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93화
293화
#77장 신상현의 몰락
고풍스런 인테리어와 외국산 소파와 고급 가구.
김정일이 혼자 생각할 일이 있을 때 자주 사용하는 주석궁 내 별실.
김정일과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수행비서가 함께 있었다.
"위원장 동지, 왜 그러십니까? 어디 편찮으신 데라도?"
"아무 것도 아니야. 내래 잠시 혼자 있고 싶으니까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 아. 예, 위원장 동지."
원래 같으면 요즘 마음에 들어 하며 매일같이 찾던 기쁨조 아이를 들여보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기색이 이상하다.
강혁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내심 이상하게 생각하며 수행비서는 밖으로 나갔다.
비서가 밖으로 나가자 김정일은 소파에 몸을 눕히고 고개를 들어 천정을 바라보았다.
뭔가 허탈한 표정이었다.
"허허, 내 수명이 이제 10년이 채 안 남았다고?"
김정일은 올해 61살이었다.
예전 같으면 환갑이 지난 나이지만 현대 과학의 힘으로 수명이 날로 늘어나는 시점이다.
북한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 각종 의료시설의 혜택을 한 몸에 누리는 김정일이 아닌가?
그의 아버지 김일성도 만으로 82살에 사망한 터라 김정일도 막연히 그 정도나 그 이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앞으로 10년 미만이라니?
믿기 힘든 아니 믿기 싫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상대가 다름 아닌 강혁이었다.
게다가 강혁은 도저히 믿기 힘들어하는 자신에게 아직은 아무도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을 꺼내었다.
김정일은 소파에 누워 강혁과 대화를 나누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 * *
"국방위원장님은 후계자로 삼남인 김정은 군을 생각하고 계시죠?"
"……!"
김정일은 강혁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 놀라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서방 언론과 해외 정부 기관들은 대부분 자신의 후계자로 장남인 김정남이나 차남인 김정철을 거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장남인 김정남이 국외 추방된 후로는 김정철이 후계자로 급부상 해 있는 상태였다.
그에 비해 삼남인 김정은은 세상에 제대로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
강혁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있는 김정일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아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언론과 해외 정보기관들은 김정은의 이름도 똑바로 알지 못했다.
남한 언론은 국정원이 확인해 준대로 김정은을 김정운 또는 김정훈으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
김정일의 요리사로 알려진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도 그의 저서에 김정은을 김정운으로 표기했다.
그래서 서방은 물론 대한민국의 언론들도 2009년까지 김정은을 김정운 또는 김정훈으로 알고 있었다.
그만큼 김정은은 대외적으로 존재감이 없었고, 2009년 이전까지는 제대로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사업이나 하고 있던 강혁이 대뜸 김정은의 진짜 이름과 함께 김정일의 흉심을 꿰뚫어 본 것이다.
김정일은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입가에 가져가 벌컥 들이마셨다.
"후―하!"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김정일은 놀란 마음을 조금 진정시킨 듯 말을 이었다.
"거 참, 시 동지가 강 회장을 천인이라고 하더니… 사실이군요. 대체 강 회장은 어떻게 아신 겁니까?"
2002년 현재 김정은은 스위스 베른 국제 학교를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존재 자체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김정은을 자신의 후계자로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강혁은 대체 어떻게 안 것일까?
역시 시진풍이 말한 대로 천기를 읽는 천인인 것일까?
김정일은 새삼 놀란 표정으로 강혁의 전신을 살폈다.
강혁의 능력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바였지만 자신이 실제로 겪으니 사람이 다시 보였다.
"하하, 그렇게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국방위원장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는 김정일을 바라보며 강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대체 내 마음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시는 거요?"
'걸려 들었다.'
강혁은 내심 미소를 지었다.
얼굴 표정을 보니 김정일이 자신의 능력을 믿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반신반의 하던 표정이 확 달라진 것이다.
사실 이번에는 강혁도 어느 정도 도박을 한 거였다.
물론 신빙성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한 배팅이었지만 말이다.
강혁은 김정일의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가 쓴 저서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김정일이 평소 김정은에 대해서 자신을 닮았다고 말하며 꽤나 만족해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실 김정남과 김정철 후계론이 대세인 가운데 김정은 후계론을 말한 것은 후지모토 겐지가 유일했다.
후지모토 겐지는 책에서 북한에 거주하는 동안 자신은 김정남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차남인 김정철은 성격이 매우 유약했다고 밝혔다.
그에 비해 김정은은 팀을 나눠 농구 시합을 하기도 하고 상당히 리더십을 발휘하는 유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으로 봤다.
그는 탈북할 때 김정은이 수령이 되어 자신에게 다시 북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는 꿈까지 꿨다고 한다.
이 일은 20여년 후 사실이 된다.
그런데 후지모토 겐지의 저서는 2003년. 즉, 내년에나 나오게 된다.
지금 이 시점에서 김정은에 대해서 북한 외부에 알려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책이 나온 후에도 해외 언론과 해외 정보국의 후계자론은 김정남, 김정철이 대다수였다.
후지모토 겐지의 말이 사실인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책이 나오고서도 10여 년이 더 필요했다.
그러니 김정일로서는 강혁이 신비롭게 보일 수밖에.
"2011년입니다."
"……?"
"김정은 군이 국방 위원장의 뒤를 이어 정식으로 그 자리에 오르는 해가 말입니다."
"……!"
더 이상 놀랄 게 있겠느냐고 생각했던 김정일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설마하니 김정은이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는 해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지만 국방위원장께서는 그 모습을 못 보실 겁니다."
꾸울꺽!
김정일은 침을 목 뒤로 삼켰다.
"내가 죽기라도 한다는 말이오?"
"2011년 12월 17일."
"……!"
김정일이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강혁이 말했다.
"국방위원장께서 돌아가시는 날입니다."
* * *
"후, 속이 타는군."
당시의 기억에서 돌아온 김정일은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알코올이 뱃속을 한 번 휘감았다.
알딸딸한 기분과 함께 가슴 속 깊은 곳에 감추어 두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죽음이라……."
아직 9년이 남았다지만 김정일은 자신이 죽을 날을 알게 되자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했다.
아직 어리기만 한 김정은이 9년 후에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된다고 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 어린 것이 잘 해낼지 모르겠군."
장남인 김정남은 이미 그의 눈 밖에 난 지 오래다.
제멋대로인 그의 행동은 북한 정권을 무너뜨릴 가능성도 있어 이미 작년 비밀리에 해외로 국외 추방했다.
둘째인 김정철은 너무 유약한 성격이 문제였다.
김정은과 함께 스위스 베른 국제 학교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김정일은 보고서에 등장한 김정철이 학교에서 썼다는 시의 내용을 보고 기함을 했다.
제목은 내가 꿈꾸는 세상이었다.
시를 읽은 김정일은 기가 찼다.
미래에 북한 정권을 이끌 지도자가 가질 생각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뭐, 핵도 없고, 무기도 없고, 전쟁도 없는 개방된 세상? 머저리 같은 녀석.'
'게다가 거 뭐야. 장 크로드 반담과 함께 테러리스트를 없애? 미친 놈.'
당시에는 아직 나이가 어려 그런 것이라 생각했지만 커서도 변함이 없었다.
결국 삼남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선택했다.
하지만 아직 지지기반이 너무 일천했고,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김정일은 삼남인 김정은의 지지기반을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을 빨리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 * *
주석궁 접객실.
강혁은 소파에 앉아 거실 내부를 천천히 살피며 혀를 찼다.
방 안이 호화로운 외국산 제품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이것들 모두가 북한 인민들의 고혈을 뽑아 만든 것이라 생각하니 통탄스러웠다.
―마스터, 신상현이 움직였습니다.
강혁의 머릿속으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인공지능 아이린의 목소리다.
현재 강혁은 북한 측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몸속에 통신용 캡슐을 심어 놓았다.
북한에서도 몸수색을 철저히 했지만 몸속에 숨겨진 최첨단 통신 캡슐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72시간 동안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이 통신 캡슐은 그 자체로 방해 전파를 발생시켜 도감청을 철저하게 막아낼 수도 있었다.
강혁은 어디선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북한 측 감청 요원을 떠올리며 씨익 웃었다.
―혹시 이회수 의원?
―그렇습니다.
―우리 측 대비는?
―실버 울프에서 보낸 우리 측 요원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꼭 살려야 해. 그 사람이 있어야 신상현과 최영혜 의원을 무너뜨릴 수 있어.
―걱정 마세요. 마스터. 반드시 지킬 겁니다.
―후훗, 부탁해.
―마스터.
―응?
―김정일이 이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강혁의 아이린의 말에 입가에 얕은 미소를 띠웠다.
조금 전 파티에서 김정일에게 했던 말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몸이 달아버린 김정일이 그새 못 참고 숙소까지 찾아온 모양이었다.
강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시죠. 위원장님."
"어엇? 어…어떻게?"
김정일은 자신이 온 것을 어떻게 알고 문을 열었는지 놀라워했다.
"보이더군요. …제 눈에."
김정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강혁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아… 우리 강 회장은 정말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람이군."
"앉으시죠. 뭐로 드릴까요?"
강혁은 자신의 집이라도 되는 양 접객실에 놓여 있는 붙박이장의 문을 열고 술을 권했다.
"거 위스키로 주시오. 제법 좋은 게 있소."
그의 말대로 상당히 고품질의 위스키가 배치되어 있었다.
강혁은 술잔도 두 개를 꺼내서는 가지고 왔다.
"강 회장.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 사실 처음에는 강 회장을 완전히 믿지는 못했지비."
김정일의 말에 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셨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래 강 회장의 말을 믿갔서."
강혁은 김정일의 말에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결심을 서셨습니까?"
강혁의 말에 잠깐 멈칫하던 김정일은 이내 마음을 굳힌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래 우리 공화국의 운명이 걸린 일인데 당연히 해야지 않겠어. 강 회장 말대로 하겠소."
김정일의 말에 강혁은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웃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위원장님의 결정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홍복입니다."
"내래 사실 베트남 애들도 중국을 따라서 개혁개방 정책을 펼치고 있어서 속이 많이 타들어 가고 있었지."
강혁은 김정일의 말에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고 우리 공화국을 가난 속에 둘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야."
"국방 위원장님의 이번 결단은 역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겁니다."
"하하하, 내래 별 수 있갔어? 천기를 읽는 도사가 20년 후에 우리 공화국이 망할 거라고 하는데 말이야."
김정일의 말에 강혁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흐흐, 20년은 아니지만 어쨌든 언젠가는 망할 나라인 건 사실이지.'
강혁은 김정일에게 친 뻥이 통한 것을 확인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 핵무기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하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시도하겠어."
"그렇게만 하면 조지아 대통령도 북한과의 관계 설정을 다시 할 겁니다. 중국과 베트남처럼 말이죠."
"내 미국은 우리 강 회장만 믿겠소."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김정일은 두 손을 내밀어 강혁의 손을 꼭 잡았다.
"내 말년에 우리 강 회장을 이렇게 만난 것이 천운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래."
김정일은 몇 번이나 강혁의 손을 잡고 흔들며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눈앞의 강혁이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