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아로새기다 (3/15)

3. 아로새기다

류원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준호가 연구소로 해원을 보내라고 했을 때 보내지 않은 이유는 다른 스테먼의 꽃을 품는 문해원을 상상할 수 없어서였다.

그런데 지금 태연하게 그에게 다른 스테먼과의 관계를 권하고 있었다. 자조하며 몸을 돌려 해원을 바라봤다.

“대답하세요.”

그는 저와의 본딩을 차악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리 주파수가 맞는다고 한들 감정이 없는 본딩은 서로에게 위험할 뿐이었다.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건 인생이 달린 문제일 수도 있잖아요. 평생 내 독이 당신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어.”

“그래서 결론은요?”

“…….”

“제가 다른 스테먼과 관계를 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괜한 오기였고 심술이었다. 해원은 손가락 마디에 핏기가 가실정도로 손을 꽉 움켜쥐었다.

류원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 답은 정해져 있었다. 속을 들쑤시는 독점욕과 집착이 대답을 만들어 냈지만 차마 그 답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했다.

해원은 머뭇거리는 류원을 스쳐 욕실을 빠져나왔다. 강류원이 뭘 고민하는지 알고 있었다. 평범한 스테먼이 아니니 그의 고민은 당연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고민을 해 주는 강류원에게 고마웠다. 저를 신경 써 주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적어도 그는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류원은 해원이 옷을 다 갈아입을 때까지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계속 거기 계실 겁니까?”

“…….”

“방으로 돌아가세요. 주무셔야… 내일, 윽!”

갑자기 류원이 성큼성큼 다가와 제 손목을 붙잡았다. 하필 부어오르기 시작한 오른쪽 손목을 붙잡은 탓에 인상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그의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해원을 올곧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게…….”

“다른 스테먼과 관계를 해도 되느냐는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그 전에… 손목부터 놔주세요.”

“아… 미안합니다.”

말과 달리 류원이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손목을 풀어냈다. 그러고는 단숨에 허리를 감싸 바짝 끌어당겼다. 해원은 숨을 집어삼키고 류원을 올려다봤다. 그의 턱 끝에 난 작은 점이 보였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그건.”

“…….”

“…안 될 것 같네요.”

주파수, 그것이 주는 맹목적인 끌림은 분명히 있었다. 그는 일주일에 다섯 시간도 간신히 자는 자신에게 매일 일곱 시간의 깊은 잠을 선사했다.

그리고 그의 나무 냄새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거의 잊고 살다시피 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제 시선 안에 머물러야 할 그가 보이지 않으면 심각한 불안함을 느꼈다. 분리불안을 겪는 어린 아이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그를 찾아 댔다.

강류원의 삶은 문해원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제 모든 생활에 문해원이 포함되어 있어야 했다. 류원은 얼굴을 문지르며 짧게 신음했다.

해원은 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이없는 신체 반응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안도하고 있었다. 다른 스테먼과 관계를 허락하지 않는 강류원에게서…….

해원은 그의 맨가슴에 뺨을 대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강류원은 자각하지 못한 사이 아주 빠르게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난 거예요, 서로에게 끌리도록 설계되어서…….”

“하지만 운명을 거부하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건…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사람들에 한정해서 가능한 일이죠. 류원이나 해원 씨처럼 흠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가항력이죠.

“불가항력…….”

“그러니까 조심해요. 너무 주파수에 휘둘리지 않게. 서로 자신의 몸을 위해 사용한다고만 생각하는 게 좋을 거예요.”

준호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를 사용한다는 말로 정의를 해 둔 선을 누구랄 것도 없이 뛰어넘어 서로를 맹렬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당신 나무가 꽃을 피우는지는 내가 직접 확인할 겁니다.”

“…….”

“당신이 피스틸의 운명으로 태어난 것처럼 내 독을 품는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 * *

류원은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해원의 손목에 얹어 두고 욕실로 들어갔다. 수건을 걷어 바닥에 던지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얼굴을 문질렀다. 문해원의 등에 꽃을 새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밑동이 까맣게 죽어 버린 나무를 누군가 보는 것도, 희미해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나무에 다른 스테먼의 꽃을 피운다는 것도, 문해원의 육체를 타인이 손을 댄다는 것도… 어느 하나 용납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빌어먹을.

류원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고 수도꼭지 손잡이를 내렸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샤워부스를 빠져나와 욕조에 걸터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졸음이 밀려오는데 자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복에 겨운 소리 하고 있네.’

류원은 자조하며 몸을 일으켰다. 자고 싶다고 온갖 몸부림을 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자고 싶지 않은 기분을 느끼고 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욕실장을 열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눅눅하고 축축한 공기를 머금은 공간에 탁한 담배 연기가 섞여 들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이미 본질은 흐려졌고 독점욕과 집착만이 남아 맹렬하게 속을 태우고 있었다.

류원은 답답한 속을 두드리고 담배를 길게 빨았다. 희뿌연 연기 위로 문해원의 담담한 얼굴이 떠올랐다. 고정 값을 설정해 놓은 것처럼 그는 늘 같은 얼굴이었다. 표정이 다채롭지 않았다.

그런 그가 쾌락에 물들면 어떤 얼굴을 할까. 어떤 얼굴로 쾌락에 겨워 몸부림칠까. 문해원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을 상상하는 동시에 성욕이 끓어올랐다. 수건을 걷어 몸에 두르고 욕실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류원은 문을 열수가 없었다.

속에서 육체적 쾌락에 집중된 본성과 조금 더 합리적이고 냉혹한 판단을 내리는 이성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육체적인 관계를 맺고 나면 그때는 정말 되돌릴 수가 없어진다. 순간의 감정, 순간의 선택이 너무 많은 걸 바꾸게 될 테니…….

나름 합리화를 하고 있지만 합리적이지 못한 결론이 추론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문해원의 인생을 책임져 줄 용기가 없어서였을까.

류원은 결국 문을 열지 못했다.

* * *

요란한 알람 소리에 해원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휴대폰을 쥐었다. 잠기운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로 알람을 끄고 엎드렸다. 늘 그렇듯 옆에는 강류원이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어젯밤 피곤했는지 류원이 욕실에서 나오는 것도 보지 못하고 먼저 잠이 들었다. 색색- 간지러운 숨소리를 내며 곤히 잠든 류원의 얼굴을 바라보며 해원이 작게 웃었다.

불면의 밤을 보내던 그가 자신을 만난 이후로 깊은 잠을 자고 있었다. 이 평화로움이 좋아서 침대에 엎드려 가만히 시간을 흘려보냈다.

“당신이 피스틸의 운명으로 태어난 것처럼 내 독을 품는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해원은 손을 뻗어 류원의 뺨을 가만히 매만졌다. 여전히 그의 몸을 터치하면 기묘하고 저릿한 느낌이 들었지만, 전처럼 울음이 터져 나올 만큼의 슬픔에 잠식당하는 일은 없었다. 기분 좋은 전류가 손끝을 타고 흐르는 느낌에 해원은 한동안 류원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눈가가 바르르 떨리며 그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해원은 얼굴을 매만지던 그대로 몸을 굳히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자신의 손이 류원의 얼굴에 닿아 있음을 느끼고 다급하게 손을 물리려 했지만 류원이 먼저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침부터 이러는 건 반칙인데.”

“…이, 일어나셔야 하, 하니까 깨우려던 참이었습니다.”

“더 만져 봐요.”

“예?”

류원이 해원의 손을 붙잡아 자신의 왼쪽 가슴에 붙였다. 심장이 있을 법한 곳에 손을 대고 지그시 눌렀다. 해원은 몸을 반쯤 일으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손바닥에 열이 올라 뜨거웠다.

“놔, 놔주세요.”

“나는 후각으로 문해원 씨를 느끼고 문해원 씨는 촉각으로 나를 느끼는 거죠?”

“…아.”

“내가 그쪽 냄새를 허락 없이 맡는 것처럼 문해원 씨도 나를 마음대로 만져도 돼요.”

해원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여전히 제 손은 류원의 손에 붙잡혀 그의 심장께를 누르고 있었다. 손바닥 전체에 느껴지는 온기에 숨이 달아올랐다.

쿵쿵, 심장이 정신없이 뛰어댔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해도 그게 잘되지 않았다. 손이라도 성하면 밀어내기라도 할 텐데 안타깝게도 오른쪽 손에는 붕대가 꼼꼼하게 감겨 있었다.

“그, 그만 놓아주세요.”

“…난 그쪽 나무 냄새를 맡으면 졸음이 오는데, 그쪽은 날 만지면 무슨 기분이 들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저릿한 느낌이 든다고 하면 그가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해원이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자, 류원은 흥미를 잃은 듯 붙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장난 그만 치시고 이제 일어나세요.”

해원은 붉어진 뺨을 문지르며 이불을 정리하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베개 아래에서 휴대폰을 꺼내 쥐었다. 마침 휴대폰이 짧은 알림을 뱉었다. 응? 해원이 의아한 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에는 [작은아빠 기일 D-1]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나. 해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화면을 껐다.

방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벽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지난 몇 년간은 불법 시술 부작용으로 아빠의 기일을 챙기지 못했다. 올해는 몸이 좋아졌으니 기일을 챙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휴대폰으로 류원의 스케줄을 확인하고 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이 불편해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밀어 넣고 담배를 손가락에 걸었다. 지루한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거의 끊어질 때쯤이 되어서야 준희의 목소리가 가까스로 들려왔다.

- 무슨 일 있어?

“아니요, 팀장님. 저 오늘 조퇴 좀 할 수 있을까 해서요.”

- 조퇴? 이유는.

“아버지 기일이라서 제사를 좀 지내려고요. 자정에 지내고 바로 현장으로 복귀하겠습니다.”

- 현장은 채현이한테 맡기고 조퇴해. 굳이 나올 필요 없으니까 그냥 쉬어도 돼.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뒷주머니에 휴대폰을 꽂아 넣었다. 비가 추적추적, 처량하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해원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 물을 잔뜩 머금은 하늘을 바라봤다.

작은아빠가 돌아가시고 1년 후쯤 큰아빠는 어린 저를 혼자 두고 홀연히 집을 떠났다. 그날도 비가 이렇게 처량 맞게 내렸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며칠을 꼼짝하지 않고 큰아빠를 기다렸다. 어린 마음에도 버려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한쪽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직 류원이 방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집 안은 조용했다. 해원은 욕실로 들어가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칫솔을 입에 물었다.

휴대폰이 짧은 알림음을 뱉었다. 채현이었다. 10분 후쯤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얼른 손을 움직였다.

준비를 마치고 나왔음에도 여전히 집 안은 고요했다. 해원은 발소리를 죽이고 류원의 침실로 다가갔다. 문을 가볍게 노크를 하고 귀를 바짝 붙였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문손잡이를 잡아 비틀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색이 바랜 청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은 류원이 젖은 머리카락을 문지르며 싱긋 웃었다.

“손목은 좀 어때요?”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영양제 좀 가져다줘요.”

해원은 얼른 주방으로 들어가 류원의 약 바구니와 생수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류원의 앞으로 가지고 가자, 그가 익숙하게 오른쪽에서 약을 골라 입에 털어 넣었다. 약 종류가 꽤 많았다. 그중에 눈에 띄는 건 봉지에 든 하얀 알약이었다.

“봉지에 든 약은 뭐예요?”

“왼쪽에 있는 건 다 신경안정제와 수면제 같은 거예요.”

“아…….”

“지금은 먹을 이유가 없어서 안 먹고 있는 중이에요.”

류원은 손을 뻗어 해원의 머리카락을 조심히 쓸어 넘겼다. 어젯밤 욕실에서 느꼈던 그 감정이 잔잔히 남아 속을 데웠다. 솔직히 말하면 욕실 문을 열지 못했던 그 순간을 후회하고 있었다. 바구니 안에 든 약봉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원이 인상을 작게 찡그렸다.

“그럼 이 약들은 버려도 되는 거죠?”

“응?”

“버리겠습니다.”

류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약봉지는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해원은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쓸어 깨끗하게 쓰레기통에 넣었다. 저딴 약들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텨 왔을 류원이 안타까웠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

“다시는 이런 거 드시지 마세요.”

류원이 약간 허리를 숙여 해원과 눈을 마주했다. 새까만 동공이 해원의 얼굴을 오롯이 담아냈다.

“지금은 해원 씨가 곁에 있으니까 약을 안 먹어도 되지만, 그쪽이 내 옆에 없으면 난 다시 약을 먹어야 해요.”

“…….”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고 내 곁에 있어 줄 겁니까?”

해원은 섣불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사람의 인생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돌연사를 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들은 사람이었다. 그가 안심할 수 있게 그렇다고 말해 주고 싶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어서요.”

류원은 피식 웃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해원을 등지자 호선을 그리던 입매가 사납게 비틀렸다. 그의 말에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지금 당장 쓰러져 숨이 멎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해원은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다.

돌연사, 외관상 건강하였던 사람이 갑자기 죽는 일. 심장의 박동이 멎거나 본인이 모르는 사이에 진전된 질병의 증상이 나타나 발병 24시간 이내 죽는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머뭇거리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동안 해원의 나무는 끝도 없이 죽음을 향해 시들어 가고 있었다. 애써 담담하게 얼굴을 포장하고 해원의 앞에 섰다.

“출근합시다.”

“저기.”

“……?”

“저 오늘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조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팀장님께는 말씀드렸습니다.”

류원은 생수병을 찌그러뜨려 재활용 봉지에 던져 넣었다. 조퇴를 해야 한다는 말에 찌그러진 생수병처럼 제 기분도 찌그러졌다. 개인적인 사정이라는데 안 된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씁쓸한 마음을 숨기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컷!”

감독의 컷-, 소리와 함께 세차게 물을 퍼붓던 살수차가 맹렬한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방금까지 처절하게 울부짖던 류원이 물에 흠뻑 젖은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채현이 얼른 담요를 가지고 달려갔다.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았는지 류원은 작게 울음을 뱉어 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손끝에 묻어났다.

기분이 한없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감정에 너무 몰입해서 그런가. 류원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물.”

“잠시만요.”

채현이 얼른 몸을 움직였다. 커다란 담요로 몸을 감싼 류원이 감독 옆으로 다가가 촬영한 장면을 확인했다.

“감정 좋고, 시선 좋고, 딕션 좋고 흠잡을 데가 없어. 아주 좋아. 수고했어.”

“수고하셨습니다.”

류원은 채현이 내미는 물병을 받았다. 빨대를 입에 물고 촬영장을 한번 훑었다. 익숙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입에 문 빨대를 놓고 채현에게 물었다.

“문해원은?”

“조금 전에 조퇴했어요. 형한테 말씀드렸다던데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류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 촬영장에 문해원이 없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류원은 거추장스러운 담요를 걷어 내고 푹 젖은 몰골로 촬영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혹시나 해서 해원이 있을 법한 곳을 다 뒤졌지만 정말 그는 없었다. 기분이 바닥을 치더니 문해원이 없어서 그랬던 건가. 자조하며 인상을 구겼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신경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서채현.”

“네, 형.”

“내 전화기 가지고 와.”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감기 걸려요.”

“토 달지 말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류원이 매섭게 일갈했다. 채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움직였다. 한동안 잠잠하던 강류원의 지랄병이 도지는 모양이었다. 류원의 개인 스태프들은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하고 하나둘씩 몸을 숨겼다. 괜히 알짱거리다가 트집이라도 잡히면 된통 깨질 게 분명했다.

채현은 비장한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류원의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곧장 류원에게 가려던 그는 잠시 주변을 살피고 주머니에서 제 휴대폰을 꺼내 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류원의 지랄병이 도졌다는 소식을 알려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지루한 통화 연결음만 계속될 뿐 해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얻어맞는 것보단 알고 얻어맞는 게 나을 텐데. 초조해진 채현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메시지라도 남길까 잠시 생각했지만 촬영 장비를 차에 싣는 현장 스태프들을 보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스타일리스트인 재영이 류원의 곁을 서성이고 있었다. 채현이 얼른 다가가 재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 왜 여깄어.”

채현이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재영이 작게 투덜거렸다.

“오빠 옷 갈아입어야 한단 말이야. 근데 꼼짝도 안 해.”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이러나 모르겠다. 내가 말해 볼게.”

채현은 깊게 심호흡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갔다. 인기척에 머리를 감싸고 가만히 있던 류원이 고개를 들고 채현을 바라봤다. 손바닥을 펼쳐 내밀었다.

“형, 옷… 갈아입으셔야죠.”

조심스럽게 류원의 손바닥에 휴대폰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옷에서 흐르는 물이 의자를 적시는 것도 모자라 바닥까지 흥건하게 적셨다. 장비를 정리하던 스태프들도 하나둘씩 류원을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류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화면에 해원의 번호를 띄웠다. 그의 부재를 미리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마치 힘껏 도망치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얕은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지루한 통화 연결음이 이어졌다. 이상하게 통화 연결음이 길어질수록 제 마음의 여유도 사라졌다.

-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되며…….

긴 통화 연결음 끝에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원은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그러는 사이 촬영 장비를 정리하던 스태프들이 채현에게 눈짓했다.

채현은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도무지 움직일 기미가 없어 보이는 류원 때문에 채원의 속이 새까맣게 탈 지경이었다.

“옷 갈아입으시고 파주 세트장으로 움직이셔야 해요.”

“시끄러워.”

“옷 갈아입으실 동안 제가 해원이 형한테 전화해 볼게요.”

그제야 류원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를 정리해 차로 옮기고 있었다. 귀에서 휴대폰을 떨어뜨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을 일으키자 재영이 얼른 담요로 몸을 감쌌다.

“문해원한테 계속 전화해. 받을 때까지 해.”

“네, 걱정 말고 옷 갈아입으세요.”

류원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에 물기가 묻어났다. 재영이 내민 옷을 받으며 류원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옷을 입은 것만큼 제 머릿속도 푹 젖어 있는 것 같다.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고 내 곁에 있어 줄 겁니까?”

“…저는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어서요.”

건조한 목소리, 마른 눈빛, 씁쓸한 미소.

류원은 아스라이 부서지는 해원의 얼굴을 떠올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옷을 들고 간이 탈의실 문을 열었다. 축축한 재킷을 벗고 셔츠를 벗었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위에 셔츠를 걸쳐 입었다. 아직 물기가 남은 피부에 마른 옷감이 닿아 점점이 물기를 머금었다.

자꾸 입술을 비집고 낮은 한숨이 샜다. 애써 마음을 다잡아 봐도 소용이 없었다. 왜 이러는 건데. 고작 피스틸 하나 없다고 왜 이런 반응까지 보이는 건데.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뚜렷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류원은 바지 버클을 풀고 축축한 바지를 끌어 내렸다. 허벅지 안쪽을 꽉 채운 주홍색의 양귀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문해원의 등 뒤를 채우고 있는 밑동이 까맣게 죽은 나무가 떠올랐다.

이 꽃을 희미하게 색을 잃어 가는 나무에 새기고 싶다.

문해원과 자고 싶다. 숙면의 밤이 아니라 짙은 쾌락이 달을 잡아먹고 어둠을 잡아먹는 그 밤을 함께 보내고 싶다. 욕심껏 그를 안고 나무 냄새에 진탕 취하고 싶다.

류원은 자조하며 떨어진 옷가지를 주워 들었다.

“해원이 형 계속 전화 안 받아요.”

“준희 형한테 전화 걸어.”

류원이 젖은 옷가지를 건네고 채현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이미 통화 버튼을 눌렀는지 통화 연결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 여보세요.

“문해원 집 주소 불러.”

- 또 왜! 뭐 때문에 이래. 진짜 나 대머리 되는 꼴 볼래. 너 때문에 머리가 빠지고 수명이 줄어 새끼야.

“지금 당장 문해원 집 주소 보내, 안 그러면 촬영 펑크 내고 잠수 탈 거니까 그렇게 알아.”

- 강류.

류원은 제 할 말만 전하고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애써 마음을 다잡고 차에 올랐다. 익숙하게 제 코끝을 간지럽히던 나무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향긋한 나무 냄새 대신 짙은 화장품 냄새와 차 특유의 고약한 냄새가 제 코끝에 닿았다.

류원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고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몇 시간을 살수차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감정 연기를 한 탓에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류원은 천장을 보고 누워 눈을 깜박였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10분 거리를 이동하더라도 문해원이 곁에 있으면 푹 곯아떨어지던 것과 달리 지금은 피곤함이 짙게 깔려 있음에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후-.”

긴 한숨을 내쉬고 등받이를 바로 하고 앉았다. 옆 좌석에 아무렇게 던져 놓은 휴대폰을 집어 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루한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다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기계적인 목소리가 반복되었다.

* * *

해원은 한 손 든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철문 앞에서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열쇠로 문을 열자, 쿰쿰한 곰팡내가 코끝을 적셨다.

밖은 환한데 집 안은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24시간 불을 켜야지 생활이 가능한 곳이었다. 암막 커튼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이 한참이나 깜박인 뒤에야 간신히 켜졌다.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비닐봉지를 싱크대 위에 올려 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새 강류원의 집에 적응이라도 됐는지 집 안의 풍경이 낯설었다. 냄새나고 지저분한 집이 싫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주머니에 든 물건들을 꺼내 접이식 침대에 던졌다. 무음으로 돌려놓은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에 부재중 전화 20통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20통?

발신자는 온통 류원과 채현이었다. 촬영장에 무슨 일이 있나. 류원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촬영 중일 것 같아 생각을 바꾸었다. 해원은 채현의 번호를 화면에 띄우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편한 반바지를 꿰입으며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 해원이 형?!

“어, 채현아. 무슨 일 있어?”

- 형,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세요.

“미안, 진동으로 바꾼다는 게 깜박했다. 근데 촬영장에 무슨 일 있어?”

- 말도 마세요. 류원이 형 지랄병 도져서 지금 촬영장이 살얼음판이에요. 예민 보스가 따로 없어요.

“뭐? 갑자기 왜 그러시는데?”

해원은 어깨와 귀 사이에 휴대폰을 밀어 넣고 낡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병 하나만 덩그러니 들어 있는 냉장고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 저도 모르죠. 하필 형 없을 때 발작 스위치가 눌려서……. 의상 하나, 촬영 소품 하나, 음료 하나 다 트집 잡고 있어요. 재영이는 커피 하나 사러 파주에서 서울까지 다녀왔다니까요.

“그래서 강 배우님은 촬영 중이야?”

- 네, 지금 카메라 앞에서 열연 중이세요. 계속 카메라 안 꺼졌으면 좋겠어요.

채현의 푸념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붕대가 감긴 팔을 힐끗거렸다. 굳은 얼굴로 붕대를 감아 주던 강류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붕대를 감는 손은 침착하고 꼼꼼했다. 조금이라도 아픈 기색을 보이면 잠시 손을 멈추었다. 혀를 쯧쯧거리며 불퉁한 표정을 짓는 게 귀여워 류원 몰래 입을 가리고 웃기도 했다.

누가 강류원을 성깔 있는 배우로 생각할까 싶었다. 그런데 또 채현이 이렇게 투덜대는 걸 보니 자신이 알고 있는 류원의 모습이 다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붕대가 감긴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만 고생하고 있어, 새벽까지 촬영 이어지면 내가 가서 바통 터치해 줄게.”

- 네, 그리고 전화 좀 받으세요. 류원이 형이 계속 전화했어요.

“응, 알겠어.”

해원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낡은 접이식 침대에 누웠다. 딱딱하고 불편한 느낌에 인상이 저절로 구겨졌다.

강류원의 침대는 넓고 푹신한데…….

제 간사함을 비웃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2주 동안 자석처럼 찰싹 붙어 있던 강류원이 곁에 없으니 마음이 이상했다. 익숙해진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작게 하품을 하고 몸을 모로 뉘였다. 졸음이 밀려왔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금세 깊은 수마에 잠식당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꽃을 품고 죽는 건 하나도 슬프지 않아. 이게 내 운명이니까… 그런데 널 두고 떠나는 건 가슴 아파.’

‘아빠, 아빠…….’

‘꼭 이 운명이 너를 비껴가기를 바라.’

‘아빠, 아빠… 아빠!!’

몸이 발작을 일으키듯 퉁겨 올랐다가 다시 침대로 떨어졌다. 하아, 울음 섞인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눈물이 눈가를 타고 흘렀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손끝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해원은 잠시간 꼼짝도 하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였다. 뜨거운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베개로 떨어졌다. 너무 아픈 꿈이라서 가슴이 미어졌다.

작은아빠가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간절히 바랐던 일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운명은 저를 정확하게 정조준했다. 관통당한 가슴이 저릿하게 울렸다.

습한 기운을 머금은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걸터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자꾸 마음이 푹 가라앉았다.

작은아빠의 기일은 늘 이렇게 힘들었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던 열 살 때나 그게 뭔지 아는 지금이나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지잉-

베개 아래에 넣어 둔 휴대폰이 길게 진동을 뱉어 내며 울렸다. 해원은 베개를 치우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여, 보세요?”

- 해원 씨?

“누구세요?”

- 이준호 연구소장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해원은 손으로 뺨을 문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라이터와 함께 챙기고 현관문을 열었다. 건물 밖으로 나가 전봇대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낮과 달리 서늘한 바람이 몸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 류원이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당사자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전화 드렸어요.

“…네, 말씀해 주세요.”

- 피스틸로 각성하면 없던 장기가 하나 생겨요. 혹시 그게 뭔지 알아요?

“자궁, 아닌가요.”

해원은 의식적으로 배를 더듬었다. 남성 피스틸은 각성을 겪는 보름 동안 몸속에 자궁이 생긴다. 그래서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었다.

- 음 맞아요. 근데 해원 씨는 불법 시술 때문에 자궁이 온전히 자리 잡지 못했어요. 그래서 임신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해원은 담배를 길게 빨았다. 희뿌연 연기가 허공에 흩날렸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돌연사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피스틸에게 임신은 너무 먼 이야기 아닌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기분이었다.

-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해요? 각성하면서 생긴 장기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은 위험 수위를 넘었다는 말이에요.

“…….”

- 가볍게 생각할 문제 아니에요. 정말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말입니다. 류원이랑 정 관계를 하지 못하겠다면 연구소로 오세요. 한시라도 빨리 나무가 꽃을 품을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전봇대에 기대어 서 있었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말이 심장을 옥죄었다. 운명을 거스르려고 했던 제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가 이렇게 클 줄 몰랐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자정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싱크대 위에 올려 둔 비닐봉지에서 제사 음식들을 꺼냈다. 재주가 없어 시장에서 사 온 것들이었다. 제사 음식들을 접시에 담고 낡은 프라이팬을 꺼냈다. 프라이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리고 불을 켰다. 비닐봉지를 뒤적거려 달걀을 꺼냈다.

작은아빠가 생전에 참 좋아하던 달걀 프라이었다. 제사상에는 좋아하는 음식을 놓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난 뒤 늘 제사상에 달걀 프라이를 놓았다. 커다란 상도 없어서 작은 밥상에 사진을 올리고 음식을 놓았다. 조촐한 제사상이 차려졌다.

해원은 잘 다려 놓은 셔츠를 입고 낡은 정장을 몸에 걸쳤다. 그러고는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차린 건 없지만 아빠가 맛있게 식사를 하고 가셨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따뜻하게 데운 국과 밥을 상에 올리고 사진 앞에 섰다. 사진을 마주하자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아빠 몇 년 동안 제사상도 못 차려 주고 미안해. 그동안 내가 많이 아팠어……. 아빠가 좋아하는 달걀 프라이도 했으니까 많이 먹고 가.”

단정하게 재킷 단추를 채우고 절을 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토록 피스틸이라는 운명이 비껴가기를 원했던 아빠였다. 자신과 같은 운명을 걷지 않길 원했던… 숨이 다 꺼져 가던 그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아빠 정말 보고 싶어…….”

무릎을 꿇고 엎드린 해원이 작게 흐느꼈다. 꾸역꾸역 참아 봐도 자꾸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근데 나 죽을지도 모른대… 피스틸로 각성한 게 너무 싫어서 시술받았는데 그게 잘못됐나 봐. 그래서 나 돌연사할 수도 있대. 그래서 제사상 차려 주는 거 마지막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많이, 많이 먹고 가.”

“죽긴 누가 죽어……!!”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해원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눈을 뜨자, 문 앞에 선 강류원이 보였다. 제사를 위해 열어 둔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해원은 다급하게 눈물을 닦아 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촬영을 끝내고 바로 온 것인지 의상이며, 헤어며, 메이크업이며 다 그대로였다.

“가, 강 배우님.”

“한시라도 떨어지지 마. 내 옆에서…….”

“그건 아침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해원 씨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나머지는 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그렇게 만들게.”

놀랄 새도 없이 해원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입술을 세게 깨물고 울음을 참아 보려고 해도 서러운 눈물이 쏟아졌다. 류원이 해원의 어깨를 감싸고 품으로 당겼다.

류원은 품에 안은 해원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짙고 묵직한 나무 냄새에 고단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 줄이 느슨하게 풀리고 한 줌의 여유로움도 용납하지 못했던 마음이 깊은숨을 토해 냈다.

“나는 이제 확실하게 결심이 섰어.”

해원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작게 흐느꼈다. 두 팔로 류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가 말하는 결심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제 등을 가득 채운, 밑동이 까맣게 죽어 버린, 금방이라도 악취가 날 것 같은 나무에 꽃을 새겨 넣을 결심을 했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만약 류원의 관계를 하고도 나무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회생 불가의 판정을 받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사형 판정이었다.

“저한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다른 스테먼과 자도 되느냐고 묻던 호기롭고 패기 넘치던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막상 강류원이 성큼 다가서니 제 마음은 꽁지 빠지게 도망을 치고 있었다. 참 비루하고 나약한 마음이었다. 이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류원은 대답 대신 해원의 머리통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문해원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죽음을 고하는 순간 핀트가 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해원이 모든 순간을 담담하게 받아들여 그런 줄로만 알았다. 최악을 논하고 차악을 논하는 그 얼굴이 너무 평온했기에 그래서 속도 단단한 줄 알았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제가 마주한 문해원은 온몸으로 처절하게 울고 있었다. 연약하다 못해 가련한 속을 내놓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두려워하고 있었다.

류원은 결심했다. 문해원의 몸에 독을 퍼붓기로. 그렇게 해서라도 나무가 꽃을 품는지 확인하겠다고. 살려 놓은 다음에, 그 다음에 또 다른 걸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류원은 나무 냄새를 깊게 삼키고 작은 상위에 놓인 조촐한 제사상과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해원과 눈매가 똑 닮은 남자가 사진 속에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구예요?”

“…저를 낳아 주신 분입니다.”

“그럼 인사드려야겠네.”

“아, 아니요. 그러시지 않아도 됩니다.”

류원은 해원을 품에서 떨어뜨려 놓고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너저분하게 풀린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사진 앞에 섰다. 해원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 절을 올렸다. 무릎을 꿇고 제사상 앞에 앉았다. 아무말도 하지 않고 사진을 똑바로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강류원이라고 합니다. 아드님과 주파수가 맞는 스테먼입니다. 죄송하지만, 저 사람 빨리 못 보내드립니다. 아주 오래 기다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운명의 짝으로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원은 오랫동안 제사상 앞에 앉아 있었다.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마치 대화라도 나누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강 배… 주무시네요.”

해원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류원은 어느새 제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색색 내쉬는 숨소리를 들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침대 아래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불안하고 혼곤한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어쩐지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늘 누워 잠을 자던 자리에 강류원이 누워 있었다.

“한시라도 떨어지지 마. 내 옆에서…….”

“해원 씨는 그냥 가만히 있어요. 나머지는 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그렇게 만들게.”

류원이 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천천히 손을 뻗어 류원의 동그란 이마를 매만졌다. 손끝에 낯선 열기가 달라붙었다. 기분이 묘했다.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더 용기를 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손 마디마디에 강류원의 체온이 닿아 간질거렸다. 어쩐지 숨이 막혔다.

“왜 하필 촉각이야. 후각이나 시각 뭐 이런 거면 좀 좋아.”

작게 투덜대며 손끝을 세워 얼굴을 매만졌다. 그러다가 무심코 입술을 매만졌다. 도톰하고 매끄러운 입술 선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손끝에서 시작한 열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해원이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 순간, 제 코끝에 타인의 숨결이 닿았다.

하, 무슨 짓을……!

해원이 놀라 몸을 물리려는 순간, 갑자기 류원이 머리를 감싸고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입안 깊숙이 뜨거운 살덩이가 밀려들었다. 해원은 눈을 크게 뜨고 류원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도리어 그는 뒤통수를 감싼 손에 힘을 주고 혀를 움직였다. 혀가 뒤엉키고 타액이 서로의 입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긴 입맞춤 끝에 입술을 떼어 낸 류원이 나른하게 웃었다.

“곤히 자는 사람 덮치는 건 어디서 배웠어요?”

“…그게 아니라.”

해원이 입술에 묻은 타액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얼굴을 붉혔다. 분명히 류원의 입술을 만지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순간의 기억이 깨끗하게 날아갔다.

류원이 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해원의 손목을 쥐었다. 반사적으로 몸에 힘을 주자, 류원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집으로 갑시다.”

“…집이요?”

벌써 새벽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자기에는 해원 씨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할 거 같은데?”

말의 의미가 모호했다. 목울대가 크게 일렁일 만큼 침을 꿀꺽 삼키고 류원을 올려다봤다.

“나 피곤한데, 아침부터 촬영이에요.”

“아… 잠시만요.”

해원이 류원의 손을 밀어내고 얼른 몸을 움직였다. 가방에 휴대폰과 옷가지들을 챙기고 몸을 일으켰다. 류원은 이미 현관으로 나가 신발을 신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갑시다.”

“…네.”

낡은 현관문을 닫고 문을 잠갔다. 열쇠를 주머니를 넣고 가방을 어깨에 멨다. 그러자 류원이 익숙하게 손목을 감싸 쥐었다. 류원은 보폭을 크게 내디뎌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 건물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류원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류원은 잠금을 해제하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요.”

“운전하시게요?”

“…해원 씨가 운전하면 내가 숨넘어갈 거 같아서. 나름 운전 경력 10년 차니까 걱정하지 말고 타요.”

“아니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차 키 주세요.”

해원이 고집을 부리자, 류원이 새까만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손으로 운전할 수 있겠어요?”

“아…….”

해원이 고개를 숙여 제 손에 감긴 붕대를 바라봤다. 불쑥 류원의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입술을 바짝 붙이고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말이에요. 집까지 무사히 가고 싶다면 내 손에 운전대라도 쥐여 주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가는 동안 이 두 손이 해원 씨를 어떻게 할지 나도 장담 못해요.”

조수석에 앉은 해원은 어색하게 뺨을 긁었다. 항상 운전석에 앉다가 조수석에 앉아 있으려니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했다.

류원이 몸을 기울여 해원의 몸에 안전벨트를 채워 주고 바로 앉았다. 그리고 버튼을 조작해 룸미러와 좌석을 몸에 맞게 조정하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해원은 시동을 거는 류원을 못 미더운 눈으로 힐끗거렸다.

“제가 운전…….”

“면허도 있고 경력도 충분히 있으니까 제발 가만히 좀 있어요.”

류원은 차 안의 공기를 단숨에 잡아먹고 묵직하게 제 코끝을 간지럽히는 나무 냄새에 차창을 약간 내렸다.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해원이 본능적으로 몸을 좌석에 꽉 붙이고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류원은 그런 해원을 비웃듯 코웃음 쳤다.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빽빽하게 주차된 골목을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도로로 들어섰다. 해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힘껏 움켜쥔 손잡이를 놓았다. 잠시 신호가 걸린 사이 류원이 해원의 무릎 위에 놓인 가방을 집어 뒷좌석에 놓았다. 그러고는 해원의 손을 붙잡아 깍지를 끼웠다.

손바닥이 맞닿아 서로의 체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해원은 손을 빼려다가 그냥 그대로 두었다. 잔잔하게 손바닥을 데우는 열기가 싫지 않았다.

“나도 해원 씨처럼 내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허벅지에 꽃이 새겨지면서 온몸에 독이 퍼졌는데 몸이 그걸 거부했어요.”

“아…….”

“각성이 끝났는데도 몸이 독을 받아들이지 못해 계속 피를 토했어요. 하얀 침구가 새빨갛게 물들 만큼 피가 나는데 그때, 베놈으로 살 바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도 스테먼이잖아요.”

붉은빛을 내던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류원이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해원은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도심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고개를 돌렸다.

피스틸보다는 스테먼이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물론 피스틸로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만족도가 있는 사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적어도 해원은 아니었다. 피스틸이라는 삶에 대한 만족도가 전혀 없었다. 피스틸 각성은 그저 제게 닥친 재앙에 불과했다.

“일반 스테먼이었으면 괜찮았을지도 모르죠. 나한테 섹스는 한 사람의 미래가 걸린 문제가 되어 버려요. 독을 품은 피스틸은 그 누구와도 관계할 수가 없으니까.”

“…….”

“그게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성욕이 줄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무성욕자 수준까지 왔어요.”

고요한 차 안에 류원의 담담한 목소리가 나부꼈다. 마치 대본에 있는 대사를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사람처럼 목소리에 감정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해원은 맞잡은 손을 세게 쥐었다. 베놈스테먼은 국가에서 보호되는 희귀한 개체였다. 그래서인지 어떤 식으로 각성이 이루어지는지 국가에서 어떤 관리를 받고 있는지 모두 금기에 붙여져 있었다. 류원이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웃었다.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네, 내 이야기의 본론은 지금부터예요.”

류원이 손을 놓고 양손으로 운전대를 쥐었다. 어느새 차가 류원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익숙하게 주차장 리모컨을 꺼내 버튼을 누르자, 도어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류원은 천천히 주차장 안으로 차를 진입시켰다. 해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원의 주차장은 차량을 오래 보관할 때만 사용했다. 데일리 카는 사용에 용이하도록 거의 밖에 주차하는 편이었다.

다른 차를 끌고 다닐 생각인가? 해원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류원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사람이 언제 가장 혼란스러운지 알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믿고 있던 사실이 깨어졌을 때. 그걸 부정당하는 순간.”

“……?”

류원은 몸을 조이는 안전벨트를 풀어내고 몸을 약간 틀어 해원을 바라봤다.

“무성욕자라고 믿고 살아 있는데 갑자기 성욕이 느껴졌을 때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해원의 좌석에 손을 짚고 몸을 기울였다. 순식간에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코끝에 짙고 묵직한 나무 냄새가 닿았다. 평소에는 양질의 수면을 선사하던 냄새가 지금은 잔잔하게 속을 채우는 성욕의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해원의 몸을 가로지르는 안전벨트를 풀어냈다. 해원이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딸려 올라가는 안전벨트를 손에 쥐었다.

“나랑 자요.”

“…강 배우님.”

“섹스해요.”

“자, 잠시만요.”

“나무에 내 꽃을 새기고 내 독을 받아요.”

해원의 뺨에 마른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솜털을 간지럽히듯 얼굴로 쏟아지는 숨결에 해원이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류원이 해원의 뺨을 길게 핥았다.

“으, 자, 잠시만요.”

“무슨 생각이 필요한 건데.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눈만 감고 있어요. 해원 씨한테 주어진 선택지는 이것밖에 없어요.”

“여, 여기서요?”

해원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한쪽 눈만 슬며시 뜨고 물었다.

장소도 따질 정신도 있고 좋네.

류원은 작게 헛웃음을 터트리며 차 문을 열었다.

“내려요, 여기가 불편하면 편한 장소로 가야지.”

류원이 먼저 차에서 내려 조수석 쪽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자 해원이 쭈뼛거리며 세게 움켜쥔 안전벨트를 놓았다. 해원은 숨을 삼키고 차에서 내려 류원의 앞에 섰다.

“괜찮으시겠어요?”

“질문이 잘못됐네. 그건 내가 해원 씨한테 물어야 하는 질문 같은데. 괜찮겠어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만약 제 등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그때는 정말 회생 불가능한 상태라는 건데 그걸 제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때는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면 돼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을 테니까.”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류원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기분이었다. 선택지는 없으니 너는 여기서 뛰어내려야 한다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는 해원을 바라보며 류원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다려요.”

류원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 모드로 통화 상태를 바꾼 그가 차체에 몸을 기대고 섰다.

- 네가 불면증이라고 남도 불면증이라고 생각하지 말랬지.

긴 통화 연결음 끝에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원에게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형, 나 문해원이랑 잘 건데.”

- 이 미친놈아!! 이 새벽에 내가 네 성생활까지 알아야 하는 거, 아니 잠깐만 누구랑 잔다고?

“만약 관계하고 난 뒤에 꽃이 안 피면 그땐 어떻게 해?”

준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움직이는지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간간이 들리고 짧은 전자음이 들렸다. 정수기를 조작하는 모양인지 곧 물소리가 쪼로록 들렸다.

류원이 답답증이 일어 다시 한번 다그치려는 순간 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죽은 나무로 판명되면 쓸 수 있는 약물이 있어. 고통스럽겠지만 약물을 주입해서 강제로 재각성을 일으킬 거야. 그래서 일단 나무를 살리고… 아무튼 그래.

“그럼, 지금 그 약물을 쓰면 안 되는 건가요?”

해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 해원 씨? 근데 안타깝게도 그 약물은 죽은 나무로 판명되지 않으면 절대 쓸 수 없는 약물이에요. 그래서 나무가 꽃을 품는지 꼭 확인해야 해요.

해원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무가 꽃을 품지 못하는 순간을 상상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순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벌써부터 마음이 벼랑 끝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방법은 있다는 거잖아.”

- 그래, 해원 씨는 촉각으로 주파수 상대를 느끼는 타입이니까 최대한 널 많이 만지게 하고 느끼게 해. 나무가 주파수에 반응하도록… 만약 죽은 나무라면 소용없겠지만.

* * *

끈적한 숨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류원은 해원의 손목을 잡아당겨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부딪쳤다. 등이 현관문에 닿고 그대로 몰아붙여졌다. 타액이 끈적하게 섞여 입가를 타고 줄줄 흘렀다.

끓어오르는 성욕에 머리가 몽롱했다. 고개가 비틀릴 때마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야릇한 신음이, 숨이 새어 나왔다. 혀가 질척이는 난잡한 소리가 현관을 울렸다. 센서 등이 꺼졌다가 켜지기를 반복했다.

해원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꿈에서 깨어나듯 몽롱한 표정으로 풍성한 속눈썹을 바르르 떨며 키스에 열중하고 있는 류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수없이 본 얼굴이었다. 상대 배우의 얼굴을 감싸고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던 얼굴. 숨이 가빴다.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해원이 약간 힘을 주고 류원의 어깨를 밀어냈다. 류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두 팔을 붙잡아 문으로 밀어붙이고 더 적극적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입안을 헤집는 혀가 제 뇌를 범하는 느낌이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미세한 뇌혈관을 핥고 이를 세워 물어뜯었다.

“흐읍, 흐… 잠깐, 잠깐만.”

뜨겁고 탁한 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와 해원의 입가를 간지럽혔다. 류원은 입술에 묻은 타액을 혀로 핥고 느슨하게 풀린 눈매로 해원을 바라봤다. 원초적인 본능과 욕구가 폭발하듯 차올라 호흡이 자꾸 흩어졌다.

“왜.”

“씻고, 씻고 싶어요.”

문과 몸 사이에 해원을 가두고 몸을 밀착했다. 더할 나위 없이 발기한 성기가 해원의 하체에 닿아 있었다. 배를 압박하는 느낌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르고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해원이 탁한 숨을 내쉬었다. 류원이 아래로 떨어진 해원의 턱을 쥐고 약간 들어 올리자, 허공에서 음탕한 시선이 뒤엉켰다.

“씻게 해 줄 테니까 나한테 집중해.”

류원이 달래듯 입술을 핥았다. 혀끝으로 입술 선을 따라 장난을 치듯 한참을 핥던 그가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치열에 혀가 닿고 입천장, 혀 아래까지 입안 구석구석 류원의 타액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진탕 술에 취한 것처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입술을 떼어 낸 그가 제 귓불을 베어 물고 핥으며 작게 속삭였다.

“매일 이러고 싶었어.”

연인에게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목소리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뜨거운 숨과 욕망에 뒤엉킨 해원은 본능적으로 되돌릴 수 없음을 느꼈다.

귀환 불능점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제 뒤돌아보는 건 의미가 없었다. 목적지로 갈 수 있다면 가야 하고 아니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곳까지 가야 한다. 그곳이 어딘지는 정해져 있었고 만약 다다르지 못하고 표류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괜찮다고 말해 줘, 내 독을 품어도 상관없다고 말해.”

류원의 탁하고 습한 목소리가 말초 신경을 긁어내렸다. 해원이 혀를 내어 그의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작게 숨을 헐떡이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아, 괜찮아요. 그게 뭐든.”

거세게 날뛰는 성욕으로 점철된 그가 정신과 육체를 온몸으로 감싸고 끌어내리고 있었다. 더 깊은 곳으로 더 자극적인 곳으로…….

체념하듯 눈을 감고 류원의 목을 감싸고 매달렸다.

류원은 해원의 머리를 받쳐 조심스럽게 현관 바닥에 눕혔다. 도화선을 타고 천천히 몸체를 태우던 성욕이 해원의 허락에 폭발했다. 각성을 하던 그 밤처럼 온몸에 열이 올랐다. 해원의 뺨을 감싸고 시선을 맞췄다. 이를 악문 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진짜 당신 나한테 이상한 사람이야.”

롤러코스터를 타고 서서히 낙하지점으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레일이 느려질수록 긴장감이 가중되는 것처럼 류원의 손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움직일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묻어났다.

“왜요, 무서워요?”

“…후, 숨이 좀 답답해서.”

“케일릭 때도 안거나 안겨 본 적 없어요?”

“하, 저는 운동만, 읏, 운동만 했습니다.”

류원이 작게 웃고는 고개를 숙여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쪽- 낯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입술에 해원의 인상이 작게 일그러졌다. 성욕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거의 운동을 하느라 뒷전이었다. 그래서 이런 성적 자극들이 낯설고 불편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해원의 육체는 불판이 서서히 달구어지는 것처럼 천천히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서고 가벼운 터치에도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류원이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사타구니를 더듬었다. 해원은 기겁을 하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흐읏, 빠, 빨리 확인만……!”

몸이 이상하게 변하는 게 두려웠다. 호흡이 제멋대로 터져 나오고 발가락을 누가 간지럽히는 것처럼 저절로 곱아들었다. 류원이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작게 웃었다.

“난 차려진 밥상을 걷어차는 성격이 아니라서, 지금도 얼마나 참고 있는지 그쪽은 모를걸?”

류원은 숨을 몰아쉬었다. 거칠게 몰아붙이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내리누르고 천천히 해원의 몸을 데우고 있었다.

제 아래에 누워 있는 문해원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초식 동물 같았다. 가슴을 진득하게 핥거나 귓가에 숨을 불어 넣을 때마다 눈꺼풀이 반쯤 일그러지는데, 그게 목을 부러뜨리고 싶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해원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얕게 숨만 헐떡였다. 류원의 혀가 가슴에 닿았다. 셔츠 위로 혀가 요사스럽게 돌아다녔다.

“흣! 자, 잠시만!”

해원이 손바닥으로 류원의 어깨를 다급하게 두드렸다. 류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젖꼭지가 있는 부분을 타액으로 적시고는 옷 위로 볼록 튀어나온 젖꼭지를 혀로 감싸 물었다. 입안에 달라붙는 천의 감촉이 좋지 않았지만 해원의 반응은 불쾌한 감각을 넘어서게 했다.

“지금이 두 시 오 분전이니까 못해도 우리는 일곱 시 전까지는 관계를 끝내야 합니다.”

“네? 다, 다섯 시간이나 남았는데요.”

“내가 힘세고 오래가는 놈이라.”

류원의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갑자기 시야가 반전되었다. 어느새 류원의 몸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경악한 표정으로 류원을 내려다보자, 그는 해원의 손을 당겨 심장께에 붙였다. 해원은 손에 닿는 저릿한 느낌에 인상을 찡그렸다.

“마음대로 만져 봐요.”

“…저는.”

“시간은 오래 못 줘요. 촉감으로 날 느껴 봐요.”

“…….”

“그쪽 촉각에 나를 새겨 넣어요, 나무가 나한테 반응하게…….”

류원이 손을 잡아당겨 손끝에 입 맞췄다. 해원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오른손에 붕대가 감겨 불편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강류원의 육체를 더듬는 손이 처음에는 소극적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담해졌다.

뭐에 홀린 사람처럼 저절로 손이 움직였다. 해원은 강류원이 제 몸을 만질 때보다 더 흥분하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에서 열기가 치솟고, 나무가 욱신거렸다.

하아, 낮게 숨을 뱉어 낸 해원이 그의 바지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류원이 낮게 신음을 내뱉었다.

“윽, 해원…….”

류원은 해원의 손목을 쥐었다가 놓으며 허탈하게 하게 웃었다. 완전히 초점을 잃어버린 눈동자가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있었다. 류원은 스스로 버클을 풀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이 거침없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쥔 그가 본능적으로 기둥을 쓸었다. 표피를 밀어 올린 손이 매끈한 귀두를 두어 번 문질렀다.

류원은 이를 악물고 해원의 손을 밀어냈다. 하지만 해원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다시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성기를 쥐었다. 기둥을 쥐고 흔드는 느낌에 류원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낮게 신음했다.

씨발, 이게 아닌데……. 무성욕자로 살다 보니 몸의 감각이 변하기라도 한 건가.

해원의 손이 기둥을 훑을 때마다 온몸에 열이 뻗치고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제가 알고 있는 성감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훨씬 더 자극적이고 강렬했다.

낮게 욕설을 뇌까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아래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뜨거움이 밀려들었다.

“으윽, 문, 해원.”

제 발목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해원이 입을 크게 벌리고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입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귀두가 이에 긁히는 느낌에 류원이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해원은 요령 없이 성기를 입에 넣으려고 애썼다. 혀끝을 적시는 액체를 혀로 핥고 입술을 모아 귀두를 빨았다.

류원이 이마를 밀어내려고 해도 그는 고집스럽게 성기를 입안에 담았다. 아이스크림을 빨 듯 입술을 모아 성기를 빨아올리며 손으로는 음낭을 주물렀다. 작은 입이 버겁게 벌어지며 입술 양쪽 끝이 찢어져 피가 맺혔다. 아프지도 않은지 연신 머리를 움직이며 성기를 자극했다.

해원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움직임을 멈추고 오직 강류원과 저만이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성기를 자극할 때마다 강류원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게 좋았다. 몸을 더듬고 만질 때마다 손끝이 달아오르고 갈증이 일었다. 류원은 강제로 해원의 입안에서 성기를 뽑아내고 가볍게 뺨을 두드렸다.

“정신 차려 봐요.”

“흐으, 으, 하, 줘.”

초점이 잃어 허망한 눈을 마주한 류원은 숨을 삼켰다. 해원이 제 몸 위로 달려들어 다시 한번 바지를 끌어 내렸다. 게걸스럽게 성기를 입에 물고 숨을 헐떡였다. 류원은 얼마 남지 않은 이성을 다잡으며 해원을 달래 몸에서 떨어뜨렸다.

“하아, 해원 씨 정신 좀 차려 봐요.”

바지를 추스르고 해원의 어깨를 감싸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힘을 풀려 주저앉는 그를 마주 안자, 해원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혀를 놀렸다.

류원은 침실까지 가지도 못하고 해원이 임시로 묵고 있는 방으로 그를 이끌었다. 침대로 가지 않고 욕실로 향했다. 목덜미에서 따끔한 느낌이 연속으로 느껴졌다. 피부를 짓씹고 빨아 당기는 느낌에 헛숨을 내쉬었다.

“하아, 나 좀, 어떻게… 흐, 해 줘.”

류원은 해원을 욕조 안으로 밀어 넣고 수도꼭지 손잡이를 위로 들어 올렸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줄기가 해원을 고스란히 적셨다. 해원은 멍한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등이, 아니 정확하게는 나무가 간지러워서 미칠 거 같았다.

손을 뒤로 돌려 나무 밑동을 긁었다. 손톱자국이 붉게 날만큼 세게 긁어 대도 간지러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류원은 잠시 해원을 바라보다가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옷도 벗지 않고 수도꼭지 손잡이를 들어 올렸다. 몸을 채우는 열기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아무리 차가운 물을 맞아도 몸을 채우는 열기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몸이 더 달아올랐다.

짜증스럽게 달라붙은 옷가지들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류원은 한껏 발기해 위용을 자랑하는 제 성기를 한번 힐끗거리고 손에 쥐었다. 해원이 했던 것처럼 기둥을 붙잡고 쓸었다.

하지만 해원이 만져 줄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이 몸 안을 훑었다. 자극적이지도 강렬하지도 않았다. 그저 배출 욕구만 가득 차올라 밋밋하게 아랫배를 당길 뿐이었다.

류원이 허탈하게 웃으며 샤워 부스를 빠져나왔다. 욕조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가늘게 뜬 해원이 저를 바라봤다. 해원이 혀를 내어 입술을 요사스럽게 핥았다.

씨발.

류원이 욕조 속에 푹 가라앉은 해원의 멱살을 틀어쥐고 일으켜 세웠다. 물에 젖은 몸이 힘없이 딸려 올라왔다. 끓어오르는 성욕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가르고 허겁지겁 혀를 밀어 넣었다. 해원이 물에 젖어 무거워진 손을 목에 두르고 적극적으로 혀를 섞었다.

입안을 채우는 그의 혀가 농밀하게 혀 밑을 진득하게 문지르며 빠져나갔다. 미처 삼키지 못한 타액이 입가를 타고 흘렀다. 해원이 턱을 적신 타액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뜨거운 숨이, 체온이, 욕구가 해원의 이성을 좀먹었다. 등에서부터 시작된 간지러움이 이제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몸이 정말 이상했다. 제 생각처럼 제어되지 않았다. 지금도 흐물흐물 몸이 풀어졌다. 류원은 해원의 셔츠 단추를 풀고 흠뻑 젖은 셔츠를 벗겨 냈다.

“등이, 간, 흐읏, 간지러워.”

해원이 손톱을 세워 등을 긁었다. 류원은 해원의 몸을 돌려 양손은 벽을 짚게 했다. 하, 류원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해원의 나무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색을 잃은 상태였다.

이제는 옅다는 말로 표현되지 않았다. 손톱으로 긁어 새겨 놓은 붉은 줄이 짙게 보일 만큼 나무는 거의 색을 잃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류원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자신이 망설이는 사이 해원의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어쩌면 여기가 마지노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더 늦어지면 그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류원은 나무의 가지를 혀로 천천히 핥았다. 혀끝에 달라붙는 피부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나무의 짙고 묵직한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하아, 그만… 하윽.”

해원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거친 숨을 뱉어 냈다. 등을 핥는 느낌이 소름 끼치게 잔인했다. 온몸이 금방이라도 녹아서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몸을 비틀어 그의 입술을 피해 보려고 해도 그는 오히려 제 몸을 벽에 밀어붙여 고정하고 입술을 묻었다.

새된 숨소리가 터져 나와 욕실을 울렸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자극점을 넘어설 만큼 혀끝은 농밀하고 잔혹했다. 해원은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치고 몸을 뒤틀었다.

“움직이지 마.”

류원의 허벅지가 아릿하게 울렸다. 꽃이 나무를 원했다. 양귀비가 요사스럽게 꿈틀거렸다. 폐가 아플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기서 자신마저 이성을 잃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읏, 하지, 하지 마! 하, 싫어.”

까맣게 죽은 나무 밑동에 혀를 대자 해원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허리를 세게 잡아 누르고 혀를 움직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상태는 정말 심각했다.

불법 시술의 영향으로 피부는 우툴두툴하고 까만 물이 들어 있었다. 피부를 걷어 내면 새빨간 피가 아니라 새까만 피가 나올 것 같았다.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 당신 정말 미련했어.”

“놔주세요, 흣, 정말, 싫어… 이거 싫어.”

밑동을 샅샅이 훑어내린 혀가 마침내 떨어지자, 해원은 몸을 돌려 차가운 물 아래로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열이 따끈하게 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감정이 복받쳤다.

수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피스틸로 각성했던 순간부터 불법 시술을 받기 위해 차가운 수술대에 누웠던 순간까지 모든 게 한 장면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벌써 이렇게 울면 이따가는 어쩌려고 이래.”

“…죄송합니다. 제가 불법 시술을 받지 않았다면.”

류원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얼굴을 가린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눈물길이 길게 남은 눈가를 문지르며 시선을 마주했다. 젖은 눈이 류원을 바라봤다.

“우리는 서로 흠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사람이에요. 어쩌면 해원 씨가 멀쩡했다면 굉장히 억울했을 거야. 당신 없으면 잠도 못 자는 그런 얼간이를 운명의 상대로 만났으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 마.”

한바탕 욕실에서 울음을 쏟아 낸 해원을 씻겨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류원은 욕조에 걸터앉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기력이 쇠한 기분이었다. 샤워 가운을 걷어 몸에 걸치고 욕실 문을 열었다.

방안에는 짙은 나무 냄새가 그득했다. 창문까지 꽉꽉 닫혀 있어 냄새가 밖으로 전혀 새어 나가지 않고 머물렀다. 숨을 크게 마시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젖은 붕대를 풀어내고 손목을 쥐었다.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입 맞추었다.

류원은 시간을 확인하고 해원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갔다. 일단 해원의 등에 꽃이 피는지부터 빠르게 확인을 할 생각이었다.

류원은 해원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구멍을 매만졌다. 그런데 뒤는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본래 피스틸은 자궁이 있어 흥분하면 애액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뒤를 적시는 편이라고 했다. 그 양이 많지는 않아도 충분히 윤활제 역할을 한다고 했는데 해원의 뒤는 아예 말라 있었다.

자궁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을 준호에게 들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어느 정도의 삽입은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꽉 다 물린 구멍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면서 해원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기분이, 이상, 후, 해요.”

“내 몸 어디라도 좋으니까 만지고 느껴 봐요.”

“꽃, 꽃이요. 꽃 만지고 싶어요.”

해원은 숨을 삼키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빗장뼈를 핥던 류원이 고개를 들고 해원을 내려다봤다. 그는 눈꺼풀을 반쯤 내리고 저를 올려다봤다. 홍조가 잔뜩 올라 얼굴이 붉었다.

“입가 찢어졌어.”

손끝으로 찢어진 입가를 매만졌다. 제 성기를 입에 담으려다가 생긴 상처였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이 상처를 내일 많은 사람이 보게 될 테지… 생각이 거기까지 뻗치자 눈가가 뜨거워졌다.

류원은 해원의 허리와 머리를 감싸 자세를 반전시켰다. 아까처럼 해원이 류원의 배 위에 올라앉았다. 해원은 류원의 다리 사이에 엎드려 허벅지에 짙게 새겨진 꽃을 핥기 시작했다.

류원은 나른한 숨을 뱉어 내며 머리카락 속에 손을 집어넣어 두피를 문질렀다. 타액이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미끈하게 피부를 간지럽히며 떨어지는 느낌에 류원은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일방적으로 강하게 몰아붙여 삽입하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일렁였다. 꽃잎 하나하나에 혀를 대고 핥아 올리는 감각이 마치 제 뇌를 직접 핥는 것 같았다. 뇌수가 끓어 넘치는 뇌를 농밀하게 핥는 것으로도 모자라 타액으로 흠뻑 적시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꽃인 줄 알아요?”

“모르, 모르겠어요.”

“위로와 위안이라는 꽃말을 가진 양귀비예요, 이 꽃이 해원씨 등에 새겨질 겁니다.”

해원은 꽃을 핥으면서 이 꽃이 제발 제 등에 새겨지기를 간절히 빌었다. 앙상한 나무에 새겨진 양귀비 한 송이…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약간 가라앉았던 성욕이 들끓기 시작했다. 손끝을 타고 흐르는 모든 감각이 장기를 들쑤시고 성감을 끌어올렸다.

하루가 긴 꿈을 꾸는 것처럼 길고 길었다. 해원이 손을 뻗어 샤워 가운을 걷어 올리고 류원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흡-, 짧은 신음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해원은 고개를 들어 성기를 입에 담고 빨기 시작했다.

기교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입에 넣고 빨아대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류원은 착실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수많은 음파와 진동 속에서 제 주파수를 찾아가는 것처럼 문해원을 찾아가고 있었다.

미끈한 쿠퍼액이 새어 나와 해원의 입안을 적셨다. 입을 벌릴 때마다 끈적한 액체가 입술에 달라붙어 늘어졌다.

류원은 해원의 턱을 붙잡고 상체를 들었다. 입가에 묻어 있는 액체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야해 빠져서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입술을 머금었다.

그 순간, 귓가에서 스타트 건이 타앙-, 쏘아진 기분이었다. 그걸 신호로 두 사람의 혀가 맹렬하게 뒤엉켰다. 끈적하고 습한 숨이 서로에게 쏟아지고 육체를 매만지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원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류원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해원의 고간에 정확하게 끼워진 성기가 은밀한 곳에서 마찰하고 있었다.

엉덩이 사이에 끼워진 성기에 질량감이 더해질수록 해원이 허리를 뒤흔드는 속도 역시 빨라졌다. 류원은 아예 팔로 눈을 가리고 이를 악물었다. 금방이라도 사정을 할 것처럼 부푼 성기가 해원의 구멍을 스쳤다. 지금 당장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쑤셔 넣고도 남을 테지만 류원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아, 해원, 문해원……!”

류원이 다급하게 해원을 불러보지만, 해원은 두 손을 류원의 배 위에 올리고 허리를 움직일 뿐이었다. 마침내, 류원의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왔다. 정액이 고간을 흠뻑 적셨다.

눈가를 문지르고 고르지 못한 숨을 억지로 삼켰다.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자신은 지독한 무성욕자였다.

요 몇 년간은 아예 성욕이 생기지 않아 마스터베이션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날카로운 성욕이 제 속을 들쑤시고 머릿속을 난도질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해원은 거친 숨을 내쉬며 그의 복부를 손으로 짚고 몸을 약간 띄웠다. 류원이 사정감에 늘어진 정신을 추스를 새도 없이 아래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압박감에 낮게 신음했다.

“윽!”

해원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엉덩이를 들어 눅눅하게 젖은 구멍에 성기를 맞추고 천천히 허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류원이 얼른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어 움직임을 막았다.

“문해원 정신 차려!”

“…흐아, 아, 치워, 저리 비켜.”

고개를 흔들며 류원의 손을 밀어냈다. 류원은 허벅지를 감싼 손에 힘을 주고 몸을 뒤로 밀었다. 시근덕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해원의 몸을 뒤집어 엎드리게 했다.

해원이 침대에 뺨을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는 정액이 흩뿌려져 엉망진창이었다.

“빨리, 흐, 어떻게 좀, 해 줘.”

해원이 엉덩이를 흔들며 재촉했다. 류원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구멍 위를 더듬었다. 정액 때문인지 아니면 안에서 애액이 흘러나왔는지 아까보다는 한결 상태가 괜찮았다.

손가락으로 회음부를 문질렀다가 구멍 위를 스치고 엉덩이 골까지 훑었다. 손가락이 주름 위에 닿을 때마다 구멍이 움찔거렸다.

손가락 하나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단박에 해원의 엉덩이 근육이 꽉 조여들며 자세가 무너졌다. 내부의 온도가 상당히 높았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물기가 손끝에 달라붙었다.

“흐읏, 아, 아파.”

“고작 손가락 하나에도 아파하면서 내 걸 넣으려고 했어?”

해원은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리고 인상을 와그작 구겼다. 손가락 하나가 또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살이 벌어지는 느낌이 끔찍했다. 해원은 베갯잇을 입에 물고 고통을 삼켰다. 아래를 들쑤시는 이물감이 불쾌하고 징그러웠다.

수치스러움과 고통스러움에 높게 쳐든 엉덩이가 덜덜 떨렸다. 손가락이 몸 안쪽 깊은 곳까지 쑤시고 들어왔다. 아우, 앓는 소리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몸 안쪽을 압박하는 느낌에 숨 쉬는 게 버거웠다. 류원의 손가락이 내벽을 더듬고 안쪽을 깊게 찔러 올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 안쪽 어느 부분을 툭 건드렸다. 흡-, 숨이 멈추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숨이 막혔다. 해원의 반응을 살피며 다시 한번 같은 자리를 문지르자, 해원이 비명을 질렀다.

“아윽!! 아, 싫어, 하윽--!!”

“여기가 좋아?”

해원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도리질 쳤다. 같은 곳을 문지를 때마다 눈앞이 빙빙 돌고, 안쪽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손가락이 계속 같은 자리를 문지르고 들쑤셨다.

그러는 사이 해원의 몸이 천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속을 채우는 성욕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희미한 나무가 제 꽃을 품어 줬으면…….

류원은 해원의 엉덩이를 양쪽으로 벌려 구멍에 제 성기를 맞췄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천천히 허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이완된 구멍 속으로 귀두가 빨려 들었다.

“아……!”

류원은 저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내질렀다. 삽입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해원의 등에 이마를 댔다. 심장이 아플 만큼 빠듯하게 조였다. 엉덩이를 위로 밀어 올리며 성기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아, 하윽, 자, 잠깐! 아파, 흐읏.”

해원이 매트리스를 주먹으로 퍽퍽 두드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몸이 두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안쪽으로 밀려드는 끔찍한 압박감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입을 벌리고 숨을 할딱였다. 구멍을 벌리고 안으로 쑤셔 박히는 감각이 뇌를 날카롭게 긁었다.

귀두가 장기에 닿을 것만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가 몸이 망가질 것 같았다. 해원의 얼굴이 눈물로 흠뻑 젖어 들어서야 간신히 움직임이 멈추었다.

“내 말 들려요?”

“아, 몰라. 흐, 아파.”

“…후, 이제 정말 꽃이 피는지 확인할 겁니다.”

류원은 고개를 숙여 나무의 밑동에 입 맞췄다. 붕대를 풀어 놓아 파랗게 멍이 든 손목이 눈에 보였다. 류원은 몸에 걸치고 있는 샤워 가운에서 끈을 당겨 해원의 오른쪽 손목에 감았다. 손바닥을 감싸도록 단단히 동여매고 매듭을 지었다.

길게 성기를 뽑아냈다가 단숨에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해원은 긴 울음을 토해 냈다. 생경하고 끔찍한 느낌에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두어 번 허리를 움직여 매끄럽게 길을 다진 그가 이번에는 각도를 달리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윽! 아읏, 아, 아! 그만……!”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아도 신음이 새어 나왔다. 포인트를 꽉 눌렀다가 안쪽으로 미끄러져 깊숙이 파고드는 느낌에 비명을 내질렀다. 해원은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허리의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해원의 몸도 빠르게 밀려 올라갔다.

쿵쿵, 어느새 침대 끝까지 밀려 올라가 침대 헤드 보드에 머리를 찧었다. 류원은 베개를 집어 머리 사이에 끼워 넣고 몰아붙였다.

해원은 울음 섞인 신음을 내질렀다. 굵고 단단한 몽둥이 같은 게 안쪽을 들쑤시고 내벽을 두드렸다. 손을 들어 제 뱃가죽을 더듬었다. 배꼽 위까지 성기가 닿는 기분이었다. 안쪽까지 밀려드는 감각을 가늠해 보지만 말도 안 되는 깊이에 손을 침대로 떨구었다.

류원은 입술을 깨물고 허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깊숙이 파고들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굵은 땀방울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침대 헤드 보드에 머리가 닿아 몰아붙여지는 육체가 눈앞을 어지럽혔다. 남들보다 월등하게 큰 편인 성기가 그의 몸속에 꼭 들어맞았다. 주파수만 맞는 게 아니라 몸도 맞는 모양이었다.

해원의 등에 꽃이 피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이대로 사정하기가 아쉬워서 자꾸만 속도가 떨어졌다. 느릿하게 허리를 쳐올렸다가 다시 스퍼트를 올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내벽을 깊게 찔러 올렸다가 단숨에 뽑아냈다. 채 다물어지지 않은 구멍으로 제 성기를 단숨에 박아 넣고 퍽퍽 쳐올렸다.

욕심 많은 구멍이 자꾸 물을 뱉어 내라고 조르지만 류원은 느릿느릿하게 안쪽을 들쑤시며 해원의 성기를 감싸 쥐었다. 이미 쿠퍼액이 질질 흘러 질척한 성기를 쥐고 빠르게 흔들었다. 해원이 머리를 감싸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아윽, 하, 강류, 흣, 류원.”

“후우, 앞으로 이름 불러요. 듣기 좋네.”

해원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짙은 사정감에 몸을 굳혔다. 진한 액체가 손가락 사이사이에 흩뿌려졌다.

탈력감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의 육체를 바로 잡아 단숨에 속도를 올렸다. 흐트러진 호흡과 신음이 뒤엉켰다.

“흣, 아, 후, 흣! 으윽! 처, 천천히!”

퍽퍽,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안을 파고드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해원의 몸이 엉망으로 무너졌다.

류원은 해원의 엉덩이를 강제로 붙들어 세우고 성기를 박아 넣었다. 사정이 임박해져 오고 있었다. 눈알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형언할 수 없는 짙은 사정감이 속을 데웠다.

그의 안쪽을 짓이기듯 문지르며 몸속 깊은 곳에 성기를 처박았다. 마침내 그의 몸속으로 정액이 쏟아졌다. 정액과 함께 자신이 품은 독까지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방 안에는 류원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해원은 불에 달구어진 쇠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굴러가는 듯한 느낌에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몸을 굳혔다. 입을 빠끔거리며 숨을 쉬려고 해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뜨거운 열기에 잠식되어 눈앞이 흐리고 어지러웠다.

“문해원, 문해원!!”

류원이 다급하게 성기를 뽑아내고 해원의 몸을 흔들었다.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손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막힌 숨이 터지지 않았다. 더욱더 숨이 막히고 등이 불에 달구어지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문해원 정신 놓지 마.”

해원의 눈동자가 뒤로 뒤집히며 꺽꺽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등을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구역질이 났다. 류원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해원의 몸을 흔들고, 정신을 잃지 않도록 뺨을 두드렸다.

“허억--!”

한참 만에 해원의 숨이 터졌다. 나무의 밑동이 아릿하게 아픔을 토해 냈다.

“…꽃이, 꽃이.”

류원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앞에 황홀할 정도의 절경이 펼쳐졌다.

해원은 단숨에 폐까지 차오르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류원의 눈빛이 검게 죽어 있었다. 해원은 류원의 표정으로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 꽃이 피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새겨지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돌연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은 마당에 결과가 좋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을 베개에 묻고 작게 흐느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작은 희망이 있었다. 아직 나무가 생명을 머금었을 거라고. 그런데 그 희망마저 물거품이 되어 흩어졌다.

갑자기 류원이 허리를 쥐고 성기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툴두툴한 힘줄이 내벽을 가열하게 긁으며 안쪽으로 박혀 들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해원은 숨도 쉬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젖혔다. 류원의 손이 해원의 목을 감싸 쥐고 뒤로 당겼다. 뺨에 입술을 붙인 류원이 낮게 속삭였다.

“내 피스틸.”

등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순식간에 꽃봉오리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흐릿한 나뭇가지에 피는 꽃의 색이 점점 진해질수록 제 허벅지 역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꽃이 순식간에 만개했다.

흐드러지게 꽃이 피는 것을 본 순간, 류원의 이성은 육체에 잠식당했다.

해원의 몸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성기가 안쪽 깊은 곳까지 단숨에 파고들어 내벽을 짓이겼다. 해원은 헐떡이는 숨을 내뱉으며 울음을 토해 냈다. 머리가 지잉, 울렸다.

“뜨겁고, 황홀해.”

류원은 연신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해원을 몰아붙였다. 성기를 길게 빼냈다가 안쪽으로 퍽 처박았다. 울퉁불퉁한 성기가 내벽을 주욱 긁었다. 해원은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나무의 색보다 진하게 꽃이 피었어.”

“하읏, 아, 그, 그만, 하윽! 읏!”

“그쪽 나무에 내 꽃이 피었다고, 나무가 죽지 않았어.”

* * *

“왜 이러는 건데.”

“강류원 가만히 좀 있어!!”

“내가 지금 가만히 있게 생겼어? 분명히 꽃 필 때까지는 멀쩡했는데 갑자기 왜 이러냐고.”

“정신 사나우니까 제발 가만히 좀 앉아 있어.”

준호는 심각한 얼굴로 해원의 상태를 살폈다. 아침 일찍 류원에게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에 아침 식사도 하지 못하고 연구소로 달려 나왔다.

“그러니까, 네 말은 관계하고 나서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 보니까 이 상태라는 거야?”

“후, 그래. 꽃 피는 것까지 분명히 확인했어. 그러고 나서, 그러니까… 하, 모르겠어. 언제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이 안 나.”

류원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관계를 하고 난 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히 꽃이 피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누군가 기억을 지운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알람 소리에 다시 눈을 떴을 때 끔찍한 상황과 마주했다.

“스케줄 있다며? 넌 일단 촬영장으로 가. 해원 씨 상태 보고 내가 전화할게.”

“내가 지금 촬영장 가게 생겼어? 문해원 왜 이러는 건데 이유가 뭔데!!”

“나도 몰라, 인마! 뭐가 문젠지 검사를 해 봐야지 알지!!”

준호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진료실 침대를 차지하고 누운 해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얼굴부터 발끝까지 피부가 까맣게 죽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베놈스테먼이 각성을 겪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그런데 피스틸인 해원이 각성 증상을 겪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본딩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준호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해원을 살폈다.

“이 사람 잘못되면 연구소 날려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알겠으니까, 좀 나가 있어.”

준호는 짜증스럽게 일갈하고 기초 검사 결과가 적힌 차트를 집어 들었다. 호흡, 맥박 모든 게 정상이었지만 체온만 이상하게 비정상이었다. 직장 체온은 월등히 높은데 외부 체온은 지극히 낮았다. 말도 안 되는 수치를 바라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류원은 침대로 다가가 해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 새벽 내내 뜨겁게 달아올라 사람을 미치게 한 그 체온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혹시 꿈을 꾼 게 아닐까. 초조한 얼굴로 해원의 몸을 뒤집어 상의를 위로 걷어 올렸다. 색이 옅은 나무에 양귀비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런데…….

“이, 이게 뭐야.”

류원의 눈동자가 빠르게 떨렸다. 분명 짙은 주홍색이던 양귀비가 어느새 새까맣게 물들어 해원의 나무를 차지하고 있었다.

“꼬, 꽃 색깔이 이상해.”

“…알아.”

“왜, 왜 이래. 이, 이게 뭐냐고.”

“강류원 너 이러는 거 해원 씨한테 아무런 도움 안 돼. 네 기분 모르는 거 아니니까 제발 진정하고 가만있어.”

입술을 비집고 낮은 숨이 새어 나왔다. 준호가 해원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해 주려고 손을 뻗자 류원이 강하게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리고 손수 옷을 정리해 몸을 똑바로 눕혔다. 떨리는 눈동자로 곤히 잠들어 있는 해원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해 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무력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화내고, 소리치고, 준호를 닦달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마저도 해원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어금니를 사리물고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빠져나갔다. 작게 해원의 이름을 불렀다.

“문해원, 해원아, 해원 씨. 내 말 들리면 눈 좀 떠 봐요.”

아무리 불러도 죽은 사람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게 숨만 내쉬는 해원 때문에 속이 타들어 갔다.

“너 빨리 안 나가?”

“금방 다시 올게요.”

류원은 허리를 숙여 해원의 이마에 짧게 입 맞추었다. 짙고 묵직하게 제 코끝을 간지럽히던 나무 냄새는 향을 잃고 힘없이 나부꼈다.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침대를 퍽퍽 찍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문해원이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운 신음을 뱉어 냈다. 뭐라도 기억이 난다면 해원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준희가 데리러 온다고 기다리래.”

“필요 없어, 나 혼자 갈 수 있어.”

짧게 일갈하고 몸을 돌려 병실을 빠져나왔다. 연구소 복도를 터벅터벅 걸었다. 발에 무거운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걸음이 무거웠다.

“류원아.”

준호가 류원의 손목을 붙잡아 돌려세우고 시선을 마주했다. 류원은 불쾌한 표정으로 준호의 손을 떨어뜨리고 벽에 기대어 섰다.

“왜.”

“나 하나만 묻자.”

“빨리 말해.”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다. 해원 씨, 정화가 필요하다면 해도 되냐?”

“뭐? 뭘 해?”

류원의 눈빛이 한순간에 흉흉하게 변했다.

준호가 말하는 ‘정화’는 안티스테먼과의 관계를 말했다. 독을 해독해 베놈스테먼과의 본딩을 끊어 내는 그런 행위였다.

“문해원이 겪고 있는 상황이 뭔지 정말 모르겠어? 너 각성할 때 어땠어. 지금 문해원이랑 똑같지 않았어?”

류원은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바로 세웠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는데…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벽에 등을 대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독을 받아들이지 못해 피를 토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기억이, 그 끔찍한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경과를 지켜봐야겠지만 문해원이 계속 독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때는 정화 프로그램 진행해야 해.”

“…씨발, 원래 이런 거야? 본딩이 원래 이렇게 지랄 맞은 거였냐고!!”

“건강상의 문제겠지. 문해원 정상 아니야. 불법 시술만 안 했어도 이런 일 없는데.”

준호의 말에 한동안 류원은 아무런 말없이 바닥을 쳐다봤다. 빌어먹을 불법 시술이 모든 문제였다. 그것이 해원의 몸을 망치고 그의 목숨까지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만 아니면 난 오히려 그때의 그 미련한 선택이 고마워. 문해원 스스로가 온전하지 않으니까 온전하지 않은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야.”

류원의 말에 준호는 고개를 돌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해원의 불법 시술을 그저 흠이 있는 정도로 치부했던 지난날의 저를 원망했다. 이건 흠이 아니라 아주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베놈스테먼의 본딩 행위조차 버티지 못하는 피스틸이라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잘 들어. 만약… 각혈을 시작하면 그때는 방법이 없어. 무조건 정화 프로그램 해야 해.”

* * *

류원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하늘만 바라봤다. 날씨가 빌어먹게도 좋았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촬영장의 분주함도 소란함도 모두 짜증스러웠다. 손에 쥔 대본을 구겨 바닥에 던지고 고개를 젖혔다. 청명한 하늘도 꼴 보기 싫어 눈을 감아 버렸다.

“형, 팀장님 전화…….”

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원이 몸을 일으키고 전화기를 낚아채 귀로 가져갔다.

“나야, 말해.”

- 형이 해원 씨 격리병동으로 옮긴대.

“격리병동? 왜 갑자기?”

- 나도 잘 몰라. 촬영은 하고 있어?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은 거 꾹꾹 눌러 담으면서 촬영하고 있으니까 형은 거기서 문해원이나 잘 살펴.”

- 지랄병 도지지 말고 얌전히 있어. 다시 전화할게.

끊어진 전화기를 손에 움켜쥐고 류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화 프로그램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해원의 상태가 심각해지는 것 같아서 자꾸 마음이 쓰였다.

정말 그게 최후의 방법이라면 어쩔 수 없이 허락은 하겠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부디, 문해원이 제 독을 그대로 삼켜 주길 간절히 바랐다.

“오빠 옷 갈아입으셔야 해요.”

류원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재영의 손에서 옷을 받아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나오자 재영이 가까이 다가와 단추를 채우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오빠!”

“……?”

“목에 상처 났는데요.”

재영이 거울을 가지고 와 류원의 앞에 대어 주었다. 류원이 고개를 약간 돌려 상처를 확인했다. 목에는 붉은 자국과 함께 피가 약간 맺혀 굳어 있었다. 손끝으로 상처를 매만졌다.

어젯밤 열락에 빠진 해원이 흥분에 겨워 목덜미를 물어뜯은 모양이었다. 피식, 작게 웃은 류원이 딱지가 앉은 자리를 손톱으로 세게 긁었다.

“오빠 피 나요!”

재영이 소스라치게 놀라 류원의 손을 억지로 떼어 냈다. 해원이 흥분에 겨워 남겨 놓은 상처라고 생각하니 눈가가 뜨거워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속을 빠듯하게 채우는 흥분감이 단숨에 제 몸을 집어삼켰다.

무성욕자로 믿고 살아온 게 무색할 만큼 욕구가 위험하게 넘실거렸다. 상처를 매만지자, 손톱 아래로 피가 스며들어 붉게 변했다.

해원의 등에 양귀비가 피던 순간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벅차오르고 황홀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금방이라도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역행해 제 입 밖으로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왜 스테먼이 피스틸에 미치는지… 그 악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재영이 서둘러 휴지로 피를 닦아 내고 그 위에 반투명한 밴드를 붙였다. 옷깃을 여며 정리해 주고는 타이를 둘렀다. 모양을 잡아 정리해 주고 뒤로 물러났다.

류원은 밴드 위를 상처를 계속 손으로 매만졌다. 여기에 꼭 문해원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아 불안감이 조금은 가셨다. 다시 해원의 등에 제 꽃을 새기고 싶었다. 나무가 꽃을 머금는 그 경이로운 광경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문해원은 제 독과 꽃을 품은 유일한 피스틸이었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방금까지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류원이 컷-, 소리가 나자마자 얼굴을 굳히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던졌다. 빠른 걸음으로 앵글 밖으로 나온 그가 재킷을 채현에게 넘기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차 키.”

“…형, 어디 가시게요.”

“차 키 내놔.”

“세 시간 후에 다시 촬영인데.”

“차 키 달라는 말 안 들려!!”

채현이 주머니에서 차 키와 휴대폰을 꺼내 내밀자, 손에서 낚아채듯 빼앗아 들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잔뜩 조여 놓은 타이를 느슨하게 풀고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연락을 주겠다던 준희도, 준호도 그 누구에게도 연락이 없었다. 숨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문해원이 잘 있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어서 짜증이 치밀었다.

류원은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채우고 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루한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지고 인내심이 거의 바닥이 날 때쯤에 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여보세.

“왜 이렇게 전활 안 받아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

- 촬영 끝났어?

“어디야, 문해원은 어쩌고 있어.”

- 그게 말이야. 아니다, 그 전에 너랑 문해원이 주파수가 일치한다는 말, 사실이야?

류원은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세게 밟았다. 촬영 장소였던 법원을 빠져나와 도로로 진입했다. 퇴근 시간이 지난 도로는 한산했다.

“내 말에 대답부터 해, 문해원이 어쩌고 있느냐고 묻고 있잖아!”

- 너 왜 이렇게 흥분하는 건데. 흥분 가라앉히고 말해.

“형 나 진짜 미치겠다고 그 사람이 걱정돼서 미치겠으니까 어쩌고 있는지부터 말해. 제발!”

류원은 답답함에 운전대를 세게 쳐올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연기를 그만두고 싶단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워낙 어릴 때부터 시작한 연기라 평생의 직업으로 여기며 지금껏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힘들어 죽겠는데 카메라 앞에서 가증스럽게 웃는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이게 뭐라고, 도대체 이게 뭐라고 제 마음마저 저버리면서 이렇게 해야 하나 회의감이 들었다.

- 해원 씨 의식은 돌아왔어. 근데…….

* * *

계기판의 속도계가 빠르게 치솟았다. 류원은 운전대를 세게 쥐고 아슬아슬하게 차 사이를 끼어들었다. 뒤차가 경적을 울려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과속 단속 카메라도 무시한 채 도로를 내달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문해원의 상태를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여유로움이 조금도 없었다.

신호에 걸린 류원이 기어를 중립으로 바꾸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 해원 씨 의식은 돌아왔어. 근데… 각혈, 시작했다.

각혈이라는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게 얼마나 두렵고 끔찍한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새빨갛고 덩어리진 피가 손바닥을 가득 채우면 알 수 없는 공포심이 온몸을 뒤덮어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다.

아무리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도 입에서 쏟아지는 피를 보면 절대 차분하게 대응할 수가 없다. 어떤 얼굴로 상황을 마주하고 있을지, 겁을 먹고 울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각혈을 시작했다면 정화 프로그램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인데, 그 말은 자신의 꽃을 품은 문해원이 안티스테먼과 육체적 결합을 해야 한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류원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끼익-!

억대의 슈퍼카를 지상에 그것도 이중 주차를 한 류원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목 끝까지 채워진 단추를 두어 개 풀어내고 연구소 로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류원아.”

로비 한쪽 구석에 마련된 흡연구역에서 의사 가운을 입은 준호가 담배를 입에 문 채 손을 흔들었다. 류원은 작은 횡단보도를 건너 준호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된 거야. 문해원 각혈한다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해. 피스틸은 나무와 자궁이 이어지는데 해원 씨 같은 경우 불법 시술을 하면서 그쪽까지 손을 댄 모양이야.”

“…….”

“만약 해원 씨가 시술을 받은 뒤에 스테먼과 관계했다면 정액 반응이 남아 있어 검사 결과로 나왔을 텐데.”

“그래서 결론이 뭐야!!”

“쉽게 말해서 다른 장기로 독이 흡수되지 못하고 자궁에 다량의 독이 고여 있다고 보면 돼.”

“…고여 있다고?”

류원이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말뜻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독이 고여 있다면 지금 위험하다는 게 아닌가. 류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준호는 대답 대신 류원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딱-!

류원이 이마를 감싸고 인상을 찌푸렸다.

“아! 뭐 하는 거야.”

“넌 좀 맞아야 해.”

“왜?”

“미친놈아, 사람이 기절했는데도 계속 관계를 이어가면 어쩌자는 거야. 거기에 독은 좀 들이부었어? 아주 신났지 어! 무성욕자라서 성욕이 없다며? 근데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류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준호의 핀잔을 듣자 기억이 순식간에 온전해졌다. 눈앞에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제 손에 흔들리던 문해원이, 귓가에는 문해원의 달뜬 신음이 들렸다. 생각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지는 기분이었다.

준호의 손에서 담뱃갑을 빼앗듯 낚아채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말도 안 돼, 초조하게 담배 필터를 짓씹었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이 기억이 정말인지 아니면 상상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펼쳤다.

“일단 그건 됐고. 그래서 어쩔 건데.”

“…임시방편으로 각혈을 막아 주는 약 처방을 했는데. 그게 얼마나 버텨 줄진 나도 몰라.”

“버티지 못하면 그때는, 그때는 어떡해?”

“…다른 방법이 있는지 미국 연구소에 자문해 놓은 상태야. 만약에 딱히 방법이 없으면 진짜로 정화 프로그램 해야 할 것 같다.”

준호는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정화 프로그램을 하지 않는 선에서 일이 마무리되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류원을 설득해서라도 독을 정화하는 게 나았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류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두드렸다.

“걱정 하지…….”

“…그럼 그렇게 해.”

“류원아.”

“그렇게 해서 살릴 수만 있다면… 해 줘.”

절대 안 된다고 불같이 화를 낼 줄 알았는데 류원은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호는 손을 뻗어 류원의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아픈가. 희미한 미열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아주 지극히 정상의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정화 프로그램은 최악의 경우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약이든 시술이든 뭐든 다 해 봐. 그 후에도 차도가 없다면 그때… 그때 시도해 줘. 그리고 정화 프로그램이 결정되면 나 들여보내 줘.”

“…뭐?! 참관하겠다는 거야?”

류원은 담배를 길게 빨았다. 폐 속까지 연기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에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긴 한숨과 함께 뿌연 연기가 흘러나왔다. 불씨가 살아 있는 그대로 물이 약간 담긴 종이컵에 꽁초를 집어 던졌다. 치익-, 소리와 함께 약간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차피 형이 할 거잖아.”

* * *

해원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하얀 백지 같은 천장에 어젯밤 열락에 빠져 허덕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류원의 입술과 체온에 온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았던 그 밤은 강렬했다. 배가 욱신거리고 아래에는 흉기 같은 성기가 아직도 드나드는 것처럼 지독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제 팔뚝과 길게 이어진 링거 병을 한번 힐끗거리고 피식 웃었다. 허탈함이 느껴졌다. 불법 시술을 받음으로써 잃은 게 너무 많았다.

시술을 받고 나면 피스틸이 아니라 노멀이 된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돈과 건강을 갖다 바쳤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웠을 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수술이 끝나면 노멀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의사는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수술이 아주 잘 끝났다고 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주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해 주사를 맞고 처방해 준 약을 먹었다. 수많은 약물이 제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어떤 날은 약물의 부작용으로 피부가 뒤집히고 한쪽 팔에 마비가 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의사는 저를 안심시켰다. 노멀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그리고 몇 달 후, 다시 병원을 찾아갔을 때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피스틸을 상대로 불법 시술을 자행하던 원장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들려왔다. 노멀이 되지 못했다는 허탈감을 느낄 새도 없이 지독한 무력증과 두통이 찾아왔다. 불법 시술로 인해 건강은 건강대로, 돈은 돈대로 잃었다.

해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어느새 어둑해진 창밖을 바라봤다. 문득 강류원이 떠올랐다. 촬영장에 갔다고 했는데.

베개 밑에 넣어 둔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류원의 촬영 스케줄표를 띄우고 찬찬히 살폈다. 지금 시간은 류원의 촬영이 비는 시간이었다. 무사히 촬영을 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쓰러진 자신 때문에 많이 놀랐을 텐데…….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해원은 얼른 휴대폰을 베개 아래에 밀어 넣었다.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문 쪽에 시선을 두었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누군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해원은 숨을 죽이고 낯선 방문자가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아,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셔츠 차림의 류원이 복잡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원은 이불을 아래로 끌어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지 말아요, 누워 있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류원은 처참한 해원의 모습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차마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어 해원을 등지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얼굴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촬영은, 잘하시고 오셨어요?”

“…그럭저럭이요. 몸은 어때요?”

해원은 이불로 얼룩덜룩하게 독이 오른 몸을 가렸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괜찮습니다. 독이 아직 제대로 흡수되지 않아 피를 약간 토하긴 하는데 컨디션도 좋고 다 좋은 거 같아요.”

그는 약물로 각혈을 막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류원은 긴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문질렀다. 해원을 볼 낯이 없었다.

만약 자신이 일반 스테먼이었다면 이런 문제가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다. 본딩 과정이 없으므로 쉽게 꽃이 피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독을 품은 베놈스테먼이었다. 꽃을 새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독까지 함께 흘려 보내야 했다. 해원의 몸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강 배우님, 저 정말 괜찮습니다.”

“…….”

“정말 괜…….”

갑자기 류원이 해원의 몸을 감싼 이불을 세게 잡아당겼다. 단숨에 환자복 상의를 입지 않은 해원의 몸이 눈앞에 드러났다. 해원이 당황해 뒤늦게 손을 뻗어 이불을 붙잡아 보지만 강류원은 이불을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류원의 눈이 해원의 상체를 찬찬히 살폈다. 물고 빨린 자국과 함께 독이 올라 얼룩덜룩한 자국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아침에 봤을 때보다 얼룩덜룩한 자국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뭐가 괜찮은 건데. 이게 괜찮아? 도대체 뭐가 괜찮은 거냐고!!”

“강, 배우님.”

“차라리 나를 탓하라고 네가 베놈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안 됐을 거라고 욕이라도 퍼부어.”

손에 쥔 이불을 바닥에 던지고 숨을 삼켰다. 이렇게 화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바보처럼 자꾸만 괜찮다고 말하는 해원에게 화가 치밀었다. 해원은 잠시 류원을 바라보고 차분한 얼굴로 침대를 내려와 떨어진 이불을 주워 몸을 감쌌다.

“고개 들고 저 좀 보세요.”

류원은 머리를 감싸고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이렇게 괴로운데 당사자인 해원의 기분은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해원이 손을 뻗어 류원의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류원이 얼굴을 감싼 손을 천천히 내리고 복잡한 눈빛으로 해원을 바라봤다. 해원은 턱을 쥐고 있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입을 열었다.

“이런 본딩, 내가 불법 시술을 받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겁니다. 내가, 내 몸이 등신이라서 이렇게 된 건데 왜 강 배우님 탓을 해야 하는 겁니까. 왜요. 내가 받는 쪽이라서?”

“…….”

“그리고 미친놈처럼 박아 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요. 자제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주제에.”

해원이 짜증스럽게 턱을 쥔 손을 놓아 버리고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몸을 웅크렸다. 강류원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건 간에 이건 자신이 원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주파수가 일치하는 스테먼이 베놈스테먼인 것도, 그와의 관계를 감행한 것도 모두 제 운명이고 선택이었다. 강요와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강류원은 마치 자신이 죄인인 양 어쩔 줄 몰라 한다. 그 모습이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어차피 확인을 위해서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그리고 강류원은 다른 일반 스테먼과 관계를 하라며 오히려 등을 떠밀었다. 그걸 거부한 건 저였다. 그러니 그가 저에게 미안해 할 이유는 없었다.

해원은 크게 숨을 삼켰다. 가빠진 숨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갑자기 큰 목소리를 냈더니 속이 좋지 않았다. 해원은 울컥 치미는 토기를 애써 참아 내며 낮게 일갈했다.

“그만 나가세요.”

“…해원 씨 나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문해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던 해원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류원이 놀라 해원의 몸을 붙잡아 돌리자, 손바닥 가득 덩어리진 피를 토한 해원이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류원은 얼른 해원의 몸을 부축해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해원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렸다. 손가락 사이로 끈적한 피가 길게 늘어졌다. 류원은 곧바로 의료진 호출 버튼을 누르고 티슈를 뽑아 해원에게 내밀었다.

“우욱! 피가.”

“침착해요. 내 독이 몸에 흡수되지 못해서 그래요. 독을 삼켜야 해요. 침 삼키는 것처럼 계속 삼켜요. 토하면 안 돼요.”

해원은 류원이 시키는 대로 침을 삼켰다. 비릿한 피가 혀끝을 적셔 계속 토기가 치밀었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숙취에 시달리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감이 심했다.

“토, 할래요.”

“안 돼요. 계속 삼켜요.”

류원은 단호하게 말하고 물티슈를 뽑아 해원의 입가와 손에 묻은 피를 걷어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문이 열리고 준호가 뛰어 들어왔다.

“왜 이래.”

“…갑자기 피를 토했어.”

“해원 씨 피 토하면 안 좋아요. 역해도 계속 삼켜요.”

준호가 간호사에게 주사기를 넘겨받아 링거에 꽂아 넣었다. 금세 링거의 색이 붉게 물들며 약물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금방 진정될 겁니다. 조금만 참아요.”

약물이 어느 정도 흡수가 되자 해원은 힘없이 몸을 늘어뜨리고 침대에 누웠다. 류원이 새 이불을 가지고 와 해원의 몸을 감쌌다. 해원은 힘겹게 눈을 뜨고 있다가 고요하게 눈꺼풀을 내렸다.

“가능성이 있는 건 모두 다 한다고 했지.”

“…어, 약물이든 시술이든 상관없어.”

류원은 해원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대꾸했다.

“그럼 다시 본딩하자.”

그제야 눈동자가 움직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준호를 바라봤다.

“다시 본딩을 하자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해원 씨 상태 안 보여?”

준호는 주머니에서 둥글게 말린 종이 몇 장을 류원에게 내밀었다. 류원이 종이를 받아 펼쳤다. 종이에는 몇 장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사진에 대한 설명이 영어로 쓰여 있었다.

“미국이나 중국에서는 해원 씨 같은 케이스가 몇 번 있었어. 불법 시술을 한 피스틸이 베놈스테먼과 본딩한 케이스.”

“그래서 결론이 뭔데.”

류원은 아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준호를 바라봤다.

“근데 모든 피스틸이 본딩 직후 모두 사망했어.”

“뭐라고?!”

“진정하고 내 말 끝까지 들어. 네가 보기에 지금 해원 씨 상태가 죽을 것처럼 보여?”

류원은 고개를 돌려 해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요하게 두 눈을 감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죽음의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얼룩덜룩하게 독이 오른 자국만 없다면 평상시 해원의 얼굴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망한 피스틸과 해원 씨가 다른 점은 딱 하나야.”

“……?”

“주파수가 맞지 않는 베놈스테먼과 본딩한 피스틸, 주파수가 맞는 베놈스테먼과 본딩한 피스틸.”

준호의 손가락이 류원의 손에 든 종이를 한번 가리켰다가 다시 해원을 가리켰다. 류원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종이에 인쇄된 사진과 해원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종이를 구겨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각혈까지 하는 문해원에게 다시 독을 퍼붓는다고? 그러다가 죽어 버리면 그때는… 그때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머리를 쓸어 올리고 몸을 돌렸다.

“난 못해.”

“…지금 기댈 수 있는 건 주파수밖에 없어. 해원 씨 지금 살아 있잖아. 그것도 각혈을 한다는 거 빼고 모두 다 정상이야. 체온도, 혈압도, 심박수 다 지극히 정상이라고.”

“근데 피를 토하잖아. 이게 제일 나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준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류원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으로썬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냥… 지금 당장 정화 프로그램, 진행해.”

“야, 강류원.”

이를 악물고 말하는 류원을 보며 준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각오해 두라고 정화 프로그램을 누차 말했지만 사실 섣불리 정화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도 없었다.

본딩한 직후 베놈스테먼의 독점욕과 소유욕은 평소에 몇 배에 달했다. 지금 류원이 자제력을 잃고 흥분해서 날뛰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해원과 관련된 일이면 류원이 어떻게 변하는지 아는데 쉽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그게 낫겠어. 뭘 찾고 어쩌고 할 필요 없이 지금 당장 정화 프로그램 해 버려.”

류원이 담담한 목소리를 내 보지만, 볼품없이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네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문해원 등에 내 꽃이 새겨지는데 그거 용납할 수 있어?”

“…….”

“강류원, 너 몇 년 동안 잠 못 자서 빌빌대던 놈이야. 수면제, 신경안정제 그렇게 처먹어도 전혀 효과 못 봤어. 그런데 운명을 비웃던 네가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을 만나 잠을 자. 거기다 이 피스틸이랑 넌 본딩까지 했어. 그런 사람을 나랑 자게 둘 수 있다고? 진짜?”

류원은 어금니를 사리물고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준호의 말에 단 한마디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입으로는 정화 프로그램을 해도 된다고 했지만 속은 그게 아니었다.

사실 본딩을 하고 난 뒤 문해원에 대한 감정이 180도 변했다. 그저 잠을 자기 위한 수단이었던 그가 제 꽃을 품자 마치 제 사람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정말 일분일초 매 순간 숨이 막혔다.

해원이 눈을 뜨지 못할 때는 천국과 지옥을 빠르게 오가는 기분이었다. 제 소중한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기분까지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해서 문해원의 눈을 뜨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제 품에 가두고 싶었다.

그런 문해원의 등에 자신의 꽃이 아니라 타인의 꽃이 새겨진다고? 상상만으로도 벌써 눈가가 뜨거워지고 속에서 홧홧한 화가 치밀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저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있던 류원과 준호가 목소리에 빠르게 반응하며 침대로 가까이 다가왔다.

“해원 씨 너무 시끄러웠죠. 속은 어때요?”

준호가 체온계를 꺼내 체온부터 체크했다. 점심때까지만 해도 체온이 요동을 치더니 지금은 36.5도로 정상체온이었다. 정말 문해원은 몸에 독이 오른 것 빼고 아주 지극히 정상이었다. 준호가 침대에서 물러나자 류원이 침대로 달라붙었다.

“해원 씨.”

“강 배우님 촬영장으로 돌아가세요. 새벽 촬영 있으시잖아요.”

“…내가 지금 촬영!”

“수백 명의 촬영 스태프와 연기자들이 강 배우님의 개인사까지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해원은 베개 밑에서 휴대폰을 꺼내 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짧게 이어지고 곧 채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현아, 형인데. 영원 복합 연구소에 강 배우님 있으니까 모시고 가.”

- 형, 저 진짜 류원이 형 때문에 수명이 줄어요. 안 그래도 촬영장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에요.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통화를 마무리하고 휴대폰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해원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해원 씨 혹시.”

준호가 불안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지만 해원은 고개를 저었다.

“두 분 다 나가 주세요.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준호가 해원의 눈치를 살피며 류원의 등을 떠밀었다. 류원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문이 닫힐 때까지 해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해원이 몸을 웅크려 무릎을 감싸 안고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아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에 닿았다.

해원은 처음부터 잠이 들지 않았다. 피곤한 기분에 눈을 잠시 감았던 것뿐이었고 준호와 류원이 하는 말을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정화 프로그램. 그들이 말하는 정화 프로그램이 뭔지 정확히 잘 모르지만 류원이 싫어한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정화 프로그램을 하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기 때문이다.

해원은 두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준호가 세면대 위에 있는 거울을 일부러 종이로 가려 두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깊게 심호흡을 하고 거울을 가려 놓은 종이를 떼어 냈다.

“하…….”

입술을 비집고 낮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천히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졌다. 검은 자국이 얼굴에 집중되어 있었다. 몸만 얼룩덜룩하게 독이 오른줄 알았는데…….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끔찍했다. 손끝으로 검게 남은 자국을 문질렀다. 그런데 아무리 문질러도 얼룩덜룩한 자국이 없어지지 않았다.

이게, 이게……!

해원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울 속에 있는 제 얼굴은 괴물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속이 꽉 막혀 신음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해원은 꼼짝도 하지 않고 화장실에 얼굴을 감싼 채 주저앉아 있었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해원, 해원 씨!”

“오지 마!”

준호가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와 해원을 부축했다. 뻣뻣한 몸을 억지로 일으키고 다시 한번 거울 속에 있는 자신과 마주했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벌벌 떨렸다.

“해원 씨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보지 마세요. 저리 가세요.”

“많이 놀랐죠.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해요.”

해원은 준호의 손에 이끌려 병실 침대에 앉혀졌다. 그때까지도 그는 얼굴을 감싼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준호는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해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어요. 마음 굳게 먹어요.”

해원은 숨을 삼키며 물을 마셨다. 약간 찬 기운이 몸으로 스며들자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준호는 서랍에서 환자복 상의를 꺼내 해원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혹시 이것도… 제가 받은 그 시술 때문에 그런 건가요.”

“…안타깝게도요.”

“그럼 강 배우님은요. 강 배우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류원이는 아주 멀쩡해요.”

준호는 의자를 끌어다가 해원의 앞에 앉았다. 어쩐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당사자인 해원도 알아야 할 이야기였기 때문에 마음에 걸린다거나 불편한 건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해원은 꽤 오랜 시간 복잡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정화 프로그램이 정확하게 뭔지 알고 싶습니다.”

“…아까 우리가 하는 이야기 다 들은 거죠?”

해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화 프로그램을 류원이 왜 불편해하고 내키지 않아 하는지부터 알고 싶었다.

“내가 준 약 잘 챙겨 먹었어요?”

“아, 그게… 먹긴 먹었는데, 다 먹지는 않았습니다.”

“먹으라니까, 말 잘 듣게 생겨서는 왜 말을 안 들어요.”

“…먹고 나면 배도 아프고 속이 좀 불편했습니다.”

“비타민이 아니라 자궁에 기력을 돋아 주는 약이라 그랬을 거예요.”

어련히 알아서 잘 먹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약간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준호는 씁쓸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베놈과 본딩한 피스틸은 다른 스테먼과 관계할 수가 없어요. 만약 그걸 모른 채 관계를 한다면 관계한 피스틸과 스테먼은 중독사하고 맙니다.”

“…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인 관계가 정리되거나 원치 않는 관계를 하거나 뭐 기타 등등의 이유로 독을 정화하고 싶다면 안티스테먼과 정화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그럼 꽃은 지워지지 않지만, 몸에 남은 독은 정화할 수 있어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 것인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화 프로그램의 방식은 안티스테먼과 관계를 해서 정액으로 독을 정화해요. 정액에 의해서 꽃이 피니까요.”

준호는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한 장을 뽑아 해원에게 내밀었다. 해원이 손을 뻗어 명함을 받았다. 하얀 바탕에 까만색 글씨가 박힌 평범한 명함이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안티스테먼 이준호’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연구소는 안티스테먼이 아니면 설립할 수가 없어요.”

“…이 독을 정화하려면 제가 소장님과 관계해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준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하지 않고 정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법에 대해 세계 각국에서 연구가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딱히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아직도 미개한 방법으로 정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본딩을 다시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류원이한테도 말했다시피 불법 시술을 받은 피스틸이 베놈과 본딩을 했을 경우 모두 다 그 자리에서 사망했어요. 근데 해원 씨는 기절을 하고 피를 토했지만 멀쩡한 편이잖아요.”

“…….”

“그들과 해원 씨가 다른 이유가 뭘까 생각해봤는데 납득할 수 있는 건 주파수밖에 없어요.”

해원은 침을 꿀꺽 삼켰다. 류원과 처음 관계가 시작된 것도 주파수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고작 다섯 시간을 자던 강류원이 제 옆에 있으면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성격 역시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의학적으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일이, 믿기 힘든 일이 강류원과 자신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주파수라는 이름을 달고…….

해원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강류원 씨와 다시 본딩하겠습니다.”

“…해원 씨.”

“여기가 벼랑 끝이라면 뛰어내려야 하는 게 맞잖아요. 그리고 강류원씨가 제 운명이라면 그 사람이랑 다시 관계를 맺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써는 주파수를 맹신할 수밖에 없었다.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을 무슨 수로 이해를 시킨단 말인가. 그저 맹신할 수밖에.

“류원이한테는 내가 이야기해 볼게요.”

* * *

해원이 약 기운에 취해 곤히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스름이 걷히는 새벽이었다.

부스스한 눈으로 베개 밑으로 손을 넣어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다섯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해원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철제 침대의 헤드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봤다.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다시 강류원과 몸을 섞고 한 송이의 꽃을 더 얻고 나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는 어스름이 물러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지 못할지도… 입술을 비집고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벅저벅-

갑자기 밖에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고요한 새벽이라 소리가 더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 뚝 멈추었다. 낯선 방문자가 제 병실의 문을 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문을 빤히 바라봤지만 소리도, 움직임도 모두 다 멈춰 버렸다.

해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고 문 쪽으로 다가갔다. 걸을 때마다 구역감이 들었지만 참을 만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런데… 병실 앞 간이의자에 강류원이 앉아 있었다. 그는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저기…….”

“…안 잤어요?”

류원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새까만 눈동자에도 피곤함이 짙게 묻어났다.

“집에 가서 주무시지 않고 왜 여기 계십니까.”

류원이 손을 뻗어 해원의 뺨을 가만히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뺨에 전해졌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온기가 나쁘지 않았다.

“난 어차피 해원 씨가 없으면 잠을 못 자니까.”

“…….”

“가까이에 있고 싶어서 왔어요.”

“그럼 안으로 들어오시지 왜 밖에.”

“내가 못 잔다고 해원 씨 단잠까지 깨우면 안 되잖아요.”

해원은 안쓰러운 눈으로 류원을 바라봤다.

스턴트맨으로 일할 때 하루 정도 밤을 새우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그때마다 눈 밑에 물파스를 바르고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고군분투했었다. 그러면 그 다음 날은 무조건 시체처럼 쓰러져 잠만 잤다. 하루만 밤을 지새워도 괴롭고 힘든데 며칠씩 잠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기분은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들어가서 자요. 나 여기에 조금만 있다가 갈게요.”

부드럽게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온종일 혼곤했던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놓이니, 해원은 작게 웃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류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해원의 말에 류원이 옆으로 자리를 옮겨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해원의 손을 끌어당겼다.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류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기울여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준호 형한테 대충 이야기 들었어요.”

“…….”

해원은 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얼룩덜룩하게 독이 오른 얼굴을 류원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많이 놀랐죠?”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습니다.”

“…근데 난 그 얼굴, 좋아요. 내 독이니까, 꼭 내 것이라고 이름 써 놓은 거 같고… 기분이 그래.”

“…….”

류원은 작게 하품했다. 전처럼 짙지는 않지만 희미하게 풍기는 나무 냄새가 제 마음을 곤하게 만들었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분명 해원이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시선은 그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카메라 불이 꺼지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해원이 있을 법한 자리로 향했다. 없다는 걸 확인하고 혼자 지쳐 버렸다.

촬영이 모두 끝나고 천근만근인 몸을 이끌고 차에 올랐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피곤한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차 안에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잠을 자려고 노력했지만 잠이 오기는커녕 눈만 아프고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문해원이 있는 곳이 제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하루가 너무 길어서 힘드네.”

잠기운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류원이 중얼거렸다. 해원은 천천히 손을 들어 류원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날렸다. 곧 어깨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일정하게 내쉬는 숨소리에 잔뜩 긴장한 어깨를 축 늘어졌다.

“강류원 당신도 나한테 참 이상한 사람이야.”

비록 주파수로 얽힌 관계였지만 해원 역시 류원에게서 마음의 위안을 받고 있었다. 얼룩덜룩한 자국이 남아 있을 법한 자리를 손가락을 세워 긁었다. 내 것이라고 이름을 써 놓은 거 같다는 말이 뇌리에 깊게 새겨졌다.

해원은 류원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졸음이 밀려왔다. 고요한 복도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 * *

“속이 울렁거리거나 어지럽지 않아요?”

“…네.”

준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원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새벽까지만 해도 얼룩덜룩하게 독이 올랐던 얼굴이 지금은 한결 나아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차트를 펼쳐 해원의 상태를 소상히 기록했다. 나중에 연구 자료로 사용될지 모르니 모든 기록은 자세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했다.

“혹시 두통이나 무력증 같은 거 없어요?”

“…있어야 합니까?”

“아뇨, 없어야죠. 없어야 하는데 이게 신기하네.”

볼펜을 쥔 손을 빠르게 놀리면서도 계속 해원을 힐끗거렸다. 각혈을 해서 류원과 본딩을 하니 마니, 정화 프로그램을 하니 마니 난리를 쳤던 게 모두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문해원은 부드럽게 풀린 눈매로 침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류원이는 언제 온 거예요?”

“새벽 다섯 시쯤에요.”

준호는 해원이 누워 있어야 할 침대에 퍼질러 자는 류원을 한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환자인 해원은 소파에 앉아 준호에게 진료를 받고 있었고, 아주 꼴이 가관이었다.

마지막으로 해원의 체온을 재고 차트에 기록했다. 지극히 정상체온 36.3도, 차트를 덮어 옆구리에 끼워 넣은 준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류원이 촬영장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감독님께 다른 배우님하고 촬영 순서 변경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한 두 시간쯤은 더 주무실 수 있을 거 같은데.”

“운명의 상대가 동종 업계에 종사하니까 좋은 점이 많네요.”

준호가 유쾌하게 웃으며 진료실 스케줄을 확인했다. 얼굴에 오른 독이 호전되긴 했지만,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세수하면서 거울 봤어요?”

해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시선이 자연스럽게 거울로 향했다. 검은 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긴 하지만 그 색이 어제보단 진하지 않았다.

“독이 많이 호전되긴 했어요. 근데 이게 독을 삼키고 흡수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복부 초음파랑 피검사는 진행해 봐야 할 거 같아요.”

“…네.”

“음, 류원이 보내고 점심 먹고 내려오면 되겠네요. 한 시쯤 예약 잡아 놓을게요. 그리고 류원이한테 숙박료 청구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해원이 곤히 잠든 류원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아침을 시작하는 소란한 소리에 해원은 비몽사몽 하는 류원을 깨워 억지로 병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침대에 눕혀 놓고 기지개를 쭉 켜자, 환자복 상의를 꼭 쥔 류원의 손이 딸려 올라왔다. 커다란 손으로 옷자락을 꼭 움켜쥔 손이 애틋해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고집스럽게 쥐고 있는 손이 아이의 손처럼 안타깝고 애처로웠다.

“네, 그렇게 전할게요.”

준호가 손을 흔들며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해원은 살금살금 침대로 다가가 의자에 앉았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린 채 잠들어 있는 류원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해원의 손길이 간지러운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얼른 손을 떼고 침대에 팔을 대고 엎드렸다. 그러고는 평화롭게 곤히 잠든 얼굴을 바라봤다.

지잉, 환자복 상의에 넣어 둔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얼른 진동을 죽이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채현이었다.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해원은 휴대폰을 쥐고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 형 저 진짜 류원이 형 때문에 제 명에 못 죽을 거 같아요. 류원이 형 전화기 꺼져 있어요. 어떡해요?

“아 그래? 그럼 연구소로 가서 대기하고 있어 봐. 내가 연락해 볼게.”

- 형 빨리 나오세요. 저 진짜 피가 마르고 살이 말라요. 오늘은 어떤 병이 도져서 저를 볶아 댈지 벌써 눈앞이 캄캄해요.

채현을 달래 전화를 끊고 얼른 병실로 들어가 류원의 몸을 흔들었다. 류원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5분만.”

“촬영 순서까지 바꿔 가면서 시간 뺀 겁니다. 절대 늦으면 안 됩니다. 빨리 일어나세요.”

류원은 아예 베개 아래에 머리를 처박고 몸을 뒤척였다. 다시 한번 류원의 몸을 흔들었다. 갑자기 그가 몸을 반쯤 일으키고 해원의 손목을 붙잡아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던 해원이 류원의 몸 위로 쓰러졌다.

“아, 문해원 냄새.”

잠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몸을 끌어안고 류원이 귓가에 속삭였다. 귓가에 열이 몰렸다.

“가, 강 배우님, 일어나세요.”

“조금만 응?”

두 다리로 해원의 다리를 감고 팔로는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류원의 행동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해원은 품에 폭 안겨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렸다.

“어?”

류원은 품에 안긴 해원의 목에 코를 파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간지러운 숨결이 닿아 목이 간질거렸다.

“나무 냄새가 짙어졌네.”

“…그래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강 배우님만 제 나무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나무 냄새는 오직 강류원만이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강류원의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

나무 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확진을 받은 피스틸에게 나무 냄새가 난다는데 누가 그걸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뺨을 손가락으로 긁고 류원을 재촉했다.

“시간 없습니다. 빨리 일어나서 씻으세요. 채현이가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해원은 류원의 팔을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벌써 십 분이나 지나 버려서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류원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침대에 덩그러니 앉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잠기운이 묻어나는 눈으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 해원과 침대를 번갈아 바라보던 류원이 낯빛을 굳혔다.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

“…아침에 제가 부축해서 옮겨 놨는데. 너무 잘 주무셔서.”

“그럼 해원 씨는?”

“저는 저 소파에서…….”

“하, 깨우지 그랬어요.”

머리에 까치집을 짓고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허둥지둥 침대를 내려오는 류원의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서른세 살이나 먹은 배우 강류원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말이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너무 귀여웠다.

웃음을 참지 못하는 해원을 바라보며 류원이 눈을 뾰족하게 떴다. 해원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류원의 손에 세면도구를 들려 주었다.

“…얼른 씻고 나오세요.”

“폐를 끼쳤네요, 내가. 미안합니다.”

류원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해원의 앞에서는 꼭 기분이 느슨하게 풀려 버린다. 거울 속에 엉망인 모습으로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배우 생활을 해오면서 터득한 거라곤 짓밟히기 싫으면 먼저 짓밟으라는 거였다. 조금이라도 빈틈이 보이면 사람들은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저를 짓밟아 댔다. 이유 없이 비난하고 모함하고 힐난을 퍼부어 대는 게 얼마나 아프고 지독한지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 버렸다.

그래서 일부러 더 뾰족하고 날카롭게 굴었다. 가시를 바짝 세우고 있으면 아무도 접근하지 않았다. 나름의 생존본능이었다.

그런데 문해원을 만나고 난 뒤로는 그 생존본능을 점차 잃어 가고 있었다. 칫솔을 꺼내 입에 물고 엉망인 머리를 대충 쓸어 넘겼다. 머리만큼 마음도 엉망진창이었다.

주석페이지

주석을 읽으신 후, 해당하는 번호 혹은 단어를 누르면 그 페이지로 돌아갑니다.

1) 후시 : 촬영 후 따로 대사와 내레이션, 음향 효과 등을 녹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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