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01화
201화
#53장 반격의 시작
띠르르르르―
전화벨이 울리자 은색 안경을 쓴 중후한 노년의 신사가 전화기를 들었다.
"예, 한신은행 은행장 박철입니다. 누구십니……."
―나야, 박 은행장.
"아, 강 이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는……."
―내가 잘 지내게 생겼어? 은행장이 사고를 치고 다니는데!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사위가 신문사 사장이라며?
"예, 맞습니다. 동보 일보라고……."
―그 친구하고, 고려의 정일환, 경향의 김신환이하고 같이 편먹고 대한일보한테 개겼다면서?
"예? 그…그게?"
―그 친구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떻게 대한일보하고 척을 질 생각을 해?
"죄, 죄송합니다. 이사장님. 제가 거기까지는 미처……."
―긴말할 것 없고, 당장 전화해서 은행 대출 자금 회수한다고 해요.
"예? 그…그건 안 됩니다. 이사장님."
―안 되긴 뭐가 안 돼, 이 사람아? 당신도 잘리고 싶어?
"아, 아니 그게."
―그게 싫으면 자네 사위한테 전해. 알량한 자존심 접고, 당장 대한일보 가서 사과하라고!
탈칵―
거두절미하고 자기 이야기만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박철은 잠시 말없이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은행이 자금을 빌려 줄 때는 회사의 채산성과 신용도를 보고 자금을 대출해 주는 것이다.
단순히 이사장의 친분 관계 때문에 대출 자금을 회수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자신도 월급쟁이 사장에 불과했다.
언제든 잘릴 수 있는 것이다.
박철은 한숨을 쉬고는 어렵게 전화기를 들어 사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사위와 함께 찾아왔던 젊은 사장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다들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이었다.
'쯧, 다들 괜찮은 젊은이들인데 이런 일로 날개를 꺾어야 하다니… 안타깝군.'
그들이 열정을 가지고 내밀었던 인터넷 언론사 사업계획서가 떠올랐다.
현 정부가 거국적으로 펼치고 있는 IT기업 육성과 일맥상통하는 괜찮은 사업계획서였다.
은행 입장에서도 충분히 자금을 대출해줄 만한 미래지향적 사업이었던 것이다.
박철은 통화를 기다리며 입맛이 썼다.
―예, 동보 일보 사장 김신환입니다.
"…나네. 김 서방."
―장인어른! 이 시간에 어찐 일이십니까?
자신을 반기는 밝고 우렁찬 목소리가 더 죄책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 했다.
"휴― 자네 최근에 대한일보와 척을 질 일이 있었나?"
―예?
"사실은 말이네……."
김신환은 말없이 장인인 박철의 말을 장시간 침묵 속에 들었다.
"미안하게 됐네. 자네 친구들하고도 의논해보고 다시 연락을 주게나."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저 때문에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야. 미안한 건 나네. 그럼."
찰칵―
전화가 끊어지자 김신환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물을 한 잔 들이켰다.
"대한일보, 이 개쓰레기 같은 자식들―"
김신환은 한참을 그렇게 씩씩거리며 분을 식혀야 했다.
언론사 사장으로서 자신은 그래도 언론의 금도를 지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눈으로 보기에도 기존 언론의 행포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었다.
독재 정권 시절에는 총칼의 행포에 억눌려 써야할 기사를 쓰지 못했다.
그러던 것이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 언론의 모습은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지난 십 년의 변화 가운데 대한일보를 비롯한 기득권 언론은 점차 제3의 권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대한일보는 그 중심에서 서서 자신의 입맛대로 여론을 움직여가고 있었다.
이 가운데 손해를 입는 것은 오롯이 독자들이었다.
대표적으로 지난 정권에서 IMF사태를 맞이하기 직전까지 대한일보는 국민들을 우롱했다.
IMF에게 돈을 빌리기로 발표하기 하루 전날까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기사를 써갈겼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보 확보가 빠르다며 자랑하던 대한일보가 과연 그 사실을 몰랐을까?
사실은 다 알면서 그런 기사를 썼다는 소문이 관련 업계 사람들 사이에 파다했다.
김신환 역시 대한일보가 몰랐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협상 당사자들 중 우리 측 정부 관료가 대한일보 측에 넌지시 알려줬다는 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당시 언론의 말을 철썩 같이 믿었던 많은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되었다.
언론이 언론으로서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사태 중 하나였다.
김신환은 그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바로 전 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일환 등과 뜻을 맞춰 대한일보에 맞서고자 결의를 하게 된 것도 그런 연유였다.
그런 일련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사회적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과 같은 언론들이 당시 대한일보의 기사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면?
실제로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작업들을 거쳤다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을 상당수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믿음을 주는 언론사로 거듭날 수 있었을 것이다.
언론이 국가의 공기라는 격언이 사실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제기랄― 여기서 멈춰야 하나?"
다른 건 몰라도 대한일보에 찾아가 사과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그건 다른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무튼 알려는 줘야겠지."
김신환은 힘겹게 전화를 걸어 정일완 등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뭐? 뭐라고? 신환아― 그게 사실이야?"
―휴, 미안하게 됐다.
고려일보 사장 정일환은 김신환의 전화에 깜짝 놀랐다.
광고가 일제히 끊어졌지만 더움과 함께 계획하고 있는 온라인 뉴스 서비스가 곧 시작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막힌 자금의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자금 순환이 원활하게 이뤄지기 전까지 융통하려고 했던 자금줄이 막힌 것이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뭐? 그게 뭔데?"
―…대한일보.
"뭐? 그 새끼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
―…일환아.
"됐어.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이만 끊자."
정일환은 김신환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양팔로 감싸 안았다.
은행에서 들어오기로 했던 자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당장 회사 운영이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회사 주식이라도 팔아야하나?'
"후―"
'아냐, 그건 안 돼. 그랬다가는 경영권 방어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어.'
"쯧."
'하지만 당장 이번 달 월급을 줘야 하는데… 사원들에게 뭐라고 말하지?'
이미 회사 전체에 광고가 끊어진 사실이 알려진 상태였다.
다들 이 일로 인해 많은 걱정들을 하고 있었다.
사내에 이번 일과 관련해서 흉흉한 소문들이 돌고 있어서 사원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일환은 오늘쯤 전 사원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가질 생각이었다.
현재 광고가 끊어진 이유와 앞으로 고려 일보가 나가려는 방향.
더움과의 협력을 통한 온라인 뉴스 서비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행에 자금 융통을 받았다는 말로 사원들의 불안감을 불식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은행자금융통 계획이 시작하기도 전에 막힌 것이다.
이게 없이는 설명회를 열어봤자 불안감만 증폭시킬 것이다.
"크, 이제 어쩌지?"
정일환이 걱정하고 있을 때 사장실 문이 덜컥 열렸다.
"무, 무슨 일이야? 노크 없이 문을 열지 말라고 했잖아?"
"예? 여러 번 해도 대답이 없기에…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 그랬나? 미안해요. 내가 생각할게 좀 있어서. 그래 무슨 일이죠?"
"예? 사장님이 오늘 발표할 것이 있다고 하셔서, 전 사원들을 강당으로 모아달라고 하셨잖아요?"
"아? 그랬지? 이것 참. 미안해. 내가 좀 정신이 없군."
"……."
"아, 미안. 곧 갈 테니. 나가 봐요."
"예, 사장님."
비서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장실 문을 닫았다.
"망, 망했다. 이제 어쩌지?"
정일환은 이제 곧 강당으로 가서 전 사원들 앞에서 설명회를 가져야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계획은 완벽했다.
마지막 은행 대출 자금만 빼면 말이다.
그게 없다면 설명회는 하나 마나였다.
그때 다시 문이 덜컥 열렸다.
"곧 나가요. 잠깐만 기다려요."
"사장님? 접니다."
"아, 이 국장."
"다들 지금 목을 빼고 사장님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그…그래요?"
이 국장이 걱정스런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얼마 전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자신을 믿어 보라고 큰소릴 쳤던 자신이었다.
"준비 끝났어요. 가시죠. 이 국장님."
정일환은 환하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 국장의 어깨를 쳤다.
그러자 그제야 이 국장의 걱정스런 표정이 사라지며 그의 뒤를 따라왔다.
'젠장, 어쩌지? 지금이라도 취소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렬한 함성과 함께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아!"
"아하하! 여러분 감사합니다."
모두의 얼굴에서 커다란 기대감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회사 내 분위기가 흉흉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장이 나서서 사원들 전체를 대상으로 회사의 미래 전망을 발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게다가 발표를 준비했던 사원들 사이에서 약간씩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이번 설명회에서 사장이 깜짝 놀랄 일을 발표한다는 것이다.
그걸 듣고 나면 불안한 마음이 싹 가실 거라는 말이었다.
어느덧 이 소문은 회사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졌다.
그래서 사원들 사이에서 엄청난 기대감이 떠올라 있었다.
현재 한국 사회는 IMF사태를 겪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는 시절인 것이다.
그렇기에 설명회에 거는 사원들의 기대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일환은 사원들의 환대에 살짝 놀라고 있었다.
"사장님, 파이팅!"
"사장님,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려 일보, 고려 일보."
누군가의 선창으로 전 사원이 고려 일보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열기에 떠밀리듯 정일환은 자신도 모르게 연단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뒤 벽면에 커다란 발표용 스크린이 스르륵 내려왔다.
오늘 발표할 내용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아, 안 돼! 설명회는 중…지야!'
스크린이 내려오자마자 바로 준비해뒀던 영상이 흥겨운 배경 음악과 함께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공부한 정일환이 TF팀을 꾸려서 미리 준비한 영상이었다.
영상은 처음 고려 일보가 한국에서 시작되었던 당시의 사진과 함께 배경음악이 흘러나오며 시작되었다.
영상 한쪽에서는 당시를 회상하는 글자들이 떠올랐다.
전 사원의 이목이 영상에 집중되었다.
98년 당시에는 아직 이런 식의 영상 발표가 드문 시기였다.
과연 미국 물을 먹은 사장이 뭔가 다르긴 다르다는 말들이 사원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런 반응들을 정일환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제…제기랄! 이거 반응이 너무 좋잖아?'
반응이 좋으면 당연히 좋아해야 할 일이지만 설명회를 취소하려는 정일환에게는 가시방석이었다.
어느덧 영상이 끝났다.
그러자 강당에 모인 사원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사원들 중에 오래된 경력자들은 눈에 눈물이 살짝 고여 있기까지 했다.
그만큼 영상의 효과가 컸던 것이다.
이제 정일환이 앞으로 나와 앞으로 고려 일보가 나아가려는 방향에 대해 설명할 차례였다.
'끄응, 지금이라도 취소해야 하나?'
"아, 여러분 감사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폭발적이네요."
정일환이 마이크를 들고는 웃으며 첫 번째 멘트를 꺼냈다.
원래 계획에 들어 있던 멘트였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그동안 준비해두었던 발표 자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원래 정일환은 첫 번째 멘트 뒤에 미안하다며 설명회는 다음 기회에 하자고 할 생각이었다.
중요한 일이 매듭지어지지 못해서 오늘 발표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둘러대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입을 열자마자 미꾸라지라도 먹은 양 입이 술술 풀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