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초(毒草) : 아로새기다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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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은 티셔츠를 벗고 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 바지를 약간 끌어내려 등을 거울에 비추었다. 하아, 낮은 숨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나무의 밑동은 거뭇하게 죽어 있었다.
준호가 분명 나무가 좋아지고 있다고 했는데…….
아무리 요리조리 몸을 돌려 확인해 봐도 나무는 그대로였다. 기운이 쭉 빠지는 느낌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해원, 뭐야. 무슨 일이야.”
방문을 열고 들어오던 류원이 바닥에 주저앉은 해원을 발견하고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해원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고 티셔츠를 끌어다가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나무가 좋아졌다기에 기대했는데 기운이 쭉 빠졌다.
“이리 와요.”
류원이 대뜸 두 팔을 벌리고 해원을 불렀다. 해원은 얼른 티셔츠에 끼워 넣고 엉금엉금 기어 그의 품 안에 풀썩 안겼다. 등을 감싸 안는 느낌에 해원은 나른하게 하품했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소장님이 나무가 좋아졌다고 그랬는데, 그냥 하신 말씀인가 봐요.”
“나무가 좋아졌으면 좋겠어요?”
“…밑동이 까맣게 죽어서 보기 흉하잖아요.”
류원이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등을 어루만졌다. 손바닥 아래로 닫는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좋아 류원이 눈꺼풀을 내리고 그의 어깨에 뺨을 묻었다. 온전히 서로에게 의지한 채 서로의 품에 안겨 있었다.
“내 눈에는 예쁘기만 한데?”
“…….”
“근데 그 나무 내 눈에만 예쁘면 되는 거 아닌가? 다른 놈 보여 주려고?”
“예? 아니요!”
해원이 편안하게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우고 아니라고 두 손을 마구 흔들었다. 류원은 순진한 반응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다시 그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해원이 없던 시간이 모두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참, 해원 씨한테 할 이야기 있는데.”
“무슨 이야기요?”
“일단 나가서 이야기해요.”
류원이 고개를 숙여 해원의 뺨에 짧게 입 맞추고 먼저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잠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원이 뺨을 긁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뺨이 약간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류원은 해원이 소파에 앉자 테이블 아래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종이 뭉치를 해원의 앞쪽으로 밀었다.
“이게 뭐예요?”
“실은 내가 해원 씨 몰래 GR금융 대출 다 갚았어요.”
“…….”
“…….”
“그걸, 왜 강 배우님이 갚습니까.”
해원은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다. 제 치부를 들켰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이를 못 갖는 걸로도 모자라 빚쟁이라니 얼마나 끔찍할까 싶었다. 고개를 푹 떨구고 애꿎은 손톱 옆 거스러미만 쥐어뜯었다.
류원은 아무 말 없이 종이뭉치 제일 아래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차용증이었다.
“마음 불편하면 나랑 이거 써요. 채권자 강류원, 채무자 문해원.”
“…강 배우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대신 조건이 있어요. 이자는 면제해 주는 대신 원금은 20년 동안 균등한 금액으로 갚는 겁니다. 중도상환 같은 거 절대 못 해요. 무조건 20년은 나랑 봐야 합니다.”
류원은 테이블 아래에서 펜을 꺼내 텅 빈 채권자란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스테먼 넘버를 적어 넣었다. 연락처와 주소까지 완벽하게 작성한 종이를 해원의 앞으로 펜과 함께 내밀었다.
해원은 아무 말 없이 종이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생각이 많아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화가 났다가, 고맙다가, 미안하다가, 부끄럽다가 오만가지 감정이 제 가슴에 와 닿았다. 한참 만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절 비참하게 만드십니까. 저는 정말 강류원 씨한테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해원 씨가 없으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요. 다만 가진 게 돈밖에 없어서 이런 물질적인 거라도 해 주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그리고 이거 해원 씨가 다 갚아야 할 돈이에요. 이거 공짜…….”
갑자기 해원이 테이블을 짚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만큼 거리가 가까웠다. 서로의 숨결이 얼굴에 닿았다. 어쩐지 숨 막히는 기분에 류원이 해원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해원이 저돌적으로 입술을 부딪쳤다.
류원은 두 손으로 해원의 얼굴을 감싸고 그의 키스에 응했다. 물컹한 혀가 부드럽게 입술 사이를 파고들어 입안을 휘저었다. 혀가 난잡하게 뒤엉켰다.
어느새 해원의 다리 한쪽이 테이블 위로 올라와 있었다. 류원의 몸에 닿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류원이 다리를 붙잡아 주욱 끌어당겼다.
해원은 종이와 함께 속절없이 그의 앞으로 끌려갔다.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던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는 어느새 류원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두 팔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넣고 열렬히 그의 혀에 매달렸다. 질척하고 끈적한 숨이 끊이지 않고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내 혀 좀 빨아 볼래요?”
“…하아, 뭐든요.”
해원이 겁도 없이 류원의 혀를 덥석 물고 입안을 조여 빨기 시작했다. 마치 그에게 펠라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강약을 조절해 혀를 깊게 물었을 때는 한껏 조였다가 부드럽게 핥을 때는 힘을 풀어 마치 제 머리를 진탕 주물러 댄 기분이었다. 류원의 손이 기어코 해원의 바지 속으로 들어갔을 때 해원이 입술을 떼어 냈다.
“…강 배우님, 돈 꼭 갚겠습니다.”
손등으로 입가에 흐른 타액을 훔친 해원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류원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줍는 해원을 바라보며 맥없이 웃었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고 얼얼한 혀를 입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뭔가 당한 기분인데, 따져 물을 수 없달까. 기분이 묘했다.
해원은 코를 훌쩍거리며 허리를 숙이고 펜을 집었다. 자신의 마음이 다칠까 봐 일부러 차용증까지 준비해 준 류원이 고마웠다. 금액과 채무자란을 채워서 류원에게 내밀었다.
“최선을 다해서 변제하겠습니다.”
“돈 없으면 몸으로 때워도 돼요. 난 그쪽이 훨씬, 윽!”
해원이 소파에 놓인 쿠션을 집어 던지고 눈을 흘겼다.
* * *
류원은 흰색 슈트를 차려입고 차에 올랐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재킷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았는지 몸을 숙일 때 그의 맨살이 드러났다. 해원은 흠흠, 헛기침하며 차 문을 닫았다. 에어컨을 미리 틀어 놓아 차 안의 공기가 쾌적했다.
오늘은 류원이 모델로 활동 중인 한 의류 브랜드의 패션쇼가 있는 날이었다. 드라마 촬영 중간에 빠져나와 참석하는 행사라 해원의 마음이 괜히 바빴다. 패션쇼가 끝나고 곧장 촬영장으로 복귀하려면 조금 시간이 빠듯했다.
“출발할게요.”
채현이 앞좌석과 뒷좌석을 분리하는 가림막을 올리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도로로 들어서자, 류원은 재킷 단추를 풀었다.
“옷이 구겨질 거 같은데, 옷걸이 좀 줄래요?”
“아, 네. 잠시만요.”
해원이 얼른 뒷좌석으로 손을 뻗어 옷걸이를 집었다. 류원은 재킷을 벗어 내밀었다. 해원은 류원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옷을 정리해 옷걸이에 걸었다.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으로 대본을 집어 들었다. 해원은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류원을 힐끗거렸다.
매일 밤 보는 몸이지만 대낮에, 그것도 이동하는 차 안에서 그의 몸을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머리를 벅벅 긁고 좌석 아래에 놓인 상자에서 담요 하나를 꺼내 류원의 몸에 둘러 주었다.
“응?”
“…감기 걸리십니다.”
“됐어요. 해원 씨는 하던 일이나 계속해요.”
“예?”
“엉큼한 눈으로 내 몸 힐끗거리는 거 말이에요.”
“으아아-.”
해원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그의 곁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귀가 달아오르는 느낌에 귀를 세게 문지르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아, 쪽팔려.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낭패감에 인상을 구겼다.
“농담인데… 진짜 나 훔쳐보고 있었어요?”
“…….”
“점점 귀여워져서 큰일이네. 집에만 꼭꼭 숨겨 놓을 수도 없고.”
류원은 안전벨트를 풀고 해원의 옆쪽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여상한 얼굴로 대본을 바라보며 한 손은 해원의 허벅지를 슬쩍 매만졌다. 해원이 바락 소리를 지르려다가 운전석에 채현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 마세요.”
“오늘 행사장에 사람 많을 거예요. 행사 경호팀도 있고, 회사 경호팀도 지원 나오니까 해원 씨는 적당히 물러나 있어요.”
류원은 평상시 말투로 해원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면서 손으로는 허벅지 안쪽의 연한 살을 더듬었다. 손을 밀어내려고 해도 그는 고집스럽게 허벅지를 주물렀다.
“대답해요.”
“…알겠습니다.”
류원의 손이 의도적으로 해원의 바지 앞섶을 훑고 지나갔다. 화들짝 놀라 다리를 오므리자 류원이 대본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이런 장난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해원은 인상을 굳히고 류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거 엄연한 직장 내 성추행입니다. 자제해 주세요. 노동부에 정식으로 진정…….”
“하, 연인 사이에 이런 건 애정표현이죠.”
“…여, 연인이요?”
연인이라는 말이 어쩐지 간지럽게 들렸다. 해원은 열이 오른 귓불을 매만지며 류원의 시선을 피했다. 연인, 입안에서 맴도는 단어에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갑자기 류원이 손이 뻗어 해원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럼 우리 사이가 뭔데요?”
“…지, 지금은 일하고 있으니까. 그런 건 자제해 달라는 겁니다.”
호기롭게 직장 내 성추행을 운운하더니. 연인이라는 말 한마디에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도 못 맞추면서……. 류원은 해원의 입술을 꾹 잡았다가 놓고는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럼 집에서는 마음껏 만져도 돼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까.”
해원이 꽤 당황한 듯 손을 파닥거리며 인상을 썼다. 류원은 손에 쥔 대본을 내려놓고 바짝 몸을 밀착했다. 상체만 뒤로 빼 차창까지 밀려간 해원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면 백발백중 입을 맞춰 오거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의 손이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슬며시 한쪽 눈을 뜨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부딪쳤다.
“웁!”
“쉬이, 조용히 해요. 채현이 운전 중이잖아.”
해원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 그가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입안을 부드럽게 헤집고 빠져나왔다가 다시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해원은 류원의 아랫입술을 빨며 혀를 진득하게 섞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타액이 서로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도착 5분 전이에요.”
갑자기 앞쪽에서 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원이 화들짝 놀라 류원의 몸을 세게 밀쳤다. 몸이 밀려난 류원이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혀로 한번 핥고 야릇하게 웃었다. 눈매가 느슨하게 풀려 있어 분위기가 미묘했다. 그는 옷걸이에서 재킷을 걷어 몸에 걸쳤다.
“재영이 잠깐 태울게요.”
행사장에 다다랐는지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잠시 차가 정차 하는 듯하더니 문이 열리고 재영이 차에 올랐다.
“오빠 메이크업 수정 좀 할게요.”
해원은 얼른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영이 분주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영은 살짝 부어오른 입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랫입술만 유달리 부어 있는 것 같았다.
“오빠 어디에 입술 부딪쳤어요?”
“컥!”
뒤쪽에서 타는 목을 축이던 해원이 물병을 떨어뜨리며 기침을 해댔다. 다행히 뚜껑을 닫아 놔 차 바닥이 젖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해원은 꽤 오랫동안 사레에 들려 콜록거려야 했다.
“김다미 씨, 다음에 하차할 거예요. 3분 전이요.”
“해원 씨는 차에 있어요.”
“아니요, 콜록! 채현이 혼자 무리라고 팀장님께서 꼭 따라 붙, 콜록! 으랬어요.”
“물 좀 마셔 봐요.”
류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병을 건넸다. 해원은 물을 마시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지금도 류원의 입술이 약간 부어 있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진짜 내가 미쳤지.
가슴을 퍽퍽 때리던 손으로 머리를 퍽 때리자, 류원이 놀란 눈으로 해원을 바라봤다.
“왜 그래요.”
“강 배우님 입술 진짜 부었어요. 어떡해요.”
“괜찮아요, 기사 나면 피곤해서 그렇다고 하면 돼요.”
류원이 도어포켓에서 손거울을 꺼내 입술을 확인했다. 확실히 평상시보다 입술이 부어 있긴 했지만 그렇게 많이 티가 나는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 하차할게요. 해원이 형, 문 열어 주세요.”
채현의 말에 해원이 얼른 몸을 움직여 차 문을 열었다. 수많은 플래시가 한꺼번에 터지기 시작했다.
문을 활짝 열자, 류원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우아하게 내렸다. 취재 경쟁이 살벌했다. 해원과 채현은 류원의 양쪽에서 그의 걸음에 맞춰 걸었다.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달려드는 팬들을 막았다. 류원이 포토라인에 서 웃고 있는 동안 해원은 동선을 빠르게 파악했다.
사진 촬영이 끝나자 행사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행사장 안으로 향했다. 런웨이 앞쪽에 강류원이라는 이름표를 발견하고 의자 밑에 빨대를 꽂은 물병을 놓아 주었다.
“멀리 가지 마세요.”
“네, 뒤쪽에 있을게요.”
류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앉은 배우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패션쇼가 시작되고 채현과 나란히 서서 패션쇼를 구경했다. 잠시 채현이 차에 물건을 가지러 간 사이 누군가 해원의 어깨를 잡았다.
“어? 최 감독님.”
“잠깐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
“지금 강 배우님 혼자 계셔서요. 채현이, 아니 다른 매니저 올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규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해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규진은 평소답지 않게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몰골이 지저분했다.
그는 늘 단정하고 깔끔한 외모를 고수하고 다녔다. 며칠씩 밤을 새우는 현장에서도 깔끔을 떨어 다른 배우들에게 야유를 받았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그의 몰골이 이 모양이라니. 해원은 의아한 눈으로 계속 규진을 힐끗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현이 다가와 물병을 내밀었다. 해원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규진과 자리를 옮겼다.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아예 행사장 밖으로 나갔다. 후덥지근한 열기에 아스팔트 열기까지 더해져 숨이 막혔다. 흡연 구역으로 만들어 놓은 곳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강류원은 정식으로 미팅 잡더니 왜 안 나온 거야.”
“…아, 그때 일이 좀 있어서요.”
“계약을 빨리 진행해야지 나도 제작에 들어갈 텐데, 왜 이렇게 미적거려.”
“감독님, 무슨 일 있으세요?”
날카롭게 말을 받아치는 규진의 행동이 어쩐지 이상해 보였다. 제가 알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규진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해원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눈으로 규진을 살폈다.
“투자에 문제가 생겼어. 너라도 빨리 도장을 찍어 주면 좋겠는데.”
“예?”
“언제까지 미적거릴 거야! 구두 계약도 계약의 일종이라는 걸 몰라?”
규진이 정신없이 가방을 뒤져 계약서 한 부를 꺼냈다. 그리고 앞 포켓에서 펜을 뽑아 해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해원은 담배를 입술에 물고 얼떨결에 계약서와 펜을 넘겨받았다.
“감독님, 정말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나도 미치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해원은 몇 모금 빨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계약서를 읽는 척 시간을 끌었다. 어차피 출연하기로 마음먹은 거라 계약서를 쓰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규진의 태도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숨이 막혔다.
“저는 읽어도 계약서의 내용을 잘 모르겠습니다. 이거 강 배우님한테 검토를 부탁…….”
“그냥 일반 출연 계약서야. 너한테 해되는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사인해. 내가 너한테 나쁘게 하겠냐?”
해원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규진을 바라봤다. 규진은 뭐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조급해 보였다. 그리고 제 본능이 지금 계약서를 쓰면 안 될 것 같다고 경고를 보냈다.
“이 계약서 제가 검토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 계약 하는 건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해원아 나 좀 살려 주라. 왜 이렇게 팍팍 하게 굴어. 여기에 사인만 하면 다 끝나는 일이야.”
“감독님 태도가 이상하잖아요. 왜 이러시는데요. 솔직하게 말씀해 보세요!!”
규진은 머리를 감싸고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상황이 정말 지랄 맞게 돌아가고 있었다. 시간을 끌고 끌어서 결국 강류원의 드라마 종방 코앞까지 와 버렸다.
만약 여기서 일이 틀어지게 되면 제 아들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하는 처지였다. 그것만은, 절대로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최 감독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 나왔는지 류원이 양손을 주머니에 꽂고 비딱하게 서 있었다. 자세를 풀고 다가와 해원의 어깨를 감싸고 손에서 계약서를 빼앗아 갔다. 계약서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는 얼굴에 진중함이 묻어났다.
“계약서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네요. 해원 씨 사인해도 될 거 같아요. 근데.”
규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그 순간 류원이 계약서를 가로로 찢었다. 보란 듯이 종이를 흔들어 보이고 재떨이에 툭 던져 넣었다. 작은 불씨가 종이에 옮겨 붙었다가 금세 꺼졌다.
“이런 계약은 하는 게 아니지.”
“…강류원, 이게 무슨 짓이야!!”
“잘나가는 스타 감독님께서 어쩌다가 베놈스테먼 연구소의 개가 되셨습니까?”
“…무, 뭐야! 개라니, 개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규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강류원이 어떻게 알고 있지.
해원은 류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규진이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류원에게 달려들었다. 류원이 규진의 팔목을 붙잡아 천막 끝으로 밀었다.
우당탕-!
의자가 넘어지면서 규진이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해원이 규진에게 달려가려는 것을 류원이 붙잡아 세웠다.
“이 자리에서 내가 사고 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그냥 가만히 있어요. 나 해원 씨 때문에 억지로 참고 있으니까.”
류원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규진이 다시 한번 류원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류원에게 다가서기도 전에 해원이 먼저 규진의 발목을 발로 걷어차고 팔을 제압해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류원이 놀란 얼굴로 해원을 바라봤다.
“감독님 용서하세요. 저는 강 배우님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강 배우님이 다치는 거 제가 못 봅니다.”
담담하게 뱉어 내는 목소리가 어쩐지 슬프게 들려왔다. 류원은 해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자리를 피해 달라고 부탁했다. 해원이 멀찍이 떨어진 것을 확인하고 규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왜 이렇게 문해원과 계약을 못 해서 안달이십니까.”
“…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전부 다. <포이즌>은 제작되지 않을 것이고, 제작하겠다고 나선 회사의 대표가 하경원이고, 또 문해원이 이 일에 미끼였고, 그리고.”
“…….”
“결정적으로 지금 영국에 있는 당신 아들이 사실은 노멀이 아니라 안티스테먼이라는 것 정도.”
규진이 잠시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류원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숨길 것도 없었다.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내심 해원을 이런 일에 끌어들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근데 해원이를 배우로 키워 주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어. 일이 이렇게 될 줄 나도 몰랐지만.”
쓸쓸하게 웃으며 규진은 해원을 바라봤다. 정말 해원을 배우로 키워 주고 싶었다. 진흙을 닦아 내서 온전한 보석으로 대중 앞에 세우고 싶었다. 그래서 은퇴 번복까지 하고 돌아왔건만. 착잡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제가 두 가지 선택지를 드릴까 합니다, 잘 듣고 선택하시면 됩니다.”
“…….”
“첫 번째는 제 쪽으로 갈아타는 겁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사주받은 내용을 저에게 전부 다 털어놓으시고 이 일에서 빠지세요. 물론 잡음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건 이 일에 가담하면서 일어나는 부작용 같은 거니까 감수하셔야 합니다.”
“…….”
“두 번째는 지금처럼 베놈스테먼 연구소의 개로 사는 겁니다. 그러는 동안 제가 알아서 정보를 캐고 증거를 수집해서 베놈스테먼 연구소의 실체를 아주 크게 터뜨릴 겁니다. 거기에 최 감독님 이름도 거론되겠죠.”
“…….”
“아마 최 감독님의 아들 일까지 세상에 밝혀지면서 비난을 받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최 감독님 아들은 한국으로 송환될 거고, 안티스테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겠죠. 평생 결혼도 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삶을 살다가 죽겠죠. 쓸쓸하게.”
말투에 악의가 가득했다. 규진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여차하면 달려들 기세였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류원은 고개를 돌렸다. 패션쇼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네요. 선택지는 드렸고 그에 대한 대답은 내일 오후 2시까지 받겠습니다. 1번을 선택할 경우 녹음기에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사주받은 내용을 더하지도 빼지도 말고 그대로 녹음해서 제 사무실로 보내 주시면 됩니다. 2번을 선택하셔도 상관없습니다.”
“…….”
“그리고 무슨 선택을 하든 다시는 문해원 앞에 나타나지 마세요.”
류원은 말을 깔끔하게 끝맺고 해원의 허리를 감싸고 걸음을 옮겼다. 해원이 고개를 돌려 규진을 바라봤다. 하지만 규진은 해원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선택할 것도 없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게임은 강류원이 이길 싸움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 바닥에서 평생 굴러먹어 멍청한 줄 알았더니 꽤 영악한 구석이 있었다.
멀어지는 해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규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강류원이 좋은 사람 같아서 다행이다.”
* * *
짙은 어둠만큼이나 집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류원은 샤워 가운의 매듭을 손으로 당기고 거실을 눈으로 한번 훑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대충 아무렇게나 물기를 털어 내고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겼다.
평소라면 거실 소파에 해원이 앉아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류원의 시나리오를 뒤적거릴 텐데…….
있어야 할 사람은 없고 낯선 적막감이 불청객처럼 찾아와 있었다. 류원은 손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그리고 굳게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해원은 저녁도 먹지 않고 방 안에 틀어 박혀 있었다.
최규진은 순순히 베놈스테먼 연구소와의 유착 관계를 전부 녹음한 녹음기를 회사로 보내왔다. 그는 제 아들 역시 한국으로 불러들여 안티스테먼으로서의 의무를 걸머지게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류원은 녹음 파일에서 그 부분은 삭제했다. 최규진이 어떤 마음으로 해원과의 의를 저버렸는지 알고 있었다. 사람을 배신한 대가는 폭로 하나로 충분했다.
해원은 최규진이 자신을 이용해서 류원의 인생까지 망치려던 사실을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최규진이 직접 녹음한 파일을 다 듣고 나서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울지는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 아침이 되도록 나오지 않았다. 아침에 마주한 해원은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 있었다. 그리고 해원은 여러 가지 실수를 하면서도 묵묵하게 촬영장에서 류원의 매니저로서 소임을 다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저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억지로 붙잡고 이야기를 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혼자서 이겨 내는 게 더 낫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단단해지고 강해지는 과정 중 하나였으니까. 해원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곧장 방으로 향했고, 다음 날 또 같은 모습으로 류원의 얼굴을 마주했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고 굳게 닫힌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가볍게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해원 씨.”
소리를 내서 불러 봐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손잡이는 잠겨 돌아가지 않았다. 벌써 사흘째 해원은 방 안에 처박혀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의무적으로 촬영장을 오가고 기계적으로 식사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류원은 익숙하게 방문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한쪽 다리를 쭉 펴고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었다. 머리카락에 스며 있던 물기가 사방으로 날아갔다. 해원이 곁에 없으니 잠도 오지 않았다.
들어가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지만,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해원이 먼저 나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상처받았다는 거 압니다. 믿었던 사람이니까, 마음을 열었던 유일한 사람인데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 허탈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자괴감도 들 거야. 근데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아요. 그것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니까. 인간관계가 참 그래.”
류원은 해원이 듣고 있는지 아니면 그가 지쳐 잠들었는지도 모르면서 주절주절 말을 쏟아 냈다. 그러다가 문득 이 말이 어제 했던 말이라는 걸 깨닫고 피식 웃고 말았다.
이렇게 말주변이 없어서야…….
자조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어제 했던 말 말고 내 이야기 해 줄게요. 아무한테도 안 한 이야긴데, 말주변이 없어서 횡설수설할지도 모르지만, 해원 씨가 들어 줬으면 좋겠어.”
갑자기 문 안쪽에서 묵직한 감이 느껴졌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해원이 문 쪽으로 다가와 앉은 것 같았다. 그 말에 확신을 심어 주기라도 하듯, 희미하게 풍기던 나무 냄새가 약간 더 짙어졌다. 류원은 문에 등을 기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살아 보니까 인간관계 그거 부질없더라. 친구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사는 데 지장 없어요. 그런 말 있잖아요.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근데 그 말은 틀렸어. 기쁨은 모르겠는데 슬픔을 나누면 그건 나의 약점이 되어서 돌아와요.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약점으로.”
땀이 슬쩍 배어난 손을 마주 잡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언젠가 크게 사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신뢰라는 이름까지 써 가며 의지했던 사람에게서…….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다가 술을 마셨고 술김에 그걸 누구한테 털어놓은 모양인데…….
다음 날 아침 포털사이트 메인에는 ‘강류원 지인에게 수십 억대 사기당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올라왔다. 잠깐의 후련함, 성의 없는 위로 따위가 필요해서 자신은 기삿거리를 제공한 꼴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와 친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허울뿐인 지인이고, 정말 친한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이 바닥에서 있으면서 아예 안면몰수는 할 수 없으니까 그냥 안부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는 사람들. 근데 내 말 듣고 있어요?”
문 안쪽에서 문을 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 문해원 다운 대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이라도 하고 제 품에 안겨 울어 주면 좋을 텐데, 그는 고집스럽게도 혼자 견디는 방법을 선택했다.
안타까운 마음과 애틋한 마음이 제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처음은 늘 아프다. 첫 경험도, 첫사랑도, 첫 이별도, 첫 배신도. 처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아프지 않은 건 손에 꼽혔다.
“내가 만약 이슈가 될 만한 사고를 치면 그들은 빠르게 안면몰수를 해요. 촬영장에서 같이 찍었던 사진을 지우고, 누가 물으면 잘 모른다고 하고. 괜히 자신까지 더러운 추문에 휩싸일까 봐 빠르게 발을 빼요. 근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괜히 대중들의 눈 밖에 나서 좋은 건 없으니까. 우리는 그들이 주는 인기로 먹고살아요. 내가 아무리 수준 이상의 연기력을 선보여도 대중들이 내 드라마를, 영화를 봐주지 않으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건 그냥 쓰레기지.”
어느새 마른 머리카락을 쓱쓱 문지르며 씁쓸하게 웃었다. 입안에 모래가 든 것처럼 까끌거렸다. 속으로만 생각하다가 입 밖으로 내니까 속이 공허해지는 기분이었다.
류원은 그동안 아등바등 인기를 좇으며 쉴 새 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잠시 넘어졌을 때도 내 다친 몸을 살펴볼 새가 없었다. 그들에게 잊히는 게 두렵고 무서워서 아픈 몸을 억지로 세우고 일으켜서 다시 대중들의 앞에 섰다.
“내가, 가장 두려운 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거예요.”
사랑을 받는 입장이지만 현실은 늘 외롭고 공허했다. 남우주연상을 받고 돌아와 텅 빈 집안의 불을 켰을 때 덜컥 혼자라는 게 두려워졌다. 많은 사람의 찬사와 환호를 받은 게 불과 한 시간 전이었지만 현실의 저는 지독한 외로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후-.”
답답한 속을 가볍게 두드리며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문해원을 위로해 주려고 시작한 말이 내 속을 까발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 버렸다.
마치 고해성사처럼…….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삶 속에 치여 있는지, 스스로가 잊고 있었던 것들을 하나둘씩 자각하고 있었다. 류원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오늘은 좋았지만, 내일은 슬플 수도 있어요. 마냥 좋은 일만 일어날 수 없으니까. 내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별별 역할을 다 해 봤는데, 다들 그렇더라고. 재벌이나 거지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더라. 해원 씨랑 나처럼…….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와요. 난, 해원 씨가 조금 더 단단해지고 강해졌으면 좋겠어. 잘 자요.”
류원은 엉덩이를 털고 몸을 일으켰다. 애틋한 눈으로 굳게 닫힌 방문을 한번 바라보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양치질하고 침대에 누웠다. 해원의 베개를 꽉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렸다. 적정 온도에 맞춰 에어컨이 돌아가는 침실은 쾌적했다. 공기 중에 부유하던 류원의 꽃 냄새가 나풀거리며 해원의 코로 흘러들어 왔다.
부드러운 불빛이 곤히 잠든 류원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해원은 차마 다가가지도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류원을 바라봤다.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류원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정말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실망감보다 류원을 곤경에 빠뜨릴 뻔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더 크게 제 마음을 옥죄었다.
“죄송해요.”
자신의 이야기를 조용조용하게 내뱉던 류원의 목소리가 자꾸 귀에 맴돌았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얼마나 혼자 외롭게 지내왔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아주 단편적이지만 진실하게 그를 알아 간 느낌이었다.
류원이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걷어 내고 몸을 웅크렸다. 해원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흘러내린 얇은 이불을 류원의 몸에 덮어 주었다.
“내가, 가장 두려운 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거예요.”
막연하게 반짝반짝 빛이 나는 별이라고만 생각했다. 아주 예쁘게 반짝이는 별, 그런데 그 뒤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류원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긴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리는 순간, 류원이 해원의 손목을 붙들었다.
“어디 가요.”
“…아, 저는.”
해원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류원이 붙잡은 손목에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맥없이 몸이 무너져 류원의 품에 안겨 들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안긴 해원이 몸을 바르작거렸다.
류원은 손으로 침대를 짚어 몸을 일으키려는 해원의 몸을 감싸고 몸을 굴렸다. 순식간에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류원을 올려다봤다. 은은한 불빛이 해원의 얼굴을 비추었다.
“나한테 미안할 거 없어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아.”
“그래도, 저 때문에…….”
류원은 듣기 싫다는 듯이 해원의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눈꺼풀이 자꾸 내려와 닫혔다. 억지로 눈에 힘을 주지만 그때뿐이었다. 해원의 냄새가 코끝을 자극해서 자꾸 깊은 수마로 저를 잠식시켰다.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나를 가엾게 여겨 달라고 했던 말 기억해요?”
“…….”
“그 말 농담 아니에요. 해원 씨 없으면 잠도 못 자는 불쌍한 나 좀 예쁘게 봐 줘요. 말 잘 들을게. 그러니까.”
“…….”
“나 혼자 두지 마.”
류원은 잠기운이 뚝뚝 묻어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고는 그대로 해원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색색 숨을 내쉬는 그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해원은 크게 숨을 마시고 곤히 잠든 류원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잠투정 같은 고백에 마음이 미어졌다. 자꾸 눈가가 뜨거워졌다. 억지로 눈에 힘을 주고 눈물을 참았다. 하지만 기어코 눈물이 터져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입술을 꽉 깨물고 눈물을 삼켰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과분하고 뜨거운 애정에 숨이 막혔다. 손끝이 저릿거리고 뜨거운 게 왈칵 치밀어 올랐다. 제 품에 안겨 있는 강류원이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그는 늘 솔직하고 꾸밈없는 말로 제 감정을 끊임없이 두드리고 자극했다.
한 번쯤은 지칠 법도 한데 그는 꾸준하게 애정을 표현하고, 사랑해달라고 애원했다. 치기 어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 진중하고 무겁고 어떨 때는 답답하기까지 한 애정을 퍼부어 댔다.
이제 정말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의 사랑이 온몸으로 쏟아져 내려 자신은 이미 흐물흐물해졌다. 이제 남은 건 그의 사랑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강류원 씨만 괜찮다면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는 그런 관계요.”
사랑한다는 말로 이 감정을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진한 감정이었다.
* * *
류원은 살얼음이 살짝 언 소주병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해원과 마주 앉았다.
오후 5시, 꽤 이른 시간이었다. 타이트하게 촬영 시간을 조인 덕분에 오랜만에 일찍 귀가 할 수 있었다.
해원과 할 이야기도 있고 해서 분위기를 슬쩍 잡았더니 그는 덥석 미끼를 물고 간단하게 소주나 한잔하고 싶다고 의사를 전해 왔다.
촬영 중에는 절대 야식이나 과식을 하지 않는 편이지만 오늘은 예외로 두기로 했다. 모처럼 해원의 얼굴이 밝았다. 식탁 위에는 뜨끈한 어묵탕과 오돌뼈, 닭발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해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소주병을 집어 들어 뚜껑을 비틀었다. 류원의 잔에 소주를 채우고 제 잔에도 소주를 채웠다.
“마셔요.”
“네.”
경쾌하게 잔이 부딪쳤다. 해원은 단숨에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 작은 그릇에 미리 떠 놓은 어묵탕을 떠먹었다. 청양 고추를 잔뜩 넣었는지 칼칼한 맛이 느껴졌다.
류원은 절반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내일도 촬영이 있어 컨디션 조절이 필요했다. 손으로 턱을 괴고 해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흘이나 방에 처박혀 울기만 하더니 뺨이 홀쭉해진 것 같았다.
“최 감독 작품 엎어진 건 알고 있죠?”
“…네.”
해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규진이 찾아와 배역을 부탁했을 때 반신반의했던 마음이 문득 떠올라 마음 한쪽이 아릿해졌다. 소주병을 가져와 제 잔을 채웠다.
류원은 의자에 올려 둔 시나리오 하나를 해원의 앞으로 밀었다. 해원이 소주잔을 입으로 가져가다가 멈추고 시나리오를 바라봤다. <몽환/정선우>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정선우 감독 알죠? 그 감독 신작이에요.”
“…아, 차기작 고르셨나 봐요.”
“아직 오케이는 안 했어요. 저번에 내가 말한 요리사가 <몽환> 주인공 직업이에요.”
“그럼 처음부터… 최 감독님 일 알고 계셨습니까?”
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땅개가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대충 훑어온 자료에서 최 감독과 베놈스테먼 연구소 직원이 은밀히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노멀인 최 감독이 그들을 만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막연하게 해원을 말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일이 땅개의 호기심을 자극했는지 사람을 풀어 최 감독을 미행하고 그의 뒤를 캐기 시작하면서 일의 윤곽이 완전히 드러났다.
왼쪽 눈 밑으로 10cm가량 절창이 짙게 그려진 얼굴로 시시덕거리며 추가 요금을 요구하던 땅개의 얼굴이 떠올라 작게 웃음이 터졌다.
놈은 생각보다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허투루 일을 처리한 적이 없었다. A부터 Z까지 파고들 수 있을 만큼 파고들어 아예 뿌리까지 파내어 들고 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입도 무거워 외부로 말이 새어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꽤 좋은 심부름꾼으로, 정보통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물론 돈은 많이 들지만…….
“제가 그때… 최 감독님, 편들었을 때 기분 나쁘셨겠어요.”
“기분 나빴지. 불쾌했지. 나와 주파수가 맞는 내 피스틸이 다른 사람을 싸고도는데 기분 좋을 스테먼이 어딨어.”
류원이 소주잔을 홀짝이고 불퉁하게 대꾸했다. 매운 닭발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었다가 놓고는 물을 마셨다.
그때 생각을 하면 속이 쓰렸다. 최 감독이 일부러 수를 쓰는 게 눈에 보이는데 해원은 맹한 얼굴로 그를 싸고돌기만 했으니…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이미 다 지난 일로 속 좁게 굴 생각은 없었다.
“죄송합니다.”
“됐어요. 다 지난 일인데 뭐. 신경 쓰지 마세요.”
해원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나리오 한번 읽어 봐요.”
“근데 왜 이걸 저한테…….”
“…처음에는 해원 씨가 이 업계로 발 들이는 게 싫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서요. 건희라는 캐릭터, 해원 씨한테 잘 어울릴 거…….”
“아니요. 저 안 할 겁니다.”
해원은 류원의 말을 자르고 단호하게 말했다. 류원의 세계에 발가락이라도 담가 보겠다고 기회를 잡은 건 사실이지만 영화가 무산되고 난 뒤, 마음을 깨끗하게 접었다.
매니저로서 류원의 곁에서 그의 일을 돕고 함께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자꾸 미련이 남는 일이 있었다. 바로 스턴트였다.
피스틸 각성으로 인해 홧김에 포기해 버린 게 지금도 후회로 남아 있었다. 카 액션을 제외하고는 다 가능했는데 감정에 휩쓸린 채 막무가내로 일을 접어 버렸다. 깔끔하게 끝맺지 못해서 그런지 자꾸 미련이 남았다.
잠시 해원을 바라보던 류원이 대뜸 소주잔을 내밀었다. 해원이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맑은 액체가 잔 가득 차올랐다.
“그럼 내 매니저로 계속 일하고 싶어요?”
“…실은 저 다시 스턴트 시작해 볼까 합니다.”
“스턴트? 카 액션 전혀 못 한다면서요.”
“극복해 보려고요.”
“…….”
“노력해 보려고요.”
류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소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산 넘어 산이라고 높은 산 하나를 억지로 넘었더니 또 다른 높은 산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머릿속으로 말을 정리했다. 소주잔 테두리를 손끝으로 둥글게 그리며 시간을 끌었다.
“안 다칠게요. 정말 조심해서 연기할게요.”
“…해원 씨 <수상한 커플> 낙하 촬영할 때 손목 접질린 거 생각하면 아직도 열 받아요. 열악한 환경에 대우도 좋지 않은 현장에서 해원 씨가 일하는 거 난 싫어요.”
“그건 제가 잘못해서…….”
“아무튼, 다쳤잖아요. 그게 해원 씨 잘못이든, 현장 문제든 다친 건 다친 거잖아!”
류원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정말 내키지 않았다. 스턴트맨이 얼마나 위험부담이 큰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의도치 않은 사고로 반신불수가 되기도 하고 심할 경우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해원이 목숨을 담보로 누군가의 대역으로 연기를 하는 게 싫었다. 마른세수를 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솔직히 지금은 제가 다시 스턴트맨으로 현장을 뛸 수 있을지 없을지도 미지수예요. 체력 문제도 있고, 기술 문제도 있고요. 근데 도전이라도 해 보고 싶습니다.”
“…….”
“미련이 남아서요.”
“진짜 이런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해원 씨 혼자 아니잖아요. 나 있잖아요. 나는? 해원 씨 다치고, 깨지고, 아프고 그런 걸 봐야 하는 나는 왜 생각 안 해요?”
해원은 입술을 말아 물고 류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소주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쓰디쓴 액체가 목구멍을 적시며 내장으로 흘러들어 갔다. 속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류원은 굳게 입을 다물었고 해원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소주잔만 연신 홀짝였다.
술이 바닥을 보이자, 해원이 냉장고를 열어 소주를 꺼내와 앉았다. 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식탁에 놓인 안주들은 손도 대지 않아 차게 식어 갔다. 류원은 거의 마시지 않고 해원만 소주를 마셨다.
새로 꺼내 온 소주병이 바닥이 보일 때까지 해원은 입을 다물었다. 빈 병을 한번 흔들어 보고 해원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류원이 그를 막아서는 바람에 해원은 움직이지 못하고 다시 자리에 앉아야 했다.
“지금 시위하는 겁니까?”
“…아뇨.”
“그럼?”
급하게 술을 마셨더니 취기가 빠르게 올랐다. 해원은 따끈하게 열이 오른 얼굴을 손으로 매만지고 류원을 똑바로 바라봤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부은 술 때문인지 초점이 금세 흐려졌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고 해원이 손으로 식탁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강 배우님은, 다른 배우들이랑 막 입 맞추고, 껴안고, 침대에서 뒹굴고 그러잖아요. 저도 그거 보기 싫습니다.”
해원이 취기가 올라 붉어진 얼굴로 투덜거렸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류원이 물을 마시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머리에 버퍼링이 걸린 것처럼 그의 말이 느리게 흘러들어 왔다. 류원의 머리가 말을 이해하기도 전에 해원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나도 그거 싫다고요!! 왜 강 배우님은 강 배우님이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보려고 하십니까?”
“그게, 그거랑 같다고 생각해요?”
“다를 건 뭔데요.”
식탁을 짚고 서 있던 해원의 몸이 갑자기 휘청였다. 류원이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해원의 몸을 부축했다. 그 덕분에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류원은 자연스럽게 해원의 허리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나는 직업이잖아요.”
“하, 저도 스턴트맨이 직업이었습니다. 저 촉망받던 스턴트맨이었다고요! 내가 강 배우님 대신해서 낙하신 촬영한 것만 해도 열 손가락이 넘습니다. 낙하신만 했을까? 카 액션이랑 뒤돌려 차기 못해서 내가 뒤돌려 차기도 해 줬잖아요. 강 배우님 아직도 뒤돌려 차기 못하죠?”
몸을 버둥거리며 제 약점을 콕 집는 미운 입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손을 풀어냈다. 류원의 몸에 의지해서 서 있던 해원이 휘청거렸지만 이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요즘 수상한 커플은 막바지 촬영이 한창이었다. 큰 사건 해결을 앞두고 두 배우의 애정라인을 한껏 부각하고 있었다. 빈번하다 싶을 정도로 애정신이 많았다. 해원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해원 씨 나 좋아하죠?”
“네. 근데 이 상황에서 그게 왜 중요해요?”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전처럼 시선을 피하거나 대답을 피할 줄 알았는데,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좋았다. 해원은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제가 이해를 못한다는 게 아니에요. 그냥 제가 그런 상황들을 강 배우님의 직업이라고 이해하는 것처럼 제 일도 이해해 달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스턴트맨 다시 도전해 보고 싶어요.”
“…알겠어요, 한번 생각해 볼게요.”
“화내서 죄송합니다. 저, 좀 어지러워서, 먼저 쉬겠습니다.”
해원이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몸을 일으켰다. 류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해원의 손을 낚아채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다리를 끼워 넣고 몸을 압박했다. 입술을 세게 말아 물었음에도 자꾸 입술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고하영이랑 키스할 때 기분이 어땠어요?”
“엿 같았죠.”
류원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도 깨물어서 붉다 못해 새빨간 입술을 삐죽이며 어깨를 미는 손을 잡아채고 위로 들어 올렸다. 단정한 눈매가 느슨하게 풀려 무방비했다.
입을 맞출 것처럼 고개를 숙이자, 해원의 눈꺼풀이 자연스럽게 닫혔다. 혀끝으로 눈꼬리를 핥고 풍성하게 내려앉은 속눈썹을 핥았다. 혀끝이 간지러웠다.
“하, 하지 마요. 기분, 이상해.”
“핥아 달라고 눈감은 줄 알았는데?”
“키스해 달라고 눈감은 겁니다.”
해원이 당돌하게 말을 덧붙였다. 류원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술잔을 바라봤다. 술에 뭘 탔나 의심이 들었다.
“나 몰래 술에 뭐 타서 마신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당돌…….”
해원이 시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쭉 빨았다가 놓았다. 그걸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입술 사이에 혀를 넣었다가 뺐다.
류원은 해원의 손을 제 목에 걸어 주고 벽 쪽으로 몸을 더 밀었다. 더 해 보라는 듯이 입술을 내밀자, 해원이 입을 벌려 입술을 삼켰다. 혀로 입술 전체를 핥고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류원은 허리에 얹은 손을 티셔츠 안쪽으로 밀어 넣고 부드러운 속살을 매만졌다.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한바탕 일을 치를 것처럼 흘러갔다.
혀가 난잡하게 뒤엉켰다. 해원이 거의 매달리다시피 류원에게 안겨 왔고 류원도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워하며 그의 바지 속에 손을 넣어 엉덩이를 주물렀다.
“하아, 그만…….”
“이제 와서?”
류원이 단단하게 부푼 아래를 일부러 밀착해서 압박했다. 복부가 묵직하게 눌렸다. 해원이 낮게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어깨에 묻었다. 침실까지 가기에는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다. 류원은 능숙하게 키스를 리드하며 식탁 의자에 해원을 앉혔다.
고개를 들고 열렬히 입을 맞춰 오는 해원은 오늘따라 적극적이었다. 류원은 기분을 만끽하며 해원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런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입술을 핥던 해원의 움직임이 멈추고, 그는 마법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누가 왔나 봐요.”
“신경 쓰지 마.”
류원이 고개를 숙여 해원의 입술을 가르고 혀를 밀어 넣었다. 하지만 이미 초인종 소리에 귀가 쫑긋거린 해원이 집중하지 못하고 월 패드를 바라봤다.
“읍, 가, 강 배우님.”
“괜찮으니까 나한테 집중해.”
화면에 불이 들어왔던 월 패드가 꺼지자, 해원도 신경을 끄고 입술을 붙였다. 하지만 다시 한번 초인종이 울렸다. 해원이 다급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그와 동시에 류원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 씨발, 어떤 새끼야.”
류원이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다름 아닌 준희였다. 그 사이 월 패드 앞으로 뛰어간 해원이 화면을 확인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팀장님 오셨어요.”
“해원 씨, 방에 들어가 있어요.”
해원이 자신의 방으로 가려고 하자, 류원이 뒤에서 끌어안아 침실 쪽으로 방향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옷 벗고 있어요. 금방 이야기 끝내고 들어갈게.”
흥분한 듯 시근덕거리는 숨결이 귓가에 쏟아졌다. 해원은 얼른 고개를 푹 숙이고 침실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류원이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준희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현관 앞에 비딱하게 몸을 기대고 섰다.
“뭐야.”
“더워 인마.”
“무슨 일인데.”
준희는 막무가내로 몸을 밀고 들어왔다. 현관 앞에 놓인 운동화를 힐끗거리고는 거실로 향했다. 옆구리에 끼고 온 두툼한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넥타이를 느슨하게 당겼다.
“해원이는?”
“자.”
“피곤했나 보네.”
“용건만 빨리하고 가.”
준희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못마땅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얼굴을 살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류원의 앞으로 들어온 광고 제안서를 가지런히 정리해 펼쳐 놓고는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설명했다.
“이건 커피, 이건 자동차, 이건 스포츠용품, 이건 화장품, 이건 이온음료, 이게 제일 중요한데 리얼리티 콘셉트.”
“리얼리티 콘셉트?”
“어, 연출이 나이가 젊어서 그런가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많네.”
류원은 광고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손으로 밀고는 리얼리티 콘셉트 자료만 집어 들어 종이를 넘겼다.
첫 번째는 평범한 일상 보여 주는, 말 그대로 리얼리티를 강조한 촬영이었고, 두 번째는 일본 여행 콘셉트의 촬영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목표를 정해서 도전하는 형식의 콘셉트였다. 류원은 그중에 두 번째 콘셉트가 적힌 부분을 손으로 찢어서 테이블로 툭 던졌다.
“이걸로 할래?”
“이건 빼. 일본이라면 신물 나니까.”
준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원의 드라마가 흥하면서 프로모션차 일본에 자주 방문할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갈 때마다 뭔가 일이 꼬여서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곤 했다. 가장 최근에 방문했을 때에도 일이 터졌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일본과 류원은 상극이었다.
첫 번째와 세 번째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던 류원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경쾌하게 딱 소리가 났다.
“결정했어?”
“형, 나 액션스쿨 좀 가자.”
“뭐?”
“문해원 내 매니저 때려치우고 스턴트맨 한대.”
준희는 시원한 물 한 잔 주지 않는 매정한 류원을 흘겨보다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냐며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벌써부터 류원의 매니저를 구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이참에 사무실을 김 이사나 허 대표에게 맡기고 자신이 현장을 뛰는 게 어떨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갑자기 왜.”
“스턴트맨에 미련이 남는대.”
“근데 너는 왜 액션스쿨을 가겠다는 거야.”
“목표 정해서 도전하는 콘셉트라며. 강류원 스턴트맨 도전.”
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 집을 방문했는가 싶었다.
“애초에 내가 너한테 뭘 바라고 이걸 가지고 왔나 싶다. 광고 제안서 읽어 보고 마음에 드는 걸로 두 개는 골라. 다 해 주면 나는 완전 땡큐고.”
“이제 됐잖아. 가, 빨리.”
“본론은 시작도 안 했어.”
“나중에 하자. 제발 나중에.”
류원은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기며 침실 쪽을 힐끗거렸다. 해원과 함께 있는 시간을 방해받은 참이라 짜증이 치밀었다. 이미 시간을 꽤 오래 허비해 버려 살짝 조바심도 일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 자료 모아 놓은 것 좀 넘겨.”
“내가 줄 수 있는 건 다 줬잖아.”
“그거 말고 너 심부름꾼 써서 모은 거 있잖아. 그거 다 내놔.”
워낙 폐쇄적인 곳이라 공식적인 루트로 알아볼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심부름센터에 의뢰를 넣었지만 베놈스테먼 연구소 일은 하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들을 건드려서 좋은 게 없을 테니 미리 발을 빼는 모양새였다.
류원은 한숨을 푹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준희를 이 집안에서 몰아내는 게 먼저였다.
“이따가 메일로 보내 놓을게. 이제 제발 좀 가.”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놨냐. 왜 사람을 못 보내서 안달이야. 아무튼 꼭 보내. 나 간다.”
“문 닫고 가.”
류원은 준희가 나가지도 않았는데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짙은 나무 냄새가 방 안 가득 차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걷어 냈다.
하, 씨발.
류원이 욕을 뇌까리고 이마를 짚었다. 그 새를 못 참고 세상모르게 잠든 해원의 얼굴이 평온하다 못해 평화롭기까지 했다.
이게 다 이준희 때문이었다. 이를 악물고 벌컥 방문을 열어젖혔다. 막 신발을 신던 준희가 의아한 눈으로 류원을 바라봤다.
“다시 들어와.”
“왜.”
“자료 줄 테니까 들어오라고!!”
류원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서재로 향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성욕이 물거품이 되어 몸을 빠져나갔다. 어쩐지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차갑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