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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186화 (186/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86화

186화

오전 7시.

20대 중후반의 사내가 한 손에는 경제 일간지를, 다른 손에는 검은색 손가방을 들었다.

깔끔하게 잘 정돈된 머리카락, 멋스런 안경, 이지적으로 보이는 밝은 인상이다.

오피스텔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자 50대 후반의 경비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임스 박, 출근하는겨?"

"예, 김씨 아저씨. 오늘도 수고하세요."

청년이 경비에게 밝게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제임스 박은 오피스텔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아침 출근길이라 많은 사람들이 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제임스는 어깨끈을 크로스로 가방을 메고, 한쪽 손에는 경제지를 들고 길가의 가게로 걸어갔다.

가게의 이름은 신라 퀸스.

신라 치킨으로 유명한 백정원이 새로 시작한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다.

바쁜 직장인들을 위해 테이크아웃 코너가 가게 입구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제임스 박은 상당히 신선한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기다리자 투명한 플라스틱 컵에 담긴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컵 중앙에는 신라 왕관을 쓴 여인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뉴욕에서 자란 제임스 박은 요즘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위해 항상 퀸스를 찾았다.

중저가의 커피 프랜차이즈점인 신라 퀸스는 등장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제임스 박은 커피를 받아들고 지하철 플랫폼으로 걸어갔다.

"꺄아! 소매치기야― 누가 좀 도와줘요!"

어디선가 젊은 여성의 뾰족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로 향했다.

얼굴에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젊은 사내가 여성의 핸드백을 들고 도망치고 있었다.

"도둑이야! 도와주세요!"

"비켜! 막으면 뒤진다!"

도망치던 사내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머니칼을 꺼내 휘둘렀다.

그런데 사내가 도망치던 길 앞에 하필 제임스 박이 지나고 있었다.

"도와주세요!"

가방을 빼앗긴 여성이 뒤에서 쫓아오며 소리를 질렀다.

"넌 뭐야! 안 비켜!"

사내가 제임스를 향해 뛰어오며 험상궂게 얼굴을 찡그린 채 허공에 칼을 휘둘렀다.

마치 '막으면 죽어!'라는 표정과 제스처였다.

제임스는 그런 사내의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씩 웃더니 몸을 옆으로 피해주었다.

사내는 그런 제임스 박의 행동에 입가에 피식 비웃음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옆을 스쳐 갔다.

그런데 사내가 제임스 박의 옆을 지나 몇 발자국 앞으로 뛰어갔을 때였다.

"꺄악!"

사람들의 놀란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어―억!"

가방을 들고 도망치던 사내가 놀라며 자신의 하의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벨트가 떨어져 나가며 바지가 훌렁 내려갔던 것이다.

"컥!"

흘러간 바지에 다리가 걸려 사내가 앞으로 거꾸러졌다.

그때 넘어지지 않게 손으로 바닥을 짚다가 그만 칼을 놓쳤다.

탁! 핑그르르르―

지하철 플랫폼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칼이 빙그르르 원을 그리며 선로 쪽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잡아!"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주변의 용감한 시민들이 동시에 사내를 향해 덮쳤다.

바지가 흘러 앞으로 고꾸라졌던 소매치기는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제압당했다.

삐! 삐―익!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지하철역에 배치된 경찰들도 달려왔다.

와글와글!

"대체 무슨 일이래?"

"소매치기래?"

"그래?"

경찰이 나타나자 주위는 더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이 갑자기 일어난 소동에 주목할 때 제임스 박은 태연히 지하철에 올라탔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무관심해 보였다.

40여 분 후.

제임스 박은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종합 무역 상사의 출입구에 들어섰다.

회사의 이름은 동양 무역.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흔하디 흔한 이름이었다.

"와아― 영웅이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동료들이 박수를 치며 제임스 박을 맞았다.

"어이쿠!"

제임스 박은 흘깃 벽면을 보고는 다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사무실 정면 벽면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거대한 스크린에서 조금 전 지하철에서 일어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마크가 한 짓이야."

제임스의 동료인 이탈리아 출신의 디노가 말했다.

C.I.A의 극동지부 본부인 이곳에서 정보 분석을 담당하고 있다.

"마―아크!"

"하하, 마침 리비아에서 넘어온 중국 스파이를 찾고 있었는데 네 활약이 보이더라."

마크는 뛰어난 해커로 서울 시내 교통망을 해킹해서 스파이의 흔적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다.

"크하핫! 저 친구 혼쭐 좀 났겠는데?"

제임스 박 옆자리의 리우 량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리우 량은 중국계 미국인으로 제임스 박과 같이 현장 요원이었다.

"잘했어, 박. 하지만 너무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마."

듀크가 제임스 박의 어깨를 두드렸다.

듀크는 건장한 체격의 흑인으로 제임스의 선배 요원이며 이곳 요원들의 팀장이었다.

한국에서 근무한 지는 벌써 3년이 넘었다.

그에 비해 제임스는 한국으로 발령받은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제임스 박은 대학시절 일본어와 중국어를 마스터하고 동아시아 역사를 전공했었다.

여기에 서울 태생이라 한국어에 능숙한 것이 극동지부로 발령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

"아무한테도 안 들켰잖아요."

"물론이지. 만일 들켰다면 내가 직접 널 캘링턴으로 보냈을 거다."

캘링턴은 C.I.A의 비밀 훈련소가 있는 곳이다.

제임스 박은 그곳에서 인간 병기로 거듭날 수 있었다.

"오우, 거길 다시 가는 건 사양입니다."

제임스는 군대 다시 가란 소릴 들은 것처럼 양손을 들고 거부의 몸짓을 보였다.

"흐흥, 가기 싫어도 일을 제대로 못하면 그곳으로 다시 가게 될 거다."

듀크의 말에 제임스는 바짝 얼었다.

그곳은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매일매일 시험받는 곳이었다.

리우 량이 제임스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절대로 사실이야. 저 얘기."

리우가 눈으로 웃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이번 일은 골든 그룹 쪽에서 정부에 협조 요청을 해온 건이다. 우리 팀이 맡게 됐다."

듀크가 3급 비밀 테크가 붙은 서류를 모두에게 건네주었다.

"골든 그룹이라면……"

리우 량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리우 량만이 아니다.

팀원들 대부분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말없이 서류를 넘겼다.

"흐흥, 이것들만 조사하면 되는 건가요?"

"그렇다."

듀크가 말했다.

"뭐, 그리 큰일은 아니네요."

"맞아, 이 정도야. 뭐. 우리 팀이라면."

마크가 제임스 박을 바라보았다.

"음, 알겠습니다. 팀장님. 언제까지 해치우면 될까요?"

"시간은 일주일 주겠다."

듀크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듀크가 자리를 비우자 마―크가 컴퓨터를 두드리며 말했다.

"거기지?"

"응, 맞아."

"이름 없는 영웅들의 보금자리."

리우 량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현재 정보요원들 사이에서 이름 없는 영웅들의 보금자리와 골든 그룹의 존 강은 화제의 대상이었다.

미국 정부와 정부 기관에서도 하지 못했던 혹은, 하지 않았던 일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있었던 C.I.A요원의 납치 사건.

이 건은 누구도 사전에 눈치채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골든 그룹은 사전에 납치 작전을 눈치채고, 요원을 구출해 내었다.

만일 그들이 구출하지 않았다면 십중팔구는 시체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 멕시코에서 납치되었던 마약수사국의 언더커버 이야기는 더 대단했다.

여러 가지 절차상의 문제로 생계의 어려움을 겪던 실종된 수사관 가족을 도와준 이야기는 유명했다.

마약수사국뿐 아니라 여러 기관에 이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하아, 진짜 좋은 일한 거야."

마크가 혼잣말을 내뱉었다.

리우 량과 제임스 박도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리타분한 관료들이 문제야. 일단 선지급하고, 나중에 문제를 해결해도 되잖아?"

"흐흐, 정치가 놈들이 그런 걸 생각이나 해주겠어? 그저 이용만 안 당해도 어디야?"

"흐흐흐."

요원들이 자조 섞인 비웃음을 날렸다.

조국을 위한 애국심으로 C.I.A요원이 된 자들이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었지만, 애국심이 바탕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없었다.

모두들 조국을 위한 헌신이라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들이 때로는 정치꾼들에게 이용당하다 소모품처럼 버려진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경우들을 직간접적으로 보고나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해 가끔 회의감을 느끼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회의감이 쌓여 가다가 변질되는 요원들이 적지 않았다.

마약단속국의 언더커버 요원에 대한 이야기도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실적에 눈이 벌게진 윗대가리가 무리하게 단서를 요구하다가 정체가 발각된 잠입요원의 실종.

다들 쉬쉬했지만 이 이야기에는 추악한 뒷이야기가 있었다.

재선을 노리는 주지사와 위에서 끌어줄 끈이 필요했던 마약단속국 국장의 무리한 일처리가 화를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실종된 수사관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감추기까지 했다.

가족들이 수사 결과를 기다리며 가장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 말이다.

게다가 더 분노할 수밖에 없는 지점은 그사이 가족들이 경제적인 고통까지 당했다는 것이다.

부인이 생계를 위해 동네의 마트에서 시급을 받으며 고생스럽게 일했다는 이야기.

장남이 대학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을 내기가 어려워 포기할 뻔 했다는 이야기.

언더커버라는 신분 때문에 오히려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한 이야기.

모두가 같은 계통 사람들로서는 토가 나올 정도로 추악한 이야기였다.

언제가 자신과 동료가 당할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이야기에는 동화 같은 반전이 있었다.

신데렐라의 요정대모가 나타난 것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한 대기업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생계의 어려움에 처한 수사관 가족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준 것은 물론이거니와.

대기업 총수가 직접 용병까지 구해서 실종된 수사관을 구출해 주었다.

이 일을 위해 무려 두 개 국가의 대통령을 움직였고, 두 개의 전투기와 헬기강습 부대와 특수전 부대가 파견되었다.

그야말로 일개 수사관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힘이 움직인 것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꿈같은 일인데 마지막 마침표도 확실하게 찍어 주었다.

이 일에 관여된 주지사와 마약수사국 국장이 증거인멸 등의 혐의로 검찰에 기소당한 것이다.

못해도 두 사람 모두 30년 형은 받을 거란 예상이 주를 이뤘다.

그야말로 통쾌한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비슷한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들 모두 맥주를 들이키며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들과 같은 직업의 종사자들에게는 그야말로 동화 같은 결말이었다.

스파이들의 세계는 온통 차갑고 비정한 곳이다.

어제까지의 동료와 상사가 내일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다.

어제의 원수와 내일은 합동 작전을 펼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죽고 죽이고, 속이고 배신하는 일이 일상인 비정한 세계.

강혁과 골든 그룹이 한 일은 그런 세계에 갑자기 들려온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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