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59화
159화
#42장 파고를 헤치며
"진주 아빠, 여기 도시락."
"어, 고마워."
이병수는 얼마 전만 해도 잘나가는 40대 중반의 중견기업 부장이었다.
그런데 그에게도 I.M.F 한파가 불어 닥쳤다.
하루아침에 다니던 회사가 도산한 것이다.
부채 무서운 줄 모르고, 무리하게 사세를 확장하려 했던 것이 문제였다.
당분간은 그래도 모아 놓은 돈이 있어서 당장 굶지는 않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는 형편이라 매일같이 새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아내가 준 도시락을 받아들고 새 직장을 알아보려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딜 가든 I.M.F 한파로 취업이 힘든 시기였다.
사람을 뽑는 곳 자체가 드물었다.
오히려 구조조정이다 뭐다 해서 있던 사람도 줄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겨우 사람을 뽑는다는 공고가 난 곳은 경력자라도 대리급을 우선적으로 뽑았다.
이병수는 중간 관리자였던 사람이라 오히려 취직이 더 어려웠다.
결국 한나절을 허탕 친 이병수는 공원 벤치에 걸터앉아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꺼내 들었다.
이병수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이가 셋 있는데, 큰딸은 취직해서 기자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시집보낼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집안이 이 꼴이 된 것이다.
둘째 아들은 대학을 중퇴하고 군대에 들어갔다.
셋째 아들은 고등학생이었다.
몇 년 후면 대학입시를 치러야 하는데 등록금을 마련해줄 형편이 아니었다.
가장으로서 어떻게든 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이병수의 등을 짓눌렀다.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들과 같은 처지의 남성들이 적지 않았다.
모두들 처량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고 있거나 신문지를 깔고 앉아 멍하니 하늘만 쳐다봤다.
"휴우―"
이병수는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암담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느낌인데 터널이 너무 길었다.
언제가 되어야 햇살을 볼 수 있을 것인가?
무거운 마음으로 도시락을 꽁꽁 싸맨 신문지를 벤치 위에 펼쳤다.
그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하얀 쌀밥 위에 검은 콩으로 하트를 그려놓았다.
이병수는 순간 울컥하고 가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못난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하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니 면목이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눈물이 핑 도는 가운데 반찬통을 꺼내놓고 도시락을 먹을 때였다.
반찬통을 올려놓은 신문지 위에 특이한 문구가 눈에 띄었다.
[…프랜차이즈 신라 치킨… 함께 하실 식구를 모집합니다.
I.M.F로 고생하고 계신 가장들을 위한 특별한 혜택.
2년간 본사에 대한 납입금 면제 및 점포 개업 비용 무이자 대출.]
'납입금 면제? 점포 개업 무이자 대출?'
이병수의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신라 치킨은 자신도 잘 아는 유명한 프랜차이즈 치킨집이었다.
치킨이라면 프라이드치킨 정도밖에 없던 한국의 치킨 시장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곳이었다.
양념과 간장, 그밖에도 다양한 변주를 준 치킨으로 대박을 터뜨렸다.
이병수도 자주 시켜 먹었을 정도로 유명한 치킨이 아닌가?
'이건 어쩌면 하늘이 내게 준 기회다!'
이병수는 신문지 한쪽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오렸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전화박스로 달려갔다.
통화 중을 알리는 전화기 소리가 한동안 계속 울리다가 마침내 연결이 되었다.
이병수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구나 하는 것을 직감했다.
―예, 신라 치킨 본사 상담원 김미경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예. 사실은 신문에 난 광고를 보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김병수는 상담원에게 광고에 적혀 있던 내용에 대해 질문했다.
상담원의 친절한 답변을 다 듣고 난 이병수는 다시 한 번 질문했다.
"그럼… 정말로 2년간 본사에 대한 납입금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사장님. 앞으로 2년간은 납입금을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상담원의 말에 이병수는 침을 삼켰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해볼 만한 승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 점포를 얻는데 드는 비용도 무이자가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사장님. 추가비용도 타당성만 있으면 연이율 0.3% 이내로 대출 가능합니다."
말이 0.3%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 정도면 공짜나 다름이 없었다.
이병수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신청 서류에 뭐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예, 사장님. 신청서와 본인을 확인할 수 있는……."
서류에 대한 안내가 길게 이어졌다.
"…제출하시면 됩니다."
"그 다음은요."
"서류 심사에서 통과하시면 댁으로 직접 전화 연락 및 우편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그런데 서류가 통과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달간 본사에서 연수를 받고, 그 후로도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병수는 오히려 좋게 생각이 되었다.
이름만 빌려주고 끝이 아니라, 맛과 영업 전략 등에 대해 지속적인 관리를 해준다는 뜻이다.
아직 프랜차이즈 시장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전이라 이병수는 듣는 것마다 새로웠다.
"그런데 이런 말하기 내 입장에서 우습지만 이렇게 혜택을 많이 줘도 본사는 괜찮은 건가요?"
이병수는 청춘을 바쳤던 회사가 도산을 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
자신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조건이었지만 괜스레 불안감이 들었다.
"호호, 그런 질문하시는 분들이 없지는 않아요. 사장님."
"그, 그래요?"
"아무래도 이런 시기이니까요. 더 불안해하시는 것 같아요."
"그, 그렇겠죠."
"그런데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회사가 사실 자금력이 알아주는 곳이거든요."
"그래요?"
"예, 나중에 저희 식구가 되시면 더 잘 알게 되시겠지만 저희 신라 치킨은……."
상담원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자 그제야 이병수는 나름 안심이 되었다.
신라 치킨이 생각 외로 작은 회사가 아니라 모기업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든든했다.
'골든 타워라?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네?'
미국에 본사를 둔 금융회사라는 말에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지금 한국에서는 가장 귀한 것이 달러였다.
미국계 회사가 본사라면 달러가 부족할 이유는 없을 것이 아닌가?
이병수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의구심도 접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이병수는 아내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보, 진짜 괜찮을까?"
"음, 일단 알아본 바로는 괜찮아 보여. 게다가 솔직히 이 나이에 취업한다는 건……."
남편의 얼굴에 긴 그늘이 보였다.
이병수의 아내는 그런 그의 모습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여보. 당신 맘도 모르고… 그래, 까짓 우리 한번 해봅시다."
이병수의 아내가 결의를 세운 얼굴로 이병수를 바라보았다.
"여보."
이병수는 아내의 손을 슬그머니 잡아 주었다.
"사장님, 저희와 계약을 맺으려는 신청자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신라 치킨 과장 이기찬은 복잡한 표정으로 사장인 백정원에게 업무 보고를 올렸다.
요리 연구가 출신에 풍채도 듬직한 백정원 사장은 이기찬 과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쥐?"
"예, 예상대로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다.
자신들도 이번 일이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장님, 괜찮을까요?"
이기찬 과장이 슬쩍 걱정이 되지는 물었다.
안 그래도 주변에서는 실직이다, 도산이다 해서 난리였다.
그런데 자신은 다행히 회사가 잘 굴러가는 편이라 안심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실직하거나 잘 다니던 회사가 도산할 위험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발표한 회사 경영 방침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2년간 신라 치킨 본사가 납입금을 안 받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새로 신규점포를 계약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이자로 대출을 해주겠다는 계획까지 있었다.
처음에 백정원 사장이 이런 계획을 발표했을 때는 모두가 무모하다고 반대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백정원 사장이 아니라 더 윗선에서 내려온 오더였다.
미국에 있는 본사에서 대대적인 자금을 지원한다는 자금지원책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 사정이었지만 슬그머니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너무 염려 하지마. 이 과장. 우리 회장님이 보통 분이 아니시라고."
백정원의 말에 이 과장이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저기… 저는 말로만 들었는데 우리 회장님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이 과장의 말에 백정원 사장의 표정이 크게 달라졌다.
마치 기회는 이때다 싶은 표정이다.
"우리 존 회장님 말이야? 하하, 진짜 대단한 분이시쥐―"
"듣기로는 사장님도 존 회장님이 직접 우리 회사로 모셨다고."
이 과장의 말에 백정원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과장 말이 맞아."
"……!"
"한참 건설 쪽에서 사업을 말아먹고, 집구석에서 요리 연구를 하고 있을 때 날 찾아 왔지."
"직접 찾아오셨다고요?"
"그게 지금 생각해도 참 신기하단 말이야. 어떻게 날 알고 찾아왔는지?"
백정원은 팔짱을 끼고는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내가 요리 연구를 하고 있다는 건 내 주변 사람들도 잘 모르는 일이었거든."
"그, 그래요?"
"그렇다니깐. 게다가 요리 연구가가 한둘이야? 나 같은 사람이 한둘이냐고?"
"그…그렇죠."
"아무런 명성도 없고, 무명이었던 날 찾아와서는 이 큰 회사를 맡겼으니. 대단한 인물이쥐."
이과장은 백정원의 말을 듣고 혀를 내둘렀다.
사실 처음 듣는 이야기도 아니건만 신기한 건 여전했다.
무명의 요리사를 만나자마자 나름 작지 않은 규모였던 회사의 사장으로 발탁시켰다.
한참 신라 치킨이라는 프랜차이즈가 시장의 큰 화제가 된 상황에서 말이다.
회사의 창업자가 직접 사장자리를 맡긴 것이라 내부에서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다만,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백정원은 사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요리연구소를 완전히 장악했다.
회사의 가장 핵심부서라고 할 수 있었던 곳을 실력으로 장악한 것이다.
그다음은 이기찬도 익히 알고 있는 바였다.
신개념이라고 불릴 만한 치킨들을 연이어 개발해서 시장을 장악했다.
대한민국에서 신라 치킨을 모르면 간첩이란 소리를 듣게 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대체 존 강 회장이란 분은 어떻게 치킨 시장에 파란을 일으킬 백정원 사장을 알아본 걸까?
창업 초기 멤버가 아닌 이기찬 과장은 존 강 회장을 직접 만나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사실 이기찬은 백정원 사장의 큰 팬이었다.
회사 내부에서 백정원 사장을 지지하고 있는 사원이 이기찬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백정원 사장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샘솟듯이 내놓는 사람이었다.
신라 치킨은 사실 시작에 불과했다.
이미 백정원 사장은 새로운 프랜차이즈를 대대적으로 출범시킬 생각이었다.
미국 본사에서도 그런 백정원 사장을 믿고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
이기찬 과장은 회사 내부의 그 누구보다도 백정원 사장의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 과장은 앞으로 백정원이 한국 요식업계의 황제가 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직원들 앞에서 선보였던 수많은 요리들은 시간이 지나면 황금알을 낳을 오리들이었다.
게다가 본사의 자본금도 탄탄했으니 앞으로 회사가 커나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알아본 존 회장님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 거야?'
이기찬 과장은 아직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존 강을 상상 속에서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