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86화
#286화
"젠장, 젠장, 젠장"
19살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거실을 이리저리 오가며 화를 내고 있었다.
"도련님, 진정하시지요."
단안경을 낀 백발의 노인이 그런 그를 만류했다.
"할아범,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청년은 그런 노인을 향해 발끈해서 화를 냈다.
요즘 들어 되는 일이 없었다.
"젠장, 이게 다 강 형사님 때문이야."
"……."
신상현은 자신의 손가락을 입으로 질겅질겅 씹어댔다.
노집사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강혁이 잠시 경찰에 몸을 담았다고는 하지만 그 기간은 매우 짧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상현은 항상 그를 강 형사라고 불렀다.
생각해보면 강혁은 형사가 된 적도 없었다.
어쨌든 강 형사, 아니 강혁 회장은 골칫덩이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신상현은 삼강그룹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기 위해 자기 사람들을 심어 놓으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안 건지 사사건건 주주총회에서 잘려 버렸다.
"대체 어떻게 안 걸까?"
"글쎄 말입니다. 김 이사가 우리 쪽 사람이라는 건 알 리가 없는데."
노집사도 고개를 흔들었다.
신상현과는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사외 이사로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잘린 것이다.
"역시 이대로는 안 돼."
"그렇습니다. 도련님."
신상현의 고민은 삼강가가 지니고 있는 주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 재벌가의 기형적인 지배구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문제는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연기금공단이 더 이상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강혁이 어떻게 대통령을 구워 삼았는지 정부의 입김을 받는 연금공단은 철저히 강혁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그래서 신상현 쪽 사람을 그룹의 힘 있는 자리에 넣는 족족 주주총회에서 다시 걸러지고 있었다.
신상현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자신과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을 그룹 이사로 올렸지만 그마저도 저지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신상현으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사실 강혁은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으로 빅데이터를 분석해서 신상현과의 관련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회귀 전의 지식이 있다고 해도 강혁이 미래지식과 엄청난 자본력으로 인공지능을 개발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이다.
"역시 정권을 바꾸지 않는 한은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도련님."
"할아범의 말이 맞아."
때는 2002년이었다.
대선이 있는 해.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10년은 더 기다려야 최영혜가 대통령이 된다.
하지만 전 국민적인 영웅이 된 최영혜라면 회귀 전보다 그 시기를 앞당길 수 있으리라.
"아무리 강 형사님이라고 해도 이것만은 어쩔 수 없을 걸?"
한국 국민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있는 최강수 대통령의 후광과 삼양백화점 사건에서 영웅이 된 최영혜의 존재감.
어떤 여권 후보도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회귀 전의 역사라면 이번에 대선에서 승리할 노 장관이 존재했지만 사실 그는 여당 내에서도 비주류다.
게다가 당시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진 이유는 아들의 병역 문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영혜에게는 그런 문제가 존재할 수 없었다.
'흐흐, 10년 후를 노렸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라면…….'
아직 19살이라 군대가 문제 될 시기가 아니다.
군대 문제는 최영혜가 대통령이 된 후에 처리하면 더 좋았다.
사실 신상현은 회귀 전에도 군대를 가지 않았다.
삼강가에서 알아서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흐흐흐, 이제 슬슬 선거의 여왕께서 움직여 주셔야겠군."
강혁 때문에 몇 차례나 물을 먹은 신상현이 독기어린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 속에는 이번에는 기필코 강혁에게 한방 먹여주겠다는 심산이었다.
강혁의 회귀를 확인한 후 지금까지 제대로 강혁과 맞붙어서 이겨 본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일진회도 내부적으로 상당히 흔들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강혁이 갑자기 미국으로 떠난 후, 가까스로 조직을 다시 정비할 수 있었다.
"흐흐, 아마도 9.11테러 때문이었나본데. 오지랖 한 번 넓군."
신상현은 자신을 끝장 낼 수도 있었던 강혁이 갑자기 미국으로 출국한 이유가 9.11테러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라면 절대 그런 쓸데없는 일에 힘과 돈을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결국 막아내지도 못했다.
어찌어찌 사람들은 대피시켰지만 미국의 상징인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다.
미국 국방성이 비행기 테러를 당해 한쪽 구석이 부서져 내렸다.
회귀 전의 역사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사람 목숨 몇 명 구한 것이 다였다.
얼마나 쓸데없는 힘 낭비란 말인가?
자신이라면 그 시간에 원수의 숨통을 멈추게 하는데 전력을 다했을 것이다.
물론 그 덕에 조직을 다시 정비할 시간을 벌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가 다시 돌아왔다.
이제 결판을 내려고 할 것이다.
"강 형사님, 이제 우리의 길었던 악연을 끝내봅시다."
신상현의 말에 백발 노집사가 말했다.
"도련님, 박광현 그 친구도 알제리에 도착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신상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가니스탄까지 가서 사기를 치고 다니시나본데, 그게 명줄을 줄이는 일이 될 줄은 몰랐겠지."
"아무튼 잘 된 일 아니겠습니까? 안 그래도 우리 쪽 전력이 부족했던 참인데 말입니다."
"크크크."
신상현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화를 내던 모습과는 천양지차다.
아니 어쩌면 변한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웃고 있는 얼굴 아래로는 여전히 화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리고 백발의 노집사만은 그런 상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고맙군요. 강 형사님. 여기저기서 사고를 치고 다니시니 생각도 못했던 전력이 내 손아귀에 들어왔지 뭡니까? 크크크."
말을 하는 신상현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제 19살.
내년에 갓 20살이 되는 청년의 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깊은 어둠이 깃든 눈이었다.
백발의 노집사도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노집사는 자신도 어딘가 고장 난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소름이 돋을 얼굴이었지만 오히려 흥분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복수의 날이 멀지 않았다.
자신의 손녀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자살하게 만든 사람.
삼강의 노괴물 신 회장.
그에게 복수를 할 때가.
자신을 여기까지 이끈 도련님이 삼강을 완전히 차지하는 날.
그 날이 바로 디데이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오려면 방해꾼을 처리해야 했다.
무지막지한 중동의 테러리스트들.
그 중에서도 가장 악독한 자들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동료들에게 조차 버림받고 갈데없는 그들을 거둬들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자신들이 동료들에게 버림받게 만든 자를 제물로 갖다 준다면.
알아서 복수하고자 광분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분풀이를 하고 난 후에는 충성스런 부하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만 된다면 사사건건 방해가 되던 강 회장을 처리하고, 대한민국에 진정한 신상현의 왕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한 악의 제국을.
* * *
"흐흐흐, 신상현이 광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강혁은 회장실 집무실에 앉아 보고서를 훑어보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지시대로 주주총회에서 신상현이 몰래 삼강그룹의 사외이사로 올린 사람을 해촉 시킨 것이다.
이미 이런 일이 몇 차례나 있었다.
처음에는 공개적으로 삼강 그룹에 자신의 사람을 심으려고 했다.
하지만 미처 연기금공단에서 반대를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상현은 비록 자신의 회사이지만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몇 없다는 사실을 이제 깨닫고 있을 것이다.
강혁이 보유하고 있는 삼강의 주식도 상당한 양이었다.
여기에 강혁의 우호 지분인 유대 금융 자본과 화교 자본의 주식.
그리고 가장 많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연기금공단의 주식.
원한다면 오늘이라도 임시 주총을 열어 삼강에서 오너 일가인 신씨 일족을 쫓아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한국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너무나 커질 것이다.
연기금공단이 회사가 넘어가는 것을 방관했다고 화살을 쏴 될 것이 뻔했다.
강혁으로서는 파장을 최소화할 작전이 필요했다.
그러자면 한바탕 연극이 불가피하다.
"회장님, 준비는 끝났습니다."
보고서를 가지고 온 박정철이 말했다.
"좋아요. 시작해봅시다."
"예, 회장님."
평소 과묵한 박정철답게 단답형으로 말한 후, 회장실을 나갔다.
강혁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고 처리할 일이었지만… 드디어 끝이 다가오는군."
강혁은 신상현을 생각하자 가슴이 들끓어 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를 잠시만 억누를 때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띠리리릿― 띠리리리릿―
강혁은 회장실에 걸려온 전화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회장님, 지시하신 일은 완료되었습니다.
강혁의 귓가로 이규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님, 수고 하셨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저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요.
"이번 일에 수없이 많은 장병들의 목숨이 걸려 있습니다."
강혁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이규철의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강혁에게서 앞으로 일어날 일이라며 자신에게 말해준 미래의 일을 들었을 때 이규철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전 국민이 월드컵 4강의 영광에 취해있을 때, 우리 장병들이 북한군의 기습 공격에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예? 그…그게 사실입니까? 회장님?'
'그렇습니다. 선배.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이규철은 그날 강혁의 눈동자에 어렸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강혁의 두 눈에는 결연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제2 연평해전.
북한 측 해군 초계정이 사전 예고도 없이 85mm포를 기습 발사하여 시작된 전투.
적의 기습에 즉시 사격 대응 명령을 내린 윤영하 대위는 저격수의 총탄에 등을 맞고 몸을 떨다 일자로 누워 숨을 전사했다.
우리 군인들은 갑작스러운 전투에도 불구하고 적과 맹렬하게 싸웠다.
결과적으로 우리 측 군인은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 먼저 기습 공격했던 북한군의 피해는 엄청났다.
경비정이 대파하고, 사망자만 함장 포함 13명, 부상자 25명 등 38명에 달했다.
우리 측 파열탄에 맞은 적 장병 중 하나는 살아남았지만 몸 전체에 박힌 파편만 230개에 달했다.
당시 전투에 대해 살아남은 북한군 장병은 다른 건 무섭지 않지만 이 파열탄만은 무서웠다고 보고했다.
서해 연평 해전이 일어난 것은 6월 29일.
그날이 오기 전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젊은 나이에 적의 총탄에 산하한 우리 장병들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었다.
강혁이 알려준 사실들을 떠올리던 이규철의 귓가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선배, 우리가 죽어도 이 일은 해내야 합니다.
"예, 회장님. 죽어도 해냅시다."
두 사람의 두 눈에 결연한 의지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