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 사는 절대기억능력자 295화
295화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김 대통령은 집무실 한쪽 벽면에 걸려 있는 달력을 바라보았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민족의 염원을 이루고, 거악을 뿌리 뽑을 기회가 온 거야.'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아니, 해야지. 해야만 해.'
김 대통령은 부르르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한번 결의를 불태웠다.
3일 후, 판문점.
전 세계의 눈이 판문점으로 향했다.
월드컵 개막일에 맞추어 오전 10시 경에 판문점에서 4개국 정상회담이 이뤄진 것이다.
판문점 평화의 집에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수천 명의 언론인들로 북적였다.
모두들 역사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긴장한 모습이었다.
"휴, 정말 떨리는군."
"그러게 말이야. 우리도 이런데 당사자들은 더하겠지?"
"아무튼 준비해 곧 나올 거라고."
"엇, 저기 나온다."
순식간에 플래시 세례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미국과 한국 두 정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양 국 정상은 기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국민 여러분 지금 미국 대통령 조지아와 우리 김 대통령께서 평화의 집을 나와 판문각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정장차림의 여성 아나운서가 현장의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이제 곧 판문각에서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남을 함께 할 예정입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에서도 약간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한반도의 역사를 바꾸는 중대한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판문각에 양국 대통령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얼마 후 중국의 후 주석과 김정일 국방 위원장도 모습을 드러냈다.
전 세계에 4개국 정상이 판문각 양측 경계선을 중심으로 남북에서 만나는 장면이 송출되었다.
네 사람은 상징적인 분계선에 모여 서로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네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하늘색 건물로 이동했다.
바로 정전협정이 이뤄졌던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이다.
"마침내 이런 날이 오기는 왔네요. 김 대통령의 감회가 크겠습니다."
조지아 대통령이 원탁으로 된 탁자에 앉으며 말했다.
원래는 이런 원탁 탁자는 없었지만 4개국 정상 회담을 위해 준비된 자리였다.
"그렇습니다. 마침내 이런 날이 왔네요."
김 대통령은 감회 어린 표정으로 나머지 정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하, 앞으로 양 국이 서로 협력해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허진타오가 웃으며 말했다.
그로서도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한다면 앞으로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민족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큰 결단을 내려주신 김정일 위원장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내레 중국과 베트남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이 적지 않았지요."
김정일이 김 대통령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김 대통령님, 우리 북조선 인민 공화국이 남쪽 못지않게 발전할 수 있도록 잘 좀 도와주시라요."
"암요, 도와드리지요. 뭐라해도 우리는 같은 민족 아닙니까? 이제 싸움은 멈추고, 다같이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갑시다."
짝짝짝!
후진타오 주석이 두 사람을 향해 박수를 쳤다.
"두 분의 말씀을 들으니 내가 다 기분이 좋군요. 어서 사인을 합시다."
이미 실무진에서 문항 하나하나까지 다 손을 본 협정서였다.
네 사람은 먼저 휴전을 끝내고, 전쟁이 끝났다는 협정서에 서명을 했다.
마지막 정상의 사인이 끝나자 김 대통령이 감회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드디어, 이 끝없는 전쟁이 끝났군요."
"하하, 아직 좋아하기는 이릅니다. 이제 평화 협정서에 서명하셔야죠."
조지아 대통령이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요. 어서 사인을 합시다."
네 사람은 평화 협정서를 펼쳐 한 사람씩 사인을 해나갔다.
이 협정서는 북한이 핵개발 프로그램을 영구폐기하며, 유엔조사단의 조사를 허락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정기적인 조사가 매 년 이뤄지며 원하는 장소는 언제든 조사할 수 있다는 조항이었다.
이 조항 때문에 한때는 협정자체가 취소될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북조선이 망하게 된다는 강혁의 조언이 고비마다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핵을 가져도 결국 망한다면 조사쯤 받으면 어떠냐는 생각에 결국 허락을 한 것이다.
공화국의 존엄과 주권에 심각한 제약을 가한다는 내부반발을 억누르고까지 말이다.
"자, 이제 협정서에 서약이 끝났습니다."
조지아 대통령이 선언하듯이 말했다.
이 장면은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동시 송출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쏟아지듯 박소 갈채와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네 사람은 서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협정서를 바라보았다.
* * *
뿌드득!
"위원장이 결국 우리 공화국을 버렸어!"
어깨에 별 네 개를 달고 있는 인민군 복장을 한 중년의 남자가 방송을 보며 인상을 찌그렸다.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인민군 장성들 역시 하나같이 분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가장 분노하는 것 중 하나는 유엔 조사를 허가한다는 등의 굴욕적인 조항이었다.
언제 어느 때든 원하는 장소를 볼 수 있게 한다면 군사기밀은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북한 내부의 방어 태세를 미국 등이 모두 알게 된다는 뜻이다.
군 장성들에게는 무장 해제하는 것이나 다름없게 받아들여졌다.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습네다. 우리가 어떻게 지켜온 공화국인데!"
"박 대장, 어떻게 방법이 없겠어? 이대로 가면 공화국은 미래가 없어야!"
비밀리에 모인 이들은 모두 이번 평화 협정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인민군 대장 계급을 지닌 박종길이 이들을 한 자리에 모은 주역이었다.
"모두 진정들 하시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니."
박종길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오!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거요?"
"있지! 방법이……."
박종길의 말에 모두의 눈이 그에게 쏠렸다.
"방법은 있지만 서도 후폭풍을 감당하려면… 위원장을 그대로 두고는 아니되오."
"……!"
박종길이 하려는 말을 못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간 홀 안은 긴장감이 흘렀다.
하지만 이들은 이곳에 모이기 전에 이미 상당수 각오를 굳힌 자들이었다.
"박 대장은 누굴 생각하고 있는 거요?"
김정일을 물러나게 하고 누굴 내세울 것이냐는 뜻이다.
"김정남은 일본에 있소. 우리 통제를 따를 자도 아니고. 김정철이 좋겠소."
박종길에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김정일 정처의 장자라는 명분도 있고, 김정철의 내성적인 성격을 생각해봐도 구슬리기에 좋았다.
잠시 후 이들은 박정길의 주도로 뜻을 함께한다는 증거로 인명부를 작성하고 친필 서명까지 했다.
서명을 한 이상 여기 모인 모두는 이제 물릴 수 없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걸었다는 생각에 모두의 얼굴에 비장함이 가득 떠올랐다.
"…계획을 설명하겠소."
박정길의 말에 북한 장군들이 집중하는 사이 한쪽에서는 남한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송을 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서울 한복판 길을 지나는 시민에게 리포터가 물었다.
[정말 축하할 일이고, 월드컵 개막식에 맞춘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정말 이대로 통일까지 쭉 갔으면 좋겠어요!]
박종길은 언뜻 눈을 돌려 방송을 바라보았다.
희망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서울 시민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박종길은 쓴 웃음을 지었다.
이들의 기쁨이 자신들에게는 분노로 돌아왔다.
'그 얼굴에 피눈물이 나오게 만들어 주갔어. 두고 보라! 축제가 지옥이 될 테니!'
박종길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 *
월드컵 개막일은 전 세계의 축하와 축복 가운데서 열렸다.
역대 어떤 월드컵보다 세계인의 관심이 집중된 월드컵이었다.
평화협정을 이끈 4개국 정상들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언급되기까지 했다.
이 열기는 한국 대표 팀의 월드컵 첫 승리과 함께 뜨겁게 달아올랐다.
전 국민의 성원을 입은 대표 팀은 부산에서 폴란드를 상대로 2대 0이라는 스코어로 신승했다.
이어진 미국과의 경기에서 1대1로 비기더니 우승 후보국 포르투칼을 1대 0으로 꺾고 16강에 올랐다.
전국이 축제 분위기로 들어섰다.
아니 축제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광풍이 불었다.
전 국민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16강전에서 모두의 예측을 뒤엎고 이탈리아를 이기더니 8강에서 스페인마저 꺾어 버렸다.
4강전이 열린 서울에서는 전국의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응원이 이어졌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카드섹션이 펼쳐지며 결국 아깝게 졌지만 축제는 그치지 않았다.
그날 거리는 밤을 잊었고, 온 국민이 대~ 한민국! 을 외치며 월드컵 4강을 기뻐했다.
* * *
신상현의 자택.
새로운 대한국당 당대표 남성수 의원이 신상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회수는 얼마 전 당대표를 물러난 후 연락이 끊어졌다.
언론은 물론이고 자신을 따르던 계파 의원들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아끼던 비서와 친우의 연이은 죽음으로 심경의 변화를 겪어 쉬고 싶다는 것이 알려진 유일한 이유였다.
아무튼 새로운 당대표가 선출되었고, 유일한 대선 후보인 최영혜 측 의원이 당선된 것이다.
"도… 도련님, 큰일입니다. 한 달 만에 여론이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최근 일진회 쪽 사람들은 신상현의 명으로 그를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남성수의 표정은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이번 대선은 그야말로 질 수 없는 싸움처럼 여겨졌다.
정권말기, 현 정권 하에 몇몇 스캔들이 터져 나왔고, 현 정권을 향한 지지여론은 급격하게 식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국민들의 기대감은 야당을 향했다.
여기에 최영혜의 대중적 인기가 더해져 이번 선거는 야당이 이길 것이라는 여론이 팽배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평화 협정이 모든 것을 뒤바꿔놓았다.
최영혜는 평소 현 정권이 추진하던 햇볕정책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보수적 성향의 국민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에는 더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문제는 그런 최영혜의 평소 정치적 입장이 이번에 자신의 발목을 건 것이다.
평화와 통일을 향한 전 국민적인 열망은 대선 여론 조사를 180도로 바꾸어 버렸다.
남성수 당대표는 안타까웠다.
아무리 평소 햇볕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이었다고 해도 이번 평화협정을 계기도 방향을 선회할 기회는 있었다.
자신을 비롯해서 많은 의원들이 최영혜에게 평화협정에 대한 환영 성명을 발표하라고 했다.
실제로 처음에는 환영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문제는 평화 협정을 환영한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딴지를 건 말들에 있었다.
언론 인터뷰에서 언제라도 협정을 파기하고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것이 북한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평소라면 최영혜의 말은 충분히 먹힐 수 있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한창 무르익어가는 평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비쳐진 것이다.
심지어 대선 때문에 모처럼 다가온 남북 간의 화해 분위기를 망치려 한다는 비난도 받았다.
이번에 발표된 여론 조사에서 최영혜에 대한 지지도가 순식간에 20% 넘게 떨어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월드컵 열기와 함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거대한 기대감이 큰 바람이 되어 불고 있었다.
최영혜는 그 거대한 바람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를 한 셈이었다.
비록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최영혜였지만 지금은 나설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메시지의 톤을 바꾸고… 정부의 방침에 적극 협력한다고 하면……."
"그런다고 이번 대선에서 여당 후보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신상현은 곤혹스러워하는 남성수 대표를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킥킥거리며 웃기까지 하는 모습에 남성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