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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220화 (220/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20화

220화

#58장 위기의 판사

"여러분 저기 대한 일보 사옥이 있습니다."

광화문 시위를 마친 10만 명이 넘는 자발적인 시위 인파가 대한 일보 사옥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 저들을 향해 한 마디 해줍시다."

"에라이, 매국노 신문아!"

에라이, 매국노 신문아!

"사죄하라! 사죄하라!

사죄하라! 사죄하라!

한바탕 욕설과 시위 구령을 외친 시위대들이 물러났다.

하지만 사옥에서 근무하고 있던 대한 일보 기자들은 사기가 크게 무너졌다.

바로 사옥 인근에서 10만 인파가 외친 욕설과 구령은 이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크, 사장님은 왜 하필 강혁 회장을 건드려 가지고."

"그러게 말이야. 요즘 진짜 죽을 맛이야."

"선배도 그래요?"

"말도 말아. 요즘 아는 사람들 등쌀에 피해 다닌다."

"저도요. 집에 내려갔더니. 할머니가 왜 그런 신문사에 다니냐고 역정을 내셨어요."

"그…그래?"

창문 너머로 시위대를 살펴보던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두 기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자라면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인 대한 일보였다.

두 사람 모두 대한 일보에 입사했을 때 가족과 지인들에게 축하를 받았던 기억이 선했다.

그만큼 대한 일보 기자라는 자리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지금은 대한 일보 기자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에게 경원시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런 날이 있을 거라고는 예전에는 정말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 가서 감히 대한 일보 기자라는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대한 일보 기자라는 사실을 밝히는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변했다.

조용히 다시 명함을 돌려주며 인터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양반이었다.

대뜸 강혁 회장 이야기를 거론하며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전 국민이 대한일보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처럼 기자 노릇하기 힘든 적도 처음이에요."

"휴우, 그러게 말이다. 왜 하필 강혁 회장을 건드려 가지고 이런 수모를 당하는지 모르겠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건 그렇고 선배, 우리 회장님과 사장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요?"

"……?"

"이제 선고 공판이 며칠 안 남았는데 이대로라면……."

"……."

"아무래도… 힘들겠죠?"

최 기자는 오랫동안 법원을 출입해온 베테랑 기자인 선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인지 선배 기자는 쉬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선배 기자가 천천히 입을 뗐다.

"그건… 모르지."

"……?"

"물론 상황이 어렵게 돌아가는 건 맞아. 국민들의 공분도 장난이 아니고."

"역시 그렇죠? 그러니 아무래도……."

"그건 아직 몰라."

"……?"

"법원 판결이 국민들 감정에 딱딱 맞게 내려지는 게 그동안 얼마나 있었냐?"

"그…그렇다면?"

"어쩌면 국민들이 우리 대한 일보를 더 미워하게 되는 판결이 내려질지도 모르지."

"……!"

"대한 일보가 괜히 대한 일보가 아냐."

"무슨 다른 수가 있다는 말인가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그냥 당하고 있을 양반들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

최 기자는 선배의 말에 왠지 모르게 그냥 수긍이 갔다.

그의 말대로 서성주 회장이나 서인태 사장이나 그냥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최 기자는 선배 기자의 말에 마음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     *     *

깊은 밤, 자정을 넘긴 시각에 강형우 판사는 자신이 써 내려간 판결문을 다시 한 번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아니, 이미 날짜가 지났으니 오늘이었다.

오늘 오전 11시. 선고 공판이 열린다.

강형우 판사는 검찰 측에서 내린 구형을 그대로 인용할 생각이었다.

서인태 징역 7년에 벌금 130억.

서성주 징역 5년에 벌금 30억.

이 두 사람을 필두로 대중일보와 대동일보 사주 역시 대동소이한 선고를 내릴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판결문에 써내려간 글들을 꼼꼼하게 살피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판결문을 마지막까지 꼼꼼하게 살핀 강형우는 소회가 남달랐다.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 사방에서 전해오는 압박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주변 지인부터 동네 사람들까지.

결국 강형우는 아예 전화기를 닫고 살았다.

하지만 몇몇 전화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중 하나가 대학 은사이자 현 법무부 장관인 이은성의 전화였다.

법관출신이자 서울대 법대 교수였던 이은성 교수는 현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이 되었다.

평소 꼿꼿한 신념과 바른 역사의식을 가진 이은성 교수를 강형우는 학생 시절 존경했었다.

그런 은사의 전화라 강형우는 전화번호를 보고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잘 있었나? 강 군. 아니, 강 판사. 하하하. 나 이은성이네.

"아니, 교수님? 아니 장관님께서 어찐 일이십니까? 참 늦었지만 장관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하하, 아니네. 다 늙어서 조국에 봉사할 수 있게 되었으니. 큰 영광이지.

두 사람은 잠시 오랜만에 만난 소회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다 마침내 이은성에게서 먼저 본론이 나왔다.

―참 자네 요즘 언론사 사주들 조세포탈관련 재판을 맡고 있지?

"아, 예. 안 그래도 요즘 골치가 아파 죽겠습니다. 하하."

―그래, 그렇겠지. 나도 사실 그 일 때문에 전화를 한 거네.

"……!"

―그 분들 잘못은 명백하지. 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공헌을 해왔나.

"……?"

―아예 무죄로 할 수는 없겠지만 그동안의 공헌도를 봐서라도 집행유예가 적절하지 않겠나?

"그, 그 말씀은 혹시 대통령께서……."

―아니, 아니 그건 아니야. 그 양반은 그럴 사람이 아니지. 쯧!

"그…그렇다면?"

―강군. 자네도 앞으로 일개 판사로 끝낼 생각은 아니겠지?

"……?"

―앞으로 못해도 장관이나 아니 대법관까지도 바라봐야지.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이 나라를 움직이는 실세는 바뀐 적이 없다네.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

―그러니 잘 판단하는 게 좋을 걸세. 이번 일만 잘하면 자네 인생에 큰 보탬이 될 테니 말이야.

"……."

강형우는 이은성 교수의 말에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한국 사회에는 그 이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강대한 세력이 존재했다.

오랜 인맥과 혼맥으로 이뤄진 강고한 이너 서클.

일제에 충성하다가 해방 이후에는 반공을 기치로 내세워 명맥을 이어온 이들.

이들은 독재정권에 부역하고, 재계와 혼맥을 맺어 공고한 세력을 구축했다.

'일진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이은성 장관이 말하고 있는 실세란 바로 그곳이다.

이은성 교수는 알고 보니 그들 쪽 사람이었다.

"설, 설마 교수님도 그곳 사람이었습니까?"

―놀랐나 보군.

"교, 교수님이 그럴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였네. 하지만 이 나이가 되어보니 철이 들더군.

"……!"

아마 김현중 대통령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이은성 장관이 이런 사람일 줄은 말이다.

평소 이은성 교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런 전화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고, 이은성은 일진회의 끄나풀이었다.

―자네도 장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나?

"……!"

―지금이 기회네. 그 기회를 잡는 건 이제 자네에게 달려 있는 셈이지.

"……"

―잘 판단해 보게나. 그럼 이만 끊지.

전화를 끊은 후, 강형우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

평소 존경했던 은사의 변질을 눈앞에서 봤기 때문이다.

이은성 교수가 이런 사람일 거라는 건 강형우 역시 꿈에도 몰랐다.

"일진회 새끼들!"

강형우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법조문만 본다면 복잡할 것이 없는 재판이었다.

이들 언론사들이 그동안 공공연하게 조세포탈을 해온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검사가 내린 구형은 법조문에 맞게 내려졌다.

그러니 그 역시 선고를 내리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일진회는 자신의 눈앞에 출세를 보장하는 황금 동아줄을 보여 주었다.

그 이면에는 자신들을 따르지 않았을 때 불이익 역시 각오하라는 뜻이었다.

누군가를 올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내릴 힘이 있다는 것과 동의어다.

만일 이번 선고에 자신이 그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앞으로 출세 길을 막힌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장관이 한 말을 바꿔 생각해보면 자신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 내가 이런 말 몇 마디에 생각을 바꿀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강형우는 단호하게 결심을 내렸다.

법으로 심판할 수 있는 최대한의 판결을 내리겠다고 말이다.

아마 구형을 내린 검찰도 깜짝 놀랄 것이다.

검찰이 내린 구형보다 훨씬 줄어든 형량으로 선고가 내려질 것이라고 판단했을 테니 말이다.

강형우는 연일 거세지는 국민들의 여론을 살피며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다 자업자득이지. 스스로 했던 일이 업보로 돌아왔으니 누구를 탓할까?"

강형우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십분 옳았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 일로 인해 자신의 출세 길이 막히게 될지는 몰라도 말이다.

사실 일진회는 이주 전 이미 자신에게 내려야 할 판결문과 시나리오까지 보내주었다.

아주 정교하게 짜놓은 판결문이었고, 시나리오였다.

이 판결문과 시나리오를 자신에게 건넨 사람은 놀랍게도 법제처 차장이었다.

'박 차장님!'

'강 판사, 나쁘게 생각하지 말게. 이 일만 해내면 자네는 앞으로는 승승장구 하게 될 거네.'

'……!'

'이 일은 대법원장님도 승인한 거야.'

박 차장의 말에 강형우는 두 눈을 부릅떴다.

설마 대법원장까지 한통속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뭘 그리 놀라나? 원래 다 그런 거야. 그러니 자네도 딴 만은 안 먹는 게 좋을 거네.'

세상이 바뀐 것 같아도 세상은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뀐 건 어쩌면 대통령 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박 차장님.'

이 날 강형우는 박 처장에게 판결문과 시나리오를 받아왔다.

그리고 며칠을 드러누었다.

더러운 세상을 탓하며 고주망태가 되어서는 병가까지 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강형우는 그날 책상 앞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홀린 듯이 판결문을 썼다.

지금 다시 검토한 판결문이 그날 써내려간 판결문을 다시 보기 좋게 정리한 것이다.

"일진회 새끼들, 날 만만하게 보다니. 아마 깜짝 놀랄 거다."

서재에서 일어난 강형우는 불을 끄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딸 아이가 잠든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강형우는 딸만 셋이었다.

첫째는 고등학생으로, 대학입시를 준비 중이었다.

둘째는 중학생으로 한참 사춘기에 접어들어 말썽을 부릴 나이었다.

첫째의 방에는 아직도 불이 켜져 있었다.

"유진아, 아직도 공부하고 있구나."

"예, 아빠. 먼저 주무세요."

"그래,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다들 하는 고생인걸요. 뭐."

"그래, 열심히 해."

첫째의 방을 확인한 강 판사는 둘째의 문을 열었다.

둘째 유민이는 침대에 발 하나를 떨어뜨리고 깊은 잠이 들어 있었다.

강 판사는 둘째의 침대를 정리해준 뒤 막내딸의 침실로 갔다.

늦둥이로 이제 유치원에 들어간 막내딸 유선은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재롱둥이였다.

강 판사가 막내딸의 문 앞에 섰을 때였다.

핸드폰에서 문자메시지 소리가 울렸다.

"이 밤중에 누구지?"

핸드폰 문자를 살펴본 강 판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강 판사는 재빨리 막내딸의 문을 열었다.

"이…이럴 수가?"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막내딸이 누워 있어야 할 침대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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