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12화
212화
#56장 신상현의 역습
서성주 회장의 말이 맞다면 이는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이제 겨우 중학교 2학년 정도 밖에 안 된 아이가 대한민국을 암암리에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당시에는 감히 아버지 앞이라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과장된 말일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벌어진 일을 보니 아버지의 말이 과장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다 사실이었어.'
서인태는 부들거리는 몸을 진정시켰다.
어쨌든 자신은 살아남았지 않은가?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곧 다른 쪽으로 생각이 돌아갔다.
신상현이 그토록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에 맞춰서 움직이면 되는 일이다.
어차피 조상 대대로 그렇게 해왔지 않은가?
자신의 집안은 대대로 권력자의 비위를 맞춰주면서 그로 인해 떨어지는 콩고물을 먹어왔다.
생각해보면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서인태는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앞으로는 어디서든 말을 조심해야 해.'
그의 눈빛이 다시 번들거렸다.
권력을 향한 그의 욕심에는 한정이 없었다.
이번에도 어떻게 해서든, 어떤 짓을 해서든 권력을 향유할 것이다.
주변을 한 번 살핀 후,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들어갔다.
* * *
"안녕하세요. 존 회장님."
"한유진 씨, 안녕하세요? 미국 땅에서 오랜만에 한국어를 들으니 좋군요."
"그러시군요. 저는 그나마 한인타운에 살아서……."
"그렇죠? 어디 뉴욕 생활에는 좀 익숙해 졌나요?"
"아직 여러모로 낯설기는 하지만 곧 익숙해지겠죠."
"한유진 씨라면 금방 적응할 거예요. 그래도 혹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 회사 측에 말씀하세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럼, 일 보세요."
"예, 회장님. 좋은 하루 되세요."
한유진은 밝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올해 28살인 한유진은 골든 타워 한국지부에서 입사시험을 치루고 본사로 발령받은 직원이었다.
비서실로 발령받은 한유진은 뉴욕생활과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유진, 어서 와요."
"이리나 선배, 안녕하세요."
비서실로 들어간 한유진은 미리 와있던 이리나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머, 혹시 이 커피. 회장님께 드리실 건가요?"
"응, 회장님이 모닝커피를 즐기시거든."
"그럼, 제가 갖다 드릴게요."
"응? 아니 그건 내가 하는 일인데."
"에이, 선배. 이런 허드레 일은 당연히 신참인 제가 하는 거죠. 선배는 쉬세요."
한유진은 이리나를 만류하며 커피 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회장실로 걸어갔다.
"흐음, 이상한 일이군요. 생각보다 일처리가 느리단 말이죠?"
"예, 회장님. 정부에서는 빠른 일처리를 약속했지만 실무진에서 계속 태클을 거는 모양입니다."
강혁은 대진건설 사장 최삼우 사장과 화상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일선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회장님."
"답답하군요."
골든 그룹의 대대적인 투자에 대해 한국 정부와 국민은 크게 환영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달라가 크게 부족한 한국 정부 입장에서 강혁의 대대적인 투자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선 실무진 차원에서 일처리가 늦는 모양이었다.
각종 서류처리와 민원 업무와 관련해서 진행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원래 계획했던 시기에 데이터 센터와 공장을 만드는 것이 어렵게 된다.
"제가 대통령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또 다른 건 없습니까?"
"그게……."
최삼우 사장이 말을 줄였다.
"최 사장님?"
화상 너머로 최삼우 사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은 국내 건설사들이 단합해 저희를 견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뿐이 아닙니다. 일선 공무원들도 여기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
이번에도 일선 공무원들이 문제라고 하다.
국내 건설사들이 힘을 합쳐 대진건설을 견제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최삼우 사장의 말에 강혁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뭔가 다른 힘이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일단 힘드시더라도 계획했던 일들을 잘 마무리 해주시기 바랍니다."
"예,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똑똑―
"회장님, 모닝커피를 준비했습니다."
문 밖에서 들려온 소리에 강혁은 화상 너머 최 사장을 향해 말했다.
"커피가 왔네요. 사장님 이번 회의를 이걸로 마치죠."
"예, 회장님. 수고하십시오."
"예, 사장님도 이제는 좀 쉬세요."
스크린의 불이 핏 하고 꺼지자 강혁이 말했다.
"들어와요."
강혁의 말에 이어 문이 열리며 한유진이 들어왔다.
"한유진 씨?"
"예, 회장님. 오늘은 제가 커피를 가져왔습니다."
한유진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들고 들어왔다.
"여기 두고 가세요."
"예, 회장님."
커피를 책상 위에 두고 한유진은 잠시 강혁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아, 아니에요. 그럼."
한유진은 허리를 숙여 강혁에게 인사를 하고는 회장실을 나섰다.
'꿈쩍도 안하네? 휴우―'
한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한유진은 신상현 측에서 보낸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신상현을 위해서 일하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원래 한유진은 삼강그룹의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커리어 우먼이었다.
그녀는 삼강그룹 비서들 중에서도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는 여성으로 대학시절에는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녀의 씀씀이가 너무 커다는 사실이다.
명품 백과 명품 옷.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하듯이 물건을 사 모았다.
종국에는 자신의 월급으로 감당이 안 되자 카드빚을 지었다.
갚을 길이 없게 되자 평소 자신에게 마음이 있던 회계부서의 직원을 유혹해 공금을 횡령하기 까지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박광수라는 남자가 자신을 찾아왔다.
한유진은 그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살이 떨려왔다.
자신을 쳐다보는 박광수의 눈길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름이 끼쳤다.
'날 사람이 아니라 죽은 고깃덩이를 바라보는 느낌이었어.'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던 한유진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상어 턱에 쥐 눈을 가진 남자.
그는 자신이 저지른 짓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 후로 한유진은 그가 시키는 짓은 뭐든지 할 수 밖에 없었다.
박광수는 자신에게 최선을 다해서 강혁 회장을 유혹해보라고 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유혹해서 넘어 오지 않은 남자가 없었던 것이다.
조금 전에도 커피를 갖다 놓으며 슬쩍 가슴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강혁은 조금도 반응이 없었다.
사실 본사로 발령을 받은 후, 지금까지 강혁을 여러 차례 대면하면서 그때마다 은근히 유혹의 몸짓을 보여줬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솔직히 한유진은 강혁 때문에 상당히 자존심이 상했다.
처음에는 강혁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를 좋아하는 그런 부류의 남자인줄 착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강혁에게 몇 명의 여자 친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알게 된 여자는 가끔 강혁과 식사를 함께하는 뉴욕시의 스타 검사 안젤라 존슨이었다.
헐리우드 여배우라도 해도 믿을 것 같은 뛰어난 외모와 그에 못지않은 지성을 갖춘 여자였다.
유명한 살인 사건을 해결한 후, 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을 TV로 본 적이 있었다.
한유진은 그 방송을 보고, 안젤라에게 큰 호감을 느꼈다.
유려한 말솜씨와 뛰어난 추리력, 단호한 행동력까지.
검사 안젤라 존슨은 그 자체로 멋진 캐릭터였다.
거기다 여배우를 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까지.
뉴욕 시민들이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이해가 갔다.
사람들은 언젠가 그녀가 뉴욕 시장에 출마할 것을 당연시 여기고 있었다.
만일 정말로 그녀가 여성으로서 뉴욕의 시장이 된다면 언젠가 백악관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해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동경하게 된 여자가 강혁과 만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안젤라가 다가 아니었다.
절대가인 천려시.
이미 대명사처럼 굳어진 아시아 최고의 인기 여배우가 강혁에게 열렬히 구애하고 있었다.
며칠 전 강혁이 운영하는 복지재단에서 개최한 자선파티 이야기는 유명했다.
안젤라 존슨과 천려시가 번갈아가며 강혁과 춤을 추고 파티가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이 강혁의 옆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뉴욕 시민들 사이에서는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피우고 있었다.
젊은 재벌 총수와 스타 검사, 그리고 여배우.
세 사람의 불꽃 튀는 삼각 로맨스 이야기가 심심하면 화제에 올랐던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저마다 편을 나눠 원하는 커플을 지지하는 모임이 생길 정도였다.
이미 페이스북과 온라인 사이에서는 이들 팬들끼리의 댓글 다툼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박광수에게 반드시 강혁을 유혹하라는 지령을 받은 한유진으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비서실 최고의 미인 이리나 역시 강혁을 좋아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처음 비서실에 배정되었을 때, 이리나를 대면하고 받았던 충격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사람이 아니라 마치 요정이나 인형을 보는 듯한 미모였다.
한유진은 이리나를 만나고 과연 자신이 강혁을 유혹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미 오랫동안 이리나같은 미인을 지근거리에서 보아왔던 강혁이 자신 정도의 미모에 눈이나 차겠나 하는 자조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노골적인 노출에도 전혀 미동하지 않는 걸 보면 자신으로서는 역부족인 모양이다.
"하아―"
가볍게 한숨을 내쉰 한유진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재빨리 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그리고 몰래 주변을 살핀 후, 종이를 찢어 소매에 숨겼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한유진은 주변의 비서들에게 용무를 말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비서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사무실 복도에 걸려 있는 그림 뒤에 종이를 숨겼다.
잠시 후, 한유진은 다시 비서실로 돌아가 업무에 열중했다.
삐삣―
문자가 온 소리에 헨리 박은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돌려 핸드폰을 확인했다.
자신에게 온 문자를 확인하자 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 헨리, 어디가? 담배 피울 거면 같이 가자."
"아냐, 화장실에 가는 거야."
"그래? 난 아무래도 한 개피 펴야겠다."
"그렇게 해. 찰스."
헨리 박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회사에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가는 복도를 향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복도의 그림에서 쪽지를 확인하고 바지 주머니에 감췄다.
그곳에 적혀 있는 내용들은 강혁이 아침에 회의할 때 최 사장과 나눈 대화였다.
지금까지 회장실에 몇 차례 도청장치를 설치한 적이 있지만 금세 발각되었다.
알고 보니 골든 타워 보안 팀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회장실과 사내 건물을 검사했던 것이다.
이런 조치는 경쟁사들이 골든 타워가 어느 곳의 주식을 사는지 항상 염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런 아날로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듣게 되면 종이에 적어 자신에게 전달하도록 한 것이다.
사실 아직 한유진은 헨리 박이 스파이인 걸 몰랐다.
의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사실 헨리 박은 신상현 측이 보낸 스파이로 국군 정보사 소속의 정예요원이었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기관의 요원이 한 개인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 기관에 신상현의 마수가 얼마나 깊이 파고 들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