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초(毒草) : 아로새기다 1권
지은이 | 윤아련
커버 일러스트 | 감람
타이포 디자인 | 기갈
발행처 | 블리스(BLiss)
※ ‘아로새기다’ 피스틸 버스 세계관 설명 ※
▶피스틸버스(Pistil Verse)란?
- 크게 피스틸, 스테먼으로 이루어진 세계관.
- 스테먼은 인구의 약 10%인 희귀종, 피스틸은 스테먼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종족. 케일릭 시절을 거쳐 발현되는 것이 특징이다.
◈ 스테먼과 피스틸 사이에는 주파수라는 게 존재한다. 주파수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을 의미한다. 굳이 운명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나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과 피스틸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
▶ 노멀(Normal)
◈ 그 외 케일릭 시기를 거치지 않은 일반인은 노멀(Normal)이라고 하며,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케일릭(Calyx)
- 2차 성징 이전의 시기를 일컫는 말로, 스테먼 또는 피스틸이 발현되기 전인 아동기에서 청소년기 시절 또는 그 시기의 사람을 칭한다.
- 케일릭 시기에 스테먼과 관계를 맺어도 등에 꽃이 새겨지지 않는다.
- 케일릭으로 발현된 이상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흔한 징후조차 나타나지 않고 갑자기 각성통을 겪는 게 일반적이다.
◈ 각성을 거치지 않은 케일릭은 특징을 가진다. 예를 들면 젖살, 어려 보이는 외모, 작은 키, 적은 체모 등.
◈ 각성은 일반적으로 18~20세 사이에 일어나지만 늦게 일어나기도 한다. 각성이 늦을수록 스테먼으로 각성할 확률이 높아진다.
▶피스틸(Pistil)
- 케일릭 시기에 각성통을 겪으며 척추를 따라 어깨뼈 부근까지 앙상한 나무가 새겨진다.(사람마다 색과 위치는 미미하게 다르지만, 주로 고동빛이나 밤색을 띠는 게 일반적이다.)
- 피스틸의 나무는 약 15일에 걸쳐 온전히 새겨지며, 그 과정을 각성이라고 부른다. (희박한 확률로 각성통을 견디지 못하고 숨지는 경우가 있다.)
- 관계의 횟수와 등에 새겨지는 꽃송이의 수는 비례한다.(관계 한 번에 꽃 한 송이씩.)
- 누구랑 맺었느냐에 따라 꽃의 종류는 다르다. 즉, 등에 새겨진 꽃의 종류가 다양할수록 피스틸은 문란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등에 꽃이 새겨질 자리가 없으면 2차 각성으로 다른 곳(둔부나 어깨)에 가지가 내려온다. 온몸에 빈틈없이 꽃이 새겨진 경우 피스틸은 사망한다.
◈ 피스틸마다 고유의 나무 냄새를 가지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향은 매우 희미한 편이다.
▶스테먼(Stamen)
- 스테먼은 각자 고유의 꽃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피스틸과 관계를 맺으면 스테먼 고유의 꽃이 피스틸 등에 새겨진다.
- 전체 인구의 약 10%에 해당하는 소수에게서만 발현되는 이상 특성. 성별에 관계없이 스테먼은 피스틸을 잉태시킬 수 있다.
◈ 피스틸의 등에 나무가 새겨지는 것처럼 스테먼 역시 각성을 거치면 고유의 꽃이 허벅지에 새겨진다. 각성은 1~2일로 짧은 편.
◈ 스테먼은 피스틸 특유의 나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베놈스테먼(Venom Stamen)
- 고유의 꽃이 독초인 스테먼으로, 스테먼 중 상위 3%에 속한다.
- 피스틸과 관계를 맺어 본딩(본인 고유의 독초를 새기는 것)을 할 수 있다. 베놈스테먼과 관계를 맺은 피스틸은 영원히 다른 스테먼과 관계를 맺을 수 없다.
- 만약 베놈스테먼과 관계를 맺은 피스틸이 다른 스테먼과 관계를 맺으면 혈관 안에 독이 퍼져 중독사하게 된다. 양쪽 모두 사망하게 된다.
◈ 베놈스테먼 역시 피스틸을 잉태시킬 수 있으며, 아이를 가진 피스틸을 본능적으로 보호한다. 이때 베놈스테먼이 가진 특유의 집착과 소유욕이 최고조에 이른다.
◈ 베놈스테먼과 피스틸 사이에서 정신적인 교감이 이뤄져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묶이는 순간을 밴딩(Banding)이라고 칭한다. 밴딩이 이뤄지는 순간 베놈스테먼과 피스틸은 서로에게 완전히 귀속되며, 피스틸은 관계를 해도 꽃이 새겨지지 않는다. 밴딩은 베놈스테먼과 피스틸의 정신적인 교감과 육체적인 교감이 동시에 이뤄져야지 가능하며, 어느 한쪽에서 거부하면 밴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안티스테먼(Anti Stamen)
- 베놈스테먼이 피스틸의 나무에 새겨 넣은 독초의 독을 정화할 수 있는 스테먼. 스테먼 중 상위 1%에 속한다. 매우 희귀함.
- 베놈스테먼과 본딩한 피스틸은 안티스테먼과 관계를 맺고 정화가 되면 자유로워질 수가 있다.
◈ 안티스테먼은 본딩만 끊어 낼 수 있을 뿐, 피스틸의 꽃은 지우지 못한다.
◈ 밴딩까지 한 피스틸과 관계를 맺으면 안티스테먼은 일반 스테먼처럼 독초에 중독되어 사망한다. 이때 피스틸은 베놈스테먼에게 귀속되어 있기 때문에 상처는 입을 수 있어도 사망하진 않는다.
‘◈’ 은 작가의 개인적인 창작 설정이므로 기본 피스틸버스 세계관 설정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초(毒草):아로새기다』에 사용된 작가의 개인적인 창작 설정 부분(◈표시)은 무단으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피스틸 버스 세계관은 리 님에 의해 창작되었습니다. 저작자 [리(@Lee_eee1)] 님께 상업적 이용을 허락 받았습니다.
1. 긴 인연의 시작
- 내달 방영 예정이었던 드라마 <눈의 여왕> 팀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오늘 오전 주연 배우인 이하원 씨가 대마초를 피우다가 적발되어 긴급 체포된 가운데…….
팟-
잘 나오던 텔레비전이 순식간에 새까만 화면으로 물들었다.
아, 뭐야…….
까맣게 점멸된 화면에 누군가의 인영이 어른거렸다. 인상을 사납게 구긴 승모가 고개를 홱 돌리고 소리쳤다.
“누구……!”
“…….”
“어… 형, 언제 오셨어요?”
승모는 멋쩍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문 앞에 촬영 의상으로 갈아입은 강류원이 삐딱하게 몸을 기댄 채 서 있었다. 승모는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근사한 입매가 비틀려 있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류원은 손에 든 리모컨을 테이블 위에 툭 던지고 미간을 좁혔다. 언제라도 꽁지 빠지게 도망갈 준비를 하는 승모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허 대표는 뭐래.”
“아, 그게… 미팅해 봐야 한다고 하셨어요. 근데, <눈의 여왕> 다음 편성이 <수상한 커플>이니까, 아마도 앞당겨질 것 같다고…….”
“일정을 뭐 이따위로 잡아서 사람 속을 뒤집어.”
류원은 답답하게 목을 조이는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욕을 뇌까렸다. 6개월간의 영화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지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촬영 기간 내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강행군을 이어온 터라 컨디션이 바닥을 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원은 화보 촬영을 위해 경기도 모처의 스튜디오에서 촬영 대기를 하고 있었다.
승모는 귓불을 손으로 문지르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뛰어나갈 생각이었다. 괜히 알짱거리다가 트집이라도 잡히면 쥐 잡듯 잡힐 게 뻔했다.
숨 막히는 침묵에 숨을 크게 몰아쉬다가 누군가를 발견한 승모의 눈이 커지며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팀장님 오셨어요!”
승모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준희가 도넛 모양이 그려진 쇼핑백을 양손 가득 들고 류원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준희는 손에 든 간식을 승모에게 넘기고 나가라고 슬쩍 눈짓했다. 승모가 기쁜 얼굴로 쇼핑백을 받아 대기실을 후다닥 빠져나갔다.
“류원아.”
“…뭐.”
“소식 들었지?”
“무슨 소식? 6개월 동안 산에서 뺑이 치면서 개고생 하다가 겨우 돌아왔더니 지금 당장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 좆같은 얘기?”
“이하원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촬영 일정이 좀 꼬였어.”
준희가 커피 캐리어에서 커피를 꺼내 내밀었다. 류원은 옷이 구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형은 책상 앞에 앉아서 뭐 하는 사람이야. 그러라고 내가 사무실로 빼 준 줄 알아?! 이렇게 융통성 없게 스케줄 잡을 거면 그냥 현장 뛰어.”
류원의 쓴소리에 준희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고 일부러 과장되게 웃어 보였다.
“우리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래? 우리 강 배우 지금까지 고생한 거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는데 나도 쉬게 해 주고 싶지. 근데 이건 천재지변 같은 거잖아.”
류원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고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누적된 피로에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게 신기할 만큼 자신은 지쳐 있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저라도 지금은 휴식이 필요했다.
아침 일찍 동료 배우 이하원의 구속 소식을 들으며 류원은 콧방귀를 꼈다. 그렇게 문란하게 놀더니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조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가을쯤으로 예정된 <수상한 커플>의 방영일이 앞당겨질 수도 있다는 비보가 들려오면서 류원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하원의 구속으로 <눈의 여왕> 방영이 취소되면서 류원은 예정보다 이르게 드라마 촬영장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난데없이 머리채가 잡혀 들어가는 형국이었다.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류원은 애써 세팅해 놓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머리는 아무런 죄가 없다. 곧 촬영 들어가야 하잖아…….”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
이준희는 익숙하게 강류원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상황이 더럽게 돌아가는 건 준희도 인정하는 바였다.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예정에 없던 촬영을 바로 시작해야 하니 류원도 짜증이 날 만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인데.
준희는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에 얼굴을 문질렀다. 만약 강류원이 연기에 대한 열정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상황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연기에 대단한 열정도, 욕심도, 자부심도 없었다. 뭐랄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 맹목적으로 하는 느낌이랄까?
류원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고 커피가 조금 남은 종이컵에 담배를 툭 던져 넣었다. 준희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시계를 힐끗거렸다.
시간이 없었다. 편성 문제로 방송국에 들어가야 해서 마음이 급했다. 드라마 국장이랑 최대한 일정을 조율해 보겠지만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류원을 설득하는 게 최선이었다.
준희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류원이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돌렸다.
“네가 조금만 양보해 주면 안 될까?”
“형이 카메라 앞에 서는 거 아니라고 쉽게 이야기하지 마. 한 회당 내가 외워야 할 대사가 얼만지는 알고 이야기하는 거야?”
“…류원아.”
“하필 법정물이야, 대사는 좀 길어? 내가 못해도 준비 기간 3개월은 줘야 한다고 했지. 그런데 뭐? 이제 영화 촬영 끝내고 나니까 화보, CF 줄줄이에 그것도 모자라서 바로 드라마 들어가라고?”
“우리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진짜야.”
“모르면 다야? 다 필요 없고 드라마 연기시켜. 나 절대로 못 해.”
류원은 강경한 태도로 나갔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휴식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특히나 영화를 끝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였다.
“난 예정대로 핀란드로 떠날 거니까 그렇게 알아.”
“강류원!”
류원의 본래 계획은 핀란드로 오로라 여행을 떠나는 거였다. 거기서 한 달쯤 머물면서 쉬고,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생각이었다.
오로라 헌팅도 하고 산타 마을도 다녀오고. 류원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여행을 준비해 왔는지 준희가 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이다. 미간을 사정없이 구겼다.
류원은 다섯 살 때부터 연예계 바닥에서 굴러먹느라 속을 터놓을 만한 친구조차 없었다. 곁에 남아 있는 사람 대부분은 강류원의 배경과 인기에 현혹된 사람들이었다. 강류원의 인기가 바닥을 치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갈, 목적이 뚜렷한 인간들. 그런 류원의 유일한 낙은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다.
정말 백번 양보해서 여행을 안 가더라도 지금 당장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는 건 무리였다. 단 며칠이라도 쉴 시간이 필요했다.
류원은 늘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편이라 촬영에 돌입하면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하루에 간신히 한두 시간, 적으면 삼십 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 그래서 늘 담배와 피로회복제를 입에 달고 살았다.
“류원아 형 좀 살려 주라.”
류원은 준희의 애원에도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만큼은 절대로 물러서 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이준희가 앓는 소리를 한다고 해도.
준희는 예상보다 더 강경하게 나오는 류원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깊게 한숨을 푹 내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나 지금 드라마 국장이랑 미팅 가는데, 내가 가서 이야기해 볼게. 2주 정도 시간 빼 주면 될까?”
준희는 엄청난 딜을 제시하는 것처럼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지만, 실속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공수표에 불과했다. 건조한 류원의 눈동자가 준희에게로 향했다.
“나 멜로도 아니고 액션 영화 끝내고 왔어. 컨디션 바닥인데 CF, 화보까지는 입 닥치고 일정 소화하고 있잖아.”
“그래, 알아. 내가 네 스케줄 뻔히 다 아는데 내가 왜 몰라. 그럼 일단 대체 편성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올게. 2주라도 시간 벌어 볼 테니까, 한 번만 봐주라 어?”
준희가 얼마나 곤란한 상황인지 류원 역시 알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건 천재지변 같은 일이었다. 당장 2주 후부터 방영이 되어야 할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구속이 되었으니 방송국도 난감한 상황일 것이다.
류원은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준희가 입에 문 담배를 가로채고 제 입술로 가져갔다. 간신히 한고비 넘겼다.
“2주간 쉰다는 조건으로 하는 거야. 일정 조율 안 되면 그대로 잠수니까 그렇게 알아.”
“알았어, 내가 국장 멱살을 잡는 한이 있어도 꼭 받아 올게.”
“…….”
“아 그리고 이거…….”
준희는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류원에게 내밀었다. 류원은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뭐야.”
류원이 심드렁한 얼굴로 봉투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봉투의 겉면에 쓰인 이름을 보고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베놈스테먼 연구소]
“너 검사받을 시기 지났다며?”
“진짜 끈질긴 새끼들… 나 검사 안 받아.”
“왜? 이거 스테먼이면 다 받는 거라며.”
“나한테는 필요 없어.”
류원은 봉투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내용은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후,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 소파에 몸을 깊게 묻었다.
류원은 한국에 몇 없는 베놈스테먼이었다. 한때 스테먼이 인구의 10%를 차지할 만큼 많았지만 언제부턴가 개체 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희귀한 수준에 이르렀다.
최근 한국에서는 스테먼의 종족 번식에 관한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강류원이 연구 대상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류원은 이런 연구 놀이에 장단을 맞춰 줄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벌써 몇 차례 연구소에 거절 의사를 내비쳤음에도 그들은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나 준호 형한테 진료 볼 거니까 예약 잡아 줘. 그날은 알아서 스케줄 빼 주고.”
“베놈 연구소로 안 가고… 잠깐만.”
지잉-
진동 소리에 준희가 휴대폰을 꺼내 귀로 가져갔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준희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류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스탠바이 10분 전.”
“…….”
“그럼 진료 스케줄은 형이랑 상의해 보고 알려 줄게. 근데 너 쉬면 뭐 할 건데.”
“아무것도 안 하고 시체처럼 잠만 늘어지게 잘 거야.”
류원은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영화든, 드라마든 모든 촬영이 완전히 끝나야 그나마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래서 휴식은 꼭 필요했다. 이미 핀란드는 물 건너간 거 같고 집에서 실컷 잠이나 자고 밀린 영화나 볼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여행 가는 걸 제외하면 거의 집돌이 수준으로 집에 처박혀 있는 게 전부였다. 만날 사람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류원의 삶은 늘 건조했다.
“나중에 술이나 사 줘.”
“돈은 네가 더 잘 버는데 왜 내가 사 주냐.”
준희는 작게 투덜거리며 류원의 셔츠 단추를 채워 주고 타이를 조여 주었다. 어깨에 묻은 먼지도 무심하게 툭툭 털어 준 준희가 류원의 앞에 섰다.
“잘생겼네 우리 강 배우. 자 이제 촬영가자.”
“일정 잘 조율해. 재계약 안 하는 수가 있어.”
“알았어, 인마. 내가 국장 앞에서 백 텀블링을 해서라도 2주는 확실하게 보장받아 올 테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 괜히 애들한테 짜증 내지 말고. 너 승모까지 그만두면 열두 명째야. 알겠냐.”
준희는 이제나저제나 류원의 매니저가 그만두겠다고 할까 봐 늘 걱정이었다. 워낙 악명 높은 강류원이라 점점 매니저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있었다. 류원은 준희의 머리카락을 슬슬 문질러 주며 피식 웃었다.
“아무도 없으면 형이 내 매니저 해.”
“시끄러워. 너 진짜 애들한테 짜증 그만 부려 알겠지? 강류원 내 말 명심하라고!”
목에 핏대까지 세워 가며 발악하는 준희를 힐끗거리고 류원은 스튜디오로 걸음을 옮겼다.
* * *
이준희가 정말 드라마 국장 앞에서 백 텀블링을 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약속대로 2주간의 휴식을 얻어 왔다. 예정된 CF와 지면광고를 소화하고 난 뒤 류원은 집 안에 처박혔다.
2주 동안 류원은 집에서 시체처럼 늘어져 휴식을 취하고, 영화를 보고, 시나리오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준희의 형이 소장으로 있는 연구소에 직접 방문해 수면제를 처방받았다. 요즘 들어 불면증이 더 심해진 기분이었다.
준호는 수면제가 든 약통을 제 앞에 내려놓으며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주파수라는 거 아냐?”
“주파수? 운명론이라면 집어치워. 그딴 거 관심 없으니까.”
“약을 써도 안 되고 좋다는 음식, 약초 다 구해서 먹었는데도 불면증이 전혀 차도가 없잖아. 혹시 누가 또 알아? 주파수가 너한테 도움이 될지?”
류원은 코웃음을 쳤다. 주파수를 맹신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주파수를 믿지 않았다.
예전에는 태어날 때부터 서로의 짝으로 정해졌다고 해서 무조건 그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요즘에는 그렇지 않았다. 자의적으로 결정을 하고 받아들이는 추세였다. 그래서 준호 입에서 나온 주파수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주파수가 맞는 상대가 나타나면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느낄 테니까 잘 살펴봐.”
“됐어.”
“무조건 됐다고 하지 말고, 어떤 자료에서 보니까 심장병을 앓던 스테먼이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을 만나고 병이 완쾌되기도 했대. 솔직한 말로 밑져야 본전 아니냐?”
밑져야 본전이라는 말이 지금까지도 귓가에 맴돌았다. 자신과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이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작게 웃음이 터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형, 대본 나온 거 이게 전부래요.”
류원은 상념을 지워 버리고 대본 같지도 않은 종이 몇 장을 받아 들었다. 피곤한 눈두덩을 손으로 문지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꿀맛 같은 2주간의 휴식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휴식이 끝나자마자 <수상한 커플> 제작진 미팅, 전체 대본 리딩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첫 촬영 일정이 잡혔다. 촬영이 얼마나 급박하게 진행되었는지 드라마가 잘되길 기원하는 고사까지 생략했을 정도였다.
류원의 컨디션을 염려한 준희가 일주일 동안 현장 매니저로 나섰다. 그러나 준희가 현장에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딱히 없었다.
정말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살인적인 스케줄이 계속됐다. 벌써 일주일째 이어지는 강행군에 류원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거기에다가 하루에 몇 잔씩 쏟아붓는 커피에 속이 다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주연 배우 하차라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어 내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류원은 손에 든 쪽 대본을 펼쳐 대사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하지만 머리가 몽롱해서 그런지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를 흔들어도 보고 뺨도 두어 대 때려 봤지만 몽롱한 기운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고르지 못한 수면 패턴에 불면증까지 겹치면서 류원의 컨디션은 바닥을 기어 다녔다.
불면증은 원래도 있었지만 최근 몇 년 새에 증상이 더 심각해졌다. 상담 치료도 받아 보고 약물 처방도 받아 봤지만 그리 드라마틱한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거의 반쯤 포기 상태였다.
촬영 중에는 약도 먹질 못하니 상태는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아주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거의 최악에 가까웠다.
“후…….”
결국 류원은 대본에서 눈을 떼고 차 문을 두드렸다.
“양승모 담배 가지고 와.”
아무리 대본을 읽고 또 읽어도 입에 붙지 않는 대사 때문에 류원의 예민함이 극으로 치달았다.
“여기요.”
차 문이 조금 열리고 투박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를 내밀었다. 빨리 받으라는 듯이 손을 흔들어 대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인데 심기가 뒤틀렸다.
옆에서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막내 매니저 채현이 류원의 눈치를 보며 담배 케이스를 대신 받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탁,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갑자기 짜증이 불쑥 치솟았다. 그리고 가슴속 깊이 고여 있던 짜증이 한순간 폭발했다.
류원이 손을 뻗어 차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좌석에 기대어 흐리멍덩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승모가 보였다.
“왜요… 뭐 필요한 거.”
“이 새끼가 빠져서. 가만히 앉아서 노는 주제에 뭐가 힘들다고 이 지랄이야.”
“…형, 저도 피곤해요. 오늘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
“네가 카메라 앞에 서길 해 아니면 대본을 외우길 해.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자빠져 있는 게 뭐가 힘들다고 지랄이야. 아주 돈 버는 게 쉽지? 당장 일어나!!”
류원은 앞뒤 재지 않고 울컥 치미는 짜증을 퍼부었다. 사소한 일임에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수면 부족과 피로 누적이 만들어 낸 참사였다. 분명히 머리는 그만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형, 그만하세요. 승모 형도 피곤해서 그래요.”
채현이 말려 보지만 이미 핀트가 나가버린 류원은 막무가내였다. 기어코 승모의 멱살을 잡아 차 밖으로 끌어내렸다. 비틀거리며 차에서 내린 승모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채현이 발을 동동 구르며 류원을 붙잡았다.
“형, 곧 촬영 들어간대요. 그만하세요. 진짜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래요.”
“그 입 다물어!!”
류원은 날카롭게 일갈하고 승모를 쳐다봤다. 승모 역시 신경이 날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벌써 며칠째 이어지는 강행군에 몸살 기운까지 있어 몸이 천근만근인데 강류원은 시도 때도 없이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커피 맛이 이상하다며 시비를 걸어왔다. 일부러 회사 근처까지 가서 류원이 항상 마시는 커피를 사 왔는데 그것마저도 마음에 안 든다고 짜증을 부렸다.
강류원은 매니저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연예인 중 한 명이었다. 까다롭고 성격 더럽기로 유명했다. 더구나 아역 배우부터 차근차근 밟아 올라간 케이스라 이 바닥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현장에 문제가 생겼을 때 대충 어르고 달랠 수도 없었다. 특히 드라마나 영화처럼 긴 호흡이 필요한 경우 그의 예민함이 하늘을 찔렀다. 강류원은 업계에서 악명 높은 또라이였다.
그런데도 강류원의 매니저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높은 보수 때문이었다. 타 연예인을 맡는 것보다 보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회사에서도 강류원의 성격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높은 보수를 내세워 매니저를 모집했다. 뭐, 어차피 그런 비용들은 강류원의 수입에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하지만 강류원은 해도 너무했다. 차라리 돈을 덜 받고 편안한 환경에서 일하는 게 훨씬 나았다. 감정적으로 짓밟히는 건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승모는 씩씩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높은 보수고 나발이고 이제 정말 못 해 먹겠다.
승모가 벌게진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쥐자 채현이 그의 팔에 매달렸다.
“형 제발 그만하세요. 류원이 형 곧 촬영 들어가야 해요.”
“놔, 안 때려. 나도 연예인 깽값 물어 줄 돈 없어. 근데,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한마디는 하고 가야겠다.”
승모가 팔에 매달린 채현을 떼어 내고 류원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주위가 물을 끼얹은 것처럼 고요했다.
“형, 저도 웬만하면 그냥 있으려고 했는데 이건 아니잖아요. 형이 고생하는 만큼 주변 스태프들도 개고생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까 재영이한테 양말 색깔 마음에 안 드신다고 짜증내시고 화내셨죠. 쟤 눈 보세요. 퉁퉁 부은 거. 그리고 저랑 막내는 현장 상황 파악하고 팬들 통제하느라 진이 빠져요. 형 팬들 때문에 NG나면 저희는 무슨 대역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굽실거리는 건 알고 계세요? 거기에 형이 부리는 온갖 짜증 다 받아 내고 있고요.”
“…….”
“향수부터 양말 한 짝까지 다 마음에 안 드신다고 하면 저희보고 어쩌라는 겁니까.”
류원은 쪽 대본을 손에 말아 쥐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이제야 머리가 차분해지고 시근덕거리던 호흡도 가라앉았다. 실수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신경이 곤두서 괜히 트집을 잡아 패악을 떨어 댔다. 하지만 그 실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라고 회사에서 월급 주는 거 아닌가?”
“끝까지 사과 한마디 안 하시네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우십니까? 제가 매니저지 형 수발상궁은 아니잖아요.”
“…….”
“저 그만두겠습니다.”
“뭐?”
“몸이 힘든 건 어떻게든 버텨 보겠는데 정신적으로 힘든 건 못 참겠네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승모는 차문을 열고 제 가방을 꺼내 어깨에 멨다. 채현이 발을 동동 구르며 승모의 팔을 붙잡았다. 혼자 남을 그가 안타까웠지만 정말 한계였다. 내일 되면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류원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승모가 멀어지기도 전에 무덤덤한 말투로 채현에게 말했다.
“준희 형한테 매니저 새로 구하라고 해.”
* * *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지하 단칸방. 불을 켜도 어두운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형광등은 오래됐는지 한쪽 끝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방 안에는 쿰쿰한 곰팡내가 진동했다. 환기를 아무리 시켜도 지하 특유의 습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환풍기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요즘에는 그마저도 돌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해원은 신발장 위에 열쇠를 올려 두고 옆구리에 낀 신문 뭉치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죄다 구인 광고가 실린 지역 신문이었다. 가장 위에 떨어진 신문 하나를 집어 들고 방 한가운데에 놓인 낡은 접이식 침대에 엎드렸다.
신문을 펼쳐 들고 구인 광고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그중에 조금이라도 할 수 있을 법한 일이라면 망설이지 않고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쳐 두었다. 한참을 신문을 뒤적이던 해원이 마지막 장을 펼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일 마지막 장에는 피스틸을 구하는 구인광고가 실려 있었다.
[고수익 보장, 하루 일당 10만 원 S 클럽]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고 신문을 바닥으로 밀어냈다. 제 처지가 한심해서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몸을 바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쳐다봤다.
해원은 한때 촉망받는 스턴트맨이었다. 어릴 때부터 운동하는 걸 좋아해서 모든 운동을 섭렵하고 다녔다. 유도, 합기도, 권투, 특공무술, 검도, 더 나아가 구기 종목까지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열여덟 살 때쯤 우연히 액션스쿨을 알게 되었고 거기서 스턴트맨의 꿈을 키웠다. 결국엔 스물두 살 때 스턴트맨으로 정식 데뷔했다. 누군가의 그림자로 사는 인생이었지만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었고 재미도 있었다.
해원은 스턴트맨으로서 상승 가도를 달렸다. 체격이며, 기술이며, 담력이며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다. 또한, 배우의 체형에 맞게 살을 찌웠다가 빼는 게 능숙한 편이라 연기자의 대역도 가능했다. 그렇게 그는 데뷔 3년 만에 업계에서는 꽤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게 다 평화롭고 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행은 소리 소문 없이 찾아왔다. 아니 예정된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해원은 일곱 살 때 케일릭(Calyx)으로 발현했다. 스테먼이나 피스틸로 각성이 예정된 운명이었다. 거의 18~20세 전후로 각성을 하지만 해원은 그 나이가 지나도록 각성을 하지 않았다.
각성이 늦어지면 대부분 스테먼으로 각성하는 경우가 많아 해원은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평화롭게 지내던 어느 날, 각성은 느닷없이 찾아왔다.
좋아하는 배우가 주연인 영화의 무술팀으로 첫 촬영을 앞둔 날이었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몸은 물먹은 솜뭉치처럼 축축 늘어지고, 열도 조금 있었다.
해원은 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느끼고 다른 선배에게 스턴트를 부탁했지만, 배우의 체격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사실 촬영할 스턴트 장면이 위험해서 다들 꺼리는 분위기였다.
어쩔 수 없이 안 좋은 몸을 이끌고 촬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해원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의상을 갈아입었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차량과 차량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면을 찍어야 하므로 감독과 연출부, 스턴트 선배들까지 모두 초긴장 상태였다. 무술 감독과 몇 번이나 리허설을 진행하고 동선을 점검했다.
준비를 마친 해원이 차에 오르자, 무술 감독이 다가와 장비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옷 안에는 온갖 보호대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실수하면 안 된다. 잘할 수 있지?”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해원은 마음을 다잡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났다. 마침내 감독의 ‘액션’ 소리가 들리고 하얀 깃발이 올라갔다. 해원은 망설이지 않고 가속페달을 세게 밟았다.
부아앙-
폭발적인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빠르게 도로를 내달렸다. 합을 맞춘 지점이 가까워지자 숨을 크게 몰아쉬고 운전대를 세게 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눈은 분명히 뜨고 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뜨거운 열이 온몸을 뒤덮고 등이 지글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시야를 다잡아 보려고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체감상 이쯤에서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줄여야 함을 알았지만 도무지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력감에 운전대를 쥔 손도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
사고를 직감한 상대 차량이 재빨리 속도를 줄이고 핸들을 꺾었지만 해원이 탄 차량은 그대로 가드레일과 충돌하고 말았다. 몸이 종이 인형처럼 나풀거리는 느낌이 들고, 사람들의 비명이 이명처럼 들렸다.
모든 게 꿈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불에 달구어진 쇠공이 등줄기를 타고 굴러다니는 느낌만이 뇌를 강렬하게 주물러 댔다.
해원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문해원 정신이 드냐?”
해원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일주일이 훌쩍 지나 있었다. 자신의 상태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사고로 인해 갈비뼈 두 대와 다리가 부러졌다.
그리고… 스테먼이 아니라 피스틸로 각성을 마친 상태였다. 믿을 수가 없어 의사를 붙잡고 몇 번이나 사실을 확인받았지만 각성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았다. 절망스러웠다.
해원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머니’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 본 적이 없었다. 남성 피스틸의 몸에서 태어나 아버지만 두 분이셨다. 큰아빠, 작은아빠라는 호칭으로 두 분을 구분했다.
작은아빠가 돌아가신 건 해원의 나이 열 살 무렵. 온몸에 사랑하는 남자의 화려한 꽃을 새긴 채 서서히 숨이 꺼져 가는 모습을 해원은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영면하기 직전, 해원의 손을 붙잡고 ‘운명이 너를 비껴가길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그토록 비껴가길 바란 그 운명은 해원을 비껴가지 못했다. 그와 똑같은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차가 반파되는 큰 사고에 갈비뼈 두 대와 다리 하나 부러진 거면 선방했다며 선배들이 입을 모았다. 어떻게 보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게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해원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스테먼이 아니라 피스틸이라니.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해원은 병실에 홀로 남겨지고 나서야 환자복을 벗어 거울로 등을 확인했다. 등에는 가지가 앙상한 나무 한 그루가 새겨져 있었다. 그때야 피스틸로 각성했음을 받아들였다.
몸을 회복하고 재활 과정을 마친 해원은 무술팀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훈련에만 몰두해서 몸의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그 덕분에 몸 컨디션은 사고 전보다 훨씬 좋았다.
마지막 테스트를 앞두고 카 액션을 점검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서킷을 도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핸들링이나 기어 변속 스킬 등 모두 평상시 그대로였다.
그런데 장소를 옮겨 카 액션 장비를 착용하는 순간부터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쭉쭉 빠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해원은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그날의 사고는 잠재된 기억 속에 꽤 큰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다.
결국, 해원은 카 액션을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야 했다. 카 액션 외에는 전체적으로 역량이 뛰어난 편이라 무술 감독은 해원을 잡고 싶어 했지만 해원은 자괴감에 빠져 스턴트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잠시 떠오른 옛 기억에 해원은 팔로 얼굴을 가렸다. 이 모든 게 피스틸로 각성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피스틸 각성이 제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스턴트맨으로 성공하고 싶었는데…….
깊은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제는 꿈도 희망도 뭐도 없었다. 스턴트맨으로 일했던 기억은 빛바랜 추억 속에 깊숙이 묻혀 있었다.
어디선가 얼큰하고 매콤한 냄새가 솔솔 풍겨 오기 시작했다. 하아, 해원은 본능적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물을 마셔 애써 눌러놓은 허기가 밀려들었다.
돈이 없어서 며칠째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식사라고는 가끔 신문을 주우러 나갈 때 편의점에 들러 삼각 김밥 하나를 먹는 게 고작이었다. 물조차 사 먹지 못해 수돗물을 마시는 형편이었다.
해원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남은 돈을 모조리 꺼냈다. 꼬깃꼬깃 접힌 천 원짜리 몇 장과 백 원짜리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피스틸이라서 국가에서 나오는 보조금이 있었지만, 보조금 전액은 사채업자들 손에 고스란히 넘어가고 있었다.
스턴트를 그만두고 난 뒤, 운명을 거슬러 보겠다고 검증도 되지 않는 약물과 시술에 돈을 쏟아부었다. 피스틸 말고 차라리 노멀로 살고 싶었다. 그때는 그런 불법 시술들로 이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절박함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등에 새겨진 나무를 파내 준다는 시술에 거의 1억이 넘는 돈을 쏟아부었다. 모아 둔 돈이며 사채까지 손을 대면서까지 미친놈처럼 발악해 댔다. 그리고 그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알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1억이 넘는 빚을 지고 있었고, 건강도 잃은 상태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증과 끔찍한 두통에 시달렸다. 운명을 거스르려고 했던 피스틸에게 내려진 벌은 가혹했다.
해원은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이 지하 단칸방에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도 돈이 없었기 때문에 방 안을 뒹굴고 울음을 터뜨리는 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딱 한 번,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119를 불러 병원에 가 봤지만 그쪽에서는 별다른 처방을 해 줄 수 없다는 답변만 듣고 돌아왔다.
최근에서야 기적처럼 두통이 가라앉고 무력하기만 하던 몸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건강을 회복하는 데 꼬박 2년이 소요되었다.
해원의 등에 새겨진 나무의 밑동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불법 시술의 부작용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얻게 되었다. 돈은 돈대로 날리고 건강은 건강대로 잃었다. 입술을 비집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금 해원에게 가장 절실한 건 안정되고 고정된 월급을 보장하는 회사였다. 해원은 머리를 흔들고 신문을 끌어와 다시 구인 광고란을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지잉-
진동 소리에 깜박 잠이 들었던 해원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름과 번호가 떠 있었다. 몽롱한 머리를 툭툭 두드리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안녕하십니까. 46기 문해원입니다.”
- 수철이다. 잤냐?
“아, 아닙니다.”
- 너 요즘 뭐 하고 사냐?
“저, 현재 취준생입니다.”
수화기를 타고 으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해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선배님?” 하고 불러 봐도 수철은 호탕하게 웃기만 했다. 한참을 웃던 수철이 아직도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나이 서른에 취준생이라는 표현이 맞는 거냐.
“취업을 준비하고 있으니 저는 취준생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래, 뭐 틀린 말도 아니니까 취준생이라고 치자. 너 <파애> 영화 스턴트 참여한 적 있지?
해원은 ‘파애’ 라는 제목만 들어도 가슴이 떨렸다. 파애는 해원이 처음 스턴트 연기를 시작한 영화였다. 처음 겪어 보는 촬영장의 분위기나 호흡이 낯설어서 실수도 많이 했고 사고도 많이 쳤던 현장이었다.
“네, 참여했었습니다.”
- 파애 주연이 누군지는 기억나고?
“아…….”
입술을 비집고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해원은 입을 조개처럼 다물고 말았다. 왜 모르겠는가. 파애의 주연 배우는 현재 최고의 배우로 칭송받는 강류원이었다.
파애 촬영 당시 해원은 강류원의 대역으로 낙하 신을 촬영하다가 착지 미숙으로 에어 매트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경미한 사고를 겪었다. 실수 했다는 생각에 아픔도 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정신이 없었다.
몸을 벌떡 일으키는 순간, 강류원이 불쑥 다가와 손목을 붙들었다. 뇌를 화끈하게 데우는 감각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제야 자신이 손목을 접질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바닥은 몸이 재산일 텐데 항상 몸조심해요.”
얼음주머니를 무심하게 던져 주고 멀어지던 그 뒷모습이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 여보세요?
“아, 예. 알고 있습니다. 강류원 배우님 아니십니까?”
- 친구가 강류원 소속사 매니저 팀장인데 이번에 매니저 구한대, 나한테 혹시 쓸 만한 놈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데 너 괜찮겠냐?
아련한 기억이 순식간에 소멸하고 절박한 마음이 툭 튀어나왔다. 두 손으로 휴대폰을 감싸고 간절하게 빌었다.
“어…?! 정말이십니까? 선배님 저 소개 좀 꼭 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래, 연락해 보고 면접 일정 잡히면 연락할게. 인마 넌 가끔 놀러도 오고 그래. 애들이 다 보고 싶어 해.
“저 취직하면 한번 놀러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진짜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끊어진 전화기를 붙잡고 해원은 쾌재를 불렀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정말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구나.
낮게 한숨을 내쉬고 아무렇게나 구겨진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찾아 입에 물었다. 운동할 때는 절대 손대지 않았던 담배였지만, 스턴트를 그만두고 난 뒤에는 골초처럼 피워 댔다. 뭐 지금은 그마저도 돈이 없어 하지 못하지만.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길게 연기를 빨았다.
띠링-
짧은 알림음이 들렸다.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담배를 입술 사이에 끼워 넣고 내용을 확인했다. 수철이었다.
[사람을 급하게 구하는 모양이야. 갑작스럽겠지만 일단 오늘 저녁 7시, 명진빌딩 8층 스타온엔터 이준희 팀장. 이력서만 들고 가면 된다. 우리 해파리 행운을 빈다.]
갑자기든 뭐든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이라고는 천 원짜리 몇 장과 백 원짜리 동전 몇 개가 전부인데 뭘 가리겠는가. 해원은 다시 한번 메시지를 확인하고 담배를 비벼 껐다.
* * *
준희는 막무가내로 촬영을 딜레이 시키고 사무실로 들이닥친 강류원을 바라보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이미 채현에게 류원이 사라졌다는 보고를 받은 상황이라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서류철을 펼치고 심드렁한 어조로 물었다.
“촬영은 어쩌고 들어왔어?”
“몰라, 형이 수습 좀 해 줘.”
류원은 푹 눌러쓴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던지고 소파에 누웠다. 정말 피곤해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딱 한 시간만 푹 잤으면 좋겠는데 이 빌어먹을 불면증 때문에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었다.
30분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들면 20~30분 만에 잠에서 깨기를 반복했다. 일주일째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거기다가 입안은 작은 모래알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까끌까끌하고 텁텁했다. 액체류가 아니고는 목구멍으로 아무것도 넘길 수가 없었다. 식욕이 거의 제로였다. 또 피곤한 기색을 지우기 위해서 메이크업은 두꺼워졌다. 그 덕에 피부는 엉망진창이었다.
“불면증 상담 다시 예약할까?”
“됐어, 가면 더 피곤하기만 해. 현장 수습이나 해 줘.”
“알았다.”
준희는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을 집어 장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감독의 목소리가 무시무시했다. 준희는 숨을 삼키고 차분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류원이가 대사량도 많고 촬영분량도 많다 보니 많이 지친 모양이에요. 아까는 헛구역질까지 한다고 보고가 들어와서 제가 병원부터 가라고 했습니다. 뭐 지금 수상한 커플 제작 환경이 보통 제작 환경도 아니고…….”
준희는 류원의 컨디션 난조를 강조하며 은근히 촬영 환경이 좆같아서 이렇다고 어필했다. 감독은 괜한 헛기침만 할 뿐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경우 감독도 짜증이 나겠지만, 배우에게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다. 6개월 정도 여유가 있던 드라마를 당겨와 찍고 있었고, 대본도 쪽 대본으로 연명하고 있으니 제작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준희는 수완 좋게 감독을 달래고 류원을 곧 촬영장에 복귀시키겠다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제발 무단이탈 좀 하지 마.”
준희가 휴대폰을 책상위에 올려 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 일주일 동안 다섯 시간 잤어. 지금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게 용한 거니까 잔소리 하지 마.”
준희는 몇 마디 덧붙이려다가 류원의 안색을 살피고 입을 다물었다. 류원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촬영장에서 그가 얼마나 예민한지도 알아서 그냥 답답한 속만 쥐어뜯었다. 일주일 동안 다섯 시간 잤다는 강류원의 말은 거짓말이 아닐 테니.
강류원은 정말 심각한 수준의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 쉴 때는 좀 호전되지만, 이렇게 촬영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거의 잠을 못 잔다고 봐도 무방했다.
회사에서 나서서 한방, 양방, 민간요법까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류원의 불면증을 고쳐 보려고 노력했지만 거의 효과를 보지 못했다. 류원도 거의 반쯤 포기 상태라 의욕도 없었다. 준희는 냉장고를 열어 피로회복제 하나를 꺼내 류원의 앞에 놓아 주었다.
“언제 온대?”
“…누구?”
“오늘 매니저 면접 본다며.”
“오전에 본 사람들은 다 별로였고 친구가 소개해 준 사람은 7시에 면접이야. 근데 이쪽 일은 처음이라 정민이 붙여 주려고. 채현이도 초짠데 새로운 매니저까지 초짜면 곤란해.”
류원은 몸을 일으켜 피로회복제를 마셨다. 피로가 가시지 않아 몸이 무겁고 눈도 뻑뻑했다. 사실 이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지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서정민? 그 개자식은 아직 계약 안 끝났어?”
“…아직 8개월 남았거든.”
“허 대표는 어딨어?”
“…연습실에 있지. 오늘 월말 평가야.”
“하, 내가 개같이 번 돈으로 기어이 아이돌을 론칭하시겠다?”
준희는 책상에 앉아 컨펌 들어온 광고 계약 건에 사인을 하며 류원을 살폈다. 스타온엔터테인먼트는 강류원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저런 반응도 이해가 됐다.
강류원이 스타온 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한 건 아역 배우 이미지를 탈피하고 성인 연기자로 막 자리 잡기 시작할 때였다. 거의 15년을 함께 해 온 소속사와 계약만료가 되었다는 소식에 수많은 회사가 앞다퉈 강류원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스타온도 그중에 한 회사였다. 규모가 작은 중소형급 회사밖에 되지 않아 처음부터 기대감 같은 것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강류원이 스타온에 계약 의사를 전해 왔다. 회사는 발칵 뒤집혔고, 허 대표는 담보 대출까지 불사하면서 강류원 잡기에 나섰다.
결국, 스타온은 강류원과 전속 계약에 성공했고 배우 소속사로 초석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강류원이 한 해 벌어들이는 수익은 그 당시 스타온에 소속되어 있는 연예인들을 다 합쳐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강류원과 계약할 당시 스타온은 대방동의 작고 허름한 빌딩 지하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10년 후, 스타온은 청담동 노른자 땅 위에 10층짜리 건물을 짓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강류원은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너 계약 만료 1년 전이잖아. 네가 이해해. 허 대표님 속이 말이 아니다.”
“…이번에는 재계약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어우, 강류원 진짜. 또 동공 지진 나게 할래.”
류원은 듣기 싫다는 듯이 소파에 누워 팔로 얼굴을 가렸다. 이번 계약이 끝나면 길게 쉬어 볼 생각이었다.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푹 쉬고 싶었다.
너무 지쳤다. 모든 걸 다 놓고 싶을 만큼.
- 팀장님, 면접 보러 오셨습니다.
“안으로 안내하세요.”
준희가 결재판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 의자 뒤에 걸린 재킷을 챙겨 입고 소파로 자리로 옮겼다. 소파에 길게 누워 있는 류원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타이를 하지 않은 셔츠 차림에 낡은 슈트를 입은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가 시선을 잡아 끌었다.
“안녕하십니까, 문해원입니다.”
“아, 반가워요. 스타온 엔터테인먼트 경영지원부 매니지먼트 팀장 이준희입니다. 이쪽으로, 아니 이쪽으로 앉으세요.”
채용 공고를 통한 면접이 아니라 인맥을 통한 면접이니 자신의 소속과 이름을 밝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강류원은 여전히 팔로 얼굴을 가린 채 누워 있었고 문해원은 침착하게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급하게 면접 일정을 잡아 당황스러우셨죠?”
“아, 아닙니다. 어차피 저도 집에서 쉬고 있어서요.”
“수철이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던데, 부디 좋은 인연이 됐으면 좋겠네요. 그럼 일단 이력서부터 좀 주시겠어요?”
“아, 네.”
해원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준희에게 내밀었다. 준희가 희미하게 웃으며 봉투를 받으려는 순간, 준희 앞으로 투박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내 매니저니까 내가 보겠다고.”
“…초짜, 아니 서정민 매니저로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류원은 콧방귀를 뀌고 피곤한 기색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고는 의식적으로 코를 문질렀다. 어디선가 향긋한 나무 냄새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류원이 고개를 들어 나무 냄새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허!”
해원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류원을 쳐다봤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떨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다친 자신의 상태를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얼음주머니를 가져다주던 그 무심한 얼굴이 눈앞을 스쳤다.
류원은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해원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코끝을 문질렀다.
피스틸인가?
코끝에 닿는 짙은 나무 냄새는 이 남자의 것이 분명했다.
끊임없이 흘러들어 오는 나무 냄새에 마음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류원은 해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사이 준희는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봉투를 열어 이력서를 꺼냈다. 지금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증명사진과 함께 반듯한 글씨체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신상 명세가 보였다.
이력에는 스턴트 경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중에는 류원이 출연했던 영화도 몇 개 포함되어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력서를 읽어 내려가던 준희가 갑자기 인상을 구겼다.
“문해원 씨 피스틸이네요?”
넋을 놓고 있던 해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그게 문제가 될 줄 알았다. 해원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을 거란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피스틸? 이 나무 냄새가 그쪽 몸에서 나는 게 맞단 말이지?”
“류원아.”
해원은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피스틸의 나무 냄새는 일반 사람들은 맡지 못한다. 오로지 스테먼만이 피스틸의 나무 냄새를 인지하고 맡을 수 있다. 그 말은 강류원이 스테먼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자신은 분명 나무 냄새가 나지 않는 피스틸이었다. 해원이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일단 넘어가. 피스틸을 채용하지 말라는 법도 없잖아.”
류원은 귀찮다는 듯이 상황을 정리하고 해원을 바라봤다. 코끝을 적시는 향긋한 나무 냄새를 깊게 들이마시고 이마를 짚었다. 기분이 몽롱해지며 눈꺼풀이 무거웠다.
이제까지 업무적으로 만났었던 피스틸의 나무 냄새는 대부분 가볍고 건조했다. 가을 나무의 마른 냄새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지금 문해원에게서 나는 나무 냄새는 묵직하고 깊이가 있었다. 여름 나무 같은 싱싱한 냄새였다.
몽롱한 기분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느슨하게 풀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3년 전까지 스턴트 일을 하시고 그 뒤로는 별다른 이력이 없네요.”
“네, 좀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음, 수철이한테 듣기로는 스턴트 사고가 있었다고 하던데… 실례지만 어떤 종류의 사고였는지 물어도 될까요? 불편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불편하지만 꼭 확인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매니저는 연예인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사람들이었다. 운전이나 혹은 사람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으면 이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정중한 목소리에 해원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사고를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아찔했다. 3년이 지난 일이지만 해원의 뇌리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빠르게 치솟던 계기판, 등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고통, 강렬한 파열음, 타이어가 노면에 마찰하며 나던 고무 냄새. 땀이 흥건하게 묻어난 손바닥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준희가 난처한 기색을 읽고 다시 입을 열었다.
“힘드시면 굳이 말씀 안하셔도 됩니다.”
“카 액션… 사고였습니다.”
“어, 그럼 혹시 운전 못하세요?”
“아니요, 운전은 자신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150km 속도로 달려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해원이 할 수 없는 것은 의도된 설정의 카 액션뿐이었다. 카 액션을 위해 보호장비를 착용하면 땀이 비 오는 듯이 흐르고 손이 뻣뻣하게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일을 시작한다면 언제부터 가능할까요?”
“뭐, 저는 아무 때나 상관없습니다.”
준희는 턱을 매만지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강류원의 기색으로 봐서는 자신의 매니저로 쓰겠다고 고집을 부릴 게 뻔했다.
지금까지 준희는 류원의 매니저로 피스틸을 채용해 본 적이 없었다. 류원은 스테먼이었고 그를 자극할 만한 요소를 곁에 두는 게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일부러 면접조차 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지인을 통해서 면접을 보게 된 거라 걸러 내지 못했다. 이걸 어쩐다…….
“형, 이 사람 내가 데려갈게.”
“뭐?!”
준희는 황당한 얼굴로 류원을 바라봤다. 류원은 나른한 얼굴로 작게 하품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물에 몸이 잠기는 것처럼 깊은 수마가 덮쳐 왔다. 졸음이 몰려오고 있었다. 폐부 깊숙이 맺히는 나무 향에 입매가 나긋하게 풀어졌다.
“나 촬영장 복귀해야 해. 근데 졸려서 운전 못할 거 같아.”
“무슨 말이야, 아니 뭐라고? 지금 졸리다고? 네가? 왜?”
“…나도 몰라. 일단 나 촬영장으로 갈 테니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류원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해원에게 내밀었다. 해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차 키를 받았다.
“이름이?”
“무, 문해원이라고 합니다.”
“문해원 씨 채용이 되든 안 되든 오늘 일당은 드릴 테니까 운전 좀 부탁합시다.”
강류원은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석 장을 꺼내 해원에게 내밀었다. 해원은 난처한 얼굴로 준희를 바라봤지만, 준희는 해원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류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희 형.”
“어?! 어…….”
“나 지금 졸리다고. 무슨 말인지 몰라?”
“아니! 알아… 해원 씨 부탁 좀 할게요. 우리 류원이 촬영장까지만 데려다주세요.”
준희의 말이 끝나자마자 류원은 해원의 손목을 낚아채고 사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뭘 생각할 새도 없이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해원은 당황해 말까지 어버버거렸다.
“저기, 자, 잠시만, 요!”
준희는 질질 끌려가는 해원의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봤다. 지독한 불면증을 앓는 강류원의 입에서 졸리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혹시 이거 꿈인가?
* * *
막무가내로 지하 주차장까지 끌려 내려온 해원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류원은 해원의 손에 들린 차 키로 잠금을 해제하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제야 손을 놓은 강류원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최고급 세단 앞에 선 해원은 머리를 붕붕 흔들고 마른세수를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시간 없습니다, 일단 타서 이야기합시다.”
류원은 조수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채웠다. 눈이 반쯤 감겨 정신이 없었다. 설명할 것도 많은데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었다. 일주일 내내 아무리 노력해도 오지 않던 잠이 지금은 정신없이 몰아쳤다. 눈만 감으면 그대로 뻗어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자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평소에는 몸을 조이는 안전벨트가 짜증스러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적당히 몸을 조여 주는 게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다. 한참 만에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른 해원이 의아한 얼굴로 류원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저한테 이러시는 겁니까.”
“구구절절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서, 일단 여기까지 운전 좀 해 줘요. 설명은 도착하고 나서 할게요.”
류원은 차량 내비게이션에 촬영장 주소를 입력하고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정말 잠이 와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눈이 저절로 스르륵 감기는 느낌에 고개를 흔들었다. 운전석에 앉아 운전대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해원이 체념한 얼굴로 시동을 걸자, 류원은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운전을 하던 해원은 고개를 돌려 곤히 잠든 강류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황당하고 이상한 상황이지만 강류원은 평온하기만 했다.
도롱도롱- 작게 코까지 골며 곯아떨어진 그는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단 한 번의 뒤척임도 없이 깊은 수면의 늪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해원은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옆을 힐끗거렸다. 강류원은 아주 고요하고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도무지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강류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저기, 강류원 씨.”
“…….”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몸을 작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작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난감한 상황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해원의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이준희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생각하는 찰나,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이 지잉-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발신자는 이준희 팀장이었다. 해원은 목소리를 낮추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 그래도 전화를 드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 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강류원 씨가 깨질 않아서요.”
- 정말이요? 정말 류원이가 자고 있어요?
“네. 깨워도 일어나질 못하시는 거 같은데.”
- 정말 신기한 일이네요. 류원이 지독한 불면증이 있어서 촬영 내내 잠을 못 잤거든요. 일주일 동안 다섯 시간 잤나?
해원은 실소했다. 이렇게 잘 자는데 일주일 동안 다섯 시간밖에 못 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너무 잘 주무시고 계시는데.”
- 그래서 저도 신기하다는 거예요. 어… 일단 현장 스태프한테 연락해서 류원이 깨울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다시 전화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휴대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좌석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잠든 강류원의 얼굴을 쳐다봤다. 자신의 옆에서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사람이 배우 강류원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현실성이 없어서 그런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 똑똑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차창 밖에 앳된 얼굴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해원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누구… 세요?”
“아, 저는 강류원 배우님 매니저예요.”
“아, 안녕하세요. 번거롭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채현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 조수석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 그러더니 깊은 한숨을 몰아쉬고 류원의 몸을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형, 류원이 형!!”
“…으, 뭐야.”
“일어나세요. 지금 다들 난리예요.”
강류원은 부스스한 얼굴로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고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여기가 어디지?
뒤로 젖혀진 등받이를 바로 세우고 몽롱한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몇 시야?”
“9시 오 분 전이요.”
“시간은 별로 안 됐… 아.”
류원은 운전석 쪽에 멍하니 서 있는 한 남자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차 안에 부유하는 짙은 나무 냄새에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미치도록 자고 싶어도 자지 못했던 잠을 잔 것도 모자라 아주 푹 잤는지 개운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뿌옇게 안개가 낀 것처럼 맑지 않던 머리도, 뻑뻑해서 눈동자조차 굴러가지 않던 눈도, 팽팽하게 당겨졌던 신경 줄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류원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채현에게 물었다.
“나 얼마나 시간 있어?”
“어… 한 십 분에서 십오 분 정도요.”
“들어가 있어, 나 이야기 좀 하고 들어갈게.”
“밖에서 기다릴게요. 저 혼자 촬영장 들어가면 눈치 보여서…….”
류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뻗어 운전석 차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멍하니 서 있던 그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타요.”
해원은 쭈뼛거리며 차에 올랐다. 약하게 에어컨을 틀어 놓은 덕에 차 안의 공기가 좀 차가웠다. 강류원은 몽롱한 기운이 가시지 않는지 몇 번이나 마른세수하고 어깨를 주물렀다.
“이름이 뭐라고 했죠?”
“…문, 해원이라고 합니다.”
“내일부터 정식 출근하세요.”
“예? 아직 팀장님과 이야기가 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갑작스러운 채용 결정에 해원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해원은 그의 말을 곱씹었다.
출근이라니, 매달 꼬박꼬박 월급을 주는 회사가 생긴 건 너무 좋은데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강류원이 독단적으로 채용을 결정해도 되는 것인지, 혹시 이게 번복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류원은 눈을 감고 코끝에 맺히는 나무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짙고 묵직한 향이 너울너울 흘러 들어와 느슨하게 풀어진 마음과 몸을 옥죄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눈을 감으면 깊은 잠에 빠질 것 같았다. 자꾸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면증은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생긴 직업병이었다. 아역 배우를 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성인 연기자로 넘어오면서 잘해야 한다는 생각과 실수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감이 점차 심해졌다.
그게 불면증으로 번질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최근 몇 년 사이 불면증 증세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불면증이 심해지면서 신경이 덩달아 날카로워졌고 그 불화살은 모두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에게 돌아갔다. 온갖 짜증과 신경질을 받아 내느라 스태프들은 지쳐 갔고 종국에는 사표를 내기 일쑤였다.
작년에 갈아 치운 매니저만 열둘이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매니저가 바뀐 셈이니, 업계에서 평판이 나빠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류원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촬영 대기시간에 수면제를 복용할 수도 없었다. 설상가상 수면제 내성도 생긴 터라 큰 효과도 없었다. 류원은 손목시계를 힐끗거리고 눈가를 문질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럼 내일 아침에 출근하겠습니다. 몇 시까지 오면 될까요?”
“…첫날이니까 9시까지 오세요.”
“네, 그리고 조금 전에…….”
“응?”
“주신 돈이 너무 많은 거 같습니다.”
해원은 주머니에서 오만 원짜리를 꺼내 내밀었다. 잠깐 운전해 준 대가치고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강류원은 돈을 받지 않고 가만히 해원의 얼굴만 쳐다봤다. 해원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뺨을 긁적였다.
“받아 둬요. 문해원 씨가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주면서 내가 잠을 잤고, 나는 잠을 잤기 때문에 조금 더 안정된 연기를 하게 됐으니까. 그 정도는 받아도 됩니다.”
“저는 한 게 없어서 돈을 받기가 좀…….”
류원은 옅게 미소 짓고 차 문을 열었다. 해원이 급하게 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잠을 잔 덕분인지 한결 컨디션이 나았다. 예민하던 신경도 가라앉아 마음이 편안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내가 자정부터 2시까지 촬영이 비는데 그때 나랑 좀 같이 있어요.”
“예?”
해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을 깜박거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강류원을 바라봤다. 마치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사람처럼 호흡이 가빠지고 목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 돈이 부담스럽지 않게 나랑 같이 있어요.”
해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촬영장 밖을 서성거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손끝에 닿는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까지 천 원짜리 몇 장이 고작이던 제 주머니에 오만 원짜리 석 장이 들어 있었다.
면접 본 게 오후 7시, 지금 시간이 오후 9시 30분. 두 시간 반 만에 15만 원이 생겼다.
이 돈을 정말 받아도 될까?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속이 시끄러웠다. 담배를 길게 빨고, 돈 15만 원에 이렇게 고민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 없을 거라 생각하며 자조했다.
“저기…….”
류원의 막내 매니저인 채현이 다가와 해원의 옷깃을 붙잡고 흔들었다. 해원은 다급하게 담배를 비벼 끄고 손을 휘적거려 담배 연기를 날렸다.
“네?”
“…류원이 형이 이걸로 식사하고 오시래요.”
채현이 내미는 건 카드 한 장이었다.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던 해원이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 돈 있습니다.”
“…형이 시킨 거라 안 받으시면 저 혼날지도 몰라요.”
채현은 눈썹 끝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고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해원이 카드를 받아 들자, 채현이 언제 울상을 지었느냐는 듯이 환하게 웃고는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꼭 식사하세요!”
해원은 손끝에 닿는 딱딱한 재질의 카드를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카드에는 강류원의 영문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낡은 구두코를 바닥에 톡톡 두드리고 입술을 짓씹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카드를 쥐고 있는 손에도 무게감이 느껴졌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이번에도 이준희 팀장이었다.
“여보세요.”
- 어디세요?
“강류원 씨 촬영장에 있습니다.”
- 어? 집에 안 가셨어요?
“그게… 좀 사정이 있어서요. 이야기하자면 좀 긴데.”
- 말씀해 보세요.
해원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준희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자신이 왜 여기에 머물고 있는지, 그리고 강류원이 쉬는 시간에 함께 있어 달라고 했다는 것도 소상히 털어놓았다. 말을 하면서도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하지만 이준희는 제 이야기를 잠자코 듣기만 했다. 일언반구의 말도 없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 그럼 일단 카드로 식사부터 하시고 류원이가 하자는 대로 해 주세요.
“예?”
- 그 녀석이 왜 그러는지는 저도 잘 몰라요. 근데 이유가 아예 없진 않을 겁니다. 무례한 부탁이라는 거 압니다만, 조금만 도와주세요.
해원은 이마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봤다. 다들 알 수 없는 소리만 해 대니 머리가 딱딱 아팠다. 손에 쥔 휴대폰을 다른 손으로 넘기고 땀이 배어난 손을 바지춤에 문질렀다.
“저… 채용은 되는 겁니까? 강류원 씨가 내일 출근을 하라고 하긴 했는데 저 출근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해서요.”
- 음, 류원이가 내일 출근하라고 했다고요?
“네.”
- 일단 내일 아침에 회사로 오세요. 어느 쪽이든 인원은 필요하니 근로계약서 씁시다.
해원은 헛숨을 삼키고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믿기지 않아서 재차 확인했다. 준희는 낮게 웃으며 회사로 오라는 대답을 해 주었다. 해원은 소리를 내지 않고 비명을 질렀다. 가슴이 부풀어 금방이라도 펑 터질 것처럼 기뻤다.
- 4대 보험 가입하려면 필요한 서류가 있으니, 그건 메시지로 보내 놓겠습니다. 다음 주까지 준비해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드디어 저에게 꼬박꼬박 월급을 줄 회사에 취직한 것이다. 그것도 4대 보험이 적용되는 직장, 어쩐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였다니. 입술을 비집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 류원이가 카드 줬다면서요. 비싸고 맛있는 밥 사 드세요. 정식 출근도 안 한 사람 막무가내로 끌고 갔으니까.
“…그래도 되나요?”
- 그럼요, 그놈 가진 건 얼굴이랑 돈밖에 없어요.
준희가 호탕하게 웃었다. 해원은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카드에 새겨진 숫자가 손끝에 닿았다. 강류원의 이름이 새겨진 카드 한 장이 제 주머니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고 전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준희는 다시 한번 신신당부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해원은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 불이 환하게 켜진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건물은 늦은 시간임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어쩐지 제가 사는 세상과는 전혀 다른 별천지 같아서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 *
류원은 오후보다 훨씬 좋아진 컨디션으로 손에 쥔 대본을 훑었다. 오후 내내 붙잡고 있어도 외워지지 않던 대사들이 천천히 머릿속에 새겨졌다.
피식- 작게 웃음이 터졌다. 대본을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대자 채현이 커피를 가지고 와 컵홀더에 끼우고 건넸다.
“형, 두통약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가서 식사하고 와.”
“예?”
“나 혼자 있어도 되니까 가서 식사하고 와. 밥차 온 거 같더라.”
“…류원이 형?”
채현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서 눈을 마구 비볐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강류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매니저로 3개월을 일했지만 강류원은 단 한 번도 개인 스태프를 비롯해 타인의 식사를 챙긴 적이 없는 인간이었다.
강류원은 촬영 중에는 예민함이 극에 달해 식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스태프들은 그의 눈치를 보며 김밥이나 빵을 차에서 먹거나 화장실에서 허겁지겁 먹어 치우는 게 일상이었다.
류원은 턱이 빠질 만큼 입을 크게 벌린 채현의 배를 대본으로 툭 두드렸다.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가라. 아, 그리고 가기 전에 아까 봤던 피스, 아니 남자한테 이걸로 식사하라고 해.”
“네!”
채현은 씩씩하게 대답을 하고 류원이 내미는 카드를 받아 뛰어 내려갔다. 류원은 뛰어나가는 채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잠을 자지 못해 신경이 예민해지면 마인드컨트롤 하는 것도 버거웠다. 그래서 주변 사람을 챙기지 못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좀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대본을 말아 쥐고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이 시간이면 두통이 심해져서 두통약을 다섯 알씩 털어 넣어야 정상인데, 지금은 머리가 무겁지 않았다. 고작 한 시간 남짓 잔 게 전부인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문해원의 나무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던 류원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한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셔츠를 입다가 봉변을 당한 남자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수상한 커플>에서 박 변호사 역할을 맡은 배우 최시환였다.
“뭐야 강류원.”
“너 피스틸이었어?”
시환은 류원의 손을 세게 뿌리치고 서둘러 셔츠를 입었다. 그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몇몇 사람이 자신들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었지만 금세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시환은 인상을 찌푸리고 셔츠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내가 피스틸인 게 왜.”
“잠깐 확인 좀.”
류원은 최시환의 셔츠 깃을 젖히고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주변의 시선이 다시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류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 향을 좇아 살갗에 입술을 붙였다.
희미한 나무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나무 향이 너무 옅어서 잘 맡아지지 않았다. 거기에 마른 나무처럼 건조했다.
류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일반적인 피스틸의 나무 냄새였다. 향이 이렇게 옅어야지 정상인데… 문해원은 유난히 향이 짙었다.
“이 미친놈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잖아.”
류원은 미련 없이 그의 몸에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매몰찰 정도로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갔다. 최시환은 황당한 눈으로 류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한참 뒤에야 자신이 류원에게 농락당한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류원은 자리에 앉아 태연한 얼굴로 대본을 뒤적였다. 눈으로는 대본을 읽고 있으면서 머리로는 문해원을 떠올렸다.
문해원의 나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졸음이 쏟아졌다. 짙은 나무 냄새가 뇌를 자극하고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너무 피곤해서 일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은 아닐까? 그동안 너무 오래 잠을 자지 못했으니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나무 냄새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피곤해서인지 그건… 이따가 정식으로 확인해 보면 될 일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준호의 말이 떠올랐다.
“주파수가 맞는 상대가 나타나면 머리보다는 몸이 먼저 느낄 테니까 잘 살펴봐.”
설마, 설마 했던 일이 정말 일어나는 건가? 류원은 작게 실소하고 커피를 입가로 가져갔다.
“류원 씨 지금 후시1) 좀 딸 수 있을까?”
“…네, 대본 주세요.”
류원은 나른하게 웃으며 대답하고 몸을 일으켰다.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 순간,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알림을 확인하는 류원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Web 발신]
ND 카드 강*원님
4,500원 일시불
04/20 21:55
하나 편의점
편의점? 류원은 휴대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껏 밥을 먹으라고 카드를 쥐여 줬더니… 편의점이라니.
흠, 손가락으로 휴대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화면 상단에 보이는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하기 전에 커피라도 사 먹었나 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휴대폰을 뒤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시작할까?”
“네.”
류원은 휴대폰을 옆쪽에 놓아두고 후시 녹음을 시작했다. 재녹음까지 할 생각으로 휴대폰이 울리길 기다렸지만 후시 녹음이 끝나도록 류원의 휴대폰은 잠잠했다.
“류원 씨 수고했어. 근데… 시간이 좀 애매해서 바로 촬영 들어가야 할 거 같은데. 컨디션 괜찮아?”
“문제없습니다.”
류원은 휴대폰을 세게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기가 막혔다. 카드를 쥐여 줬더니 고작 4,500원을 썼어? 그의 성격이 얼마나 소심한지는 이런 작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빠 의상 갈아입으셔야 해요.”
류원은 이내 생각을 접고, 입고 있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흰색 셔츠로 갈아입고 그 위에 법복을 입었다. 스타일리스트가 옷매무새를 만져 주는 도중에도 류원은 연신 대사를 중얼거렸다.
촬영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제법 긴 대사가 입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상대 배우인 고하영과의 합도 괜찮았다. 특별한 NG 없이 촬영이 마무리되자 감독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류원의 어깨를 두드렸다.
“류원 씨 고생했어, 앞으로 두 시간 정도 여유 있으니까 좀 쉬었다가 와.”
“네, 감독님.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류원은 입고 있던 법복을 벗어 채현에게 내밀었다. 채현이 법복을 받아 품에 끌어안고는 류원의 뒤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랐다. 계단을 반쯤 내려가다가 걸음을 멈춘 류원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넌 왜 따라와.”
“…형 따라가려고요.”
“됐어, 스탠바이 20분 전에 전화나 해.”
채현은 발을 동동 구르며 멀어지는 류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류원은 목 끝까지 채운 단추를 하나 풀어내고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촬영 내내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약간의 두통이 몰려왔다. 구역감도 좀 있는 거 같고, 자신의 몸 상태를 스스로 진단하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하, 유리문을 세게 밀고 나온 류원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실소했다. 입구 계단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몸을 웅크린 문해원이 보였다.
“여기서 뭐 합니까?”
“…아, 촬영 다 끝나셨어요?”
“갑시다.”
“어디를요?”
해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류원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류원이 어깨를 감싸 끌어당겨 일으켜 세우고 어깨 위에 턱을 올렸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으니까 협조 좀 해요.”
“뭐, 뭐를요.”
“우리의 주파수?”
주파수라는 말에 해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스테먼과 피스틸 사이에서 주파수라는 것은 곧 운명의 상대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류원은 해원의 손목을 붙잡아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끌었다. 그리고 직접 운전석에 해원을 밀어 넣고 차체를 돌아 자신은 조수석에 올랐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해원은 바보처럼 눈만 깜박였다.
“무슨 확인을 말씀하시는 건지 제대로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따가 말해 줄게요.”
류원은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나무 냄새가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오자 더 짙어졌다. 기분이 몽롱해지며 예민하게 곤두선 신경이 차분해지는 기분에 입술을 핥았다. 자꾸 입술을 비집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진짜 미치겠네.”
“…….”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나한테 당신, 참 이상한 사람이야.”
류원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들을 직접 느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온몸의 근육들이 천천히 이완되며 예민하던 신경도 단번에 누그러졌다. 눈꺼풀에 졸음이 내려앉았다. 눈을 뜨려고 해도 눈이 떠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다.
차 안에는 류원의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눈을 가린 손이 스르륵 미끄러지며 강류원의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다. 해원은 넋을 놓고 강류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짙은 눈썹과 풍성한 속눈썹… 오뚝 솟은 콧대, 약간 붉은 기가 도는 입술. 묘하게 야한 얼굴이었다.
그는 알게 모르게 야하고 퇴폐적인 느낌을 풍기는 배우였다. 목소리도 낮고 나른한 편이라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냥 평범하게 섹시하다고 말하기엔 그 느낌을 다 담아내지 못했다.
해원의 입술을 비집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해원은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가 조심스레 떴다. 하지만 눈앞에서 곤히 잠든 강류원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든 강류원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해원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자정이었다. 약간 한기가 드는 기분에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강류원의 몸 위에 덮었다. 깊은 잠에 빠진 그의 숨소리를 들으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냈다.
집으로 돌아갈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제 주머니에는 오만 원짜리 석 장과 강류원의 카드가 들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액이 너무 많았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15만 원이라는 큰돈을 받는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거기다 저녁을 사 준 것에 대해 인사도 해야 했고…….
해원은 휴대폰으로 스턴트 영상을 찾아보며 무료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깜박 잠들었던 해원은 화들짝 놀라 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그런데 제 것이 아니었다.
“으음.”
강류원이 벨 소리에 미간을 좁히고 몸을 뒤척였다. 벨 소리는 집요하게 이어졌고, 결국 강류원은 허벅지 아래에 끼워 놓은 휴대폰을 집어 눈도 뜨지 않은 채 귀로 가져갔다.
“누구야.”
- 형, 스탠바이 20분 전이에요. 근데 주무셨어요?
류원은 졸린 눈을 손으로 문지르고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잤냐는 물음이 생소하게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운전석에 앉은 해원이 어이없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짙은 나무 냄새가 코끝에 닿아 후각을 자극했다.
“끊어. 곧 올라갈게.”
류원은 등받이를 세우고 깊은 수면에서 힘들게 빠져나온 머리를 흔들었다. 졸음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몸이 더 깊고 긴 단잠을 원했다. 몽롱한 기운을 쫓기 위해 뺨을 두어 번 두드렸다.
“거기 물 좀 줄래요?”
류원은 잠기운이 묻어나는 낮은 목소리로 나른하게 말했다. 해원이 얼른 운전석 도어포켓에 꽂힌 생수병을 꺼내 내밀었다. 물로 입을 축이고 나니 한결 기분이 나아졌다.
숙면이 삶의 질을 얼마나 높여 주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몇 시간 자지 않았음에도 기분이 달랐다. 류원은 이마를 손으로 짚고 옆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해원을 쳐다봤다.
“나, 얼마나 잔 겁니까.”
“한 두 시간쯤이요.”
하, 류원은 작게 실소했다. 일주일 동안 간신히, 아주 간신히 다섯 시간을 잤는데 오늘 하루 동안만 세 시간을 잤다. 그것도 선잠을 잔 것도 아니고 아주 깊은 잠을 잤다.
지금도 잠이 마구 쏟아졌다. 마치 질 좋은 수면제를 먹은 것처럼 눈꺼풀이 내려왔다. 과연 이걸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묘했다.
“저 이거…….”
“음?”
해원은 주머니에서 카드와 오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내밀었다. 원래는 전액을 다 돌려줄 생각이었지만 이 시간까지 잠도 못 자고 시간을 보낸 게 억울해 오만 원은 따로 챙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일도 없는데 주신 돈이 너무 많은 거 같아서요. 그리고 저녁도 감사했습니다.”
“저녁? 식사도 안 했던데 감사 인사가 받기가 민망하네요.”
“예? 저 식사했습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 먹었습니다.”
해원은 억울하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이며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영수증 하나를 내밀었다. 영수증에는 ‘봄날 도시락’이라는 이름과 금액이 적혀 있었다.
너무 싱겁게 풀린 의문에 류원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류원은 해원의 손에서 카드만 챙겨 지갑에 넣었다.
“왜 그쪽이 한 게 없습니까. 아주 큰일을 했는데…….”
“제가요?”
“아주 큰일을 했으니까 이 돈은 받아도 돼요. 마음 같아서는 두 배, 세 배쯤 주고 싶은데 그쪽이 부담스러워 할까 봐 참고 있는 겁니다.”
돈 15만 원에도 벌벌 떠는 사람인데 더 큰 액수를 쥐여 줬다간 사달이 날 것 같았다.
해원의 얼굴이 기묘하게 구겼다. 해원은 이제 답답함이 일었다. 강류원은 아까부터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운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전 지금 강류원 씨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불퉁한 목소리로 불만을 표하자, 류원은 시동 버튼을 눌러 차창을 약간 내렸다. 일교차가 큰 날씨에 찬바람이 내부로 흘러들었다. 따뜻한 기운에 푹 싸여 있던 공기를 차가운 공기가 야금야금 먹어 치웠다. 류원은 목 끝까지 채운 단추 두어 개를 풀어내고 잠기운이 묻어나는 눈을 문질렀다.
“난 심각한 불면증이 있어요. 현재 촬영 중이라 약을 먹지도 못하고 그냥 무식하게 버티고 있는 중인데. 이상하게 문해원 씨 나무 냄새를 맡으면 졸음이 쏟아집니다. 지금도 그렇고…….”
“제 나무 냄새요?”
“네, 굉장히 짙은 나무 냄새가 나네요. 원래 피스틸은 냄새가 옅은 게 대부분인데.”
해원은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게서 나무 냄새가 난다니, 류원이 했던 말 중에 가장 어이없고 황당한 말이었다. 류원이 착각을 해도 단단히 착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은 나무 냄새가 나지 않는 피스틸이었다. 불법 시술을 받고 난 뒤, 등 뒤에 새겨진 나무의 밑동은 새까맣게 죽어 버렸다. 나무 냄새 역시 희미해지더니 아예 사라졌다. 후각이 뛰어난 스테먼도 자신의 나무 냄새는 맡을 수가 없었다. 수치상으로도 정상 피스틸의 몸에서 나는 냄새보다 훨씬 옅은 향이 난다고 했다.
이것도 운명을 거스르려고 했던 자에게 내려진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런데 강류원은 자신에게 나무 냄새가 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해원은 어안이 벙벙했다.
“저한테 나무 냄새가 난다고요?”
“음?”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불법으로 시술을 받아 나무 냄새가 나지 않는 피스틸입니다.”
류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짙게 드리웠다. 코를 한번 문지르고 다시 숨을 크게 마셨다. 분명 그의 몸에서는 짙은 나무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진하게… 그런데 나무 냄새가 나지 않는 피스틸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류원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가까이 끌어당겨 목에 코를 파묻었다. 보드라운 살갗에 입술을 파묻고 강하게 숨을 마셨다. 분명히 묵직하고 짙은 나무 냄새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왔다.
“이렇게 묵직하고 짙은 나무 냄새가 나는데 무슨 소립니까.”
“…그럴 리가요.”
류원의 휴대폰이 다시 한번 요란하게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류원이 벨 소리를 죽이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 나무 냄새가 나든 나지 않든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의 냄새를 맡았고, 그 냄새에 취하듯 깊은 잠에 빠졌으니까. 문해원은 아무리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던 자신에게 숙면을 선사하는 피스틸이었다.
“뭐 상관없습니다. 문해원 씨가 내 곁에 있으면 나는 잠을 잘 수 있으니까, 그걸로 됐습니다.”
“…….”
“내일 아침에 봅시다.”
류원은 허벅지까지 흘러내린 재킷을 힐끗거리고 작게 웃었다. 복잡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곁에 두고 필요할 때 유용하게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류원이 차에서 빠져나가자 해원도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다. 류원은 재킷을 한 손에 움켜쥐고 해원의 앞으로 다가와 마주 섰다. 재킷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덕분에 내가 따뜻한 잠을 잘 수 있었네요.”
“아…….”
해원이 손을 뻗어 재킷을 넘겨받으려고 했지만 류원이 먼저 재킷을 펼쳐 어깨에 걸쳐 주었다. 재킷에는 그의 향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매니저의 일과 별개로 제안 하나 하고 싶은데.”
“어떤……?”
“나랑 잡시다.”
“예?”
해원은 심장이 발끝까지 아니 그보다 더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심장을 움켜쥐었다.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자자고요?”
“나는 지금 문해원 씨가 몹시 필요합니다. 내 배우 생활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내 생명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생명이요?”
“난 그만큼 절박합니다. 일주일 동안 다섯 시간도 자지 못하고 식사도 잘 하지 못합니다. 예민함이 극에 달해 인간관계도 좋지 않죠. 잠을 자지 못하니까 사람을 만나도 짜증만 납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말했다. 이게 우연이라도 좋았다. 뭐든 상관없었다. 잠다운 잠만 잘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이건 동물이건 괴물이건 하등 상관없었다. 그만큼 잠이 절실했다.
“혹시 주파수라는 거 압니까?”
“…….”
“어쩌면…….”
“……?”
“나와 그쪽이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과 피스틸일 수도 있잖아요.”
* * *
“어서 와요. 어제 류원이가 늦게 보내 줬다면서요?”
“…조금요.”
“커피 마실래요?”
해원은 푸석한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눈을 감으면 강류원이 어른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새 뒤척거리다가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강류원이 말한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과 피스틸이라는 건 서로 운명이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서로의 정신과 육체에 최적화된 존재.
하지만 주파수가 맞는다고 해서 무조건 둘의 관계에 발전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자신은 강류원에게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마 오랜 수면 부족으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졌고 냄새를 착각한 게 틀림없었다.
준희가 직접 찻잔을 가지고 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향긋한 커피 향이 코끝을 적셨다.
“마셔요.”
“감사합니다.”
해원은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따뜻한 커피가 밤새 시달렸던 정신을 맑게 만들어 주는 기분이었다.
준희는 해원의 안색을 살피고 서랍을 열어 근로계약서를 꺼냈다. 인제 그만 쓰고 싶은 근로계약서였다. 한 달에 한 번 월례 행사처럼 강류원 매니저 근로계약서를 쓰고 있는지라 이제는 보기만 해도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부디 오래 버텨 주길 바랐다.
“우리 류원이가 워낙 이 바닥 빠꼼이라 좀 피곤할 겁니다. 까다롭고 성격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라서 힘들게 할지도 모르고요.”
“…저기, 죄송한데.”
해원은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머뭇거렸다. 안절부절못한 기색을 읽은 준희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근로계약서를 테이블 아래로 집어넣고 밝게 웃었다.
“편안하게 말씀하세요.”
“혹시…….”
“네.”
“저… 강류원 씨가 아닌 다른 배우님의 매니저로 일할 수 있을까요?”
준희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순순히 사무실을 찾아왔길래 당연히 강류원의 매니저로 일할 줄 알았더니 뜬금없이 다른 배우의 매니저라니. 하지만 준희는 당황한 기색을 표하지 않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어제 우리 류원이가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니요, 그게 아니라 어, 제가 매니저 일이 처음이라 그러니까 그게, 제가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어… 그게,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며 이런저런 이유를 대는 해원의 얼굴에는 난감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어젯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해원은 류원을 맡고 싶지 않아 하는 게 눈에 보였다.
“흠…….”
준희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준희 입장에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를 류원의 옆에 붙인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았다. 현재 막내로 일하는 채현이도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회초년생이었다. 당연히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였다. 그런데 보충 인원인 해원까지 초짜인 건 좀 곤란하긴 했다.
지금 강류원에게는 전적으로 그를 서포트해 주고 케어해 줄 베테랑급 매니저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준희가 사무실을 내팽개치고 현장을 뛸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최소한 자신을 대신한 인력이기를 바랐다. 해원의 말에 차라리 잘됐다 싶으면서도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류원이 해원을 썩 마음에 들어 했던 거 같은데…….
“이유를 물어도 이야기는 안 해 줄 거 같고,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없을까요? 류원이가 해원 씨를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아서요.”
해원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입안의 연한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눈앞에서 숨이 꺼져 가던 작은아빠를 떠올렸다. 마지막 순간 그는 온몸에 붉은 백일홍을 피우고서는 힘겹게 말했다.
“꼭 이 운명이 너를 비껴가기를 바라.”
그 빌어먹을 운명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자신이 무슨 짓까지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스테먼인 강류원과 엮이는 게 내키지 않았다. 운명이든 주파수든 저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들이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배우 매니저 일하는 것보다 보수도 높은데…….”
“…….”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준희는 어쩔 수 없이 서랍을 열어 다른 종류의 근로계약서를 꺼내 내밀었다.
“어쩔 수 없죠, 그럼 다른 배우의 매니저로 붙여 줄게요.”
“정말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채용 취소가 되면 어쩌나 걱정했던 게 무색하리만큼 준희는 경쾌하게 대답을 내놓았다. 풀이 죽은 얼굴로 가만히 바닥만 내려 보던 해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고민해 봐도 강류원의 매니저를 맡는 건 내키지 않았다. 주파수를 운운하는 그의 말이 자꾸 목구멍의 가시처럼 걸렸다. 강류원과 자신이 운명이라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법한 이야기였다.
해원은 머리를 붕붕 흔들고 준희를 바라봤다. 준희는 곧장 서정민의 매니저인 반석을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구의 사내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민이 매니저 윤반석이라고 합니다.”
“문해원입니다.”
“이쪽 일은 전혀 안 해 봤으니까 반석이가 잘 가르쳐 줘. 문제 생기면 바로 보고하고.”
준희는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반석과 해원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고 소파에 몸을 기댔다. 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작게 한숨을 푹 내쉬고 류원의 일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폰 화면에 강류원의 이름이 뜨고 요란한 벨 소리가 울렸다. 준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형, 문해원 연락처 알지? 연락처 좀 알려 줘. 출근하기로 했는데 아직 출근 안 했어.
“해원 씨 사무실 왔다 갔어. 해원 씨가 네 매니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매니저로 일하길 원해. 그래서 일단 서정민한테.”
- 뭐? 누구 맘대로! 아니 이유가 뭐야.
“이유는 나도 모르지, 한참 곤란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더라. 설득해 봤는데 소용없었어. 다른 매니저 구해.”
- 나 촬영 들어가야 하니까 일단 연락처나 보내. 내가 해결할 테니까.
“류원아 제발…….”
- 나 그 사람 필요해. 꼭 필요하다고.
준희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문지르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붙여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류원을 설득했다.
“너 편하게 일하려면 해원 씨처럼 초짜가 아니라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매니저가 나아.”
- 나 한 번도 편하게 일한 적 없어. 촬영 다 엎어 버리고 사무실로 쫓아가기 전에 연락처 보내 놔.
“일단 연락처는 보내 놓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냉정한 통화 종료 음을 들으며 준희는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짜증을 내질렀다.
이 어린놈의 새끼! 이게 스타라고 오냐오냐해 주니까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어.
발로 테이블을 차올리고 씩씩거렸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화를 삭이던 준희는 결국 휴대폰 잠금을 열고 류원이 원하는 대로 해원의 번호를 찍어 전송했다.
* * *
해원은 운전대를 잡고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봤다. 봄기운이 완연한 세상은 알록달록한 꽃들로 가득했다. 차창 밖의 풍경이 너무나 한가롭고 평화로워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문득 꽃을 매단 채 바람에 흔들리는 연약한 나뭇가지가 퍽 애처로워 보였다. 저렇게 많은 꽃송이를 매달고 있으면 힘들지 않을까?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은 해원은 신호가 바뀐 걸 확인하고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었다.
제 등에 핀 나무에는 단 한 송이의 꽃도 피지 않았다. 불법 시술로 인해 나무의 밑동이 까맣게 죽은 나무, 짙은 고동색이던 나무의 색이 옅어진 것도, 희미하게 나던 향이 아예 나지 않게 된 것도 모두 시술의 결과였다.
몸이 망가진 건 확실한데 스테먼과 관계를 해 보지 않아서 나무는 어떻게 망가졌는지, 까맣게 죽은 밑동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첫 월급을 받으면 꼭 병원에 한번 가 볼 생각이었다.
“해원 씨 시간이 좀 촉박해서 그런데 빨리 좀…….”
해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2시까지 촬영장에 도착해야 하는데 벌써 1시 30분이었다. 백미러로 뒷좌석을 힐끗거렸다.
서정민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매니저 반석만이 사색이 된 채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네, 빨리 갈게요.”
신호가 걸려 잠시 차가 멈추자, 재촉했던 게 미안했는지 반석이 몸을 약간 붙이고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오늘 스타온 단체 화보 찍는데, 늦으면 정민이가 화낼 거예요. 오늘 회사 식구들 다 모이는 거라.”
“아… 그래요?”
서정민의 매니저로 일한 지 이제 고작 일주일, 해원은 서정민의 전반적인 스케줄 관리까지는 하지 않고 있었다. 거의 반석이 알려 주는 곳으로 정민을 데려다주는 게 주된 임무였다.
“해원 씨는 모르겠구나. 회사에서 일년에 한 번씩 사회공헌사업으로 화보촬영을 해요. 판매수익을 기부하는 건데. 뭐 그건 포장이고 사실은 이미지 메이킹 차원이라 소속 배우들은 거의 필수로 참석해요.”
“좋은 일 하는 거네요.”
해원은 건조하게 대꾸했다. 아직 이곳 생리는 잘 모르겠으나 잘 만들어진 이미지 하나가 배우의 인기를 좌지우지한다는 건 알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강류원이 떠올랐다. 해원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혹시 강류원 배우님도 오시나요?”
“그분은 워낙 만들어진 이미지가 공고하다 보니 거의 참석을 안 하시는 편이에요.”
“아… 그렇구나.”
“근데 이번에는 참여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작가도 유명하신 분이 참여하시고 취재도 나오는 모양이에요.”
해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며칠 전부터 계속 강류원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한두 시간 간격으로 꾸준하게 걸려 왔다.
처음에는 모르는 번호라 무시했더니 메시지를 보내 왔다.
[할 말 있으니까 전화 좀 받아요]
[나랑 이야기 좀 합시다]
[주파수가 맞는다고 당신이랑 나랑 무슨 관계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피합니까]
[잠이 안 와서 미치겠습니다]
[처음부터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지 그랬어]
원망했다가, 애원했다가, 협박했다가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해원의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혹시라도 마주치면 뭐라고 변명을 해야 할지 벌써 눈앞이 캄캄했다. 부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신호 떨어졌어요.”
해원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촬영장에 도착하자 2시 3분 전이었다. 해원은 적당한 곳에 주차했다.
도착하기 전부터 정민을 깨웠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반석이 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내려 뒷좌석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곤히 잠들어 있는 서정민을 깨우기 시작했다.
“정민아 일어나. 다 왔어.”
“…아 오 분만.”
“안 돼, 일어나.”
한참을 뒤척거린 서정민이 안대를 벗어 던지고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반석은 그런 그를 어르고 달래며 생수병에 빨대를 꽂아 내밀었다. 투덜거리면서도 정민은 반석이 입에 물려 주는 빨대를 입에 물었다.
“정신 차리고 촬영가자.”
“언제 끝나는데.”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아, 하기 싫어.”
평소답지 않게 응석을 부리는 정민을 반석이 수완 좋게 달래고 있었다. 그런데 주차된 차 옆으로 검은색 밴 한 대가 멈춰 섰다. 갑자기 눈을 크게 뜬 정민이 반석의 멱살을 잡아 차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다급하게 차문 개폐 버튼을 눌렀다.
“왜왜!”
“…저거 강류원이야.”
해원은 숨을 죽이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검은색 밴 문이 열리고 강류원이 피곤한 기색으로 차에서 내렸다. 연신 뒷목을 손으로 주무르며 채현이 내미는 재킷을 걸쳐 입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움직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우 재수 없어. 저 새끼는 왜 오고 지랄이야.”
“오면 좋지, 사람들 관심도 높아지고… 너한테 나쁠 거 하나도 없어.”
“내 기분이 아주 나빠서 별로거든?”
서정민이 강류원을 싫어하게 된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정민이 시상식에서 입고 싶어 하던 턱시도를 류원이 가로채 가면서부터였다. 정민은 온갖 패악을 떨어 대며 준희를 닦달했지만 결국 그 옷은 강류원이 입었다.
서정민이 툴툴거리며 차 문을 열었다. 반석이 정민의 옷을 챙겨 주고 선글라스까지 꺼내 내밀었다. 정민이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해원과 반석은 그의 짐을 정리해 뒤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좁은 통로에서 몇몇 배우들이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고, 스태프들은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그 틈을 비집고 내부를 뛰어다녔다. 대기실에 짐을 내려놓은 해원이 반석에게 양해를 구했다.
“저 죄송한데 아까 먹은 샌드위치가 체했나 봐요. 저 잠시 차에 가서 쉬어도 될까요?”
“괜찮아요? 따로 약 안 먹어도 되겠어요?”
“…조금 쉬면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럼 그렇게 해요. 여기는 내가 맡아도 충분하니까. 정민이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요.”
해원은 반석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얼른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사실 체했다는 건 핑계고 혹시라도 강류원과 마주칠까 봐 미리 도망치는 거였다.
촬영 준비로 분주한 스튜디오를 한번 힐끗거리고 계단으로 향했다. 빠르게 계단을 밟아 내려오면서도 의식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유리문을 밀며 건물 밖으로 나오자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해원은 한쪽 구석으로 가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주파수, 그게 뭐라고 이렇게 도둑고양이처럼 그를 피하는지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오랜만이에요.”
익숙하고 낮은 목소리가 해원의 귓가로 들려왔다. 콜록-, 담배 연기가 목구멍에 덜컥 걸려 기침이 튀어나왔다. 허리를 숙이고 거세게 기침을 하는 해원의 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얇은 티셔츠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낯선 온기가 등을 감쌌다.
순식간에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날 선 열기에 머리카락이 쭈뼛거렸다. 손가락에 걸린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해원은 허리를 세웠다. 눈앞에는 강류원이 입술에 담배를 문 채 제 앞에 서 있었다.
“왜 내 전화 안 받아요?”
“…모르는 번호라서요.”
“메시지도 남겼는데 그건 뭐라고 설명할지 궁금하네.”
“…….”
류원은 나른한 눈빛으로 해원을 바라봤다. 일주일 사이 불면증은 심해졌고 결국, 촬영을 중단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제작진은 제작진대로 속이 타들어 가고 강류원은 강류원대로 속이 타들어 갔다.
이러다가 정말 정신병이 생길 것 같았다. 하루하루를 고카페인과 니코틴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위장은 카페인에 녹아내리고 폐는 니코틴으로 썩어 가는 기분이었다.
시큰거리는 눈을 문지르며 준희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있을 때 저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류원은 준희를 내버려 두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바람에 묻은 그의 나무 냄새가 희미하게 제 코에 달라붙었다.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다가갈수록 잔뜩 긴장한 근육들이 이완되며 이상하리만치 몸과 마음이 나른해졌다.
깊은 수마에 잠식되기 직전의 기분, 눈앞이 흐릿해지고 머리가 몽롱해진 상태. 지금이 딱 그랬다. 정말 이게 뭘까, 류원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 내고 쓰게 웃었다. 오픈된 공간이라 그의 나무 냄새가 짙지 않았다.
“내 매니저 자리는 발로 걷어차고 서정민 매니저로 일한다면서요?”
“쿨럭, 제가 배우님께 도움이 되지 못할 거 같아서요.”
“그냥 숨만 쉬어도 나한텐 도움이 될 텐데……?”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그건 착각, 착각입니다. 그리고 저는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강류원의 말대로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과 피스틸이라면 해원 역시 그에게 무언가를 느껴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지금 내 눈이 어떤 거 같아요?”
“…네?”
“그쪽 눈에 내 눈이 어떻게 보이냐고.”
“…충혈되어 있고, 눈꺼풀이 무거워 보입니다.”
류원이 한 걸음, 두 걸음, 거리를 좁히며 그의 앞에 바짝 다가섰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마주칠 것 같은 거리였다.
“잘 봤어요. 일주일 동안 촬영까지 중단시켜 가면서 자려고 무던히 노력했는데, 잠이 안 와. 그런데…….”
“……?”
류원은 해원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짙고 묵직한 나무 냄새가 온몸을 감싸고 제 정신을 잠식해 갔다.
“지금 내가 잠이 온다고.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잠이…….”
“…저기요!”
갑자기 강류원의 몸이 무너졌다. 쓰러지는 그의 몸을 가까스로 받아 든 해원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짙게 서렸다.
해원은 강류원의 몸을 두 팔로 세게 끌어안았다. 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삐--
이명이 들리고 눈앞이 아득하게 멀어졌다가 돌아왔다. 이상 증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원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류원아!”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 류원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 다급한 발소리, 여러 소음이 뒤섞여 있지만 해원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품 안에 안긴 강류원의 고른 숨소리만 크게 들려왔다.
* * *
해원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맥없이 제 품에서 잠든 강류원을 근처에 있던 준희와 함께 대기실로 옮겨 놓은 게 조금 전 일이었다.
준희는 심각한 얼굴로 해원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준희 옆에는 강류원이 소파에 길게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주위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색색 고른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든 얼굴이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준희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류원의 불면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며칠 전에는 카메라 앞에서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제작진이 은밀하게 주연 배우 교체를 논의하고 있다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거기에 강류원은 미친놈처럼 문해원만 찾아 댔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전화를 걸어 문해원이 어딨느냐고 준희를 들들 볶아 댔다.
잠을 못 자 신경이 예민해진 류원의 짜증은 하늘을 찔렀고 스태프들은 그의 짜증을 받아 내느라 거짓말 좀 보태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문해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강류원이 갑자기 그의 품으로 쓰러진 것이다. 준희가 놀라서 달려갔지만 류원은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깊은 잠을…….
준희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곤히 잠든 류원을 빤히 바라봤다.
“문해원 씨.”
“…예.”
해원을 불러 놓고도 준희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상황이 너무 기이해서 그리고 이해할 수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
“류원이 매니저로 일해 주실 수 있을까요?”
준희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촬영 일정을 생각하면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가 피스틸이라는게 여전히 마음에 걸리지만, 지금으로는 방법이 없었다. 강류원이 미친놈처럼 문해원을 찾는 이유를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보수는 원하는 만큼 넉넉하게 드리겠습니다.”
“…….”
“류원이 불면증이 심각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 상태라면 곧 촬영 펑크 날 거고, 악의적인 기사까지 날 겁니다.”
해원은 마른세수를 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전 느꼈던 기묘한 감각이 손끝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손을 오므렸다가 펴도 그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쩌면 강류원의 말처럼… 진짜로 자신과 그가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과 스테먼일지도 모르겠다. 기절하듯 제 품 안으로 안겨 드는 강류원을 두 팔로 세게 끌어안는 순간,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었다. 그런데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추상적이고 기괴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 등에 새겨진 나무의 밑동 부분이 따갑고 아렸다. 까맣게 죽어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던 그 부분에서 감각이 느껴졌다. 불법 시술을 받고 나서 처음이었다. 해원은 소파에 기대어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류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은 뭘 결정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먼저 강류원 씨와 이야기를 해 보고 결정하고 싶습니다.”
“얼마든지요. 부디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나길 기대합니다.
“…네.”
“저는 스튜디오 좀 둘러보고 올게요. 류원이 좀 봐 주세요.”
준희가 몸을 일으키자 해원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대기실 문이 닫히자 그제야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맞은편 소파에는 여전히 강류원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해원은 팔로 얼굴을 괴고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납게 일그러지는 눈매와 인상을 찡그릴 때마다 주름이 잡히는 미간, 조각해 놓은 것처럼 근사한 콧대. 누가 봐도 그는 천상 연예인이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낡아 빠진 셔츠와 빛바랜 청바지, 해어지기 일보 직전인 운동화,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 강류원과 자신의 갭 차이는 너무 컸다.
마치 강류원은 저 하늘의 별이었고 자신은 바닥에 아무렇게 굴러다니는 볼품없는 돌멩이 같았다.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강류원과 함께 있으면 자꾸 한숨이 나왔다.
해원은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류원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올렸다. 기분이 좀 묘했다. 어쩐지 자꾸만 그를 만지고 싶었다. 손이 근질거렸다. 침을 꿀꺽 삼키고 날렵한 콧날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손이 덜덜 떨렸다. 얼른 손가락을 접고 손을 거둬들었다. 꼭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는 기분이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해원은 작게 하품을 했다. 그의 색색거리는 숨을 듣고 있자니 졸음이 몰려왔다. 해원은 곤히 잠든 류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류원은 몸을 뒤척이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가 어디지?
어스름이 내려앉은 공간에는 가로등 불빛만이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류원은 고개를 움직여 옆을 바라봤다. 맞은편 소파에는 팔짱을 끼고 몸을 기댄 채 잠들어 있는 문해원이 보였다.
그제야 자신이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은은한 가로등 불빛이 해원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류원은 허탈하게 웃었다. 또 문해원의 옆에서 잠들었다. 무려 세 번씩이나……. 이제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문해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이 나무 냄새가 저에게 깊은 안식과 숙면을 선사하고 있었다.
류원은 확신했다. 문해원과 자신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운명으로 태어난 영혼의 반쪽, 주파수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 엮여 있는 존재가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지독한 불면증을 이렇게 완벽하게 잠재울 수는 없었다.
요즘 세상에 주파수에 연연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파수라는 게 강제성이 없었기에 어쩌다가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무시해 버리기 일쑤였다.
류원도 그랬다. 운명론 따위 믿지 않는다고, 집어치우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이제 인정해야 했다. 운명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이제 그 운명에 목을 매야 한다는 것을.
류원은 강제해서라도 문해원을 곁에 둘 생각이었다. 달콤한 맛을 알아 버린 간사한 혀는 절대로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문해원은 제 혀끝에 닿은 단맛이었다.
갑자기 끼익- 낡은 문이 앓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준희가 피곤한 기색으로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일어나 앉은 류원을 발견한 준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뭐야 일어났어?”
“…조용히 해.”
류원은 잠든 해원의 얼굴을 살피며 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갔다. 준희가 전등 스위치를 올리려고 하자, 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준희를 밖으로 떠밀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온 류원이 벽에 기대어 섰다. 환한 빛이 거북스러웠다.
“나 얼마나 잤어?”
“4시간쯤?”
“촬영은?”
“단체 촬영은 너 빼고 진행했는데 그래도 개인 촬영은 해야 할 거 같아서 깨우러 왔다.”
소속 배우들의 화보 촬영이 하나씩 마무리되면서 준희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회사 단체 화보에 참여하지 않기로 유명한 강류원이 며칠 전 갑자기 화보에 참여하겠다며 의사를 전달해 왔다.
이례적인 행보에 준희는 촬영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진작가도 교체하고 촬영 콘셉트 역시 류원에게 맞게 변경했다. 그런데 결국, 강류원이 깊이 잠들면서 모두 수포가 되었다.
허탈한 마음에 개인 화보라도 찍게 하고 싶었다. 강류원이 참여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주목도나 화제성 그리고 종국에는 판매량까지 엄청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강류원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오랜만에 단잠을 자는 류원을 깨우기도 미안했다. 긴 고민 끝에 준희는 밑져야 본전이다 싶어 그의 대기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마침 류원이 깨어 있었다.
준희는 류원의 안색을 살폈다. 잠을 좀 자서 그런지 안색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문해원 씨랑 너…….”
“형.”
“…어.”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마.”
“그래도 조금이라도 알 거 아니야. 나도 뭘 알아야 대처를 하지.”
“내가 아는 건 하나야.”
“그게 뭔데. 속 시원하게 말 좀 해 봐.”
류원은 나른한 기운을 애써 밀어내며 기지개를 켰다. 짧은 시간이지만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자서 그런지 머리가 가벼웠다.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퍽퍽 두드리는 준희를 바라보며 나른하게 웃었다.
“문해원이 옆에 있으면 내가 잠이 온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