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27화
227화
#60장 신상현의 분노
"자, 이젠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피의자 측의 수석 변호사인 이 변호사가 강 판사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시간 끌 필요가 있느냐?
빨리 판결을 내리고 그만 재판을 끝내자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이상을 느끼기 어렵겠지만 강 판사만은 알았다.
그의 얼굴과 눈빛에서 느껴지는 빈정거림을 말이다.
강 판사는 만일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면상에 주먹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지금이 재판 중이라는 사실이 원통할 정도였다.
"검찰 측도 같은 생각인가요?"
"예,
이 변호사와 한 검사 모두 재판석 가까이에 다가와 강 판사를 마주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 판결을 내리도록 하죠."
이 변호사가 피의자 석으로 물러나자 이번에는 한 검사가 말했다.
"그럼 판사님, 공정한 판단을 기대하겠습니다."
"물론이죠. 한 검사."
한 검사는 불안한 표정으로 강 판사를 한 번 바라본 후, 검찰석으로 돌아갔다.
오늘은 선거 공판이기 때문에 이미 판결문을 작성해 왔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이미 지난 공판에서 변호사의 최후 변론과 검찰 측의 구형 이유까지 설명이 끝났기 때문이다.
오늘은 판결만 내리며 되는데 이렇게 시간을 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 검사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설마, 저 양반.'
한 검사는 그제서야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강 판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의자 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화려한 변호인단을 이끌고 있는 수석 변호사인 이 변호사.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지만 지나치게 여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증거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고 했을 때, 왠지 귀찮아하는 느낌이었다.
불안해 했던 자신과는 다른 태도였다.
'아니야, 그래도 설마?'
한 검사는 반사적으로 피의자 석의 서성주와 서인태를 바라보았다.
약간의 불안함이 느껴지는 서인태와는 달리 서성주는 상당히 침착해보였다.
지금까지는 확실히 거물은 거물이라 저렇게 침착하구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이 들어오자 그 침착함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한 검사는 다시 한 번 강 판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이마에 땀이 가득한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강 판사와 재판을 함께 해왔던 한 검사였다.
이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보는 듯했다.
'바보같이 왜 이제껏 눈치를 못 챈 거지?'
한 검사는 재판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강 판사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시간을 끌어 보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선고를 미룰 수 없었다.
아이를 구해주겠다던 여성의 음성은 그 후로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휴식시간에 귀에 꼽혀 있는 통신기에 대고 몇 번이나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아이를 구했는지 물어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보고 있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강 판사는 판결문이 들어 있는 검은색 선고판을 펼쳤다.
그의 눈 앞에 두 장의 서로 다른 판결문이 들어 왔다.
떨리는 손으로 강 판사는 한 장의 판결문을 꺼내 들었다.
"재판 결과에 대해 선고하겠습니다. 피고 서성주와 서인태는……"
'훗, 이제야 결심을 했나보군.'
이 변호사는 강 판사를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대충 그의 고심을 잃을 수 있었다.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시간을 끌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자, 이제 마무리를 지으라고 강 판사. 귀여운 막내 얼굴을 봐야 하지 않겠나?'
"……오랫동안 언론사를 운영하며 피고인들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력을 감안할 때……."
'그렇지 잘하고 있어. 그동안 한국 사회에 기여한 공이 얼만데.'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으나… 검찰 구형대로 징역 7년에 벌금 130억을 선고한다."
'그렇지 너무 과한 감이 있지. 그러니 집행유예를… 뭐…뭐라고?'
이 변호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틀림없이 그렇게 구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검찰 측이 구형한 그대로 선고한 것이다.
"이…이 변호사?"
"서…서 회장님."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그게 글쎄. 저 놈이 미쳤나 봅니다."
이 변호사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이번 판결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 판사가 아이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보를 흘린 것도 자신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막내 딸을 납치하게 된 데에는 이 변호사가 건넨 정보가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판결이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이…이 빌어먹을 자식아, 너한테 갇다 바친 돈이 얼만데? 재판을 망쳐!"
흥분한 서인태가 달려와 이 변호사의 멱살을 쥐었다.
"서…서 사장님, 이러지 마십시오."
난장판이 된 피고인석은 법원 경찰이 와서야 정리가 되었다.
"그만 진정하시죠."
"뭐야? 지금 누구야?"
서인태는 자신에게 진정하라고 한 사람을 향해 화난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경찰 제복 차림의 남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상당히 키가 큰 남자였는데, 검게 탄 얼굴에 험상궃은 인상이었다.
"이수근 경장입니다. 그럼 가시죠."
철컥!
이수근 경장이라고 한 남자가 서인태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뭐, 뭐하는 짓이야?"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는 군. 이제 그만 가자고."
서인태에게 수갑을 채운 경찰은 서성주의 손목에도 수갑을 채웠다.
"이…이럴 순 없어!"
서인태는 악에 바쳐 이 변호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개자식. 넌 해고야!"
이 변호사는 서슬퍼런 서인태의 말에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서성주와는 달리 서인태는 법정 경찰에 끌려가는 내내 이 변호사를 향해 소리쳤다.
"괜…괜찮을까요? 이 변호사님."
변호인단 중 한 사람이 이 변호사에게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괜…괜찮지 않으면… 설…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하하,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저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그…그건 그렇지."
이 변호사는 다시 한 번 손수건으로 땀을 훔쳤다.
서성주 회장과 달리 서인태는 화가 나면 물불 가리지 않는 과격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인테리 답게 평소에는 상당히 젠틀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판단한 인물이 머리 위로 기어오를 때는 가차 없었다.
이 변호사는 등꼴이 오싹해졌다.
한편 울상이 된 피고인 측과 달리 검찰 측은 재판의 승리를 축하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한 검사 축하하네."
"예, 부장님. 감사합니다."
부장 검사인 김성호가 웃으며 악수를 건네었다.
한수진 검사는 동료와 상사의 축하 인사를 받으면서도 속으로 의아해했다.
이런 판결을 내릴 거면서 왜 그렇게 시간을 끌었는지 이상했던 것이다.
한 검사는 흘낏 고개를 돌려 강 판사를 바라보았다.
"어? 어디로 가셨지?"
"응? 무슨 소리야?"
"아, 아뇨. 아무 것도 아닙니다."
강 판사가 이미 재판정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한 검사는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이는 지금 어디 있나요?"
―법원 남쪽 건물 3층 계단 쪽으로 오세요.
강 판사는 법복을 벗을 생각도 못하고 급히 법정을 나섰다.
법정 앞은 이번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들로 가득했다.
"강 판사님, 이번 판결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판결에 대한 인터뷰는 사절입니다."
강 판사는 급히 기자들을 피해 남쪽 건물 쪽으로 달렸다.
다행히 이 시간에 남쪽 건물에는 재판이 없어 사람이 거의 없었다.
"헉, 헉, 헉."
강 판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쉴 새없이 올라갔다.
마침내 3층 계단을 모두 올랐을 때였다.
건물 로비 중앙에 낯익은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아빠!"
딸 유선이었다.
그녀의 옆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유선의 손을 잡고 있었다.
유선은 밝게 웃고 있었는데 마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모르는 듯 밝은 표정이었다.
"유…유선아!"
강 판사는 헐레벌떡 딸아이를 향해 달려갔다.
"……유선아!"
딸아이를 꼭 끌어 안은 강 판사는 절로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마터면 딸아이를 영원히 보지 못할 뻔하지 않았는가?
"아빠? 왜 그래?"
"…유선아, 유선아……."
강 판사는 어리둥절하는 유선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저 딸 아이의 이름을 되뇌었다.
"다행이에요. 강 판사님."
"고…고맙습니다. 당신들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강 판사는 고개를 들어 유선이의 옆에 서 있는 여성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머리를 뒤로 묶은 포니테일에 160cm 정도의 키.
마른 몸매에 눈 아래에는 살짝 주근깨가 보였다.
몸 전체에 딱 들어 붙은 검은색 슈츠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강 판사님, 소신을 다한 판결문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합니다. 그런 저희는 이만……."
"……이…이봐요. 당신들은 대체… 누구?"
류수정은 강 판사를 뒤로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이 봐요. 성함이라도 알려주세요."
―강 판사님, 굳이 저희들이 누군지 알려고 하지는 마십시오.
갑자기 귀에 꽂혀 있는 통신기로 낯익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당신이군요."
―강 판사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정한 판결에 감사드립니다.
"아뇨, 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고. 감사는 제가 해야 할 것 같군요."
―호호, 솔직한 분이시군요.
"앞으로 또 연락할 수 있을까요?"
―…….
통신기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만일 저희 쪽에서 필요한 일이 생기면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내 쪽에서 당신들과 다시 연락하려면요?"
―저희들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통신기로 접촉을 시도해보세요.
"알…알겠소. 이번 일에 대해서는 거듭 감사드리오."
강 판사는 다시 한 번 신소희에게 감사를 표하며 통신을 마쳤다.
그리고 언젠가 이들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갚을 길이 있기를 빌었다.
* * *
쾅!
신상현의 주먹이 앉아 있는 의자의 손걸이를 쳤다.
"당했군."
"면목이 없습니다. 도련님."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징역 7년이라니? 이렇게 되면 다른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잖아!"
대한일보 회장과 사장의 판결이 나왔으니, 다른 신문사 사주들도 대동소이한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여론을 움직이는 힘.
신상현이 가진 힘의 절반이 찢겨 나가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아이를 납치했다면서?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박광수의 말로는 C.I.A가 개입한 것 같다고 합니다."
"C.I.A?"
"거기다 미군도 협조한 것 같다고 하는군요."
"끄―응."
백발 노집사의 말에 신상현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회귀 이후 가장 큰 실패라고 할만한 일이었다.
"C.I.A에 미군이라? 내가 아무래도 강 형사님의 힘을 과소 평가했던 모양이군."
신상현은 생각 이상으로 강대한 강혁의 힘을 느끼고 입술을 이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