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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291화 (291/301)

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91화

291화

한 달 전.

이회수는 최영혜의 자택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대한국당의 당 대표인 그가 왜 일개 의원 집 응접실에 앉아 있는 것일까?

사실 이번 대선은 이회수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기회였다.

지난 대선은 상대 후보였던 김 대통령이 아니라 사실상 I.M.F사태에 진 것이었다.

이회수는 그렇게 믿었다.

호남을 정치 기반으로 하는 김 대통령으로서는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

영남과 호남.

우리나라의 정치 지형을 둘로 나눠 놓은 고질적인 지역감정.

비록 지난 대선은 천재지변이라 할 수 있는 외환위기 때문에 졌지만.

2002년 대선은 결코 이 지역감정의 파고를 넘어 설 수 없을 것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정치평론가들도 의견을 같이했다.

문제는 오히려 상대 당의 후보가 아니라 대한국당 내부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아직 신인에 불과한 최영혜.

하지만 그녀의 대중적인 인기가 너무 높았다.

최강수 대통령의 딸이라는 후광.

그것만으로도 대구 지역에서는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이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여기에 더해 삼양 백화점 사태에서 보여준 살신성인의 모습.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관계없이 이미 그녀는 전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만일 그녀가 3선 국회의원 정도만 되어도 이번 후보 경선에서 떨어지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당 내 조직에서 월등히 앞서는 이회수였다.

적어도 이번 경선에서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다행한 일이지.'

이회수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대중적 인기가 높은 최영혜와 당 조직에서 앞서는 자신.

아마도 치열한 한판 승부가 될 것이다.

문제는 경선 이후였다.

잘못하면 대한국당이 둘로 나눠져 경선 후에도 심각한 후유증을 겪을 수 있었다.

이회수는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최영혜가 나오면 이번에 자신을 밀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렇게만 해주면 다음 번 대선에서 자신이 확실하게 밀어줄 것이라고 말이다.

'서로 윈윈하는 것이지. 당을 위해서도 그 편이 좋고 말이야.'

정부 요직과 당내 노른자위에도 최영혜의 사람을 넣어줄 생각이었다.

어느 정도 지분이면 최영혜가 자신에게 이번 경선을 양보할 지 머릿속으로 분주한 계산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안방 쪽 문이 열리며 묘령의 청년이 다가왔다.

'누구지?'

문뜩 이회수의 머릿속으로 최영혜가 양자를 한 명 입양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청년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이회수는 크게 놀랐다.

드물게 보는 미청년이었던 것이다.

옥처럼 하얀 얼굴에 귀티가 나는 피부, 커다란 눈과 시원스런 콧대.

감탄성이 절로 나는 미남이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온 최영혜가 자신이 운영하는 시설에서 아들을 입양했다고 하기에 놀랐었던 기억이 새롭다.

'허허, 이것 참. 인중룡이로군.'

몸 전체에 감도는 신비로운 분위기에 이회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회수 당 대표님. 처음 뵙겠습니다. 최상운이라고 합니다."

"아, 반갑군요. 이회수예요."

이회수는 손을 내밀어 신상현과 악수를 나누었다.

'허허, 거참. 손도 곱군. 입양아만 아니면 내 손녀랑 혼담을 내밀고 싶을 정도야.'

이희수는 속내를 감추며 신상현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최 의원에게 장성한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보는군요."

"말씀 낮추십시오. 대표님."

"하하, 그럴까?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최 군."

"19입니다."

"올해 고3이로군."

"그렇습니다."

"그래, 학교는 어디로 갈 생각인가?"

"글쎄요. 서울 의대를 생각 중인데 어머니는 자신을 도와 정치를 해볼 생각이 없냐고 하셔서……."

"오! 그래? 그럼?"

"정외과나 법대 쪽으로도 생각 중입니다."

"대단하군. 성적이 좋은가 보지?"

이회수의 물음에 신상현은 그저 씩 웃었다.

회귀 전 신상현은 서울 의대에 거든히 합격했었다.

이번에도 어느 과든 골라서 갈 자신이 있었다.

"법대로 오면 내 후배가 되는 셈이군."

이회수는 눈앞의 잘생기고 영민한 신상현에게 매료되는 자신을 느꼈다.

입양아만 아니면 손주 사윗감이라고 생각했던 생각이 꼭 짝지어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변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어디 보자 소연이 그 애가 올해 몇 살이더라?'

이회수가 자신의 손녀들 나이를 헤아리고 있을 때였다.

응접실로 백발의 노집사가 찻잔을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차 세트를 놓고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

"드시죠. 대표님. 맛이 괜찮을 겁니다."

신상현이 찻주전자를 열자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러지. 좋은 차인 것 같군. 좋은 향이 나."

이회수는 잠시 기꺼운 마음으로 차를 즐겼다.

"그런데 최 의원이 좀 늦으시는군."

이회수는 최영혜가 좀처럼 나올 생각을 안 하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니는 안 나오실 겁니다."

"……?"

이회수는 신상현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안 나온다니?"

"대표님."

"……?"

"이번 대선은 대표님이 양보하시죠."

"……!"

"아니 양보하셔야 할 겁니다."

이회수의 눈이 커졌다.

이제 겨우 19살 밖에 되지 않는 청년의 표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한 표정이 신상현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이…이! 감히!"

이회수는 무서운 표정을 짓고 눈앞의 앳된 청년을 노려보았다.

"최 의원은 어디에 있나? 난 더 이상 자네와 말을 섞고 싶지 않군."

이회수가 벌떡 일어섰다.

"어머님은 나오지 않으실 겁니다."

신상현의 말투는 담담하면서도 분명했다.

이회수는 자신이 헛걸음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닌 말로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회수가 누구인가?

지난 보수 정권의 2인자이자 감사원장 출신으로서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다.

현직 당 대표로 당내에서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유력한 대선 후보였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과 척을 지기 보다는 상부상조하는 길을 택할 텐데 오늘의 이 태도는 뭔가?

명백히 자신을 적으로 돌리겠다는 시그널이었다.

"어머니께 전하게 후회하게 될 거라고!"

"가시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일 없네. 자네하고는 더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군."

이회수는 사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감히 자신과 대화 자리를 피하면서 아들을 대신 내보내다니?

자신을 화나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확실히 성공한 셈이었다.

뿌드득.

'감히… 최 의원. 날 적으로 돌릴 생각이라면 그래, 어디 한 번 해봅시다.'

이회수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푸훗, 후회하실 텐데요."

"후회? 누가 후회하게 될 건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될 터. 나는 이만 가겠네."

"박인배 사장."

"……?"

돌아서는 이회수를 향해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저히 19살 소년이 말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감정이 실려 있었다.

무시하고 나가려 했던 이회수의 등이 다시 돌아서며 의문에 찬 얼굴로 물었다.

"자네가 그 친구를 어떻게 아는 건가?"

"뭐, 우연히 알았다고 해두죠."

빙긋이 웃는 신상현의 얼굴에 서린 귀기 어린 표정에 이회수는 자신도 모르게 소스라쳤다.

"자…자네 대체 정체가 뭔가?"

"정체라… 제 정체보다는 제가 뭘 할 수 있는지를 궁금해 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

"자, 이제 그만 댁으로 돌아가시죠. 조만간 제가 오늘 한 말을 이해하시게 될 날이 올 겁니다. 그럼, 그때 다시 뵙죠."

"……!"

이회수는 황당한 마음을 감추며 발걸음을 돌렸다.

*     *     *

한 달 후.

부르르르르―

이회수는 팔에서 소름이 돋는 듯했다.

박인배 사장의 자살 소식을 듣고 한 달 전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당시 이회수는 황당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겨우 19살 밖에 안 되는 어린 친구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대체 그 친구가 뭘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박인배 사장은 자수성가한 인물로 보통 사내가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일반인이 어떻게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아니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함부로 건들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은 모두 틀린 것인지도 몰랐다.

♪♬♬♪♩♪♬~

회상에 잠겨있던 이회수의 가슴팎에서 핸드폰 벨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다.

정치인인 이회수는 여러 개의 전화기를 가지고 다녔다.

이 번호는 알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였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기 어려운 전화기인 것이다.

무시하려던 이회수에게 갑자기 뭔가 모를 느낌 같은 것이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이회수는 핸드폰을 열었다.

"이회수입니다. 누구시죠?"

―한 달 만이네요. 이 대표님.

아직 앳된 청년의 목소리.

이회수는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자…자네……?"

―예, 접니다.

이회수는 갑자기 허파가 아파 왔다.

친우의 갑작스러운 자살.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걸려온 전화.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자…자네… 설마……."

꾸울꺽.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물어야 했다.

"설마… 자네 짓인가?"

―후훗, 제가 후회할 거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 이…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이 대표님.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

갑자기 바뀐 어조에 이회수는 기가 막혔다.

"이봐! 이제 와서 발뺌을 할 셈인가!"

―글쎄요. 뭘 가지고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전화를 드린 이유는 전에 드렸던 말씀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서 말입니다.

"……?"

'이 자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설마 잊으신 건 아니겠죠. 후보 사퇴 말입니다.

"……!"

이회수는 화가 나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명백한 도발이며 동시에 협박이었다.

"용…서하지 않겠어."

―…….

"무슨 생각으로 이런 짓을 벌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려주지."

―…….

"자넨… 아니, 자네 어머닌. 싸움을 걸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말이야."

―하하, 그런가요. 재밌군요. 그럼 어. 디. 한. 번. 보여주시던가요.

신상현은 중간의 말을 스타카토로 끊어 읽으며 이회수를 도발했다.

*     *     *

일주일 후.

대한국당 당사 당 대표 집무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게. 정말 뒤져도 나오는 게 하나도 없답니다."

"……!"

이회수는 황당했다.

신상현과의 통화 이후 이회수는 자신이 가진 모든 영향력을 동원해 박인배 사장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을 조사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박인배 사장의 친필임에 분명한 유서까지 발견된 터라 더욱 그러했다.

"더 뒤져봐. 경찰이든 검찰이든 더 닦달해 봐. 틀림없이 뭔가 있어. 알겠어?"

이회수는 신경질적으로 호통을 쳤다.

"예, 예. 대표님 알겠습니다."

이회수의 호통에 비서는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못하고, 자라목이 되어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비서가 나간 집무실에서 이회수는 씩씩거리며 화를 삼켰다.

친우의 죽음에 신상현이 얽혀있는 것이 분명했는데 아무런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회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왔다.

아무래도 막역한 동료 의원을 불러 술이라도 한잔 걸쳐야 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자신을 향해 여 사무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대표님! 대표님!"

"왜 그러나? 김 양?"

"대표님, 김…김 비서님이……."

"응? 김 비서가 왜?"

조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있었던 김 비서를 거론하자 이회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길을 건너시다가 횡단보도에서 사고를 당하셨대요."

"뭐? 뭐라고?"

"일단 병원으로 실려 가셨지만, 목격자 말로는 아무래도 현장에서 즉사하셨다고 합니다."

"……!"

여 사무원의 말에 이회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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