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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205화 (205/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05화

205화

#54장 서예리의 유혹

"예리!"

코넬대 티셔츠를 입은 금발의 젊은 백인 남자가 말을 건넸다.

서예리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학 내 잔디밭 벤치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한 손에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있었는데 코넬대 캠퍼스에 입점한 신라퀸즈의 커피였다.

그녀 주변에는 친구들이 둘러싸고 깔깔거리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녀들의 손에도 모두 짠 듯이 신라퀸즈의 커피가 들려 있었다.

"헨리, 무슨 일이야."

서예리가 웃으며 물었다.

헨리는 그녀의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럴 만도 했다.

서예리는 코넬대의 여왕이었다.

이름도 낯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여왕.

코넬대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정도로 유명했다.

지금도 다양한 매력을 가진 미인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평범한 여자들과는 뭔가가 달랐다.

"예리, 이번 주말에 시간 있니?"

그의 말에 예리 주변에 있던 여학생들이 입가에 손을 올리며 슬며시 웃었다.

헨리가 이번 주 내내 예리의 주변을 맴돌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헨리 같은 남자는 하루에도 몇 명이나 있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예리의 승낙을 얻어낸 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친구들의 얼굴에는 상당히 기대 섞인 표정들이 드러나 있었다.

예리는 그런 친구들에게 살짝 웃음을 내보이며 헨리에게 대답했다.

"미안, 난 그때 뉴욕에 있을 거야."

"뭐? 뉴욕에는 왜?"

"삼촌이 부탁한 일이 있어서. 다음 주에나 돌아올 예정이야."

"그래? 그럼 내가 차로 데려다 줄까?"

코넬대가 있는 이타카에서 뉴욕까지는 차로 몇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고맙지만 사양할게. 헨리, 나도 운전을 좀 즐기고 싶거든."

"알았어.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헨리가 왼쪽 눈을 깜박거리며 예리에게 윙크를 보냈다.

그가 사라지자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었다.

"예리, 헨리 정도면 괜찮지 않아? 한번 사겨보지 그래?"

"뭐, 그리 나쁘진 않지."

예리가 웃으며 대답했다.

친구들 말대로 헨리는 제법 괜찮은 남자였다.

준수한 외모에, 건장한 몸과 코넬대 학생다운 지성과 위트.

20대 여자애라면 한번쯤 관심을 가질 법한 매력적인 남자인 건 사실이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로는 집안도 상류집안에 상당히 부유한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예리는 썩 마음이 당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예리가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그런 여자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다만 헨리에게서 딱히 끌리는 구석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캠퍼스에 널리고 널린 그런 남자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나쁘지는 않지만 딱히 남보다 나아 보이는 구석을 보지 못했다고 할까?

그만큼 코넬대 학생들의 수준이 높은 것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예리의 성에 차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참 야망이 큰 계집애야. 푸흣.'

서예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평범한 것에는 왠지 마음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해도 남이 자신과 똑같은 것을 가졌다면 금세 흥미를 잃고는 했다.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만큼 어릴 때부터 일류 지향적인 삶을 살아왔다.

서예리의 어머니는 재벌 순위 20위인 부영 그룹의 둘째였다.

어릴 때부터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재벌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삶을 살다보니 생긴 습성이었다.

예리의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어디 특별한 남자는 없는 걸까? 세상에 둘도 없는 그런 남자 말이야.'

서예리는 그런 남자야말로 자신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삼촌의 전화를 받고도 귀찮게만 여겨진 이유였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대충 돈 많은 남자라는 것은 알겠다.

아마도 가문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남자겠지.

하지만 돈만 많은 남자는 여지껏 많이 만날 수 있었다.

그다지 특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주변 사람들 중 돈 없는 사람은 없었다.

'따분한 주말이 되겠군.'

서예리는 그나마 오랜만에 대학 도시인 이타카를 벗어나 뉴욕을 방문하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쇼핑이나 마음껏 해야지.'

예리는 삼촌이 이번 일로 통장에 보내 준 달러를 생각하며 위안을 삼았다.

금요일 마지막 수업을 마친 서예리는 룸메이트와 인사를 나눈 후, 차를 운전해 뉴욕을 갔다.

몇 시간에 걸친 운전도 서예리의 쇼핑욕심을 막지는 못했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간 곳이 맨허튼에 있는 센츄리21이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최대의 쇼핑거리인 우드버리 아울렛에 가고 싶었다.

그곳은 뉴욕 최대의 쇼핑몰로 무려 221개의 브랜드가 입점해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시내에서 상당히 벗어난 곳에 있어서 일정을 맞추기 어려웠다.

맨허튼에서 한 시간 반은 더 가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서예리는 맨허튼 다운타운에 있는 센츄리21을 선택한 것이다.

"흠, 친구들이 알려준 곳이기는 하지만 내 취향은 아니야."

맨허튼 다운타운점은 정말 많은 제품들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관광객들로 엄청 붐볐다.

게다가 한국처럼 점원이 맞는 사이즈를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직접 찾아야 했다.

서예리는 대충 한 바퀴 둘러 본 후 서둘러 나왔다.

주차장에서 차를 뺀 후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어퍼 이스트 사이드였다.

이곳은 고급스런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고, 부자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루이비통, 티파니앤코, 프라다, 발렌티노와 같은 수많은 명품들이 모여 있었다.

상당히 비싼 매장들이 즐비한 곳이다.

인근의 공영 주차장에 차를 파킹한 후, 서예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쇼핑에 나섰다.

군자금도 두둑이 받았으니 나름 쇼핑을 즐길 생각이었다.

그녀가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루이비통 매장이었다.

친구들이 반드시 가보라고 알려준 곳이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방문한 것이다.

"후후, 다이애나가 꼭 가보라고 했는데 내 마음에 드는 게 있으려나?"

다이애나는 제일 친한 친구였다.

이곳 매장의 단골이라고 했다.

서예리는 한참을 돌아다니며 매장을 구경했다.

하지만 좀처럼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아쉽지만 서예리는 물건을 사지 않고 그냥 매장을 나서려고했다.

그런데 갑자기 매장 여점원이 매장을 나가려는 그녀를 제재 했다.

"왜 그러시죠?"

"손님, 죄송하지만 잠시 쇼핑 가방 좀 살펴보겠습니다.

서예리는 오늘을 위해 커다란 쇼핑 가방을 들고 왔다.

그게 눈에 띄었나 보다.

"아니? 설마 제가 뭔가 물건이라도 훔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죄송하지만 손님. 이곳은 이런 일이 워낙 많이 생기는 곳이라서 말이죠."

"전 훔치지 않았어요."

서예리가 발끈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왠지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가 났다.

저 사람들이 자신을 뭘로 보고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걸까?

평생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더 당황스러웠다.

동양인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마저 들어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럼, 가방을 보여주시면 간단히 해결되지 않겠어요?"

여점원이 양팔을 감싸 안은 태도로 한쪽 손을 두드리며 말했다.

서예리는 더욱 기분이 상했다.

"좋아요. 보여 드리죠. 하지만 아무 것도 없으면 제게 사과하셔야 할 거예요."

"당연히 사과드려야죠."

여점원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왠지 그런 태도마저 기분이 나빴다.

"자, 여기 있어요."

입구에서 벌어진 소동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저마다 웅성거렸다.

"이런? 이건 우리 제품인 것 같은데요?"

여점원이 가방 속에서 작은 지갑을 하나 꺼내며 말했다.

서예지는 깜짝 놀랐다.

자신은 그런 지갑을 넣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 아니에요. 전 그런 적이……"

여 점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말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아가씨."

어디선가 나타난 매장 점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 말이 맞죠? 점장님. 얼굴 예쁘고 부티나게 생겼다고 안 훔치는 게 아니거든."

여점원이 더욱 심술궂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 화장으로 가려 놓은 주근깨가 매장조명을 통해 밝게 드러났다.

갈색 머리카락 아래 그녀의 얼굴이 왠지 더욱 심술궂게 보였다.

"전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런 지갑 정도는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요."

"그래? 그러면 도벽이라도 있는 거야?"

"뭐…뭐라고?"

"아무튼 팩트는 계산도 하지 않고 여길 나가려고 했다는 거지."

사람들이 서예리를 바라보며 뭐라고 웅성거리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발갛게 상기되었다.

"경찰을 부르세요. 점장님. 저런 도둑년이 하는 말은 더 들을 필요도 없어요."

여점원이 점장을 재촉했다.

"알, 알았어. 메리양."

점장이 휴대폰을 꺼내들려고 했다.

서예리는 더욱 당황했다.

이런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큰 망신이었다.

집안 어른들의 문책은 물론이고, 대학에 소문이 퍼질지도 몰랐다.

평소 동양에서 온 퀸이니, 프린세스니 하는 소문에 배알이 틀려하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틀림없이 큰일로 번질 것이다.

여자들의 질투는 종종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었다.

자신에게 닥쳐올지도 모를 미래를 상상하자 서예리는 끔찍했다.

"잠, 잠깐만요. 기다려 주세요. 점장님. 이거 제가 살 테니깐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

"아니, 그럴 순 없지. 일단은 경찰을 불러야 해."

여점원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그런?"

서예리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경찰이 오고 조사까지 하게 되면 기록이 남게 된다.

더는 감추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저…저기 그러지 말고……."

여점원이 심술궂은 표정으로 뭔가 말하려고 할 때였다.

그들 사이로 누군가가 쑥 하고 들어왔다.

"저기 잠깐만요."

서예지는 자신들 사이로 갑자기 들어온 사람을 확인했다.

190은 될 것 같은 큰 키에 검은 머리.

자신과 같은 동양인이었다.

날카로운 턱선과 짙은 눈썹.

나름 잘생긴 얼굴이었다.

"조금 전부터 보고 있었습니다만, 이 아가씨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더군요."

강혁의 말에 서예리는 살짝 얼굴이 펴졌다.

모두가 자신을 도둑처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강혁이 마치 구세주처럼 보였다.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제가 여기서 지갑을 꺼내는 걸 보셨잖아요?"

"물론 보고 있었죠. 그래서 더 의심스럽다는 말입니다."

"……?"

"점장님, 이 지갑이 놓여 있던 장소가 어디인지 아십니까?"

"어디 보자. 이건 저쪽 3번째 매대에 있던 거군요."

"맞습니다. 사실 저도 이 지갑을 그곳에서 봤거든요."

"그러시군요?"

"그런데 분명 제가 이 지갑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본 후, 이 아가씨는……."

"예리, 서예리예요."

"그렇군요."

서예리의 말에 강혁이 웃었다.

"이 아가씨는 그곳에 전혀 들르지 않았어요."

"아, 맞아요. 전 그쪽을 한 번만 보고 지나갔어요. 지갑에는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럴 리가요? 그럼 대체 왜 이 지갑이 여기 있는 거죠?"

점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CCTV가 있죠?"

강혁의 물음에 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확인해 보시죠."

"알겠습니다."

점장과 강혁이 함께 CCTV를 확인하기 위해 이동했다.

그때 여점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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