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이상반응 (2/15)

2. 이상반응

류원은 텁텁한 입안을 혀로 굴리며 대기실 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충동적으로 대기실 문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곤히 잠들어 있는 문해원이 보였다.

문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문해원이 연기처럼 사라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베놈스테먼으로 각성하고 난 뒤 불면증이 심해졌다.

“형이랑 처음 봤을 때도 나 불면증이 심했나?”

“심했지, 병원 기록 남을까 봐 내 이름으로 수도 없이 수면제 처방받아 줬잖아.”

“…그랬지. 그래도 쉴 때는 좀 호전되는 편이잖아.”

“음, 솔직하게 말해 줘?”

준희는 처음 류원을 맡았던 때를 가만히 떠올렸다. 아역 연기자라는 꼬리표를 떼고 막 성인 연기자로 발돋움하던 시기라 그의 예민함은 하늘을 찔렀다. 거기에 지독한 불면증이 겹쳐져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아침에 류원을 데리러 가면 그는 눈가가 빨갛게 충혈된 채 침대에 앉아 대본을 읽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연기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오랫동안 지켜본 결과 강류원의 불면증에는 이유가 없었다. 그냥 잠이 오지 않는 거였다. 이유도 원인도 뭐도 아무것도 없었다.

류원은 괴로움에 몸부림쳤고, 준희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 류원을 이해시킬 수밖에 없었다. 연기에 대한 강박증이나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만들어 낸 불면증이라고. 그러지 않고서야 이유가 없는 불면증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 봐.”

“네 불면증, 쉴 때 호전되는 거 아니야. 네가 몸을 쓰지 않는 집돌이다 보니 쉴 때는 마냥 누워 있고 체력 소모가 없어서 덜 피로하다고 느끼는 것뿐이야.”

“…뭐?”

“맞아, 쉴 때 수면 패턴 검사한 거 촬영할 때랑 비슷했어. 내가 거짓말 한 거야. 너 그렇게라도 믿으라고.”

류원은 말문이 막혔다. 쉴 때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잔다고 생각했다. 그게 마음이 편해서라고 그렇게 막연히 생각했는데…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각성을 하고 난 뒤 자신은 촬영을 하든 안 하든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다는 소리였다.

“일단 나 촬영 준비하러 갈 테니까 문해원 좀 보고 있어.”

“…문해원이 확실하게 너한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응, 확실해. 그 사람만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잘 수 있어. 이 빌어먹을 불면증에서 나를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확신에 찬 듯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준희는 류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준호 형한테 이따가 간다고 퇴근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해 줘.”

“어? 시간이 이렇게 늦었는데?”

“사정 이야기하면 형도 이해할 거야.”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고 멀어지는 류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준희는 휴대폰을 꺼내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이내 입을 다물었다.

- 그래서 그 피스틸이랑 같이 온다는 거야?

“어, 아마도. 형이 좀 이해해 줘. 류원이 요즘 통 못 자는데 그 피스틸 만나고 나서는 좀 자는 모양이야.”

- 흠, VVIP님께서 행차하신다는데 연구소장 나부랭이가 무슨 힘이 있어 거절을 하겠냐. 오랜만에 류원이 얼굴도 보고 좋지. 좋게 생각할게.

준희는 끊어진 전화기를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대기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는 문해원이 서 있었다. 해원이 잠기운이 묻어나는 얼굴을 문지르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해원 씨, 일어났어요?”

“네, 깜박 잠이 들어서요. 근데 강류원 씨는…….”

“류원이 화보 촬영 하러 갔어요. 아마 금방 끝날 겁니다.”

준희는 경쾌하게 대꾸하며 대기실 한쪽에 놓인 아이스박스를 열어 음료수 캔 두 개를 꺼내 소파에 앉았다.

“이리 와서 앉아요.”

“저 담배 한 대만 태우고 오겠습니다.”

“아… 그럼 같이 가요.”

준희가 음료수 캔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건물 내부에 별도로 마련된 흡연실로 향했다. 진한 담배 냄새가 쿰쿰하게 묻어났다.

준희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담뱃갑을 해원에게 내밀었다. 해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담뱃갑을 건네받아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해원은 담배를 길게 빨았다가 한숨을 내쉬듯 연기를 내뿜어 냈다. 저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강류원이 보이지 않았다. 잠기운을 채 몰아내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조금 열린 문틈으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응, 확실해. 그 사람만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잘 수 있어. 이 빌어먹을 불면증에서 나를 해방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마음이 술렁거렸다. 주파수라는 말의 뜻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어떤 작용을 하고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불면증이라는 류원이 제 곁에서만은 깊은 잠을 자는 것도 주파수의 영향이라는 건가?

“해원 씨?”

“아… 네?”

준희가 제 손가락에 걸린 담배를 바라봤다. 아! 몇 모금 빨지 않은 담배가 혼자 타들어 가 재가 길게 매달려 있었다. 얼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얼굴을 문질렀다. 강류원과의 진지한 대화가 절실했다.

“팀장님.”

“네?”

“강류원 씨 이후 스케줄이 어떻게 되나요?”

“공식 스케줄은 없어요. 오전까지 드라마 촬영하고 넘어와서 내일 아침에나 스케줄 있을 겁니다.”

준희는 해원의 얼굴을 힐끗거리고 한눈에 봐도 불편해 보이는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내부를 울렸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어둠이 점차 더 짙어지고 있었다.

“강류원 씨요.”

“응?”

“…어떤 사람인가요?”

준희는 손을 뻗어 담배를 비벼 끄고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해원은 초조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 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준희가 말문을 열었다.

“류원이 저 녀석 겉으로는 까칠해 보여도 속은 물러 터졌어요. 이 바닥에 다섯 살 때부터 굴러먹어서 세상 물정을 잘 몰라요. 제 손으로 공과금 한번 내 본 적도 없고, 물건 시세 같은 것도 하나도 모르고.”

“…….”

“사실 나이만 먹었지 어른이라고 할 수 없죠. 애 같은 구석도 있고, 상처도 잘 받고, 여리고… 화만 낼 줄 알지 사과하는 법도 몰라요. 남들은 무례하다 싸가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류원이가 자라 온 환경이 그래요.”

해원이 작게 웃었다. 정말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강류원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차갑고 단단하게 생겨서는 애 같은 구석이 있다고 하니 믿기지 않았다.

“류원이 같은 경우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매니저 역할을 해 주었고 커서는 저 같은 사람이 따라붙어 그의 잡다한 일을 다 해 줬어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마 겪어 보면 알 거예요. 음, 석류 있죠? 겉은 굉장히 단단하고 딱딱한데 속살은 빨갛게 익어 새콤한 거, 강류원한테도 그런 반전이 있어요.”

“…강류원 씨 이미지는 그런 게 아닌데.”

“그렇죠, 대중들은 철저히 이미지 메이킹 된 강류원의 모습을 보는 거니까요.”

해원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준희의 입을 통해 듣는 그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혼자 단단한 척, 센 척, 잘난 척 하는 것뿐이에요. 이 바닥에선 누군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걸 밟고 일어서려는 사람투성이라… 차라리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욕을 먹는 게 나아요.”

준희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해원이 높이 쌓아 올린 경계심과 고착된 이미지를 천천히 깨부수었다. 긴장감에 잔뜩 솟아오른 어깨가 천천히 풀어졌다. 해원은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사람한테 경계가 심해요. 워낙 데인 적도 많고 어릴 때부터 수많은 사람이 류원이의 인기에 현혹되어 접근해 왔으니까요. 알려지진 않았지만 사기도 많이 당했어요.”

“사기요?”

“자기 사람이라고 믿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는 놈이에요. 그동안 여기저기 돈 많이 뜯기고 다녔어요.”

준희는 씁쓸하게 웃으며 강류원에게 돈을 뜯어 간 인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무명의 신인 배우도, 당시 대한민국을 씹어 먹던 인기 가수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중견 배우도 모두 강류원에게 사기를 쳐서 돈을 뜯어 갔다.

투자 명목으로 혹은 급한 돈이 필요하다며 적게는 몇 백 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수십억 대까지…….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다양하게도 뜯어 갔다.

어린 시절의 류원은 맹목적으로 사람을 믿었지만 몇 번의 사건이 있고 난 후부터는 철저히 혼자 지내는 걸 선호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런 일련의 사건이 류원의 마음을 다치게 한 게 분명했다.

언제부턴가 류원은 업계에서 알아주는 집돌이 스타가 되어 있었다. 류원의 사생활을 취재하려고 따라붙은 기자 하나가 일주일 동안 집 안에만 처박혀 있는 그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아갔다는 일화는 유명했다.

갑자기 준희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 중앙에 떠오른 이름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류원의 촬영이 끝난 모양이었다. 준희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몸을 일으켰다.

“흡연실에 있다, 금방 갈게.”

- 문해원은?

“같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통화를 마무리한 준희가 해원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만 들어가죠.”

“네, 이야기 감사합니다.”

준희는 흡연실 문을 열고 말을 덧붙였다.

“…솔직한 말로 난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류원이도 그렇고, 해원 씨도 그렇고 빠른 시일 내 자세한 이야기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 * *

류원은 아까보다 한결 나은 컨디션으로 운전석 문을 열었다. 잠을 조금 자서 그런지 기분이 괜찮았다.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채우고 두 팔로 운전대를 감싸 기댔다. 입술을 비집고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면증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예민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거세게 몰아붙여진 상태로 24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몸은 깊은 수면을 원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맡은 바를 충실히 해낼 수도 없었다. 머리가 무거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최근에는 수없이 읽고 외웠던 대사를 머릿속에 사는 벌레가 다 먹어 치워 버려 멍청한 얼굴로 카메라 앞에서 넋을 놓기 일쑤였다. 정말 지랄 맞다는 말로밖에 표현되지 않았다.

달칵-

갑자기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문해원이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류원은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을 했다. 해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평온한 얼굴로 류원이 스스로 채운 안전벨트를 풀어내고 몸을 물렸다.

“내리세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네? 아, 아니요, 내가 운전할 겁니다. 타세요.”

“저랑 같이 있으면 졸리시다면서요. 내리세요.”

류원은 모자를 푹 눌러쓴 해원을 잠시 바라보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해원이 조수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기다렸다. 매니저들이 해 주는 일상적인 행동인데도 문해원이 해 주니 기분이 묘했다.

류원이 차에 오르는 걸 확인하고 문까지 닫아 준 해원은 몸을 빠르게 움직여 운전석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당겨 몸에 채우면서 해원이 물었다.

“어디로 갈까요?”

“…문해원 씨한테 양해를 구하지 않고 진료 예약부터 했어요.”

“진료 예약이요……? 지금 시간에요?”

“우리가 정말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과 피스틸이라면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정말 주파수가 맞는 사이인지도 확인해 볼 겸.”

류원은 내비게이션에 준호의 연구소 주소를 입력하고 좌석에 몸을 기댔다. 해원은 내비게이션 안내를 들으며 시동을 켜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움직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강류원은 또다시 잠이 들었다. 해원은 곤히 잠든 류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작게 실소했다. 잠을 못 잔다더니 그게 거짓말인가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공기가 좀 차다 싶어 히터를 약하게 틀고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유행이 지난 발라드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원은 노래 가사를 입안에서 굴리며 속력을 높였다.

이윽고 내비게이션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종료되었다. 해원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간판을 눈으로 훑었다.

[영원 복합 연구소]

병원이 아니라 연구소로 온 게 좀 의아했다. 해원은 등받이를 약간 뒤로 눕히고 곤히 잠든 류원의 몸을 흔들었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몽롱한 얼굴로 눈을 뜬 그가 놀란 얼굴로 해원을 바라봤다가 이내 눈을 감아 버렸다.

“도착했어요.”

“…정말 그쪽이랑 같이 있으면 잠귀신이 달라붙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네요.”

류원은 팔로 눈가를 가리고 잠시 누워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잠을 못 자서 어지럽던 머리가 지금은 깊은 수면에 빠졌다가 깨어나느라 어지러웠다. 참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류원은 뒤로 젖혀진 등받이를 바로 세우고 차 문을 열었다. 해원도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잠이 안 깨서 그런데 담배 한 대 피우고 들어갈게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아니요, 기다리겠습니다.”

류원이 차체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피우는 사이 해원은 고개를 들어 새까만 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서울은 늘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릴 땐 조금이라도 보였던 거 같은데… 요즘에는 통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별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해원은 류원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무심하게 꽂아 놓고 담배연기를 천천히 흘려보내고 있었다.

“강류원 씨…….”

“말해요.”

“주파수가 운명이란 거 믿으세요?”

류원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뱉고 짤막해진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주파수라는 건 모든 피스틸과 스테먼이 반신반의하는 일이었다. 뭐랄까 유니콘 같은 존재랄까? 주파수가 맞는 사람끼리 만나는 것도 어려웠고 만나더라도 이상 반응이 꺼려져서 거리를 두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주파수를 무시하고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논쟁이 붙기도 했다.

“그걸 말하기 전에 내 소개부터 해야겠네요. 나는 베놈스테먼입니다. 한국에서는 꽤 희귀한 종족이죠.”

해원이 눈을 크게 뜨며 저도 모르게 차량 보닛을 손으로 짚었다. 베놈스테먼이면, 독이 있는 스테먼이었다. 그것도 맹독을 가진… 개체수가 현저히 줄어 희귀하다고만 알고 있었지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류원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여상하게 웃었다. 마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난 믿기로 했어요. 믿지 않으면 이 이상 반응을 뭐라고 설명해야 될지 몰라서.”

지독한 불면증을 앓는 자신이 같은 사람에게 같은 냄새를 맡고 세 번씩이나 깊은 잠에 빠졌다. 이걸 우연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해원 씨는 어때요?”

“…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강류원 씨가 하는 말도 다 이해가 되지 않고, 어렵습니다.”

“당연해요. 나 같아도 나만 보면 잠만 퍼질러 자는 사람이 있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일단 갑시다. 확인해 보면 알겠죠. 그게 뭐든.”

류원은 연구소로 들어가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류원은 건조한 웃음을 지으며 무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류원의 몸을 세게 끌어안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어째 키가 더 자란 느낌이다?”

“내 나이가 몇 살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지?”

“한창 클 나이지 서른세 살이면…….”

류원이 못 말린다는 듯이 웃고는 해원을 소개했다.

“이쪽은 문해원 씨, 피스틸이야.”

“반가워요. 영원 복합 연구소장 이준호라고 합니다. 이준희 친형이고요.”

해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준호가 내미는 손을 맞잡았다. 이준희 팀장의 친형이구나, 그래서 그런지 풍기는 분위기가 비슷한 것 같았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준호는 류원과 해원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연구소 내부는 굉장히 복잡했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기계 인식이 필요했다. 준호는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면서도 착실하게 기계에 신분증을 갖다 댔다. 다섯 개쯤 문을 통과하고 나니 상담실이라는 작은 팻말이 붙은 문이 보였다.

준호는 문을 열어 주며 해원에게 자리를 권했다. 뒤따라 류원이 들어가려고 하자, 준호가 그의 뒷덜미를 붙잡아 세웠다. 준호가 엄한 얼굴로 말했다.

“넌 안 돼.”

“……?”

“스테먼 검사 안 받았다며. 그거부터 받고 이야기해.”

류원은 잠시 해원을 바라봤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해원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고는 류원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상담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은 해원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벌써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멍하니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일 어디로 출근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직 자신의 소속은 서정민의 매니저였다.

해원은 준희의 번호를 화면에 띄웠다가 이내 지워 버리고 문자메시지 창을 열었다. 전화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입안의 연한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신중하게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팀장님 문해원입니다. 저 내일 어디로 출근해야 하나요?]

메시지가 정상적으로 보내진 걸 확인하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희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통화할 수 있어요?]

해원은 준희의 번호를 화면에 띄우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고 곧 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디예요?

“저, 지금 영원 복합 연구소에 있어요.”

- 형한테 갔구나. 해원 씨 일단 내일은 류원이 좀 맡아 줘요. 채현이 있을 거고 당분간은 반석이가 류원이 맡아서 케어할 거예요. 해원 씨는 반석이 도와서 류원이 보살펴 줘요. 반석이한테 일 배워요. 반석이가 도와주는 건 길어야 일주일이에요. 일주일 후부터는 해원 씨랑 채현이가 류원이 케어해야 해요.

“…네.”

- 그래도 너무 걱정 말아요. 사무실에서도 지원할 거고, 또 류원이가 알아서 잘할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 류원이가 좀 까다롭게 굴어도 이해해 줘요. 내가 아까 말했다시피 흠이 많은 놈이에요.

준희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해원에게 알려 주고 전화를 끊었다. 해원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기다렸죠?”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해원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문 쪽을 바라봤다. 준호가 희미하게 웃으며 해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해원은 쭈뼛거리며 시선을 아래쪽으로 떨어뜨렸다.

“류원이는 잠시 회복이 필요해서 좀 쉬고 있어요. 조금 있으면 올 거예요.”

의자를 빼서 앉으며 대수롭지 않게 류원의 상황을 전해 주었다. 그러고는 종이를 한 장 끌어와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음, 검사하기 전에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네.”

“피스틸로 각성한 건 언제예요?”

“스물일곱 살이요.”

“늦게 각성한 편이네요. 뭐 당연히 스테먼으로 각성할 줄 알았겠네요.”

해원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피스틸로 각성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아 의사에게 몇 번이고 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음, 잠깐 실례해도 될까요?”

“네?”

준호가 의자를 밀고 일어서며 갑자기 해원의 목덜미에 코를 들이댔다. 한참을 킁킁거리던 준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나무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데… 이건 왜 이러죠?”

“사실은 불법 시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나무 냄새가 전혀 나지 않습니다.”

“저런… 상의 좀 벗어 볼래요? 나무부터 확인해야겠네.”

해원은 말없이 몸을 일으키고 셔츠 단추를 끌렀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깊게 호흡하며 셔츠를 벗고 안에 받쳐 입은 흰색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었다. 그리고 뒤돌아 등을 보였다.

해원의 등을 보자마자 준호가 혀를 찼다. 앞 포켓에 꽂힌 안경을 빼서 쓰고는 해원의 등을 살폈다. 나무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심각한 상태였다. 피스틸의 심장이라고 하는 나무의 밑동이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색도 짙은 고동색이 아니라 색이 바랜 잿빛이었다.

“이건, 류원이가 아니라 해원 씨가 제발 주파수가 맞길 바라야 하는 상황이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피스틸한테 등에 새겨진 나무는 심장이에요. 해원 씨가 한 불법 시술은 심장을 파내려고 한 거랑 다를 게 없어요. 시술받고 나서 많이 아프지 않았어요?”

“…무력감과 두통이 심해서 일상생활을 전혀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몸이 좋아졌고?”

준호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물었다. 늦게 각성하는 피스틸 대부분은 자신이 스테먼으로 각성할 거라 믿었다. 통계상 그럴 확률이 월등히 높았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스테먼이 아니라 피스틸로 각성하면 거의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나무를 파내 준다는 말도 안 되는 불법 시술이 성행하고 있었다. 불법 시술도 일종의 실험이었다. 몇 년 전에는 저명한 의학계 인사가 불법 시술에 참여해 피스틸을 실험 대상으로 이용, 그 과정과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해 크게 파문이 일기도 했다.

운명을 거스르고 싶어 하는 피스틸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그 방법이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써는 운명을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과 피스틸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줍니다. 운명을 따르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류원이나 해원 씨나 흠이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꼭 필요한 존재죠.”

“…….”

“그리고 만약 류원이가 해원 씨와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이라고 하면, 이 나무도 좋아질 수도 있어요.”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나무가 이렇다고 해서 일상생활에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준호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혀를 찼다. 이 피스틸은 자신의 상태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나무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게, 갑자기 몸이 좋아진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문해원 씨의 나무는 지금도 많이 희미해져 있어요. 이 상태로 계속 내버려 둔다면 나무의 색은 더 옅어질 겁니다. 아주 희미해지겠죠.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

“돌연사할 겁니다.”

쾅-!

갑자기 문이 열리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강류원이 나타났다. 류원은 크게 숨을 몰아쉬고 벽에 기대어 섰다. 스테먼 검사를 받은 뒤, 아직 완벽하게 몸이 회복되지 않아서 서 있는 것도 좀 버거웠다.

돌연사라니, 귀로 분명히 들었음에도 믿기지가 않았다. 시선이 부자연스럽게 해원의 등으로 향했다. 나무의 뿌리가 있을 법한 척추의 끝 부분이 까맣게 썩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나무의 색이 진하지 않고 흐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돌연사하다니?”

“그럴 수도 있다는 거야, 원래 의사들은 차악을 말하지 않아. 항상 최악을 이야기하지. 그리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야.”

해원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분명히 귀로 들었지만 말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돌연사, 내가 죽는다고?

“…저는 지금 거, 건강한데요.”

“건강하다고 누가 그래요?”

“…….”

“심장이 뛰지 않으면 사람은 죽기 마련입니다.”

준호는 해원의 셔츠를 집어 그의 몸에 걸쳐 주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전 세계에서 스테먼과 피스틸에 관한 연구는 계속 이루어지는 중이지만 여전히 변수에 영향을 받는 희귀종이라고만 그들을 정의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영향을 받는 변수에 주파수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문해원처럼 불법 시술로 나무가 죽어 가고 있다면 주파수를 맹신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주파수 검사부터 받아 보자.”

“…일이 복잡해지네.”

류원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고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해원은 아까부터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그저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준호가 셔츠를 걸쳐 주었지만, 옷을 여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돌연사라니…….

2년 동안 끔찍하게 저를 괴롭히던 두통과 무력증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다 끝난 줄 알았다. 그저 몸이 회복되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돌연사할 수도 있다니…….

해원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준호가 가까스로 주저앉으려는 해원을 붙잡았다.

“제, 제가 돌연사한다는 게 정말, 정말인가요.”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겁니다. 최악의 가능성.”

“그 말은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후, 해원 씨 같은 사람은 지속적인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지금까지 병원 치료를 전혀 받지 않았잖아요. 아니 진료조차 받지 않았죠?”

해원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2년간은 무력증과 두통으로 꼼짝할 수 없었고 몸이 회복하면서는 돈이 문제였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병원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만약 강류원을 만나지 않았다면 영원히 이 사실을 모른 채 숨이 끊어졌을 거라는 소리였다.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형은 저 사람한테서 나무 냄새를 맡았어?”

“…아니, 전혀 나지 않아. 나무가 아예 망가진 게 분명해.”

“근데… 나는 지금 저 사람의 나무 냄새를 맡고 있어. 굉장히 묵직하고 진한 나무 냄새야.”

“…….”

“여름 나무처럼 싱싱해, 이걸 뭐라고 설명할 건데. 주파수가 맞지 않고서야 나무가 망가진 피스틸의 나무 냄새를 어떻게 맡아.”

류원이 준호를 지나쳐 해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짓는 해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셔츠를 여며 단추를 하나씩 잠가 주었다. 목 끝까지 채운 단추를 손가락으로 톡 두드리고 고개를 돌려 준호에게 말했다.

“나는 확신해, 근데 뭐든 확실한 게 좋은 거니까 검사는 해. 검사 결과가 나와야지 이 사람도 믿기 편하겠지.”

준호는 해원과 류원을 검사실로 안내했다. 검사실로 들어가기 전 가벼운 반소매 티와 반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검사실 안에는 커다란 원통형의 기계가 중앙에 놓여 있고 양옆으로 냉장고처럼 생긴 기계가 있었다. 준호가 버튼을 조작해 기계를 가동했다. 내부를 파란빛이 가득 채웠다.

“몸에 두르고 있는 귀금속이나 금속 물체는 다 빼서 바구니에 넣어 주세요.”

“네.”

“그리고 류원이 넌 스테먼 검사한 거 다 정상 나왔다. 네가 걱정했던 후각 역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류원은 손목시계를 풀어 테이블에 내려놓고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웃었다. 후각에 이상이 생겨 나지도 않는 나무 냄새를 맡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자신의 후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아무도 맡지 못하는 문해원의 나무 냄새를 오직 자신만이 맡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나른한 수면욕을 선사하는 그런 냄새를.

류원이 반지까지 빼서 바구니에 던져 넣자, 준호가 검사실 안으로 류원을 불렀다. 그리고 그의 몸에 기계들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해원은 검사실 밖에 서서 강류원의 허벅지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허벅지에는 고유의 꽃이 새겨져 있었다. 화려하게 핀 주홍색 꽃이었다. 꽃 이름은 모르겠으나 그 꽃은 아마 독초일 것이다. 강류원이 스스로 베놈스테먼임을 고백했으니 그건 당연했다. 독초는 오직 베놈스테먼만이 가지는 고유의 꽃이었다.

베놈스테먼과 관계한 피스틸의 등에는 독초가 새겨지고 온몸에 독이 퍼진다. 베놈만이 할 수 있는 본딩의 과정이었다. 만약 베놈과 관계한 피스틸이 다른 스테먼과 관계를 하면 스테먼과 피스틸 모두 베놈의 독이 퍼져 온몸이 새까맣게 물들어 죽음을 맞이한다.

강류원의 허벅지에 새겨진 저 꽃은 겉보기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실상은 잔인하리만치 잔혹한 꽃이었다.

해원이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준호가 투명한 창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안으로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해원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검사실 문을 열었다. 준호는 해원의 몸에 기계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중 몇 개의 줄은 강류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양쪽에 보이는 원통에 각각 들어가면 됩니다. 시간은 약 15분 정도 걸릴 거고. 두 분 다 화면에 집중하세요.”

해원은 원통에 들어가서 눈을 질끈 감았다. 등에 연결한 기계의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꾸 등을 간지럽히고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저릿했다.

준호가 문을 닫아 주고 검사실 밖으로 나갔다. 위잉- 소리와 함께 기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원통 내부 화면에는 강류원 고유의 꽃이 떠올랐다. 선명한 주홍색의 화려한 꽃은 강류원을 똑 닮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등을 자극하는 느낌은 강렬해졌다. 입술을 세게 깨물고 화면에 정신을 집중했지만 이내 집중력이 무너지고 말았다. 등을 태우는 듯한 감각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느낌은 강렬하고 잔혹해졌다.

급기야 해원은 주먹을 쥐고 통을 두드렸다. 호흡이 가빠지고 시야가 흐려졌다. 뒷목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문해원 씨!”

준호가 문을 열고 해원의 몸에 연결된 기계들을 거의 잡아 뜯듯 제거했다. 앞으로 쓰러지는 해원을 받아 낸 준호가 그를 바닥에 똑바로 눕혔다.

“크게 심호흡하세요.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숨쉬기 불편해요?”

“…하아, 조금요.”

“좀 쉬면 괜찮을 거예요. 여기 그대로 누워 있어요. 류원이 좀 꺼내… 알아서 잘 나오네.”

준호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해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돌렸다. 강류원은 직접 원통을 빠져나와 선을 아무렇게나 뽑아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해원의 곁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류원은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해원을 바라봤다. 땀을 많이 흘렸는지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손을 뻗어 해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네가 좀 돌보고 있어.”

“다른 데로 옮기면 안 돼?”

“호흡 좀 가라앉으면 그때 옮겨. 검사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고 올게.”

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며 검사실 밖으로 나갔다. 류원은 아무 말 없이 해원의 곁에 앉아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속이 조금 시끄러웠다. 문해원을 곁에 두기 위해서 주파수 검사를 하려고 온 것뿐인데 몰라도 될 일까지 알아 버린 게 마음이 불편했다.

돌연사할 가능성이 있는 피스틸.

지금까지 자신은 베놈이라서 피스틸과 관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책임하게 독을 퍼붓고 싶지 않았다. 그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없을 테니…….

그래서 피스틸과의 관계를 극도로 꺼려 왔다. 연애도 모두 노멀들과 했다. 그들은 적어도 제 독을 몸속에 품지 않았다.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곁에 두고 싶어 한 피스틸이 언제 돌연사할지도 모르는 몸이라니. 지금 이 상황은 제 독이 문제가 아니었다.

주파수가 맞는다고 해도 문해원을 옆에 두는 것이 과연 정답일까.

“후회하지 않으세요?”

힘없이 나부끼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해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뭘 말입니까?”

“지금 이 상황이요.”

류원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턱을 괴고 무심한 눈으로 누워 있는 해원을 쳐다봤다. 막연하게 강박증과 부담감에서 가중된 불면증이라고 생각했지만 준희의 말을 듣고 난 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각성하는 순간부터 자신은 이런 운명을 타고난 것이었다.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을 찾기 전까지 계속, 만약 찾지 못한다면 평생 불면의 고통을 느끼다가 죽어 버릴 운명이었다. 아까보다 한결 편안한 숨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성격이 예민한 편입니다. 그래서 직업병 때문에 불면증이 심하다고 생각했어요. 해원 씨를 만나기전까지는.”

“…….”

“앞으로 촬영이 석 달가량 남아 있습니다. 잠 한숨 자지 못하고 계속 촬영을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나는 대책이 필요합니다.”

“대책이라는 게 혹시 저인가요?”

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소르르 잠이 쏟아지는 중이었다. 짙고 묵직한 나무 냄새가 코끝을 적시고 안정감 있게 수면으로 인도했다.

“문해원 씨한테 흘러나오는 나무 냄새를 맡고 있으면 어이없게도 잠이 옵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어요. 내가 오래 못 자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데 문해원 씨만 만나면 기절하듯 잠이 드니… 이걸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

“나한테 문해원 씨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후회할 이유도 없죠.”

배우라는 직업이 빛을 발할 때는 바로 이런 순간이다. 자신의 속내를 숨겨야 할 순간, 완벽하게 불안한 표정과 목소리를 숨길 수가 있었다.

해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류원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다시 눕혔다.

“조금 더 쉬어요. 괜히 나 때문에 고생을 하는 것 같네.”

“아니요. 덕분에 제 상태를 알게 됐으니까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해원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돌연사할 수도 있다는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나무의 색이 옅어지고 있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불법 시술 때문에 밑동이 까맣고 죽고 난 뒤 일부러 확인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나무의 색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해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을 무대로 뛰고 있었다.

준호가 검사실 안으로 들어왔다. 류원이 해원의 몸을 부축해 앉을 수 있게 도왔다.

“다시 검사해야 해?”

“아니, 결과는 내일 오후쯤 나올 것 같다.”

류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결과를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주파수가 일치한다는 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었다.

준호는 해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이마에 손을 얹었다. 다행히 열은 없었다.

“류원이 넌 좀 나가 있어.”

“왜?”

“잠깐 할 이야기 있으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류원은 작게 투덜거리며 몸을 돌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준호는 해원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준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애꿎은 안경테만 손끝으로 문질렀다.

“해원 씨.”

“…네?”

“혹시 류원이랑 같이 있으면서 뭐라고 해야 하나, 좀 이상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평소와는 다른 느낌, 받은 적 없어요?”

해원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적이라,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았다. 피스틸과 달리 스테먼에게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아 허벅지의 꽃을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강류원처럼 스테먼임을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 한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해원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가늘게 떴다. 아까 스튜디오에서 마주쳤을 때,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에게 이상한 감각을 느꼈었다. 강류원이 기절하듯 몸을 무너뜨리던 순간, 기묘한 감각이 제 몸을 스쳤다.

“강류원 씨가 기절하듯 제 품으로 안겨 들었는데, 제가 그분을 세게 끌어안았거든요. 그때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데 아무튼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등이 간지럽거나 욱신거리는 그런 느낌은요?”

“척추 아랫부분이 좀 따갑고 아린 느낌이 들긴 했는데…….”

준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원의 말처럼 두 사람은 주파수가 일치할 확률이 월등히 높았다. 몸이 서로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류원이 후각으로 해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준호가 걱정한 건 해원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주파수를 느끼지 못하면 어찌하느냐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역시 촉각을 통해 무난하게 주파수를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참으로 기묘했다. 강류원은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문해원은 육체적인 안정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이런 케이스는 굉장히 드물었다. 스테먼이나 피스틸 양쪽 모두가 건강하거나 어느 한쪽만이 문제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 다 망가진 상태에서 만났으니 두 사람은 맹렬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이가 될 것이다.

준호는 안경을 벗어 앞 포켓에 끼워 넣고 눈가를 문질렀다.

“해원 씨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나무는 말라 가고 있어요. 나무의 색이 바래질 만큼 옅어졌고 나무의 뿌리는 까맣게 죽어 있어요.”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갑자기 준호가 해원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의자에 앉아 있던 해원이 엉덩이를 들고 준호의 앞으로 끌려갔다. 준호는 그의 손을 자신의 고유 꽃이 새겨진 허벅지로 가져갔다.

“아무런 느낌이 없죠?”

“네?”

해원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준호를 바라봤다. 갑자기 검사실 문이 벌컥 열렸다. 검사실 밖 유리창으로 안의 상황을 보고 있던 류원이 득달같이 검사실 안으로 달려들었다. 놀랄 새도 없이 해원의 손목을 낚아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잔뜩 경계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뭐 하는 짓이야!”

“…그러는 넌 뭐 하고 있냐?”

류원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는 자신의 품 안에 안긴 해원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인상을 구겼다. 다급하게 손을 풀고 해원의 몸을 약간 밀어냈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있던 해원의 몸이 앞으로 조금 밀려나는 게 느껴졌다. 그 감각마저 불쾌함으로 다가와 제 감정을 날카롭게 베었다.

“류원이가 후각으로 해원 씨를 느끼는 것처럼 해원 씨도 류원이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

“해원 씨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요. 피스틸에게는 나무가 있고 스테먼은 꽃이 있습니다. 타인의 손이 잘 닿지 않는 곳에 표식이 새겨져 있어요. 강렬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그걸 이용하면 됩니다.”

준호는 해원의 옆에 나란히 서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류원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강류원은 어느 순간부터 무감하다 싶을 정도로 인간관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적정선에서.

그런데 지금은 문해원에게 과할 만큼 집착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건 스테먼의 본능이었다.

“검사 결과는 내일 알려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거…….”

준호는 의사 가운 주머니에서 약통 하나를 내밀었다. 약통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뚜껑을 열자, 연두색 알약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상한 거 주는 거 아냐? 이리 줘 봐요.”

류원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고 해원의 손에서 약병을 빼앗아 들었다. 약을 손바닥에 쏟아 보고 냄새도 맡아 본 류원이 준호를 쏘아보았다.

“이거 무슨 약인데.”

“넌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데.”

준호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리며 놀리듯 물었다. 그는 마치 제 암컷을 지키기 위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수컷 같았다. 류원의 인상이 사정없이 일그러지며 이로 입술을 짓이겼다.

“피스틸 몸에 좋은 거.”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피스틸 전용 비타민이다, 인마. 해원 씨 이거 하루에 한 알씩 챙겨 먹어요. 알겠죠?”

준호는 류원의 손에서 약병을 빼앗아 뚜껑을 닫았다. 그러고는 해원의 손에 약병을 쥐여 주었다.

“꼭 챙겨 먹어요.”

* * *

류원은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비스듬하게 누워 운전대를 잡은 문해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쪽 팔을 차창에 기대고 한 손으로 운전대를 돌리는 그의 몸짓에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류원이 반대편 차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차창에 해원의 모습이 비쳤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준호와 단둘이 검사실에 남겨 놓고 문을 닫았을 때 복잡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의도한 것도 심각하게 고민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문을 닫고 나왔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검사실 안쪽을, 정확하게는 문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파수가 도대체 뭔데 사람 마음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한숨을 길게 푹 내쉬고 등받이를 바로 세웠다. 조수석을 힐끔거린 해원이 당황한 듯 두 손으로 운전대를 쥐었다.

“안 주무셨어요?”

“…졸린데 참고 있는 겁니다.”

“도착하려면 20분 정도 남았는데, 눈 좀 붙이세요.”

류원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약하게 틀어진 히터를 끄고 차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차 안의 탁한 공기를 환기했다.

류원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잠을 자고 싶은데 눈을 감으면 준호가 해원의 손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에 붙이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준호는 스테먼이었고… 그의 허벅지에는 고유의 꽃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스테먼이 피스틸의 손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리는 행위는 ‘밤을 보내자’는 은밀한 신호였다. 피스틸인 문해원이 모르진 않을 텐데…….

물론 준호가 그런 의도로 해원의 손을 잡아끌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류원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빨았다. 폐 속 가득 들어찬 연기를 길게 뱉어 내도 속을 꽉 채우는 답답함은 가라앉지 않았다.

사실 해원의 나무가 그렇게 많이 상해 있을 줄 몰랐다. 새까맣게 죽은 밑동에서는 금방이라도 악취가 날 것 같았다.

처음 불법 시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제게 문해원은 이 지독한 불면증을 가라앉혀 줄,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에 거기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마음이 쓰였다.

새까맣게 죽어 버린 나무의 밑동을 보고 있자니 가슴속 어딘가 깊게 팬 상처에 뜨거운 물을 들이붓는 느낌이 들었다.

“불법 시술…….”

“…….”

“왜 받았어요?”

해원은 잠시 신호가 걸린 사이 고개를 돌려 류원을 바라봤다.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는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이 하얀 담배를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굳이…….”

“…피스틸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온몸에 꽃을 새기고 죽어 가고 싶지 않았어요.”

“피스틸의 운명이라는 게 참 서글프지만 그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지. 왜 몸을 축내요.”

류원이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꾸하고 차량 재떨이에 담배를 툭 던져 넣었다.

“아무것도…….”

“…….”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쭙잖게 위로하는 척, 아는 척하지 마세요. 스테먼인 그쪽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재앙이니까.”

운전대를 세게 움켜잡은 해원의 두 손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해원은 화를 꾹꾹 눌러 담은 얼굴로 류원을 노려봤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작태에 화가 치밀었다.

담배꽁초가 제대로 꺼지지 않아 희뿌연 담배 연기가 폴폴 올라오고 있었다. 류원은 재떨이 뚜껑을 닫고 차창을 조금 더 내렸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미안합니다.”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 역시 베놈스테먼으로 각성하면서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허벅지에 꽃이 새겨지며 독이 온몸에 퍼졌다. 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육체가 피를 쏟기 시작했다. 새하얀 침구가 붉게 물들만큼 피를 토해 내고 밤새 울었던 기억, 그게 각성이었다.

각성의 과정이 끝나고서도 며칠간은 코와 입으로 피를 토해 내야 했다.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계속 피를 토할 겁니다.”

의사가 제게 경고했다. 류원은 살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독을 삼켜야 했다. 입안 가득 채운 피를 억지로 목구멍으로 넘겼다.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라서야 간신히 상태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베놈스테먼의 저주를 알기 때문이었다. 피스틸의 목숨을 죽일 수도 아니면 살릴 수도 있는 존재. 사회의 필요악, 그런 존재가 바로 베놈스테먼이었다.

류원은 새까만 밤을 찬란하게 비추는 불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누군가 글로 써 주는 대사를 입 밖으로 내는 게 더 편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좀 생각 없이 이야기 할 때가 있어요.”

“…….”

“드라마나 영화 속에는 철저히 설정 값이라는 게 있어서 현실 데미지와는 조금 다르거든요. 그래서 내가 의도치 않아도 상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쪽이 이해.”

“이게 좀 주제넘은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

“그럼 고치세요. 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말씀하시면 되는 일이잖아요.”

류원은 말문이 막혀 입을 벙긋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서렸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고치라는 말을 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아서 맞춰 주고 이해해 주고 온통 그런 사람들밖에 없었다. 류원의 입술을 비집고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해원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뒤늦게 상기하고 낯빛을 굳혔다. 실수했다.

“주제넘어서 죄송합니다.”

해원이 정중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류원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고치면 되는 일이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며 웃었다.

“정말 문해원 씨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여러모로.”

“…칭찬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근데 내가 전에 말했던 말 기억해요?”

“…무슨 말이요?”

“나랑 자자는 말.”

해원이 놀라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다.

끼익-!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도로 한복판에 차가 멈춰 섰다. 다행히 바로 뒤따라오는 차가 없어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다. 해원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빠아앙-

차 한 대가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해원에게 욕을 퍼붓듯 신경질적으로 클랙슨을 울리며 지나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해원이 얼른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며 류원에게 사과했다. 자칫하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놀라서…….”

류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좌석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꼈다.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주제를 운운하면서 당돌하게 쏘아볼 때는 언제고 지금은 귀 끝을 붉게 물들이고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내가 그쪽을 잡아먹기라도 합니까?”

“…그게 아직, 주파수가 맞는다고 나온 것도 아니고.”

“주파수가 맞는다고 하면 나랑 잘 겁니까?”

해원은 입술을 세게 깨물고 우측 방향 지시등을 켰다. 천천히 우측 차로로 차선을 변경하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비상등을 켜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들을 때마다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해원이 약간 몸을 틀어 류원을 바라보자, 그가 먼저 선수 치듯 입을 열었다.

“농담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절박해서 하는 말입니다.”

“주파수 결과가 나오면 그때…….”

“아직도 우리 주파수가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1%의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싶은 거냐고.”

“…….”

“내가 섹스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내 옆에서 잠만 자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류원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차 문을 열어젖혔다. 해원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류원의 모습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강류원의 상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저 말만 들으면 긴장이 되고 불편한지 모르겠다.

육체적인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잠만 자자는 거였다.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만약 류원이 아니었다면 돌연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테니까.

해원은 마음을 굳히고 차 문을 열었다. 차 문이 열리자,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던 류원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부딪쳤다.

“강류원 씨가 하신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뭐?”

“같이 자겠다고요.”

“…….”

“강류원 씨랑.”

* * *

해원은 주인도 없는 침대에 오도카니 올라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강류원의 침실은 아주 심플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쪽 벽에는 피규어 장식장이 크게 놓여 있고 그 맞은편 벽에는 엄청난 크기의 강류원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사진을 보고 혹시 나르시시즘이 있는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강류원은 그런 제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얼른 말을 덧붙였다.

“저건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신 거라 차마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마세요.”

사진 아래에는 지금 해원이 오도카니 앉아 있는 침대… 그리고 커다란 체경이 놓여 있었다. 배우의 집치고 너무 소박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규모에 비해 가구가 별로 없었다.

욕실에서는 물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해원은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입고 있는 티셔츠에서 강류원 특유의 냄새가 폴폴 올라왔다.

분명히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자꾸 심장이 벌렁거렸다. 해원은 긴 한숨을 푹 내쉬며 뒤로 벌러덩 누웠다.

탄력적으로 몸을 받쳐 주는 느낌에 작게 실소했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접이식 침대에서도 머리만 대면 곯아떨어지는 자신과 달리 이렇게 편한 침대에서도 잠을 못 잔다니… 강류원은 불면증인 게 확실했다.

류원의 침대는 안락하면서도 넓었다. 옆으로 세 번이나 데굴데굴 굴렀음에도 자신은 침대 위에 멀쩡하게 누워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침대에 감탄하며 의식적으로 귀를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물소리가 뚝 멎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주인도 없는 침대에 앉아 있는 게 좀 이상한 것 같아서 아예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좀 이상한가? 머리를 긁적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결국, 몇 초간 뻘쭘하게 서 있다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건 누가 봐도 뭐 마려운 강아지가 안절부절못하는 꼴이었다. 해원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고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그리고 곧 욕실 문이 열렸다.

류원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나오다가 침대 위에 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꼴을 보고 작게 실소했다.

방 안에는 문해원의 나무 냄새가 가득했다. 나른한 기분에 머리를 툭툭 털고 수건을 세탁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침대에 눕기 전 내일 아침 스케줄을 확인하고 알람을 맞췄다.

휴대폰을 충전기에 연결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기운이 몰아쳤다. 전등 리모컨을 집어 들어 무드등을 제외하고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어둑해진 방 안에 짙은 나무 냄새가 드리워져 기분이 나른해졌다. 평소라면 한참을 뒤척이며 잠이 들기 위해서 노력해야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눈을 감으면 바로 깊은 수마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온몸의 근육을 이완시켜 줄 만큼 따뜻하고 편안함이 느껴졌다. 류원은 샤워 가운을 벗고 드로즈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

“거기서 꼼지락대면 떨어집니다.”

침대의 끝에서 꼼지락대며 색색 숨소리를 내는 해원의 어깨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나무 냄새가 한층 더 짚어졌다. 이불에 몸을 숨긴 채 끌려온 해원은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안 잡아먹을 테니까 숨 좀 쉬어요.”

한참 동안 이불에 푹 싸여 있던 해원이 이불을 걷어 내고 머리를 내밀었다. 류원은 팔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주고 눈을 감았다. 졸음이 쏟아졌다.

“오, 옷은 왜.”

“잠버릇이에요.”

담백하게 대답하고 해원의 몸을 고쳐 안았다. 적당한 체온이 저를 더 깊은 수마로 끌고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해원은 유려한 그의 육체를 실눈으로 훑으며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금방이라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 것 같은 류원에게 순수하게 궁금증이 일었다.

“정말 제가 옆에 있으면 잠이 오나요?”

막 깊은 수마에 빠져들려는 찰나, 해원의 순진한 물음이 들려왔다. 류원은 잠기운이 가득 묻어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한 해원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짙은 쌍꺼풀이 진 눈매를 부드럽게 쓸었다.

“응, 졸려…….”

그는 정말 잠이 오는지 말꼬리가 길게 늘어뜨렸다. 해원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다급하게 물었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제가 그쪽이랑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이라고 하면 어쩌실 거예요?”

“…내 옆에 둬야지. 아무 데도 못 가게. 태어날 때부터 내 거라고 태어났는데, 내가 가져야지.”

잠기운에 푹 절은 류원이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해원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쿵쿵- 요란한 심장 소리가 류원에게 들릴까 싶어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내 거라고 이름도 써 놔야지… 아무도 못 건드리게.”

류원은 몰아치는 잠기운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저 물음에 착실하게 입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곧 지독한 수마에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해원은 완전히 잠들어 버린 류원을 확인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류원이 깊이 잠들면서 저를 감싸고 있던 팔에서도 힘이 빠졌다. 품에 빠져나온 해원은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깊이 잠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손바닥을 펼쳐 눈앞에서 흔들어도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꾸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어쩐지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돌연사할 거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두통이 심해 머리를 가눌 수가 없었다. 거기에 무력증까지 더해져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화장실도 기어서 갔을까.

그런데 몸이 기적처럼 좋아지면서 다 괜찮아졌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정말 안이한 생각이었다.

조금 더 빨리 심각성을 깨달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빨리 몸 상태를 알았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당장 먹고 살기에 급급해 병원에 갈 엄두도 못 냈을 테니까. 가난함 앞에는 장사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돌연사한다는 말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강류원 씨, 내가 정말 당신의 운명이 맞을까. 아니 우린 정말 서로의 운명일까?”

해원은 대꾸도 없는 류원을 힐끗거리고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강류원이 모로 누우며 해원의 허리에 팔을 감쌌다. 그걸로도 모자라 해원의 팔을 베개 삼아 베고는 도롱도롱 낮은 숨을 내쉬었다. 졸지에 류원에게 끌어안기고 팔까지 내어 주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샴푸 냄새에 해원은 피식 웃고 말았다. 커다란 남자가 품에 꽉 들어차 있었다.

해원이 눈을 감으며 무심코 팔을 접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런데… 낮에 느꼈던 의미 모를 감각이 손끝을 타고 등에 닿았다. 손끝에 짜릿한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랄까.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등도 아릿하고 따끔거렸다.

해원은 모로 누워 류원을 마주 바라봤다. 풍성한 속눈썹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훑었다. 아,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깨를 만졌을 때보다 더욱 선명해진 감각이 몸을 타고 흘렀다.

강류원이 자신의 몸을 만지는 건 아무런 느낌이 없지만 해원이 직접 류원의 신체를 만지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류원이가 후각으로 해원 씨를 느끼는 것처럼 해원 씨도 류원이를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해원은 기묘한 감각에 홀린 듯이 계속 류원의 몸 이곳저곳을 만졌다. 점차 호흡이 가빠지고 등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강류원이 제게서 나지 않는 고유의 나무 냄새를 맡은 것처럼 저 역시 그의 육체를 만짐으로써 이상 반응을 느끼고 있었다.

해원은 그의 곁에 놓인 전등 리모컨을 집어 들어 불을 밝혔다. 환한 불빛 아래에 놓인 육체를 보는 순간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눈앞이 까맣게 점멸되고 오류가 발생한 컴퓨터처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 류원의 허벅지를 감싸고 있는 이불을 걷어 냈다. 눈앞에 드러나는 그의 고유의 꽃, 이름은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주홍색의 꽃잎이 흐드러지게 핀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그의 허벅지에 새겨져 있었다. 해원은 홀린 듯이 손을 뻗어 그의 꽃을 매만졌다.

꽃잎에 닿은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누군가 마음을 잡아채 깊은 바다로 끌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온갖 슬픔이 거세게 몰아쳤다.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저도 알지 못했다. 그저 기괴하고 기묘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주파수 그게 도대체 뭐길래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손을 떼고 싶은데 뗄 수가 없었다. 울음은 점점 거세지고 마음은 심해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았다.

“가, 강류원 씨.”

“…….”

“저기요, 제발… 눈 좀 떠 봐요. 나 좀 어떻게 해 달라고!!”

온갖 기억들이 범람했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심장을 옥죄었다. 작은아빠가 눈을 감던 날부터 큰아빠가 저를 버리고 집을 나갔던 날, 그리고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그날까지.

억지로 꾹꾹 눌러 담아 왔던 기억들이 모조리 다 쏟아져 나왔다. 질끈 감고 있는 눈가를 비집고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손끝에서 불길이 일어 제 몸을 서서히 태웠다. 마음이 수십 개의 조각으로 갈기갈기 찢겨 흩날렸다. 애달픈 울음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몸이 거세게 밀어 눕혀지고 제 몸 위로 강류원이 기어 올라왔다. 끅끅- 눈물을 삼키고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왜 울고 있어.”

“가, 강류원… 강류원, 강, 류원.”

그의 다정한 물음에도 해원은 그의 이름만 애타게 불렀다. 허벅지에서 떨어진 손에는 아직도 기묘한 감각이 남아 손끝을 간지럽혔다.

속을 꽉 채운 울분과 슬픔 그리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들이 마음속에서 범람하던 순간,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마치 세상 모든 글자가 사라지고 오직 강류원이라는 이름 세 글자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울고 있어. 응?”

“강, 류원… 강류원. 강류원. 강류, 원.”

그가 눈가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달래듯 물었다. 하지만 해원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류원은 허벅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허벅지에, 아니 정확하게는 꽃에 손을 댄 채 울고 있는 해원을 보는 순간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제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피스틸의 목소리는 제 사고 회로를 차단하고 마음의 여유를 앗아갔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흐느낌이 잦아들고 해원은 고집스럽게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저를 바라봤다. 까만 눈동자가 물기에 일렁였다. 혼란스러운 듯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눈 감아요.”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기분이 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이상한 기분을 느꼈으니까.”

“…….”

“이로써 우리의 관계가 조금 더 확실해진 것 같네요.”

류원은 땀에 흠뻑 젖은 해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주며 자조했다. 아직도 허벅지 안쪽이 지글지글 끓어 대는 느낌이었다. 단 한 번도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운명이라는 단어가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서러운 울음을 쏟아 내던 해원이 지쳐 곤히 잠이 들었다. 류원은 이불을 잘 여며 주고 거실로 나왔다. 복잡한 머릿속에 그의 나무 냄새가 엉켜 들어 생각을 방해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피곤한 눈가를 문질렀다. 한 시간도 채 자지 못한 상태라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고개를 젖히고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문해원의 눈물 자국을 지웠던 손끝에 작은 열기가 몰렸다.

조금 전, 문해원이 서러운 눈물을 쏟아 내고 있을 때 류원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맺히고 더운 숨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아랫도리가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분명히 성욕이었다. 서럽게 우는 문해원을 보며 뜨거운 욕정을 느꼈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졌다.

베놈스테먼인 류원에게 성욕은 필요악이었다. 어릴 때는 노멀을 만나 연애도 하고 섹스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성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무성욕자에 가까웠다. 그런 자신이 문해원에게 성욕을 느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 인생에 피스틸이 그것도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이 불쑥 끼어들 거란 생각을 전혀 해 보지 않았다.

돌연사 할지도 모르는 피스틸을 곁에 두어도 괜찮을지, 이 일로 인해 귀찮고 성가신 일에 휘말리게 되진 않을지 고민스러웠다.

류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문해원이 꼭 필요했다. 이 지독한 불면에서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그것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저 문을 넘으면 그를 잡을 수가 있었다. 제 손에 떨어진 빛을 스스로 멀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크게 숨을 삼키고 준호의 번호를 화면에 띄웠다. 곧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한참 만에 잠기운이 뚝뚝 묻어나는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형…….”

- 너 지금 몇 신 줄 아냐. 할 말 있으면 이따가…….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문해원과 나 말이야.”

- 후, 왜 말해…….

“주파수가 맞지 않는다고 해도…….”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맞는다고 해 줘.”

* * *

준호는 자신의 진료실 책상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책상 서랍을 열어 주파수 검사 결과지를 류원의 앞으로 밀었다.

“어차피 결과지 봐도 약자들이 많아서 잘 모를 거야.”

류원은 콧방귀를 뀌고 결과지를 집어 들어 내용을 살폈다. 하지만 이내 종이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인상을 사납게 구겼다.

“결과부터 말해.”

“두 사람은 98% 확률로 주파수가 일치하는 스테먼과 피스틸이야.”

“그럴 줄 알았어.”

그리고 준호가 예상한 대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해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가 강류원 씨한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말로 해석해도 되는 겁니까?”

“…좋은 영향이죠. 아주 좋은, 그리고 류원이 역시 해원 씨한테 좋은 영향을 미칠 거예요.”

해원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과 피스틸, 결과지를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좀 실감이 안 나죠?”

“…네.”

“음, 그럼 이건 어때요? 류원이가 불면증이 심한 건 알고 있죠? 해원씨가 류원이한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수면 패턴 검사를 진행해 보는 거예요.”

해원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류원을 바라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여상하게 웃어 보였다.

“수면 패턴 검사를 진행하면 좀 더 확실하게 주파수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류원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불면증이 해원으로 인해 호전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었다.

“강류원 넌 어때? 이게 가장 확실한 거 같은데.”

“그렇게 해.”

“처음에는 평소 수면 뇌파 상태를 체크할 거고 두 번째는 해원 씨가 같이 있는 상태에서 수면 뇌파 상태를 체크할 거예요.”

“…소장님은 진짜로 저 때문에 강류원 씨의 불면증이 좋아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눈으로 확인해 보면 알겠죠? 검사실로 갑시다.”

류원은 몸에 걸친 옷을 다 벗고 드로즈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검사실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고는 안대를 쓰고 몸을 편하게 늘어뜨렸다. 준호는 류원의 몸에 기계를 연결하고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한참 만에 몸을 떨어뜨린 그가 검사실 내부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외부 컴퓨터에는 류원의 뇌파 상태가 그래프로 그려지고 있었다. 류원은 캄캄한 방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렇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록 류원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류원이는 억지로 수면을 청하면서 델타파가 아니라 베타파가 그려지고 있어요.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뇌파 반응이에요. 쉽게 말해 휴식을 취하고 있지만,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아…….”

준호는 서랍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이제 해원 씨가 방으로 들어갈 겁니다. 외부 마이크와 이어폰이 연결되어 있어요. 류원이가 잠드는지 알려 줄게요.”

해원은 케이스를 열어 이어폰을 착용했다. 그사이 준호는 방 안으로 들어가 류원의 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는 불퉁한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안대를 걷어 내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어설픈 수면에 두통이 일었다.

“다시 한번 검사할 거니까. 안대 써.”

“머리 아파.”

“검사 끝나면 두통약 줄게.”

류원은 얌전히 안대를 내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몸을 늘어뜨린 그를 확인하고 준호는 검사실 문을 열었다. 준호가 나옴과 동시에 해원이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검사실의 공기에 어쩐지 숨이 막혔다. 해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던 류원이 갑자기 상체를 반쯤 들고 해원이 서 있는 자리를 바라봤다. 눈이 안대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도 않을 텐데 마치 뭐가 보이는 사람처럼 해원을 한참 바라봤다.

해원은 숨을 죽이고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때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 류원이 뇌파 상태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류원은 천천히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색색거리는 짙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 완벽하게 잠들었어요. 아까 베타파가 나왔다면 지금은 완벽한 델타파가 나오고 있어요. 깊은 수면에 들어갔다는 소리예요.

해원은 천천히 발을 움직여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작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강류원 씨.”

“…….”

조금 더 큰 소리로 이름을 재차 불렀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반가량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조금 전과는 판이했다. 류원은 질 좋은 수면 상태에 진입해 아주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 이 기이한 상황을 주파수가 아니고서야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제, 밖으로 나오셔도 됩니다.

해원은 이어폰을 빼내고 곤히 잠든 류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반신반의했는데 이렇게 검사까지 동원해 확인을 하니 혼란스러웠다. 이제 인정해야 했다. 이 사람에게는 자신이 필요했다.

하필 불법 시술을 받아 온전치 못한 나무를 가진 피스틸을 운명으로 만난 스테먼이라니…….

준호가 류원을 깨우러 들어올 때까지 해원은 미동도 하지 않고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추슬렀다.

부스스 눈을 뜬 그는 잠기운이 가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몽롱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가슴 한쪽이 따끔거렸다. 잠시 류원이 옷을 갈아입으러 간 사이 침대를 정리하는 준호에게 물었다.

“만약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과 스테먼 중 한쪽이 먼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파수는 끊어집니다. 새로운 짝을 찾는 건 남겨진 사람의 몫이겠죠.”

준호는 어깨를 으쓱이고 침대를 마저 정리했다. 사용한 이불과 시트를 걷어서 품에 안고 검사실을 빠져나갔다.

“여기서 뭐 해요.”

“아, 그냥요.”

옷을 갈아입은 강류원이 아까보다 낯빛이 좋아진 얼굴로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고는 속으로 작게 웃었다.

류원의 솔직한 심정은 문해원을 업고 지구 한 바퀴를 돌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불면증을 고쳐 보겠다고 한방, 양방, 민간요법, 무속 신앙 등등 안 해 본 짓이 없었다.

아무리 돈을 쏟아붓고 시간을 투자해도 불면증은 좋아지기는커녕 도리어 나빠지기만 했다. 불면증은 겪어 본 사람만 아는 아주 질 나쁜 고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문해원의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졸음이 쏟아졌다. 그는 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류원은 홀가분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요.”

“……?”

“집에 가야죠. 난 이제 문해원 씨가 없으면 안 돼요.”

* * *

해원은 정신없이 반석을 따라다니면서 현장 일을 배웠다. 정신없이 그의 말을 메모하고 귀담아 들었다.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다. 반석이 류원의 일을 봐 주는 건 딱 일주일뿐이었다.

서정민이 해외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그는 다시 서정민 매니저로 돌아가야 했다. 반석이나 해원이나 마음이 조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제 사흘 후부터는 초짜 둘이서 온전히 현장을 제어하고 책임져야 했다.

“촬영장에 팬들이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아마 배우가 등장하면 팬들이 환호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팬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해요. 배우가 곧 등장할 예정인데 촬영에 방해되면 배우가 욕을 먹는다고 잘 설명해 줘요.”

“아… 그럼 팬들이 조용히 해 주나요?”

“대부분은요. 내 오빠가 욕을 먹는다는데 어떤 팬들이 시끄럽게 굴겠어요. 간혹 기쁨을 주체 못해 소리를 지르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럴 땐 팬을 나무라기보다는 감독한테 빨리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게 나아요.”

해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인 현장을 바라봤다. 류원이 법복을 입고 배우 고하영과 대사를 주고받고 있었다. 마침 촬영이 끝났는지 숨죽인 스태프들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촬영 끝났나 보다.”

“저 먼저 가 볼게요. 천천히 오세요.”

해원은 손에 쥔 대본을 탁탁 털고 류원의 앞으로 달려갔다. 모니터링 중인 그를 잠시 기다렸다가 물병과 함께 대본을 내밀었다. 류원이 손을 힐끗거리고 물병을 받아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뭐 하고 있었어요?”

“일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이 되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해원이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류원은 빨대를 이로 씹었다가 놓으며 작게 웃었다.

주파수가 일치한다는 확진을 받고 난 뒤, 이상하게 문해원을 주시하는 일이 잦아졌다. 엄마를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이의 마음처럼 시선이 늘 문해원을 따라다녔다. 해원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을 하고 나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쉬엄쉬엄해요. 해원 씨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놓이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차로 갑시다.”

류원은 물통을 해원에게 내밀고 밴이 세워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촬영 시간이 삼십 분 이상 비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렇게 촬영 중에 짬에 생기면 저를 데려다가 앉혀 놓고 잠을 청했다. 그러면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류원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검사실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류원은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팔로 눈가를 가렸다. 해원과 함께하는 며칠 동안 제게는 아주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려 저조하던 기분이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항상 짜증스럽게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그가 이제는 사람을 보며 웃을 수 있었다. 인위적인 미소가 아니라 상황을 즐기고 호응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정말 극적인 변화였다.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막혔다. 자신은 십수 년 동안 불면증으로 고통 받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작 주파수가 일치하는 피스틸을 만났다고 아주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주파수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은 맹신할 수밖에 없었다.

해원의 나무 냄새는 언제 맡아도 기분이 좋았다. 여름 나무 같은 싱싱함을 가진 냄새가 향긋하게 제 후각을 자극했다. 류원은 그렇게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드라마 수상한 커플 기분 좋은 출발, 시청률 10.8%]

“우와!”

채현이 해원의 손을 붙잡고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채현의 손에 빙글빙글 돌려지던 해원의 눈앞으로 신문 기사를 들이밀자, 그제야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류원의 드라마는 워낙 촬영 스케줄이 촉박해 그 흔한 홍보를 위한 예능 출연 한번 못하고 첫 방송이 전파를 탔다. 첫 방송 날에는 <수상한 커플> 배우들과 스태프들도 촬영을 접고, 강남의 모 고깃집에서 회식 겸 첫 방송 모니터링을 함께했다.

첫 방송이 끝나고 감독은 눈물까지 보이며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원로 배우들은 대박의 조짐이 느껴진다며 입을 모아 격려했다. 그리고 드디어 첫 방송 시청률이 나온 것이다.

“전작이 워낙 망해서 시청률 안 나올까 봐, 가슴 졸였는데.”

“…정말 잘 됐다.”

준희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채현과 해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원이 류원의 매니저로 일한 지 2주째, 준희는 입사한 이래 처음으로 평화롭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류원의 개인 스태프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무실로 들이닥쳐 한풀이(?)하는 일도 없어졌고, 강류원이 무단으로 촬영을 펑크 내고 들어와 소파에 드러눕는 일도 없었다.

오랜 고민이었던 스트레스성 발모증 역시 완치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준희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해원아 류원이 인터뷰 아직 안 끝났냐?”

“…아직이요. 인터뷰 끝나면 이쪽으로 오시겠다고 했어요.”

류원은 오전 촬영을 마치고 언론사 인터뷰를 위해 사무실로 향했다. 원래는 외부에서 진행하기로 한 인터뷰였는데 강류원이 굳이 사무실에서 진행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바람에 준희는 아침부터 인터뷰실 액자를 류원의 사진으로 교체해야 했다.

“인터뷰 끝나면 바로 촬영장으로 복귀인가?”

“아니요, F사 지면 광고요.”

“아무튼, 촬영장에 늦지 않게 복귀해. 시청률 잘 나와서 며칠간은 기자들 바글바글할 거다. 류원이 잘 단속해.”

준희는 신신당부를 하고 해원을 잠시 밖으로 불러냈다. 음료 자판기에서 이온음료를 뽑아 해원에게 내밀었다.

“준호 형이 류원이 없을 때 전화 좀 하라던데. 지금 해 볼래?”

“지금이요?”

해원은 인터뷰실이 있는 곳을 잠시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원과 거의 동거하다시피 한 게 벌써 2주였다.

거의 촬영장에서 밤을 새우느라 집에 들어가는 건 일주일에 두세 번이 고작이었지만 늘 해원이 함께했다. 그 덕분에 류원은 단 몇 시간이라도 숙면을 취했다. 강류원은 촬영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머리처럼 문해원의 곁에 찰싹 붙어 시간을 보냈다.

준희가 준호에게 전화를 걸어 해원에게 내밀었다.

- 어 왜.

“안녕하세요, 소장님. 문해원입니다.”

- 어? 해원 씨? 준희랑 같이 있나 봐요.

“네, 사무실에 볼일이 있어서요. 근데 전화하라고 하셨다고…….”

- 준희한테 좀 떨어져서 전화 받아 봐요.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이야기라.

전화기를 타고 준호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해원은 자연스럽게 준희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준희는 자판기에 몸을 기대고 해원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말씀하세요.”

- 다른 게 아니라, 류원이 컨디션은 확실하게 좋아지는 거 같은데 해원 씨는 영 차도가 없어서 말이에요.

“차도요?”

- 음, 류원이가 섹스하자고 안 해요?

“푸학… 켁!”

해원은 무심코 음료를 입에 머금었다가 뿜어내고 말았다. 약간 떨어져 있던 준희가 혀를 차며 다가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손수건을 받아 입을 틀어막고는 준호의 말을 상기했다.

세, 섹스라니.

“해, 해야 하는 건가요?”

- 류원이가 말 안 했구나. 이 돌부처 새끼 진짜…….

“뭐, 뭐, 뭘요?”

해원은 입가를 손수건으로 닦으며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준희 눈치를 보며 통화 음량을 최대로 낮추었다.

- 사실은 해원 씨 나무 상태를 육안으로 확인하는 데 한계가 있어요. 나무가 꽃을 피울 수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는데. 류원이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해서…….

“그게 그거… 그러니까 그거, 그걸로만 확인이 가능한 건가요?”

그때 마침, 기자와 함께 인터뷰실을 빠져나오는 류원이 보였다. 해원은 몸을 돌리고 붉어진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 꽃을 피우는 건 스테먼의 정액으로만 가능하니까요.

어느새 강류원이 등 뒤로 다가와 어깨에 뺨을 대고 기댔다. 작은 목소리로 ‘피곤해’라고 말하는 류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러다가 문득 해원이 통화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그가 물었다.

“누구예요?”

“준호 형이랑 통화 중이야, 인터뷰는 끝났어?”

준희가 해원 대신 대답을 했다. 갑자기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류원이 해원의 손에서 휴대폰을 강탈하듯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통화 종료 버튼을 눌러 버렸다.

“강류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형이랑 통화 중이었잖아.”

“준호 형한테 무슨 소리 들었어요?”

“아, 아무것도.”

해원은 불그스름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아니 회피를 한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류원은 금세 피곤한 기색을 지워 버리고 짜증스러움이 가득 한 얼굴로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준희 형 잠깐만 사무실에 들어가 있어. 나 통화 좀 하고 들어갈게.”

“어… 어.”

준희가 사무실 문을 열자, 그가 자연스럽게 해원의 등을 떠밀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류원의 고함이 들렸다.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 왜 문해원한테까지 이래.”

- 하루라도 빨리 확인하는 게 나으니까. 해원 씨한테 이야기했으니까 빨리 해결해. 못할 것 같으면 연구소로 보내.

“이야기했다고? 연구소로 보내면 다른 새끼랑 섹스라도 시키려고?”

-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 해서라도.

“어디 한번 그렇게 해 봐, 내가 무슨 짓을 하나.”

* * *

해원은 차체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길게 빨았다. 온종일 마음이 심란해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나무에 꽃이 피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말이 명치에 단단히 걸려 내려가지 않고 있었다.

긴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꽃이 피는지 확인하려면 육체적인 관계가 필요했다.

육체적인 관계, 섹스… 강류원이랑? 아…….

해원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강류원은 베놈스테먼이었고 만약 그와 관계를 한다면 자신은 그가 아닌 누구와도 몸을 섞을 수 없게 된다. 아마 강류원도 그게 마음에 걸려 선뜻 확인이니 뭐니 이런 말을 입에 올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숨이 뒤섞인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2주 동안 류원의 촬영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같이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우와 매니저,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과 피스틸의 관계, 공과 사가 장소와 시간을 구분하지 않고 뒤엉켰다. 짤막해진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발로 비볐다.

마침 헤어를 마치고 나오는 류원이 보였다. 포마드 스타일로 깔끔하게 넘기고 고급 슈트까지 입은 모습이 근사했다. 해원이 막 다가서려는 찰나 감독이 류원의 이름을 불렀다. 해원은 잠시 멈칫하고 몸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류원 씨 요즘 컨디션 좋아 보이네? 안색도 좋은 거 같고.”

“그런가요. 확실히 잠을 푹 자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다행이야. 오늘 찍을 장면 말이야.”

류원은 감독과 대화를 하면서도 눈으로는 자연스럽게 해원을 찾았다. 저 멀리 해원이 의자를 정리하고 컵 홀더에 커피를 끼워 넣고 있는 게 보였다.

요즘 그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촬영해 임하고 있었다. 준호는 서로 좋은 영향은 받되 운명이라는 굴레에 너무 갇히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류원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라면 멀리할 것도 없었다.

류원은 간단히 생각을 정리했다. 문해원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해원과 함께 있으면 그 어떤 사람과 있는 것보다 마음이 편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이렇게 마음이 편한 적이 없었다.

해원 역시 자신의 수면 뇌파 검사 이후 주파수에 대해서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도리어 해원은 적극적으로 제시간을 맞춰 주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상태는 눈에 띄게 좋아졌다.

하지만 해원은 계속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사실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며칠 전 준호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 와 해원의 나무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 불법 시술로 어느 정도 손상이 됐는지 알 수가 없어. 일단 꽃이 피는지부터 확인해야 다음 검사도 진행할 수 있는데…….

꽃을 피우는지를 확인하려면 육체적인 관계가 필요했다. 육체적인 관계, 만약 자신이 일반 스테먼이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자신은 베놈스테먼이었다. 맹독이 흐르는…….

베놈스테먼과 관계한 피스틸은 다른 스테먼과 육체적인 관계를 할 수가 없다. 오로지 자신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데 아무리 우리의 주파수가 맞는다고 해도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문해원의 선택에 맡겨야 하는 문제였다.

몇 번이고 해원에게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 성욕과는 별개였다.

“건물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대역으로 대체합시다. 듣고 있어요?”

“네? 네… 그렇게 진행해 주세요.”

감독은 못마땅한 얼굴로 류원을 바라보고는 이내 몸을 돌렸다.

“5분 있다가 리허설 갑시다.”

어느새 해원이 다가와 제 어깨에 얇은 카디건 하나를 걸쳐 주었다. 낮에는 한여름처럼 더운데 해가 지면 기온이 뚝 떨어져서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배우가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도 매니저의 몫이었다.

류원은 자정이 넘은 시각 주변을 환히 밝히는 조명을 한번 힐끗거리고 해원을 바라봤다.

“식사는?”

“아까 채현이랑 나가서 먹고 왔어요. 안 추우세요?”

“괜찮아요.”

한차례 매서운 바람이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었다. 해원은 손에 쥔 대본을 류원에게 넘기고 무릎 담요로 그의 몸을 감쌌다.

“과잉보호라는 건 알고 있어요?”

“네?”

“낮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건 알고 있죠? 고작 몇 도 떨어졌다고 날 이렇게 싸매 놓는 게 재밌어서.”

류원은 작게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담요의 끝을 당겨 몸을 감쌌다. 가끔 해원이 제게 보여 주는 행동들이 가끔 도를 넘을 때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전혀 짜증스럽거나 불쾌하지 않았다. 도리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종종거리며 뭐가 필요한지 늘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강류원 씨 매니저분.”

해원이 즉각 반응하며 스태프에게 달려갔다. 촬영 일정을 조정 중인지 해원은 연신 휴대폰을 꺼내 무언갈 확인했다.

일주일 동안 반석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운 그가 거의 제 스케줄을 전담하고 있었다. 물론 사무실에서 준희가 그를 조종하다시피 일을 시키고 있지만 현장에서 순간순간 결정해야 하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해원은 의연하게 상황을 잘 대처했다. 류원도 전처럼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 예민한 신경이 가라앉으니 그건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해원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류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세트 촬영 시간 때문에요. 어, 그러니까 변경 요청하신 배우님이 워낙 대선배님이시기도 하고 또 저희는 아직 여유가 있기도 하고.”

류원은 눈치를 살살 살피며 횡설수설하는 해원을 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손짓 발짓까지 해 가며 장황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입안의 연한 살을 깨물며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숨기기 위해 목소리를 잔뜩 깔고 물었다.

“누구?”

“최석하 선생님이요. 선생님이 엄청 연기도 잘하시고 또 강 배우님의 아버지로 나오시기도 하고, 연세도 있으시니까.”

계속 저를 설득하려는 게 이미 바꿔 주겠다고 대답을 한 모양이었다. 류원은 산뜻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다고 해요. 다른 분도 아니고 선생님이 요청하신 건데 그렇게 해야지.”

“감사합니다.”

류원의 깔끔한 대답에 해원이 환하게 웃었다. 이런 부분은 충분히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 줄 수 있었다. 애쓰는 모습이 예쁘지 않은가.

“자, 리허설 갑시다.”

스태프의 목소리에 류원은 제 몸에 둘린 담요와 카디건을 걷어 해원의 몸에 둘러 주었다. 몸이 밀착되면서 해원의 나무 냄새가 더욱 진하게 풍겼다. 묵직하고 진한 나무 냄새를 오직 자신만이 독점한다는 게 새삼 만족스러웠다.

“아, 문해원이랑 자고 싶다.”

“…네?”

“촬영 다녀올게요.”

류원이 작게 웃으며 손을 뻗어 해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뜨렸다. 해원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제 몸에 둘린 담요를 걷어 손에 쥐었다. 괜히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고 싶다니…….

분명히 그 속에 내포된 의미는 별것도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준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그런가? 더 마음이 이상했다.

해원은 무심하게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카메라 앞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해원은 약간 거리를 두고 리허설을 지켜봤다. 촬영 라인 뒤쪽으로 무술팀의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잠시 류원을 흘끗거리고 무술팀의 리허설이 진행 중인 현장으로 다가갔다.

익숙한 얼굴들이 더러 보였다. 그리고 특히 오늘 대역을 맡은 스턴트맨은 해원도 아는 얼굴이었다. 모영우, 그는 해원과 같은 해에 들어온 동기였다.

영우는 류원이 입은 옷과 비슷한 옷을 입고 건물 옥상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무술 감독은 현장이 마음에 안 드는지 조감독과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준비된 종이 박스는 이것밖에 없는 겁니까?”

“철물점이 문을 닫아서 구할 수가 없어요. 그래도 구한다고 구한 건데…….”

“우리 애들 목숨이 무슨 파리 목숨이야!!”

무술 감독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낯빛을 굳혔다. 해원이 보기에도 현장 상황이 좋지 않았다. 종이박스는 낙하할 때 몸의 무게에 의해 무너지며 완충재 역할을 한다. 낙하 신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현장에는 종이박스가 제대로 쌓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환경이 열악하다고 해서 촬영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게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해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무술 감독이 잔뜩 굳은 얼굴로 무전기를 들어 영우에게 지시를 내렸다.

“착지할 때 바닥에 몸을 제대로 붙여. 어설프게 설 생각하지 말고.”

현장에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해원도 숨을 죽이고 리허설을 지켜봤다.

“테스트 갑시다.”

“예!”

“자, 테스트 액션!”

무술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영우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 주저 없이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완벽하게 매트리스 위로 떨어졌다.

“컷! 떠밀리듯이 연기를 하면서 떨어져야지. 이게 뭐 어떻게 떨어지는지 시범 보이는 거냐.”

감독은 리허설임에도 실전처럼 영우를 다그쳤다. 영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한번 옥상으로 올라갔다.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어설픈 느낌이 들었다. 해원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한때 업계 유망주였던 해원이었다. 현장을 뛰는 게 즐겁고 재밌었다. 만약 피스틸로 각성만 하지 않았더라면 계속 스턴트맨을 했을 텐데. 입안이 썼다.

“컷! 영우야 이따가 이렇게만 해라.”

“예, 감독님.”

리허설이 끝나고 영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매트리스 위에서 내려왔다. 해원은 애써 씁쓸한 표정을 지우고 영우의 앞으로 다가갔다.

“모영우!”

“어? 문해원! 이게 얼마만이야, 현장에는 어쩐 일이야.”

“나 강류원 매니저로 일해.”

“그렇구나, 정말 잘됐다. 근데 너 몸은 괜찮고?”

“어, 보다시피 건강해. 현장이 좀 열악해서 어떡하냐.”

“악으로 깡으로 하는 거지 뭐. 걱정하지 마.”

영우가 시원하게 웃으며 해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해원은 부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해원이 현역으로 뛰고 있다면 이 역할은 자신이 맡았을지도 모른다.

모영우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는데…….

괜히 입술을 한번 삐죽이고 영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영우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얼굴을 했다. 왜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어깨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강류원이 제 어깨에 머리를 대고 서 있었다. 영우는 놀랐는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해원 역시 당황해 허둥지둥 몸을 물렸다. 하지만 강류원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태연하기만 했다.

“누구?”

“액션스쿨 동기요.”

“아…….”

류원은 잠시 영우에게 시선을 두었다가 아예 몸을 틀어 해원을 바라봤다. 그는 영우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해원이 민망한 기분에 뺨을 문질렀다.

“좀 쉬어야겠어요. 갑시다.”

“아! 어… 영우야 이따가 봐.”

해원이 허겁지겁 영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차로 향하는 걸음이 다급했다. 그는 여전히 촬영 스케줄에 쫓기는 편이라 많은 잠을 자진 못했다. 그래서 짬이 날 때마다 무조건 눈을 붙여야 했다. 날씨도 변덕스러워 힘든데 잠까지 못자면 체력이 버티질 못할 것이다.

류원은 손수 운전석 문을 열어 해원을 태웠다. 그러고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영우를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영우가 곧장 고개를 돌렸다.

“안 타세요?”

해원의 재촉에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류원은 곧장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입가를 비집고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최근 자신은 가끔 계산되지 않은 행동들을 저지를 때가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그런 행동, 특히 지금처럼 문해원이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꼭 정신이 반쯤 나간 것 같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의 나무 냄새를 오직 저만이 맡을 수 있는 것처럼… 문해원의 육체 역시 오직 저만이 가지고 누리고 싶었다. 자신과 주파수가 일치하는 유일한 피스틸이니까.

촬영하다가도 카메라가 꺼지면 시선은 곧바로 해원을 찾아 움직였다.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나면 거짓말처럼 마음이 놓였다.

그저 잠자는 수단으로 해원을 이용을 하겠다는 자신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류원은 쓰게 웃으며 해원을 바라봤다.

이럴 때보면 그가 자신의 매니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게 참 편했다. 남들의 시선을 피해 독점욕을 부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약은 먹었어요?”

“아… 아니요, 아직.”

해원은 준호가 준 약을 거의 먹지 않고 있었다. 비타민이라고 했지만 먹을 때마다 알 수 없는 복통이 일어 속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준호가 또 생각해서 준 약인데 안 먹기도 뭐해서 띄엄띄엄 먹고 있었다.

“먹기 싫은 얼굴이네?”

“…그건 아닌데, 안 주무세요?”

“15분 후에 촬영 시작이에요.”

“아…….”

류원은 등받이를 바로 세우고 차창밖에 시선을 두었다. 조명팀 스태프들이 조명과 반사판을 들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하품했다.

“준호 형한테 이야기 들었다면서.”

“…….”

“왜 거짓말했어요?”

해원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괜히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안색을 살핀 류원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근데 나라도 모르는 척했을 거야. 그게 보통 일인가.”

“일부러 모르는 척했던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말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무리라는 것도 나도 알고 있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원하지 않으면 나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을겁니다.”

류원은 차창을 열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숨이 막히는 침묵과 함께 알싸한 담배 연기가 공간을 채웠다.

해원은 마음이 복잡했다. 돌연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있지만 가끔 크게 한숨을 쉬고 나면 혹은 고개를 돌리거나 몸을 움직이면 이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질까 봐 두려울 때가 있었다. 해원은 의식적으로 시계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모든 게 가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냄새나는 지하 단칸방에서 고개도 가누지 못하던 제가 지금 이렇게 걸어 다니고 강 배우님의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때가 있어요.”

“…바보 같은 생각이네.”

그의 말처럼 이 생각이 바보 같은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정말 몇 달 전 일이 까마득해서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아팠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 수 없어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고 하면 믿을 텐가. 해원은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게 뭐든…….”

“…뭐라고?”

연기를 길게 뱉어 낸 류원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운전석 쪽으로 아예 몸을 틀었다. 해원은 고개를 푹 떨군 채 뒷목을 긁적였다.

순간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슨 의미로 괜찮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붉게 물든 귓불을 보자 무슨 뜻인지 이해되었다.

피스틸의 등에 꽃을 피우는 행위는 성 접촉이 있어야지만 가능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걸 알면서도 괜찮다고 했다. 류원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어 댔다.

“해원 씨 내 얼굴 좀 봐요.”

해원이 제 말에 반응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그의 턱을 쥐고 들어올렸다.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게 제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류원은 헛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

“혹시 내가 베놈이라는 사실을 잊었어요?”

해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강류원이 후각으로 자신을 느끼고 있다면, 자신은 촉각을 통해 그를 느끼고 있었다. 주파수가 맞는다는 소리를 듣고 난 뒤 자꾸만 그의 몸을 만지고 싶은 음험한 욕구가 불쑥불쑥 치밀었다. 어쩌면 강류원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도 그가 잠들면 육체를 만질 수 있어서인지 모른다.

똑똑-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해원과 류원이 동시에 차창을 바라봤다. 차창밖에는 류원의 스타일리스트 재영이 서 있었다.

“촬영 시작하나 봐요.”

“…어디 가지 말고 촬영장 안에 있어요. 그 이야기는 이따가 다시 합시다.”

“네.”

해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겨 주고 차 문을 열었다. 재영이 발을 동동 구르며 류원을 채근했다. 류원은 잔뜩 굳은 얼굴로 그녀를 따라 촬영장으로 향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해원은 숨을 죽이고 촬영 현장을 바라봤다. 류원은 쫓기는 장면을 촬영 중인데 자꾸 합이 맞지 않아 NG가 나고 있었다. 벌써 네 번째 계단을 뛰어오르는 그가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컷-, 소리가 들리고 류원이 땀을 닦으며 모니터를 위해 감독 옆에 앉았다. 스타일리스트가 달라붙어 땀을 닦아 내고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다시 한번 가야 할 것 같지?”

“그러네요.”

지친 기색이 짙어 보여서 만족스럽지 않았다. 류원이 느슨하게 풀어놓은 타이를 조이며 몸을 일으켰다. 다시 크게 숨을 몰아쉬고 계단 쪽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류원은 의식적으로 누군가를 찾았다. 그리고 곧 자신과 눈을 마주친 류원이 오랫동안 이곳을 응시했다. 제법 거리가 멀었음에도 꼭 가까이 붙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만큼 강렬하게 시선을 주었다. 뜨거운 시선에 해원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저 준비됐습니다.”

류원은 그 후로도 다섯 번이나 계단을 뛰어올라야 했다. 촬영이 한 각도가 아니라 다각도에서 촬영되므로 류원은 만족스러운 컷이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계단을 뛰어올랐다.

“컷! 수고했어.”

류원은 아예 허리를 숙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해원은 얼른 물병을 들고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불쑥 물병을 내밀자, 류원이 해원임을 확인하고 물병을 받았다. 빨대를 빨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후우, 고마워요.”

“…많이 힘드시죠?”

“해원 씨가, 매니저가 직업인 것처럼, 나는 배우가, 직업이에요.”

아직 호흡이 불안정해서 그런지 그의 말이 뚝뚝 끊어졌다.

갑자기 촬영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조연출이 달려와 감독에게 귓속말했다. 상황을 전해 들은 감독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감독은 짜증스럽게 욕을 뇌까리며 무술 감독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뭐야,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류원이 손에 든 물병을 해원에게 넘기고 물었다. 대충 상황을 듣고 온 재영이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그게 오빠 대역을 하기로 스턴트맨이 리허설 도중에 좀 다친 모양이에요.”

“뭐?”

“큰 부상은 아닌데 발목을 접질렸다는 거 같아요.”

“제가 상황 파악하고 올게요.”

해원은 낯빛을 굳히고 무술팀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정말 영우가 보이지 않았다. 무술팀과 제작진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은지 분위기가 심각했다.

이야기를 대충 들어 보니 급하게 다른 사람을 부르고 있지만 다른 쪽 촬영장과 맞물려 지금 당장 와 줄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촬영이 길어질 것 같았다. 해원이 막 몸을 돌리는 찰나, 무술 감독이 해원의 이름을 불렀다.

“해원아.”

“네?”

“너, 한번 해 볼래? 낙하하는 거라 간단한 건데.”

“아… 저요?”

“지금 영우가 다쳤는데 대체 인원이 없어. 부탁 좀 하자.”

해원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눈을 반짝였다. 다시는 못할 줄 알았던 스턴트를 할 기회가 갑자기 찾아왔다.

“정말이십니까? 진짜 제가 해도 됩니까?”

해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란하게 뛰어 대는 통에 귀가 시끄러웠다.

기회였다. 다시 스턴트에 도전할 기회. 다시는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해원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최근 들어 몸을 키우기 시작해서 고난도 스턴트는 어렵겠지만, 낙하 정도는 할 수 있었다.

해원이 숨을 삼키고 대답을 하려는 순간.

“문해원 씨가 스턴트맨입니까?”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강류원이 인상을 잔뜩 구기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건 아니지만 대체 인원이 없어서 말이야. 해원이는 어차피 유경험자고 하니까.”

“문해원 씨는 스턴트맨이 아니라 제 매니접니다. 이 신 찍다가 다치면요? 그때는 누가 책임질 겁니까?”

“류원 씨 이거 그렇게 위험한 거 아니야.”

“위험하지 않아서 스턴트맨 배우가 발목을 접질렸습니까?”

“그거야…….”

무술 감독이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자, 류원은 미련 없이 해원의 손목을 붙잡고 몸을 돌렸다. 무술 감독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해원은 연신 고개를 돌려 촬영장을 확인했다. 촬영장에서 벗어나 조용한 곳으로 해원을 데리고 온 류원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저기…….”

“듣기 싫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하지만! 촬영 시간만 지연 돼요. 지금 이 시간에 올 사람도 없을 겁니다.”

“그건 그쪽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제작진에서 해결할 문제지, 내 개인 매니저인 문해원 씨가 나설 이유 없어.”

“그래도…….”

해원은 소란스러운 촬영장 쪽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벌써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까딱하다가는 밤을 새울 수도 있었다. 온종일 촬영을 하느라 류원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안 다치고 잘할 수 있어요. 한 번만요.”

“안…….”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정말 하고 싶어요. 피스틸 각성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고 그 사고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 스턴트를 그만뒀지만 전, 아직도 스턴트가 좋습니다. 좋아 죽겠어요.”

류원은 말문이 막혔다. 하고 싶다고 말하는 해원의 얼굴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저 얼굴을 언젠가 자신도 한 적이 있었다. 연기에 열정이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정말 꼭 하고 싶은 배역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역은 이미 다른 배우가 내정된 상태였다.

류원은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 감독을 직접 찾아갔다. 감독에게 애원했다. 한 번만 하게 해달라고, 아니 오디션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그 마음이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했는지 모른다.

지금 해원의 얼굴이 그때의 제 얼굴과 똑 닮아 있었다. 류원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간절함과 절박함을 이길 수 없었다.

“내가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거예요?”

“…….”

“…정말 안 다칠 수 있어요?”

“네, 안 다칠게요.”

해원은 두 손을 모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침음한 류원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문해원이 스턴트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그런 얼굴을 한다고 해도 절대로 허락해 주지 않을 테니까.

“문해원 정신 똑바로 차려. 떨어질 위치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심호흡 크게 해.”

해원은 무술 감독이 시키는 대로 숨을 크게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6m 높이에서 아래를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줄 하나 없이 맨몸으로 뛰어내리는 건 생각보다 많은 담력이 필요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스턴트맨으로 카메라 앞에 서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 테스트 갑시다. 테스트 액션!”

해원은 조금 전 무술 감독이 시범 보여 줬던 연기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감독이 한 것처럼 뒤를 한 번 힐끗거리고 주저 없이 몸을 던졌다. 발이 공중으로 뜨고 빠른 속도로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안정적으로 매트리스 위로 몸이 떨어졌다.

“윽-.”

박스가 몇 개 쌓여 있지 않다 보니 몸의 충격이 상당했다.

“컷! 생각보다 잘하네? 아직 쓸 만해.”

“감사합니다!”

아픔도 잊고 씩씩하게 대답을 한 해원이 매트리스를 엉금엉금 기어서 아래로 내려왔다.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내고 몸을 돌렸을 때, 미간을 잔뜩 찌푸린 강류원이 보였다.

“이걸 꼭 해야겠어?”

“…제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정말 다치면 안 됩니다. 알겠어요?”

“네, 그리고 강 배우님.”

볼에 약한 홍조가 피어오른 해원이 불쑥 류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류원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그보다 해원의 손이 더 빨리 다가왔다. 뺨을 감싸듯 부드럽게 얼굴을 매만지고 떨어졌다.

“제가 어떤 식으로 강 배우님을 느끼는지 궁금하다고 하셨죠?”

“…그랬죠. 이제 알려 줄 마음이 생겼어요?”

“네, 저는 이런 식으로 느껴요.”

다시 한번 해원의 마른 손이 류원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얼굴에 피어오른 홍조가 아까보다 훨씬 짙어졌다. 류원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해원이 입을 벙긋거리는 순간, 무술 감독이 해원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저는 다시 리허설 하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자, 잠깐만.”

류원이 다급하게 해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2주 내내 어떻게 느끼느냐고 물어도 해원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이번에도 알려 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유를 부렸는데… 어쩐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촬영 끝날 때까지 잘 생각해 보세요.”

해원은 입술을 꽉 깨물고 류원의 손을 밀어냈다. 그의 피부와 접촉했던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기묘한 감각이 숨을 데우고 몸속 장기에 활력을 북돋웠다. 기분 좋은 긴장감에 강류원의 기운까지 더해져 몸 상태가 최상으로 끌어 올려지는 기분이었다.

무술 감독이 해원을 향해 손짓했다. 다시 리허설이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잘했어. 근데 착지가 좀 불안하네. 몸에 힘 빼고 뛰어.”

“예, 알겠습니다.”

낙하 리허설은 최대한 적게 하는 편이다. 뛰면 뛸수록 긴장감이 떨어져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영우의 사고도 같은 이유로 벌어졌으리라 짐작했다. 해원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뛰어내려 보고 리허설을 마무리했다.

곧바로 촬영 준비가 이어졌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옷 속에 보호대를 잔뜩 착용했다. 그리고 류원이 입은 정장과 비슷한 옷을 챙겨 입었다.

의상까지 챙겨 입으니 그제야 촬영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해원이 비장한 얼굴로 천막을 걷었다. 그런데 천막 앞에는 류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왜 여기 계세요. 좀 쉬시지…….”

“내가 지금 쉬게 생겼어요? 이걸 왜 한다고 해서 사람 속을 태워요.”

“저 한때 업계 유망주였습니다. 이런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워요. 정말 자신 있습니다.”

류원은 아무 말 하지 않고 해원이 입고 있는 재킷을 벗겨 내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해원이 당황한 얼굴로 얼른 셔츠를 붙잡았다.

“배, 배우님. 왜, 이러세요.”

“가만히 있어요.”

굳은 표정으로 손을 치워 내고 셔츠 단추를 풀어낸 류원이 셔츠 안에 착용한 보호대를 하나씩 확인했다.

“하, 장비가 이것밖에 없습니까?”

“…개인 장비는 집에 있어서. 그냥 굴러다니는 거 착용했습니다.”

해원이 머쓱한 얼굴로 보호대를 손으로 매만졌다. 마땅한 보호대가 없어 차에 아무렇게 돌아다니는 보호대를 착용했다. 그랬더니 크기가 맞지 않아 등 쪽은 헐겁고 다리 쪽은 너무 꽉 조였다. 못마땅한 얼굴로 보호대를 바라보던 류원이 등 쪽 보호대를 잡아당겼다.

“보호대 다 풀어요.”

“네?”

류원이 해원의 손을 잡아끌고 밴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쉬고 있던 채현이 허둥지둥 차에서 내리자, 해원을 안으로 밀어 넣고 자신의 보호대를 손수 꺼내 왔다. 한때 대역 없이 촬영을 하던 류원이라 최고급 장비가 차에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보호대 이걸로 착용해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내가 마음이 안 놓여서 그러니까 빨리 벗어요.”

괜찮다고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해원은 낡은 보호대를 빼고 류원의 보호대를 몸에 착용했다. 고가의 장비라 그런지 가볍고 조임도 부드러웠다.

다시 한번 보호대를 꼼꼼하게 확인한 류원이 셔츠를 입혀 주고 단추를 직접 채워 주었다.

“제가 해도 되는데…….”

“첫 번째도 안전, 두 번째도 안전입니다. 못하겠으면 지금이라도 말해요. 뒷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아니요. 저 이거 꼭 하고 싶어요.”

채현이 차창을 두어 번 두드렸다. 촬영이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재킷을 몸에 걸치고 밴 문을 열었다.

해원은 류원이 쉴 새 없이 올랐던 계단을 밟고 올라가 옥상 난간 위에 섰다. 아래에는 촬영 스태프와 류원을 비롯한 배우들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원은 낙하지점을 눈으로 확인하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류원의 보호대를 착용했더니 꼭 그에게 안겨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자 스탠바이. 준비됐어요?”

해원이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심장이 기분 좋게 떨렸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긴장감이었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약속된 위치에 섰다. 발끝을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작은 돌이나 모래가 6m 아래로 떨어졌다.

가슴을 두어 번 툭툭 두드리고 폐가 아플 정도로 숨을 마셨다. 긴장감에 입이 말랐다. 혀로 입술을 축이고 아래 상황에 집중했다.

“액션!”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뒤쪽에 대기하고 있던 단역 배우들이 해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뽀얀 모래 먼지가 일었다. 해원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다가 뒤를 한 번 바라보고는 아래로 거침없이 뛰어내렸다.

몸이 매트리스 위로 안정적으로 떨어졌다. 매트리스 위로 떨어지는 소리, 종이 박스가 무너지는 소리.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런데 매트리스에 착지한 몸이 다시 한번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젠장-!

머리가 직감적으로 사고를 예감했다.

“문해원!”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해원의 몸이 바닥에 떨어졌다. 윽, 해원은 낮게 신음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떨어지면서 손으로 땅을 짚은 모양인지 오른쪽 손목에 화끈한 고통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운동을 쉬다가 이제 막 운동을 시작한터라 간단한 낙법조차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충격이 상당했지만 해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일으켰다. 감독과 무술 감독이 빠른 걸음으로 해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해원아 괜찮냐?”

“저 괜찮습니다. 안 다쳤어요.”

무술 감독이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해원을 노려봤지만 해원은 괜찮다는 말로 스태프들을 안심시켰다. 무술 감독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촬영 라인을 벗어났다. 어떻게 떨어졌는지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무 말 못하는 해원 대신 싸워 줄 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의 배우 때문에 촬영이 딜레이가 된 상태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대타를 시키는 게 아니었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뒤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술 감독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이게 괜찮은 겁니까?”

“으윽! 아파, 아픕니다. 놔요!!”

“감독님, 이거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류원은 해원의 오른쪽 손목을 붙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해원의 몸이 매트위에서 다시 튀어 오르던 순간이 눈앞에서 느리게 재생되었다.

순식간에 촬영장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촬영팀 역시 숨을 죽이고 상황을 주시했다. 해원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사색이 된 채 바라보는 촬영 감독과 무술 감독, 그리고 조명과 반사판을 든 채 굳어버린 조명팀, 카메라의 붉은 불빛이 꺼졌음에도 허리를 펴지 못하는 촬영팀. 해원은 숨을 고르고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아니요, 저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

“괜찮기는 뭐가 괜찮습니까. 입 다물고 있어요. 다 엎어 버리기 전에.”

류원은 소리를 죽이고 낮게 읊조렸다. 그런데 이 상황에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언젠가 한번 겪었던 상황 같은데…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촬영은 접고… 다시 이야기합시다.”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이 조명을 내리고 촬영 장비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류원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무언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해원은 채현의 도움을 받아 손목에 압박붕대를 감아 임시로 응급조치를 마쳤다.

손목에 붕대가 감겨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처음부터 허락하는 게 아니었는데.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여기 있어요. 감독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잔뜩 굳은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 류원의 손목을 해원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손끝을 타고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기분에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강 배우님,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그냥 두세요. 제가 실수해서 촬영장에 민폐를 끼친 겁니다.”

“사람이 다쳤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아뇨, 제 실수였어요. 감독님께서 억지로 시키신 것도 아니고 제가 하고 싶어서, 이건 제 실수로 일어난 사고예요. 그리고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요.”

“…….”

“괜히 배우님 이미지만 안 좋아집니다. 그리고 만약 항의할 일이 있다면 배우님이 아니라 제가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근데 저 정말 괜찮습니다.”

해원은 조곤조곤한 말투로 류원을 진정시켰다. 류원은 한동안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서 의자에 앉은 해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기저에 잔잔하게 깔린 화가 넘실거리고 있지만,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처럼 온몸에 기운이 쭉 빠졌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류원은 의욕을 상실하고 해원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훈계질 하지 말라고 지랄을 떨었을 텐데… 해원을 상대로는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기가 막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촬영은 끝났으니까 일단 응급실부터 갑시다.”

채현은 두 눈을 손으로 문지르고 류원을 바라봤다. 해원의 앞에 앉아 있는 강류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번 핀트가 나가면 개지랄을 떨어야 직성이 풀리는 강류원인데…….

해원이 말로 달래자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냥 기가 막혔다.

류원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채현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채현이 꿈에서 깨어난 듯 몽롱한 얼굴로 류원을 바라봤다.

“뭐해? 차에 시동 걸어.”

“아, 아… 네!”

채현이 허둥지둥 차 키를 집어 들고 밴으로 달렸다. 해원은 하얀 붕대로 돌돌 감긴 손목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왜 강류원만 만나면 손목이 남아나질 않는 것인지…….

류원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그때도 당황해서 아픈 것도 모르고 사과하기 바빴는데……. 류원이 얼음주머니를 무심하게 던져주며 몸을 챙기라고 말해 주었다.

“저, 강 배우님 감독님께서 좀 보자는데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해원이 상념을 깨고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얼굴의 스태프가 류원의 앞에 서 있었다. 류원은 거만한 태도로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류원의 앞에 서 있는 스태프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묻어났다.

“얼른 다녀오세요. 여기 정리하고 있을게요.”

“갈 마음…….”

“촬영 아직 많이 남으셨습니다. 감독님한테 미운털 박혀 봤자 좋은 일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어서 다녀오세요.”

류원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무슨 강아지 조련하는 것도 아니고 어르고 달래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가관인 건 자신이 그의 말을 따르고 있다는 거였다. 무슨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큼큼- 괜히 멋쩍은 기분에 헛기침하며 류원은 스태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해원은 멀어지는 류원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형… 저 사람 우리 류원이 형이 맞죠?”

“어?”

“저 만 4개월 동안 일하면서 류원이 형 저렇게 고분고분하게 말 듣는 거 처음 봤어요. 항상 성질내고 예민하게 굴고 짜증 부렸는데… 진짜 괴상하네요.”

“괴상할 정도야?”

“항상 매니저들이 못 해 먹겠다고 그만둬요. 오죽했으면 한 달에 한 번꼴로 매니저가 바뀌었다니까요.”

바로 옆에서 겪어 본 류원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다. 준희의 말처럼 강류원은 몸만 컸지 좀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해원이 말로 어르고 달래면 곧잘 말을 들어주곤 했다.

“짜증도 안 부리고, 잠도 잘 주무시는 거 같고. 요즘 같으면 정말 일할 맛 난다니까요.”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드리워졌다. 채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는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응급실까지 다녀오고 나니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간신히 류원의 집 앞에 도착했다.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린 해원이 뒷좌석 문을 열었다. 류원이 피곤한 기색으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차에서 내렸다.

“채현아 조심해서 들어가라.”

문을 닫고 인사를 건네자, 채현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떡 벌린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해원이 입 모양으로 왜? 하고 묻자, 그는 머리를 저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류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류원의 집으로 들어가는 게 채현의 눈에는 이상해 보일 법도 했다. 늘 류원과 단둘이서 퇴근을 하던 길을 오늘은 채현이 동행했다. 한 손으로 운전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강류원에게 운전을 맡기자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채현의 도움을 받았다.

해원은 일부러 모르는 척하고 손을 흔들었다. 차에서 막 떨어지는 해원을 채현이 다급하게 불렀다.

“형은, 집에 안 가세요?”

“…아, 그게.”

해원이 난처한 얼굴로 강류원을 힐끗거렸다. 강류원은 이미 대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문을 연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 나는 강 배우님 주무시는 거 보고 가려고. 이 팀장님이 꼭 부탁하신 일이라.”

“아 팀장님이 부탁하셨구나, 형 진짜 피곤하시겠어요.”

채현이 목소리를 죽이고 속삭였다. 류원이 멀찍이 떨어져 있긴 하지만 혹여라도 그가 들을까 봐서였다.

“채현아 운전 조심해라.”

“네, 고생하세요.”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던 해원이 작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낮은 대문을 밀었다. 촬영 때문에 집에 들어오는 건 거의 이틀에 한 번꼴이라 아직 그의 집이 낯설기만 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해요.”

“…채현이가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신경 쓸 거 없어요. 어차피 알게 될 텐데.”

류원은 작게 하품을 하며 해원을 먼저 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해원이 신발을 벗기 위해 무심코 오른손으로 벽을 짚었다.

“악--!”

해원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비명에 얼른 입을 틀어막고 류원의 눈치를 살폈다. 현관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은 그가 가까이 다가와 해원의 손목을 잡아챘다. 거친 손길과 달리 목소리는 다정했다.

“괜찮아요?”

“…네. 많이 아픈 것도 으악!”

손목을 움켜쥔 그가 일부러 손에 힘을 주고 인상을 썼다.

“왜 자꾸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거짓말이 아니라…….”

“씻고 내 방으로 건너와요. 손목 그대로 두면 내일 퉁퉁 부을 겁니다.”

류원은 해원이 임시로 머무는 방문을 손수 열어 주고 자신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종일 카메라 앞에서 감정 연기를 하고 추격 신까지 촬영한 터라 피곤함이 몰려왔다. 방문을 열기도 전에 셔츠 단추를 모조리 푼 그는 곧장 셔츠를 벗어 던졌다.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품으로 고정해 놓은 머리를 손으로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리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에 눈을 반짝이며 스턴트를 하겠다고 말하는 문해원과 그가 6m 아래로 떨어지는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억지로라도 못하게 말렸어야 했는데… 문해원이 다친 게 짜증스러웠다.

마음이 복잡했다. 문해원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현장에서 뛰었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다시는 그런 현장에서 일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찜찜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해원의 손목을 찜질해 주고 빨리 깊은 수마에 빠져들고 싶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속옷까지 탈의한 류원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막 수도꼭지 손잡이를 올리려던 류원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류원이 욕실장에서 대형 수건을 꺼내 허리에 두르고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아무렇게나 벗어 둔 옷가지들이 발에 챘다. 허리를 숙여 옷가지들을 집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고 방문을 열었다.

집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슬리퍼를 찍찍 끌며 해원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방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문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열었다. 해원은 샤워하는 모양인지 방안은 조용했다. 안쪽에 딸린 욕실로 다가갔다. 역시 예상한 대로 물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욕실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문이 빠끔히 열리고 물에 축축하게 젖은 해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니요, 해원 씨가 내가 필요할 거 같아서…….”

류원이 문틈으로 손을 넣어 힘으로 문을 밀어 열어젖혔다. 해원이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문으로 몸을 가린 채 뒷걸음질 쳤다.

“어… 어, 어… 자, 잠깐만요.”

“이리 나와요.”

“…아니, 저 괜찮은데. 왜요”

해원과 류원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말을 주고받았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나오지 않으려는 해원을 바라보며 류원은 팔짱을 끼고 세면대 위에 부착된 거울을 힐끗거렸다. 문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히 내미는 해원의 모습을 세면대 거울이 고스란히 비추고 있었다.

해원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지 문으로 몸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류원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으며 문을 약간 앞으로 당겼다. 그러자 해원이 필사적으로 문에 달라붙었다. 해원이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른손 내밀어 봐요.”

“손이요?”

해원은 얼른 까만 비닐봉지가 둘둘 감긴 손을 내려다보고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이렇게 세심한 성격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비닐봉지가 둘둘 감긴 손을 류원의 앞으로 내밀었다.

류원은 비닐봉지를 조심스럽게 벗겨 내고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씻고 나서 다시 감아 줄게요. 가만히 있어요.”

“저 혼자서 할 수, 할 수 있어요.”

혼자 할 수 있다는 해원의 말에도 류원은 붕대를 풀어내고 파랗게 멍이 오르기 시작하는 손목을 손에 쥐었다. 해원은 낭패감에 푹 젖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갑자기 류원이 문을 닫아 버렸다. 문이 닫히면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류원의 앞에 드러났다.

“왁!”

“누가 보면 내가 겁탈하는 줄 알겠네.”

“빠, 빨리 나가세요.”

해원이 하체를 가리기 위해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류원의 손에 저지당했다. 멀쩡한 왼손을 펼쳐 중요 부위를 어설프게 가린 채 바들바들 떨어 대는 꼴이 아주 볼만했다.

“힘으로 해 봤자, 내가 이길 게 빤한데 이렇게 힘을 빼야겠어요?”

“…혼자 할 수 있다니까요.”

“서로 피곤하니까 힘 빼지 말고 곱게 말 들어요. 나도 오늘 이래저래 피곤하니까.”

류원은 개의치 않고 샤워기를 집어 들어 온도를 맞추고 그의 몸 위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해원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물줄기를 얌전히 맞았다. 피곤하다는 류원과 계속 실랑이를 해 봤자 감정 소모만 될 게 뻔했다.

류원이 칭찬이라도 하듯 머리를 한번 쓸어 넘겨 주고 얼굴에 묻은 물기를 손으로 걷어 냈다.

“씻고 얼음주머니 만들어 줄게요.”

“…전에도 얼음주머니 만들어 주셨는데.”

샤워기를 해원의 손에 쥐여 준 류원이 이번에는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짜 문질렀다. 거품이 몽글몽글 일어난 샤워볼을 목부터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전에?”

“파애 스턴트로 참여했을 때요. 그때도 낙하 신을 찍다가 손목을 접질렸는데… 그 당시 저는 처음 현장에 나온 신인이라서 아프다는 말도 못했거든요.”

“…아.”

“근데 배우님이 어떻게 아시고 저한테 얼음주머니를 가져다주셨어요. 몸이 재산이지 않느냐면서…….”

온몸 구석구석 비누칠을 한 그가 손에서 샤워기를 가지고 갔다. 곧 머리부터 물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품이 말끔하게 쓸려 나가자, 해원을 욕조 안으로 들어가 기대게 했다. 그러고는 샴푸를 꾹꾹 짜 욕조 밖으로 나온 해원의 머리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파애 촬영장에서 만났던 문해원이라…….

케케묵은 기억 속에서 당차고 어렸던 문해원을 찾아냈다. 파애 촬영 당시 대역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어차피 위험한 장면은 없는데 굳이 대역을 써야 하느냐는 류원과 무조건 써야 한다는 제작진 간의 잡음이 있었다. 하지만 회사까지 나서서 류원을 말렸고, 결국 대역을 쓰기로 최종 합의했다.

그리고 촬영 현장에 나타난 스턴트맨은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씩씩하게 인사를 하며 촬영장을 누비는 패기가 마냥 귀엽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문해원이었을 줄이야.

“우리 재밌는 인연이네요.”

“…저 사실 강 배우님의 팬입니다. 그때 그렇게 챙겨 주시고 마음 써 주신 게 계속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작품도 다 챙겨 봤습니다.”

“해원 씨 이제 보니까 성덕이네요. 성공한 덕후.”

물의 온도 때문인지 아니면 부끄러워서인지 해원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덕후라는 말이 좀 쑥스러웠다. 류원은 해원의 얼굴을 못 본 척하고 두피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근데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음… 우리 할 이야기 있잖아요.”

“어떤 거요.”

“…뭐든 괜찮다는 말.”

류원의 말은 겉보기엔 담백했지만, 그 속에 내포된 의미는 무겁고 진중했다. 해원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몸을 엉거주춤하게 일으켰다. 하지만 류원이 손가락으로 해원의 이마를 꾸욱 누르며 움직임을 제지했다.

“괜찮다는 말이 너무 쉽다고 생각 안 해요?”

“…쉽게 대답한 건 아닙니다.”

잠시 뜸을 들인 해원이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류원은 아무 말 없이 욕조에 걸터앉아 샤워기를 집어 들었다. 수도꼭지 손잡이를 들어 올리고 그의 머리카락 끝을 물로 적셨다. 몽글몽글 부풀어 오른 거품이 물살에 쓸려 하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베놈스테먼이에요. 이게 꽃만 피우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입니다.”

본격적으로 이마 쪽에 샤워기를 대고 거품을 걷어 내기 시작했다. 하얀 거품이 물과 함께 빠르게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귀 뒤에 묻은 거품까지 말끔하게 헹구어 낸 류원이 샤워기를 바닥에 내려놓고 해원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베놈스테먼과 본딩을 하면 다른 스테먼과 관계를 맺을 수…….”

“저는 강 배우님과의 관계를 단 한 번도 쉽게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해원 씨가 말하는 관계의 의미는 뭡니까? 정신적인 관계 아니면 육체적인 관계?”

“…둘 다요.”

목소리에 담담함이 묻어났다. 해원은 그의 손에서 샤워기를 빼앗아 들고 몸을 헹궜다. 수건을 걷어 몸에 두르고는 고개를 돌렸다.

“저한테 최악은 제가 죽는 거고 차악은 베놈스테먼인 강류원 씨와 본딩하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

“미치도록 살고 싶습니다.”

사람 마음은 참 간사했다. 죽고 싶을 때는 죽지 못해 산다고 했으면서 막상 죽을지도 모른다니까 살고 싶어 미치겠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살고 싶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남들처럼 숨을 쉬고, 먹고, 자고, 걷고,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을 아쉬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싶었다.

“차악이라…….”

“…….”

“그럼 나 말고 일반 스테먼과 관계하세요. 그럼 꽃만 남을 겁니다.”

한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문지르는 해원의 손에서 수건을 빼서 그의 머리에 덮었다. 천천히 수건으로 머리를 문질렀다. 수건이 금세 물을 머금어 축축해졌다.

해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샤워기에서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소리와 류원이 머리를 문지르는 마찰음만이 욕실을 가득 채웠다. 어느 정도 물기를 털어 낸 류원이 그의 머리 위에 수건을 덮은 그대로 두고 몸을 돌렸다.

“얼음주머니 만들어 둘 테니까 방으로 와요.”

“강 배우님.”

“……?”

“제가 다른 스테먼과 관계해도 상관없으십니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