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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263화 (263/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63화

263화

"혹시 로렌?"

"제임스?"

"하하, 맞네요. 혹시 잘못 본 건 아닐까했어요."

제임스의 말에 로렌이 웃으며 대답했다.

"왜요. 혹시 실망하셨나요?"

"전혀요. 오히려 제가 자격이 있나 싶을 정도로 미인이십니다."

이규철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화려한 금발에 세련되고 멋진 외출복을 입은 로렌은 군중 속에서도 눈에 확 띄는 미인이었다.

오늘은 서로 약속을 잡아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이규철은 정말 오랜 만에 여자와 단 둘이 만나는 것이라 솔직히 좀 당황하고 있었다.

게다가 로렌은 정말 멋진 여성이었다.

그러니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위해 이규철은 나름 준비를 한 것이 있었다.

일명 첫만남을 위한 뉴욕의 데이트 코스.

구글에 접속해 데이트 코스를 검색해서 로렌이 좋아할만한 장소들을 찍어둔 것이다.

"그… 그럼 갈까요?"

"그래요."

로렌은 앞장서는 제임스의 옆으로 총총거리며 다가가 팔짱을 끼었다.

"로… 로렌?"

"여서가요. 제임스."

"그… 그래요."

이규철의 볼이 살짝 상기되었다.

이규철은 깜짝 놀랐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로렌같은 여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오랜만에 느끼는 묘한 감정이 생겨났다.

"이봐! 어때?"

"흐흐, 잘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해리슨이 이규철과 로렌 두 사람을 멀리서 살펴보며 무선으로 톰과 말을 주고 받고 있었다.

"어휴, 두 사람 모두 뭐하는 짓이야?"

제인이 옆에서 톰에게 말했다.

"이봐, 제임스는 우리의 소중한 상관이야. 그러니 어떤 사람과 만나는지 확인은 해봐야지."

"어휴! 난 빠질래."

제인이 고개를 흔들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흐흐, 그렇게 해."

톰이 말했다.

한참 후 이규철과 로렌은 뉴욕의 명물 맛집으로 들어섰다.

그걸 살펴본 해리슨이 말했다.

"으음, 두 사람 모두 분위기가 그럴듯한걸."

"그래?"

"아무래도 우리 캡틴에게 여자친구가 생길 것 같은데?"

"크크, 잘 된 일이지."

"뭐, 염탐은 여기까지 하자구. 나중에 캡틴한테 혼나긴 싫으니 말이야."

해리슨의 말에 톰이 말했다.

"알았어. 여기서 접자. 참 사무실로 오기 전에 47번가에서 신라치킨 좀 사와."

"알았어. 톰."

신라 치킨은 요즘 뉴욕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치킨브랜드였다.

얼마나 맛있는지 한번 맛보고 나면 다른 치킨에는 손이 가지 않을 정도라는 평을 얻고 있었다.

해리슨은 한 번 더 레스토랑 쪽을 바라보고는 휫파람을 불며 47번가로 향했다.

멋진 야경과 함께 저녁식사를 그럴듯하게 마친 두 사람은 그 후로 신라 다방을 찾았다.

요즘 뉴욕에서 제일 인기 있는 커피숍 중 하나로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어머, 여긴? 신라 다방이잖아요?"

"맞아요."

"와, 여긴 안 그래도 꼭 한 번 와보고 싶었어요."

로렌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요즘 뉴욕의 핫플레이스잖아요. 안 그래도 제 친구하고 한번 가보자는 말을 했거든요."

"좋아하시니 다행이네요."

이규철이 빙긋 미소를 보였다.

신라 다방은 외관부터 한국의 전통 양식을 따라 지어졌다.

입구 문에는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고, 문 위로는 기와지붕을 연상시키는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면 현대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전통양식의 문양들로 내부가 꾸며져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실용 한복을 입은 직원이 서빙하는 모습이 보였다.

실비아 로렌은 깔끔하면서도 아름다운 색감에 반해 잠시 넋을 잃고 직원들을 쳐다보았다.

"로렌?"

"와우, 저 사람들 입은 옷 좀 보세요. 정말 환상적이지 않나요?"

로렌의 호들갑에 이규철은 직원들이 입고 있는 실용한복들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서양인의 눈에 비친 한복의 아름다움은 그들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의식적으로 동양의 문화를 자신들보다 아래로 생각하도록 배워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뉴욕에서 불고 있는 한식 바람은 이들의 단단한 세계관에 조금씩 균열을 내주고 있었다.

여기에 모던하면서도 한국의 미가 풍기는 인테리어와 한복은 큰 역할을 했다.

"왜요? 로렌도 입어보고 싶나요?"

이규철의 말에 로렌은 반색했다.

"혹시 어디서 구하는지 아시나요?"

로렌의 반응에 이규철은 잔잔한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알아봐 드리죠."

"와! 좋아라."

이규철의 말에 로렌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차를 마시고 수다를 떨었다.

물론 대부분 로렌이 말하고 이규철은 그 말에 반응하는 식이었다.

원래 평소에는 과묵한 이규철이지만 이날만은 그래도 많은 말을 했다.

오래 전 아내를 잃은 후로는 평소 여성과는 인연이 없던 이규철이었다.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군.'

이규철은 자신이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뭐해요? 어서 들어오세요."

로렌의 말에 이규철은 멍하니 서 있다가 로렌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하니 첫 데이트에 로렌의 집까지 들어가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생각이상으로 로렌은 과감했다.

"여기가 로렌의 집인가요?"

"맞아요. 실망하셨나요?"

"설마요? 아주 쾌적해 보이는 걸요."

실비아 로렌은 뉴욕 시내에 나름 괜찮은 아파트를 구해 살고 있었다.

이규철이 거실을 구경하고 있을 때 로렌이 잔 두 개와 와인 한 병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다.

"우리 한 잔씩 해요."

또르르르르.

투명한 유리 잔이 금세 붉은 와인색으로 물들었다.

팅―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두 사람의 잔이 맞부딪혔다.

로렌은 살짝 윙크를 하며 잔을 입 가에 가져갔다.

이규철은 모든 것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간다고 느꼈지만 이 상황이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목구멍으로 와인을 넘겼다.

그리고 로렌을 바라보았다.

"맛있네요."

"그렇죠?"

이규철의 말에 로렌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를 지었다.

"로렌."

"예?"

"불을 껐나요? 갑자기 컴컴해지……."

이규철이 갑자기 바닥으로 쓰러졌다.

"후후, 푹 자두라고요. 제임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잠에서 깨어난 이규철은 엄지 손가락으로 이마 양쪽을 누르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규철은 자신의 양팔이 결박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깨어났나요?"

"…로렌?"

정신이 든 이규철은 자신의 눈 앞에 총을 겨누고 서 있는 로렌을 발견했다.

"미안하군요. 제임스. 다른 상황에서 만났다면 좀 더 즐길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로렌이 혀로 입술을 훔치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이 실제로 매우 아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군. 당신 짓이었나?"

이규철의 말에 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기장과 부기장 모두 내가 죽였죠."

로렌의 말에 이규철은 한 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난 로렌이 아니에요."

"……?"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아랍인 남성 한명이 금발의 여성 한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아랍인이 데리고 들어온 여성은 입을 막고 손이 결박되어 있었는데 어딘지 로렌과 닮았다.

"……?"

의문이 가득담긴 이규철의 표정에 로렌이 말했다.

"모르겠어요? 저 여자가 진짜 실비아 로렌이에요."

"……!"

이규철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역시 그랬군. 내가 바보야."

이규철은 한 숨을 쉬었다.

처음 만날 장소로 갔을 때 로렌이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동양인들은 우리들 얼굴이 잘 구별이 안 간다고 하더니 사실이더군요."

"끄―응, 그래서 네 진짜 이름은 뭐야?"

"그게 그리 중요한가요?"

이규철의 말에 가짜 로렌이 실실거리고 웃었다.

"하긴 그렇군."

"후훗, 곧 죽을 목숨이니 가르쳐 드리죠. 제 이름은 다이애나에요."

"다이애나, 왜 이런 짓을 하는거지?"

이규철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재빨리 대화거리를 찾았다.

그런 한편 눈치채지 못하게 주변을 살폈다.

"호호, 내가 대답해 줄 의무는 없을 텐데요."

"그건 그렇겠지만 그냥 궁금해서 말이지. 넌 아랍인도 아니잖아."

이규철의 말에 다이애나가 웃으며 말했다.

"전 영국인이에요. 어머니가 암만 사람인데 그덕분에 어릴 때부터 차별 당하며 살아야 했죠."

"그건 안됐군."

이규철이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당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없어요."

"그렇겠지."

"하산, 두 사람을 옮겨."

아랍인이 진짜 로렌과 이규철을 총으로 위협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걸음을 옮겼다.

로렌이 방을 빠져나가고 뒤를 이어 이규철이 걸어갈 때였다.

하산의 옆을 지날 때 이규철의 발차기가 쏜살같이 하산의 얼굴을 강타했다.

퍼―억!

일격필살!

707특임대 전설의 사나이 다운 번개같은 발차기가 턱을 강타하자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이―익!"

다이애나가 이규철을 향해 총을 겨눌 때 이미 이규철은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이애나의 앞으로 굴러온 이규철은 몸을 스프링처럼 움직이며 점프했다.

퍼―어억!

환상적인 두 번의 발차기가 한 호흡에 터져나왔다.

총을 쥔 손과 턱을 연이어 강타한 것이다.

다이애나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했다.

그 모습을 진짜 로렌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로렌. 곧 풀어 줄께요."

입이 가리개로 막혀 있는 로렌은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결박된 끈을 풀어낸 이규철은 로렌에게 다가가 결박된 손을 풀어 준 후 입마개를 풀었다.

"두 번이나 제 목숨을 살리셨군요. 제임스."

로렌의 두 눈이 글썽거렸다.

이규철은 로렌을 바라보자 그제서야 비행기 안에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었던 그 로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로렌…미안해요. 이번엔 저 때문에……."

이규철의 말에 로렌이 고개를 도리질쳤다.

"제 목숨을 구해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로렌."

로렌의 눈빛이 해변의 모래알처럼 반짝거렸다.

"이번 일이 끝나며 우리 못한 데이트를 재개하죠."

이규철이 로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러자고요."

로렌의 말에 이규철이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규철은 고개를 돌려 쓰러진 다이애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바라보자 묘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규철은 곧 생각을 거두고 전화를 걸었다.

오래지 않아 F.B.I가 출동해 두 사람을 결박해서 데리고 나갔다.

이규철은 끌려가는 두 사람 아니 다이애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요. 아쉬운가요?"

로렌이 놀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뇨. 다이애나같은 사람이 테러를 하게 된 게 안타까워서요."

이규철의 말에 로렌이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아랍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규철의 말에 로렌은 따뜻한 표정이 되어 그를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친철하군요."

"예?"

"아니에요. 제임스."

로렌이 두 사람이 잡혀간 현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이애나, 미안해.

로렌이 마음 속으로 나직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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