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198화
198화
"예? 람보르기니요?"
"예, 저희 회사에서 신차가 나오거든요."
"그…그렇군요."
"전 세계에 런칭 중인데 한국 광고 파트너로 귀사를……."
광고부 직원들의 입에서 기쁨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전화기에서 불이 날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세계적인 회사들의 광고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그중에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회사들도 많았다.
이 회사들이 왜 자기들 신문에 광고를 넣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예? 애플의 신형 컴퓨터요?"
"예, 예, 알겠습니다."
"GM의 신차 광고요? 예, 되고 말고요."
강혁은 자신이 미국에서 자리를 잡으며 알게 된 인맥들을 총동원했다.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서 수많은 기업들이 광고를 넣고 있었다.
현재 존강이 미국의 정재계에 가지고 있는 위상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까짓 신문 광고 정도야 그들에게는 그다지 큰돈도 아닌데 강혁과 친분을 나눌 수 있다면 싼 값이라 생각했다.
홍콩과 말레이시아의 재계도 마찬가지라 순식간에 광고 지면의 몇 년 치가 예약되어 버렸다.
이예림 팀장은 장기옥 사장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대체 뭐하는 사람이기에 세계적인 기업들의 광고가 알아서 들어오느냔 말이다?
이예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장기옥 사장이 백수 생활 중에 귀인을 만났다는 소릴 여러 번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그 귀인인가 뭐시긴가가 해준 건가?
"대체 그 귀인이라는 사람은 정체가 뭐야? 어디 외국의 대기업 회장이라도 되나?"
이예림은 자신이 진실에 상당히 접근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책상 위를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폭주한 광고 주문을 조정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끙, 이거 얼굴이 화끈해지는군."
고려 일보 사장 정일환은 서울 데일리의 신문 기사를 보고 있었다.
정일환은 은퇴한 아버지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은 지 2년이 되지 않은 젊은 사장이었다.
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경영학과 저널리즘을 전공한 2세 경영인이었다.
정일환은 편집장이 관성에 따라 대한일보가 넘겨준(?) 가십성 기사를 따라 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국에는 일종의 언론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었다.
언론 마피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고하고 끈끈했다.
고려 일보 같은 작은 신문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결속력이었다.
중소 신문사로서는 저항은커녕 그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 전국지로 발돋움한 서울 데일리가 그 강고한 기득권에 도전하고 있었다.
언론계에 소문이 자자한 반골 노현우 장관에 대한 특집 기사를 연이틀에 걸쳐 쓴 것이다.
사실 이는 기존 언론계에 대한 노골적인 반격이었다.
기득권 언론이 자신들을 반대하는 정치인을 이런 기사들로 길들이기를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 아주 공공연한 반기를 든 셈이다.
하지만 이는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기사를 아무렇게나 꾸며 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언론의 신뢰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짓이었다.
그런 점에서 서울 데일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건에 대해 팩트를 확인하고 기사를 쓰는 것.
그리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심층취재를 거치는 것.
하지만 고려 일보는 바로 그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정일환은 그것이 가슴이 아팠다.
"끄응, 이거 얼마 전만 해도 아래로 보던 서울 데일리였는데―"
정일환의 마음이 답답해졌다.
단순히 외형만 커진 것이 아니라 내실도 크게 달라진 모양이다.
처음 정일환이 외국의 대학에서 경영학과 언론학을 공부할 때는 원대한 꿈을 품었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언론사를 운영하게 되면 정말 멋지게 잘해볼 의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 2년간 정일환은 자신의 의지를 많이 내세우지 못했다.
막 회사 사장에 취임했을 때는 꿈에 부풀었지만 현실은 꿈처럼 달콤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정일환도 그저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취임 초기와는 달리 많은 것이 안정을 찾고 있었다.
회사 내부에서도 자신에 대한 평가가 상당히 좋았다.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부하 직원들도 적지 않았다.
만일 개혁을 한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정일환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려 일보 편집국의 이 국장을 불렀다.
잠시 후, 편집국 이 국장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이 국장은 50대 중반으로 정일환과는 2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났다.
하지만 그만큼 노련하고 언론계 전반에 걸친 인맥과 함께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은퇴한 정일환의 아버지가 신뢰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국장님, 오셨습니까? 여기 앉으시죠."
정일환은 이 국장을 응접실 소파로 안내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사장 비서가 내온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다 이 국장이 씩 웃으며 정일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와 이런 한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부르신 건 아니실 테고? 무슨 할 말이 있으신 겁니까?"
"하하, 역시 이 국장님 눈은 못 속이겠군요."
정일환은 커피 잔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장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을 가져왔다.
"서울 데일리군요."
"예, 그렇습니다."
이 국장은 왜 남의 신문을 가져왔는지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일환은 그런 이 국장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찬찬히 서울 데일리를 펴서는 문제의 기사를 가리켰다.
"…이건?"
"이틀에 걸쳐서 서울 데일리가 쓴 기사입니다. 저희가 쓴 것과는 판이하게 내용이 다르더군요."
"……."
"우리 기사가 사실관계를 정확히 확인하고 기사를 쓴 것이 맞습니까?"
"…그게"
"이상하게도 이번 사건에 대한 기사 내용이 대한일보와 거의 99% 흡사하더군요."
"……."
"아주 복사해서 붙여 썼다고 해도 되겠어요."
이 국장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외국 물 먹은 2세 후계자가 업계의 사정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국장은 어떻게든 잘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게 사실은… 업계의 관행입니다."
"관행이요?"
"그렇습니다. 사장님이 아직 잘 모르셔서 그러시는데……."
"덕규 삼촌."
정일환은 갑자기 이 국장의 호칭을 바꿔서 말했다.
"…사장님?"
"삼촌, 옛날에 저희 집 자주 오셨잖아요? 아빠랑 술 드시고, 거의 만취 상태로요."
"……."
"그때 저 삼촌 많이 좋아했어요. 절 보면 자주 용돈도 주시고."
"하하, 오래 전 이야기죠."
"맞아요. 오래 전 이야기죠. 하지만 저 지금도 삼촌 많이 좋아해요."
이 국장은 정 사장의 말에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옛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
"제 생각을 따라주시지 않는다면 전 이 국장님을 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
"앞으로도 이러실 거면 회사를 나가주셔야겠어요."
"……!"
"업계의 관행? 전 그런 거지같은 관행은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하…하지만… 사장님. 아직 모르셔서 그러는데 이 업계에는 룰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룰이라? 그 룰이란 게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정치인을 가짜 기사로 길들이기 하는 겁니까?"
"…그…그게"
"대한일보가 뿌린 기사를 제대로 된 검토도 없이 그대로 실어준다? 그게 관행이고, 룰입니까?"
"……."
"우리가 왜 더 커지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대한일보 꼬봉 노릇이나 하고 있으니 그렇죠!"
"일…일환아―"
"덕규 삼촌. 전 앞으로는 이런 거지같은 업계의 관행! 따를 생각 없습니다. 그러니까."
"……!"
"앞으로는 이런 거지같은 기사는 절대 우리 지면에 실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이.국.장.님!"
"하지만 사장님. 그렇게 되면 그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그 후폭풍!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도 바른 언론으로 한번 거듭나보자고요."
정일환의 말에 이 국장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이 애송이가 회사를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군.'
대한일보가 언론계에 가지고 있는 힘은 고려 일보 따위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하면 내일 당장 고려 일보 광고주들이 모두 손절하고 떠날 수도 있었다.
대한일보가 한 번 작심을 하면 어떤 일을 벌일 수 있는지 이덕규 국장은 잘 알고 있었다.
각종 인맥과 카르텔로 똘똘 뭉쳐 있는 그들 기득권 그룹을 건드리면 그들은 확고한 태세로 복수를 감행한다.
그런 사실을 이덕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눈앞의 애송이 사장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사장님! 아니 일환아! 나라고 하고 싶어서 대한일보 기사를 그래도 실어줬겠냐?"
"……."
"네 아버지나 나나 양심에 털이 나서 그러겠냐고?"
"삼촌."
"서울 데일리의 객기는 얼마 못 가! 우리라고 안 해봤게냐?"
"…예?"
"휴, 너희 아버지랑 나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
"……?"
"기사 나가고 일주일도 안 돼서 광고 다 끊어지고, 은행에서는 빌린 돈 내놓으라고 닦달을 하더라."
"……!"
"당장 사원들 월급 줄 돈도 없어지고 나서야 세상이 어떤 줄 깨달았지."
"…삼촌, 설마 아빠가?"
"휴우, 형님이랑 나, 서성주 그놈 앞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그럴 수가?"
"휴우, 서울 데일리 거기도 얼마 못 갈 거다."
"……."
"나는 네가 그런 수모를 똑같이 겪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방법이 있어요."
"……?"
"제가 설마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런 말을 했겠어요?"
"방법이 있다니?"
"온라인 언론사를 기획하고 있어요."
"온라인 언론사라고?"
"미국에서 유학할 때 최승호 사장의 페이스북에 대해 접하게 되었죠."
"페이스북이라?"
이 국장은 아직 컴퓨터에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세대였다.
김현중 대통령이 전국에 인터넷 광케이블을 깔고 전 국민이 인터넷 사용자가 되기 전의 일이었다.
아직 언론인들에게 인터넷 신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시기인 것이다.
정일환의 설명에도 이 국장은 그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최승호, 미국에서는 전설이라 불린 사람이에요."
"나도 조금 들어보기는 했다만."
"아무튼 저랑 뜻이 맞는 언론사들 몇이 계획하고 있는 게 있어요."
"……."
"미래에는 틀림없이 인터넷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언론사가 대세가 될 겁니다."
"인터넷 플랫폼?"
"맞아요.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확실한 경쟁력과 차별성 즉, 색깔이 분명해야 한다고요."
"……."
"국내에도 더움이란 포털 사이트가 본격적으로 생겼어요. 여기에 우리 신문 기사를 실을 겁니다."
이 국장은 정일환의 설명이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평생을 신문쟁이로 살아온 사람에게 온라인 언론사라는 것은 실감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클릭을 한 횟수로 각 언론사에 포털의 광고 수익이 돌아가는데……."
"그만해!"
"예?"
"휴― 생각하는 게 다 어린애들 짓거리야."
"뭐라고요?"
"기사란 모름지기 종이에 인쇄되어 나오는 신문, 잡지 이런 걸 통해야 신뢰가 생기는 거야."
"……!"
"대체 어떤 사람들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서 기사를 보겠어? 또 그런 기사를 누가 믿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