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초(毒草) : 아로새기다 2권
4. 감정의 전환점
류원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소파에 몸을 느긋하게 기댔다. 눈으로 상담실 내부를 훑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준호가 커피 잔을 들고 상담실 안으로 들어왔다. 류원의 앞에 커피 잔을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촬영 중간에 빠져나오셨을까?”
“어제 해원 씨 정밀 검사했잖아. 결과 알고 싶어.”
해원이 연구소로 온 지도 벌써 엿새가 흘렀다. 여러 가지 가설을 두고 가슴을 졸이며 해원을 살폈지만 그는 어이없게도 자연 치유로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얼룩덜룩하게 독이 올랐던 얼굴도 차츰 가라앉았다.
그리고 어제 해원은 종합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준호는 테이블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쓸어 모아 정리하면서 입을 열었다.
“본딩을 하고 난 직후에 실시한 피검사에서는 독 수치가 전혀 나오지 않았는데 지금은 독 수치가 나와. 그것도 굉장히 높은 수치로.”
“…그럼 독이 흡수됐다는 말이야?”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손에 쥐고 실없이 웃었다. 황당하지만 그중에 반가운 소식은 눈으로 확인하기는 힘들지만 빛바랜 나무의 색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 이참에 연구소 때려치우고 주파수 연구나 할까?”
“헛소리 좀 하지 마.”
준호는 해원이 처음 연구소에 왔을 때 진행했던 검사 결과지와 어제 진행한 검사 결과지를 류원에게 내밀었다. 류원은 손사래 치며 종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어차피 봐도 알지 못하는 숫자와 약자들만 가득할 게 뻔했다.
“나 진심인데, 너 개인 비서 안 필요하냐?”
주파수라는 게 이렇게 경이롭고 위대한 결과를 가져다줄지 몰랐기 때문에 연구 의욕이 샘솟았다. 이참에 연구소를 접어 버리고 류원을 따라다니며 주파수 연구를 해야 하나. 준호는 머리를 감싸 쥐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흠이 있는 스테먼과 피스틸,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게 신기함을 넘어서 괴상할 지경이었다.
해원은 각혈까지 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주 빠르게 회복 중이었다. 혹시 몰라서 각혈을 예방하는 주사는 계속 맞고 있지만, 이것도 인제 그만 맞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안심할 수 없으니까 한 나흘쯤 연구소에 있으면서 경과 지켜보자.”
“…나흘이나?”
“뭐야, 그 반응은?”
“아니야.”
준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불퉁한 표정을 짓는 류원을 모른 척하고 몸을 일으켰다. 요즘 연구소 내부에는 강류원과 문해원의 간질거리는 썸 타기가 살랑살랑 부는 봄바람처럼 곳곳으로 퍼지는 중이었다. 직원들은 아침마다 다정하게 머리를 기대고 병실 복도에서 발견되는 그들에게서 마치 봄 향기가 나는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촬영을 끝내고 새벽 두 시고 다섯 시고 시간 상관하지 않고 찾아오는 강류원과 류원을 기다리느라 새벽마다 쉴 새 없이 문을 여닫는 문해원의 애틋하고 간질거리는 썸 타기는 당직 서는 직원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강류원이 오지 않으면 직원들이 더 불안해 한다는 소리가 우스갯소리로 떠돌았다. 류원은 그런 소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하기만 했다.
“…형, 이건 만약인데, 진짜 만약이야.”
“응?”
“…문해원이랑 섹스해도 돼?”
푸학-!
텀블러를 입가로 가져가는 순간 훅 들어온 질문에 준호는 입에 든 물을 뿜어내고 말았다. 류원은 인상을 구기고 티슈를 툭툭 뽑아 준호에게 내밀었다. 한참을 콜록거리며 기침을 하던 준호가 인상을 찌푸리며 버럭 화를 냈다.
“넌 그런 질문을 무슨 ‘이거 얼마예요’처럼 묻고 그래! 사람 간 떨리게.”
“그럼 뭐 몸이라도 비비 꼬면서 물어?”
준호는 티슈로 입가를 닦고 태연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류원을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축축하게 젖은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어 두고 옷걸이에서 새로운 가운을 벗겨 몸에 걸쳤다.
“너 무성욕자라며, 안 꼴린다며, 섹스하기 싫다며?”
“…만약이라는 말 못 들었어?”
“어째 내 귀에는 기회가 되면 섹스하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
류원은 머쓱하게 뺨을 긁으며 시선을 외면했다. 요즘 해원은 독을 말린다는 이유로 상의를 거의 입지 않았다. 까맣게 독에 중독되었던 꽃도 점차 색을 찾아 가면서 주홍빛이 돌기 시작했다. 앙상한 나무가 제 꽃을 품고 있는 걸 볼 때마다 눈이 돌아갔다.
해원의 몸속에 파정을 하던 순간, 정확하게는 해원의 등에 꽃이 피던 그 순간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순식간에 꽃잎이 새겨지고 만개하는 장면은 황홀했다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론이 뭔데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나흘 동안 상태보고 말해 줄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준호는 작게 웃으며 류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대게 본딩을 한 후 열흘 정도가 지나면 베놈이 피스틸을 맹목적이고 일방적으로 옭아매려는 본딩 효과가 진정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본딩 효과가 진정이 되고, 해원의 상태도 완벽해지고 난 뒤에 그런 마음이 든다면 그때 관계해도 늦지 않았다. 류원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상담실 문이 벌컥 열리고 준희가 씩씩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로 환자복을 입은 해원이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오른쪽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오늘은 뽀얀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손목도 다 나은 모양이었다.
“강류원 이 자식아. 넌 어디 가면 간다고 말을 하고 가야 할 거 아니야. 너 진짜 이럴래.”
“오전 촬영 다 끝냈고 오후 촬영은 세 시부턴데 왜. 뭐가 문제야.”
“전화는 왜 안 받아. 네 전화는 시계냐? 어!”
류원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촬영에 들어가면서 무음으로 돌려놓은 전화기가 아직도 무음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화면을 켜자, 부재중 전화 열 통이라는 알림이 보였다. 통화 목록에는 채현과 준희의 번호가 번갈아 찍혀 있었다. 준희는 타이를 당겨 느슨하게 풀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무슨 일인데?”
“고하영 교통사고 났단다.”
“그게 뭐?”
“여자 주인공이 교통사고 났다는 게 이게 작은 일이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제작진은 뭐래?”
류원은 준희를 스쳐 아직도 문밖에 서 있는 해원에게 다가갔다. 흘러내린 환자복 상의를 똑바로 입혀 주고 손목을 붙잡아 상담실 안으로 끌어당겼다.
“일단 경과 보고 연락 준다는데. 돌아 버리겠다. 이렇게 촬영 딜레이되면 네 스케줄도 다 밀린다고.”
“누구 맘대로 내 스케줄을 또 정해!!”
“인간아 네가 팬서비스 차원으로 리얼리티 찍고 싶다며. 작년 팬 미팅 때 약속한 거 기억 안 나? 그래서 잡아 달라며. 그거 말한 거다. 그거.”
류원은 매년 생일 즈음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팬 미팅을 개최했다. 업계에서는 개차반이라고 소문이 났어도 팬들에게만큼은 살뜰하고 애정이 넘쳤다.
역조공은 기본이고 팬 사이트에서 행사나 기부를 하면 잊지 않고 꼭 성의 표시를 했다. 생긴 건 차갑게 생겼어도 저를 좋아해 주는 팬들을 향한 마음만은 물러 터진 순두부 같았다.
류원은 해원을 소파에 앉히고 손수 정수기에서 따뜻한 물을 받아 앞에 놓아 주었다.
“얼씨구?”
“절씨구.”
준호와 준희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한마디씩 했다. 류원은 이씨 형제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해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럼 오후부터 촬영이 취소되는 건가?”
“…QQ 엔터에서 연락이 와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살다 보니 고하영한테 고마워할 일이 생기네.”
고하영과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로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아역으로 데뷔한 동갑내기, 그녀와 저 사이에는 남들은 모르는 애틋한 동지애 비슷한 게 서로 존재했다.
연기를 못해서 감독님께 혼나면 같이 울어 주던 눈물 겨운 사이랄까?
고하영은 실제로는 털털하고 호탕한 성격이지만 대중에겐 청순한 이미지로 자리 잡아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무미건조하게 말을 내뱉고 컵을 해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해원은 준희와 준호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준희가 펄펄 뛰어 대는 걸 보면서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무작정 그를 뒤쫓아 왔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과 달리 준희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고 류원도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하영의 소속사에서 연락이 왔고 대대적인 언론 보도가 이루어졌다. 결국, 제작진은 오랜 논의 끝에 오후 늦게 공식입장을 내고 한 주 휴방을 결정했다.
류원은 병실에 있는 환자복을 꺼내 입고 해원과 함께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해원은 괜히 천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같은 환자복을 입고 있어도 류원은 배우여서 그런가 아니면 팔다리가 긴 편이라 그런가 뭔가 근사한 느낌이 들었다.
“아, 좋다.”
“오랜만에 쉬시는데 계속 여기 계실 거예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그리고 해원 씨 옆에 있으면 잠도 잘 오고 마음도 편해서 어디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들어요. 뭐 같이 가면 몰라도.”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꿀맛 같은 휴식이 예상치 못하게 찾아왔다. 류원은 해원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느긋하고 한가로운 기분을 만끽했다.
“뭐 하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말하면 같이 해 주게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얼마든지요.”
류원이 천장을 보고 누운 몸을 모로 굴려 해원을 바라봤다. 해원은 어색하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면서 괜히 그의 시선을 피했다. 수줍음을 타는 성격은 아닌데 류원이 저를 빤히 바라보면 어쩐지 뺨을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한강 가서 치킨 먹고 싶어요.”
“네?”
“차에서 말고 그냥 밖에서 돗자리 깔고.”
류원이 눈을 반짝이며 해원의 턱을 손으로 붙잡아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류원과 눈을 마주쳐야 했다.
“어릴 때부터 배우 생활을 해서… 그런 일상적인 것들을 못해 봤어요. 내가 아는 것들은 다 촬영이나 아니면 기사, 책 같은 걸로 접해 본 게 전부라서 그냥 해 보고 싶어요.”
“아… 한강 가서 치킨.”
“진지하게 생각 안 해도 돼요. 그냥 해 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류원은 다시 벌러덩 천장을 보고 누웠다. 단 한 번도 제 마음대로 뭘 해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이 알려져 있으므로 늘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돌이가 되었다. 반강제적인 집돌이. 혼자만의 공간에 처박혀 있는 게 가장 속 편했다.
인터뷰에서 ‘집이 가장 편해요’라고 말할 때 가장 속이 쓰렸다. 나가고 싶을 때 못 나가는 건 정말 억울했다.
“저랑 가요.”
“어?”
“저라도 괜찮으시면 한강 가서 같이 치킨 먹어요.”
“…….”
“제가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류원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손을 뻗어 해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는 것처럼 해원의 말이 제 마음을 간지럽혔다. 봄바람에 마구 흔들리는 꽃잎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색색 작은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든 해원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이불을 잘 여며 주고 침대를 빠져나와 창가에 섰다. 창밖으로는 붉은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가 퍽 마음에 들었다.
병실 안에는 오직 자신만이 느끼고 맡을 수 있는 문해원의 나무 냄새가 그득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나무 냄새가 닿았다가 빠져나갔다.
류원은 창가에 걸터앉아 잠든 해원을 바라봤다. 작게 하품이 났다. 나른한 기분이 들긴 하지만 자고 싶지 않았다.
만약 해원을 만나지 못했다면 류원은 아직도 불면증에 시달리며 온갖 짜증을 부리며 주위 사람들을 들들 볶아 대고 있을 것이다. 촉박하게 드라마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승모가 자신의 짜증을 못 이기고 매니저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면접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한 번 엇갈렸을지도 모른다.
류원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모로 누워 있던 해원이 몸을 뒤척여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렸다. 그 바람에 이불이 허리까지 내려갔다. 해원의 등에는 앙상한 나무와 함께 주홍색 양귀비 한 송이가 진하게 피어 있었다.
류원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창턱에서 내려와 침대로 가까이 다가왔다. 손을 뻗어 꽃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제 허벅지에 새겨진 꽃과 해원의 등에 새겨진 꽃이 똑같았다.
내 것, 내 것이라는 증거. 나와 몸을 섞었다는 증거.
순식간에 머리가 뜨거워지고 안구가 아플 만큼 열이 올랐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등에 입술을 붙이고 혀를 내어 꽃을 핥았다. 혀끝으로 꽃잎이 감겨드는 기분이었다.
숨이 막히고 몸이 뜨거워지는 듯한 감각이 깊은 수마에 잠식된 정신을 깨웠다. 흐, 낮은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이게, 흣, 저기…….”
해원은 등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두 손은 강인한 손에 잡혀 있었고 몸은 커다란 몸에 짓눌려 있었다. 베개에 뺨을 파묻고 입술을 짓씹었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누군가 등을 핥고 있었다. 꽃이 새겨진 자리를 집요하게 핥고 빨았다. 뜨거운 숨이 쏟아질 때마다 숨을 멈추고 몸을 경직시켰다. 코로 익숙한 향수 냄새가 흘러들어 왔다. 류원이 즐겨 쓰는 향수였다.
“가, 강 배우님.”
“…예뻐. 정말 예뻐.”
낮게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해원은 있는 힘껏 몸을 버둥거렸지만 강류원은 연신 예쁘다고 속삭이며 꽃잎을 핥았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 강류원과 몸을 섞었던 그때처럼 머릿속이 붉게 번져갔다. 혀의 감촉이 소름이 끼치도록 집요하고 섬세했다. 몸에 기운이 쭉 빠졌다.
똑똑-
몸을 늘어뜨린 해원의 귀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해원은 정신을 차리고 몸을 뒤틀었다.
“하아, 강류원, 제발!”
“그래 이 꽃의 주인은 나야. 네 몸에 이 꽃을 새겨 넣은 사람. 그게 바로 나라고.”
류원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등으로 뜨거운 숨결이 쏟아졌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강류원은 이미 핀트가 나가 눈에 초점이 없었다.
혀를 뒤덮는 매끈한 감촉과 혀끝이 아리도록 단맛이 나는 듯한 착각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황홀하다는 말로 이 기분을 다 설명이 되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따라붙는 혀끝의 달콤함은 류원을 무아지경으로 밀어 넣었다.
해원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노크하고 밖에서 기다리던 준호가 인기척을 감지하고 문을 열었다.
“해원 씨 자… 강류원!”
준호가 경악한 얼굴로 병실 안으로 뛰어들었다. 해원의 등에 올라타 나무를 핥고 있는 강류원의 상태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다.
해원에게서 류원을 떼어 내려고 해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 그는 자신이 새겨놓은 꽃을 핥고 또 핥았다. 간간이 목을 긁는듯한 신음도 들려왔다.
“해원 씨 괜찮아요?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보안팀에…….”
“으읏, 아, 안 돼요. 보안팀은, 강 배우님, 읏.”
해원은 나무의 기둥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에 이를 악물고 신음을 삼켰다. 열기가 뇌 속을 진탕 휘저었다.
잠시 망설이던 준호는 가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 여보세.
“병실로 당장 튀어 올라와. 강류원 사고 치고 있으니까.”
준호의 진료실에서 업무를 보던 준희가 연구소를 나선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보안팀을 부르면 간단하게 끝나겠지만 해원의 부탁도 있고 류원이 배우임을 감안해 아직 멀리 가지 않았을 준희를 불렀다.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류원의 팔을 뒤로 잡아 몸을 압박했다.
“놔 씨발! 놓으라고.”
“강류원 너 내가 돌이킬 수 있는 짓만 하랬지. 정신 안 차릴래?”
류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준호의 손에 잡힌 팔을 빼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킷을 한 손에 움켜쥔 준희가 병실 문을 열었다. 뛰어왔는지 얼굴에 땀이 맺혀 있었다.
“무슨 일, 아씨! 강류원!”
준희가 병실 안 상황을 보고는 얼른 문을 잠그고 침대로 달려왔다. 손에 든 가방과 재킷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고 류원의 오른쪽 팔을 붙들었다.
“류원이 왜 이래.”
“일단 분리 먼저 시켜놓고 이야기하자.”
양쪽에서 팔을 붙들고 강제로 해원과 떼어 놓았다. 류원이 거세게 반항을 하며 다시 해원에게 달려들었지만 사내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류원을 소파에 던져 놓은 준희가 아예 등에 올라탔다.
“비켜!! 문해원! 문해원!”
“시끄러워. 너 진정제 놓기 전에 입 다물어라.”
류원이 헐떡이며 소리치자, 준호가 날카롭게 일갈했다. 준호는 해원의 상태부터 살폈다. 해원은 몸을 늘어뜨리고 밭은 숨을 색색 내쉬고 있었다.
등을 얼마나 물고 빨아 댔는지 꽃이 새겨진 자리에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무의 가지에 붉은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로 피부를 씹어 놓은 자국이 언뜻 보면 꽃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아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해원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소파 쪽을 바라봤다. 류원은 거친 숨을 내쉬며 절박한 눈으로 해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호가 옷장에서 환자복 상의를 꺼내 어깨에 걸쳐 주며 몸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테니까 눈길도 주지 마요. 뭐 예쁘다고 눈길까지 줘.”
“…그래도 강 배우님이.”
“류원이가 이러는 거 해원 씨랑 합의된 거예요? 노파심에 말하지만 합의되지 않은 관계는 명백한 강간이에요.”
준호는 단호하게 말을 내뱉고 환자복 단추를 손수 잠가 주었다. 해원은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혀가 닿은 등 전체가 뜨겁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었다.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마시고 옷 속으로 손을 넣어 척추를 매만졌다. 이곳까지 류원의 혀가 닿았다. 온몸의 감각을 일깨우는 집요한 애무를 당하고 난 뒤라 몸에 힘이 빠졌다.
준호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는 해원을 두고 소파로 다가가 류원의 상태를 살폈다. 류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스테먼이 피스틸과 관계 후, 꽃이 피는 황홀경에 젖어 이성을 잃어버리는 현상. 대부분의 스테먼이 겪는 일이었다. 베놈의 경우 독과 함께 핀 꽃에 집착하고 내 것에 대한 독점욕이 유독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본딩 효과가 끝나기 전에 관계를 맺어 재본딩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준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준희를 떨어뜨리고 물을 따라 입가에 대어 주었다. 물을 마시고 나자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점차 또렷해졌다. 연거푸 물을 삼킨 그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이제 좀 정신이 드냐.”
류원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해원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또렷하게 기억이 났다. 해원의 억눌린 신음과 코끝을 적시던 짙은 나무 냄새 그리고 정신없이 해원의 등에 빨아 대던 제 모습까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몸과 마음이 제어되지 않았다. 해원의 등에 새긴 제 흔적을 보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속에서 뜨거운 게 치솟아 온몸을 태워 버렸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류원은 입가를 손등으로 문지르고 병실 문을 열었다. 도저히 해원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만약 준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해원의 몸을 강제로 취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정말 그랬다면……. 재밖에 남지 않은 속이 숨을 쉴 때마다 힘없이 바스러졌다.
“미안합니다. 내가, 잠시 이성을 잃고, 정말 미안합니다.”
“…….”
“준희형, 미안한데 운전 좀 해 줘.”
“어? 어, 그래. 가자.”
류원은 환자복을 갈아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준희가 서둘러 바닥에 떨어진 재킷과 가방을 챙기고 준호에게 살짝 눈인사했다. 준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 문을 나서는 찰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 배우님!”
“…….”
류원은 차마 고개도 돌리지 못하고 문 앞에 멈추어 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해원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해원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안 가시면 안 돼, 요?”
준호는 헛기침을 하고 조용히 준희를 데리고 병실을 빠져나갔다. 류원은 여전히 문을 바라보고 서 있었고 해원은 하염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가면 안 되느냐고 묻는 한마디에 발이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온몸에 달라붙은 열기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떼어 내고 싶었다.
“내가 힘으로, 해원 씨를 찍어 누르고 강제로.”
“…자다가 깨서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해원.”
류원이 천천히 몸을 돌려 해원을 바라봤다. 그는 침대 위에 오도카니 앉아 류원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이게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과 스테먼이라서 맹목적으로 서로를 당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이 싹을 틔우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류원은 시선을 고정하고 천천히 해원에게 다가갔다. 점차 거리가 좁혀질수록 심박수도 빠르게 요동쳤다. 마침내 두 사람의 거리가 완벽하게 좁아졌을 때 해원은 두 팔을 벌려 류원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얇은 셔츠 아래로 느껴지는 뜨거움을 고스란히 안고 뺨을 붙였다. 혼란스러운 듯 볼품없이 떨리던 류원의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좋지 않았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느낌이 뭔지 오랜만에 느껴 봤어요.”
“…….”
“뻔히 배우님이 몇 시에 끝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저는 수십 번씩 저 문을 열고 닫습니다. 저도 제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해원은 투정을 부리는 아이처럼 뺨을 비비면서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주고 당겼다. 열한 살 때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큰아빠가 집을 나간 후로 줄곧 계속 혼자서 지내 왔다. 담당 사회복지사가 시설로 옮기기를 바랐지만 해원은 집에 있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담당 사회복지사는 도시락과 지원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해원은 집에서 혼자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혼자 지내면 외롭지 않니?”
“외로운 게 뭔데요. 저는 아무렇지 않아요.”
거짓말, 열한 살짜리가 하는 말은 모두 다 거짓이었다. 단 한 번도 외롭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외롭다고 하면 시설로 옮기게 될까 봐 외롭지 않다고 말해야 했다. 큰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그 집을 떠나지 못했다. 아니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이를 먹어 가면서 점점 외로움에 익숙해져 갔다. 그렇다고 외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단한 척, 센 척, 괜찮은 척하는 것도 가끔은 한계가 있었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다가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텔레비전 속 사람들은 다 웃고 있는데 자신만이 엉엉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웃음소리에 파묻힌 울음소리는 처량하고 구슬펐다.
외롭던 해원의 삶에 강류원이 불쑥 끼어든 건 불과 한 달 조금 남짓이었다.
류원이 곁을 내주고 어깨를 내주었을 때 해원의 마음속에는 잠시 잊고 있었던 외로움이 불쑥 치솟았다. 어느새 하나가 아니라 둘이 된 일상이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그런 일상 속에 해원은 가랑비에 옷이 젖어 가듯 천천히 젖어 들고 있었다.
류원은 천천히 해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물었다.
“날, 기다렸어요?”
“네… 혹시나 저번처럼 문 앞에 앉아 계시는 게 아닐까 하고 마음을 졸였습니다.”
“기특하네.”
해원의 뺨이 닿은 복부에 뜨겁게 열이 몰렸다. 있는 힘껏 해원을 껴안고 제가 느끼는 감정의 갈피를 잡아 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게 정말 주파수에만 의존한 감정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류원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해원의 얼굴을 떼어 냈다. 해원이 눈을 들어 류원을 바라봤다.
“우리 나갈까요?”
“…네?”
“어디라도 좋으니까 그냥 우리 둘만 있는 곳으로 갈래요?”
해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라는 놈에게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어 두 사람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두 사람을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근데… 이거 하나는 알고 따라와요.”
“……?”
“해원 씨가 원해서 나를 따라오면 그때는 나도, 어떻게 할지 장담 못 해요.”
말속에 많은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해원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환자복 단추를 풀고 옷장 문을 열었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 침대에 던지고 환자복을 벗었다.
류원은 저도 모르게 등을 돌리고 해원의 몸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또다시 그의 등을 본다면 이번에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희미한 나무가 품은 양귀비는 지독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고요한 복도를 걸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유독 발소리가 크게 들렸다. 긴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연구소 정문을 빠져 나올 때까지 류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왼손으로 해원의 손목을 쥐고 앞만 보고 걸었다. 해원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뒤통수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애꿎은 입술만 질근질근 씹어 댔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의 불빛이 반짝였다. 삐삑- 도어가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류원이 걸음을 멈췄다.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 돌아가세요, 아무 말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
해원은 여전히 손목을 쥐고 있는 류원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입은 돌아가도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정작 그의 손은 손자국이 날 만큼 제 손목을 세게 쥐고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아무 말도 안 하셨어요.”
해원은 짧게 말을 뱉고 손목을 쥐고 있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류원이 순간적으로 놓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손 좀 놓으세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류원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제 손을 바라봤다. 하아, 피가 안 통할 만큼 손목을 세게 쥐고 있는 게 보였다. 헛숨을 내쉬고 천천히 손목을 놓았다.
손바닥에 남은 온기와 감촉이 목을 옥죄어 왔다. 만지고 싶고, 안고 싶다.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맹목적인 느낌, 해원의 몸에 제 꽃이 새겨진 이후로 이 갈증은 심각해지고 있었다. 류원은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돌렸다.
“…하, 정말.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우리 좀 미친 거 같지 않아요?”
“강 배우님은 모르겠고 전 좀 미친 거 같습니다. 강 배우님이 이러는 게 귀엽게 느껴지니까요.”
담담하게 말을 뱉은 해원은 류원의 손에서 차 키를 빼앗아 운전석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곧 류원이 빠르게 다가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허공에서 시선이 뒤엉키는 순간 류원이 먼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숨이 막혔다.
“조수석에 타요. 내가 운전할게요.”
“…아니요. 좀 주무세요. 저는 아까 좀 자서 괜찮습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만 찍어 주세요.”
해원이 몸을 숙여 운전석에 올랐다. 버튼을 눌러 시동을 걸었다. 특유의 엔진음이 폭발적으로 들려왔다. 해원은 시동을 걸어 놓고 차에서 내렸다.
“담배 좀…….”
“아, 잠깐만요.”
류원이 재킷 주머니를 뒤져 담뱃갑과 라이터를 꺼내 내밀었다. 해원은 익숙하게 담배를 넘겨받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줄곧 운동만 하던 자신이 이렇게 흡연자가 될지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실없는 웃음이 희뿌연 담배 연기와 함께 새어 나와 밤하늘로 흩어졌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해원 씨 집이 가까운지 아니면 내 집이 가까운지 고민하고 있어요.”
“저기…….”
“……?”
“…여기서 약간만 벗어나면 숙박업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어요.”
“숙박업소?”
잠시 류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해원은 짧아진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신발로 문질렀다. 예전에 여기 주변에서 장기 촬영을 한 적이 있어 지리를 조금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집으로 가나 류원의 집으로 가나 어느 쪽이든 족히 40분은 걸렸다. 어차피 목적이 뚜렷한데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있나.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르자 류원이 다급하게 차체를 돌아 조수석에 올랐다. 차가 도로로 들어서자 류원은 슬그머니 해원의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괜히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차 안의 공기가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해원은 마른 침을 삼키고 운전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손가락 사이를 촘촘히 감싼 체온을 애써 외면하며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후, 길게 숨을 내쉬고 표지판을 확인했다.
끼익-!
갑자기 차가 방향을 꺾어 공영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주차장 입구의 번호 인식기가 차량 번호를 인식하는 순간에도 해원은 초조하게 운전대를 두드렸다. 마침내 차단기가 올라가자 텅 빈 주차장에 아무렇게 차를 주차하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여기가 어디, 해원 씨… 웁!”
입술에 닿는 따뜻한 온기에 류원이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는 살며시 눈꺼풀을 내린 해원의 얼굴이 있었다. 입술을 부드럽게 핥고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해원의 몸이 자신의 몸 위로 올라오고 좌석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짙은 나무 냄새가 코끝에 닿아 제 마음을 간지럽혔다.
서툰 입맞춤이었다. 호기롭게 입안으로 밀려든 해원의 혀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작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고 혀끝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았다. 해원이 입술을 떼려고 하자 류원이 뒤통수를 감싸고 바짝 끌어당겼다.
“억지로 참고 있는데 왜 도발해요.”
“…후, 그게 아니라.”
“지금 누가 누굴 덮치고 있는지 좀 봐 주면 좋겠는데.”
해원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아래에 깔린 류원의 몸을 훑었다. 서로의 하체가 맞닿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얌전하게 굴더니 어디서 핀트가 나갔어요?”
“…손, 손잡을 때요.”
“이렇게?”
류원이 해원의 손을 붙잡아 다시 한번 손가락 사이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고 꽉 쥐었다. 이번에는 오른손뿐만 아니라 왼쪽 손까지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손바닥 전체를 감싸는 체온에 해원은 숨을 삼켰다.
입가로 쏟아지는 숨결에 류원이 그의 뒤통수를 감싼 손에 힘을 주고 입술을 맞물렸다. 혀가 입술을 가르고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마치 거센 파도가 백사장으로 밀려드는 것처럼 입안을 가득 채웠다. 마치 이런 게 키스라고 알려 주는 것처럼 입안을 헤집는 혀는 능란했다. 혀끝이 입안 구석구석 닿아 말초 신경을 자극했다.
타액과 함께 끈적한 숨이 뒤엉켰다. 류원의 손이 티셔츠를 걷어 올리고 등을 쓰다듬었다. 거뭇한 나무 밑동을 손끝으로 쓸고 손바닥 전체로 나무를 감싸 쥐듯 덮었다.
해원이 몸을 바르작거리며 그의 손을 밀어내려고 애썼다. 등이 간지러웠다.
“가만히 있어요.”
류원이 입술을 약간 떼어 내고 작게 속삭였다. 숨이 간지러워 해원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저었다. 등을 매만지는 손길이 점점 대담해졌다. 옷을 걷어 올려 나무의 정중앙을 훑었다. 그의 손이 불순한 의도를 담고 나무를 장악해 가고 있었다.
“하아, 잠시만요.”
해원이 입술을 떼어 내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숨이 몸속 깊숙이 닿았다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어느새 해원은 두 다리를 좌석에 올리고 그의 하체에 자신의 중심부를 슬슬 문질러 대고 있었다. 류원이 해원의 허리를 감싸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짓궂게 웃었다.
“감당하지도 못할 거 용감하기만 하지.”
“…하아, 저도 사람이니까요.”
“응?”
“몸이 후우, 뜨거워서 운전을 못할 거, 같았습니다.”
류원은 솔직한 대답에 피식 웃었다. 자신 역시 몸에 흥분감이 꽉 들어차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래서 대책도 없이 달려들었어요?”
“…죄송합니다.”
해원은 비척거리며 류원의 몸에서 내려와 운전석에 앉았다. 그러자 류원이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차체를 크게 돌아 운전석으로 온 류원이 차 문을 열고 해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도 안 잡고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일단 내려요.”
“네?”
“일단 내리라고.”
류원은 한 손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해원의 손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해원은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손에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생리적인 반응에 허리를 다 세우지 못하고 약간 엉거주춤하게 서자, 류원이 놀리듯 웃었다.
“정말 대책 없네.”
류원이 허리를 약간 숙이고 단숨에 해원을 둘러업었다. 두 다리가 허공에 뜨자 겁을 집어먹고 몸을 버둥거렸다.
“내려, 내려 주세요.”
“…내가 급해서 그러니까 이번만 좀 참아요.”
류원은 빠른 걸음으로 조수석으로 다가가 해원을 좌석에 앉혔다. 손수 안전벨트까지 채워 주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꾹 잡았다.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하면 사정 봐주지 않고 박을 겁니다.”
“아…….”
해원은 입술을 벙긋거렸다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운전석에 오른 류원이 시동을 걸고 가속페달을 세게 밟았다. 차가 튕기듯 빠르게 요금정산소로 향했다.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단말기에 밀어 넣고 요금이 정산되기를 잠시 기다렸다. 기계에 결제되었다는 글씨가 뜨고 곧 기계가 카드와 함께 영수증을 뱉어 냈다.
류원은 카드를 지갑에 넣고 영수증은 해원에게 내밀었다.
“받아요, 기념으로 줄게요.”
* * *
강류원은 과속도 하지 않고 차분하게 정속 주행으로 집까지 왔다. 그리고 집 앞에 주차하고 내려 현관문을 열 때까지도 그는 성숙한 신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해원에게 사납게 달려들었다.
신발장에 몸을 밀어붙이고 해원을 잡아먹을 듯이 몰아붙였다. 혀를 뽑아 먹을 기세로 빨아 대던 그가 해원을 슬슬 밀기 시작했다. 해원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류원이 원하는 대로 뒷걸음질 쳤다.
그 와중에도 서로에게 달라붙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류원은 혀를 맹렬하게 빨며 스스로 셔츠를 벗어 거실 바닥에 떨어뜨리고 버클을 풀어 바지를 벗었다.
침실 문에 해원을 밀어붙이고 진득하게 혀를 섞었다. 나른하게 동공이 풀린 그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마치 보석이 반짝이는 것 같았다. 성마른 욕구가 몸속을 뒤흔들었다. 고개를 숙여 목을 빨며 침실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폭주하듯 속을 데우는 뜨거운 불덩이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예 두 다리를 감싸 들어 올리고는 문 옆으로 난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욕실 문을 열고 해원을 내려놓았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느낌에 해원이 눈을 제대로 뜨고 류원을 바라봤다.
“벗어요.”
“예?”
해원은 꿈속에 있는 것처럼 기분이 몽롱했다. 어디선가 꽃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냄새를 따라 천천히 허리를 낮추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냄새의 근원지는 류원의 허벅지에 새겨진 꽃이었다.
허벅지에 코를 처박고 숨을 크게 마셨다. 향긋한 꽃냄새가 코끝을 적셨다. 해원이 혀를 내밀어 꽃잎을 핥았다.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몸 안쪽이 울렸다.
류원은 욕조에 걸터앉아 해원의 몸을 끌어당겼다. 다리를 넓게 벌리고 허벅지를 내어 주자 해원이 정신없이 꽃을 핥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문해원은 메인 요리를 맛보기 전 입맛을 돋우는 애피타이저 같았다.
적극적으로 꽃을 빨며 몸을 들썩이는 꼴이 제 입맛을 돋우고 있었다. 불쑥 치미는 성욕을 애써 진정시키고 문해원이 하는 짓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새빨갛게 익은 혀가 요사스럽게 꽃잎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핥고 빨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거기에 고르지 않은 숨소리가 제 귓가를 어지럽혔다.
류원은 수도꼭지 손잡이를 들어 올려 욕조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와 함께 해원의 숨소리가 파묻혔다. 한결 숨 쉬는 게 나아졌다. 욕조의 물이 빠르게 채워졌다. 류원은 해원의 턱 아래를 감싸 쥐고 들어 올렸다.
“또 씻고 싶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기회 줄 때 씻어요.”
“…하아, 꽃이 너무 예뻐요.”
입가를 타고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류원이 고개를 숙여 턱 끝을 가볍게 핥고 입술을 머금었다. 짙은 나무 냄새에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해원은 엎드린 채 베갯잇을 이로 꽉 물고 신음을 삼켰다. 속에서 뜨거운 게 치밀어 속이 울렁거렸다. 류원의 혀가 나무의 밑동을 핥는 느낌에 베갯잇을 놓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 아…! 그만, 하아, 그만해요.”
“문해원, 해원아.”
제 이름을 애달프게 부를 때마다 뜨거운 숨이 등으로 쏟아졌다. 살갗을 태울 것 같은 뜨거움에 해원이 허리를 들썩이며 몸부림쳤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름인데 강류원이 불러 주면 특별해졌다.
운동을 그만두고 난 뒤 살아가는 게 무미건조해졌다. 단맛도 없고, 짠맛도 없는 그냥 무맛이 나는 그런 삶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곁에서만 곤한 잠을 자는 강류원을 만난 뒤로는 모든 게 바뀌었다. 마치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딴 생각할 정신도 있고 여유롭네?”
류원의 손끝이 나무를 덧그리듯 부드럽게 등을 쓸었다. 온몸의 세포가 손끝을 향해 달려들었다. 나무를 만지는 느낌은 생경하지만 기꺼웠다.
혈관 아래로 순환하는 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꽃을 품고, 몸에 새기고 싶었다. 얼마 전 독을 품은 양귀비가 제 몸에 새겨지는 그 순간, 눈앞이 아찔할 만큼 온몸이 전율했다. 다시 한번 그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다.
“빨리, 하아, 빨리요.”
류원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발기한 성기가 제 허벅지를 꽉 눌렀다가 떨어졌다. 해원은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그를 채근했다. 긴 손가락이 엉덩이 주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윽!”
느긋한 손길로 주름을 훑던 손가락이 불시에 아래를 벌리고 깊숙이 찔러왔다. 아, 해원은 숨도 쉬지 못하고 몸을 굳힌 채 입을 크게 벌렸다. 류원이 엉덩이 살집을 쥐었다가 놓으며 작게 웃었다.
“손가락 하나에도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왜 자꾸 조르는 건데.”
“아, 아, 아-----!”
류원은 목에 핏대가 바짝 설만큼 괴로워하는 해원을 바라보며 잔혹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손을 뻗어 가느다란 목을 틀어쥐었다. 손바닥 아래에 맥박이 느껴졌다.
이대로 비틀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목뼈가 어긋나는 감각은 얼마나 섬뜩하고 선연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몸에 한기가 드는 기분이었다. 문해원은 사람을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분리불안을 겪는 아이처럼 늘 눈이 문해원을 집요하게 좇았다. 어떨 땐 미친놈 같고 어떨 땐 애처롭기까지 한 제 감정은 오롯이 한 사람을 겨냥하고 있었다.
류원은 상념을 지워 버리고 목을 감싼 손에 힘을 약간 풀었다. 해원의 턱을 당겨 입술을 겹쳤다. 바짝 세운 상체가 침대로 떨어지면서 해원의 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아, 으윽.”
몸을 겹치고 귓불을 물었다. 귓바퀴를 타고 혀를 놀리면서 안쪽으로 파고든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완급을 조절하며 공을 들여 안을 자극했다. 슬슬 손끝에 물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류원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애써 평온한 척 연기를 하고 있지만 속은 그게 아니었다. 난잡하게 몸을 들쑤시고 개처럼 헐떡이고 싶었다. 류원은 자조하며 손가락 하나를 안쪽으로 더 밀어 넣었다. 아래가 벌어지는 생경한 느낌에 해원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도리질했다.
한 번 해 봤다고 수월할 줄 알았는데 그건 정말 오산이었다. 갑자기 안쪽을 깊숙이 찌르는 느낌에 엉덩이를 꽉 조였다. 엉덩이 근육이 도드라지며 손가락을 세게 물었다.
“힘 좀 빼. 왜 이렇게 긴장했어.”
“흐으, 아, 아파요.”
“거짓말, 안쪽은 흥건하게 젖었는데.”
안쪽이 젖었다는 말에 해원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성기가 자신의 안쪽과 마찰하면 어떤 소리가 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현듯 안쪽을 들쑤시는 감각이 되살아나며 해원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몸을 이완시켰다.
“야해 빠졌어.”
“…흐, 아, 좋아, 더요, 읏, 더.”
류원은 손가락을 약간 구부려 해원이 느끼는 부분을 세게 문질렀다. 얌전히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해원의 몸이 크게 튀어 올랐다.
“아, 아! 자, 잠깐만, 으윽.”
살짝 부어오르기 시작한 전립선을 류원이 손끝으로 연신 문지르고 괴롭혔다. 몸 안쪽에서 퍼지는 감각은 기괴하고 끔찍했다. 그런데 또 미묘하게 흥분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쾌감이었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며 이불에 성기를 비벼 댔다. 이불에 마찰하는 걸로 성이 차지 않아 아예 허리를 허공에 띄우고 손으로 성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류원의 손가락은 착실하게 안쪽을 들쑤시며 해원의 사정을 부추겼다. 해원은 손등을 세게 깨물고 빠르게 손을 흔들었다. 사정감이 점차 고조될수록 머리가 뜨거워지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으윽, 읍, 으읏.”
해원은 아랫배가 아프도록 조이는 순간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눈앞이 희뿌옇게 변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르지 못한 숨이 마구잡이 흩어졌다.
류원은 몸이 사정의 여파로 몸이 경직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손가락을 거둬들였다. 꽤 오랫동안 손가락을 머금었던 구멍이 둥그렇게 벌어져 있었다.
류원은 제 성기를 두어 번 쓸고 허벅지를 타고 앉았다. 점점 입을 다무는 구멍에 귀두를 맞추고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구멍이 한계까지 벌어지며 귀두를 물었다. 잦아들던 해원의 울음소리가 다시금 커졌다.
“쉬이, 괜찮아.”
“으윽, 아, 악! 아파요. 흣, 아파.”
잔뜩 성이 난 성기가 안쪽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무리 없이 제 성기를 꽉 조여 무는 구멍 주위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훑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속을 꽉 채운 성기에 해원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버둥거렸다. 해원의 손을 낚아채고 제 허벅지 위에 올렸다.
“꽃 만져. 정신 차리고 내 몸 만지라고.”
해원이 손을 뒤로 뻗어 꽃이 그려진 허벅지를 더듬거렸다. 손톱이 꽃잎을 짓이기듯 살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몸속으로 열기가 빠르게 들어찼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성욕이 폭죽 터지듯 터져 나와 육체와 정신을 좀먹었다.
느긋하게 육체를 맛보려고 했던 계획은 한순간에 깨끗하게 날아가고 무섭도록 본능적인 욕구가 들끓었다. 류원은 두 손으로 엉덩이를 세게 잡아 벌리고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기둥이 구멍을 벌리고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아-….”
숨을 멈추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류원이 뒤늦게 숨을 터뜨렸다. 꽃을 피우고 싶은 스테먼의 욕심이 속에서 들끓었다. 내벽이 촘촘하게 성기를 감싸고 빨아 당겼다. 마치 정액을 쥐어짜려는 것처럼…….
류원은 사정 욕구를 억지로 삼키고 천천히 성기를 뽑아냈다. 체액이 묻어 번들거리는 성기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몸뚱이가 다시 좁은 구멍을 통과하고 싶어 요동쳤다.
해원의 손이 부자연스럽게 허벅지를 오르내렸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착실하게 류원의 육체를 만졌다. 류원은 그의 몸 위에 길게 엎드리고 양손을 겹쳐 쥐었다. 손바닥을 가득 채우는 열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으, 아, 강류원, 하아.”
“…난 내가 미쳐 가는 게 주파수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해.”
“아윽! 으, 아… 천, 천히.”
류원은 허리를 빠르게 흔들면서 해원의 몸속을 들쑤셨다. 귀두 끝에 장기가 닿는 느낌이었다. 비명 어린 신음을 내지르는 해원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없으면 잠도 자지 못하는 나를 불쌍하게 생각해 줘. 가엾게 여겨 달란 말이야.”
“그만, 그만……. 흣, 아윽.”
해원은 귓가로 쏟아지는 말을 뒤늦게 이해하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생각을 길게 이어 갈 정신이 없었다. 류원이 안쪽을 찔러 올릴 때마다 숨이 막혔다. 한순간에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온몸의 근육들이 조여들었다.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해원은 몸을 허우적거리며 극한의 쾌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류원이 허리를 감싸고 잡아당겨 퍽-, 소리가 날 만큼 크게 허리를 처박았다. 온몸의 감각이, 성감이 집중되었다.
“하으, 으, 제발, 제발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애원했다. 이대로 짙은 쾌락에 삼켜지면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다리를 접어 몸을 웅크렸다.
류원은 좀 더 편한 자세가 되자, 아예 허리를 세우고 빠르게 안쪽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찰박거리는 살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해원의 몸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해원은 시트를 움켜쥐고 울음을 토해 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류원이 허리를 잡고 있지 않았다면 몸은 벌써 무너져 나뒹굴었을 것이다.
“으윽.”
“하읏, 아, 아! 아, 그만! 윽!”
빠르게 안쪽을 드나들던 성기가 안쪽에 콱 처박혔다. 배 속의 장기를 밀어내며 자리를 잡은 성기가 길게 빠졌다. 류원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지고 우둘투둘한 성기가 구멍을 비집고 안쪽으로 깊숙이 처박혔다. 그리고 세상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류원은 몰아치는 사정감에 정신을 붙잡고 뿌연 시야를 다 잡았다. 정액이 사출됨과 동시에 해원의 울음소리가 방 안을 크게 울렸다. 등을 긁으려는 해원의 손을 잡아채고 몸을 숙였다.
눈앞에서 등 전체가 붉게 달아오르더니 꽃봉오리가 피어오르고 순식간에 꽃이 만개했다. 두 번째로 맞이한 절경이었다. 넋을 놓고 꽃이 피는 광경을 바라보던 그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에 의식적으로 호흡했다.
이 희미하고 비루한 나무가 품을 수 있는 꽃은 오직 주홍색 양귀비뿐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다른 새끼의 꽃이 새겨지는 꼴은 볼 수가 없었다. 류원은 몸을 늘어뜨린 해원의 몸속에서 성기를 뽑아내고 나무가 품은 꽃을 혀로 길게 핥았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독점욕이 류원의 머릿속을 갉아먹었다.
내 나무, 내 꽃을 품은 내 것…….
류원은 침대 헤드 보드에 몸을 기대고 해원의 손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탈력감에 몸을 축 늘어뜨린 해원이 속절없이 끌려왔다. 움직일 때마다 안쪽을 흠뻑 적신 정액이 질질 새어 나와 침대로 뚝뚝 떨어졌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해원의 허리를 끌어당겨 배 위에 앉혔다. 두 다리를 모으고 비스듬하게 앉아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해원이 색색 숨을 내쉬었다.
해원의 허벅지 옆으로 발기한 성기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흔들렸다. 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원의 이마를 짚었다. 평소보다 체온이 높았다.
“열이 좀 있는데.”
“…소장님이, 독이 몸 안으로 흡수되면서 열이 날수도 있다고, 했어요.”
해원은 가쁘게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가슴, 팔, 다리 할 것 없이 검은 자국이 얼룩덜룩 오르기 시작했다. 류원이 손목을 쥐고 독이 오른 자리에 짧게 입 맞췄다. 이 몸속에 자신의 독이 퍼져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무슨, 생각하세요?”
“피를 마시고 싶단 생각?”
해원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슬며시 붙잡힌 팔을 비틀었다. 의외로 순순히 팔을 놓아준 류원이 등을 천천히 쓸었다. 영롱한 색깔을 뽐내며 해원의 등을 수놓은 꽃이 참 아름다웠다.
몇 년 전에 스테먼과 피스틸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을 맡은 적이 있었다. 출연자는 결혼까지 한 부부였는데 스테먼은 인터뷰 중간중간 피스틸의 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피스틸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때는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얼간이 같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자신의 꽃을 피운 피스틸을 안고 나니 자신 역시 그 스테먼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나무가 품은 꽃을 보고 있노라면 입안에서 갈증이 느껴졌다. 옷으로 가리고 있어도 꽃이 어디쯤 새겨져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류원은 실없이 웃으며 해원의 젖꼭지를 쥐고 손끝으로 굴렸다.
“흣, 간지러워요.”
“…참아 봐.”
류원이 보란 듯이 젖꼭지를 잡아당겼다가 손끝으로 세게 누르며 비볐다. 해원은 몸을 잔뜩 웅크리고 한쪽 눈을 찡그렸다. 저릿한 느낌이 싫어 손길을 피해 보지만 그는 집요하게 따라붙어 젖꼭지를 괴롭혔다.
“윽!”
갑자기 류원의 입에서 낮은 비명이 터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해원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끙끙 신음을 뱉어 냈다.
“손 들어요.”
서릿발 같은 일갈에 류원은 순순히 젖꼭지를 희롱하던 손을 떼어 내고 귀 옆으로 들었다. 순수한 항복의 의사였다.
“하, 항복. 으윽!”
류원이 앓는 소리를 내며 항복을 외쳤다. 하지만 해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단단하게 발기한 류원의 성기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달아오른 귀두에서 쿠퍼액이 주르륵 흘렀다.
쿠퍼액이 윤활제 역할을 하면서 손놀림이 한결 수월해졌다. 빠르게 손을 흔들자, 류원이 고개를 젖히고 신음했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고 혀를 굴렸다. 땀 냄새와 뒤섞인 체향이 진하게 묻어났다.
“하아, 문해원… 그만해. 후회하지 말고.”
“…강 배우님도 제가 그만하라고 했는데 하셨잖아요. 저도 제 마음대로 할 겁니다.”
귀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자위하듯 쥐고 흔들었다. 탁탁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야살스럽게 들렸다. 류원은 손이 작은 편인 해원이 힘겹게 성기를 움켜쥐고 있어 꼼짝할 수가 없었다.
손을 오므릴 때마다 성기가 저절로 쥐어짜졌다. 헛숨을 내쉬며 해원을 힐끗거렸다.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신나게 손을 움직였다. 하, 타인의 손으로 성욕이 끌어 올려지는 기분은 꽤 기꺼웠다.
류원은 이를 악물고 해원의 손목을 붙잡았다. 당황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눈을 모르는 척하고 해원을 침대로 밀어 눕혔다. 그사이 뽀송뽀송하게 마른 머리카락이 하얀 침구에 흩뿌려졌다.
해원의 다리를 붙잡아 밀어 올리고 그대로 성기를 찔러 넣었다. 구멍이 활짝 벌어지며 울퉁불퉁하게 성이 난 성기를 집어 삼켰다. 단숨에 뿌리 끝까지 밀려들어 가는 느낌에 해원이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목을 긁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삽입까지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후회한다고 했잖아.”
류원이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쪽에 정액이 고여 있어 성기가 부드럽게 안으로 파고들었다가 빠져나왔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성감을 돋우는 기특한 구멍이었다. 해원은 두 손으로 류원의 밀어내며 몸을 버둥거렸다. 그 순간, 해원의 손톱이 류원의 가슴팍을 세게 할퀴었다.
류원은 담담한 표정으로 허리 짓을 이어가며 붉은 자국이 길게 난 제 가슴을 힐끗거렸다. 몸을 데우는 성욕이 아픔을 앞서고 있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읏, 아, 처, 천천, 히윽!”
빠른 속도로 몸속을 치받는 성기가 마치 불기둥 같았다. 속이 다 타 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아래가 뜨거웠다. 해원이 목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고개가 뒤로 젖혀지면 류원이 제가 그랬던 것처럼 입술을 목에 묻고 살결을 빨았다.
“하, 그만, 하읏, 제발요!”
“…예뻐.”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해원의 눈가를 혀로 핥았다. 남자에게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대신할 대체어를 찾지 못하겠다. 그저 예쁘다는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해원이 독이 퍼져 거뭇한 자국을 달고 온몸으로 매달려 왔다. 안 그래도 뜨거운 육체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각도를 약간 비틀자, 귀두 끝에 볼록하게 부어오른 부분이 닿았다. 일부러 그 부분을 긁으려 성기를 더 밀어 넣었다.
“흣, 거기, 하아, 싫, 싫어! 하윽.”
해원이 몸을 뒤틀며 신음을 내질렀다. 굳이 조준하지 않아도 울퉁불퉁한 성기가 연신 포인트를 자극해 이미 부어오를 대로 부어올라 있었다.
성기를 길게 뽑아내고 단숨에 퍽-, 쑤셔 박았다. 포인트를 긁고 쑤셔 박히는 느낌에 해원이 몸을 버둥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해원의 몸이 경련하듯 덜덜 떨렸다. 류원이 놀라 고개를 들자, 뱃가죽이 축축했다.
해원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시선을 피했다. 수치심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앞을 만진 것도 아닌데 고작 뒤를 들쑤셨다고 가 버리다니, 자괴감이 들었다.
아직도 해원의 성기에서 정액이 쏟아지고 있었다. 찔끔찔끔 쏘아 대는 성기를 길게 훑어 주고 허리를 감싸 몸 위로 끌어올렸다. 양쪽 엉덩이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결합 부위가 깊어진 탓에 숨이 막혔다. 류원이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뒤로 느끼면서 가 봐요.”
“하, 으읏, 싫어. 못 해.”
“그럼 이대로 밤새든가.”
류원이 엉덩이를 쥔 손을 떼어 내고 아예 길게 누워 버렸다. 해원은 몸속에 우람한 성기를 품은 채 그의 몸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아 있었다. 열이 잔뜩 오른 뺨을 손으로 문지르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 한번 해 보라는 듯이 류원은 두 팔을 들어 머리를 베고 누워 눈을 감았다. 슬쩍 허리를 쳐올려 아래를 자극하자, 해원이 파드득거리며 양손으로 복부를 짚었다.
“흣, 진짜, 아, 장난치지, 하윽, 말고.”
애처로운 애원에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해원이 한숨을 푹 내쉬고 천천히 몸속에서 성기를 뽑아냈다. 귀두가 보일 때까지 뽑아낸 뒤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내렸다. 잔뜩 성이 난 성기가 몸속 깊이 파고들었다.
몸이 저절로 벌벌 떨렸다. 류원은 해원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구경하면서 그의 다리를 붙잡고 앞뒤로 흔들었다.
“하읏, 아, 그냥, 아윽, 그냥!”
해원은 정신없이 몸을 흔들면서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몇 차례 가격했다. 머리끝까지 성욕이 차올라 토악질이 날 지경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눈앞이 뿌옇게 번지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허리를 들썩이며 신음을 내질렀다.
어느새 류원이 허리를 세우고 해원의 몸을 고쳐 안았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뒤로 넘어가려는 것을 가까스로 잡아챈 게 벌써 서너 번이었다. 허리를 들썩이며 한껏 고조된 해원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류원은 손끝을 마주 비볐다.
갑자기 이 관계가 끝날까 봐 두려워졌다. 주파수로 이어진 아슬아슬한 관계, 애정이 아니라 오직 몸으로만 이루어진 관계, 말도 안 되는 운명론이 만들어 낸 관계.
어느 날 갑자기 문해원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다고 해도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어쩌면 이 관계에 목을 매고 있는 건 문해원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해원이 어깨에 이마를 대고 흐느꼈다. 류원은 그의 허리를 감싸고 다시 침대에 눕혔다. 이 육체적인 관계가, 해원에게 자신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하찮은 이유라도 됐으면 좋겠다.
두 다리를 감싸 안고 빠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마침내 정액이 안쪽에서 터져 나오고 그와 동시에 해원의 성기에서 정액이 새어 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해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쿵쿵 뛰어대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류원은 나른한 후희를 즐기며 해원의 몸 곳곳에 입 맞췄다. 혀끝에 닿는 살결이 달아서 혀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해원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몸을 늘어뜨렸다. 가쁘게 숨을 내쉬는 해원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며 작게 속삭였다.
“문해원 씨.”
“…….”
“나를 가엾게 여겨 달라는 말은 진심이야.”
* * *
류원은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제 옆에는 문해원이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 짓고 커다란 창을 바라봤다. 밖이 어두운 걸 보니 꽤 많이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몇 시지?
더듬더듬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시 침대에 벌러덩 누워 해원을 바라봤다. 자신의 옷을 걸치고 세상모르게 잠든 얼굴이 편해 보였다. 기분이 묘했다. 누군가 제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게 낯서면서도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 손을 뻗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러자, 해원의 눈가가 움찔거리며 몸을 뒤척였다.
“으음?”
“깼어요?”
해원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고 화들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잠이 깨질 않는지 머리를 툭툭 치고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류원은 두 팔을 베고 누워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체구가 작거나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다. 키는 한 180cm 정도, 적당히 근육이 잡혔지만 거대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배는 안 고파요?”
“…네, 강 배우님은요?”
“나도 별로.”
해원은 침대를 벗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세수하고 양치질을 했다. 잠기운이 물러간 얼굴을 툭툭 두드리고 얼굴을 확인했다. 조금 부은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변기통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았다. 자신의 집보다 훨씬 넓고 호화스러운 욕실을 눈으로 훑었다.
류원과 함께 하는 생활이 익숙해져서 큰일이다.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어 버리고, 그의 옷을 입고, 대화하는 일상이 너무 편안하고 즐거웠다. 늘 혼자였던 삶에 강류원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
똑똑-
해원은 변기통 커버를 올려 두고 욕실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류원이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다.
“우리 잠도 안 올 거 같은데 드라이브 갈까요?”
“…지금이요?”
“아니면 산책도 괜찮고.”
해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드라이브도 산책도 모두 괜찮았다. 옷을 갈아입고 류원과 함께 집을 나섰다. 밤공기에 약간 더운 기가 묻어났다. 류원은 개인 차고의 문을 열었다. 그중 가장 앞쪽에 세워진 차로 다가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해원이 쭈뼛거리며 조수석에 앉았다. 명색이 제가 매니저인데 배우에게 운전을 시키는 기분이 조금 불편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는 얼굴로 시동을 걸고 안정감 있게 차고를 빠져나와 도로로 들어섰다.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이지만 거리에는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잠시 신호에 걸린 사이 에어컨 온도를 조절했다.
“몸은 좀 어때요?”
“컨디션은 나쁘지 않습니다.”
해원은 희미하게 웃었다. 차가 어느새 올림픽대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심을 환하게 비추는 불빛을 응시하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이런 여유가 낯설고 어색했다.
“어머니께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나는 면허 같은 거 안 따려고 했어요. 근데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안 딸 수가 없더라고.”
“…….”
“따기 싫어서 몇 번은 일부러 떨어지기도 했는데, 결국은 따야 했어요. 정말 따기 싫었는데.”
“저는 면허를 따면 차가 당연히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뜬금없는 해원의 말에 류원이 작게 웃었다. 어쩐지 그 말이 저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 같아서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리고 대화가 끊어졌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차 안에 어색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고요함이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짙은 나무 냄새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늘 혼자서 다녔던 길이었다. 마음이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혼자서 이 길을 달렸다. 배우 강류원과 인간 강류원의 갭 차이가 클 때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그리고 이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진짜 강류원의 얼굴은 철저히 숨긴 채 배역에 빠져 몇 달 살고 나오면 내 정체성, 내가 누구인지 헷갈렸다. 현실 속 강류원과 배역 속 강류원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럴 때마다 이길 위에서 잃어버린 ‘나’ 를 찾았다.
그런 길 위를 문해원이 함께하고 있었다. 늘 외롭고 힘들고 아팠던 마음이 지금은 괜찮았다.
차는 어둠을 달려 강원도 쪽으로 향했다. 해원은 내심 너무 멀리 가는 게 아닌가 걱정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운전대를 잡은 류원의 얼굴이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다.
“해원.”
류원은 이름을 부르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해원은 좌석에 몸을 기대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괜히 깨우고 싶지 않아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목적지를 두지 않고 달리다 보니 여기까지 와 버렸다.
청평호는 류원에게 꽤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 어린 시절 연기가 서툴러 감독님께 혼이 나면 어머니는 늘 이곳으로 저를 데려왔다. 그러면 아버지는 저를 번쩍 안아 품에 안고 입을 맞춰 주셨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피식 웃었다.
아버지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낡은 건물, 아버지의 작업실이었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건물로 들어갔다. 문손잡이에 열쇠를 꽂아 놓고 비틀었다.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익숙한 유화 냄새를 맡으며 전등 스위치를 켰다.
유일하게 아버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류원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입술을 문지르고 아버지께서 늘 이젤에 캔버스를 올려 두고 그림을 그리던 창가를 멍하니 바라봤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 안에 부유하는 유화 냄새가 사라지는 게 싫어 그만두었다. 왜 갑자기 이곳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은 자신만의 작은 아지트였다. 그런데 왜 문해원에게 이곳을 보여 주고 싶었을까. 잠시 생각하던 류원은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차 앞을 서성이는 해원의 모습이 보였다. 곧 저를 발견한 해원이 다급하게 달려와 제 몸 이곳저곳을 만져댔다.
“괜찮으신 겁니까? 갑자기 사라지셔서 놀랐습니다.”
잔뜩 상기된 얼굴,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 갑자기 감정이 울컥 복받쳤다. 류원은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문질렀다. 어느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저와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 그리고 제멋대로 흔들리는 마음…….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입을 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류원은 간신히 감정을 추스르고 해원을 마주 바라봤다.
정말 마음이 이상했다. 무언가가 자꾸 마음을 툭툭 건드렸다. 해원에게 나 좀 가엾게 여겨달라고, 나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사정하고 싶었다. 철옹성같이 차곡차곡 쌓아 올린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포장되지 않은 날것의 감정이 북받쳤다.
류원은 애써 표정을 숨기고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화가셨어요. 늘 이곳에서 작업하셨고 난 이 앞 공터에서 흙장난을 치며 놀았어요.”
“아…….”
해원은 작은 전등이 켜진 마당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요.”
“…제가 들어가도 될까요?”
“세월의 흔적이 묻어 볼품없지만, 그래도 볼만할 거예요.”
류원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수많은 그림이 걸려 있고 바닥에도 흰 천으로 덮어 놓은 캔버스가 많았다. 운동 말고는 관심이 없던 해원이라 이 풍경이 신기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내가 여섯 살 때, 폐암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땐 죽음이 뭔지 잘 몰라서 멀뚱멀뚱하게 장례식장에 서 있기만 했거든요. 그러다가 사촌들이 오면 신나게 장난감 차를 밀고 장난을 쳤고.”
“…그 나이 때는 다 그런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아니, 그런 걸 알아서도 안 되는 나이예요.”
류원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 해원에게 손짓했다. 앞으로 다가온 그의 등을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가슴에 얼굴을 묻고 짙은 나무 냄새를 들이마셨다. 짙고 묵직한 여름 나무의 냄새가 제 폐부 깊숙이 닿았다가 밖으로 흘러나왔다.
“항상 아쉬움이 남아요. 아버지와 제대로 된 이별 인사 나누지 못한 게, 이렇게 긴 이별이 될 줄 알았다면 인사라도, 할걸.”
“…….”
“생각해 보니까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제대로 인사를 못 했어요. 하나뿐인 아들인데. 서운하셨을거야. 근데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해원은 아무 말 없이 류원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저 역시 어린 나이에 작은아빠와 긴 이별을 했기에 그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베놈스테먼으로 각성을 하느라 생사를 넘나들고 있을 때 어머니도 교통사고로 사경을 헤매셨거든요. 아마 그때 어머니가 제 목숨을 저버리고 나를 살려주신 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타인에게 제 치부를 보여 준다는 게 싫었다. 시간이 흐르면 이것 또한 약점이니 될 테니까. 그런데 왜, 꼭꼭 숨겨 둔 마음을 해원의 앞에는 죄다 꺼내 보여 주고 싶은 것인지, 이렇게 해서라도 그가 자신을 동정하길 바라는 것인지 도무지 제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저기 앞에서 장난을 치다가 물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수영도 못하는 아버지께서 물에 뛰어드셨대요. 아들이 물에 빠지니까 자신이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을 잊으셨나 봐요.”
해원은 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말주변이 없기도 했고, 그냥 그렇게 들어 주고 싶었다. 어쭙잖은 위로보다 가만히 곁을 지켜 주는 게 어쩌면 더 좋은 위로가 될 테니까.
그 후로도 한참을 류원은 제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서로 마주 안고 있었던 두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류원은 아이처럼 해원의 팔을 베고 몸을 웅크렸다.
화분을 깨뜨려 다쳤던 이야기, 어머니께 호되게 혼이 나 많이 울었던 이야기, 촬영장에 가기 싫어 도망쳤던 이야기 등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밤은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 * *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더니 오후가 되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해원은 담요로 몸을 감싸고 거실 소파에 누워 있었다.
예상치 못한 휴가는 어느새 끝자락에 닿아 있었다. 일주일 동안 류원과 함께 먹고, 자고 모든 시간을 함께했다.
겉으로 보이는 강류원이 아닌 훨씬 더 깊은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었다.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식성이, 취향이, 공감대가, 성격이 찰떡같이 맞아떨어졌다.
해원은 슬그머니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 주방을 힐끗거렸다. 뭘 그렇게 열심히 만드는지 앞치마를 두른 류원의 뒷모습이 분주했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해원이 담요를 걷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아, 신경 쓰지 말아요. 그냥 컵이 하나 깨진 것뿐이에요.”
류원은 잔뜩 당황한 얼굴로 손짓, 발짓을 해 가며 해원이 다가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깨진 유리 조각을 조심스럽게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사납게 욕을 뇌까렸다. 지금까지 강류원에게 주방이란 그저 물을 마시는 곳일 뿐이었다. 주방 안의 식기나 온갖 주방용품은 구색은 갖춰야 한다며 준희가 구비해 놓은 것들이었다. 이사 온 지 한참이 지났지만 단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 태반이었다.
“저기… 타는 냄새 나는데요.”
“아! 미치겠다.”
류원이 유리 조각을 줍다 말고 몸을 벌떡 일으켜 다급하게 불을 줄였다. 이미 프라이팬의 달걀은 테두리가 새까맣게 타서 제 모습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먹으면 병에 걸릴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제가 할 테니까 나가 계세요.”
“…그냥 나가서 먹읍시다. 아니면 배달이나.”
“네, 저는 뭐든 상관없으니까 일단 이 주방에서 좀 나가 주세요.”
류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유리 조각이라도 정리하려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해원이 손목을 낚아채고 끌어당겼다. 와자작, 슬리퍼 아래로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정리할 테니까 슬리퍼 여기에 벗어 두고 나가세요.”
해원은 얼른 바닥에 주저앉아 깨진 큰 유리조각을 정리하고 작은 빗자루로 대충 바닥을 쓸었다. 쭈뼛거리며 주방을 서성거리던 그가 눈치 빠르게 청소기를 가지고 와 주방을 슥슥 밀기 시작했다.
“세상에, 도대체 달걀을 몇 개나 쓰신 거예요.”
싱크대 위에 놓인 유리 볼에는 달걀 껍데기와 기름이 범벅되어 한눈에 봐도 식욕이 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쌓여 있는 껍데기 개수로 얼추 따져 보아도 수십 알은 족히 되어 보였다. 류원이 얼른 다가와 유리 볼을 낚아채고 뒤로 숨겼다.
“이건 내가 치울게요.”
“이리 주세요.”
“하, 진짜. 내가 주방에서 뭘 해 본 적이 없어요.”
“…네? 그럼, 식사는요?”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시작하면 거의 안 먹거나 샐러드 도시락을 이용하는 편이고, 쉴 때는 배달로…….”
변명이랍시고 주절주절 늘어놓고도 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항상 불면증이 심해 집에 들어오면 식사보다는 대부분 잠을 자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며칠씩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면 입안이 까끌까끌해 물 외에는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도 힘들었다.
“그런 것치고 정력이 지나치게 좋으시던데.”
해원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류원은 민망함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해원을 바라봤다. 자칫 무거워질 법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벼워졌다. 기분이 좀 묘했다.
“그거나 이리 주세요.”
해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류원이 감추고 있는 유리 볼로 손을 뻗었다. 류원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유리 볼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런 걸 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한참 승강이를 벌이다가 결국, 해원의 손으로 유리 볼이 넘어갔다.
해원은 음식물과 껍데기를 분리해 비닐봉지에 담고 싱크대 한쪽에 놓아 둔 채 집기들을 씻기 시작했다.
류원이 해원의 뒤로 다가가 허리를 끌어안고 등에 얼굴을 묻었다. 짙은 나무 냄새가 혼곤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해원은 다른 사람과 달랐다. 모든 사람은 잠을 자지 못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늘 예민하고 까칠하게 구는 자신을 안타깝고 불쌍한 눈으로 바라봤다. 마치 동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런데 해원은 그러지 않았다. 동정도 하지 않고,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도리어 농담을 던지며 웃어 보였다.
“왜 날 동정 안 해요?”
“…동정, 하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아니요. 난 문해원 씨가 나를 가엾고 불쌍하게 여겨 줬으면 좋겠어요.”
“…….”
“그러면 불쌍한 나를, 가여운 나를, 안타까운 나를 떠나지 못할 테니까.”
집기를 수세미로 닦던 해원의 손이 멈추었다. 거품이 손등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뜨거운 게 치밀어서 마음이 울렁거렸다.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뭐 하나 모자란 것 없이 살아왔을 이 넉넉한 남자가 애정을 구걸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빈털터리인 자신에게…….
류원이 한 말은 마치 드라마 대사 같은 비현실적인 말이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말속에 너무 많은 의미와 마음이 담겨 제게 전해졌다.
해원은 거품이 잔뜩 묻은 집기를 싱크대 안에 내려놓고 수도꼭지 손잡이를 올려 물을 틀었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손을 씻었다. 손에 묻은 거품이 물살에 씻겨 내려갔다. 류원의 마음속에 깊게 파인 상처와 슬픔도 이 거품처럼 씻겨 내려갔으면 좋겠다.
손을 탈탈 털어 내고 허리를 감싼 손을 풀어냈다. 몸을 돌리자, 류원이 그대로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제가 뭐라고 강 배우님을 불쌍하다고, 가엾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
“조급해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요.”
해원은 두 팔을 벌려 류원의 허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배고프시겠어요. 식사하러 나가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어요.”
갑자기 정적을 깨는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해원이 먼저 몸을 떼어 내고 거실로 걸음을 옮겼다. 화면에는 ‘이준희 팀장님’ 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휴대폰을 통화상태로 전환했다.
“여보세요.”
- 해원아 혹시 류원이랑 같이 있니?
“네, 옆에 계세요.”
- 류원이 좀 바꿔 줘. 아, 너 혹시 여권 있어?
“여권이요?”
어느새 다가온 류원이 손을 내밀었다. 준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류원에게 전화기를 내밀었다. 류원은 해원의 옷깃을 정리해 주고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무슨 일이야.”
- 드라마 일본에서 촬영 있는 거 알지?
“어, 근데 휴방하면서 그 일정도 같이 밀린 거 아니야?”
- 나도 그렇게 알았는데 촬영 장소 대여 문제로 그냥 예정대로 진행될 모양이야.
“그래서 결론이 뭐야.”
- 내일 모레 출국. 해원이 여권 있겠지?
류원은 소파 테이블을 정리하는 해원의 뒷모습을 힐끗거렸다.
“물어볼게.”
- 그리고 이따가 퀵 하나 갈 거야. 대본 보냈다.
“알겠어.”
- 아! 하나 더. 베놈 연구소에서 또 우편물 날아왔다. 잘 보관…….
“갈기갈기 찢어서 버려.”
칼같이 말을 잘라 내고 전화를 끊은 류원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베놈 연구소라는 말만 들어도 치가 떨렸다. 해원이 테이블을 물티슈로 닦고 그의 옆에 앉았다.
“아까 팀장님이 여권 있느냐고 물으시던데.”
“일정이 딜레이 된 줄 알았더니 그대로 진행하나 봐요. 내일모레 출국이라는데. 해원 씨 여권 있죠?”
“…저 여권 없는데요.”
피스틸이나 스테먼으로 각성할 경우 케일릭 시기의 여권이나 신분증을 폐기하고 재발급받아야 한다. 그런데 해원은 불법 시술 부작용인 무력증과 두통으로 인해 아직 신분증도, 여권도 모두 재발급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 정말요? 장난치지 말고.”
“…피스틸로 각성하고 나서 재발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류원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 벌써 3박 4일 동안 어떻게 있어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분명 불면증이 도져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게 뻔했다.
“하…….”
긴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류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해원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준희 형한테 다시 전화 좀 걸어 봐요.”
해원은 얌전히 휴대폰 잠금을 풀고 통화버튼을 눌러 넘겨주었다. 지루한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졌다. 류원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이 날 때쯤 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해원 씨 여권 없대.”
- 뭐? 왜?
“피스틸로 각성하고 난 뒤에 재발급받는 걸 잊었나 봐. 혹시 편법을 써서라도 빨리 발급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좀 알아봐 줘.”
- 어, 한번 알아볼게. 그리고 여유 있을 때 짐 좀 싸 놔.
“어, 알아보고 연락해 줘.”
류원은 복잡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해원을 두고 3박 4일 동안 일본을 가야 한다니 벌써 숨이 턱턱 막히고 눈이 아픈 느낌이었다. 지독한 불면증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것도 두렵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문해원과 떨어진다는 거였다. 부디 편법을 써서라도 여권이 발급되길 간절히 바랐다.
“만약에 발급 못 받으면 좀 답답하긴 하겠지만 캐리어에 들어가요. 내가 들고 갈게요.”
“예?”
“…농담이에요. 그만큼 내 마음이 간절하다는 거예요.”
해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뺨을 긁었다. 사실 저도 캐리어에 몸이 들어갈 수 있는지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긴 했다. 그 사실을 차마 류원에게 말할 수는 없어 혼자 속으로 낄낄대고 말았다.
“나 짐 쌀 건데, 캐리어 한번 들어가 볼래요?”
“자꾸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니라고 하면 한번 들어가 볼래요?”
류원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해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눈꺼풀을 내리고 숨을 크게 마셨다. 해원의 나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빨리 드라마가 마무리되어 문해원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하아…….”
갑자기 머리 위에서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류원이 놀라 고개를 들고 해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데 해원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입을 약간 벌린 채 동공이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해원 씨?”
해원은 짙은 양귀비 냄새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확 풍겨 온 냄새가 제 신경 세포를 마비시켰다. 근육이 풀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기분은 뭐랄까 감기약을 먹은 것처럼 좀 몽롱하다고 해야 하나.
“하아.”
크게 숨을 마신 해원이 천천히 소파에 누워 몸을 이완시켰다.
“문해원 왜 이래!”
“…하아, 냄새가… 너무, 좋아.”
해원의 입가를 타고 타액이 질질 흘렀다. 류원은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반응을 보인단 말인가. 먹은 거라곤 먹다 남은 피자 몇 조각이 전분데……. 초조하게 입술을 씹으며 해원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어?”
“문해원!”
초점을 잃었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또렷해지면서 해원이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해원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에 이마를 감싸고 허리를 숙였다.
“제가 왜 누워 있어요……?”
“하, 생각 안 나요?”
몇 분 동안의 기억이 없어졌다. 캐리어에 들어가 보라는 류원의 말은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뿌옇게 흐렸다. 과음하고 나면 필름이 끊겨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는 것처럼 정말 아무것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강 배우님이 캐리어에 한번 들어가 볼 거냐고 물으셨고 그 뒤로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아무것도.”
* * *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의 공기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현이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끗거렸다. 류원은 차창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고, 해원 역시 고개를 돌리고 반대편 차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이 싸운 건가?
채현은 잠시 신호가 걸린 사이 전화를 받는 척, 운전석과 뒷좌석을 차단하는 가림막을 올렸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화나셨어요?”
“…….”
“여권을 미리 만들어 놨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해원 씨가 죄송할 문제는 아닌데, 속이 쓰리긴 하네요.”
류원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해원을 바라봤다. 어제 아침, 일주일의 달콤한 휴가를 끝내고 드라마 촬영이 재개되었다.
류원의 촬영은 오후 늦게 시작해 새벽까지 이어졌다.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런데 류원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촬영이 늦게 끝난 것도, 피곤한 것도, 잠을 자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문해원이 여권이 없어 일본 촬영에 동행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준희가 이틀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안타깝게도 여권 재발급에 필요한 서류가 준비되지 않아 재발급이 불가했다. 여권 발급을 위해서는 스테먼이나 피스틸임을 증명하는 검사기록과 확인서가 필수로 들어가야 하는데 발급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서 결국 해원은 일본 촬영에 동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형, 도착 10분 전이에요. 하영 누나도 비슷하게 도착할 거 같아요.”
채현이 가림막을 살짝 내리고 도착 임박을 알려왔다. 드라마 홍보를 위해 고하영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한 주 휴방을 했기 때문에 이 정도 이벤트는 해야 한다는 게 제작사 측의 주장이었다. 류원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돌려 해원을 바라봤다.
“진료 예약해 놨으니까 잊지 말고 준호 형한테 가 봐요.”
“…네.”
해원의 이상 징후가 나타났던 날 바로 연구소로 찾아가려고 했지만, 하필 준호가 미국에서 열리는 세미나 참석차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류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저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제 걱정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해원 씨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잠을 자고 어떻게 잘 지내다가 옵니까.”
류원은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예정된 3박 4일을 꽉 채우고 돌아올 게 뻔했다. 그동안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 할 걸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해원이 손을 뻗어 류원의 손을 감싸 쥐었다. 시선을 내려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빼곡하게 손가락 사이를 채운 손가락이 퍽 예뻐 보였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닿는 열기에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차가 천천히 공항으로 진입했다. 공항 앞에는 취재진과 팬들이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류원은 재킷을 걸쳐 입고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뒤에 하영 누나 차 있는데 에스코트 가실 거예요?”
“…내가 왜?”
“하영 누나가 에스코트할 수는 없잖아요.”
류원이 눈을 사납게 뜨고 채현을 노려봤다. 채현은 얼른 시선을 피해 차를 적당한 자리에 세웠다. 류원의 차량을 알아본 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누군가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차창 밖에는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서정민의 매니저 윤반석이었다. 채현이 반갑게 웃으며 운전석 문을 열었다.
“막둥이 안녕, 류원 씨 안녕하세요, 해원 씨도 오랜만이에요.”
반석의 경쾌한 인사에 채현과 해원이 얼른 반갑게 인사했다. 류원은 서정민 매니저라는 사실만으로도 불쾌한지 인상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무뚝뚝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현장 지원 나왔어요. 팀장님이 해원 씨도 공항 안까지 배웅하라고 하셔서요. 우리 둥이둥이 막둥이, 내려. 형이 주차할게.”
류원은 차창 밖을 한번 힐끗거리고 고개를 돌려 해원을 바라봤다. 카메라와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향해 있었다.
저 많은 인파에 해원이 휩쓸려 다칠까 걱정스러웠다. 실제로 모 아이돌 그룹의 팬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사람이 짓밟히는 사고가 있기도 했다. 해원의 손을 쥐었다가 놓고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경호원들도 있고 준희 형도 있는데 뭐 하러.”
“그래도… 가시는 거 보고 싶어요.”
“나중에, 오늘은 그냥 여기 있어요.”
해원이 배웅하고 싶다는 의사를 재차 피력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안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지만 소용없었다. 류원이 내리기 전 마지막으로 해원과 눈을 마주치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갔다 올게요.”
“…다녀오세요.”
해원은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문을 활짝 열었다. 차 밖으로 몸을 빼내고 류원이 내릴 수 있게 옆으로 비켜섰다. 류원이 긴 다리를 뻗어 차에서 내리자,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요란하게 터지기 시작했다.
“왔어?”
차에서 약간 떨어져 팬들을 통제하고 있던 준희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류원은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 작게 투덜거렸다.
“…기자들 왜 이렇게 많아.”
“강류원이 공항에 뜨는데 기자가 적으면 쓰나. 우리 강 배우 체면이 있지.”
준희가 뒤쪽에 힐끗거리고 류원을 바라봤다. 선글라스에 얼굴이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준희는 아무 말 없이 류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류원은 뒤쪽에 비상등을 켜고 서 있는 승합차로 다가가 차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곧 차 문이 열리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고하영이 환하게 웃으며 차에서 내렸다. 눈이 아플 만큼 카메라 플래시가 펑펑 터졌다.
“뭘 이렇게 빼입었어. 무슨 시상식 가냐.”
류원을 보자마자 웃고 있는 입으로 독설을 날렸다. 업계에서 소탈하기로 유명한 그녀는 아이러니하게도 청순 여배우의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청바지에 흰 티, 포니테일로 시원하게 올려 묶은 헤어. 한눈에 보기에도 수수한 그녀와 달리 류원은 검은색 슬랙스에 스트라이프 셔츠, 거기에 재킷과 선글라스까지 완벽하게 세팅한 모습이었다.
“협찬, 근데 이런 이벤트는 왜 하는 건데.”
“휴방 타격을 최소화하기 위한 몸부림이랄까? 협조 좀 해.”
“귀찮게.”
“내가 죽일 년이네. 내가 여기서 머리 풀고 석고대죄라도 하리?”
“재밌겠네.”
“너 죽을래? 이게 아주 선배 알기를 개떡으로 알지?”
“정확하게 데뷔 일로 따지면 내가 너보다 열흘 선배다.”
카메라 속 두 사람은 선남선녀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정작 그들의 대화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경호팀과 준희를 비롯한 매니저가 달라붙어 공간을 확보했다.
해원은 다정하게 걸어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어쩐지 기운이 쭉 빠지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괜히 등이 간지러웠다.
시끄러운 소리와 인파 속에서 파묻힌 류원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해원은 눈을 떼지 않았다. 어느새 카트에 여행용 캐리어를 실은 채현이 팔을 툭 두드렸다.
“형 다녀올게요.”
“…어, 고생해. 강 배우님 며칠 예민할 수도 있으니까 네가 이해 좀 하고.”
“네! 다녀오겠습니다. 류원이 형 없을 때 푹 좀 쉬세요.”
해원은 채현을 배웅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캐리어에 들어갈 걸 그랬나.’
* * *
해원은 대기실 의자에 앉아 포털사이트 메인에 뜬 류원과 하영의 사진을 넘겨보고 있었다. 사진을 한 장씩 넘길수록 해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가 좋다고 이렇게 웃고 있어.’
속으로 투덜거리며 사진을 넘겼다. 하영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어 주는 류원이 못마땅했다. 아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사진을 끝까지 넘겨보지 못하고 휴대폰 화면을 꺼 버렸다. 손을 뻗어 옆자리를 쓸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강류원의 자리가 익숙해 있었다.
늘 여기 있었는데.
텅 빈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자리에 그가 앉아 있었으면 좋겠다.
“해원 씨.”
“아, 안녕하세요.”
해원은 뒷주머니에 휴대폰을 꽂아 넣고 몸을 일으켰다. 의사 가운을 입은 준호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와 해원의 손을 맞잡았다.
“안색이 좋아 보이네요. 류원이랑 지내는 거 괜찮은가 봐요.”
“…잘해 주세요.”
준호는 미소를 짓고 해원을 상담실로 안내했다. 커피포트에 물을 담아 전원을 올리고 믹스커피 두 개를 뜯어 종이컵에 쏟아부었다. 적정량의 물을 부은 종이컵을 해원의 앞에 그리고 제 앞에 두고 책상 의자에 앉았다.
책상 하나를 두고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가볍게 대화를 시작했다.
“류원이가 잘해 준다는데 난 잘 상상이 안 되네.”
“…다정하시고 따뜻하시고 잘 챙겨 주세요.”
“엑?! 혹시 류원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살고 있는 거 아니에요?”
준호가 과장된 몸짓을 하며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강류원은 항상 까칠했고, 예민했고, 사나웠다.
처음 준희가 류원의 매니저를 맡았을 때는 눈에 눈물 마를 날이 없을 정도였다. 강류원에게 쥐 잡듯이 잡히고 들어와 눈물, 콧물을 쏟으며 매운 닭발을 뜯던 준희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해원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류원이한테 대충 이야기는 들었어요. 잠깐 의식을 잃었다던데.”
“…저도 갑자기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어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그냥 뿌옇기만 합니다.”
“일단 등 좀 볼 수 있을까요? 정밀 검사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육안으로 나무 상태가 어떤지 좀 보고 싶은데.”
해원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셔츠 단추를 풀었다. 등에 새긴 꽃을 누군가에게 보여 준다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눈을 질끈 감고 셔츠를 벗었다.
준희는 안경을 고쳐 쓰며 해원의 등을 살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색이 옅던 게 이제는 제법 나무색을 띠기 시작했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확실히 나무색이 짙어졌어요. 색이 드문드문 날아간 부분도 조금씩 채워지는 중이고.”
“…좋아지고 있다는 건가요?”
“네, 물론이에요. 근데 이 양귀비는 쓸데없이 색이 영롱하고 예쁘네요.”
해원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꽃이 새겨지는 과정이 오직 섹스뿐이라 꽃을 언급하는 게 민망했다.
준호가 셔츠를 어깨에 걸쳐 주자 해원은 얼른 팔을 끼워 넣고 단추를 잠갔다. 등에 꽃이 새겨진 이후로 거의 짙은 계열의 셔츠를 주로 입었다. 혹시나 등에 새겨진 꽃이 비칠까봐 신경 쓰였다. 이 꽃은 자신만의 꽃이 아니었다. 강류원의 은밀한 부분이었다. 그것을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준호는 앞 포켓에서 펜을 꺼내 차트에 해원의 상태를 꼼꼼하게 기록했다.
“주파수라는 게 참 신기하죠? 류원이는 몇 년간 불면증으로 고생했는데 지금은 잠도 잘 자고 혈색도 좋아졌어요. 그리고 해원 씨는 색이 옅었던 나무가 짙어졌고……. 이럴 때보면 의학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요.”
“…….”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 내가 조사한 결과를 말해 줄게요. 워낙 변수가 많은 상황이라 이게 맞는다고는 확신은 못해요.”
“…어쩐지 긴장이 되네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 몸이 안 좋아지거나 나빠진 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나무는 건강해지고 있지만, 내부 장기는 나빠지고 있다든가 하는 그런…….
“일종의 중독 증상이에요.”
“중독… 이요?”
“해원 씨 등에 새긴 양귀비는 맹독이 있는 꽃이에요. 그래서 베놈스테먼과 관계한 피스틸이 독을 받는 행위를 본딩이라고 해요. 해원 씨는 류원이와 본딩 상태예요. 그래서 이 몸속에 양귀비의 맹독이 흐르고 있고.”
“…네.”
“지금은 안티스테먼과 관계를 하면 독을 정화할 수 있어요. 그래서 본딩을 끊어 낼 수가 있죠. 그럼 다른 스테먼과 관계를 해도 중독사하지 않아요.”
해원은 조급증이 일었다. 이 뒤에 나올 말이 절망적일까 봐 두려웠다. 마른 침을 삼키고 준호의 입에 시선을 고정했다.
“혹시 밴딩(Banding)이라고 들어봤어요?”
“…아니요. 처음 듣습니다.”
해원은 약간 식어 미지근한 커피를 입가에 머금었다. 입안을 채우는 텁텁함에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밴딩은 베놈스테먼과의 관계에서만 맺어질 수 있어요. 두 사람의 육체와 정신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순간 이루어지는 건데 확률적으로 굉장히 낮아요.”
“…….”
“베놈과 밴딩을 하게 되면 피스틸의 나무에 더 이상 꽃이 피지 않아요.”
“네?”
준호는 벽 한 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책장에서 두툼한 책을 하나 꺼내와 해원의 앞에 놓았다.
엄청난 두께에 저도 모르게 몸을 물린 해원이 멋쩍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책보다는 운동 쪽에 관심이 많았기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준호가 피식 웃고는 표시해 둔 부분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책에는 꽃이 흐드러지게 핀 피스틸의 나무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밴딩을 한 후 피스틸의 몸에 더 이상 꽃이 피지 않았고, 건강 상태 역시 양호했다.]
“류원이 전화 받고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보고 자문을 구했어요. 다양한 의견이 나왔고, 그중 가장 신빙성이 있는 건 바로 이거예요. 밴딩.”
“…그럼 제가 강류원 씨와 밴딩을 했다는 건가요?”
해원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밴딩에 대해서 아는 게 없으므로 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준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밴딩을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른 편이었다. 더구나 밴딩이 일방적으로 맺어지는 현상이 아니다 보니 그럴 확률은 현저히 낮았다. 류원이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해원에게 집착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준호가 봤을 때 해원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해원을 힐끗거리고 펼쳐놓은 책을 바라봤다.
밴딩의 조건은 두 사람 사이의 감정 교류, 육체적 반응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야 가능했다. 일방적인 감정이나 한쪽이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단순하지만 단순하지만은 않은 행위였다.
“그럼요?”
“밴딩의 전조증상쯤으로 보고 있어요. 피스틸은 일반적으로 꽃을 품을 수 있지만, 꽃 냄새는 맡지 못해요. 그런데 해원 씨가 잠시 기억을 잃었던 그때 꽃 냄새가 너무 좋다고 했대요. 후각이 예민하지 않은 피스틸이 베놈의 꽃냄새를 맡은 거죠.”
후각 구조는 피스틸보다 스테먼이 더 예민하게 발달하여 있었다. 그래서 노멀들이 전혀 맡지 못하는 피스틸의 나무 냄새를 스테먼은 맡을 수가 있었다.
해원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꽃 냄새, 준호가 말하는 그 꽃 냄새를 맡은 적이 있었다.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또다시 몸에 문제가 생긴 건가. 해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저, 사실 그때 말고 그전에도 꽃 냄새 맡은 적 있어요.”
스테먼은 무취의 존재였다. 허벅지의 꽃을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만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류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류원과 두 번째로 몸을 섞을 때 꽃 냄새를 맡았다. 짙고 향기로운 꽃 냄새에 홀린추가이 꽃잎을 핥던 순간이 눈앞으로 스쳤다. 미세하게 떨리던 손끝이 이제 눈으로 보일 만큼 크게 떨렸다.
“처음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두 번째 관계할 때 강 배우님 몸에서 꽃 냄새를 맡았어요. 그런데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어요. 그냥 황홀하다 정도로 인식했던 거 같습니다.”
준호는 데스크톱 전원을 올리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강류원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의 집착을 보였다. 베놈스테먼의 본능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해원을 옭아매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몸에 독을 퍼부은 걸로도 모자라… 지속해서 밴딩을 시도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감정 교류가 많은 작용을 하고 있어요. 이 상태가 계속 지속하면 머지않아 밴딩을 하게 될 겁니다.”
감정교류, 해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강류원과 자신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는 빠르다면 빠르고 느리다면 느렸다.
24시간 붙어 있다 보니 금세 서로의 존재가 익숙해졌고, 조금씩 서로의 외면이 아니라 내면에 집중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상처를 발견할 때마다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처음에는 이게 주파수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꼭 주파수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두 사람 사이가 너무 빨리 진행되고 있어요.”
“…….”
“피스틸이 베놈과 밴딩을 하고 나면 꽃은 더 이상 새겨지지 않지만, 그가 아닌 사람과 다시는 관계를 할 수가 없어요. 어느 한쪽이 죽어야지 이 모든 게 끝납니다.”
“그럼 이게 안 좋다는 말씀이신가요.”
준호는 대답 대신 영원 복합 연구소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관리자 모드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비밀 게시판 하나를 열고 모니터를 돌려 해원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류원이가 최근에 베놈스테먼 정기 검사를 이쪽에 받으면서 내가 류원이 주치의로 지정됐어요. 그리고 이건 베놈스테먼 연구소에 온 협조 공문이에요.”
해원은 담담한 얼굴로 화면을 가득 채운 글씨들을 찬찬히 읽어 나갔다. 그런데 점점 해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협조를 부탁한다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난 뒤 해원은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책상을 쾅 내리쳤다. 눈가에 열이 몰리면서 화가 치밀었다.
“이 개새끼들!”
“…진정해요. 해원 씨.”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보다시피 류원이는 이 프로그램의 대상자예요.”
한때 대한민국 인구의 10%를 스테먼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년 개체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스테먼 소멸 위기 국가 후보에 올라 있었다.
베놈스테먼의 숫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오죽하면 얼굴이 알려진 배우까지 종족 번식이라는, 이름마저도 끔찍한 프로그램에 참여시키려 하겠는가. 준호가 씁쓸하게 웃었다.
“후우, 그럼 밴딩한 베놈스테먼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겠네요.”
해원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물었다. 입안의 연한 살을 질근질근 씹어 댔더니 살이 너덜거렸다.
“해원 씨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거 같네요. 내가 이걸 보여 주는 이유는 류원이와 밴딩이 위험하다는 거예요.”
“위험하다고요?”
“류원이가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된 이상 베놈 연구소가 발목을 잡을 거예요. 아직은 내 선에서 막을 수 있는 수준이라 해원 씨 상태를 정상으로 올려놨지만… 조만간 밝혀질 거예요.”
준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 몰랐다. 류원이 주파수에 맹목적으로 매달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밴딩까지 염두에 두고 있을 줄 몰랐다. 마른세수를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히 류원이는 해원씨에게 계속 밴딩을 시도할 거고 언젠가는 밴딩이 되겠죠.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피스틸과 밴딩을 한 걸 알면…….”
“…….”
“해원 씨뿐만 아니라 류원이까지도 위험해질지 몰라요.”
* * *
주인이 없는 집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같은 공간, 같은 온도, 같은 습도인데 류원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해원은 류원이 늘 앉는 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쯤 촬영을 하고 있으려나, 일본 일정표를 받지 못해 지금 류원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괜히 화면만 만지작 거렸다.
집으로 돌아온 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일정한 시간에 해가 뜨고 지고, 사계절이 순서대로 지나가는 것처럼 제 감정 역시 그냥 순리에 맡기기로 했다.
불면의 밤을 보낸 그와 나무가 죽어 가는 자신이 기적처럼 만났다. 그리고 강류원과의 밴딩이 된다면 이 또한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거부하는 방법도 모르겠고 거부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자신 역시 어느새 강류원에게 천천히 젖어 있었다.
갑자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해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나 이내 입술을 삐죽이며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화면에는 ‘선배 수철’ 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46기 문해원입니다.”
- 뭐 하고 있어?
“저, 그냥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 해파리 오늘 쉬는 날?
“네, 강류원 씨가 일본으로 촬영을 가셔서 쉬고 있습니다.”
- 나와라, 술이나 한잔하자. 할 이야기도 좀 있고.
해원은 반사적으로 벽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9시가 훌쩍 넘었다. 오늘은 정말 머리가 무거워 외출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일자리까지 소개해 준 선배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어 말끝을 흐리며 물었다.
“…지금이요?”
- 어, 우리 자주 가던 곱창집 있지? 30분 후에 거기서 보자.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입술을 깨물었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터덜터덜 욕실로 향했다. 어쩌면 수철이 일자리를 소개해 주지 않았다면 아직도 강류원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자신은 나무가 죽어 가는 것도 모른 채 돌연사로 사망했을 수도 있다. 해원은 무거운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발에 욕실 슬리퍼를 끼워 넣었다.
막 휴대폰을 선반 위에 올려 두려는 순간 다시 한번 전화벨이 울렸다. 어? 해원의 눈이 커졌다.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밥은 먹었어요?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해원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촬영이 얼마나 고생스러웠을지 안 봐도 눈에 선했다. 해원은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괜히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네, 먹었어요.”
- 안 먹은 거 다 아는데… 요새 자꾸 거짓말만 느네.
“저, 정말 먹었어요.”
어디선가 류원이 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해원이 주변을 살피면서 말을 버벅거렸다. 입맛이 없어 점심도, 저녁도 거른 상태였다. 곧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해원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문질렀다.
- 나는 촬영 끝나고 숙소 들어왔어요. 이제 샤워하고 좀 쉬려고요.
“오늘 많이 더우셨죠?”
- 공항에서는 너무 아쉬웠는데 막상 오니까 해원 씨 안 데리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습도가 높아서 숨만 쉬어도 지치네요.
“차가운 물 많이 드시지 마시고 물 드실 거면 미지근한 물로 드세요.”
걱정스러운 말을 하는 게 어색해서 손가락으로 뺨을 살살 긁었다. 그 뒤로 일상적인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는 촬영하면서 있었던 일을 말하며 작게 투덜거리기도 했고, 풍경이 예뻐서 더운 것과 별개로 눈이 즐거웠다고 했다. 해원은 간간이 대답을 하며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 잠이 안 올 거 같은데… 밤새도록 통화할래요?
“…억지로라도 주무셔야지 내일도 촬영하실 텐데.”
- 걱정하지 마세요. 해원 씨 안 만났을 때는 일주일에 다섯 시간 자고 촬영했으니까. 나한테는 익숙한 일이에요. 조금 괴롭긴 하지만.
류원이 작게 웃었다.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잠이 조금만 부족해도 눈이 아프고 머리가 몽롱한데 일주일에 다섯 시간이라니…….
해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될 류원이 안쓰러웠다. 류원과 통화를 하다 보니 벌써 약속 시각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저, 잠시 나갔다가 와야 합니다.”
- 어디?
“액션스쿨 선배가 잠깐 얼굴 좀 보자고 해서요.”
- 이 야심한 밤에 만나서 뭐 하려고요. 나는 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밤 새게 생겼는데 해원 씨는 나 없으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외출하네요.
불퉁한 목소리를 들으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혹시나 웃음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을 세게 막았다. 그가 불퉁한 목소리를 낼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눈을 어떻게 뜨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이 눈에 선했다.
“일찍 들어올 겁니다.”
- 다녀와서 전화해요.
“아니요, 내일 전화하겠습니다.”
- 어차피 안 잘 거니까 그냥 전화해요. 목소리라도 들으면 잠이 올지 어떻게 알아요.
해원은 꼭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류원과 전화 통화를 하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했다. 결국,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해원은 숨을 헐떡이며 가게 문을 열었다. 허름한 골목에 있는 곱창집 내부는 곱창 특유의 냄새와 함께 연기가 자욱했다. 안쪽 테이블에 앉은 수철을 발견하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선배님 46기 문해원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 해파리 왔냐.”
수철은 피식 웃으며 노릇노릇하게 익은 곱창 한 점을 해원의 앞으로 내밀었다. 수철의 오랜 버릇이었다.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늘 이렇게 음식을 먹여 주곤 했다. 해원은 군말 없이 입을 벌리고 곱창을 받아먹었다. 고소한 맛이 혀끝에 감돌았다.
“기특하게 안 잊어버렸네? 얼른 앉아라.”
맞은편 의자를 빼자, 수철이 고개를 저었다. 의아한 얼굴로 수철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고갯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는 사용한 흔적이 있는 컵과 수저 한 벌이 놓여 있었다.
“해원아 오랜만이다.”
낯선 목소리에 해원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해원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해원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입을 벌렸다.
“설마 최 감독님?”
“…잘 지냈어?”
해원은 눈물이 그렁그렁 한 얼굴로 최 감독의 손을 맞잡았다. 최규진, 대한민국 첫 1,000만 영화 <이탈>의 감독이자 해원의 첫 스턴트 데뷔작인 <파애>의 감독이었다.
그는 실수투성이인 초보 스턴트맨을 다독이고 손수 연기 지도까지 해 주며 이끌어 주었다. 해원에게는 각별한 사람이었다.
규진은 해원의 패기와 열정을 기꺼워했다. 그래서 운 좋게 규진의 영화에 연달아 출연할 수 있었다. <세븐데이즈>, <비열한 복수>까지……. 스턴트 일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것도, 도전이라는 것에 겁을 내지 않게 된 것도 모두 규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규진은 해원을 스턴트맨이 아니라 배우로 키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일부러 필요하지도 않은 감정 연기를 시키고 손끝, 발끝, 호흡, 발성, 발음까지 틈날 때마다 가르쳤다.
해원은 나중에 도움이 될 거라는 규진의 말에 열심히 배웠고 비열한 복수에서는 아주 작은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세 작품을 함께 하면서 규진은 해원을 살뜰히 챙기며 이 바닥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런데 해원이 각성하기 한 3개월 전쯤, 그는 돌연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해원은 가슴이 벅차올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저 손만 꼭 붙잡고 있었다.
“감독님, 감독님.”
“…그래, 수철이한테 그간 사정은 대충 들었다. 마음고생 심했을 텐데… 고생했다.”
고생했다는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고 크게 심호흡했다. 규진이 손목을 잡아당겨 옆자리에 앉혔다. 갑작스러운 만남에 정신이 없었다. 규진은 종업원에게 소주잔을 부탁하고 앞 접시에 곱창을 덜어 해원의 앞에 놓아 주었다.
“강류원 매니저로 일한다고?”
“…네.”
“배우 해야 할 놈이 왜 매니저를 하고 있어.”
규진은 피식 웃으며 마침 종업원이 가져다준 소주잔을 받아 해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소주병을 들어 해원의 잔을 채웠다. 해원이 고개를 돌려 소주를 조금 입에 머금고 내려놓았다. 소주 특유의 알싸함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잘 익은 곱창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강류원 지랄 맞기로 유명한데 안 힘들어?”
“…잘해 주십니다.”
곱창을 씹으며 류원을 떠올렸다. 업계에서 지랄 맞기로 소문난 건 맞지만 그건 다 잠을 자지 못해 예민해진 신경 탓이었다. 아무리 성격 좋은 사람이라도 일주일에 다섯 시간을 잔다면 다 까칠하고 지랄 맞을 것이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류원의 근사한 얼굴을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파애 작업할 때도 나랑 사사건건 부딪쳐서 꽤 피곤했거든.”
“…지금은 안 그러십니다. 새벽 늦게까지 촬영할 때도 짜증 한번 안 내고 열심히 하십니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법한 이야기는 하지 말고.”
“정말입니다! 강 배우님 책임감 있고 성실하십니다.”
해원은 규진의 비웃음에 발끈해 큰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곱창집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가 금세 흩어졌다.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저, 담배 한 대 피우고 오겠습니다.”
“같이 가.”
해원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규진도 몸을 일으켰다. 곱창집 옆에 길게 난 골목길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끝에 불을 붙였다. 길게 담배를 빨고 손가락에 걸었다.
“운동도 그만두더니 담배도 피우고, 우리 해원이 많이 망가졌네.”
“…힘든데 의지할 곳이 없어서요.”
해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담배를 입가로 가져갔다. 규진은 담배를 피우지 않고 담벼락에 기대어 서서 가만히 해원을 바라봤다.
전보다 살도 빠지고, 근육도 많이 줄어 체격이 왜소해 보였다. 무심하게 손을 뻗어 가슴 근육을 꾹꾹 눌렀다. 단단하기는커녕 물렁물렁한 수준의 가슴을 눌러보고 기가 막힌 듯 실소했다.
“몸이 완전히 갔네? 배우 매니저 한다는 놈이 운동도 좀 하고 그래야지.”
“…조금씩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기술은 잘 씁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한번 배운 기술들은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상대를 어떻게 타격하고 공격해야 하는지 몸이 먼저 인지하고 반응했다.
규진은 뒤늦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새빨간 불씨에 담배가 타들어 갔다. 해원이 먼저 담배를 비벼 끄고 원통형의 재떨이에 꽁초를 던져 넣었다.
“왜 갑자기 영국으로 떠나신 것인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이 판이 지긋지긋해서. 주연 배우 비위 맞추랴, 스태프들 눈치 보랴, 투자자들 접대하랴 어느 날 갑자기 정말 싫어지더라.”
“…….”
“이렇게 해서 나한테 남는 게 뭔지. 도대체 나는 뭘 위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어.”
회한에 찬 얼굴로 말하는 규진에게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고단함이 묻어났다. 늘 현장에서 누구보다 열정적이었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규진이었다. 그래서 해원은 그를 존경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느끼고 그는 담배를 비벼 끄고 몸을 돌렸다.
“들어가자.”
규진은 씩 웃으며 해원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술자리는 꽤 흥겹게 이어졌다. 초보 스턴트맨이었던 해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업계동향이나 에피소드 등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 쌓인 소주병이 대여섯 개가 되었을 때 해원은 손부채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마신 술에 취기가 올랐다.
“저 화장실 좀…….”
눈앞이 핑핑 도는 느낌에 해원은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터덜터덜, 가게 밖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두드렸더니 안에 사람이 있는지 노크가 되돌아왔다.
해원은 밖으로 나와 담배를 빼 물었다. 갑자기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얼른 담배에 불을 붙이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에는 반가운 이름이 떠 있었다.
“여보세요.”
- 술 많이 마셨어요?
“조금요. 뭐 하고 계세요.”
해원은 담벼락에 등을 대고 쪼그려 앉았다.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담배까지 피우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고개를 두어 번 젓고 전화기를 귀에 꼭 붙였다.
- 담배 피우고 있나 봐요.
“네, 화장실 가려고 나왔다가 담배가 피우고 싶어서…….”
- 해원 씨 취한 거 같은데 괜찮아요?
“…저요? 아닌데. 안 취했는데. 괜찮은데.”
해원은 담배 연기가 역한 기분이 들어 얼른 바닥에 비벼 끄고 꽁초를 재떨이에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간 꽁초가 재떨이에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
“에이.”
해원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몸을 일으켜 꽁초를 주워 재떨이 안에 던져 넣었다.
- 음, 취했는데, 취한 거 같은데, 취했을 텐데.
“진짜 아닌데, 안 취했는데, 멀쩡한데.”
유치한 말장난에 작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울리며 웃는 웃음소리가 좋아 휴대폰을 더 바짝 끌어당겼다. 바짝 붙인다고 해서 더 잘 들리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자꾸 류원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배우님은 뭐 하고 계세요? 식사는 하셨어요?”
- 대본 보고 있었어요. 식사는 아까 간단하게 먹었고.
“더우니까 식사 잘하셔야 해요. 억지로라도 드세요. 잠도 못 주무시는데 식사까지 못 하면 체력 떨어집니다.”
해원은 흙바닥에 손가락으로 강류원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썼다. 술에 취해 삐뚤빼뚤한 글씨가 바닥에 그려졌다.
- 해원 씨 술 취하니까 귀엽네. 나중에 나랑도 술 마셔요. 말꼬리 늘어지면 확 잡아먹게.
“저 잡아 드시게요?”
- 아, 문해원이랑 자고 싶다.
장난스럽게 말하는 류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작게 미소 지었다. 문득 처음 만났을 때 류원이 떠올랐다. 딱딱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제 손목을 붙잡던 그 순간. 해원이 바보처럼 웃음을 흘렸다. 마음을 누가 막 간지럽히는 것 같아서 가슴을 손으로 벅벅 긁었다.
“저… 이런 말 좀 이상한데.”
- 응?
바닥에 쓴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손가락으로 글씨를 덧그렸다. 거의 두 달 가까이 늘 곁에 있어서 강류원의 빈자리를 느낄 새가 없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떨어지고 나니 그의 빈자리가 못내 아쉽고 그리웠다.
또 준호가 보여준 협조 공문이 자꾸 명치 끝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해원은 손끝에 묻은 흙을 털어 내고 괜히 등을 한번 쓸었다. 이 등에 류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가 강 배우님, 꼭 지켜 드릴게요.”
- 갑자기?
“저는 매니저니까요. 다른 뜻은 없어요. 매니저라서… 그래요.”
류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작게 들려오는 숨소리가 아니었다면 전화가 끊어졌다고 생각이 들 만큼. 화장실 쪽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몸을 일으켜 화장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문해원.
“…….”
- 다른 뜻 정말 없어?
해원은 화장실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다른 뜻이 없냐고 묻는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드러낸다는 게 두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속을 채우는 간지러움이 뭘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 대답해 봐. 진짜 그게 다야?
“그냥… 제가 지켜드리고 싶어요. 심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강 배우님이 다치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지켜 드리고 싶어요.”
해원의 뺨에 붉은 홍조가 떠올랐다.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마음이 뜨거워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 그래요, 지금은 그게 전부라면 어쩔 수 없지. 일찍 들어가서 쉬어요. 들어가면 전화하고.
“네에…….”
- 말꼬리 늘이지 말고, 보고 싶으니까.
숨이 덜컥 막히고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휴대폰만 귀에 대고 있었다. 그 뒤로 류원이 뭐라고 몇 마디 더 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으니까.
보고 싶으니까.
그 말만 제 귓가에 맴돌았다. 끊어진 전화기를 들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뭐하느라 이렇게 늦게 와.”
해원은 넋이 나간 얼굴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다. 수철이 투덜거리며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해원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빈 병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여전히 꿈을 꾸는 것처럼 기분이 몽롱했다. 강류원 특유의 목소리가 자꾸 귓가를 간지럽혔다.
“해원아.”
“…….”
“문해원.”
“아, 네네!”
“왜 이렇게 넋이 나갔어. 화장실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아무 일도…….”
수철과 규진이 잔을 들자, 해원이 얼른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쳤다. 맑은소리를 내며 부딪친 잔을 고개를 돌리고 홀짝였다. 해원이 크으-,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는 찰나 규진이 가방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해원의 앞에 놓았다.
표지에는 <포이즌> 이라는 글씨가 크게 인쇄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규진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해원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규진을 바라봤다. 이건 책이 아니라 대본이었다.
“감독님 새 영화 시작하시는 겁니까?”
“…그래. 은퇴 선언 번복하는 거 죽기보다 싫은데 꼭 작업하고 싶은 사람이 생겨서.”
“…정말 잘 됐습니다.”
규진은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곱창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소주 특유의 쌉쌀한 맛을 지워 내고 해원의 어깨를 손으로 붙들었다.
“너 나한테 스턴트 때려치우면 배우 생각해 보겠다고 한 거 기억나냐?”
해원은 취기가 오른 얼굴을 문지르고 생각을 더듬었다. <비열한 복수>에 단역으로 출연했을 때 규진이 배우 해도 잘하겠다며 저를 치켜세운 적이 있었다. 그래서 스턴트 때려치우면 배우로 나서야겠다며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그때는 스턴트를 평생 직업으로 생각했었고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에둘러 거절한 것뿐이었다. 규진은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거 지금 생각해 봐라. 포이즌에 해원이라는 배역 너 생각하면서 쓴 거니까 네가 꼭 해 줬으면 좋겠다.”
* * *
류원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잠시 선잠이 들었지만, 고작 10분 남짓이었다. 유난히 긴 밤이었다.
거의 두 달간 편히 잠들었던 게 무색하게 해원이 곁에 없으니 바로 불면증 증상이 나타났다. 기가 막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문해원이 없다고 바로 불면증이 나타나다니, 몸이란 것이 간사하기 짝이 없었다.
커튼을 걷어 내고 창문을 열었다. 습한 기운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에어컨 온도를 조금 더 내리고 대본을 집어 들었다. 오늘 촬영 분량을 대충 확인하고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7시, 어젯밤 술을 진탕 마신 해원이 곤히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새근새근 작게 숨을 내쉬며 곤히 잠든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 제가 강 배우님, 꼭 지켜 드릴게요.
지켜 준다는 말이 이렇게 간지러운 말이었던가. 생각해 보면 지금껏 타인이 자신을 지켜 준다고 한 적은 없었다. 서른세 살이나 먹은 성인 남성을 누가 지켜 준다고 할까. 실없는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밑도 끝도 없이 대뜸 지켜 준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쓸데없이 비장하고 단단했다.
누가 누구를 지켜.
류원은 괜히 투덜거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하고 나와 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에 짜증이 치밀 때쯤 잠기운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형? 벌써 일어나셨어요?
“인스턴트 죽 가지고 온 거 있으면 내 방으로 가져와.”
- 예? 아침 드시게요?
류원은 대답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현이 방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형, 안녕히… 못 주무셨네요. 불면증 도지신 거예요?”
채현이 류원의 안색을 살피고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시끄러워, 죽은?”
“아… 다시 확인하고 가져다 드리려고요. 정말 죽 갖다 드려요?”
류원은 짜증이 치미는 걸 간신히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채현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서 있다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채현은 죽을 데우는 사이 류원의 개인 스태프 단톡방을 열고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류원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으니 각별히 주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전송을 누르자, 곧 알림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하나같이 우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류원의 불면증이 도져 잠을 자지 못하면 얼마나 예민하고 날카롭게 구는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벌써부터 숨이 막혔다. 해원이 있었다면 좀 수월했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채현은 비장한 얼굴로 작은 쟁반에 죽 그릇을 올려 류원의 방문을 두드렸다.
어느새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은 류원이 말끔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류원을 지나쳐 쟁반을 테이블 위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너무 뜨겁게 데웠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걸 보며 채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걸로도 괜히 트집이 잡혀 쥐 잡듯이 잡힐 수도 있었다. 수저로 죽을 두어 번 휘적거려 한 김 식히고 류원을 불렀다.
“식사하세요.”
“몇 시부터 촬영이야?”
“어젯밤에 하영 누나랑 촬영 순서 바꾸기로 했거든요. 아마 8시쯤이면 마무리 될 거 같아요. 정확하게 시간 알아보고 말씀드릴게요.”
류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 의자에 앉았다.
- 더우니까 식사 잘하셔야 해요. 억지로라도 드세요. 잠도 못 주무시는데 식사까지 못 하면 체력 떨어집니다.
술 취한 와중에도 제 걱정이 늘어지던 해원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 그릇을 수저로 휘적거리다가 입으로 가져갔다. 냄새는 분명 고소한데 입은 아무 맛도 느끼지 못했다. 쌀알이 부서져서 입안을 돌아다녔다.
입안이 마르고 까끌까끌해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뱉어 내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물을 조금 마셨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넘어가지 않는 죽을 억지로 퍼 입속으로 넣었다.
삼십여 분에 걸쳐 식사를 마친 류원이 새로운 생수병을 따서 입가로 가져갔다. 그릇은 텅 비어 있었다. 죽보다 물을 더 많이 마신 기분이었다.
류원은 빈 그릇을 바라보다가 충동적으로 휴대폰을 들어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을 실행시켰다. 그리고 밥알 하나 남지 않은 빈 그릇을 촬영했다.
“커피 가져와.”
“네, 정확한 시간은 팀장님이 현장 가서 확인하시고 연락해 주신대요.”
채현이 휴대폰을 뒷주머니에 꽂아 넣고 쟁반을 들었다. 뭐야 다 먹었어? 텅 빈 죽 그릇과 류원을 번갈아 바라보던 채현이 류원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딴청을 부렸다. 잠을 자지 못하는 날에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류원이라 텅 빈 죽 그릇이 채현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류원은 창가에 기대어 앉아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깨끗하게 비운 죽 그릇 사진을 띄워 놓고 귀를 만지작거렸다. 분명 목적이 있어서 찍은 사진이지만 막상 실행에 옮기자니 낯간지러웠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화면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우습잖아, 이런 사진 같은 거… 칭찬받고 싶어 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류원이 작게 실소했다. 고심 끝에 사진을 삭제하기로 했다. 손끝으로 화면 하단에 있는 쓰레기통 모양을 클릭했다.
[사진을 삭제하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화면에 떴다.
류원은 숨을 크게 삼키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해원의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리는 휴대폰을 바라보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여보세요.”
- 크흠, 일어나셨어요?
“목소리가 많이 안 좋네요. 속은 괜찮아요?”
- 네, 속은 괜찮은데 오랜만에 술을 마셨더니… 필름이 좀 끊긴 거 같습니다.
“음……?”
- 어젯밤에 통화 기록이 있던데… 혹시 실수한 게 있나 해서요.
류원은 소리 없이 피식 웃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자신과 통화 기록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 들었을까. 이 상황이 재밌기도 조금 언짢기도 했다.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 거예요?”
- 아, 드문드문 기억은 나는데…….
“내가 좋아 죽겠다고 한 건 기억나요?”
- 네?!
괜한 심술이었다. 지켜 주겠다고 밤새 사람을 설레게 하더니 인제 와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에게 작게 심술이 일었다.
- 아, 제가, 제가 진짜 그랬나요? 아, 그러니까 그건 제가 술에 취해서 시, 실수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왜 죄송하지? 술 깨고 나니까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어요?”
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었다가 전화기를 바꿔 드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류원은 피식 웃으며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다.
“어제…….”
- 아니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쿵, 발아래로 무언가 떨어진 기분이었다. 허벅지 안쪽이 따끔거렸다. 해원은 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무미건조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모든 상황을 일관했다. 어젯밤, 지켜 주고 싶다는 것 말고 다른 뜻은 없느냐고 물었을 때도 한참을 망설이던 그였다.
술에 취한 정신마저도 무뚝뚝해 빠진, 줄곧 운동만 해서 할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는, 감정마저도 수동적인… 그게 바로 문해원이었다. 그런데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내고 속을 내보였다.
류원은 조급증이 일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키고 방안을 서성거렸다.
“아침부터 사람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네요.”
-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촬영 빨리 끝내고 갈 테니까 우리 만나서 이야기합시다. 몸으로든, 입으로든.”
* * *
해원은 규진과 해장국 그릇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둘 다 얼굴에 숙취와 피곤함이 남아 얼굴이 수척했다. 숟가락으로 해장국을 휘적거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젯밤 정말 강류원한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한국에 없었다는 거였다. 만약 그가 한국에 있었다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을지 모른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셨네.”
“…저도요.”
“근데 넌 수철이랑 나 모텔에 데려다주고 귀소 본능을 발휘해 집에 갔더라?”
해원은 종지에 담긴 청양 고추를 해장국에 쏟아부으며 작게 웃었다. 술을 마시면 이상하게 귀소 본능이 강해져서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는 칼같이 들어갔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술 취해서 숙박업소나 타인의 집에서 눈을 떠 본 역사가 없었다.
“예전에는 귀소 본능 칭찬하셨으면서 오늘은 왜 그러세요.”
“수철이랑 딱 달라붙어서 눈뜨니까 기가 막혀서 그런다.”
얼큰한 해장국을 떠먹으면서 규진이 작게 투덜거렸다. 뜨끈한 국물에 속이 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한참 말도 없이 국물만 축내던 규진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라는 건 생각해 봤고?”
“…저 아직 머리가 술에 쩔어 있어서 안 돌아가요.”
“정신없을 때 몰아쳐야지 원하는 대답을 얻지.”
해원은 말없이 해장국을 푹푹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일단 이 빌어먹을 숙취부터 물리쳐야지 다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주연으로 세우고 싶은데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일부러 조연급으로 캐릭터 잡았어. 부담 갖지 말고 나 믿고 한 번만 가 보자.”
“감독님, 저 백수 아니고 강류원 배우님 매니저예요. 그리고 저 빚도 있어요. 그거 갚으려면 다달이 월급 주는 회사 다녀야 합니다.”
해장국 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해원이 물 컵에 물을 따랐다. 지금은 류원의 매니저로 일하는 게 좋았다. 그렇다고 연기에 딱히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규진의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다.
“강류원 매니저 금방 갈아 치우기로 유명한 놈인데 그러다가 잘리면 뭐 할 건데. 평생 몸 쓰는 것만 해온 놈이 사무직을 할 거냐, 요리를 할 거냐.”
“…….”
“이 바닥에서 자리만 잘 잡으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어. 내가 도와 줄 수 있을 때 한번 해 보자. 너 마스크도 괜찮고 연기에도 재능 있어. 아예 가능성 없으면 이런 말도 안 한다.”
규진은 액션스쿨에서 처음 봤던 해원의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키도 큰 편이라 사내새끼들이 득실득실한 곳에서도 단번에 시선을 잡아끌었다. 스턴트맨으로서의 역량도 뛰어나지만, 연기자로서의 역량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고 무조건 연기를 시키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비열한 복수에서 작은 배역으로 연기를 시켜 봤다. 연기를 시켜 보고 싶어 그 자리에서 급조한 캐릭터였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형수의 아들, 결국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울부짖으며 처절하게 우는 역할이었는데… 그때의 희열과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해원은 그저 얼굴로만 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펑펑 눈물을 쏟아 내는 연기를 선보였다.
수십 명의 스태프들이 숨을 죽이고 해원의 연기에 빠져들었다. 카메라 감독은 주변에 있는 다른 배우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오로지 해원의 감정선만 따라 촬영을 진행했고 저 역시 컷을 외쳐야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단 한 번도 자신의 눈은 틀린 적이 없었다. 문해원은 진흙 속에 파묻혀 있는 진주였다.
“무조건 거절만 하지 말고, 일단 생각이라도 좀 해 봐. 아직 캐스팅하고 진행하려면 시간 있으니까.”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뭐가.”
“저한테 기회 주셨는데 감독님이 원하시는 답변 못 드려서요.”
규진은 답답한 속을 두드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해원도 얼른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나는 제작사 미팅 있어서 가 봐야 해. 다시 연락하자.”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해원은 규진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려운 숙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뒤집어 놓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신저 앱에 알림 표시가 떠 있었다. 아직 숙취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자꾸 입이 말랐다. 물을 마시면서 메신저 앱을 화면에 띄웠다. 채현이 보낸 메시지가 보였다.
[채현 : 비상! 류원이 형, 불면증 도졌음. 다들 몸 사리고 불필요하게 촬영장에 얼쩡거리지 말 것.]
그 뒤로 다른 스태프들의 우는 모양 이모티콘이 줄지어 이어졌다. 아… 잠을 못 주무셨구나. 해원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얼마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날씨도 더운데, 식사도 못했을 게 뻔했다.
해원은 화면을 터치해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메신저 앱을 종료했다. 그런데 아이콘에 아직 빨간 말풍선이 떠 있었다. 해원은 의아한 얼굴로 다시 메신저 앱을 켰다.
화면에는 강류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진을 보냈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해원이 손가락을 움직여 창을 띄웠다.
화면이 전환되며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깨끗하게 비워진 죽 그릇 사진이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지어졌다. 시선을 떼지 않고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류원이 보낸 이 사진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해원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 * *
“컷!”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날씨가 더워 촬영이 지연되다 보니 류원은 입국 당일까지도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컷-, 소리에 채현이 얼른 커다란 우산을 들고 와 뜨거운 태양을 가렸다. 류원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촬영은 다 끝났고 이제 공항으로 가시면 될 거 같아요.”
“물.”
류원은 목을 조인 타이를 느슨하게 당겨 풀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습도가 높은 날씨에 숨이 막혔다. 채현이 내미는 물병을 받아 빨대를 빨았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시원한 기운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오빠 이거 입국하실 때 입으실 의상이에요.”
재영은 류원에게 된통 깨질 각오로 슈트케이스를 내밀었다. 류원이 워낙 협찬받는 걸 좋아하지 않아 대부분의 협찬은 거절하는 편이지만 <수상한 커플> 의상 전부를 거의 맞춤으로 제작해 준 업체라 어쩔 수 없이 들고 왔다. 류원이 입어 주기만 하면 깨지는 건 아무렇지 않았다.
류원은 재영이 손에 든 유명 슈트 브랜드 로고를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두말하지 않고 슈트케이스를 받아 차 안으로 들어갔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더위를 먹은 건가?”
“오빠 정말 이상하다. 잠 못 잔 거 눈에 뻔히 보이는데 며칠 동안 짜증 한번 안 내고. 이게 더 무서워.”
“그러게. 전처럼 그냥 소리 지르고 짜증 내면 욕이라도 하지. 이건 뭐 숨도 못 쉬겠다.”
채현은 목소리를 낮추고 투덜거렸다. 일본 촬영 내내 류원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눈 밑이 거뭇할 정도로 수면 부족을 호소하면서도 짜증 한번 부리지 않고 묵묵하게 카메라 앞에 섰다.
지금도 그랬다. 평소라면 안 입는다고 치우라고 소리를 쳐야 하는 게 정상인데, 그는 군말 없이 옷을 가지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꼭 살얼음판을 살금살금 걷는 기분이었다.
탁-, 차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재영이 즉각 반응했다. 린넨 소재의 슈트를 입은 류원이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으로 매만지며 차를 빠져나왔다. 재영이 옷매무새를 만져 주고 가방에서 메탈시계를 꺼내 손목에 채웠다.
“선글라스.”
“아, 잠시만요.”
재영이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차 안에서 적당한 크기의 선글라스를 꺼내왔다. 선글라스까지 착용하고 나자, 재영이 휴대폰 카메라 애플리케이션을 켜 사진을 찍었다. 협찬사에 보낼 사진이었다.
“준희 형은 어딨어.”
“아 팀장님은 먼저 공항으로 가셨어요. 타세요.”
류원은 좌석에 몸을 기대고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메신저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해원과 나눈 대화 내용을 눈으로 찬찬히 훑었다.
한심스러워 보이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사진을 보내고 난 뒤 해원은 엄지를 치켜든 이모티콘과 함께 메시지를 보내왔다.
[감사합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와 주세요. 스태프들한테도 짜증 조금만 내시고요]
참 별것도 아닌 문장인데…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엄마한테 수학시험 100점 맞아 칭찬을 받는 기분이랄까.
피식 웃고 눈을 감았다. 사흘 동안 세 시간 남짓 잔 게 전부였다. 컨디션이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어지럼증을 동반한 구토 증상까지 있었다. 그전에는 지속적으로 잠을 자지 못해 약간의 면역이라도 있었지만 해원을 만난 뒤로는 계속 잠을 깊이 잤던지라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곧 해원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세 시간 후, 김포공항이 발칵 뒤집히는 일이 발생했다.
* * *
“비키세요!”
“다친다고요, 비키세요!”
팬들과 취재진이 뒤엉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매니저팀과 경호팀이 억지로 공간을 확보해 보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사방에서 터지는 셔터음과 팬들의 울음소리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해원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고 발을 동동 굴렀다. 목구멍까지 욕이 치밀어 올랐다.
“강류원 씨 괜찮은 겁니까.”
“일본 촬영에서 문제가 있었던 겁니까.”
“공식 입장은 언제 발표하실 건가요.”
“한마디만 해 주세요.”
취재진의 질문에 준희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고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결국, 공항 지원팀까지 나서서 류원 일행이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왔다.
해원은 등에 업힌 류원을 뒷좌석에 눕히고 함께 차에 올랐다. 차 문이 닫히자마자 채현이 가속페달을 밟았다.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재킷으로 얼굴을 가려 놓아 류원의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재킷을 걷어 내고 물티슈로 땀을 닦아 냈다.
“사흘 내내 거의 못 주무셨어요. 그래도 식사는 죽이라도 계속 드셨는데. 꼬박꼬박.”
“…기내에서는 별문제 없었어?”
“머리 아프시다고 해서 두통약 드셨고, 화장실 계속 들락거리셨어요. 승무원이 토하는 거 같다고 해서 갔는데 괜찮다고 하셨어요. 일단 가까운 병원으로 갈까요?”
“영원 복합 연구소로 가.”
해원은 류원의 셔츠 단추를 두어 개 더 풀고, 바지 버클을 풀어 혈액 순환을 도왔다. 땀에 절여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고 팔, 다리를 연신 주물렀다. 이런 얼굴로 마주하게 될 줄 몰랐다. 몸을 무너뜨리며 쓰러지는 류원의 모습이 자꾸 눈앞을 어지럽혔다.
연구소로 차가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준호가 다가와 차 문을 열었다. 의식을 잃은 류원의 상태를 잠시 살피고 곧장 이동식 침대로 옮겨 연구소 내부로 들어갔다. 해원이 막 연구소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준희가 제 팔을 붙들었다.
“팀장님.”
“일단 나는 공식 입장 때문에 회사로 들어가 봐야 하니까 류원이 깨어나면 연락 줘.”
“네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냥 피곤해서 그럴 거야. 전에도 불면증 때문에 몇 번 쓰러진 적 있어. 별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준희는 사색이 된 얼굴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멀어지는 준희를 바라보며 마른세수를 하고 연구소 유리문을 세게 밀었다.
해원은 처치실 복도를 서성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준호가 처치실 문을 열고 나왔다.
“해원 씨.”
“소장님, 강 배우님은요? 어디 많이 안 좋은 겁니까?”
“아뇨, 전혀. 체온, 혈압, 맥박 다 정상이에요. 의식도 돌아왔고…….”
류원은 현재 의식이 있고 대화가 가능한 상태였다. 연구소로 오면서 의식이 깨어났고 한차례 구토를 하긴 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준희한테 들으니까 일본에서 고생 많이 한 모양이에요. 해원 씨랑 떨어졌으니 수면부족은 당연했을 것이고.”
“…….”
“불면증 심하면 밥도 안 먹는 놈이 억지로 죽까지 먹어 가며 버틴 모양인데 그게 오히려 역효과를 냈어요.”
“역효과요?”
“…저 녀석은 특이하게 잠을 못 자면 심각할 정도로 신체기능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식사보다는 링거 한 대 맞는 게 나아요. 많이 힘들었을 텐데 용케 촬영까지 마치고 한국까지 왔네요. 정신력 하나는… 아무튼 들어가 봐요.”
해원은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체력이 떨어질까 봐 밥을 챙겨 먹으라고 한 것뿐인데……. 그게 역효과를 낼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류원과 수십 번 통화를 하면서도 그는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무심했다.
준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처치실로 다가갔다. 문을 살짝 열자,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류원이 보였다. 한쪽 팔로 눈을 가리고 있던 류원이 몸을 반쯤 일으켜 해원을 바라봤다.
“가까이 와요.”
“…괜찮으신 겁니까?”
“보다시피요. 해원 씨는 잘 지냈어요? 얼굴 보니까 잘 지낸 거 같네.”
“…….”
“내가 괜히 일만 크게 만들었죠. 나 전화기가 없어서 그런데 전화… 해원 씨?”
해원은 고개를 푹 떨구고 가만히 서 있었다. 괜찮다고는 하지만 제 눈에는 하나도 안 괜찮아 보였다. 아까는 선글라스를 써서 몰랐지만 눈 밑은 거뭇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얼굴로 뙤약볕 아래에서 대사를 외우고 카메라 앞에 섰을 류원이 안쓰러웠다. 류원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해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많이 놀랐나 보네. 미안해요.”
“…제가 괜히 짜증도 부리지 말고 식사하라고 해서 탈이 나신 거잖아요. 그냥 아무 말 하지 말걸…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도 많네. 나 진짜 괜찮아요. 응?”
부드럽게 저를 달래는 목소리에 해원은 코끝이 찡해졌다. 정말 강류원은 제 마음을 이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말에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 따뜻한 눈빛과 말투로 단단하게 쌓아 놓은 벽을 허물어 버린다. 정확하게 이 감정이 뭔지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여기서 더 깊어지면 발을 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또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파도처럼 밀려드는 강류원을 밀어낼 수도 없다.
류원은 손을 뻗어 해원을 감싸 안았다. 품으로 쓰러지듯 안겨오는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해원 특유의 나무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 문해원 냄새… 좋다.”
저를 안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는 해원의 몸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몸의 떨림이 제게도 느껴졌다.
“왜 이렇게 떨어요. 추울 리는 없고…….”
언젠가 류원이 자신을 가엾게 여겨 달라고, 불쌍하지 않으냐고 동정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던 그 말의 뜻을 지금은 조금 알 것 같았다.
“저, 여권 재발급 신청해 놨습니다. 이제 제가 다 따라 다닐 겁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해원 씨가 나 지켜 준다고 했으니까 나 좀 지켜 줘요.”
“…….”
“나는 해원 씨만 믿을게요.”
류원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해원의 귓불에 짧게 입을 맞췄다.
* * *
류원의 침대 앞에 작은 카메라 한 대가 설치되었다. 침대에 앉아 심드렁한 얼굴로 잠시 카메라를 바라보던 그는 금세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렸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준비해. 카메라 각도 잘 잡고.”
해원은 멀찍이 떨어져 카메라를 만지는 채현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 뒤로 보이는 류원을 보고 있는 게 맞았다. 류원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집에 도착했을 땐 완전히 곯아떨어졌다. 그렇게 한 다섯 시간쯤 자고 났더니 얼굴이 한결 좋아 보였다.
“해원아 팬카페랑 펜페이지 반응 좀 체크해 봐.”
“네, 팀장님.”
류원의 방에 카메라를 설치한 이유는 흔히 라방이라고 부르는 라이브방송을 하기 위함이었다. 기사와 별개로 공항에서 류원이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팬들의 목격담이 퍼지면서 류원의 SNS와 팬카페에는 걱정하는 글들이 수천 개가 게시되었다.
아무리 회사에서 아무 이상 없다고, 피곤해서 그렇다고 해명을 해도 팬들은 믿지 않았다. 도리어 회사에 항의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드라마 홈페이지까지 팬들이 점령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결국, 준희는 류원과 상의해 라이브방송을 결정했다.
해원은 노트북으로 팬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꼼꼼히 읽고 반응을 체크했다. 라방 소식에 카페가 들썩거렸다. 카메라 세팅을 마친 준희가 시간을 확인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재영이 분첩으로 류원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렸다.
“침실에서 하는 거 별로야.”
“회사에서 하자니까 네가 싫다며. 어차피 리얼리티 들어가면 다 공개할 건데 그냥 좀 미리 공개한다고 생각해.”
류원은 심드렁한 얼굴로 침대를 손으로 쓸었다. 이 방은 해원이 뜨겁게 신음하고, 온몸으로 저를 원하던 공간이었다. 이 네모난 공간에 갇혀 음란하게 젖어 울던 해원이 다시금 보고 싶었다. 시선으로 해원을 희롱하며 혀로 입술을 축였다.
이 공간을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류원은 이불을 걷어 내고 채현에게 손짓했다.
“아무래도 침실은 안 내켜. 카메라 거실로 옮겨.”
“시간 없다고 그냥 해. 어차피 십 분이야.”
“거실에 카메라 세팅 다시 해.”
류원의 일갈에 채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원은 묵묵하게 단단히 조여 놓은 나사를 풀어내며 채현을 다독였다.
그로부터 10분 후, 우여곡절 끝에 라이브방송이 시작되었다.
카메라가 켜지고 류원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빠르게 채팅창이 올라가는 걸 눈으로 훑고 환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배우 강류원입니다. 오늘 갑작스러운 사고에 많이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평소에 참 건강한 타입인데……. 회사에서 공식입장을 발표한 것처럼 저는 지금 아주 건강한 상태예요. 일본에서 촬영 내내 날씨가 습하고 더워서 힘들었는데, 촬영이 끝나니까 긴장이 풀렸나 봐요.”
채팅창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ㅜㅜ, ㅠㅠ 이런 종류의 이모티콘이 도배되다시피 했다. 류원은 걱정하지 말라며 재차 팬들을 안심시켰다.
“어?”
류원이 한참 말을 하고 있는데 화면이 먹통이 되며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버 터졌나 보다. 잠깐 대기.”
준희는 서버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동시 접속자가 갑자기 몰리면서 서버가 터졌다는 거였다. 팬카페에도 게시글이 빠르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곧 라이브 방송은 다시 재개되었지만 서버가 불안정한 듯 자꾸 화면이 끊겼다.
“이거 이상하잖아.”
류원의 불퉁한 목소리에 준희가 소리를 내지 않고 머리 위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렸다. 계속 진행하라는 소리였다.
류원은 개구진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화면도 제대로 돌아오고 채팅창도 원활하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 팬 미팅 때 약속 드렸던 리얼리티를 올해 가기 전에 선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 사생활을 공개하는 건 데뷔 후 처음이라서 좀 부담스러운데 그래도 약속한 거니까 노력해 볼게요.”
류원은 조곤조곤 준비한 말들을 전했다. 눈물 바다였던 채팅창도, 팬들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가고 있었다. 류원은 일본에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며 자신이 정말 건강하다는 걸 몸소 증명했다.
종료 30초 전, 류원은 준희의 신호를 확인하고 서둘러 인사했다.
“우리 시크원, 다들 건강하고 <수상한 커플>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시간이 없네요. 그럼 다음에 또 만나요. 안녕.”
그는 끝까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짧은 라이브 방송은 동시접속자수 13만 명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그렇게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