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97화
197화
#52장 언론 전쟁
"사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응? 왜 그러나 한 국장."
한 국장이 가져온 신문을 펼쳐본 서인태 사장은 얼마 안 가 얼굴 표정을 구겼다.
"여기가 어디야?"
"서울 데일리입니다. 사장님."
"감히 이 업계에서 우릴 거스르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있을 줄이야?"
서 사장은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이제껏 없었던 일이라 더 기가 막혔다.
이번 기사는 반 은퇴한 아버지 서 회장의 지시로 들어간 기사였다.
서 사장의 생각에 아무래도 최영혜 쪽과 관련된 일인 모양이었다.
삼양 백화점 사건 이후로 서 사장은 자신이 모르는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생기면서 많은 것이 변하는 중이었다.
기존에 권력을 지니고 있는 자신들과 같은 기득권세력에 공공연이 대항하는 자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서 회장과 뜻을 같이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변화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들이 대한민국 사회에 뿌리내린 견고한 기득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최영혜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 중이다.
이번 기사는 틀림없이 그쪽에서 그린 그림 중 하나였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서 회장이 직접 자신에게 그런 지시를 내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노현우 장관은 기존의 권력에 대항하는 자들 중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삼당 합당 이후로 견고해진 영호남 간의 지역 갈등에 변화를 이끌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언론 권력에 무릎을 꿇지 않고, 끈덕지게 저항하고 있었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더 크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
이번 기사는 노 장관의 이미지에 타격을 입힐 좋은 기회였다.
노장관 측이 정정보도 신청을 하겠지만 이미지에 타격을 입히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정정보도 신청 후, 기사를 검토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그때가 되면 시일도 한참 지난 후이고, 정정보도 한다며 신문 한구석에 조그마하게 실어주면 그만이다.
독자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노 장관이 서민 이미지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는 기사일 것이다.
지금까지 대한일보는 이런 식으로 정치인들을 입맛대로 다루어왔다.
자신들이 가진 힘으로 대통령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그런 자부심이 있었다.
만일 국가 부도라는 엄청난 사건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정권이 넘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여론 조작을 통해 그동안 만들어 놓았던 김현중 대통령의 빨갱이 이미지의 힘은 그만큼 컸다.
이번 일도 노현우 장관에 대한 장기적인 이미지 마사지 작업의 일환인 것이다.
그런데 전국 일간지에 이런 기사가 실리면 효과가 크게 반감된다.
게다가 서로 상반된 기사로 인해 비교 대상이 될 것이다.
잘못하면 대한일보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기사를 막 써댄다는 여론까지 생길 수 있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아무래도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서울 데일리를 밟아 줘야 할 모양이다.
"한 국장."
"예, 사장님."
"서울 데일리라고 했나?"
"예, 서울 데일립니다."
"당장 여기에 광고 넣은 광고주들 찾아내서. 전원에게 전화를 걸어."
"……!"
"서울 데일리에서 광고를 빼면 우리 신문에서 30% 할인가로 광고 실어 준다고 해."
"알겠습니다. 사장님."
신문은 광고로 먹고 산다.
그런 신문사에게 있어서 광고가 끊어진다는 것은 회사의 사활과 관계된 일이다.
광고주들은 어떻게든 인지도가 높은 신문에 자사의 광고를 실으려고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대한민국 1등 신문이라 자부하는 대한일보에서 광고를 실어준다고 하면 너도나도 달려들 것이 자명했다.
서울 데일리는 며칠 못 가 항복할 것이다.
"이 새끼들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싹싹 빌게 해주지."
서인태의 말에 한일주 국장이 얼굴에 잔인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사장님, 그때 저도 꼭 불러 주십시오."
"크크, 알았어. 한 국장. 그때가 되면 자넬 잊지 않고 부르지."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놈들 손이 발이 되라 빌 겁니다. 그때 실컷 비웃어 주겠습니다. 크흐흐흐."
"하하, 나도 벌써 그날이 기대되는 군."
"저는 지금 당장 돌아가서 전화 돌리겠습니다."
"그래, 서둘러."
서 사장의 말에 한일주는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부리나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이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한 국장은 책상 앞에 앉더니 두꺼운 전화번호부를 꺼내서는 서울 데일리를 펼쳤다.
그리고 광고가 들어간 회사의 전화번호를 찾아내서는 일일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서울 데일리 광고부.
"예, 서울 데일리 광고부 이예림 팀장입니다."
―아, 예. 남영 우유 광고기획부 차 과장입니다.
이예림은 전화를 받고 금세 무슨 전화인지 눈치챘다.
이번에 남영 우유에서 신상품이 나와 대대적인 판촉광고에 들어가기로 했던 것이다.
이번 광고를 위해서 서울 데일리는 이미 신문 지면을 비워두고 있었다.
서울 데일리가 전국 일간지로 발돋움하면서 들어온 대형 광고였다.
앞으로 적어도 한 달은 지속적으로 광고를 넣을 대형 계약이었다.
서울 데일리 측에서도 이번 광고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예림은 한껏 꾸며낸 예쁜 목소리로 응대했다.
"예, 차 과장님. 안녕하세요. 이번 주부터 광고 들어갈 겁니다. 1면 하단……."
―아, 그게 아니고요.
"예? 그게 아니라뇨?"
―그게 아니고, 저희 광고 넣은 거 취소하겠습니다.
"예? 취소하신다고요? 아니 왜요?"
―뭐,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탈칵!
전화가 끊어졌다.
"뭐, 뭐야 이 사람?"
이예림 팀장은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서울 데일리에 근무하면서 이렇게 예의 없고 경우 없는 전화는 처음이었다.
보통은 왜 광고를 끊는지 이유를 알려주며 끝까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다.
지금 같은 전화는 앞으로 우리 회사와는 연을 끊겠다는 신호나 다름이 없는 행동이었다.
"대체 남영 우유가 왜 이래? 우리 회사하고 무슨 원한이라고 생겼나?"
이예림은 다시 남영 우유 측에 전화를 걸었다.
대체 왜 갑자기 광고를 끊으려 하는지 문의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남영 우유 측은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다시 전화를 끊었다.
"뭐야? 이 사람들? 대체 뭔 일이야?"
이런 식으로 신문사와 척을 지는 것은 보통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이런 일은 사주 측에서 내린 지시가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개 회사 직원이 벌린 일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큰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뒤에서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게 확실했다.
"그건 그렇고 큰일이네. 남영 우유 때문에 1면 하단 지면을 비워뒀는데……."
이예림은 대체할 광고를 무엇으로 할지 고민했다.
"남영 건이 캔슬됐으니 그럼 테리우스 신상품 광고를 앞당겨서 넣을까?"
테리우스는 국내의 유명 의류 업체였다.
이주일 전 테리우스 측에서 새로운 신상품 광고를 의뢰했던 것이다.
이번 광고도 큰 건이었다.
한창 TV에서 유명세를 펼치고 있는 남녀 스타들이 신상품 광고에 출연했다.
이전에는 테리우스 측의 광고를 싣지 못했다.
언제나 일류를 선호하는 테리우스 측은 광고를 싣는 곳도 엄선했던 것이다.
만일 이전처럼 지역의 중견 일간지에 불과했다면 들어오지 않았을 광고였다.
"아니면, TG의 신상 청소기 광고를 앞당겨 보는 건 어떨까?"
전국 일간지로 발돋움한 서울 데일리에 광고가 몰려들고 있었다.
남영 우유가 아니더라도 넣을 광고가 아직까지는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띠리리리릿― 띠리리리릿―
한참 다음 광고를 뭘로 할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서울 데일리 광고팀 팀장 이예림입니다."
―여기 테리우스 기획팀 실장 강수철입니다.
"아, 강 실장님. 이렇게 직접 전화를 주시고, 신상품 광고 때문이시죠?"
―하하, 그게. 아무래도 내가 직접 전화를 드리는 게 예의라 생각해서요.
"……."
―이번에 넣으려고 했던 광고를 아무래도 취소해야겠습니다.
"예? 아니 왜요?"
강 실장의 말에 이예림의 뒷머리가 빠짝 서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 남영 우유 측의 이상한 행태를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뭔가 있는 모양이다.
―뭐, 저도 윗선에서 시키면 그대로 따라야 하는 직장인이라…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기가 울렸다.
급히 받아보니 이번에는 TG전자 쪽이다.
'대…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예림은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는 TG전자의 최 과장에게 급히 소리쳤다.
"잠깐만요. 최 과장님― 끊지 말고 잠시만요."
―왜…왜요?
"혹시 알고 계신 거 없어요? 왜 광고를 끊으려고 하는 건지요?"
―그…그게 대한일보 측에서 30% 할인을 해준다고 합니다.
"예? 광고 단가를 할인했다고요? 그것도 30%나요? 왜요? 대한일보가 왜?"
―그…그건 모르겠네요. 그쪽에서 대한일보 측과 뭔 알력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던데?
"그래요?"
최 과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광고팀 부서원들의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예, 서울 데일리… 예? 광고를 끊는다고요?"
이 팀장의 고개가 팀원을 향했다.
그런데 그 팀원만이 아니다.
전화를 받는 사람마다 광고를 끊는다는 전화가 폭주하고 있었다.
'야단났다.'
"고마워요. 최 과장님. 전화 끊을게요."
이 팀장은 전화를 끊자마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사장실 문이 열리며 이예림 팀장과 이진주가 들어왔다.
"뭐야? 이진주, 그리고 이 팀장. 노크도 할 줄 모르나?"
"큰…큰일 났어요. 사장님."
"큰일 났어. 선배."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외쳤다.
"자자, 진정들하고 천천히 말해봐."
이예림 팀장이 울상을 하며 말했다.
"어떡하죠. 사장님. 지금 광고를 취소하겠다는 전화가 계속 걸려오고 있어요."
"광고 취소 전화가 온다고?"
"예, 지금 취소 전화로 저희 부서가 불이 났어요."
"흐흠, 그렇군."
장기옥 사장은 침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광고는 신문의 생명줄이었다.
그런데도 사장의 표정이 흔들리지 않고 평온한 모습을 보이자 이예림 팀장은 의아해했다.
'뭐지? 이 사람?'
"이 팀장 말은 잘 알았고? 넌 뭐야? 이 진주?"
"선배, 아무래도 이 사태가 제가 쓴 기사 때문인 것 같아요. 어쩌죠?"
"아마 맞을 거예요. 대한일보가 저희 광고를 빼돌리고 있어요. 그것도 30% 광고할인을 걸고요."
"흐흠, 그렇군. 30%라? 돈 좀 썼네?"
사태가 심각함에도 장 사장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모습을 이진주는 오히려 불안하게 보았다.
이제 막 사장이 된 선배에게 자신의 기사가 큰 피해를 줬다는 생각에 이진주는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선, 선배… 미안해요.'
이진주가 장 사장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저, 선배. 이거 받으세요."
"이건 뭐야?"
"사…사표에요."
"……?"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사표를……."
"푸하하하핫!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옛?"
장 사장은 웃으며 사표를 받아들더니 두 손으로 쫙쫙 찢어버렸다.
"선, 선배?"
"사, 사장님?"
"이 진주, 잘 들어!"
"……."
"넌 기사 잘 썼어. 앞으로도 기사는 그렇게 쓰도록 해. 발로 뛰고 심도 깊게. 알았어?"
"하, 하지만?"
"그리고 이 팀장!"
"예, 사장님."
"광고가 끊겼단 말이지?"
"예, 큰일이에요. 이대로 가다간 회사 운영이……."
이예림 팀장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려 할 때였다.
장 사장이 씩 웃더니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어 책상 위에 던졌다.
휘리릭!
책상 위에 펼쳐진 것은 회사 이름과 상품들이 적혀 있는 리스트였다.
두 사람은 책상 위에 던져진 리스트 문건을 바라보며 두 눈을 껌벅거렸다.
하나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회사들과 그들의 신상품 리스트였던 것이다.
"사, 사장님? 이…이건?"
이예림 팀장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앞으로 반년 간 우리 신문에 실을 광고들이야."
"예? 이…이 회사들이 우리 신문에 광고를 싣는다고요?"
이예림의 반문에 장 사장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실이야. 그러니 광고 걱정은 하지 말라고!"
이예림 팀장은 장 사장의 얼굴과 자신의 손 위에 있는 리스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에 사장이 큭큭하며 웃었다.
장기옥 사장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리스트에 있는 회사의 한국 지사나 미국 등지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만이 아니다.
홍콩과 말레이시아에서도 광고를 싣겠다는 전화가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