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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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또 다른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방 안에는 짙고 묵직한 나무 냄새가 가득했다. 그리고 제 옆에는 먼 미래를 꿈꾸게 하는 문해원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모든 게 평화롭고 따뜻했다.

류원은 곤히 잠든 해원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 넘겨 주고 작게 미소 지었다. 밤새 제 위에서 울부짖던 얼굴이 떠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을 감고 있어도 눈 밑이 부어오른 게 보일 정도였다.

눈 밑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즉흥적인 짧은 일탈이 아쉽기만 했다. 고개를 숙여 뺨에 짧게 입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얇은 커튼 뒤로 푸른 바다가 보였다. 한동안 넋을 놓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감상했다.

그 사이 곤히 잠든 해원이 몸을 뒤척였다. 얼른 시선을 옮겨 해원을 바라봤다. 가슴을 두어 번 두드려 주자, 그는 다행히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침대 헤드 보드에 몸을 기대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제 정말 해원과 완벽한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러려면 큰 결심이 필요했다.

류원은 지금 베놈스테먼의 장점이자 단점인 밴딩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상대와 완벽하게 몸과 마음이 맞아 떨어지면 밴딩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밴딩을 쉽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본딩은 안티스테먼이 개입하면 독을 정화하고 남이 될 수 있지만, 밴딩은 그럴 수가 없다. 베놈과 피스틸 모두 서로에게 귀속되는 일이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었다.

류원은 침대에서 벗어나 재킷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켰다. 잠시 전원이 켜지는 동안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셨다.

지잉-,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림 소리에 해원이 깰까 싶어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알림을 확인했다. 메시지를 보낸 건 거의 준희였다.

최 감독이 최대한 빨리 다시 미팅하길 원한다는 메시지를 읽으며 뺨을 문질렀다. 어쩐지 텍스트에서 준희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심부름꾼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사진 몇 장이 첨부된 메시지였다. 사진을 터치해 크게 확대했다. 얼굴을 확인하고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아주 짧게 이어졌다.

- 넌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바빴어. 사진은 언제 찍은 건데.”

- 어제 저녁때. 확실하게 꼬리 밟았으니까 이제 딜 들어가도 될 것 같다.

“그럼, 영국 병원에서 발급받은 진단서 확보하고 그 새끼 잡아 놓고 기다려. 전화할 테니까.”

- 내 얼굴 노출되는 거 싫다고 했지.

류원은 물병 주둥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렸다. 웬만한 일은 준희가 다 알아서 해 주지만 사적이거나 불법적인 일은 일명 ‘땅개’라고 부르는 심부름꾼을 통해서 처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만 주면 뭐든 해 주는 은밀한 심부름꾼이었다.

“제시한 금액의 두 배.”

- 두 배?

“그래 두 배.”

-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지 마라. 잡아 놓고 연락할게.

끊어진 전화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준호가 서프라이즈라며 넘겨 준 자료는 말 그대로 서프라이즈했다.

땅개를 시켜 일을 추적하자 예상치도 못한 꼬리가 여러 곳에서 밟혔다. 어쩌면 한꺼번에 일을 처리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 꼬리를 확실하게 밟았으니 몸통을 아예 잘라버릴 생각이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한 삼십 분쯤 흘렀을까, 방 안에서 해원의 알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환기하고 테라스에 앉아 해원이 몸을 뒤척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뺨을 베개에 묻은 채 알람을 꺼버린 그가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요란하게 알람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베개 아래로 머리를 처박고 끙끙거리던 해원이 옆으로 팔을 뻗어 침대를 더듬거렸다. 그리고 놀란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부스스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던 해원이 테라스에 앉은 류원을 발견하고 배시시 웃었다.

“강 배, 쿨럭…….”

잔뜩 목이 쉬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해원은 낭패감에 인상을 구기고 탁자 위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어디 상태 좀 봐요.”

어느새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은 류원이 해원의 팔을 잡아당겼다. 해원은 물을 마시고 순순히 그의 앞으로 끌려갔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자신과는 달리 반질반질한 얼굴을 보니 울컥 화가 치밀었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누구 덕분에.”

“전 몸이 천근만근이에요.”

“올라갈 때 내가 운전 할 테니까 차 안에서 눈 좀 붙여요.”

해원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태로 운전은 무리였다. 그래도 류원에게 운전을 맡기는 게 미안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리 엎드려 봐요.”

류원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침대에 엎드리게 하고 꽃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꽃은 아주 잘 말라 예쁘게 피어 있었다. 꽃이 잘 마르지 않으면 피부 발진이 일어날 수 있어 늘 조심해야 했다. 류원은 고개를 숙여 등을 채운 꽃에 입 맞췄다.

“불편한 데 없어요?”

“…목이, 쿨럭 좀 아픈 거랑 무릎이 따끔거려요.”

“여기는 괜찮고?”

류원이 손을 아래로 내려 엉덩이를 슬쩍 주물렀다. 해원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 직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히 찝찝할 거라 생각했던 몸이 보송보송했다. 분명 땀과 체액에 젖어 엉망이었는데…….

의아한 눈으로 류원을 바라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무릎을 살폈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무릎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무릎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저 어제 기절… 한 건가요?”

“아뇨, 지쳐서 잠들었던데요.”

해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절이나 지쳐서 잠든 거나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지쳐서 잠들었다고 말하는 류원이 귀여워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아무튼, 섹스하다가 기절을… 아니, 지쳐서 먼저 잠들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때 체력이라면 액션스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는데…….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면 괜찮아지겠지?

류원은 입술을 말아 물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성에 대해서 무지하면서 왜 꼭 밤에는 그렇게 요망하게 저를 돋우는지, 기가 막혔다.

“이제는 좀 자제할게요. 침대에선 왜 이렇게 자제력이 없는지…….”

“…좋았어요.”

“응?”

“어젯밤에, 좋았다고요.”

류원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그러나 이내 이해하고는 작게 웃었다. 고개를 숙여 붉어진 해원의 귀 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 뺨에 짧게 입 맞췄다.

“아주 요망해.”

“…….”

“얼른 씻고 나와요. 가는 길에 식사하기로 하고 일단 출발합시다.”

지잉-, 침대 위에 뒤집어 놓은 해원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짧은 진동이 연달아 이어졌다. 해원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 작게 미소 지었다.

“누구예요?”

“하영 누나요.”

“고하영?”

“네.”

해원이 휴대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풀 메이크업을 한 채 환하게 웃고 있는 하영의 사진이 보였다. 류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뒤 다른 스테먼과 대화를 주고받는 제 피스틸을 보고 있자니 배알이 뒤틀렸다.

해원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보다 못한 류원이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뒤로 감췄다.

“내가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 씻고 나올게요.”

“그렇게 홀딱 벗고 다른 스테먼이랑 연락하고 싶어요? 그것도 내 앞에서?”

해원은 귀를 문지르며 몸을 움직였다. 바로 샤워를 할 거지만 그래도 홀딱 벗었다는 말이 신경 쓰여 침대 아래에 떨어진 티셔츠를 주워들었다. 그런데 티셔츠의 상태가…….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고 티셔츠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어젯밤, 류원이 티셔츠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고 마구 움직인 탓에 싸구려 티셔츠가 다 늘어나 너덜거렸다.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해원을 바라보던 류원의 눈매가 사르르 풀리며 멋쩍게 웃었다. 얼른 옷걸이에 걸린 해원의 셔츠를 집어 내밀었다. 손가락으로 뺨을 긁으며 서 있는 류원을 놀려 주고 싶어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티셔츠 사 주세요.”

“…원하는 만큼 사 줄게요. 해원 씨가 원하면 뭐든 다 해 줄게요. 그러니까,

“…….”

“나 좀 좋아해 줘요.”

해원은 욕실 문 앞까지 다가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이게 아닌데…….

방 한가운데 서서 저를 바라보는 류원이 보였다. 자신은 이미 몸과 마음이 온통 강류원이었다. 이상한 만남으로 시작한 이 관계가 이렇게 애틋하고 지독할지 그때는 몰랐다. 큼, 목소리를 가다듬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 * *

“컷! 십 분만 쉬었다가 갑시다.”

35도에 육박하는 더위에 배우들을 비롯한 모든 스태프가 지쳐 해롱거렸다. 류원은 촬영 때문에 걸쳐 입은 재킷을 빠르게 탈의하고 타이에 손가락을 걸어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후우, 긴 한숨이 비집고 새어 나왔다.

“수고했다, 강류원.”

“고하영, 너 나 좀 보자.”

“왜?”

류원은 대꾸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그늘이 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영은 가까이 다가오는 자신의 스태프들을 물리고 류원을 뒤따랐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높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그늘 안으로 들어섰다. 서로 정면을 바라보고 섰다. 촬영 스태프들이 이쪽을 힐끗거렸다.

“뭐야, 용건이.”

“우리 그때 회식했던 날, 누가 내 사진을 찍어서 제보했어.”

“뭐?”

하영의 인상이 단박에 구겨졌다. 이 바닥에 있으면서 가장 예민한 건 몰래카메라였다. 자신도 모르는 모습이 타인의 손에 찍혀 돌아다니는 건 끔찍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넘겨 손에 쥐었다가 놓았다.

그날 회식을 제안한 건 하영이었고 그때 참석했던 사람들은 하영의 스태프와 강류원쪽 스태프가 전부였다. 어쩐지 입이 마르는 기분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류원이 말을 덧붙였다.

“기자가 회사로 찾아왔고 준희 형이 대충 둘러막았어. 근데 사진을 보니까 회식했던 장소더라.”

“…식당 직원들이 그런 건 아니고?”

“미리 계산하면서 2층에 올라오지 말라고 당부했고 그쪽도 그런 건 좀 철저한 편인 거 같더라. 2층에 상주하는 직원도 없었어.”

하영은 저도 모르게 손톱을 입가로 가져가 질근질근 씹어 댔다. 연예인을 상대하는 가게 대부분이 그렇지만, 손실을 감수하고 그런 사진을 찍어 제보하는 경우는 없었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면 당연히 연예인들이 방문을 할 테고, 가게는 연예인의 이름을 팔아서 장사를 해먹을 수 있다. 굳이 그런 사진 찍어서 몇백 손에 쥐는 것보다 비밀을 유지해 주고 장기적으로 가게 홍보를 노리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 때문에 직원 교육 역시 철저했다.

하영은 짜증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하필 강류원 사진을 찍어서 제보를 할 건 뭐람, 낭패감에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너희 스태프들은?”

“내 스태프들은 내 성격 알거든. 절대로 사진 찍어서 기자 찾아갈 깜냥 안 돼.”

“그래도 그렇게 확신하지 말고…….”

“네가 제안한 회식이었어. 그러니까 찾아내. 누가 사진을 찍어서 이따위 짓거리 했는지 찾아내.”

류원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았다. 나무 그늘에 서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같았지만, 주고받는 내용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주변에서 하영과 류원의 투 샷을 보며 힐끗거렸지만,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일단 찾아볼게. 근데 기대는 하지 마. 난 내 스태프들 의심하는 거 정말 싫어.”

“의심하기 싫다고? 그럼 좆같은 내 기분은 네가 책임져 줄 거냐?”

다른 것도 아니고 해원과 함께 찍힌 사진이었다. 그것도 저와 입술을 맞댄 사진, 빌어먹을. 류원이 낮게 욕을 뇌까리고 마른 바닥을 발로 퍽퍽 차올렸다.

“근데 무슨 사진이길래 이런 반응이야.”

“…키스 사진.”

“뭐!?”

그제야 왜 강류원이 미친놈처럼 날뛰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키스라니, 그날 회식 자리에는 온통 스태프들밖에 없었는데. 스태프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야? 하영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단정하고 깨끗한 얼굴로 늘 류원의 곁에 머무는 한 사람. 하영은 아까보다 더 짜증스러운 얼굴로 류원을 올려다봤다.

“혹시, 그 키스 상대가 문해원이야?”

“맞아. 그러니까 너 문해원한테 관심 좀 꺼.”

“미친!”

하영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짝다리를 짚었다. 안 그래도 짧은 스커트가 말려 올라가 피를 머금은 듯한 새빨간 장미가 살짝 보였다. 그녀가 스테먼이라는 증거였다.

“하, 그러니까 지금, 앞에 이야기는 다 밑밥이고 문해원한테 연락하지 말라는 게 포인트라는 거지?”

“아니, 범인 찾아내라는 거 빈말 아니다.”

“너 지금 내가 문해원 꼬셔서 잡아먹을까 봐 나 찾아온 거지. 너 나 질투하니?”

질투라는 말에 류원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고하영을 상대로 유치한 감정을 느끼게 될 거라고 상상도 못 했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를 불러낸 후였다.

해원은 요즘 들어 하영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처음에는 한두 번 그러다가 말겠지 했는데 점점 횟수가 빈번해지더니 이제 퇴근 후에는 의례적으로 하영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속에서 부아가 치미는 걸 참고 또 참았지만 이젠 한계였다.

“그럼 문해원이 좋아하는 스테먼이 너야?”

“…뭐?”

“와씨 내 라이벌이 하필 강류원이라니, 이렇게 불행할 수가.”

하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머리를 감싸 쥐고 탄식했다. 해원의 깨끗하고 단정하게 생긴 외모가 퍽 제 취향이었다. 그래서 은근히 단체 회식도 제의하고 추파도 계속 던졌는데, 해원은 좋아하는 스테먼이 있다는 말로 저를 퇴짜 놓았다.

그런데 상대가 강류원이라니 기가 막혔다. 당장 해원에게 만나지 말라고 강짜를 놓고 싶은 걸 억지로 참았다.

“해원이도 눈이 참 발바닥에 있나 보다. 널 좋아하는 걸 보면, 에라이!”

하영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홱 돌리고 높은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류원의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 * *

류원은 연예정보 프로그램 인터뷰를 앞두고 질문지를 확인했다. 대체로 무난한 질문지였다. 거의 드라마에 관한 내용이었고 딱 하나 개인적인 질문이 들어가 있었다. 재계약에 관한 질문이었다.

스타온 엔터테인먼트와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 여기저기서 물밑작업이 들어오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1인 회사를 차리고 싶지만, 회사를 맡아서 관리해 줄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해원을 바지사장으로 세워 볼까도 했지만, 그의 성격상 흔쾌히 받아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준희가 해 주면 좋을 텐데…….

류원은 쓰게 웃고 질문지에 체크했다.

똑똑-.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류원이 고개를 돌렸다. 고하영이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흰색 원피스를 입은 채 서 있었다. 어쩐 일인지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문을 열자, 하영이 휴대폰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내가 그랬어.”

“뭐?”

“미안해.”

“고하영, 너 진짜 이럴래?”

류원은 하영의 말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핸드폰을 받아들고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그랬어, 미안해.”

류원이 실소했다. 이 업계사정을 잘 아는 고하영이 이런 사진을 찍어 기자에게 넘겼다고?

고하영이 제보를 목적으로 사진을 찍었다면 키스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하는 게 아니라 전체적인 상황과 배경이 잘 나오도록 찍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은 키스 장면이 클로즈업된 채로 찍혀 있었다.

정말 지나가는 개가 웃겠네.

류원이 코웃음 쳤다.

“누구야.”

“내가 그랬다고.”

하영은 고집스럽게 자신이 찍었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찍었을 리가 없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거니와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데.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렇게 얕은수를 쓸 인간이 아니었다.

“…고하영 너, 네 마음은 알겠는데. 누군지 말해.”

“…말 못 해 줘. 너 고소할 거잖아.”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치르는 게 맞아.”

“내가 따끔하게 혼냈어. 그러니까 내 얼굴 봐서 한 번만 봐주라. 응?”

내심 가게 직원이길 바랐다. 적어도 하영과 제 스태프만은 아니길 빌었는데…….

류원은 손에 쥔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떨어진 휴대폰을 류원은 아무렇지 않게 밟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반질거리는 구두로 사정없이 휴대폰을 짓밟기 시작했다.

하영은 입술을 깨물고 짓밟히는 휴대폰만 멍하니 바라봤다. 류원에게 미안해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사진을 찍은 범인이 제 스태프 중 한 명이었다. 하영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류원은 발로 짓밟혀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휴대폰을 집어 들어 바닥으로 세게 내팽개쳤다. 이음새가 벌어져 휴대폰이 볼품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류원이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다잡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가져가, 네 식구라고 무조건 싸고돌지 말고 싹부터 잘라. 사진의 주인공, 고하영 네가 될 수도 있어.”

“…….”

“내가 항상 말하지만 너 스태프한테 정 주지 마. 옆에 있을 때나 내 식구지 떠나면 다 남이야. 너 착한 것도 병이다.”

시선을 내리깔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시끄러웠다. 하영과는 나름 이 바닥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사이었다. 둘은 아역 배우 시절부터 연령대가 비슷해서 그런지 동반 캐스팅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애증이든 애정이든 찰떡같이 소화하는 사이였다. 어쩌면 학교 친구들보다 하영을 보는 날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류원이 하영의 목을 감싸고 머리를 주먹으로 콩콩 쥐어박았다. 하영이 산발이 된 채로 류원의 품에 안겨 비명을 내질렀다.

“놔! 안 놔?! 강류원 죽을래!!”

“자꾸 까불래?”

“머리 망가진다고!!”

고하영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이렇게 화내고 씩씩한 게 더 잘 어울렸다. 간신히 류원의 품에서 벗어난 하영이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 내가 한 말 새겨들어. 괜히 상처받아 울지 말고. 그리고.”

“…….”

“계속 씩씩한 척해.”

“…뭐?”

갑자기 하영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메라 앞에서 웃고 울고 하는 배우라고 해서 다 성격이 외향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향적이고, 조용하고, 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하영 역시 거기에 속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조용하면 스태프들이 불편해한다는 걸 알게 된 후부터는 일부러 과장되게 씩씩한 척, 털털한 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류원이 알아채고 있을 줄이야.

“고하영, 우리는 친구 말고 동료하자. 업계 동료.”

“친구나 동료나 뭐가 달라.”

“동료는 거리감이 있지만, 친구는 거리감이 없잖아. 오래 보려면 이게 편해.”

류원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을 여는 것도, 다가가는 것도, 다가오는 것도 다 불편하고 껄끄러웠다.

생각해 보니 이 나이 먹도록 속을 시원하게 터놓을 친구가 단 한명도 없었다. 물론 드라마 촬영장에 밥차나 커피차를 보내 줄 만한 연예인 동료들은 많았다. 낯간지러운 멘트를 적어 보낼 만한 비즈니스적인 관계.

어쩐지 속이 쓰렸다. 속 깊은 이야기는 혼자 벽보고 하는 게 제일 편했다. 누가 들어 준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문해원이 왜 너를 좋아하나 했더니 이유가 있었네.”

“…….”

“아 참, 키스 사진 찐하고 좋더라. 잘생긴 애랑 잘생긴 애가 붙어 있으니까 내 눈에 정화수를 들이부은 느낌이더라.”

“고하영 너…….”

류원의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지자, 하영이 혀를 쏙 내밀고는 저만치 달아났다. 하영은 멀찍이 떨어져 코를 훌쩍이며 류원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래, 친구 말고 업계 동료하자. 그리고 오래 보자.

* * *

해원은 촬영장을 채현에게 맡겨두고 오랜만에 집을 찾았다. 우편함에 잔뜩 쌓인 우편물을 가방에 넣고 열쇠로 문을 열었다. 지하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해원을 반겼다.

신발을 벗고 전등 스위치를 올렸다. 하지만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던 전등이 아예 나가 버렸는지 불이 켜지지 않았다.

작게 한숨을 푹 내쉬고 부엌 쪽 전등 스위치를 켰다. 좁은 거실을 눈으로 한번 둘러보고 접이식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한참 쓰지 않은 이불에 눅눅함이 묻어났다.

충동적으로 이불을 뭉쳐 안아 들고 다용도실로 향했다. 족히 15년은 되어 보이는 세탁기 뚜껑을 열고 이불을 쑤셔 넣었다. 세제를 아무렇게 쏟아부은 뒤 전원을 켜고 동작 버튼을 눌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세탁기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해원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거미줄이 친 천장을 바라보며 길게 연기를 뿜어냈다.

류원과 함께 사는 집이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다리를 접어야지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낡은 접이식 침대, 덜그럭거리며 돌아가는 세탁기, 잔뜩 쌓아 올린 지역 신문, 고장 난 지 오래된 텔레비전, 때가 꼬질꼬질하게 낀 커튼, 낡고 허름한 옷장, 곰팡이가 낀 벽과 거미줄이 친 천장, 아무렇지 않게 늘 썼던 물건들이 어쩐지 불편하고 낯설게 느껴졌다.

새삼 참 지지리 궁상으로 살았구나 싶었다. 해원은 담배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수도꼭지 손잡이를 빙글빙글 돌렸다. 오랜만에 틀어서 인지 물이 터지듯 쏟아져 나오며 토수구에 간신히 걸쳐져 있던 호스가 빠지며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양말과 바지 밑단이 젖어 버렸다.

“아, 진짜…….”

축축한 양말과 바지를 벗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속옷 바람으로 거실을 활보했다. 그러다가 해원은 피식 웃어 버렸다. 류원과 함께 살면서 단 한 번도 이런 차림으로 집 안을 돌아다녀 본 적이 없었다.

늘 음험한 눈빛으로 제 몸을 훑어 대는 그 짐승 같은 눈에 잡아먹힐까 봐 단단히 몸을 감싸고 다녔다. 그걸 떠올리니 괜히 오기가 생겨 옷을 훌훌 벗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혼자만의 공간, 아무도 보지 않는 공간에 있다는 게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어젯밤 류원이 이 집을 정리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 왔다. 집에 살지 않는다고 해서 월세가 안 나가는 것도 아니니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빚을 갚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러 우편물을 회수해 가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 혼자만의 공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공간은 꼭 필요했다. 저는 당장 1분 후의 일도 예측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상체를 반쯤 비틀어 거울에 제 등을 비추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주홍색의 양귀비가 소담하게 피어 있었다.

갑자기 류원이 꽃을 정성스럽게 핥아 주는 감각이 되살아나며 하체에 열이 몰렸다. 달아오르는 뺨을 두어 번 툭툭 두드리고 셔츠를 다시 주워 입었다. 청바지를 발에 꿰어 넣고 양말도 신었다.

숨을 깊게 삼키고 의식적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난잡하게 엮이는 혀와 제 몸에 안달을 내는 그의 얼굴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성에 대해서 무감하게 지냈던 시간들이 무색하게 요즘은 강류원만 보면 달려들고 싶어 손끝이 저릿거렸다. 해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한참 만에 화장실을 빠져나온 해원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고르지 못한 숨을 애써 진정시키며 냉장고를 열어 차가운 물을 마셨다. 식도를 타고 차가운 게 넘어가니 속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해원은 깊은숨을 내쉬고 가방 안에서 우편물을 꺼내 침대에 펼쳐 놓았다. 각종 세금 고지서와 광고물이 잔뜩 있었다.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지서는 가방에 넣어 두고 광고물은 찢어 한쪽에 놓았다. 그리고 하나 남은 봉투를 집어 들었다. 보낸 사람에 GR금융이라는 글씨가 정자로 새겨져 있었다.

해원이 불법 시술을 받느라 대출을 받은 은행이었다. 얼른 봉투를 찢어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이자 연체 독촉 고지서였다.

이게 뭐야……. 정부에서 지원하는 보조금 전액이 이자로 빠져나가고 있는데, 이자 연체라니.

해원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전화번호부를 열어 GR로 저장해 놓은 이름을 터치했다. 대출 담당자 직통번호였다. 곧 통화 화면으로 전환되며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네, GR금융 우재민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문해원이라고 하는데요.”

- 아, 문해원 씨. 안 그래도 전화 드릴 참이었는데.

“이자가 연체되어 있다고 고지서가 와서요.”

- 이번 달에 통장 잔액이 없어 이자가 인출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통장 잔액 확인해 보셨나요?

“…아니요. 그게 정부 보조금 통장이라서 잔액이 없을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어느새 손톱을 질근질근 물어뜯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전화기를 타고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한참 만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재인출을 시도했지만 잔고가 없는지 들어오는 돈이 없네요. 음, 보조금이 끊길 만한 상황이 있으신 건 아닌지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연체 금액은 오늘 바로 입금하도록 하겠습니다.”

- 네, 알겠습니다.

해원은 얼른 가방을 챙겨 들고 몸을 일으켰다. 신발까지 다 신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부엌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게 보였다. 다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전등 스위치를 내렸다. 대낮임에도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차에 시동을 걸고 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현에게 류원의 상황을 체크하고 곧장 동사무소로 향했다. 낮임에도 동사무소는 사람들로 붐볐다.

번호표를 뽑고 의자에 앉았다. 번호표 알림을 해 주는 브라운관에서는 예전에 강류원이 출연했던 드라마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그는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로 아버지 역으로 보이는 원로 배우에게 뺨을 맞고 있었다. 짝-,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아가는 게 보였다.

“아프겠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꼬마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봤다.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마침 딩동 소리와 함께 화면에 해원의 번호가 떴다. 가방을 움켜쥐고 얼른 창구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수고하십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피스틸 보조금을 받고 있는데 이번 달에 입금이 안 된 거 같아서요.”

“음 피스틸 등록증 주시겠어요?”

해원은 지갑에서 피스틸 등록증을 꺼내 내밀었다. 직원은 컴퓨터에 해원의 등록 번호를 넣어 확인하더니 직급이 높아 보이는 직원을 호출했다. 단정한 슈트를 입은 남자가 다가와 화면을 확인하고 종이를 출력해 제 앞으로 내밀었다.

“문경욱 씨, 그러니까 아버지 신분이 계속 말소로 되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게 6월에 말소 해제되었어요.”

“예?”

“그리고 문해원 씨가 지금까지 수령한 정부 지원금은 피스틸 보조금이 아니라 생계지원금이었어요. 아버지 신분이 되살아나면서 중단된 걸로 확인됩니다.”

“무, 문경욱 씨가 확실, 확실한 겁니까.”

해원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숨을 쉬어야 한다고 주문하며 억지로 숨을 뱉어 냈다.

해원은 성인이 되어서야 큰아빠의 신분이 말소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막연하게 어디서 죽었다고만 생각했다.

“다시, 다시 하, 한번만 확인해, 주, 주세요.”

“맞습니다. 문경욱 씨 말소가 해제되었습니다.”

큰아빠가 사, 살아 있다고?

해원은 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으로 이제는 희미해진 큰아빠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 * *

류원은 연락이 되지 않는 해원 때문에 답답함이 일었다. 간신히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적인 음성만 들려왔다.

“해원 씨 연락 없었어?”

“아까 오후에 전화 와서 형 촬영하고 있는지 확인한 게 전부예요.”

채현이 백미러를 힐끗거리며 대답했다. 회사 직원에게 부탁해 해원의 집에 가 보라고 했지만 집은 비어 있었다.

그럼 도대체 어딜 간 거야.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평범했다. 잠시 집에 들러 우편물만 회수해 오겠다고 했고 그걸 흔쾌히 허락한 게 전부였다. 그러고 나가서는 벌써 몇 시간째 연락이 되지 않고 있었다.

“형 도착했는데요.”

“…혹시 문해원한테 연락 오면 나한테 전화해 줘.”

“예, 들어가세요.”

류원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 현관 앞으로 다가갔다. 이 집안에 문해원이 없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현관 앞에 해원의 운동화가 보였다. 신발을 아무렇게 벗어 던지고 집안을 가로 질렀다. 침실 문을 벌컥 열자, 침대에 몸을 잔뜩 웅크린 인영이 보였다. 작은 조명 하나가 은은하게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해원 씨.”

“…….”

제 부름에도 해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류원은 침대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집에 왔으면 왔다고 연락이라도 좀 하지. 걱정했잖아요.”

“…….”

“전화는 왜 안 받아요. 아무튼, 걱정시키는데 뭐 있어.”

류원은 티셔츠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고 바지 버클을 풀었다. 속옷까지 한꺼번에 벗어 탈의하고 벽에 걸린 가운을 몸에 걸쳤다. 매듭을 지으며 해원을 힐끗거렸다.

잠들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까이 다가가 해원의 어깨를 쥐었다.

“해원 씨, 자… 문해원!”

손에 닿는 열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급하게 침실 불을 켜고 상태를 확인했다. 해원의 몸이 불덩이였다. 이불을 걷어 내자 온몸이 땀에 젖어 흥건할 정도였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문해원, 눈 떠 봐. 해원아!!”

힘없이 팔이 툭 떨어졌다. 류원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가 낮게 욕을 뇌까렸다. 이럴 때 자신의 직업이 원망스러웠다. 괜히 119를 불렀다가 어떻게 기사가 날지 모를 일이었다.

추측성 기사 한 줄에 회사는 류원의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입장문을 발표해야 할 것이며, 드라마 촬영장은 류원이 무사한지 확인하려는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룰 것이다. 류원은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벗어 놓은 옷을 주워 입었다.

축 늘어진 해원을 안아 들고 집을 빠져나왔다. 뒷좌석에 그를 눕혀 놓고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쩔 수 없었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라 그런지 통화 연결음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긴 손가락이 초조하게 운전대를 두드렸다.

- 너 지금 몇 신 줄 아…….

“문해원이 쓰러졌어.”

- 뭐? 너 어디야. 어쩌다가. 아니다. 일단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연구소로 와. 나도 지금 갈 테니까.

전화를 끊고 곧장 시동을 걸었다. 새벽 시간의 도로는 한산했다. 과속 카메라를 가뿐히 무시하고 도로를 내달렸다. 평소 30분 이상이 걸리는 거리를 약 20분 만에 끊었다.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자, 먼저 도착해 있던 준호가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모르겠어. 오늘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됐는데 집에 와 보니까 이 모양이야.”

“일단 안으로 옮기자.”

류원이 몸을 숙여 해원을 안아 들었다. 축 늘어진 해원의 몸은 여전히 뜨거웠다. 진료실 침대에 눕히자 준호가 체온부터 측정했다.

“열이 39.7도나 되네.”

준호가 낮게 혀를 차고 해열제를 가져오겠다며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류원이 얼른 해원의 곁으로 다가가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 아래로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 아빠.”

류원은 작은 흐느낌 같은 소리를 듣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가에 귀를 대고 해원의 몸을 흔들었다.

“해원 씨, 문해원!! 정신 좀 차려 봐.”

“흐, 아빠, 아빠……. 아빠.”

흐느껴 울며 아빠를 찾는 해원의 목소리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해원의 눈꼬리에 눈물길이 길게 그려졌다. 손을 뻗어 눈꼬리를 문질렀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류원은 늘어진 해원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원이 애타게 찾는 그의 아버지는 류원이 보호하고 있었다.

류원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해원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어지럽게 흩어지던 숨소리가 차분해지고, 해원의 팔이 축 늘어졌다.

* * *

“스트레스 지수가 상당히 높아. 예를 들어 100이 최대치라고 치면 90 정도. 스트레스 지수가 갑자기 높아지면서 몸이 못 버틴 거야. 약 먹고 좀 쉬면 괜찮아질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라.”

“…고마워.”

한숨도 자지 못하고 해원의 곁에서 밤을 꼬박 지새운 류원이 피곤한 기색을 떨쳐 내려고 얼굴을 문질렀다.

“근데 해원 씨 나무 많이 좋아진 거 같더라.”

“……?”

“혹시 나무 때문에 발열이 일어난 게 아닐까 싶어서 검사했는데, 나무는 오히려 좋아졌어.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나무 밑동이 까맣게 죽어 있던 것도 피부 안쪽부터 천천히 사라지고 있더라.”

“하아, 다행이네.”

“어쩌면 넓게 퍼진 까만 자국이 없어질지도 모르겠다.”

준호는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류원과 해원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면제를 처방받으러 오던 류원이 깊은 숙면에 빠지고, 해원은 까맣게 죽은 밑동을 비롯해 나무의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다.

준호가 이따가 오겠다며 몸을 돌렸을 때 류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관계 맺을 때 좀 이상한 게 있었어.”

“어떤 게?”

“처음 관계를 맺을 때는 전혀 젖지 않았어. 근데 최근에는 아래가 젖더라고. 혹시 이것도 해원 씨 몸 상태와 관련이 있을까?”

말투에 걱정스러움이 묻어났다. 준호는 해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피스틸은 기본적으로 자궁이 생성되면서 삽입을 위한 윤활제, 그러니까 애액이 분비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해원은 자궁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상태로 불법 시술을 받아 그 기능을 하지 못했다. 자궁이 타 장기들과 연결되지 않고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임신은 물론 애액이 전혀 분비되지 않는 상태였다.

애액이 나온다는 것은 자궁이 제 기능을 한다는 말인데.

어쩌면 해원의 스트레스 원인이 자궁이 될 수도 있었다. 해원이 기절해 있는 상태라 낮에 어떤 증상을 겪었으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나무가 좋아진 것처럼 해원의 자궁에도 변화가 생기고 그에 따른 부작용이 일어났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준호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고 침대를 고정해 놓은 고리를 풀었다.

“뭐 하는 거야.”

“검사 좀 해 보자.”

“무슨 검사.”

“어차피 날 밝으면 검사해 보려고 했어. 나무가 좋아졌으니 자궁 역시 변화가 있을 거야. 거기에 애액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건 자궁이 제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거야. 최근에 복통이 있진 않았어?”

“…잘 모르겠어.”

“혹시 애액에서 냄새가 나거나 그러진 않았어?”

“…전혀, 나무 냄새만 더 짙어졌어.”

고리를 모두 풀어낸 준호가 침대를 병실 밖으로 끌어냈다. 류원은 초조한 얼굴로 침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준호는 검사실 안까지 따라 들어온 류원을 힐끗거리고 초음파 기계의 전원을 올렸다.

“복부 초음파로 보고 확인해 보고 안 되면 항문 초음파까지 해야 하니까 그렇게 알아.”

“…응.”

준호는 해원의 옷을 걷어 올리고 복부에 젤을 문질렀다. 그리고 초음파 기계를 복부에 댔다. 기계를 천천히 롤링하며 화면을 살폈다. 류원은 온통 까맣기만 화면을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준호가 기계 손잡이에 달린 버튼을 눌러 화면을 캡처했다. 모니터에 캡처한 사진을 띄우고 세심하게 살폈다.

“자궁의 크기가 전보다 커졌네. 확실히 변화가 있어.”

준호는 초음파 기계의 전원을 끄고 몸을 일으켰다. 복부 초음파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발달샘이나 자궁길은 내진으로만 확인 가능했다. 류원이 준호의 팔을 붙잡았다. 준호는 의아한 눈으로 류원을 바라봤다.

“왜.”

“…그게 다야? 제대로 확인해 줘.”

“복부 초음파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이게 다야. 내가 내진하는 건 네가 불편하잖아. 이따 다른 선생님께 부탁해서 확인할…….”

“형이 해 줘.”

류원이 준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마른 침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속을 채우는 질투와 독점욕, 집착 따위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문해원의 몸에 이상이 있는지 없는지가 더 중요했다.

“나 이 사람이랑 본딩 이상을 생각하고 있어.”

“…….”

“진심이라고.”

준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안쪽 커튼을 젖혔다. 안에는 괴상한 모양의 의자가 한 대 놓여 있었다.

“이쪽으로 데리고 와.”

류원은 해원을 옮겨 주고 검사실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놓인 의자에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지금은 해원이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라서 피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해원이 임신할 수 있다면 피임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했다. 피스틸이 피임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스테먼쪽에서 정자가 배출되지 않게 막는 시술을 하는 편이었다.

이 빌어먹을 운명을 내 아이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이 지독한 운명은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피를 왈칵 쏟아 내면서도 독을 삼키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류원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휴대폰을 꺼내 땅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말해.

“문경욱, 어딨어.”

- 무슨 개소리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짖어대.

“상태는, 아니 외부 활동은?”

- 너 정말 돌았냐?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스로 질문을 하고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어 버렸다. 문경욱은 현재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류원은 마른세수를 하고 턱을 문질렀다. 까슬까슬하게 올라온 수염이 손끝에 걸렸다.

- 할 일 없으면 자라. 아, 그리고 베놈 연구소 쪽에는 사람 붙여 놨다. 얼굴마담도 구해 놨고. 피해자들 명단도 확보했어. 여기는 스탠바이 됐다.

“자료 일부는 내 회사로 보내. 이준희 팀장 앞으로.”

- 그래도 되겠냐?

“어, 그리고 어쩌면 조만간 문경욱 만나야 할지도 모르겠으니까, 준비해 둬.”

- 그 아들놈?

류원은 대꾸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그와 동시에 진료실 문이 열리며 준호가 침대를 밀고 나왔다. 침대에 누워 곤히 잠든 해원은 평온해 보였다.

“어떻게 됐어.”

“…너 아이 가지고 싶냐?”

준호의 물음에 류원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자신이 베놈스테먼이 아니라 일반스테먼이었다면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을지도 모르겠다. 준호가 어깨를 툭 쳤다.

“처음보다는 확실히 좋아졌어. 동떨어진 상태로 몸에서 부유하던 자궁이 제 자리를 찾았고. 그래도 당장 임신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야. 나중에 더 좋아진다면 또 몰라도.”

* * *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류원은 꼼짝도 하지 않고 해원의 곁을 지켰다. 열이 잔뜩 올라 불그스름했던 얼굴이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달뜬 숨이 완벽히 가라앉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다른 손으로는 해원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늘 만지고 쥐었던 손이지만 오늘따라 애틋하게 느껴졌다. 손끝에 입술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만 자고 눈 좀 떠 봐요. 보고 싶다, 문해원 눈…….”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려 주고 가습기를 확인했다. 물이 아직 절반 정도 남아 있었다. 세기를 조절하고 주변을 대충 정리했다.

준호에게 해원을 부탁하고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몇 번이나 뒤를 힐끗거렸다. 금방이라도 해원이 달려 나와 제 품에 안겨 들 것만 같았다.

주차장으로 나와 스마트키를 눌렀다. 중형 세단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어제 급하게 나오느라 해원이 하루 종일 타고 돌아다녔던 차를 그대로 끌고 나온 모양이었다. 하긴 정신이 없었으니까. 자조하며 차 문을 열었다.

운전석 문을 열자, 뜨거운 태양에 바싹 마른 공기가 느껴졌다. 브레이크를 밟고 시동을 걸었다. 에어컨을 최대치로 틀어 놓고 차 밖으로 빠져나왔다. 류원은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조수석 쪽으로 다가가 차 문을 열었다.

툭-, 신발 위로 가방 하나가 떨어졌다. 해원이 늘 들고 다니는 가방이었다. 떨어진 가방을 주워 다시 조수석에 올려 두었다.

해원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마치 현실도피를 하는 사람처럼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속이 답답했다. 뜨거운 바람과 함께 흡입되는 담배 연기가 불쾌함을 가져다주었다.

담배를 입술에 물고 조수석 문을 닫았다. 차체를 크게 돌아 운전석에 올랐다. 담배를 길게 빨고 재떨이에 비벼 껐다. 문해원 대신 자리를 잡은 해원의 가방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거기 뭐가 들었어요?”

“그냥 이것저것이요.”

“보여 줘요.”

“지저분해서 안 됩니다.”

지저분해서 절대 못 보여 준다는 가방은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씁쓸하게 웃었다. 한참 가방을 노려보다가 충동적으로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방 지퍼를 열자, 그가 왜 보여 주지 않으려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작은 가방 안은 너저분한 종이들이 뒤엉켜 엉망이었다.

류원은 가방을 허벅지 위에 올려 두고 하나씩 종이를 꺼내 내용을 확인했다.

무심한 눈으로 전기, 가스, 수도 요금 고지서를 차례차례 넘겨보았다.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고지서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어제 집에 다녀온다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닌 모양이었다.

가방을 뒤적여 잡다한 종이들을 확인하고 앞쪽 주머니를 열었다. 사 등분으로 접힌 종이가 두 개 들어 있었다. 한 개를 꺼내 펼치자 [이자 연체 독촉 고지서]라는 글씨가 보였다.

문해원 귀하로 시작하는 종이에는 대출 원금과 이자, 최초 대출일 등이 적혀 있었다. 빚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는데,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하긴 문해원의 입으로 빚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개가 말을 배워 스스로 말을 하는 게 더 빠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젓고 눈으로 종이를 훑었다.

1억이 조금 넘는 금액이었다. 류원은 길게 생각하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서류 하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경쾌한 멜로디와 함께 대출을 권장하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 GR금융 우재민입니다.

“채무자 중에 문해원이라고 있습니까?”

- 누구, 시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 채무자 개인정보는 함부로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있는지만 확인되면 지금 당장 원금과 이자를 갚겠습니다. 있습니까?”

류원은 남자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나머지 종이를 꺼내 펼쳤다. 종이는 두 장이 겹쳐져 있었다. 잔뜩 구겨졌다가 다시 펼쳐진 자국이 가득한 종이는 문해원의 주민등록등본이었고, 다른 하나는 생계 지원금이 중단되었다는 확인서였다.

류원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흩어진 모든 퍼즐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꽤 오랜 침묵을 깨고 남자가 입을 열었다.

- 있습니다.

“혹시 어제 문해원한테 전화가 왔습니까?”

- 이자 연체 때문에 통화를 했고 통장에서 인출을 시도했으나 인출이 되지 않아 확인을 부탁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이 번호로 계좌 번호 보내세요. 그리고 처리 서류는 우편으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

류원은 남자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조수석으로 던졌다. 운전대를 두 팔로 감싸고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해원의 스트레스 원인은 자신에게 있었다.

아마 해원은 이자 연체 독촉장을 받고 통장을 확인했고 보조금이 들어오지 않은 사실에 동사무소를 찾아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문경욱의 말소 해제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았다. 그 말소 해제는 류원이 직접 지시한 일이었다.

차창을 조금 내리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떤 기분을 느꼈어?

무슨 기분으로 집까지 왔어?

많이 울었어?

해원의 병실이 있을 법한 층을 올려다보며 속으로 물었다. 가슴을 쇳덩이로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답답증이 일었다.

언젠가 침대에서 탈력감으로 늘어진 해원의 몸을 끌어안고 가족에 관해서 물은 적이 있었다. 제 팔을 베고 누운 해원은 정신이 없는 상태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열 살 때 저를 낳아 주셨던 작은아빠가 꽃이 만개해서 숨을 거두셨고 열한 살 때 큰아빠가 집을 나가셨어요. 그 후로 연락 한 통 없어요. 아마.”

“…….”

“돌아가신 거 같아요. 아니면 다른 살림을 차렸거나. 근데 주민등록 말소가 되어 있으니 그것도 못할 거 같고, 모르겠어요. 정말 밉고 싫은데 저한테는 유일한 혈육이니까 그립기도 해요.”

해원은 그 말을 끝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 유일한 혈육이라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땅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주 만에 문경욱의 소재를 파악했다.

문경욱은 해원이 생각한 것처럼 죽지도 않았고 다른 살림을 차리지도 않았다. 땅개에게 끌려온 그는 상태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팔, 다리가 한쪽씩 절단된 상태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감면이라는 작은 소도시의 부랑자 수용소에서 발견되었다.

절단된 팔, 다리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점차 썩어 가고 있었고, 뼈가 드러날 만큼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오히려 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땅개의 연락을 받은 류원은 해원이 곤히 잠들기를 기다렸다. 세상모르게 잠든 해원에게 짧게 입 맞추고 은밀하게 집을 빠져나와 킹덤으로 향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땅개가 내미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9년 동안 교도소에 있었다고?”

“어, 죄명은 피스틸 중간 살인.”

“…중간 살인?”

‘피스틸 중간 살인’은 피스틸을 만개해 사망케 한 스테먼 스스로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율 형량을 받는 것을 의미했다. 악의가 있어 살인한 것은 아니지만, 죗값을 치르고 싶은 스테먼이 스스로 죄를 청하는 것이었다.

피스틸이 만개해 사망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피스틸이 사망한 뒤, 스스로 죄를 청해 오는 스테먼은 꽤 많았다. 사랑하는 연인 혹은 배우자를 죽였다는 죄책감… 문경욱 역시 같은 케이스였다. 배우자를 사망케 했다는 죄책감에 자신을 스스로 벌한 것이다.

“아이도 있었으면서 무책임했군.”

“스테먼은 원래부터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종족이지.”

류원은 자조했다. 자신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종족이었다. 문해원이 온몸에 양귀비를 새기고 숨이 꺼져 갔다면, 그처럼 죄를 청하고 자신을 스스로 가두어 버렸을 것이다. 정말 지랄 맞은 운명이었다.

“그 후에는?”

“출소 후에는 전국 부랑자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산 모양이야. 문경욱이라는 이름 대신 김영수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어서 찾느라 고생했다.”

“…돌팔이는 뭐래?”

“첫 번째. 절단된 팔, 다리는 거의 다 썩어서 2차 절단 수술 필요, 두 번째. 영양실조와 당뇨병, 세 번째. 염증 수치가 너무 높대. 근데 다 죽어 가는데 굳이 수술이 필요할까 싶긴 하다.”

“수술이든 뭐든 해서 사람처럼 만들어 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땅개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괘념치 않았다. 문해원이 원하면 땅속에 묻힌 사체라도 꺼내 눈앞에 데려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데 문제는, 문경욱 신분이 말소되어 있어.”

“그런데?”

“너 혹시 돌팔이한테 수술 맡길건 아니지?”

땅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바닥에 돌팔이라고 불리는 의사는 꽤 유능한 편이었다. 류원 역시 자살 시도로 수혈이 필요했을 때 이 바닥 돌팔이 도움을 받았다. 그는 이리저리 출장을 다니며 사람을 고쳐주는 걸 업으로 삼는 인물이었다.

“돌팔이한테 절단 맡겼다가 죽을 수도 있어. 돌팔이는 말 그대로 돌팔이일 뿐이야.”

“그래서 어쩌라는 건데?”

“말소 해제해서 신분 살리고 대형 병원에서 수술받아야지.”

“그럼 그렇게 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진행을 지시했다. 현재 문경욱은 2차 절단 수술을 마치고 킹덤에서 회복 중이었다. 어느 정도 회복을 하면 해원과 만나게 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틀어져 버렸다.

해원은 류원이 전혀 예상치 못한 루트로 아버지의 생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스트레스로 해원이 쓰러져 버렸다. 짜증스럽게 운전대를 세게 내려치고 험악하게 욕을 뇌까렸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렇게 캄캄할 수가… 류원은 기가 막혀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 얼굴을 문질렀다.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가속페달을 밟았다.

* * *

“죄송합니다.”

“류원 씨 조금만 쉬었다가 갈까?”

“예, 5분만 쉬었다가 가죠.”

류원은 저조한 컨디션 때문인지 자꾸 NG를 내고 있었다. 촬영 장비를 내려놓고 스쳐 지나가는 스태프들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그리 어려운 대사도 아니고 장면도 아닌데 어쩐 일인지 입 밖으로 대사가 나오지 않았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하니 서 있다가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채현이 조심히 다가와 물병을 내밀었다. 물병을 받아 입을 축이고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루가 정말 지독하리만치 길었다. 아직도 해가 떠 있는 걸 보니 화가 치밀었다.

촬영장에 막 도착했을 때 준호에게 전화가 왔었다. 해원은 깨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좀처럼 울음이 진정되지 않아 안정제를 놓아 재웠다는 말을 덧붙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처음부터 해원에게 문경욱을 찾았다고 말하는 게 옳았을까? 자꾸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몰골이 처참해서 어느 정도 회복만 되면… 씨발!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짜증에 애꿎은 맨바닥을 발로 퍽 차올렸다.

“저기, 팀장님이 전화 좀 급하게 달라고 하셨는데 연결할까요?”

채현이 류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조건 바꾸라고 소리치는 팀장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류원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채현이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류원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짧게 들렸다. 블루투스를 연결해 놓았는지 짧게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 끊어, 5분 후면 도착하니까.

류원은 대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밀자, 채현이 얼른 받아 갔다. 준희가 미친놈처럼 촬영장으로 달려오는 걸 보니 아마 땅개가 보낸 서류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 봐야 알겠지만.

류원은 덤덤한 얼굴로 손가락을 까닥였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재영이 빠르게 다가와 분첩으로 얼굴의 유분기를 제거했다.

“다 됐어요.”

류원은 다시 촬영장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감독이 장면에 대해서 다시 한번 설명을 하고 의자에 앉았다. 눈으로 촬영장을 한번 훑었다. 수많은 스태프가 각자의 자리에서 류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촬영장 어딘가에 해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입안이 썼다.

류원은 좀처럼 촬영에 집중하지 못했고 결국 감독은 촬영 장면을 편집해 사용하기로 했다. 류원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하고 촬영장을 벗어났다. 촬영 라인을 벗어나자 숨통이 트였다.

“강류원.”

익숙한 준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류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괴로운 신음을 내뱉었다. 마음 같아서는 촬영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해원의 곁으로 가고 싶었다. 미친놈처럼 날뛰는 마음 하나 잡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마음이 답답하고 언짢았다.

“강, 류원 씨…….”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류원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천천히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희미하게 웃는 문해원이 보였다.

류원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 해원을 와락 껴안았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쉬었다. 묵직하고 짙은 나무 냄새가 코 점막에 스며들었다.

“아, 문해원 냄새.”

물을 잔뜩 머금은 솜뭉치처럼 축 가라앉았던 기분이 문해원을 마주하자, 흐렸던 날씨가 개는 것처럼 맑아졌다.

그제야 모든 게 다 안정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미친놈처럼 날뛰던 마음도, 답답한 숨도 모두…….

“몸도 안 좋으면서 왜 나왔어요. 병원에서 좀 쉬지. 안 힘들어요?”

“…싶 …요.”

“응?”

“보고… 싶어서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들시들한 꽃처럼 금방이라도 몸통과 머리가 분리될 것 같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강류원이 화사한 얼굴로 촬영 라인 안으로 들어와 섰다. 피곤한 기색은 남아 있었지만, 표정은 그 어떤 때보다 밝았다. 아까와는 180도 다른 모습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어이없게도 문해원이 촬영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류원은 기운이 넘쳤다. 조금 전과 판이해진 모습에 감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류원은 자진해서 NG난 장면의 재촬영을 요구했고 단 한 번에 OK를 받아 냈다. 감독이 황당한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그를 바라봤다.

“아니, 이렇게 잘할 거면서 왜 그렇게 사람 속을 태워.”

“수고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순조롭게, 아니 싱겁게 끝나 버린 촬영에 모두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NG만 자그마치 열두 번이나 났던 장면이었다. 스태프들이 어이가 없거나 말거나 류원은 촬영 라인을 빠져나와 재킷을 벗어 재영에게 내밀었다.

“아주 기운이 뻗치냐?”

준희가 옆으로 다가와 빈정거렸다. 전 같았으면 말꼬리를 잡아 같이 툭탁거렸을 테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비구름이 말끔하게 갠 맑은 하늘처럼 류원은 실없이 웃으며 대꾸했다.

“어, 아주.”

“문해원이 만병통치약이네.”

“그것보다 더할지도.”

류원은 걸음을 바삐해 밴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해원이 등받이를 뒤로 젖힌 채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덥다, 할 이야기…….”

“이따가.”

준희가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단칼에 막은 류원이 차 문을 닫고 그의 곁에 조용히 앉았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잠든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가지런하게 내려앉은 풍성한 속눈썹이 퍽 예뻤다.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며 온몸으로 안겨오는 그의 몸을 끌어안은 게 조금 전이었다. 그때의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저명한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을 때도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피식-, 작게 웃음이 터졌다. 문해원이 뭐라고 기립박수를 받는 그 순간조차 느껴 보지 못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걸까.

손을 뻗어 해원의 이마를 짚었다. 희미한 미열이 있었다.

“으음…….”

해원이 미간을 좁히고 몸을 뒤척였다. 얼른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깨지 않길 바랐지만, 해원은 깊은 수마를 헤치고 수면으로 올라왔다. 천천히 눈꺼풀이 들리고 강아지처럼 까맣고 맑은 눈동자가 보였다. 잠시 멍한 눈으로 류원을 바라보던 해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촬영, 다 끝나셨어요?”

“네. 몸은 어때요?”

“나쁘지, 않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음…….”

류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해원이 아파서 누워 있는데 입으로 음식이 들어갈 리가 만무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해원이 등받이를 올리고 바로 앉았다.

“여름이라 식사 안 하시면 체력 떨어진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해원 씨가 그렇게 누워 있는데 입맛이 있겠어요?”

류원이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해원은 손을 뻗어 류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타인에게는 늘 무뚝뚝하고 정 없는 사람이지만 제게 만큼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입술 새로 낮은 숨이 샜다.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아빠가 아니라 강류원이었다. 당연히 곁에 있을 줄 알았는데…….

그의 빈자리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의 빈자리가 못 견디게 아쉽고 서러웠다.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가 잠투정을 하는 것처럼 길게 눈물길이 그려졌다. 강류원, 차마 소리를 내서 부를 수도 없었다.

하영이 언젠가 ‘나 해원 씨가 좋은 거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자신은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뒤늦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한 대상이 강류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막연하게, 멀다고만 생각했던 그의 존재가 어느새 제 가슴을 흠뻑 적시고 있었다.

“류원이가 밤새 간호했어요. 손에 쥐면 터질세라 바람 불면 날아갈세라 얼마나 안절부절못하고 지극정성이었는지 몰라요. 좀 쉬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그러고 있다가 조금 전에 촬영장 갔어요. 좀 쉬고 있으면, 올 거예요.”

해원은 준호의 말에 더 서러운 눈물을 쏟아 냈다. 아이도 가질 수 없는 비루한 몸뚱이를 가진 제게, 이보다 더한 사랑을 퍼부어 줄 사람이 이 세상에 강류원 말고 또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 때문에 좋아한다 말하는 그에게 대답 한 번 해 준 적이 없었다. 이미 마음은 온갖 꽃을 피워 강류원을 향해 산들거리고 있었으면서……. 그가 보고 싶었다. 지금 당장 보지 않으면 마음이 펑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저 촬영장에, 가 봐야겠습니다.”

“안 돼요, 열은 많이 떨어졌다고 해도 아직 정상 체온 아니에요. 이것 봐요, 울었더니 또 열 오르잖아요.”

준호는 체온을 재고는 혀를 내둘렀다. 체온계에 뜬 숫자를 눈앞에 대어 주었다. 37.3도, 열이 펄펄 끓어올라도 지금 당장 류원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열 때문에 정신이 살짝 돌아 버린 게 확실했다.

마음이 이상해서 자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준호는 제게 양해를 구하고 안정제를 놓았다. 눈가를 타고 흐른 눈물이 귀 안쪽에 고였다. 그 눈물이 꼭 제 마음에 고인 강류원 같아서 차마 문지를 수도 없었다.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강류원을 애타게 부른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류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어느새 그의 손이 제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지고 있었다. 손길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괜히 마음이 간지러웠다. 해원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강류원 씨 생각했습니다.”

“응?”

3초간 멍한 표정을 짓던 류원이 놀란 얼굴로 손을 뻗어 해원의 이마를 덮었다. 열은 없는데. 솔직하게 제 감정을 드러내는 해원이 낯설지만, 이 상황이 퍽 기꺼웠다.

“…사실은, 어제 동사무소에 갔다가 큰아빠가 살아 있단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막연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 있다고 하니까 마음이 이상하더라고요.”

“…….”

“살아 있었으면서 왜 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는지, 나는 계속 기다렸거든요. 아빠가 집으로 돌아올까 봐 혼자인 집에서 묵묵하게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뎠습니다. 그런데 끝내 오지 않았어요. 제가 열한 살짜리 꼬마에서 서른 살 먹은 성인이 될 때까지.”

담담하게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는 해원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류원은 해원의 어깨를 감싸 품에 안았다.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많이 무서웠을 텐데, 기특하네. 우리 해원이.”

장난스럽게 칭찬하자, 그가 손가락을 새워 뺨을 긁었다. 열한 살 꼬마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참담하고 끔찍했을 텐데 묵묵하게 혼자 견디고 감당해서 이만큼 자라 준 게 기특했다. 문해원은 바르고 곧게 잘 자랐다.

“근데 참 이상하게 조금 전에 눈을 떴는데 아빠가 생각나는 게 아니라 강류원 씨가 생각났습니다.”

“…….”

“눈물도 나고 괜히 서럽고 옆에 없는 그쪽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상황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촬영 펑크라도 내고 옆에 있을 걸 그랬네요.”

“아니요, 그 덕분에 제가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해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류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머리가 핑핑 돌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류원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엮어 넣었다. 가만히 손을 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찬 기운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희미하게 짙은 꽃 냄새가 흘러들었다.

“꽃, 꽃 냄새가 나요.”

“…….”

“강류원 씨 냄새가 납니다.”

숨을 크게 마셨다. 꽃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폐부 깊숙이 밀려든 꽃 냄새가 몸속 장기의 기운을 북돋는 것 같았다. 마치 어서 기운을 차리라는 것처럼.

“괜찮아요?”

“…강류원 씨가.”

“…….”

“좋습니다.”

쿵-, 심장이 발아래로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류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맞잡은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가만히 손등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날마다 오늘만 같았으면 소원이 없겠네.”

“이제 싫다고 하셔도 소용없어요. 운동만 한 애들이 지독한 외골수거든요. 저도 운동만 해 와서…….”

류원은 손을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해원의 얼굴을 감싸고 입술을 맞대었다. 해원의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와 닫혔다. 혀가 뒤엉키는 농염한 키스가 아닌 서로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맞댄, 어린아이들이나 나눌 법한 그런 순수한 입맞춤이었다.

류원의 코끝에는 해원의 묵직하고 짙은 나무 냄새가, 해원의 코끝에는 류원의 지독한 양귀비 꽃 냄새가 오래도록 머물렀다.

“저,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해 봐요.”

“저, 큰아빠 아니, 아버지를 찾아볼까 합니다. 그래서 당분간 매니저 일을 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큰아빠라는 단어를 얼른 정정하며 뺨을 붉혔다. 지금까지 실컷 아빠라고 불렀으면서 이제 와서 아빠라고 부르는 게 거슬렸다. 류원이 저를 어리다고 생각할까 봐 마음이 쓰였다.

해원은 류원의 안색을 살폈다. 이 세상에 남겨진 유일한 혈육이었다. 제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절반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버려졌을지언정 부모는 부모였다.

그 무엇보다도 해원은 그에게 묻고 싶었다. 왜 그렇게 무정하게 자신을 버리고 떠났느냐고. 열한 살짜리 꼬마 아이를 두고 떠나는 기분은 어땠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류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통한 표정으로 해원을 바라봤다. 문경욱을 데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문경욱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류원이 보호하고 있다고 하면 그는 지금 당장 만나려고 할 게 뻔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난 그럼 해원 씨한테 양해를 구해야겠네요.”

“……?”

“조금만 기다려 주면 해원 씨 아버지 만나게 해 줄게요. 내가 직접 만나게 해 줄게요.”

“아뇨,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제 개인적인 일이니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드라마 촬영이 거의 막바지라 정신이 없을 텐데 제 개인적인 부탁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류원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해원 씨가 촬영장에 없는 게 더 힘들어요. 오늘 NG를 몇 번이나 냈는지 알아요?”

“…NG요? 강 배우님이요?”

류원은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묻는 얼굴이 귀여워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입 근육이 제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한껏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한 장면으로 열두 번이나 NG를 냈더니 스태프들이 무섭게 노려보던데요.”

“열두 번이나요?”

류원은 극에 대한 몰입도가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NG를 잘 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런 사람이 열두 번이라니, 너무 놀라 입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컨디션 안 좋으세요?”

해원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물음을 던졌다. 날씨가 더운데 아직 식사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혹시 그것 때문인가. 아니면 어젯밤 저를 간호하느라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 건가.

이런저런 가설들을 떠올리며 해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류원이 해원의 코를 아프지 않게 쥐었다가 놓으며 작게 웃었다.

“그러니까 아버지 문제는 나한테 맡겨 둬요.”

“…그래도, 제가 괜히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류원은 자꾸 생각이 깊어지는 해원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무 말 없이 얌전히 안겨오는 몸을 소중히 끌어안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일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해원이 먼저 말을 꺼내 줘서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모든 게 순리대로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쾅쾅―!!

갑자기 차 문을 부술 듯 두드리는 소리에 류원이 해원을 품에서 떼어 내고 문을 바라봤다. 검게 선팅이 되어 있는 차창 밖으로 준희의 얼굴이 보였다.

류원은 제 손목시계를 힐끗 바라봤다. 아직 여유가 있었다. 해원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 차 문을 열자, 준희가 서류 봉투 하나를 류원에게 집어 던졌다. 서류 봉투가 류원의 몸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팀장님!”

“문해원 넌 가만히 있어. 강류원 당장 이거 설명해!”

준희는 평소답지 않게 화를 내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땅개가 보낸 서류였다. 안에는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은밀히 진행 중인 종족 번식 프로그램의 내용, 프로그램 대상자로 강류원이 선정되었다는 확정 서류, 매달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류원의 앞으로 보내오는 독촉장 같은 공문의 전문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각 장마다 기밀문서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류원은 해원의 손을 잡아끌어 좌석에 앉히고 시선을 마주했다.

“준희 형이랑 단둘이만 할 이야기라서… 여기서 쉬고 있어요. 불편한 거 있음 채현이 부르고.”

준희가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음에도 류원은 태연한 표정으로 해원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해원의 뺨을 부드럽게 쓸고 차를 빠져나왔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류원의 몸에 안겨왔다.

“도대체 이게 뭐냐고!!”

“자리 옮겨서 이야기 할 테니까 진정해.”

류원이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퀵서비스로 서류를 받았는지 준희의 손에는 영수증 하나가 들려 있었다. 서류를 움켜쥐고 준희의 차가 세워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희가 빠르게 따라붙으며 씩씩거렸다.

은색 세단의 조수석 문을 열자, 그가 뛰다시피 운전석에 올랐다. 그늘에 세워 둔 차는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익숙하게 콘솔 박스를 열어 담배를 꺼냈다. 그리고 여상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매달 나한테 우편을 보내오는 건 알고 있었잖아.”

“난 그저 정기검진에 대한 독촉인 줄만 알았다고! 근데 그 종이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내용이 담겨 있을 줄 상상도 못 했어. 너는 이런 일을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지금껏, 하아… 정말 내가 너한테 고작 회사 직원일뿐이야? 네 공적인 것만 처리해 주는 그런 허수아비였냐고.”

“…….”

“이런 일이 있었으면 나한테 진작 말을 했어야지!! 왜 등신처럼 혼자 이 무거운 걸 안고 있어!”

차가 그늘에 있다고 해도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준희는 화를 내지르면서도 류원이 더울까 싶어 차에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켰다. 금세 시원한 바람이 차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류원은 씁쓸한 얼굴로 차창을 조금 열었다.

“형이 안다고 해도 달라질 게 없으니까.”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이따위 개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라고 형은 뉴스로 접한 적 있어? 아니 하다못해 기사 한 줄 본적 있냐고. 이건 내부에서 은밀하게 진행되는 일이야. 형이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데.”

“그럼 지금은?”

류원은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길게 빨았다. 담배 연기가 폐부 깊숙이 닿았다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여전히 준희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류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키고 싶은 게 생겼어. 그래서,”

“…….”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벌이고 있는 이 일을 언론에 폭로할 생각이야.”

“뭐?”

“이미 준비는 다 끝냈어. 최대한 회사에 피해 안 가게 할게.”

준희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베놈스테먼 연구소는 국가 최상위 기관이었다. 이 기관에서 벌어지는 일은 검찰, 경찰도 눈감아 준다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 곳을 일개 배우 따위가 건드리겠다고? 이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마른세수를 하고 류원의 옆모습을 힐끗거렸다.

“형, 나 열여덟 살에 베놈스테먼으로 각성을 했어.”

“…그건 나도 알아.”

“베놈스테먼으로 각성했다고 국가에 신고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

“연구소에 잡혀가. 거기서 생식 능력을 검사해. 고작 열여덟 살짜리 애를 발가벗겨서 강제로 발기시키고 정액을 쥐어짜.”

담담하게 말을 잇는 류원의 목소리는 수분이 하나도 없는 마른 나뭇잎처럼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말의 의미는 역겹고 잔혹했다. 준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주먹을 쥐었다가 펴도 그 떨림이 가라앉지 않았다.

강류원이 그 당시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준희는 무의식중에고개를 가로저었다.

“…마, 말도 안 돼. 엄연한 인권이 있는데 그런 일을 정말 벌인단 말이야?”

“인권? 하, 사흘 동안 갇혀서 정액을 쥐어짜이다가 나와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알아?”

류원은 그 끔찍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억지로 독을 삼키고 간신히 생명줄을 다 잡았을 때 비보가 날아들었다. 어머니께서 뺑소니 사고로 사망하셨다는 이야기였다. 류원이 각성통을 겪는 동안 어머니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계셨다. 그러다가 결국 숨을 거두셨다.

류원은 미친놈처럼 울부짖었다. 각성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게 뭐라고……. 온몸의 피가 밖으로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리고 그날 류원은 베놈스테먼 연구소로 끌려갔다. 영문도 모른 채 옷이 발가벗겨지고, 강제로 정액이 쥐어짜이며 서럽게 울어야 했다. 왜 나한테 이러냐고 악다구니를 하면 연구소 직원들이 앵무새처럼 대답했다.

“절차입니다.”

그들이 내뱉는 것은 저 기계적인 말이 전부였다. 절차, 그 빌어먹을 절차. 아무도 믿지 못하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는 베놈스테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설립되었지만, 보호는커녕 도리어 베놈스테먼의 인권을 유린하고 제 입맛대로 굴리고 있었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류원은 한숨 같은 긴 숨을 내쉬고 말을 마저 이었다.

“경찰에 신고했어.”

“…….”

“근데 경찰이 그러더라. 베놈스테먼 연구소는 최상위 국가 기관이라 검, 경은 못 건드린대. 신고하려면 직접 베놈스테먼 연구소에 진정서를 정식 접수하라더라. 내 인권을 유린당하고 성적 학대를 당했는데 신고조차 할 수 없었어.”

준희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도어포켓에서 물병을 꺼내 물을 마셨다. 미지근한 물 온도가 더 짜증스럽게 속을 데웠다. 안티스테먼인 준호 역시 각성 직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검증 단계를 거쳤다. 그리고 지금은 국가의 재산으로 취급받고 있다.

아버지는 준호가 희귀 종족인 것에 대해서 굉장히 안타까워하셨고 죄스러워했었다.

그런데 안티스테먼이야 피스틸에게 정화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베놈스테먼은 도대체 왜 생식 능력을 검증받아야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데, 베놈스테먼의 생식 능력이 왜 중요한 건데.”

“지금 같은 상황을 대비해서지. 종족 불균형.”

“……?”

준희는 이해가 되지 않아 멍청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일반 스테먼과 피스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절반 확률로 스테먼으로 각성을 해. 그런데 베놈스테먼과 피스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거의 90% 확률로 베놈스테먼으로 각성하고.”

“…베놈스테먼의 개체 수가 많아지면 안 좋다고 뉴스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래서 태아일 때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거야. 베놈스테먼이 아니라 일반 스테먼으로 태어날 수 있게.”

“그럼 결국 태어나는 건 베놈이 아니라, 일반 스테먼이 태어나는…….”

류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지만 어쩐지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열이 오른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고 에어컨 세기를 한 단계 더 올렸다.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처음 연락이 왔을 때에는 불면증에 시달려 제정신이 아니었고, 지금은 지키고 싶은 피스틸이 있었다.

그리고 만약 저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가 태어나야 한다면 문해원의 태를 빌린, 혹은 그의 동의를 받은 아이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절대 허용할 수 없었다.

한동안 심각한 얼굴로 이것저것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던 준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의 말처럼 베놈스테먼 연구소가 진행 중인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는 기사 한 줄 없었다.

아직도 류원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그들이 자행하는 짓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준희는 애써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길 바라는데.”

“형은 언론을 움직여 줘.”

“후, 어떤 간 큰놈이 베놈스테먼 연구소를 이슈화 하겠냐. 기자들도 섣불리 기사 못 쓸 거야.”

“강류원이 종족 번식 프로그램의 대상자라고 하면 너도나도 달려 들 거야. 그리고 사회면이 아니라 연예면에 보도되겠지.”

“그래도 이건 너무 위험한 거 같다.”

류원은 커피가 조금 남은 종이컵에 담배꽁초를 떨어뜨리고 꺼져가는 불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마 베놈스테먼 연구소가 은밀하게 접근해 오지 않았다면 저 역시 방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소가 문해원까지 이 일에 끌어들여 저를 주물러 대려고 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맞설 수밖에…….

고개를 돌려 준희를 바라봤다. 얼굴에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희미하게 웃으며 준희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난 내 씨가 어디에 어떻게 뿌려져 어떤 애가 내 앤지 모르는 상황까지는 가고 싶지 않아.”

“…….”

“더 지체하면 강류원 주니어가 사방 천지에 걸어 다니게 될지도 모르지. 나만 모르는 내 자식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이번 드라마 촬영이 끝나면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슬슬 움직일 거야.”

이제 곧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공식적인 휴식기에 들어가니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움직일 게 뻔했다. 최 감독은 하루빨리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싶어 할 테고…….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회사로 찾아갈 거야. 사무실에 CCTV 새 걸로 바꾸고, 경호팀이랑 법무팀 대기 시켜놔.”

“…나는 네가 안 다쳤으면 좋겠다.”

“안 다쳐.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나 아직 문해원이랑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죽을 수도, 다칠 수도 없어.”

류원이 실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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