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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192화 (192/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92화

192화

L.A근교. 고속도로.

앰뷸런스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급히 사고 현장으로 구급차가 달렸다.

얼마 후 사고 현장에 도착한 응급구조원들은 현장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거대한 화물차가 승용차를 들이박아 차량이 반파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휴, 이거 살아 있는 거 맞아?"

"희망을 가져보자고."

구급차에서 내린 응급구조원들은 먼저 도착한 911대원들이 절단기로 찌그러진 문을 잘라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반파된 차량에서 20대 후반의 동양인을 끄집어냈다.

머리에는 피를 흘리고 있었고, 의식불명의 상태였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 빨리 옮겨!"

젊은 동양인을 실은 구급차가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병원으로 긴급호송을 시작했다.

그런데 사고 현장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내가 차로 돌아가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알았다. 내가 마무리하지.

전화기 너머로 낮고 탁한 음성의 사내가 대답했다.

응급차량이 병원에 도착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급히 환자를 받아 수술실로 향했다.

잠시 후 수술실의 불이 켜지고 수술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술실 앞으로 창백한 표정을 한 동양인 사내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얼굴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고, 매우 당혹해하는 모습이었다.

나이는 30대 초중반 정도 되었고, 양복을 입은 모습은 전형적인 샐러리맨이었다.

"크, 큰일이다."

사내가 지나가던 간호사를 불러 세우고 물었다.

"지금 수술 받고 있는 사람의 지인입니다.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지인이라고요? 정확히 어떤 사이인가요?"

"저분 아버님이 제가 다니는 회사의 오너입니다. 미국에는 유학 중이고요. 제가 현지 담당입니다."

사내는 부리나케 간호사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설명해주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간호사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 것 같더니 곧 전화를 끊고 사내를 바라보았다.

"의식불명 상태로 긴급 수술에 들어갔어요. 이 이상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현재는 없네요."

"……!"

"일단은 수술을 지켜보셔야 할 것 같아요."

간호사의 말에 사내는 죽을상을 지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수술이 잘 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사내는 고개를 돌려 수술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세 시간 후.

수술실 불이 꺼지며 수술가운을 입은 의사가 걸어 나왔다.

사내는 부리나케 의사에게 달려갔다.

"선, 선생님. 어떻게 됐습니까?"

마스크를 벗은 의사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운명하셨습니다."

"……!"

의사의 말에 사내는 동공을 커다랗게 뜨고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죽…죽었다고요? 도련님이? 돌아가셨다고요?"

사내의 물음에 의사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죄송합니다."

의사는 막무가내로 다가오는 사내의 팔을 치우고 사라졌다.

사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아, 안 돼― 이럴 수가?"

양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사내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누군가가 바라보고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상어턱, 그리고 쥐를 연상시키는 눈을 가진 사내였다.

잠시 후, 불이 꺼진 수술실 안으로 상어턱을 가진 사내가 몰래 숨어들었다.

그러자 수술실 안에는 아직 수술대에 위에 한 사내가 담요 같은 것에 덮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수술대로 다가간 사내는 담요를 끌어내려 얼굴을 확인했다.

"……."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상어턱 사나이는 들어왔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수술실 밖으로 나갔다.

"도련님, 처리가 완료됐다고 합니다."

노집사가 신상현에게 다가와 말했다.

신상현은 노집사에게 다시 물었다.

"확실하게 확인한 거지?"

"직접 시체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래?"

노집사의 말에 그제야 신상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도련님."

노집사의 단안경이 반짝거렸다.

"후후훗, 어떻게 하긴. 할아범. 이제 때가 된 거지."

"……."

"드디어 아버님을 만나러 갈 때가 되었군."

신상현이 웃음 지었다.

자신의 형이자 삼강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가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제는 자신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혈육이었다.

지금쯤 삼강의 노괴물 신철호는 망연자실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제국을 물려받을 후계자가 사고로 죽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

아니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아직 아들이 하나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 자신을 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신상현은 굳이 신철호가 힘을 낭비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아버지― 오랜만에 뵙겠군요. 흐흐흐흐흐."

신상현의 말에 노집사의 단안경이 반짝거렸다.

'오랜만이라고? 이전에 뵌 적이 있다는 말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오랫동안 신철호를 옆에서 모셨던 노집사는 잘 알고 있었다.

신상현이 태어나서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노집사는 생각을 더 나아가지 않았다.

자신이 할 일은 신상현을 빈틈없이 보좌하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언젠가 신상현은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것이다.

딸을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넣은 삼강가를 차지하면서 말이다.

지금도 노집사는 꿈꾸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의 손에 신철호가 가장 비참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삼강이란 거대한 제국이 신상현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순간 이 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이제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대체 왜 아직도 찾지 못한 거야?"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신철호의 호통에 양복차림의 중년인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내가 지시를 내린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어. 그런데도 중학생 아이 하나 못 찾아내다니!"

"……."

신철호의 불호령에 거실에 모여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신 회장의 비서가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살아 있는 건 확실해?"

"그…그게……"

비서는 신철호의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외가 쪽 사람들이 집단 자살을 하는 바람에 신상현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다행히 함께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경찰과 국정원도 움직였으니 조만간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흥, 그러고도 내 아들을 찾아내지 못하면 너희들 모두 사표 써! 김 비서 너도!"

"알, 알겠습니다. 회장님."

김 비서가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는 거실 벽에 걸려 있는 벽시계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저… 회장님, 시작할 시간입니다."

"크흠, 벌써 그렇게 됐나?"

"예, 회장님."

김 비서는 리모컨으로 거실에 놓여 있는 대형 삼강 TV의 전원을 켰다.

잠시 후 TV가 켜지면서 화면에는 기자 회견장이 나타났다.

장소는 삼강에서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오늘의 기자 회견장은 삼강의 회장인 신철호가 직접 연락해서 대관을 해준 곳이다.

이제 곧 최강수 대통령의 무남독녀 최영혜의 정계 진출 기자 회견이 열린다.

정치계가 주목하는 초유의 이벤트였다.

몇 년 전 삼강 백화점 붕괴사건으로 인해 일약 영웅이 된 최영혜가 정계에 진출하는 것이다.

예전 최강수 대통령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그녀는 그야말로 한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외환 위기로 인해 정권을 잃은 대한국당 역시 그녀의 정계 진출을 반겼다.

최강수 대통령의 딸이라는 후광 효과와 삼강 백화점의 잔다르크라는 이미지는 역대 어떤 정치인도 가지지 못한 자산이었다.

비록 외환 위기와 국가 부도 사태로 인해 민심을 잃어버린 대한국당이지만 그녀가 합류하면 희망이 보였다.

옛 독재 정권 하에 빌붙어 권력의 단맛을 빨았던 자들도 하나둘 그녀의 깃발 아래에 모이고 있었다.

신철호는 상당히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한참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수많은 기업들이 도산하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실직자가 되어 길거리를 방황했다.

사람들은 기존의 정치권에 대해 희망을 잃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의 등장은 정치권에 일약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심 쓰듯이 최고급 호텔의 회견장을 비우고 최영혜 측에 공짜로 대관해준 것이다.

앞으로 아낌없이 지원하겠다는 말도 넌지시 흘리면서 말이다.

삼강은 각계각층에 삼강 장학생들을 키우고 있었다.

미리 재목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선정하여 장학금과 지원금을 주면서 미래의 우군으로 만드는 것이다.

장래에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정치인이라는 판단을 내린 신철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과감한 지원을 결심하고 있었다.

"시작합니다. 회장님."

김 비서의 말대로 본격적인 회견이 시작되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최영혜가 회견장 중앙으로 나섰다.

여기저기서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 터졌다.

마치 유명 톱스타가 등장하기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이 자리에… 국난을 극복하는 데 한 힘을 보태려고 합니다."

정계 진출에 대한 최영혜의 소견발표가 있고 나자 여기저기서 기자들이 손을 들었다.

최영혜는 손을 든 기자들 중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기자를 찾아 손으로 가리켰다.

아쉽게도 최영혜는 이런 쪽으로 순발력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미리 정해둔 말이 아닌 경우에는 엉뚱한 답변을 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그래서 사전에 정해둔 질문과 답변을 하도록 기자 회견을 계획해 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유력한 언론사들의 사주들이 최영혜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영혜는 만면에 미소를 띤 우아한 모습으로 기자들의 질문에 하나씩 답변을 해주었다.

TV를 통해 이 장면을 보고 있는 국민들 중 상당수는 최영혜의 기품어린 동작과 우아한 모습에 반하고 있었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청와대에서 자란 최영혜였다.

아버지 최강수가 모셔온 최고의 전문가들로부터 걸음걸이부터 손 움직이는 동작까지 교육받은 사람이다.

요즘 같은 시대에 최영혜만큼 기품 있는 동작을 훈련받은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그녀의 한 동작 한 동작 한마디 한마디는 멋모르는 사람들의 귀와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비록 머릿속은 텅 비어 있어 자신의 주관이나 철학 같은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런데 신상현의 입장에서는 그런 점이 또 좋았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관이 결여된 최고의 쇼윈도 정치인.

한 동작, 한마디로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최고의 꼭두각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질문 한 가지만 더 드려도 될까요?"

"예, 그러셔요."

최영혜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아들을 입양하셨다고 하는데 소개해 주실 수 있습니까?"

"호호, 맞아요. 그게 벌써 4년 전 이야기네요. 마침 여기 왔는데… 어디 보자? 상현아?"

최영혜가 몸을 돌리며 입양했다는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사실 최영혜가 처녀의 몸으로 양자를 들였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 실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얼굴을 공개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TV를 시청하는 사람들의 잔뜩 호기심을 품고 브라운관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중2 정도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TV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신상현은 하얀 얼굴에 기품이 있어 보이는 보기 드문 미소년이었다.

"어머! 잘생겼다."

회견장에 모여 있는 기자들 중 여성 기자들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하, 여자들이 난리로군."

"그럴 만하잖아."

기자들 사이에서도 놀랐는지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저…저 녀석은?"

TV를 보고 있던 신철호 회장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사진을 꺼내어 비교해 보았다.

"서…설마 상현이?"

신철호 회장은 사진 속의 신상현과 TV속의 신상현을 비교하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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