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60화
260화
"위대함은 총구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미국은 이번 일을 직시하고………."
아프가니스탄 산골의 한 마을.
허름한 가옥 안에 흰색의 발목까지 오는 긴 옷 터브를 입은 사내가 TV를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흰색의 터번을 두르고 이슬람 전통에 따라 긴수염을 기르고 있지만 그리 늙지 않았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TV속에서 들려오는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허름한 가옥이지만 신기하게도 가옥 위에 위성 방송을 잡을 수 있는 동그란 접시가 보였다.
가옥 안에 살고 있는 남자가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외에도 많았다.
그의 주변에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소총을 들고 서 있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테러에도 반대하며 이를 자행하는 자들에게 단호히 행동 할 것 입니다."
TV영상 속의 조지아 대통령은 매우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대통령의 표정을 사내는 흥미롭게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흐흐, 그래 분노하라고. 조지아."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친구처럼 부르는 사내의 정체는 무엇일까?
연설의 전반부는 이번 테러를 일으킨 자들에 대한 분노와 함께 단호한 복수를 천명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TV를 보고 있는 사내는 그런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그래야지. 잘 하고 있어. 조지아."
사내는 조지아 대통령을 상당히 잘 아는 듯이 보였다.
TV를 보는 사내의 눈빛에는 심지어 약간 장난기마저 엿보였다.
한편 영상 속 조지아 대통령의 연설은 상당히 격조가 있었다.
때로는 맹렬하게 때로는 부드럽게 듣는 청중들의 호흡까지 계산한 듯 유려하면서도 흡입력 있는 연설로 청중들을 매료시켰다.
[여러분, 위대한 미국의 국민 여러분.]
조지아 대통령이 백악관 앞에 모여 있는 청중들을 잠시 응시했다.
[우리 미국은 이 시점에서 진정한 복수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
영상 속 조지아 대통령의 말에 사내는 잠시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아랍권 전체를 향한 미국의 성전을 선포해야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뭐하는 거야? 조지아. 말해 이슬람과 전쟁을 선포한다고!'
[…이제 냉전은 사라졌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핵무기?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소련의 몰락과 냉전의 소멸은 그렇게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적은 사실 우리의 내부에 있습니다. 바로 편견과 증오입니다. 이슬람을 향한 우리의 편견과 증오가 오늘 우리의 진정한 적입니다.]
"대체 뭐라는 거야? 조지아!"
TV를 보던 사내가 갑자기 소리쳤다.
[테러를 자행한 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전에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이들에게 가담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명분을 주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에게 진정한 우정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입니다.
이런 테러를 지지하는 종교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 미국이 이슬람 국가들과 진정한 친구가 될 때, 비로소 진정한 복수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바로 증오와 편견이라는 진정한 우리의 적에 대한 복수 말입니다. 전쟁을 선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 것입니다.
우리가 이슬람 국가들에게 저질렀던 잘못들에 대해 먼저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그럴 때 증오는 사라지고 테러조직은 이 세상에 발 붙일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명분 자체를 소멸 시킬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나는 그들을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소멸시킬 것입니다. 화해와 용서 그리고 단호한 응징으로 말입니다.]
콰-앙!
펑-하는 소리와 함께 TV브라운관이 박살이 났다.
사내가 TV를 향해 옆에 있던 물병을 집어 던진 것이다.
"오사무 님."
사내의 뒤를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놀라며 외쳤다.
"제기랄, 저 멍청이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대체 누구야? 저 녀석에게 엉뚱한 생각을 불어 넣은 자가!"
오사무 번 라덴이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TV를 박살낸 후로도 한동안 화를 참지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겨우 화를 누그러뜨린 오사무가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 계획이 누설 됐어."
"예? 그럴 리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많은 인원이 모두 대피할 수 있었겠나?"
오사무가 경호원이자 최측근인 사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번 테러 계획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전 세계가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거대한 테러였지만 그에 비해 사상자가 너무 적었다.
게다가 이번 테러에서 마지막 방점을 찍어줬어야 할 워싱턴 국회의사당 테러는 아예 실패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다."
"……!"
오사무의 말에 경호원이자 최측근인 남자가 놀라는 듯했다.
그들의 조직에서 이번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던 자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이 얼마나 오사무 번 라덴에게 헌신적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찾아내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오사무님."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숙소를 나서려했다.
"잠깐!"
오사무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번 연설에 누가 영향을 준 건지 알아야겠어."
"누군가 개입했다고 보시는 겁니까?"
사내의 말에 오사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는 한 조지아 부스는 저런 연설을 할 작자가 아니야."
"그렇다면?"
"누군가 그의 옆에서 조언을 한 자가 있었을 거야. 그 자를 찾아."
오사무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오사무 님."
사내의 눈빛에는 오사무 번 라덴을 향한 충심이 가득했다.
이번에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테러를 계획하고 성공시킨 사람이었다.
서구 문명이 이슬람 세계를 억압한 이후로 지금처럼 통쾌한 반격을 가한 사람은 그가 최초였다.
이전에도 그들을 경악하게 한 적은 있었지만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한 번도 침략당한 적이 없다고 자랑하는 미국 본토를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힘의 상징인 국방부 건물 한쪽을 붕괴시켰다.
그것도 그들의 국민이 타고 있는 여객기를 납치해서 말이다.
통상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성전의 전사들이 없다면 말이다.
그들에게는 없고, 자신들에게는 있는 힘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 바로 오사무 번 라덴이었다.
그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성전을 수행하여 이슬람에게 진정한 승리를 가져다 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내는 간단히 오사무에게 목례를 하고 다시 숙소를 나섰다.
사내가 사라지자 오사무는 부서진 TV를 바라보았다.
"누굴까? 멍청이 부스가 저런 연설을 하게 만든 녀석은?"
오사무는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지아 부스의 연설 내용을 바꾼 사람과 이번 테러계획을 누설한 내부의 첩자 두 사람을 말이다.
* * *
이번 테러에 대한 미국 내의 반향은 엄청난 것이었다.
뉴욕의 상징인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것은 미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
게다가 슈퍼파워 미국을 상징하는 국방력의 중추인 국방성이 공격당했다.
비록 인명피해는 최소화시켰다고는 하지만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래서 더욱 미국 대통령이 직접 백악관 뜰에 나와 대국민 연설을 한다고 밝히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미국이 과연 이번 사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모두가 궁금해했다.
냉전이 끝난 지금 구소련은 해체되었고, 세계의 유일한 슈퍼 파워가 미국이었다.
그런 미국이 분노하게 된다면?
단순히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세계가 숨을 죽이고 조지아 대통령의 연설을 기다렸다.
그리고 미국을 적대시해왔던 국가의 수반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백악관에 연락을 취했다.
"대통령님, 방금 이라크의 후세인이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후세인? 뭐라고 하던가요?"
"이번 테러 사건과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들에게 유감을 표하고, 이번 사건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더군요."
"흐흠, 그래요?"
조지아 대통령은 그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 이라크가 얼마나 미국을 적대시해왔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님, 북한에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
"이번 테러 사건에 대해 김정일 국방장관명으로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자신들은……."
"이번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이란 외무성에서 연락이………."
조지아 대통령은 한동안 미국의 적대국 수반들에게서 온 전문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아직 수사 중이지만 강혁의 말대로라면 이번 일은 중동의 테러조직이 행한 일이었다.
사실 지구 상에 미국을 향해 이런 짓을 저지를 간 큰 국가는 없었다.
만일 정말로 그런 국가가 있다면 지구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해야할 터였다.
하지만 이번 일이 테러조직에 의한 것이라면 다른 이야기였다.
훨씬 대처하기에 까다로운 일이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마주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지아 대통령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의 연설문 작성을 도울 비서관이 다가왔다.
"대통령님 초안이 완성됐습니다."
"여긴 어수선하니 잠깐 자리를 옮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조지아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설 비서관과 함께 사람이 없는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건네받은 원고를 쭉 읽어 나갔다.
"음, 괜찮군. 이 정도면 상처 입은 우리 국민들에게 위로가 되겠어."
"그리고 우리의 적들은 벌벌 떨 겁니다."
연설 비서관이 힘주어 말했다.
아직 정확한 증거가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정황상 이번 사건은 중동 테러 조직의 짓이 분명했다.
이미 몇 개의 테러 조직에서 이번 일은 자신들이 자행한 짓이라는 성명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C.I.A와 F.B.I 두 정보 조직은 모두 이번 일은 그들의 짓이 아니라는데 의견을 일치시켰다.
몇 시간 후, 탑승객들의 명단이 확보되었고, 그들 중 테러에 연관된 사람들을 특정지울 수 있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여객기 납치를 시도하다가 잡힌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계 아랍인과 외국 유학생으로 아랍인들이었다.
하나같이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고 다양한 국적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러니 이번 일은 한 국가가 움직인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좋아, 이걸로 가지. 수고했어. 로버트. 조금 수정한 후에 다시 보내지."
"예, 대통령님."
대통령이 칭찬을 건네자 연설비서관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고는 방을 나왔다.
연설 비서관이 자리를 뜨자 대통령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원고를 수정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에서 벨이 울렸다.
이 핸드폰은 말 그대로 최측근만이 아는 번호였다.
"누구지?"
조지아 대통령이 핸드폰을 확인했을 때 뜬 번호는 다름 아닌 강혁의 번호였다.
"존 회장?"
―대통령님.
"혹시 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조지아 대통령은 깜짝 놀라 전화를 받았다.
―진정하시지요. 오늘은 또 다른 테러는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휴, 그랬지요."
조지아 대통령은 숨을 크게 들이키며 안도했다.
"그럼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나요. 존 회장."
대통령의 음성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오늘 대통령과 미국은 강혁에게 큰 빚을 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조지아 대통령 본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오늘 저녁 대국민 연설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강혁의 목소리에 조지아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오늘 미국은 큰 상처를 입었어요. 대통령으로서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어야합니다."
조지아 대통령이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그런데 대통령님. 이번 테러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혹시 아십니까?
"……?"
조지아 대통령은 강혁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존 회장은 알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
조지아 대통령은 강혁의 말에 크게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