 솔라스에게 큰돈을 맡긴 투자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네 진짜 영화 사업에 뛰어들 생각인가?
솔라스의 말에 강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영화사를 인수하든 아니면 새로 하나 세우든 할 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왜요? 뭐 조언해주실 거라도 있나요?"
강혁은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한번 물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어쩌면 내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
―자네 유니버셜 영화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나?
유니버셜 영화사는 미국의 6대 영화사 중의 하나이다.
강혁은 영화사를 인수할 생각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알고 있었다.
"씨그램이죠."
씨그램은 캐나다의 주류 회사로 음반판매도 겸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리하게 음반회사와 영화사를 사들여 경영 악화에 빠진 모양이야.
"……!"
강혁은 솔라스의 말에 귀가 솔깃했다.
"자세히 좀 말씀해주세요."
―거기 경영자가 이제 20대인 아직 젊은 재벌 3세인데 말이지.
"저도 20대입니다만?"
―카하하핫, 그랬지! 참! 하지만 그 친구는 존 회장과는 전혀 다른 부류야―
솔라스는 한참을 웃고 난 후 말을 이었다.
―자네하고 비교한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지. 회사를 거의 말아먹었으니 말이야.
솔라스의 이야기는 길었지만 요지는 간단했다.
새로 회장이 된 젊은 재벌3세가 겉멋으로 회사를 운영하면서 재정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솔라스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원래 씨그램은 주류 회사가 본업이다.
그런데 회사의 잘나가는 먹거리인 주류 상품의 특허권을 팔았다는 것이다.
음반회사와 영화사를 사기 위해서!
그런데 그 이유가 영 불손했다.
헐리우드의 잘나가는 영화배우들이나 가수들 사이에서 왕 노릇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를 위해 유니버셜 영화사와 음반회사, 미국 최대의 위성방송인 USA위성방송을 인수했다.
폴리그램이란 영화사도 인수했는데 이 회사가 원래 레코드 회사였다.
음반, 방송, 영화사를 함께 겸하고 있는데 세계적인 판매로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 강점이다.
아무튼 무리해서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진출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가 문제였다.
엄청난 자금을 끌어들여 찍은 영화들이 모두 망한 것이다.
원래 영화 사업이 그런 면이 있다.
히트작이 연이어 계속 나올 수도, 연이어 흉작이 나올 수도 있는 판인 것이다.
문제는 출혈이 심할 때 흉작이 연이어 나온 것이 문제였다.
―수억 달러를 들인 영화들이 참패하자 회사가 휘청거린다는 군.
"회사를 팔 의향이 있는 겁니까?"
―이번 주에 긴급 주주총회가 열린다네.
"……!"
―내가 거기 주주 중 한 명이지.
솔라스의 말에 강혁이 미소를 지었다.
알고 보니 솔라스가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혁으로서도 좋은 일이었다.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인 것이다.
강혁으로서는 영화사에 덤으로 음반회사를 인수할 기회였다.
솔라스는 무너져가는 회사 때문에 떨어지는 주가를 회복시킬 기회였다.
"저도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강혁의 말에 솔라스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 덕분에 회사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기꺼이 인수해드리지요."
―너무 헐값에 꿀꺽 삼키지만 말았으면 좋겠군.
"그거야 협상하기 나름이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내가 자리는 마련해주지.
"부탁드립니다."
강혁은 전화를 끊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니버셜 영화사를 인수한다면 본격적으로 마블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연이어서 히트작을 배출할 자신이 있었다.
그 첫 포문은 스파이더맨이 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영화가 히트하고, 어떤 감독이 우수한지 알고 있는 강혁으로서는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강혁이 굳이 영화사를 인수하려고 노력한 이유이기도 했다.
'앞으로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될 거야.'
강혁의 표정이 한순간 굳어졌다.
앞으로 I.M.F사태로 수많은 사람들이 실직하고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강혁은 어떻게든 그들을 돕고 싶었다.
이를 위해 한국에 프랜차이즈 회사들을 세운 이유이기도 했다.
강혁은 회사를 실직하고 자영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초기 자금들 도울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여야 했다.
영화 사업은 강혁에게 황금알을 낳아 주는 수많은 거위 중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