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71화
271화
툭. 투. 툭.
세르게이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라면 대단하군."
세르게이는 아무래도 시간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혁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질을 이용한 협박은 이미 물 건너 간 셈이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눈앞의 이 남자가 아무리 대단한 권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총구 앞에서는 누구나 똑같다.
이제 부하들이 몰려오면 상황은 바꿀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어디 멀리 외국에 나갔다가 조용해지면 다시 돌아오면 되는 일이다.
"이번 일은 유감이군. 아무래도 서로 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인데."
세르게이는 여유를 부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봐, 그런 여유는 다음 영상을 보고 나서 부리지 그래."
"……?"
세르게이는 아직 영상이 남아 있나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과연 강혁의 말대로 영상이 다시 바뀌었다.
그런데 이번 영상은 눈에 익은 건물이었다.
"…여긴?"
"그래, 바로 이곳이지."
영상은 신기하게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구도였다.
마치 위성에서라도 보는 것 같은…….
"설… 설마?"
"맞아, 그 설마야."
"……!"
영상은 세르게이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영상이었다.
건물 전체가 러시아 마피아들의 아지트로서 평소에는 공고한 성채와 같은 곳이다.
그런데 이런 곳을 단 몇 명이 뚫고 들어온 것이다.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거다.
영상은 옥상을 비추더니 신기하게도 건물을 투과해서 보여주기 시작했다.
"이… 이건?"
"그래, 지금 실시간으로 우리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세르게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꿀―꺽.
세르게이의 입에서 침을 넘어갔다.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
"여길 봐."
강혁이 가리키는 영상을 보니 건너편 건물의 구조도가 보였다.
"여기에 저격수가 비치되어 있지."
"……!"
"그리고 넌 적이 많으니 평소 창문가에는 앉아 있지 않지."
강혁의 말대로 세르게이의 책상과 창문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여기 예쁘게 생긴 물병이 있군."
강혁은 사무실 한쪽에 있는 물병을 가져다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를 곧추세우더니 아래로 내렸다.
영상 속에 보이는 건너편 건물에서 저격수가 총을 쏘는 모습이 보였다.
챙그랑!
창문이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놀랍게도 책상 위에 있는 물병이 깨어지며 물이 쏟아졌다.
"어… 어떻게?"
세르게이는 질린 눈으로 강혁을 바라보았다.
"이해하려고 하지마.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세르게이는 창문과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물병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도저히 저격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각도가 아니었다.
총알이 휘어서 들어오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다.
"말… 말도 안 돼."
어이없어 하는 세르게이를 향해 강혁이 말했다.
"어서 부하들을 데리고 여길 나가!"
"……?"
강혁은 팔목을 올려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앞으로 3분 남았군."
"무… 무슨 소리야?"
"3분이 지나면 여기 건물은 벽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거야."
"……!"
"살고 싶으면 나가라고."
"이… 미… 미친."
"이 전무. 나가지."
"예, 회장님."
말을 마친 강혁은 갑자기 몸을 돌려 깨진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 전무라는 남자가 따랐다.
두 사람 모두 창문으로 몸을 내던진 것이다.
이 황당한 상황에 세르게이는 몸을 일으켜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허공에서 레펠을 잡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럼, 다시 보자고 세르게이."
헬기에서 내린 밧줄을 붙잡고 강혁이 세르게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 이……."
세르게이는 황당했지만 눈앞의 모습은 현실이었다.
그는 즉시 다시 돌아와 책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어 부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스, 이미 도착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부하의 말에 세르게이는 복장이 터졌다.
"이 바보야. 당장 건물을 빠져나가!"
"예?"
"건물이 폭발한다. 어서 나가!"
전화를 끊은 세르게이는 눈앞의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이미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숫자가 보였다.
"젠장."
세르게이는 몸을 일으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육중한 몸을 움직여 계단으로 달려가자 우르르 몰려있는 부하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습이었다.
"이 바보들아, 당장 여길 빠져나가!"
세르게이의 고함소리에 그제서야 부하들은 다시 계단 아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목숨을 소중한 모양이었다.
건물이 폭발한다는 소리에 체면이고 뭐고 모두 팽겨치고 꽁지가 빠지게 내달렸다.
세르게이의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육중한 몸으로 그렇게 빠르게 달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게 달렸다.
1층 로비에 세르게이가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건물 여기저기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폭음같은 소리였다.
세르게이는 뭔가 시작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들 달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낀 것은 세르게이만이 아니었다.
이미 건물 벽이 갈라지고 머리 위에서 뭔가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뛰어!"
우드드드득.
이상한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며 건물잔해가 떨어졌다.
러시아 마피아들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건물 밖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르게이가 빠져나갔을 때였다.
우르르 꽝!
건물이 폭삭 무너지며 시멘트 가루가 세르게이의 몸을 덥쳤다.
에취~
세르게이는 온 몸을 회반죽으로 뒤덮힌 채 손을 내저어 시야를 가리는 먼지를 치웠다.
"알렉산드로 세르게이?"
누군가 연기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누구요?"
"뉴욕 경찰이오. 당신을 안젤라 검사장 납치 및 살인 미수, 공갈 협박 죄로 체포하오."
휘이잉.
바람이 불며 시야가 확보되었다.
세르게이의 눈앞에 흑인 경찰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자신의 부하들이 수갑을 차고 경찰차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철컹!
"세르게이, 이번에 들어가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거다. 감히 우리 안젤라 검사장님을 건드려!"
흑인 경찰이 세르게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 * *
드드드드드드-
헬기 모터 소리와 함께 작전 헬기가 거대한 건물 위에 내렸다.
테러로 무너져 내린 쌍둥이 빌딩을 대신해 새롭게 뉴욕의 랜드 마크가 된 골든 그룹의 신사옥이었다.
헬기에서 강혁이 내리자 누군가 그의 품을 향해 뛰어 들었다.
"존……!"
"안젤라!"
강혁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안젤라의 풍성한 금발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어 주었다.
"안젤라, 무사해서 다행이야."
"존, 난 존이 날 구해주러 올 줄 알았어."
"안젤라."
안젤라는 가슴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어 강혁을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존. 난 존이 아니었으면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안젤라의 두 눈이 글썽거렸다.
그녀의 가슴은 강혁에 대한 여러 가지 감정으로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뭔가 이해하기 힘든 열정이 그녀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존, 고마워."
"안젤라."
안젤라는 그대로 강혁의 목을 잡고는 입술을 가져갔다.
그리고 격정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안젤라.'
강혁은 감히 안젤라를 뗄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기에서 내린 실버 울프 대원들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빙긋 웃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이규철은 특히나 강혁과 안젤라의 모습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훗, 회장님. 어서 빨리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세요.'
히히 웃으며 옥상 문을 열고 들어선 이규철을 깜짝 놀랐다.
눈앞에 이리나가 귀신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리나?"
"왜요. 이 전무님."
"아, 아니야. 이리나."
이규철은 부리나케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슬쩍 이리나 쪽을 바라보았다.
왠지 이리나의 어깨가 축 쳐져 있는 것이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이리나도 나쁘지는 않은데. 꼭 안젤라 검사장이 아니라고 해도.'
하지만 여자 문제는 자신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다.
'회장님, 행운을 빕니다.'
이규철은 강혁의 명복을 빌며 재빨리 현장을 벗어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안젤라는 격정적인 입맞춤을 마치고 얼굴을 뗀 후 그제야 얼굴을 붉혔다.
"미… 미안. 내가 평소에는 안 이러는데."
"아… 아냐. 안젤라."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의 미묘한 관계에 있었다.
언제든 한쪽으로 균형이 휩쓸릴 수 있는 사이였지만 묘하게 이런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존, 난… 말이지."
안젤라가 강혁을 지긋이 바라보며 입을 뗐다.
그녀의 얼굴은 석양에 물들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금발머리와 석양에 물든 붉은 얼굴빛은 뭔가 묘한 대조를 이루어 신비롭기까지 했다.
"…안젤라?"
강혁은 안젤라가 뭔가 중대한 말을 하려는 낌새를 느끼고 당황했다.
"존, 사실 나는……."
꿀꺽.
강혁의 목에서 침이 넘어갔다.
안젤라가 하려는 말이 무엇이든, 이 말을 하고 나면 두 사람의 관계는 지금까지와 달리 변하고 말 것이다.
"존!"
"응, 안젤라."
"사실은 나……."
"…회장님! 존 회장님."
두 사람은 옥상 위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이… 이리나?"
두다다다다다다!
"회장님! 무사하신 거죠."
이리나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옥상 위를 가로질러와 강혁의 목에 매달려다.
"엇, 난 괜찮아. 이리나."
"흑,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난 정말…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줄 알고. 훌쩍."
"난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리나."
진심으로 이리나는 강혁을 걱정하고 있었다.
이번에 안젤라를 구출하기 위해 뉴욕에 있는 실버울프 팀이 모두 출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뉴욕에 있는 실버울프팀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나로서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뒤늦게 강혁이 미국 대통령을 움직여 네이버 씰 팀과 협동작전을 펼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은 안심했지만 말이다.
"참, 안젤라.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이리나는 눈에 글썽거리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진심이 깃들어 있었다.
"고마워 이리나."
안젤라도 그런 이리나에게 밝게 웃으며 미소를 보였다.
* * *
"역시, 존 회장이군요. 안젤라 검사장을 안전하게 구출했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에 대통령님의 도움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아닙니다. 윌슨 의원님. 저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오."
윌슨 의원의 말에 조지아 대통령은 미소로 답변했다.
"아무튼 정말이지. 우리의 선지자는 대단하군요."
조지아 대통령의 말에 윌슨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을 겪으며 제가 처음 존 회장을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오르더군요."
"오오! 부디 그날의 일은 저도 듣고 싶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윌슨 의원의 말에 조지아 대통령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윌슨 의원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조지아 대통령에게 그날의 일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