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169화 (169/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69화

169화

서울 데일리.

"뭐라고? 회사가 넘어갔다고?"

포니테일에 청바지 차림의 젊은 여기자는 선배의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쉿! 조용히 해."

마른 체구에 넥타이 차림의 남자가 입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사내 복도였다.

홍인걸은 이진주의 5년 선배로 처음 이진주가 입사했을 때 사수였다.

사회부 기자였던 홍인걸은 지금은 예전부터 원했던 정치부로 옮겨 기자생활을 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던 홍인걸은 이진주를 데리고 인적이 드문 계단으로 데려갔다.

"우리 회사도 경영난이 심했나봐. 결국 사주 일가가 회사를 팔기로 했단다."

"그게 사실이에요?"

이진주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이야."

홍인걸의 말에 이진주는 심란해졌다.

그래도 오랫동안 일해 온 신문사였다.

망한 것은 아니지만 사주가 바뀐다는 것은 신문사의 미래가 불투명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그럼 누가 인수하는데요? 그것도 알아요?"

이진주의 말에 홍인걸이 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상당히 큰손이 인수한다는 말이 있어."

"큰손?"

이진주의 반문에 홍인걸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고위층에서는 이번 인수에 적극 찬성하는 입장이래."

"흐흥―"

홍인걸의 말에 이진주는 콧소리를 내며 동그란 안경을 낀 진주같은 큰 눈을 깜빡거렸다.

사실 알고 보면 이진주는 꾸미면 상당히 외모가 괜찮은 여자다.

다만 뛰어난 민완기자를 목표로 하면서 외모를 가꾸는 데 등한시 할 뿐이다.

홍인걸 같은 남자 선배들은 이진주와 오래 지내면서 그런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간혹 회사 행사에서 잘 꾸미고 나타난 이진주를 보고 깜짝 놀란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 데일리 직원들 중에는 은근히 이진주에게 관심이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홍인걸 역시 그중 한 명이다.

다만 은근히 여자로서 마음에 두고 있어서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홍인걸은 이진주를 서울 데일리에 몇 없는 진짜 기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회사에 무슨 일이 있으면 이런저런 정보를 알려주며 챙겨주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야."

"……?"

"윗선에서 살생부를 만들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

홍인걸에 말에 이진주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대충 감이 온 것이다.

"…설마?"

"그 설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

홍인걸은 정치부에서, 이진주는 사회부에서 소위 찍힌 존재들이었다.

다른 기자들은 여러 기관과 기업들을 왕래하면서 소위 떡값들을 챙겨 먹어왔다.

그러면서 기사에 장난질을 해댔지만 두 사람은 단칼에 거절해왔다.

정치부 기자들인 홍인걸의 동료들은 떡값으로 상당한 액수를 챙긴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면서 기사로 뒤가 구린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뒤를 봐준 것이다.

그런 그들 눈에 홍인걸과 이진주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그런 정치인이나 관료, 기업이 결탁해서 저지른 비리를 기사로 써댔다.

윗선에서 몇 번이나 막혔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이런 기회에 회사에서 잘라버리려는 것이다.

"휴, 이 짓도 이제는 그만해야 하는 건가?"

이진주는 한숨을 쉬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나마 최근에 실직한 아버지가 다시 재기한 것이다.

신라 치킨 체인점을 하면서 굶지는 않게 되었다.

다만 지금 여기서 자신이 그만두면 군식구가 하나 늘어나게 되는 것이니 그 점이 미안했다.

'아빠, 미안.'

이진주는 부모님을 생각하자 속이 쓰렸다.

"선배는 괜찮아?"

"괜찮겠냐?"

홍인걸은 혼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면 당장 입에 풀칠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진주는 괜스레 화가 났다.

돈이나 밝히며 기사를 엉망으로 쓴 놈들은 끼리끼리 봐주고 있었다.

그런데 홍인걸 같은 진짜 기자는 실직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러게 적당히 하지."

"훗, 남 말은……."

"나야 뭐, 안 되면 시집이나 가버리지 뭐."

가볍게 말했지만 홍인걸은 잘 알고 있었다.

이진주는 진심으로 이 직업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타협하지 않고 제대로 기사를 쓰려고 노력하는 기자였다.

"살생부에 누구누구 올라가 있는지 알아요?"

"음, 내가 아는 사람은 경제부에 김철 선배, 문화부에 박수진… 정도야."

"그나마 우리 회사에서 양심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총망라했네."

"그렇지."

"흥, 사주가 누군지는 몰라도 껍데기만 남은 회사를 인수하게 생겼구만."

이진주의 말에 홍인걸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살생부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제대로 된 양식 있는 기자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서울 데일리 신문사의 혼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서울 데일리가 지역에서 인정받는 신문사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자르겠다니?

홍인걸은 윗사람들의 썩어빠진 행태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려고 했다.

"그건 그렇고 취재는 어떻게 돼 가고 있어?"

홍인걸이 삼양백화점 건에 대해서 물었다.

그는 이진주가 그동안 남몰래 그 사건에 대해 취재해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대충 80% 정도는 됐어요. 하지만… 뭐랄까 뭔가 큰 조각 하나를 놓친 기분이라……."

"그래?"

이진주의 말에 홍인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이 사건에 대해 이진주가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지금쯤이라면 취재가 마무리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큰 사건이었다고는 해도 삼양백화점 붕괴 사건은 잘 알려진 사건이라 더욱 그렇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니?

뭔가 세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런 문제라도 있다는 말인가?

"뭐, 너무 안달하지는 말고 알지 이럴수록……."

"한발 뒤로 물러나서 전체를 살펴보란 거죠?"

이진주의 말에 홍인걸이 피식 웃었다.

"맞아, 너무 깊이 들어가면 숲이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 특히 미로같이 복잡한 사건이라면……."

홍인걸의 말에 이진주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조금 뒤로 물러나서 숲 전체의 모습을 보려고 노력해야 할 시점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뭔가 보일지도 몰랐다.

사건을 취재하면서 지금까지 뭔가 모르게 찜찜한 이 느낌의 정체를 말이다.

"뭐, 아무튼 고마워요. 선배. 미리 알려줘서."

"근심거리만 안긴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에요. 아무 것도 모르 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아."

"크, 고마우면 쏴―"

"히히, 항상 고마워요. 선배."

홍인걸의 작업에 이진주는 은근슬쩍 웃으며 넘어갔다.

전부터 홍인걸이 자신에게 살짝 마음을 내비친 적이 있기에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이다.

"어휴, 자식 말이나 못 하면… 훗."

"그럼 선배. 또 다음에……."

"그래. 다음에 보자."

이진주가 사라지자 홍인걸은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물었다.

사실 사주가 바뀐다는 건 자신들 같은 월급쟁이에게는 작은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닥칠지 모른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특히나 지금처럼 나라의 경제 사정이 안 좋아서 여기저기서 회사들이 무너질 때는 말이다.

새 오너 역시 경영합리화 한다면서 직원들을 자르려는 판이다.

지금 같은 때는 어떻게 항의도 하기 힘들었다.

이미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니 말이다.

자기 또래 회사원들은 매일같이 회사에서 잘리지나 않을까 조심하며 다니는 중이었다.

홍인걸은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며 이마에 근심 어린 주름살을 만들었다.

진짜 해직이 된다면 정말로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했던 것이다.

"휴, 지금이라도 어떻게 빌어봐―"

홍인걸은 신문사의 윗대가리들을 떠올렸다.

탐욕에 찌든 그들의 낯짝을 생각하니 저절로 고개가 흔들어졌다.

"제―기럴, 세상 참 살기 어렵네."

홍인걸은 속이 배배 꼬이는 느낌이었다.

집에는 늙은 어머니가 계셨다.

자신은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이대로 해직되어서는 안 된다.

"휴― 할 수 없지."

홍인걸은 터덜터덜 정치부 부장을 만나러 걸음을 옮겼다.

똑똑!

"들어와!"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앞에는 은테 안경에 넒은 이마, 머리숱이 많이 빠진 중년남자가 앉아 있었다.

정치부 부장 서영철이다.

그는 누가 문을 두드리자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소리를 높였다.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홍인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례합니다. 부장님."

"이게 누구야? 우리 그 잘난 홍인걸 기자님이 아닌가?"

서영철 부장이 홍인걸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사실 두 사람은 얼마 전 기사 하나 때문에 서로 얼굴을 붉힌 사이였다.

부장의 비아냥에 홍인걸은 얼굴이 굳어졌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아유, 부장님도 참. 무슨 말씀입니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부장님이 잘 가르쳐 주십시오."

"……?"

서영철 부장은 홍인걸의 말에 살짝 놀랐다.

평소 홍인걸에게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언행이었다.

홍인걸이 부장실에 나타나면 언제나 한바탕 고성이 오가고는 했던 것이다.

"어라? 이게 뭐야? 우리 천하의 홍인걸이가 왜 이래?"

서영철이 의아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홍인걸은 두 손을 몸 앞에 모으고는 다소곳이 말했다.

"저… 김인수 국회의원 기사 말입니다. 제가 좀 더 보충……."

"어, 그래. 그거. 내가 편집부에 말해서 잘랐어."

서영철은 홍인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중간에 말을 잘랐다.

"……예?"

서 부장의 말에 홍인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 역시 기사를 보류하려고 온 것이기는 했다.

그래야 서 부장에게 살생부에서 자신의 명단을 빼달라고 말이나 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자기 독단으로 기사를 뺐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 그걸 왜?"

"그걸 몰라서 물어? 엉? 정치부 생활 몇 년째야? 그런 건 기사로 못 써."

"왜 이제 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겁니까? 지난번 회의 때는 분명히."

"그때는 그때고. 엉? 너도 짬밥이 있는데 아직도 모르겠냐? 왜 안 되는지?"

서영철은 피식 웃으며 홍인걸을 바라보았다.

마치 높은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홍인걸은 서서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오른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불현 듯 집에 계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홍인걸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의 힘을 풀었다.

그리고 원래 기사를 보류하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휴, 그래 참자 참아.'

얼굴을 푹 숙이며 화를 참아낸 홍인걸은 다시 얼굴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 기사는 좀 더 취재해서 보강 후 내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야, 이 X만 한 새끼야―"

홍인걸의 말에 서 부장은 화가 나서 버럭 호통을 쳤다.

"보강이고 뭐고 그 기사는 안 된다니까!"

김성수 국회의원의 비리를 파헤치는 기사는 절대 신문에 실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보강 어쩌고 하는 홍인걸이 기가 찼다.

서영철은 두 눈에 불을 켰다.

"야! …이 개XX야! 이 천지 구분도 못 하는 개 같은 놈아! 너 때문에 우리가 다 망해야겠어? 엉?"

홍인걸은 서 부장의 막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른손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뭐야? 이 시키. 야, 꺼져! 당장 여기서 나가!"

홍인걸은 부르르 떨리는 손을 내려놓으며 푹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홍인걸은 문을 닫고 부장실 밖으로 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