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29화
#229화
강혁의 전용기 걸프스트림의 아름다운 동체가 김포 공항에 매끄럽게 내려앉았다.
"회장님, 김포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군. 확실히 고국의 냄새야."
아직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강혁은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 강혁의 모습에 이리나는 상큼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한국에 오고 싶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오신 소감이 어때요?"
"하하, 글쎄. 반갑고 기분 좋은 건 사실이지만 이제부터 골치 아픈 일을 처리해야 하니……."
강혁은 말을 줄였다.
오늘 한국으로 귀국한 것은 대통령의 부탁으로 태우 그룹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태우 그룹 인수는 강혁에게 있어서 오래 전부터 계획해왔던 일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렇게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워낙 덩치가 큰 공룡이었기에 강혁으로서도 잘못 먹으면 얹히는 일이 생길 수 있었다.
수많은 기업들 가운데 옥석을 잘 구분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이제 나가시면 됩니다, 회장님."
깔끔하게 유니폼을 입은 남자 승무원이 다가와 강혁과 이리나를 향해 말했다.
"그럼 가보자고."
"예, 회장님."
강혁과 이리나는 승무원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비행기 문이 열리며 활주로로 연결된 길다란 이동식 계단이 보였다.
강혁이 문을 나서며 계단으로 이동할 때였다.
"응? 저 사람들은 뭐지?"
활주로 아래에 양복을 입은 사람들로 길다란 줄이 서 있었다.
강혁은 약간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계단을 내려왔다.
그 뒤를 이리나가 따라 내려왔다.
"이리나, 저 사람들 뭐야?"
"그게… 태우 그룹 쪽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출발 전에 저희가 도착하는 시간을 물어보더군요."
"그래?"
강혁이 활주로에 다 내려오자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몇 사람이 강혁에게 다가왔다.
오늘 모인 사람들 중에서도 대표들인 모양이다.
그런데 강혁을 경호하는 스티브가 그를 막아섰다.
왜소한 동양인들 눈에 거인같이 보이는 거대한 흑인 보디가드가 앞을 막아서자 깜짝 놀랐다.
"스티브, 괜찮아."
강혁의 한마디에 스티브가 뒤로 물러섰다.
선글러스에 양복을 빼입은 백인 경호원들이 강혁의 뒤에 병풍처럼 둘러쌓다.
십 수 명의 태우 그룹 사장단들은 모두 그런 강혁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사실 오늘 모인 사장들 대부분이 강혁에게 여러모로 놀라고 있었다.
김포 공항 활주로에 매끄럽게 내려앉은 전용기에서부터 급이 다르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세계적인 명품 비행기라는 명성답게 잘 빠진 연청색 걸프스크림은 그 자체로 스포티지했다.
자수성가한 젊은 재벌이란 이미지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승강기로 내려오는 순간 강혁의 뒤에서부터 그를 보조해주고 있는 비서를 보는 순간 모두들 두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인형같은 외모에 회장 비서다운 품격도 느껴졌다.
당시는 98년도였다.
여전히 영어 쓰는 외국인에게 자신도 모르게 살짝 주늑이 드는 시절.
강혁은 그런 한국인의 트라우마를 가볍게 넘어서는 스케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강 회장님. 저는 태우 그룹 기획실장 마동현입니다."
"저는 태우 전자 사장 오한준입니다."
"태우 조선 사장 박시형입니다."
"강혁입니다. 반갑습니다."
뒤에 쭉 늘어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태우 그룹의 임직원들인 모양이었다.
강혁이 알기로 태우 그룹은 임직원들만 600명이 넘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임원들일 것이다.
다들 강혁과 악수라도 나누고 싶은 얼굴들이었다.
하긴, 안 그런 사람들이 있겠는가?
강혁이 자신들의 명줄을 잡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안면을 트고 싶을 것이다.
그때 자신을 기획실장이라고 말한 마동현이 나섰다.
"회장님께서는 오랜 비행으로 피곤하실테니 다들 인사는 본사로 가서 하십시다."
"하하, 뭐 그럴 것 있습니까? 저 아직 젊고 튼튼합니다."
강혁이 웃으며 스스럼 없이 다가가 한 사람씩 인사를 나누었다.
"반갑습니다. 회장님. 태우 자동차의 한건우 사장입니다."
"음, 그렇군요."
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자동차 회사가 몇 개나 있는 강혁이었다.
아마 태우 자동차 사장인 한건우는 속으로 엄청 불안할 것이다.
하지만 강혁은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른 체하며 인사를 건네고는 다음으로 넘어갔다.
"태우 건설의 박규태 사장입니다."
'건설사라? 안됐군. 우리에겐 이미 최고의 사장님이 계시니 말이야.'
강혁은 최삼우 사장을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대진 건설은 아직 중견 건설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고의 품질과 안정성 검사로 대중에게 큰 신뢰를 받고 있었다.
층간 소음이 없는 명품 아파트 건설로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박규태 사장은 그런 강혁의 속도 모르고 자신을 보며 웃었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태우 그룹의 사장단들은 이번에 자신들의 목이 달아나는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다들 좌불안석인데 강혁이 자신과 악수하며 웃고 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강, 강 회장님이 웃고 있어?'
'아니, 저럴 수가?'
'설마 저 친구 자리를 보전하는 건가?'
'아니야, 저건 다른 신호일지도 몰라.'
사장들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강혁은 다음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관광 사업 쪽을 맡고 있는 힐튼 호텔의 김상윤 사장입니다."
"태우 그룹에서 호텔, 리조트 쪽을 맡고 있습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기획실장 마동현이 사장들을 소개했다.
강혁은 마동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아하니 마동현을 중심으로 전자 쪽의 오한준 사장과 조선쪽의 박시형 사장이 한 팀처럼 움직인다.
그런데 다른 사장들도 그런 그들을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회사에서 중심적인 인물들인 모양이었다.
강혁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악수를 나눈 후, 활주로를 나섰다.
"회장님, 저희들이 본사까지 모시겠습니다."
"음, 그럴까요?"
강혁의 말에 이리나가 물었다.
"회장님,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분들을 따라 가도록 하지. 이리나도 함께 가자고."
"알겠습니다. 회장님."
"서양분이신데 한국말을 상당히 잘하는군요."
마동현 실장이 이리나의 한국어 발음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습니다. 과연 회장님 비서답게 미모도 발군이고, 언어능력도 뛰어나시군요."
오한준 사장이 냉큼 마동현 실장의 말을 받아 이리나를 칭찬했다.
"과연 회장님이십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분은 처음 봅니다."
박시형 사장도 한 눈치 하는 사람이었다.
강혁의 비서라면 아무래도 강혁과 가장 가까운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럴 때 한마디라도 칭찬을 해두면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이리나의 미모를 칭찬했다.
"하하, 하긴 이리나가 외모로는 누구한테 안 밀리죠. 자동차 모델도 할 정도랍니다."
"아, 그러고보니? 어디서 본 분 같더라 했습니다."
오한준 사장이 감탄하며 말했다.
"람보르기니 광고 모델이시죠?"
"호호, 저희 회사 제품을 대상으로만 활동했답니다."
오한준 사장의 말에 이리나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이리나는 최근 골든 그룹과 관련된 제품이나 관련 행사에 모델로 몇 번 활동을 했다.
헐리우드 배우인 에밀리아 패닝과 천려시가 함께 나와 화제가 되었던 광고의 후속편에 등장했던 것이다.
유럽에서는 두 사람 이상으로 이리나의 광고가 인기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아예 전업 모델로 나서볼 생각은 없느냐는 업계의 러브콜이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이리나는 광고업계의 열렬한 러브콜을 거절하고 회사에 남았다.
"사실 미국이나 유럽의 광고업계에서 열렬한 러브콜을 던질 정도였답니다."
강혁이 가까이서 따라오고 있던 사장들에게 말했다.
"그…그렇군요. 과연. 그럴만 합니다. 회장님."
"어휴, 무슨 소리세요. 회장님. 계속 놀리시면 저 혼자 갑니다."
"하하하, 알았어. 이리나."
강혁은 더 이상 말을 아끼며 공항 주차장으로 향했다.
한편 삼인방은 서로 살짝 눈빛을 주고 받았다.
아직 미혼인 걸로 널리 알려져 있는 강혁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쩌면 미묘한 감정이 흐른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음, 앞으로 저 비서에게 잘못 보였다가는 끝이겠군.'
'사모님이 될 수도 있다는 건가?'
'천려시와도 소문이 무성하던데?'
아직 미혼이라 이런 저런 소문은 많지만 자신들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내 정치에 단련된 인물들이었다.
자신들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벌써 몇 번이나 이해하고도 남았다.
이리나가 보기 이상으로 강혁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 * *
"……이 차는?"
"저희 회사의 고급 브랜드 승용차 아카디아입니다."
태우 자동차 사장인 한건우가 다가와 말했다.
한건우의 설명에 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 전 태우 자동차는 우여곡절 끝에 외국 자동차 회사인 GM에 넘어갔다.
그러면서 아카디아는 99년에 단종된 차량이었다.
원래는 현대와의 고급 대형차 시장에서 승부를 보기 위해 등장했던 차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내년에 그 운명이 끝나는 차량인 것이다.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강혁은 마치 태우그룹 그 자체를 보는 듯이 아카디아를 바라보았다.
'어쩔까? 고쳐 쓸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다 갈아 버릴까?'
강혁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어디 한 번 시승해 볼까요."
강혁이 뒷좌석에 타자 이리나가 그 옆에 앉았다.
운전석 옆 자리에는 기획 실장 마동현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차지했다.
마동현은 태우 그룹의 전반적인 사정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사주인 김 회장이 원톱 경영을 하던 태우 그룹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마동현은 김 회장의 인정을 받아 기획실 실장을 맡은 회사의 중추였다.
강혁을 태운 차가 태우 그룹 본사 건물로 향하면서 마동현은 회사의 실정에 대해 간략히 보고했다.
강혁은 아무 말 없이 마동현의 브리핑을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들었다.
태우 그룹이 이 지경이 된 것에 마동현의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혁은 사람을 볼 줄 알았다.
적어도 마동현이 무능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실 강혁은 이미 알파팀을 통해서 태우 그룹 임직원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놓았다.
이들 중 누가 분식 회계 조작에 깊이 관여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아직 검찰이 수사 중인 상황도 강혁은 상세하게 알고 있을 정도였다.
사장단들 상당수가 나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능력은 없으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능력은 있지만 부패한 사람도 있었다.
강혁은 이들 중 누굴 버리고, 누굴 쓸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회장님, 다 왔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강혁이 눈을 떴다.
"아카디아의 승차감은 그리 나쁘지 않군요."
"그…그렇습니까?"
"그럼, 회사 구경을 잠시 해볼까요?"
"옙! 회장님."
마동현이 급히 말하며 자리에서 내렸다.
"갈까? 이리나?"
"후훗, 도사시라니까?"
"응?"
"사람 부리는데 도사시라고요."
"하하, 그래?"
강혁은 이리나의 말에 웃으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태우 그룹 본사 직원들이 우르르 나와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강혁은 지금까지 여러 회사들을 세웠지만 사원들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강혁은 양쪽으로 일제히 도열해있는 사원들을 바라보았다.
"환영합니다. 강혁 회장님!"
짝짝짝짝!
회사가 무너질 위기에 쳐한 사람들이었다.
모두는 강혁이 자신들을 구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있었다.
아직 협상은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사원들은 이미 강혁을 자신들의 회장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절박한 거군. 이 사람들.'
강혁은 박수갈채 속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태우 그룹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