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안녕, 나의 꽃
해원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몸을 한 바퀴 굴렀다. 넓은 침대의 가장자리까지 굴러가 끙, 소리를 내며 눈꺼풀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으, 머리야.
끔찍하리만치 지독한 숙취가 골을 띵하게 울렸다. 아직 해독이 덜된 술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와 구역질이 치밀었다. 머리는 누군가 망치로 쉴 새 없이 두드리는 것처럼 쾅쾅 울려 댔다.
으-, 낮게 신음하며 익숙한 품으로 꼬물꼬물 기어들어 갔다. 류원의 팔을 베고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드로즈 한 장 덜렁 걸치고 잠드는 습관 때문에 맨 가슴이 뺨에 닿았다. 그리고 진한 꽃 냄새가 코를 적셨다.
그런데 류원의 꽃 냄새를 맡는 순간 짧은 기억들이 드문드문 잘린 것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아, 입술을 비집고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해원은 최근에 자신이 술을 마시면 쓸데없이 용감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철이 늘 술 마시기 전 입버릇처럼 취하는 건 좋지만, 입으로 똥은 싸지 말라고 했는데……. 그런데 아주 보기 좋게 입으로 똥을 싸 버렸다.
“엿 같았죠.”
갑자기 떠오른 한마디에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내가 고하영이랑 키스할 때 기분이 어땠어요?”
대답 뒤로 질문이 떠올랐다.
미쳤구나. 문해원 정말 미친 게 맞아.
류원의 애정신을 보고 질투한 걸 제 입으로 말해 버렸으니. 안 그래도 아픈 머리가 더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 가고 싶었다. 해원에게 질투라는 단어가 너무 낯설고 어색했지만, 분명히 자신은 고하영을 질투하고 있었다.
한 장면을 찍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서너 번은 입을 맞춰야 했다. 그러다가 NG라도 나면 다섯 번, 여섯 번, 길게는 반나절을 찍기도 했다.
류원이 나름대로 키스신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에게 심부름을 시키거나 대본에 대사를 형광펜으로 칠하라고 시키거나 기타 잡다한 일을 시키곤 했지만, 그런 장면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보게 될 수밖에 없었다.
반나절 내내 커피를 사러 다닐 수도 없고 대본에 대사는 한정적이었으니까.
“아, 머리 아파.”
이게 술기운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인지 류원의 키스신을 생각해서 아픈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머리가 끔찍하게 아팠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잠들어 있던 류원이 갑자기 해원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마를 더듬거렸다. 시원한 기운이 묻은 커다란 손이 이마를 감싸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관자놀이를 서너 번 꾹 눌러 준 그는 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얼굴에 올린 채로 다시 잠이 들어 버렸다. 해원이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자, 그가 다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다시 서너 번 꾹꾹 눌러 준 손은 그대로 얼굴에서 잠들어 버렸고 해원은 그게 좋기도 하고 마음이 간지럽기도 해서 웃고 말았다.
어스름이 짙게 깔린 새벽이었다. 조금 더 잠을 청하고 싶어 류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류원은 자연스럽게 해원의 허리를 감싸 바짝 당기고 등을 토닥였다.
해원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머리가 아프고 입안이 마르는 것과 별개로 저를 감싸 안은 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피스틸이라서 끔찍하기만 했는데, 강류원을 만나고 나서는 피스틸이라서 행복했다.
제 등에 그의 꽃을 새길 수 있어서, 그의 일부분을 나눌 수 있어서, 그의 꽃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행복’이라는 낯설기만 하던 그 두 글자가 제 가슴을 꽉 채웠다. 해원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웃음을 그대로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 * *
해원은 구두를 신다 말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몸을 감싼 슈트가 어색하고 답답했다. 어쩐지 무언가가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약간 큰 구두가 덜그럭 소리를 냈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류원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내내 해원은 넋을 놓고 멍하니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 저를 불러도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하루가 엉망진창이었다. 집에 돌아와 땀에 젖은 몸을 씻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현관을 열자 텁텁한 바람이 불어왔다. 비가 오려는지 공기가 습하고 더웠다. 대문 앞에 세워진 차를 힐끗거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맞지 않은 구두 때문에 걸음이 더뎠다.
“타요.”
몸을 조수석으로 기울여 문을 연 류원이 차분한 얼굴로 손짓했다. 차에 오르자 류원이 안전벨트를 당겨 채워 주고 운전대를 쥐었다. 류원은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마스크에 야구 모자까지 푹 눌러쓰고 있었다.
“혹시 충격받을까 봐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아버지 상태 그렇게 좋지 않아요.”
“…계속 말씀하셨잖아요.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아, 그랬나.”
류원은 마른 침을 삼키고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긴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하늘에 낀 먹구름처럼 제 마음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해원의 아버지 의식이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다. 그리고 어젯밤 쇠약해진 기력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란 절망스러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땅개는 평소답지 않게 흥분해서는 말을 전했다.
- 그 아들놈, 보여 줄 거면 빨리 보여 줘. 얼마 남지 않았어.
“무조건 살려 놔.”
- 사람 죽고 사는 게 내 마음대로 되냐? 억만금을 줘도 못 하는 게 그거다. 늦기 전에 빨리 와.
밤새 고민하다가 아침 일찍 해원에게 아버지를 만나겠느냐고 물었다. 해원은 당황한 얼굴로 한참을 망설였지만 이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만나서 꼭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고 있지만, 신경은 온통 해원을 향해 있었다. 해원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흡연 구역에서 줄담배만 뻑뻑 피워 댔다.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그의 마음이 어떤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해원에게는 19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였다.
“출발할게요.”
킹덤으로 가는 내내 해원은 차창만 멍하니 바라봤다. 19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에 대한 감흥은 그다지 없었다. 아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게 더 정확했다.
자꾸 입안이 말라 갈증이 났다. 도어포켓에 꽂힌 물병을 집어 들어 입을 축였다. 500mL 물병 하나가 동나고서야, 한 건물 앞에 차가 멈춰 섰다.
류원은 건물을 한 번 힐끗거리고 시동을 껐다. 차가 완전히 멈추자, 해원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조금만 있다가 들어갈래요?”
류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해원은 고개를 젓고 먼저 차 문을 열었다. 습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떨리는 두 손을 맞잡고 숨을 크게 마셨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어떤 얼굴로 마주하게 될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건물 앞으로 다가가자, 덩치 두 명이 류원의 앞을 막아섰다. 류원은 인상을 구기고 땅개에게 전화를 걸어 덩치에게 넘겨주었다. 덩치는 전화로 지시를 받고 나서야 길을 터 주었다.
해원은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으며 빠르게 바뀌는 엘리베이터 숫자판을 멍하니 응시했다. 6층에 도착하자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물 좀 달라고 할까요?”
“…네.”
류원은 다시 땅개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키 작은 남자가 다가와 류원에게 물병을 건네주고 돌아갔다. 물이 새것인지 확인하고 직접 마개를 비틀어 내밀었다. 해원은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쪽으로 와요.”
류원을 따라 걸음을 옮길수록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반쯤 따라 걷던 해원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막상 마주하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신이 없었다. 얼굴을 감싸고 걸음을 멈추자 류원이 다시 길을 되돌아와 해원의 어깨를 감쌌다.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은데, 오늘이 아니면 못 볼 거 같아서 그런 말도 못 해 줘요.”
“…오늘이 아니면 못 보다니요?”
“계속 말했지만, 아버님 상태 정말 안 좋아요.”
“…….”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해원은 충격을 받은 듯 몸을 비틀거렸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려는 것을 류원이 세게 붙들었다. 초점이 없는 눈이 정신없이 방황했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류원의 몸을 밀어냈다.
류원이 몸을 놓아주자, 해원은 비틀거리며 주춤주춤 발을 뒤로 물렸다. 현실을 부정이라도 하듯 고개를 저었다.
“이리 와요.”
“…갈래요.”
“이렇게 가 버리면 당신 아버지 영원히 못 봐. 지금 아니면 영정사진 따위로 봐야 한다고. 그래도 괜찮겠어요?”
“…….”
“가서 만나 봐요. 묻고 싶은 것도 있다며. 내가 옆에 있을게. 이리 와요.”
류원이 손을 내밀었다. 단단하고 큰 손이 저를 향해 있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괜찮을 거라고 마음을 진정시켜 봐도 아주 잠시뿐이었다. 창문 밖으로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이 번쩍거렸다. 세차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해원은 넋을 잃고 쏟아지는 비를 바라봤다. 드문드문 잊힌 기억 속에서 단란했던 가족의 모습을 애써 찾아내고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한참 만에 내민 손을 붙잡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감싸오는 온기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류원을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류원은 커다란 문 앞에 서서 해원을 앞쪽에 세웠다. 해원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두드렸다. 마치 응원이라도 하듯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주는 손길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제 문만 열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난 여기 있을게요.”
“…아뇨, 같이 들어가요.”
“해원 씨가 그러길 바란다면 나는 상관없어요. 근데 옷차림이 좀 그러네.”
사람들의 눈에 띌까 싶어 일부러 트레이닝복을 입고 야구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류원은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머리카락을 툭툭 털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정리했다. 어쩐지 마음이 이상했다. 류원은 해원의 재킷 단추를 채워 주고 어깨에 묻은 먼지를 가볍게 털어 냈다.
“힘들면 나한테 와요. 뒤에 있을게.”
“…….”
“아버지잖아.”
어깨를 힘 있게 쥐었다가 놓고 뒤로 물러섰다. 해원의 시선이 류원을 따라 움직였다가 이내 문손잡이로 향했다.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잡았다.
이 문만 비틀어 열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떤 얼굴로 마주하게 될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어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괜찮아.”
“…정말요?”
“내가 같이 있을 테니까 도망치고 싶으면 나한테 와요. 내가 해원 씨 손잡고 도망쳐줄게.”
해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끼익-, 문이 앓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침대에는 하얀 환자복을 입고 고개를 돌린 채 누워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 사람이 제 아버지임을 알아챘다.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마음은 문을 열기 전만큼 요동치진 않았다. 해원은 침대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저, 해원입니다.”
“…미안하다.”
19년 만에 듣는 제 아버지의 첫마디였다. 세월의 모진 풍파를 맞아 힘없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해원은 낮게 신음하며 몸을 비틀거렸다. 오른쪽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옷이 푹 꺼진 채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원이 손을 뻗어 푹 꺼진 옷 위를 더듬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한쪽 팔이, 그리고 한쪽 다리가 없었다.
“이, 이게…….”
“미안하다.”
“…….”
“너한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탁하고 듣기 싫게 갈라진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해원의 동공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힘없이 떨렸다.
자식새끼 버리고 떠났으면 잘 살았어야지 이게 뭐야!!
해원은 비틀거리는 몸을 스스로 지탱하며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봤다.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단정하게 조여 놓은 타이를 거칠게 당기고 셔츠 단추를 풀기 위해 손을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손톱이 목을 긁어 생채기를 내고 있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손이 벌벌 떨려 단추가 열리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요.”
보다 못한 류원이 다가와 해원의 몸을 돌려세우고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 주었다. 목에 난 붉은 자국을 바라보며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해원은 두 팔을 벌려 류원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류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해원을 안아 주지도 않고 다독이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의 버팀목처럼 우직하고 묵묵하게 자리를 지켰다. 한참을 류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해원이 고개를 들었다. 류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원이 다시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작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께 꼭 묻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왜, 저를, 저를, 버리셨어요? 고작, 열한 살밖에 안 된, 나를…….”
왈칵 치미는 울음을 억지로 삼키고 손을 모아 맞잡았다. 손바닥 아래가 금세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한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천둥소리와 빗소리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쿨럭, 아버지가 입을 가리고 마른기침을 했다. 다발적으로 기침이 쏟아졌다. 해원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고 테이블에 놓인 컵을 집어 들어 입가에 대어 주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이 해원의 손을 겹쳐 쥐었다.
해원은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잡아 뺐다. 그 바람에 물 컵이 떨어지고 쏟아진 물이 침대 시트를 축축하게 적셔 나갔다.
해원이 허둥지둥 휴지를 뽑아 내밀었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손으로 두어 번 슥슥 문지르기만 했다.
“괜찮다. 앉아.”
“…….”
해원은 떨어진 물 컵을 주워 올려놓고 흉곽이 크게 부풀도록 크게 숨을 마셨다. 도무지 호흡이 진정되지 않았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애써 손을 맞잡고 진정시켜 보지만 떨림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주환이는.”
“잠깐, 잠깐만요.”
“…널 낳지 말았어야 했다. 병원에서 널 낳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주환이가 굳이 널 낳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난 거다.”
“…….”
“나무가 썩어 가는 희귀병이라서 약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고작 진통제 몇 알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게 전부였어. 처음에는 약국에서 파는 진통제 같은 걸로 버티다가 네가 열 살이 되던 해에는 거의 마약을 입에 달고 살았다.”
담담하고 고요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회고를 하는 사람처럼 그는 눈을 감은 채 지난날을 회상했다.
서주환은 희망도 뭐도 없던 삶에 한 줄기 빛처럼 찬란하게 저를 비추던 사람이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람이라서 손조차 뻗을 수가 없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눈이 부셨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좋은 단어들을 다 갖다 붙여도 서주환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문씨 아저씨, 이리로 오세요.”
“아닙니다. 저는… 밖에서 먹겠습니다.”
“에이, 괜찮으니까 이리로 오세요.”
공사장 한쪽에는 공사장 인부들을 위한 작은 식당이 있었다. 다들 이 집을 함바집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진주댁이 식당을 운영했지만, 교통사고로 몸져눕자 그의 아들인 주환이 식당을 맡아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진주댁은 늘 아들 자랑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덕분에 그도 주환이 피스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피스틸임을 증명하듯 늘 그에게서는 희미한 마른 나무 냄새가 났다.
고봉밥을 퍼 주며 환하게 웃는 얼굴이 좋아서 새벽부터 시작된 일이 힘든 줄도 몰랐다. 그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천천히 꼭꼭 씹었다.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먹던 밥알에서 구수한 맛이 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이것 좀 더 드세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문씨 아저씨 좋아해서 더 주는 거니까 사양 말고 드세요.”
주환이 제 밥 위에 고등어 한 덩이를 더 얹어 주며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척척한 식당 안에 온갖 꽃들이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나간 유행가가 흘러나오는 라디오 안테나 위로 산들거리는 들꽃이 피어오르고, 주환이 늘 쓰는 국자 위에도, 냄비 위에도 숟가락, 밥그릇, 국그릇 할 것 없이 온 천지에 꽃이 피었다. 그리고 제 마음에도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말없이 시작된 짝사랑이 깊어질 때쯤 아파트 건축이 모두 끝났다.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자연스럽게 주환도, 식당도 다른 곳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배고프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문씨 아저씨는 공짜로 드릴게요.”
마지막 인사를 하며 희고 고운 손으로 연락처를 내밀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주환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달처럼 환하게 밝은 미소를 제게 보여 주었다.
무슨 용기가 그렇게 났을까. 정리되지 않은 말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왔다.
“좋아하고 있습니다. 좋아해요. 제가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정말 좋아하고 있습니다.”
“나도요. 아저씨가 고백 안 하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주환은 사내의 투박하고 멋없는 고백에도 말갛게 웃으며 저도 같은 마음이었노라고 작게 속삭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폭죽이 눈앞에서 펑하고 터지는 기분이었다. 허벅지에 새겨진 제 꽃이 파르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이 차이도 두 살밖에 나지 않으면서 늘 꼬박꼬박 문씨 아저씨라고 불렀던 주환과 가정을 꾸리게 된 건 제 인생 최고의 행운이자 행복이었다. 그런데 불행은 소리 없이 찾아왔다.
주환과 제 사이에 축복이 찾아왔다. 초음파 사진을 들고 행복해하는 얼굴이 예뻐서 숨이 막혔다. 곧 태어날 아이와 주환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밤낮으로 일했다. 그런데도 그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비가 오면 그날이 곧 휴일이었다. 마침 주환이 병원에 가는 날이었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그날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이만 살려 주세요. 저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으니까 아이만 살려 주세요.”
“주환아, 정신 차려!”
“경욱 씨, 내 아이야. 나 아이 낳을래. 낳고 싶어. 이대로 아이 잃으면 나 다시는 경욱 씨 아이 못 가져.”
“상관없어.”
진심이었다. 아이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보다 제 곁에서 숨 쉬는 주환이 더 소중했다. 지루한 말다툼이 일주일이나 이어졌다. 입장 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제가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주수가 채워질수록 주환의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임신 7개월, 주환은 아이를 응급수술로 낳아야 했다. 사내아이였다.
경욱은 태어난 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애정 같은 건 없었다. 아이는 살았지만, 주환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오래도록 빠져나오지 못했다.
결국,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고 나서야 주환은 눈을 떴다.
“아이는?”
“…중환자실에 있어.”
“…….”
“미숙아라서 어쩔 수 없대. 주환아, 나는 너 없이 못살아. 그러니까 제발 아이 말고 너, 너 살아 주라. 제발…….”
그 후로 주환은 10년 동안 길고 질긴 투병 생활을 이어 갔다. 원인도 알 수 없는 희귀병이었다. 주환은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해원이가 걸음마 할 때까지만, 해원이가 말을 할 때까지만, 해원이가 유치원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원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만…….
병원에선 기적이라고 했다. 이렇게 오래 산 사람이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주환은 작은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고 또 다른 목표를 세우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끔찍하리만치 고통스럽게 버텼다. 살아간다는 말은 주환에게 사치였다.
그냥 버텼다. 죽음의 고개를 넘고 또 넘었지만, 어쨌든 꾸역꾸역 버텨 냈다. 저와 해원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날, 주환은 제게 부탁했다.
까맣게 물든 몸을 가려 달라고.
자궁을 들어낸 탓일까. 몸은 하루가 다르게 까맣게 물들어 갔다. 새빨간 백일홍이 등을 꽉 채우고 2차 각성이 일어났다. 팔과 다리, 둔부, 얼굴까지 나뭇가지가 새겨졌다.
저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주환은 멈추지 않았다. 꽃이 한 송이씩 늘어 갈 때마다 그의 죽음이 임박해져 오고 있음을 느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이롭게 바라볼 이는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서주환은 너무 잔인했고, 이기적이었고, 가혹했다. 붉은 백일홍이 서주환의 온몸을 뒤덮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해원이 주환의 뺨에 핀 새빨간 백일홍을 매만지며 말했다.
“작은아빠 얼굴에 꽃이 피었어요.”
“…….”
“예뻐요.”
그리고 그날 거짓말처럼, 주환은 숨을 거두었다. 해원의 초등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다던 그는 그 말을 지키지 못하고 떠났다. 희고 곱던 피부가 새까맣게 죽고 새빨간 백일홍만을 온몸에 피운 채 그렇게 조용히 그의 곁을 떠났다.
“나는 네가 싫었다. 너만 아니었으면 주환이가 그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테니까. 내가 사랑한 사람을 앗아간 네가 죽도록 싫었다.”
해원은 낮게 신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던 기억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제 머릿속에 환하게 웃던 작은아빠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얗고 생기 넘치던 얼굴이 새까맣게 변했고 저를 만지는 손은 앙상하고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아, 아니야.
해원은 머리를 감싸 쥐고 발을 굴렀다. 고통스러움에 입술을 비집고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무언가 퍽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은 정원 앞에서 무릎 담요를 덮고 앉아 있는 작은아빠의 얼굴은 흉측하리만큼 말라 있었다. 마치 해골 같았다. 기어이 울음이 새어 나왔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던 기억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작은아빠의 얼굴이 선명해질수록 해원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주먹으로 침대를 쾅쾅 내려치며 울부짖었다.
해원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완벽히 왜곡되어 있었다. 너무 끔찍하고 잔혹한 현실에서 도망친 아이의 방어기제가 발동한 것이었다.
끔찍하고 잔혹한 현실을 흙으로 덮어 뿌리를 감추고 흙 위에 뿌리가 없는 아름답게 핀 꽃을 심었다. 그렇게 아주 감쪽같이 아름답게 핀 꽃만이 향기롭게 해원의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아냐, 아니야! 거짓말이야!”
“…그래서 도망친 거다. 내가 내 손으로 너를 죽일까 봐. 내 속에 찬 이 빌어먹을 원망과 미움이 나를 막다른 길로 자꾸 몰아가고 있었으니까.”
“아니야, 거짓말… 아빠는 나를 버리고 도망간 거야. 어린 나를 두고 그냥 비겁하게 도망친 거라고.”
“…내가 네 곁에 계속 있었으면 넌 죽었을 거다. 내가 내 손으로 너를 죽이고 말았을 거다. 주환이도 모자라 너까지 내 손으로……!”
해원은 숨이 막히도록 울음을 토해 냈다. 무의식이 뒤덮었던 끔찍한 기억이 점점 짙어졌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새벽 싱크대 양쪽 문 사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울음을 쏟아 내던 아버지가, 안방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숨 막히는 신음과 울음소리가, 내 목을 조르는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이 모두 또렷해졌다.
“이제 가. 얼굴 봤으니까 됐다. 다시는 찾아오지 마라. 내가 죽더라도 장례도 치르지 말고 나 같은 건 부모라고 생각지도 말고 그냥 잊어버려. 원망해. 죽도록 미워하고 죽도록 증오해.”
“말도 안 돼, 거짓말이야!! 작은아빠는 그냥 당신 때문에 죽은 거야. 당신이 꽃으로 죽인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어. 이제 가.”
경욱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눈가를 적시는 뜨거운 눈물을 차마 닦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어린 자식을 버린 대가는 지옥에 가서 받겠노라고 작게 읊조렸다.
“…아냐, 아빠가 날 버린 거야. 아빠가 날 버린 거라고.”
“…….”
“정말이야, 나는 버림받았고 나한테서 작은아빠를 빼앗아 간 건 아빠야. 아빠가 그렇게 만들었어. 온몸에, 꽃이 피어서 그렇게 숨이, 숨이… 꺼졌다고!! 나 때문이 아니야. 작은아빠가 마지막으로 숨을 거둘 때조차 없었…….”
갑자기 해원이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서 작은아빠가 힘없이 눈을 감는 순간이 떠오르고 귀로는 왕왕거리며 울어 대는 제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지금껏 들리지 않았던 울음소리 하나가 희미하게 귀로 흘러들어 왔다.
해원은 입을 틀어막고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날수록 눈앞에 보이는 작은아빠의 모습이 작아지며 집 안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래된 텔레비전, 늘 가지고 놀던 게임기, 낡은 장롱, 작은아빠가 좋아했던 소파, 온갖 꽃이 핀 화분 그리고 울고 있는 자신의 옆으로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몸을 웅크린 채 작은아빠의 손을 붙잡고 울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주환아, 서주환.”
작은아빠의 숨이 꺼져 갈 때 아빠는 애달픈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있었다. 아아, 혼란스러운 기억에 몸서리가 쳐졌다.
지금까지 품고 있었던 기억은 반쪽짜리였다. 보기 싫은 건 다 지워 버리고 제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해 놓은 이기적인 기억이었다.
“아…….”
해원은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꾸역꾸역 삼켰다. 등 뒤에 단단한 몸이 닿았다. 고개를 조금 돌리자 류원의 얼굴이 보였다. 젖은 눈으로 하염없이 류원을 바라봤다. 그리고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이거 거짓말이야. 나는, 나는, 버림받은 게 맞아.”
“알아.”
“아빠가 나를 버렸어. 나는 열한 살 때 혼자가 됐는데, 그랬는데…….”
해원은 어린 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해 댔다. 류원은 말없이 해원의 몸을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끅끅 울음을 삼키는 그의 몸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혼란스러운 기억을 되짚으며 몸을 떠는 그가 가여웠다.
한참을 품 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을 쏟아 내던 해원이 한순간 몸을 축 늘어뜨렸다. 류원이 다급하게 해원을 꽉 끌어안았다. 끔찍한 기억 속에서 도망치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의 정신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류원은 해원의 몸을 받쳐 안아 들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자네는 나처럼 그 불쌍한 아이를 버리지 말게. 그 아이를 가엾게 여겨 주게나.”
“…해원 씨,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올곧게 살아왔습니다.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성숙해질 겁니다. 그러니 편히 눈감으셔도 됩니다.”
“…고맙네.”
경욱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뜨거운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귓가에 고여 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명줄이 조금 더 가느다래진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려 축 늘어진 채 안겨 있는 해원과 그를 단단히 안은 남자를 바라봤다.
“손이라도 한번 잡아 볼 수 있게 해 주겠나.”
조금 전까지 냉정하고 매몰차게 해원을 대하던 남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애달픈 아비의 모습만이 덩그러니 남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류원은 침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오른쪽에 해원을 눕혀 주었다.
경욱이 몸을 비스듬히 세워 멀쩡한 왼손으로 해원의 얼굴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제 기억 속에 해원은 열한 살짜리 꼬마 아이였다. 제 손에 목이 졸려 힘겨워하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살려 달라고 말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평생 그 기억이 제 뼈를 부수고 마음을 난도질했다.
“해원아, 미안하고 고맙다. 못난 아비라서 미안하다.”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경욱은 류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류원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경욱의 손을 잡았다. 앙상하게 마른 손가락이 류원의 손을 꾹 잡아 왔다.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서 류원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내가 죽어도 해원이에게 알리지 말아 주게. 나는 그냥 편히 살고 있다고 그렇게 알게 해 줘. 나를 원망하면서 그렇게 계속 살게 해 줘. 내 마지막 부탁이네.”
“…네, 알겠습니다.”
“이제 가 보게.”
경욱은 마른 손으로 해원의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평생 해원이 커가는 걸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애틋한 눈으로 늘 바라봤는데……. 마지막 가는 길이 되어서야 제 아들 녀석의 손을 잡아 볼 수 있었다. 경욱은 쓰게 웃었다.
“아버님.”
류원은 머리를 매만지고 두 손을 공손히 모아 경욱을 향해 절을 올렸다. 경욱이 놀라 몸을 반쯤 일으켰다.
“해원 씨를 제 짝으로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욱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제 아들 녀석을 안고 방을 빠져나가는 류원의 뒷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 * *
오랜만에 슈트가 아닌 청바지와 간단한 티셔츠를 입은 준희가 촬영 현장을 누볐다. 살뜰하게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며 마지막까지 류원을 잘 부탁한다며 연신 허리를 숙였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멀찍이 떨어져 촬영 준비가 한창인 류원을 바라봤다. 해원은 사흘째 결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류원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촬영은 막바지에 다다랐고 류원을 보기 위한 팬들의 촬영장 방문도 늘어나고 있었다. 류원을 챙기랴, 팬들을 통제하랴, 정신없는 채현이 먼저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고, 준희가 현장매니저로 뛰고 있었다.
이제 이틀만 고생하면 드라마 촬영은 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푹푹 찌는 날씨에도 스태프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쳤다. 다만 류원의 얼굴만 짙게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팀장님, 커피요.”
마침 커피를 사 온 채현이 음료 캐리어를 내밀었다. 준희는 음료 캐리어에서 커피를 뽑아 류원에게 다가갔다. 류원을 특수분장을 받고 있었다. 찢어진 상처를 만들고 피를 묻히는 분장을 받으며 류원은 고요하게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커피 마실래?”
“…조금 이따가.”
류원은 통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정 기복도 심해지고 해원이 없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준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그의 곁에서 분장이 진행되는 걸 지켜봤다.
“수고하셨어요.”
특수분장팀이 가방을 정리하자 준희가 류원 대신 인사를 전했다. 분장이 끝났음에도 류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는 건가? 준희가 류원의 얼굴 위로 손바닥을 펼쳐 좌우로 흔들었다. 류원의 인상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자는 줄 알았잖아.”
“…형, 나 결혼하고 싶다.”
“뭐?!”
빨대를 입에 물고 커피를 쪽 빨던 준희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단 한 번도 결혼을 입에 올린 적 없던 류원이었다. 누군가를 오래 만난 적도 없었을 뿐더러 결혼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나.
“무슨 말이야, 갑자기.”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 사람의 가족이 되고 싶단 생각.”
“해원이랑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류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원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아릿하게 울렸다.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준희가 한쪽에 내려놓은 커피를 집어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직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그런 생각이 드냐?”
“…그 사람 가족이 되고 싶어.”
“야 인마! 결혼하려면 적어도 사계절은 만나 봐야지 그렇게 빨리하면 안 좋아.”
류원은 작게 웃었다. 사계절이 지난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싶었다. 그는 아마 10년, 아니 50년이 지나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어도 지금처럼 올곧고 단단할 것 같았다.
빨대를 이로 씹으며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퍽 예뻤다.
해원은 딱 사흘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여름에 한겨울의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온몸을 사시나무가 떨리듯 벌벌 떨어 대는 해원을 한번 꽉 끌어안아 주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기다려 주는 것밖에…….
그는 낮에는 액션스쿨에서 훈련을 하고 밤에는 헬스장처럼 꾸며 놓은 운동 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다행인건 잠은 꼬박꼬박 제 곁에 와서 잤다. 늦은 밤, 잠든 걸 확인하고 조심히 곁에 누웠다가 자신이 깨기 전에 침대를 빠져나갔다. 그는 혼자만의 방식대로 몸과 마음을 천천히 끌어올리고 있었다.
류원은 묵묵히 시간을 견디고 있을 뿐이었다. 해원이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기를.
“아, 그리고 광고주들 난리다. 제안서 검토해 보고 말해 준다더니 어떻게 됐어.”
“…아직 광고 진행하지 마. 이제 드라마 끝날 거고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움직일 거야. 자칫하면 언론 보도까지 나가야 하는데 타격 있을 수도 있어.”
“…조용히 내부에서 해결되면 좋겠는데.”
“내가 준비하라는 건 다 준비됐어?”
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류원의 이야기를 들은 날 바로 CCTV는 초고화질로 바꾸었고 법무팀과 경호팀은 24시간 비상체제로 돌려놓았다. 그것도 모자라 국내 최대 법무법인 수(秀)와 파트너십을 맺어 두었다. 스타온엔터테인먼트가 진행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방어를 준비해 두었다.
“근데 네가 준 자료로는 뭔가 부족해 보이던데 확실하게 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그건 내가 알아서 준비 중이야. 형은 무조건 그 새끼들 잡아 놓고 시간만 끌어. 나머지는 준호 형이랑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류원은 한쪽에 내려놓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사진 한 장을 준희에게 전송했다. 알림음에 준희가 휴대폰 화면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류원과 해원이 입을 맞추고 있는 사진이었다.
“이게 뭐야.”
“보이는 그대로야.”
“내가 이걸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건데?”
“보도 자료 스탠바이만 하고 기다려. 해원 씨 얼굴에 모자이크 확실하게 하고 내용은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과 열애 중이라고. 결혼까지 생각한다고 적어 주면 더 좋고.”
준희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 사진을 멍하니 바라봤다. 연예인 스스로가 열애 사실을 밝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도 강류원처럼 톱급 연예인일 경우 더더욱.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기사로 너한테 남는 게 뭔데.”
“문해원이 남겠지. 그리고 베놈스테먼 연구소 일 폭로되면 유용하게 쓰일 테니까 기사 스탠바이하고 기다려. 해원 씨한테 물어보고 연락 줄 테니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거 같은데.”
“나 문해원이랑 진짜 결혼하고 싶다. 둘이 먹고살려면 더 열심히 벌어야겠네.”
류원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실없이 웃었다.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서로에게 의지해 천천히 늙어 가고 싶었다.
* * *
류원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향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진 촬영에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거실에 불이 켜진 게 보였다.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누군가 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지는 기분이었다. 정원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집안을 바라봤다.
빌라나 아파트에서 늘 생활하다가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온 건 2년 전이었다. 보안 문제로 준희가 크게 반대했지만 제 고집을 꺾진 못했다.
정원이 있어서 좋았다. 굳이 어딜 찾아가지 않고 밖으로 나오기만 해도 시원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무 냄새와 풀 냄새가 가득했다. 류원은 다리를 꼬고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도시 같지 않은 고즈넉한 풍경을 가진, 풀벌레 소리가 들리는 이곳이 참 좋았다.
“뭐 하세요.”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류원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거짓말처럼 해원이 눈앞에 서 있었다. 얼굴을 제대로 본 건 딱 사흘만이었다.
“어… 해원 씨.”
“채현이한테 연락받았는데 안 들어오시길래요.”
“…괜찮아요?”
해원은 류원의 어깨를 두 손으로 눌러 벤치에 앉히고 자신도 그의 곁에 앉았다. 두 손을 뒤로 짚어 류원이 그랬던 것처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괜찮으냐는 물음에 아직은 대답하지 못할 것 같았다.
사흘 동안 눈을 뜨면 액션스쿨을 가고 집에 오면 운동 방에 처박혔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뛰고, 걷고, 몸을 움직였다. 그러면서 왜곡된 기억을 하나씩 되짚고, 감춰진 기억을 들추었다.
그런데 생각만큼 끔찍하지 않았다. 열한 살 꼬마와 서른 살 성인이 감당할 수 있는 정신적 데미지는 다른 모양이었다.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작은아빠가 돌아가시고 일 년, 아빠가 제게 어떻게 했는지 모두 기억이 났다. 아빠는 괴로움에 몸부림쳤고, 깊은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저는 그걸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냥 울기만 했다.
그래도 꼬박꼬박 우는 저를 식탁에 앉히고 밥을 해 주셨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 입혔다. 준비물을 챙겨 가방에 넣어 주셨고 학교에 데려다주셨다.
작은아빠가 돌아가셔서 슬펐던 건 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빠가 집을 나가던 그날 있었던 일이, 아주 까맣게 칠해 놓은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목을 조르던 큰 손, 살려 달라는 말 한마디에 놀란 듯 떨어진 몸,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던 모습. 그리고 그는 정신없이 짐 가방 하나를 챙겨 도망쳤다.
“내가 내 손으로 너를 죽일까 봐. 내 속에 찬 이 빌어먹을 원망과 미움이 나를 막다른 길로 자꾸 몰아가고 있었으니까.”
그의 말은 진짜였다. 스스로 제 아들의 목을 졸랐던 죄책감에 그렇게 떠난 거였다. 또다시 아들의 목을 쥐게 될까 봐 겁이 났던 것 같다. 아빠를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평생 왜곡된 기억을 안고 살 뻔했다. 아빠를 원망하면서…….
“…아버지 만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홀가분한 얼굴이네요.”
“오해였으니까요. 지금까지 아버지가 성욕에 못 이겨 작은아빠를 죽였다고 생각했어요. 꽃이 만발한 채 숨이 꺼져 가던 모습이 너무 선해서요.”
“…….”
“무섭고 두려워서 그냥 도망치고 싶었나 봐요. 그래서 내 멋대로 좋은 기억만 남긴 거 같아요. 드라마나 영화에 악역이 있는 것처럼 도망친 아버지를 철저히 악역으로 만들었어요. 나 스스로…….”
류원은 해원의 어깨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가 머리를 비스듬히 기대어왔다. 담담하게 속을 털어놓는 해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래도 제 곁에 강 배우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만약 혼자 있었더라면 제가 깊게 파 놓은 구덩이에 몸을 웅크리고 거기서 울기만 했을 텐데…….”
“기특하네.”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슬프고 힘듭니다. 만약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해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운동화 앞코로 잔디를 짓이겼다. 작은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낳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자신은 류원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도 몸이 성치 않아 가질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에게 딱 한 명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대신 몸이 망가진다고 하면 저 또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낳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남겨질 사람, 류원과 아이… 그들을 생각하지 않은 처사였다.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작은아빠는 그때 자신을 포기해야 했다. 해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명줄을 달고 태어난대요. 이런 소리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해원 씨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도 작은아버지는 그날 돌아가셨을 거예요.”
“…….”
“아니 어쩌면, 해원 씨가 태어나서 더 오래 사셨을지도 모르지. 해원 씨가 너무 예뻐서, 그 예쁜 모습 더 오래 보고 싶어서 억지로 살려고 발버둥 쳤을지도 모르잖아요.”
서툴지만 진심 어린 위로에 눈물이 뺨을 적셨다. 류원이 해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내려앉았다. 상체를 세우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손가락을 문질렀다. 뜨거운 눈물이 손가락에 묻어났다.
“감사합니다.”
사실은 어젯밤 류원 몰래 아버지를 한 번 더 뵙고 왔다. 입구에서 막힐 거로 생각했지만, 다행히 덩치들은 저를 알아보고 길을 비켜 주었고 아버지가 계신 곳에 수월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곤히 잠들어 계셨다. 몸을 웅크리고 잠든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나왔다. 용서라는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사죄를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저 역시 나이를 먹어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내의 마음은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자신이 기억을 다 지워 버리고 악역으로 아버지를 세운 것처럼…….
아버지를 만나고 난 뒤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기적인 선택을 한 작은아빠도, 그리고 저를 버리고 떠난 비정한 큰아빠도. 홀로 남아야 했던 열한 살짜리 꼬마 문해원의 마음까지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해원은 생각을 차곡차곡 접어 마음속에 넣어 두고 제 뺨을 감싼 손을 꽉 쥐었다. 류원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한 번에 모든 게 다 괜찮아졌다. 더 빨리, 더 건강해지고 싶었다.
“저 상담 치료를 받아 보려고요.”
“…상담 치료요?”
“이 소장님이 권유해 주셨던 건데, 이번 일 겪으면서 진지하게 생각해 봤거든요. 다니면서 마음도 튼튼하게 고쳐 보려고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류원은 마음을 튼튼하게 고쳐 보겠다는 말에 마음을 놓았다. 역시나 해원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단하고 곧은 사람이었다.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드리워졌다. 해원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히 매만졌다. 사람을 대할 때 이렇게 조심스러운 건 처음이었다.
예전에 류원은 늘 제멋대로 소리 지르고 하대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데 해원을 만나고 난 뒤로는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았고 사람을 막 대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해원이 이런 모습을 싫어할까 봐. 얼마나 원초적이고 간결한 답인가. 미움받기 싫어 말 잘 듣는 아이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강 배우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성욕 때문에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해도 돼요?”
류원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해원에게 내밀었다. 해원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담배를 끊기로 한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키고 익숙하게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담배 끝이 타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스테먼과 피스틸 사이에서는 에로스적인 사랑보다는 플라토닉적인 사랑이 더 중요하다면서 정신적인 교류를 강조하잖아요. 근데 그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미 맛본 육체가 얼마나 뜨겁고 달콤하다는 걸 아는데 그걸 어떻게 참아.”
“…….”
“사실 이건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강류원의 생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강류원은 정신적인 교류와 다른 방법으로 성적 욕구를 푸는 방법을 찾았을 거예요. 나는 내 사람이 평생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날한시에 죽는 게 내 꿈이거든.”
류원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 내고 손으로 해원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한날한시에 해원과 함께 영면하고 싶었다. 불면증으로 괴로워 몸부림치던 저를 잠재워 준 것처럼 자신의 마지막 숨도 함께 하길 바랐다.
“그렇게 눈감으면 정말 행복할 거 같네요.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길고 긴 여행을 함께 떠나면 좋을 거 같아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해원의 눈이 휘어지며 잔잔하게 웃었다. 류원은 불씨가 필터 끝에 닿은 담배를 비벼 끄고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러자 해원이 팔을 벌려 왔다. 조금 의아한 얼굴로 그의 앞에 다가갔다. 허리에 팔을 감고 배에 뺨을 댄 해원이 작게 속삭였다.
“강 배우님만 괜찮다면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 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는 그런 관계 말이에요.”
천천히 해원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던 류원의 손길이 멈추었다. 류원은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 귓가로 흘러들어 오는 말이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머리가 바로 출력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해원이 말한 관계는 밴딩이었다. 몸과 마음이 서로에게 귀속되는 그런 관계. 죽음이 아니면 절대로 끊어질 수 없는 그런 관계.
류원의 심장이 가파르게 뛰기 시작했다.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심장이 아프다는 느낌을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 한 말이 사랑한다는 말보다 천 배쯤, 아니 그보다 더 진실한 말처럼 느껴졌다.
“그 말 되돌릴 수 없다는 거 알죠. 장난치는 거 아니죠?”
“장난도 아니고 되돌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류원은 해원을 일으켜 세우고 품에 안았다. 품 안 가득 안겨 드는 몸을 세게 끌어안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더운 공기가 흘러들었지만 그렇게 불쾌하지 않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히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해원에게 들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얼간이 같은 저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한 그가 고맙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머리가 몽롱할 지경이었다.
* * *
류원은 샤워 가운의 매듭을 단단하게 조이고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물기를 머금어 축축해진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고 거울 앞에 섰다. 면도가 꼼꼼하게 됐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던 류원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강 배우님만 괜찮다면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어요.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는 그런 관계 말이에요.”
턱을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가슴 한쪽 구석이 간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언젠가 꿈에서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얼마나 문해원을 간절히 원하면 꿈에서까지 나오나 싶었는데… 그 말을 현실에서 듣게 될 줄이야.
누군가 심장을 쥐고 세게 주무르는 것처럼 욱신거리고 숨이 막혔다. 그리고 피가 빨리 도는 듯한 느낌 때문인지 몸도 뜨거운 것 같았다. 정말 중증이 따로 없었다.
류원은 정갈하게 정리된 침대에 걸터앉았다. 엉덩이 아래에 짓눌린 시트가 신경 쓰여 얼른 몸을 일으켰다.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거렸다. 괜히 멀쩡하게 놓인 베개를 집었다가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쏜살같이 흐르던 시간이 갑자기 슬로우 모션을 걸어 놓은 것처럼 느릿느릿 흐르는 기분이었다.
입 안쪽 연한 살을 이로 짓씹었다. 입술을 모아 쭉 내밀고 살을 질근질근 물었다 놓았다. 한참이 지나고 입 안쪽이 너덜너덜해질 때가 돼서야 노크 소리가 들렸다.
류원이 단숨에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활짝 열었다. 뜨거운 물로 샤워했는지 더운기가 잔뜩 묻은 얼굴로 해원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드, 들어와요.”
“아…….”
류원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문 옆으로 비켜서는데 해원이 팔을 뻗어 품으로 풀썩 안겨 들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축축한 머리카락이 입가에 닿고 해원의 나무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두 팔로 해원의 몸을 감싸고 세게 끌어안았다.
“예전에 제가 원하는 대로 안아 주신다고 한 거 기억나세요?”
“아, 아, 당연히 기억나죠.”
“그럼 저는 부드럽고 뜨겁게 부탁할, 아!”
갑자기 해원의 발이 허공으로 들리고 순식간에 침대로 몸이 떨어졌다. 매트리스가 얕게 진동했다. 류원은 해원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며 작게 웃었다.
“부드럽고 뜨겁게 접수.”
“읏!”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살짝 어긋날 수도 있으니까 그건 좀 감안해 주세요.”
류원은 숨을 크게 몰아쉬고 상체를 세웠다. 침대에 누워 저를 오롯이 올려다보는 해원의 눈가에 입술을 찍어 눌렀다. 분명 숨을 쉬고 있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는 그런 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감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에 인상을 작게 찡그렸다.
“저기.”
“……?”
“숨 쉬세요.”
해원은 입가를 가리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수십 명이 지켜보는 앞에서도 맡은 배역을 담담한 얼굴로 연기를 해 나가던 강류원이 지금은 잔뜩 얼어붙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류원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눌러 잡고 몸을 굴렸다. 사흘 바짝 운동한 효과를 이런 걸로 확인하게 되다니……. 해원이 웃음을 참으며 침대에 머리를 대고 누운 류원을 바라봤다.
“이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피스틸이 스테먼을 잡아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 뭐라고?”
류원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해원을 올려다봤다. 해원의 손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리해 주며 낮게 흥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제야 긴장한 어깨가 축 늘어지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기 시작했다.
“제가 확 잡아먹어 버리기 전에.”
류원의 손이 해원의 뒷덜미를 붙잡아 끌어당겼다. 금세 입술이 가까워졌다. 가쁜 숨이 서로의 얼굴로 쏟아졌다.
“뭘 먹으면 이렇게 요망해지나?”
“그냥 밥 먹습니다.”
느끼한 물음에 무덤덤하게 대답한 해원이 고개를 숙여 입술을 핥았다. 혀끝으로 입술선을 가볍게 훑고는 입술을 벌려 혀를 밀어 넣었다. 입안 온도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류원은 매듭을 풀지도 않고 해원의 가운을 어깨 아래로 끌어내렸다. 밖으로 드러난 맨살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점점 뒤로 물러나는 해원의 고개를 쫓아 몸을 세웠다.
어느새 류원의 혀가 제 입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매끈한 혀가 입천장을 문지르고 점막을 부드럽게 쓸었다. 서로의 타액이 쉴 새 없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하아, 으, 잠시만.”
해원이 숨이 답답해 몸을 바르작거리며 하체에 힘을 주자,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짓눌리며 류원이 앓는 소리를 냈다. 해원은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하체에 꽉 힘을 주었다. 해원이 상위에 있어 류원의 성기가 제대로 눌렸다.
“흣, 부드럽고 뜨겁게, 원한다면서 이러면, 곤란하지.”
“아래가 뜨거워요.”
해원이 손을 아래로 내려 드로즈 위로 도드라진 성기를 매만졌다. 손바닥 전체로 성기를 감싸 위아래로 문지르자 류원이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이따가 얼마나 후회하려고 이래.”
“…나중 일은 나중에, 웁!”
류원이 해원의 목을 감싸고 입술을 맞물렸다. 거침없이 혀를 밀어 넣고 입안을 들쑤셨다. 해원은 머리가 핑핑 돌고 눈앞이 아찔했다.
사실 오늘만큼은 류원도 해원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머릿속으로 ‘부드럽고 뜨겁게’를 되뇌며 다름대로 성욕을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해원의 손이 그의 성기를 더듬는 순간, 퓨즈가 나간 것처럼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참기 힘들었다.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류원은 해원의 몸을 침대에 눕히고 허겁지겁 매듭을 풀어헤쳤다. 단단하고 유려한 육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사흘 동안 운동을 얼마나 했는지 촘촘하게 짜진 근육들이 류원의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근육이 도드라진 가슴을 세게 움켜쥐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흉곽을 크게 부풀리며 숨을 크게 마셨다.
“약속 못 지키는 건 순전히 문해원 때문이야.”
“…하아, 강류원.”
수색이라도 하듯 혀가 구석구석 입안을 들쑤셨다. 몸이 달아오르고 정신이 저만치 물러나는 듯한 느낌에 해원이 류원의 팔뚝을 움켜쥐었다.
류원은 고개를 숙여 해원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당장에라도 몸을 꿰뚫어 버리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내리누르고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작은 돌기를 혀로 핥고 입술을 모아 빨았다. 유륜을 둥글게 핥자, 해원의 몸이 격렬하게 튀어 올랐다.
“으읏, 으, 으응!”
해원은 입술을 세게 깨물고 신음을 삼켰다. 새끼손톱 반만 한 젖꼭지를 집요하게 물고 핥아 대는 통에 몸이 배배 꼬였다. 좋은데 수치스러운 기분이랄까. 양손으로 베개를 움켜쥐고 고개를 비틀었다. 성욕이 고조될수록 몸이 제멋대로였다.
류원이 뱃가죽을 혀로 핥으며 젖꼭지의 갈라진 틈에 손톱을 박아 넣고 들쑤셨다. 해원은 낮게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젖혔다. 뒷덜미가 붕 뜨며 목에 핏대가 도드라졌다.
갑자기 심장이 꽉 조여들며 숨이 덜컥 막혔다. 혈관 아래 잔잔히 흐르던 피들이 급류라도 된 양 빠르게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피에 뒤섞인 독이 심장으로 들어갔다가 빠르게 흘러나왔다.
“하아, 아, 강류, 흣, 원!”
수위를 넘실거리는 수조의 담긴 물처럼 성욕이 찰랑거렸다. 해원이 손을 내려 류원의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상체가 반쯤 세워진 채 낮게 신음하는 해원을 힐끗거린 류원이 팽팽하게 일어선 성기를 입에 담았다.
성기가 단숨에 그의 입안으로 쑥 밀려들었다. 뜨거운 입안 온도에 성기가 저절로 꿈틀거렸다. 그가 입술을 모아 살덩이를 조이며 빨아 올렸다. 금방이라도 사출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머리카락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으, 제발……!”
뜨거운 입안에 갇혀 한참을 빨리던 성기가 공기 중에 노출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류원이 해원의 두 다리를 잡아 높게 들어 올렸다. 반쯤 들린 상체가 침대로 떨어지고 허리가 접혀 두 다리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허벅지 뒤쪽 근육부터 천천히 입을 맞추며 주름진 구멍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성욕이 찰랑거리는 수준을 넘어 출렁거렸다.
“흐읏, 아, 빨리…….”
“좀 참아 봐요. 부드럽고 뜨겁게 원한다면서.”
“아냐, 취소야! 흣, 취소라고!”
해원이 다급하게 외쳤다.
부드럽고 뜨겁게는 개뿔!
머리끝까지 차오른 성욕에 머리, 배 할 것도 없이 아프고 손끝 발끝이 다 곱아 들었다. 하지만 류원은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느릿하게 구멍을 확인하고 천천히 안을 벌려 손가락 하나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허공에 들린 허리에 힘이 잔뜩 들어가며 뻣뻣해졌다.
손가락은 곧장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내벽을 문질렀다. 머리 쪽에 몰려 있던 성욕이 배로 내려와 뱃가죽을 들쑤셨다. 그의 손이 안쪽을 찔러 올릴 때마다 촘촘히 짜인 복근이 움찔거렸다. 손가락 하나가 추가로 뒤를 파고들었다.
구멍이 벌어지는 느낌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것도 모자라 안을 크게 휘저었다. 저절로 허리가 덜덜 떨렸다. 류원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곧게 뻗은 다리에 입 맞췄다.
“안이 너무 뜨거워.”
“아흣, 아, 으윽, 흣.”
류원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안을 들쑤셨다. 어느새 그는 스스로 성기를 쥐어 흔들고 있었다. 손가락을 깊숙이 밀어 넣고 어느 한 부분을 집요하게 문질렀다. 그러자 성기를 문지르던 해원의 손이 침대를 퍽퍽 두드렸다.
“흣, 아, 그만… 읏, 싫어.”
“여기 싫어? 안이 꽉 조여드는데?”
살짝 부어오른 부분을 두 손가락으로 두드리듯 문질렀다. 해원이 낮은 비명을 내지르며 성기를 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쿠퍼액이 해원의 얼굴에 뚝뚝 떨어졌다. 눈가를 적신 액체 때문에 눈도 뜨지 못하고 성기를 흔들었다. 그의 손이 빠르게 절정을 향해 달렸다. 쿠퍼액이 손바닥을 적셔 마찰음이 요란해졌다.
“흐읏, 으, 아, 아읏!”
류원이 손가락을 빼내고 고개를 숙여 벌어진 구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뜨겁고 축축한 혀가 안쪽으로 밀려드는 감각에 해원이 몸을 굳히고 정액을 토해 냈다.
“윽! 아아--! 하윽!”
손바닥을 적신 정액이 해원의 얼굴에 뚝뚝 떨어졌다. 해원은 붉어진 얼굴을 자신의 체액으로 더럽히고 성기를 쥔 손을 떨어뜨렸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탈력감에 몸이 늘어졌다. 아래에는 류원이 엉덩이 살을 벌린 채 구멍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흣, 하지 마, 하윽, 더러, 흣, 더러워.”
버둥거리는 해원의 하체를 꽉 감싸고 오므라든 구멍에 혀를 밀어 넣고 안을 핥았다. 뜨거운 내벽에 혀끝이 닿아 머릿속이 찡하게 울렸다. 아무도 맛보지 못할 이 뜨거운 맛을 오직 저만이 누리고, 가지고 맛볼 수 있었다.
“흣, 그만, 으윽, 그만!”
류원은 해원의 엉덩이를 더 넓게 벌리며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몸속 장기들까지 다 핥아 맛보고 싶었다. 미칠 듯한 뜨거움이 그의 속을 데웠다.
혀로 아래를 들쑤시며 자신의 드로즈를 끌어내려 성기를 밖으로 노출시켰다. 팽팽하게 일어선 성기가 흉흉한 기세로 꿈틀거렸다. 핏줄이 잔뜩 불거진 성기를 손으로 훑으며 해원의 회음부를 길게 핥고 성기 아래쪽을 혀끝으로 문질렀다.
“삽입까지 부드럽게 한다고 장담 못 해.”
류원이 뜨거운 숨을 회음부에 토해 내며 속삭였다. 숨이 뜨거워서 아래가 화끈거렸다. 고환 아래까지 혀가 닿았다 떨어졌다.
해원은 코끝을 찡긋거리며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그와 육체가 닿아 있는 것만으로 숨이 가쁘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어서 빨리 그가 아래를 벌리고 들어와 줬으면 좋겠다.
혀가 한 번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류원은 피스톤 질을 하는 것처럼 혀를 뾰족하게 세워 안쪽을 들쑤셨다. 온몸이 녹아 흐물거리는 것 같았다.
류원이 바짝 들린 허리를 아래로 내려 주고 해원의 다리를 넓게 벌렸다. 엉덩이가 침대에 닿자, 안쪽에 고여 있던 액체가 밖으로 흘러나오며 시트를 적셨다.
류원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테이블 서랍을 열어 젤을 꺼냈다. 그러고는 젤 뚜껑을 열어 뾰족한 입구를 해원의 구멍에 넣었다. 튜브를 누르자, 젤이 몸 안쪽으로 흘러들었다. 갑자기 차가운 게 쏟아져 들어오자 해원이 놀라 몸을 버둥거렸다.
“쉬이, 괜찮아. 젤이야.”
“…흣, 차가, 차가워.”
류원은 손바닥 크기만 한 젤을 다 짜 넣고 튜브를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샤워 가운과 드로즈를 한꺼번에 벗어던지고 해원의 다리 사이에 앉았다. 해원이 재촉을 하듯 허리를 감싸 끌어당겼다.
“왜 이렇게 보채. 부드럽게 해 주려고 노력 중인데.”
“흐응, 취소야, 흣, 빨리, 해요. 윽.”
류원이 몸을 겹쳐 해원의 얼굴을 적신 정액을 혀로 핥았다. 해원의 체액이라 생각하니 비릿한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가에 맺힌 액체를 혀로 핥자, 해원이 꽉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류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눈가에 짧게 입 맞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류원을 재촉했다. 배꼽 아래로 모여든 성욕에 몸이 달았다.
류원은 손을 아래로 내려 젤로 흠뻑 젖은 구멍을 확인하고 귀두를 아래에 맞췄다. 해원이 손으로 시트를 세게 움켜쥐었다.
천천히 아래를 벌리고 귀두를 밀어 넣었다. 성기를 밀어 넣을수록 안을 채운 젤이 옆쪽으로 밀려나며 야릇하게 아래로 떨어졌다. 류원은 인내심을 가지고 천천히 귀두를 밀어 넣었다. 내벽에 치덕치덕 발린 젤이 계속 구멍 밖으로 밀려 나와 절경을 선사했다.
해원은 숨 막히게 느린 진입에 억눌린 숨을 토해 냈다. 삽입의 순간은 지독하게도 길었다. 성기에 도드라진 핏줄 하나하나를 확인이라도 시켜 주는 것처럼 느릿하게 아래를 밀고 들어왔다.
류원은 해원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삽입을 당하면서 일그러지는 미간과 눈가의 작은 주름 하나까지 세세하게 눈에 담았다. 어느 하나 제 눈에 예쁘지 않게 없었다.
“흐읏, 아, 으윽, 아파.”
감상에 젖어 있던 류원이 안쪽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에 인상을 찡그렸다. 고개를 숙여 아래를 확인했다. 삽입이 많이 진행되긴 했으나 아직 완전하진 않았다.
허리를 얕게 쳐올렸다. 무언가가 안쪽 진입을 막고 있었다. 해원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게 분명했다. 류원이 다급하게 허리를 물리려고 하자, 해원이 두 다리로 허리를 감싸고 끌어당겼다.
“흣, 아픈데, 아아, 윽.”
“근데?”
“으읏, 아픈 것만은, 하아, 아냐.”
초점을 잃어 몽롱한 눈빛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류원은 허리를 살짝 물렸다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퉁, 부딪치는 느낌이 두껍지는 않은 것 같았다. 뭐랄까, 얇은 막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허리에 약간 힘을 주자, 해원이 손톱을 세워 제 팔뚝에 박아 넣었다. 조급증이 일었다. 약간만 더 힘을 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허리를 얕게 쳐올리며 해원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폈다.
류원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해원은 미간을 좁히며 입을 벌렸다. 뜨거운 숨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아픈 감각만 느껴지는 건 아닌 거 같은데.
해원은 귀두가 안쪽 어딘가를 쑤실 때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미칠 듯한 흥분감이 몰아쳤다.
“으읏, 으, 더요, 더, 흐윽, 깊이…….”
“…네가 다칠 수도 윽, 있어.”
“흣, 빨리, 아아……!”
해원의 말꼬리가 길어졌다.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해원의 입가에서 타액이 흘렀다. 해원의 반응으로 봐서는 다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번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서 허리를 뒤로 물리고 손가락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벽이 꽉 조여들며 손가락을 물었다.
아무리 안쪽 깊은 곳까지 더듬어도 손가락에 걸리는 건 없었다. 이상하다, 류원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다시 성기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퉁, 얇은 막에 부딪히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 흣! 흐윽, 크윽.”
내벽이 빨리 정액을 뱉어 내라는 것처럼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성기를 조물조물 씹어 댔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울렸다.
말 같지도 않은 ‘부드럽게’를 실천하던 류원의 인내심도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해원의 상태를 살피고 허리를 붙잡아 단단히 고정했다.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단숨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아까는 닿지 않았던 깊은 곳까지 귀두가 쑤욱 밀려들어 갔다.
해원이 바들바들 떨며 자지러지는 신음을 쏟아 냈다. 가로막던 막이 찢어진 것인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류원이 확인을 하는 것처럼 좁은 통로를 귀두로 꾸욱 눌렀다.
류원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어느새 울음을 터뜨린 해원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흉곽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었다.
해원은 정신없이 손을 뻗어 류원의 목에 팔을 걸었다. 허리를 받쳐 몸을 당기자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해원아.”
“흐읏, 꼬, 꽃 냄새가, 흣, 너무, 윽, 진해서.”
갑자기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심장이 가파르게 뛰고 눈앞이 아찔했다. 몸에 일어난 이상 반응을 감지하는 찰나, 갑자기 해원이 허리를 들썩이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 윽, 해원 씨.”
“흣, 꽃이, 하앗, 꽃.”
해원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연신 허리를 들썩였다. 성기가 예민한 안쪽을 문지르며 깊숙이 틀어박혔다. 성감이 고조될수록 눈앞이 캄캄해지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힘줄이 불거지고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그리고 허벅지 안쪽에 새긴 양귀비에서 강렬한 자극이 느껴졌다.
몸이 제 몸이 아닌 것처럼 이상했다. 해원의 손이 몸 이곳저곳에 닿았다. 뺨에서 목으로, 어깨, 가슴, 팔, 허리. 손으로 더듬거려 제 몸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류원이 끓어오르는 성욕을 참지 못하고 해원을 밀어 눕혔다. 눈앞이 까맣게 물들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을 가려 놓고 채찍질을 당하는 경주마처럼 사납게 해원의 아래를 들쑤시고 흥분을 고조시켰다. 해원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온몸의 열기가 하체로 몰리기 시작했다.
“하아, 밴딩이 안 되더라도, 후, 실망하면 안 돼.”
“흐읏, 아, 아, 윽!”
해원이 신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밴딩에 대한 기대가 있지만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걸 수도 있고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정감이 고조됨과 동시에 스퍼트를 빠르게 올렸다.
퍽퍽-,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해원의 손을 모아 복부에 붙이고 아래로 끌어내리며 허리를 쳐올렸다. 안쪽 깊은 곳까지 닿는 느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해원은 울음 섞인 신음을 내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몸 안쪽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성기가 내장을 밀어 올렸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져 귀 안쪽에 고였다. 밴딩이 안 되더라도 실망하지 말라는 말이 슬프게 들렸다.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가가 달아올랐다. 류원이 배 쪽에 올려놓은 제 손을 세게 움켜잡고 크게 허리 짓하며 안쪽 깊숙이 성기를 박아 넣었다. 내벽을 긁고 처박히는 느낌에 몸을 굳히고 숨을 삼켰다.
“아…….”
가쁜 숨을 토해 내기도 전에 등이 지글지글 끓어 대기 시작했다. 꽃이 새겨질 때처럼 강렬한 뜨거움이 온몸에 떨어졌다. 울음을 참지 못할 만큼 거센 고통에 몸부림쳤다. 류원 역시 같은 고통을 느끼는지 몸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갑자기 달뜬 숨소리가 가득 채우던 방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 한 줌 낼 수 없는 적막함 속에 갇혔다. 다른 차원으로 육신이 빠져나온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코끝에는 양귀비 특유의 꽃 냄새가 진하게 흘러들었다.
어쩐지 웃음이 났다. 계속 흐릿하게 맴돌기만 하던 꽃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강류원을 닮아 자기주장이 강했다. 입꼬리를 올리고 실없이 웃었다.
“…원아! …아! 문해원.”
뺨을 두드리는 느낌에 해원이 눈을 깜박였다. 하아, 막힌 숨이 터지고 몸의 감각이 한꺼번에 돌아와 몸을 덮쳤다. 아직 아래를 채우고 있는 성기가 몸 안쪽에서 선명하게 느껴지고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지른 탓에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괜찮아?”
“…하아, 네.”
류원이 몸을 겹치고 입술을 핥았다. 몸속 깊은 곳에 아직 류원의 성기가 박혀 있었다.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류원의 눈이 반달로 휘어졌다.
“…화, 확인해 봐요.”
“조금만 더 있다가.”
류원이 얼굴 곳곳에 입술을 찍어 누르며 느긋하게 후희를 즐겼다. 해원의 귀 안쪽에 고인 눈물까지 모두 핥고 나서야 천천히 허리를 물렸다. 체액에 잔뜩 젖어 번들거리는 성기가 몸속을 빠져나왔다. 해원은 숨을 크게 삼키고 몸을 움직였다.
천천히 몸을 뒤집어 엎드렸다. 손을 뒤로 돌려 척추뼈를 더듬었다. 이쯤, 이쯤이 뜨거웠는데…….
류원이 해원의 손을 치우고 그 자리에 입술을 묻었다. 혀가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꽃 모양을 덧그리듯 등을 간지럽혔다.
해원은 허탈한 기분에 몸을 늘어뜨렸다. 밴딩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워낙 무용담처럼 떠도는 밴딩 현상에 대해서 둘 다 자세히 알지 못했다.
다만 아는 것이라고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마음과 마음이 통하고 육체와 육체가 닿아서 만들어 내는 약속이라는 것뿐……. 실망하지 않기로 했는데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류원이 해원의 옆에 누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해원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해원 씨 나무 냄새가 이런 냄새였구나.”
“…예?”
“그냥 막연하게 묵직하고 짙다는 생각은 계속하고 있었는데, 진짜 나무 냄새는 훨씬 좋네.”
류원이 빙그레 웃으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입술을 삐죽이고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와 섹스를 하고 난 직후라서 그런지 몸이 노곤했다. 샤워도 해야 하고 할 게 많지만… 지금은 옴짝달싹도 하기 싫었다.
“아무 냄새 안 나요?”
“응?”
탄식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코끝에도 류원의 꽃 냄새가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전에 맡았던 그런 희미하고 흐린 냄새가 아니라 선명하고 진한 꽃 냄새였다.
추상적이기만 하던 꽃 냄새가 현실적으로 흘러들었다. 류원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며 웃었다.
“내 나무.”
가슴이 벅차올랐다. 해원은 코끝이 찡해지는 기분에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을 삼켰다. 그의 꽃이 몸뿐만 아니라 가슴에도 아로새겨졌다. 강류원은 세상에 하나뿐인 해원만의 꽃이었다.
“생각보다 쉬운데?”
류원이 장난스럽게 코끝을 깨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후, 근데 저 좀 어지럽고 토할 거 같은데.”
“뭐?”
류원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기분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류원의 허벅지에 핀 꽃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완전히 의식이 멀어지기 전, 해원은 작게 속삭였다.
“안녕, 나의 꽃.”
* * *
지난밤부터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침까지 이어졌다. 류원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침대에 누운 해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밖에는 채현이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지만 좀처럼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채, 현이 기다리는데.”
해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내 봐도 류원은 꼼짝 하지 않았다. 낭패감에 인상을 작게 찌푸리고는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류원의 개인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단체 대화방에는 채현이가 형이 나오지 않는다며 우는소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액션스쿨 가지 말고 운동도 하지 마세요.”
“어… 사흘 동안 근육 만드느라 제가.”
“사흘 동안 프로틴만 먹어서 사람 간 떨어지게 한 사람이 누구더라?”
“…네. 오늘은 얌전히 있을게요.”
해원은 꼬리를 얼른 내리고 눈치를 살폈다.
어젯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방 안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준호가 제 팔뚝에 링거를 연결하고 있었다.
“무리한 운동은 오히려 건강에 안 좋아요.그리고 토사물에 음식물이 전혀 없던데. 아무것도 안 먹고 운동만 한 거예요?”
“…프로틴은 먹었습…….”
“몸을 혹사하고 싶으면 운동 말고 공사장이나 이런 곳으로 가 봐요. 잡부 같은 거 하면 시간도 금방 가고 돈도 생겨요.”
준호가 건조하게 대답하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해원이 허둥지둥 몸을 반쯤 세우자, 준호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해원 씨가 사흘 동안 프로틴만 먹었다는 건 비밀로…….”
“뭐?”
비밀이 될 수도 있었지만, 타이밍 좋게 방에 들어온 류원 때문에 사흘 동안 프로틴을 먹은 사실이 발각되었다.
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 후까지 떠올리려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새벽에 마시듯 먹어 치운 죽이 아직도 위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어서 가세요.”
“이따가 채현이 보낼게요. 죽 먹고 약 먹어요.”
“아니요, 그러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챙겨 먹을게요.”
짧게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결국 해원이 알아서 챙겨 먹겠다는 말에 류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일단락되었다. 류원은 출근하기 싫어 계속 미적거리고 있었다.
“내일까지만 촬영하면 다 끝나니까 모레부터는 함께 있어요.”
“…네.”
“해원 씨한테 찰싹 붙어서 안 떨어질 거니까 각오해요.”
류원은 허리를 숙여 해원의 뺨에 짧게 입 맞추고 재킷을 집어 들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류원이 뭔가 생각난 듯 몸을 돌려 다시 침대로 다가왔다.
“왜요?”
“나 해원 씨한테 허락받을 거 있는데.”
“……?”
“우리 연애하는 거 비밀이에요?”
해원은 작은 쿠션을 끌어다가 배 위에 올려놓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말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관계였다. 채현도 내색하진 않지만, 얼추 관계를 짐작하는 것 같았고, 준희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지금도 충분히 비밀이 아닌데… 해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연애하는 거 기사화해도 되느냐는 말이에요.”
“예?”
“우리의 연애가 범법 행위는 아니잖아요.”
“…그래도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해원은 톤을 낮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애가 범법 행위는 아니지만 류원을 좋아하는 팬들이 받아들이는 건 조금 다를 테니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류원은 신중하자는 의미를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불퉁한 표정으로 해원을 바라봤다.
“연애를 밝히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강 배우님 팬들 입장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음, 내 팬들은 다 이해해 줄 거예요. 연애를 권장하는 사람들이라.”
“말은 그렇게 해도 막상 기사 터지면 속상할 거예요. 저부터도 제가 좋아하는 배우님의 열애 기사를 보면 속상할 거 같은.”
“해원 씨가 좋아하는 배우는 나잖아요.”
류원은 능청스럽게 대답하고는 얄미울 정도로 환하게 웃었다. 대화가 이상하게 흘렀다. 하지만 류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 해원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를 수면으로 끌어올릴 생각만 하다 보니 저를 사랑해 주는 팬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줄 뻔했다. 해원의 머리카락을 쓱쓱 문질러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해원이 어색하게 한 손을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장에 동행할 생각이었다. 문이 닫히자,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베개를 베고 모로 누워 몸을 웅크렸다.
류원과 밴딩을 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아직 꽃이 피는지 안 피는지 확인하지 못해 반신반의하는 마음도 들었다. 다음 관계 때 만약 꽃이 새겨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완벽한 관계가 된 것일 테지. 오직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는 그런 관계.
손을 뒤로 돌려 등을 더듬거렸다. 돌연사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제 등에는 주홍색의 양귀비 다섯 송이가 새겨져 있었다. 나무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나무 밑동이 까맣게 썩어 있던 게 이제는 척추 끝에만 까맣게 남아 있었다.
흉측하기만 한 그게 점점 없어질수록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 피스틸이라서 끔찍했던 모든 순간이 강류원과 함께 있으면서 좋아졌다. 오히려 피스틸이라서 다행이었다. 주파수라는 맹목적인 끌림에 의해서 시작된 관계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와 밴딩을 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음과 마음이 뜨겁게 통해서 그의 꽃인 양귀비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강류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딱 한 명뿐이었다. 해원은 빠르게 뛰어 대는 심장을 손으로 덮고 눈을 감았다.
* * *
“컷!”
준희가 재빨리 대형 수건으로 류원의 몸을 감쌌다. 물을 흠뻑 뒤집어쓴 류원이 얼굴에 묻은 물기를 대충 손으로 닦아 내고 모니터링을 위해 감독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감독은 화면을 돌려 촬영한 장면을 보여 주었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고 몸에 둘린 수건을 준희에게 넘겼다.
“다시 한번 가시죠.”
“…그래도 될까?”
“쏟아지는 물 세기를 좀 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대사하기가 좀 힘듭니다.”
류원의 말에 감독이 얼른 스태프를 불러 살수차의 물 세기를 조절하라고 말했다. 류원은 천막 아래로 들어가 젖은 얼굴을 말리고 옷을 다시 갈아입었다. 벌써 4시간째 같은 장면을 찍고 있었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해도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자니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내리는 비도 모자라 살수차까지 동원해 물을 뿌리고 있는 덕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통약 줘.”
“머리 많이 아프냐?”
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준희가 두통약과 물을 가지고 와 내밀었다. 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컨디션이 나빠지는 게 확실하게 느껴졌다.
야외 촬영이 끝나면 곧바로 파주로 넘어가 밤늦게까지 세트장에 있어야 했다. 더운 숨을 뱉어 내고 재킷을 걸쳐 입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촬영 라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감독이 원로 배우에게 디렉팅을 주고 자리로 돌아갔다. 류원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살수차가 물을 뿌리기 시작하고 큐 사인이 들렸다.
“이제 어떤 식으로든 저를 막으실 수 없으실 겁니다. 저는 유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천천히 대사를 뱉어 내던 류원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감독이 컷을 외쳤다. 벌써 몇 시간째 물을 맞는 배우에게 화를 낼 수도 없어, 그는 짜증스럽게 인상만 구겼다. 촬영을 지켜보던 준희가 대신 감독에게 죄송하다며 허리를 숙였다.
“감독님, 류원이가 비를 많이 맞았더니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봅니다. 조금만 쉬었다가 가면 안 되겠습니까?”
준희가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고 감독도 별말 하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류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준희와 채현이 달려들어 류원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
“왜 이래 인마.”
“…형, 나 문해원이랑 밴딩했는데.”
“뭐, 뭐라고?”
“지금 나무 냄새가 너무 짙게 나서 숨도 못 쉬겠어.”
코끝으로 스며드는 짙은 나무 냄새에 머리가 몽롱했다. 해원이 촬영장에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냄새가 짙었다. 그런데 해원의 그림자는커녕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 해원이 형, 왔나 본데요. 밴에서 기다리…….”
류원은 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뿌리치고 밴으로 달려갔다. 몇 번이나 다리가 풀려 넘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넘기고 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누워 있던 해원이 놀란 얼굴로 류원을 바라봤다.
“강, 배우님!!”
“문해원.”
해원이 몸을 일으켜 문가로 다가왔다.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얼굴에 덜컥 겁이 났다. 류원은 해원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낮은 숨을 내쉬었다. 머리는 뜨겁고 마음은 제멋대로였다.
“왜 왔어.”
“…제가 온 게 문제가 아니라… 어디 아프신 거 아닙니까? 열도 조금 있는 거 같은데…….”
해원이 조심스럽게 푹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류원은 힘없이 몸을 기대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 예정된 촬영 스케줄이 또 있고 세트 촬영을 위해 파주까지 넘어가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여기에 잠깐만 있어요. 나 금방 촬영 끝내고 올게.”
류원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고 몸을 돌렸다.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빗속을 걸어가는 류원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해원이 얼른 차에서 내려 류원의 팔을 붙잡았다.
“몸 안 좋으신 거 같은데.”
“비 맞아요. 얼른 들어가 있어.”
류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제 팔을 붙잡은 해원의 손을 떼어 냈다. 빨리 끝내고 한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촬영장 거리를 가늠하며 걸음을 옮겼다.
해원은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속을 걷는 그의 뒷모습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지켜봤다. 위태로운 걸음이 한 번씩 비틀릴 때마다 해원의 마음도 비틀리는 것 같았다.
해원은 류원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넘어지지는 않을까,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천막이 쳐진 곳까지 다가가자 준희가 저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해원은 고요하게 집게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갔다. 준희는 얼른 류원을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곧 있음 준호 형 올 거야.”
“…뭣 하러.”
“너 해원이랑 밴딩했다는 말 안 했다며? 형이 막 화내던데.”
류원은 대꾸도 할 힘이 없어서 고개를 푹 떨궜다. 몸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기력이 빠지는 게 몸에 직접 느껴지고 있으니, 상태가 심각한 것 같기는 했다. 그래도 야외 촬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내야 했다.
류원은 마음을 다잡고 촬영 라인 쪽으로 다가갔다. 감독이 하얗게 질린 류원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몸 안 좋아요?”
“아뇨, 괜찮습니다.”
“촬영 장면 편집해서 사용해도 되니까 너무 힘들면 패스해도 돼. 얼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류원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몸 상태가 안 좋았다.
“정 마음에 걸리면 풀 샷 한 번만 갑시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풀 샷에는 어차피 얼굴 안 나오니까, 편하게 해요. 비는 좀 맞아야 하겠지만…….”
감독의 배려로 촬영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컷-, 소리와 함께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를 철수하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하게 류원의 몸에 물을 퍼붓던 살수차도 멈추었다.
“하아.”
류원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강 배우님.”
해원이 등을 감싸고 제 어깨에 대형 수건을 걸쳐 주었다. 차에서 기다리라니까… 말도 안 듣지. 그래도 해원이 곁에 있으니 어쩐지 마음에 놓였다. 해원의 부축을 받아 밴으로 자리를 옮겼다.
채현은 촬영장 정리를, 준희는 촬영 일정 조율을 위해서 자리를 비웠다. 해원이 차에 시동을 걸어 히터를 틀었다. 바람 세기를 최대치로 올려놓고 다시 뒷좌석에 올랐다.
류원은 차창에 머리를 대고 힘없이 기대어 있었다. 축축하게 젖어 온몸에 달라붙은 옷도 갈아입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런데 그런 제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해원이 재킷 소매를 당겼다.
류원은 해원이 옷을 벗기기 수월하게 몸을 조금씩 움직여 주었다. 젖은 재킷을 벗겨 바닥에 내려놓고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해원 씨가 옷 벗겨 주니까 색다른 기분인데.”
“지금 농담이 나오십니까.”
해원은 입술을 깨물고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어 내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안타까워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네 시간 넘게 살수차로 퍼부어 대는 물을 꼼짝없이 맞으며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고 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렇게 아플까 싶었다.
젖은 셔츠를 벗겨 내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냈다. 요란하지 않은 프린팅이 들어간 티셔츠를 류원의 머리 위에 뒤집어 씌웠다. 팔을 하나씩 끼워 넣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류원은 손을 들어 해원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베놈스테먼은 잘 아프지 않아요. 이건 일시적으로…….”
“종알거릴 힘 있으시면 바지나 벗고 이걸로 갈아입으시죠.”
해원은 엄한 얼굴로 말을 쏘아붙였다. 그러자 류원이 입을 다물고 바지를 힘겹게 벗었다. 물에 흠뻑 젖어 있어 벗기가 지랄 같았다. 간신히 옷을 벗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새겨진 양귀비가 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전보다 색이 진해지고 꽃 중앙을 감싼 수술도 풍성해진 느낌이었다. 허벅지에 손을 대자,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반대쪽 허벅지는 차갑기만 했다.
“여기 좀 만져 봐요.”
류원의 몸을 보는 게 민망해서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해원이 고개를 돌리자 하의를 탈의한 채 자신의 허벅지를 매만지고 있는 류원이 보였다.
“이, 일단 속옷부터 좀 입으세요.”
“아…….”
류원은 얌전히 해원이 내미는 속옷을 꿰입었다. 그러는 사이 해원도 류원의 꽃을 주시하고 있었다. 수없이 본 꽃이었다. 그런데 꽃 모양이 좀 변한 거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보기에도 색이 선명해지고 진해진 것 같았다.
“꽃이 뭔지 모르게 달라진 느낌이에요.”
“밴딩 때문에 이런 건가. 열도 좀 나는 거 같은데.”
류원이 해원의 두 손을 잡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렸다. 하나는 꽃이 새겨지지 않는 허벅지 위에 올리고 하나는 꽃이 새겨진 허벅지에 올렸다. 해원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꽃이 새겨진 허벅지가 뜨거웠다.
똑똑-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해원이 얼른 문을 열었다. 준호가 가죽 가방을 손에 들고 차에 올랐다. 하얗게 질린 류원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혀를 찼다. 해원은 얼른 바닥에 아무렇게 벗어 둔 옷가지들을 챙겨 문을 열었다.
“해원 씨는 어디 가요. 해원 씨도 앉아요. 확인해야 하니까.”
“저도요……?”
“밴딩은 뭐 혼자 하나?”
해원이 젖은 옷가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쭈뼛쭈뼛 류원의 곁에 앉았다. 준호가 가방을 열어 주사기 두 개와 약병 두 개를 꺼냈다.
“넌 왜 밴딩했다는 소리를 안 해.”
“…어제 해원 씨 때문에 정신없어서.”
“어제 얼굴 봤을 때 말했으면 바로 조치를 취해 줬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을 해.”
준호의 타박에 류원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준호는 류원의 허벅지부터 살폈다. 휴대폰에 찍어 둔 꽃과 비교하면서 면밀히 관찰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준호가 류원의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해원 씨 나무 냄새가 어때?”
“…진해. 전보다 훨씬 더.”
“해원 씨는?”
“전에는 추상적으로 꽃 냄새라고 짐작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생화의 냄새처럼 진하게 맡아집니다.”
준호는 고개를 끄덕이고 주사기를 약병에 꽂아 넣어 약물을 빨아 당겼다. 약물이 주사기에 가득 차올랐다.
“밴딩은 본딩보다 훨씬 많은 양의 독이 피스틸한테 넘어가. 어쩌면 해원 씨가 어제 잠시 기절을 한 것도 다량의 독이 넘어가면서 일지도 모르지.”
“…하, 그래서 나는 왜 이러는 건데.”
“밴딩을 하고 나면 베놈은 희석 과정을 거쳐. 독의 성분을 바꾸는 거야. 체내에 남은 독이 꽃으로 스며들어서 색과 모양을 바꿔. 그 과정에서 발열이 나는 거야. 어제 미리 주사 한 대 맞았으면 이렇게 비실거리지 않았을 텐데. 쯧.”
준호가 류원의 팔뚝을 당겨 고무줄을 묶고 혈관을 두드렸다. 주사기의 바늘이 혈관으로 밀려 들어갔다.
“다음 주에 연구소로 와. 해원 씨는 셔츠 좀 벗어 봐요. 꽃 모양이 바뀌었으면 주사 안 맞아도 되는데. 안 바뀌었으면 발열 때문에 맞아야 해요.”
해원이 더듬거리며 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셔츠를 벗고 등을 드러내자 나무 냄새가 확 짙어졌다. 류원이 숨을 삼키며 해원의 등을 살폈다.
준호가 손을 뻗어 해원의 등을 쓸었다. 오싹한 기분에 해원이 등을 떨자, 류원이 미간을 찡그렸다. 제 피스틸이 타인의 손을 타는 게 못마땅했다.
“꽃 모양이 아직 그대로네. 오늘 밤에 열이 날 수도 있으니까 해원 씨도 주사 맞는 게 낫겠다.”
준호가 해원의 셔츠를 집어 어깨에 걸쳐 주고 주사기를 집어 들었다. 류원과 마찬가지로 주사기를 혈관에 꽂아 넣었다. 고무줄을 풀어내고 알코올 솜을 팔뚝에 꾹 눌렀다.
“두 사람 다 다음 주에 연구소 와서 검진받도록. 류원이 넌 한숨 자. 자고 일어나면 몸 가뿐할 거다.”
주사기와 알코올 솜 통을 가방에 챙겨 넣고 몸을 일으켰다. 해원이 준호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감사합니다.”
“이건 감기약, 물 많이 맞았다며? 혹시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자기 전에 먹여요.”
준호가 약 봉투를 내밀었다. 해원은 봉투가 비에 젖을세라 얼른 뒷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류원이 아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별일 아니야. 밴딩을 하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반응이니까 신경 쓸 거 없어요. 주사도 맞았고 이제 또 쌩쌩해질 거니까 그렇게 어두운 표정 할 거 없다고.”
“…예, 감사합니다.”
“그래도 다행이네, 두 사람 밴딩까지 하고. 이제 결혼할 일만 남은 건가?”
결혼이라는 말에 해원이 손바닥을 파닥거렸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밴딩을 했으니 결혼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럼에도 결혼은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강류원의 배우자가 되는 일, 법적으로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 주는 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제 한고비만 넘기면 되겠다.”
“한고비요……?”
“혹시 류원이가 말 안 해 줬어요? 그럼 그냥 흘려들어요.”
“말씀해 주세요. 그 한고비라는 게 뭘 의미하는 겁니까?”
준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다. 류원이 베놈스테먼 연구소의 일을 폭로하면 언론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마구잡이로 기사를 쏟아 낼 것이다. 모르고 있다가 뒤통수 맞는 것처럼 알게 되는 것보다 대충이라도 알고 있으면 좀 낫겠지 싶었다.
“곧 류원이가 베놈스테먼 연구소 칠 거예요.”
* * *
파주 세트장으로 이동하는 내내 류원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차가 세트장으로 서서히 들어섰다. 차창 너머에는 먼저 도착한 스태프들이 촬영 장비를 옮기고 있었다. 분주한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차가 완전히 멈추고 준희가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바라봤다.
“깨울까요?”
“아니, 조금 더 자게 내버려 둬.”
“그래도 될까요?”
“세팅하고 준비하려면 꽤 걸려. 지금 다 도착했는데 뭐.”
준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고 차에서 내렸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도 서서히 멎어 가고 짙은 먹구름 뒤에 숨어 있던 해가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대본을 말아 쥐고 세트장 안으로 들어가는 감독을 발견하고, 준희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해원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형, 저도 재영이랑 같이 있을게요. 필요하면 전화주세요.”
채현이 룸미러로 뒷좌석을 힐끗거리고 차 문을 열었다. 차문이 두 번이나 여닫혔음에도 류원은 여전히 제 허벅지를 베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해원은 조심스럽게 이마를 짚어 류원의 열을 체크했다. 아까보다 열이 많이 떨어진 게 확실히 느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올렸다. 류원의 꽃 냄새가 차 안에 진동했다. 조금 전 준호에게서 들은 말이 자꾸 신경이 쓰였다.
예전에 준호가 자료를 보여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벌이는 일이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는 건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류원이 나설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위험한 일은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그가 위험해지는 건 싫었다.
“도, 착했어요?”
류원이 부스스한 얼굴로 눈가를 문질렀다. 스스로 이마를 짚어 열을 체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자신의 상태를 점검이라도 하듯 이곳저곳을 움직여 보기도 했다. 준호가 돌팔이는 아닌 듯 그의 말처럼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컨디션이 훨씬 좋아졌다.
“좀 어떠세요?”
“컨디션은 아까보다 나아요. 시간은 얼마나 있어요?”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해원이 차 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제 손을 쥐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작게 웃으며 해원의 손을 쥐고 앞뒤로 흔들었다. 눈동자에 잔뜩 특유의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여기 있어요. 내가 알아볼게. 전화 한 통 해 보면 될 일을 뭘 나가요.”
류원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휴대폰 알림을 확인하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졌다.
“해원 씨.”
“혹시 준호 형한테 무슨 이야기 들었어요?”
“…아, 그게.”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 봐요.”
“별다른 말씀은 아니시고 그냥, 강 배우님께서 베놈스테먼 연구소를 칠 거라고.”
류원은 입술을 달싹였다가 이마를 짚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펄펄 끓던 이마가 이제는 차갑게 느껴졌다.
어차피 해원도 알게 될 일이지만 그래도 미리 알리고 싶지 않았다. 걱정이 많은 사람이니 일이 터지기도 전에 쓸데없는 걱정을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데.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놓고 고개를 들었다.
“위험한 일도 아니고, 내 신변에 문제가 생길…….”
“제가 그렇게 못 미더우세요?”
“…나는 그런 게 아니라, 괜히 해원 씨가 걱정하는 게 싫어서.”
“그럼 저도 저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 강 배우님이 걱정하실 만한 것들은 다 숨겨도 됩니까?”
“절대 안 돼요. 해원 씨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내가 알아야 합니다.”
류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미간을 찡그렸다. 말을 하고 보니 말에 상당한 어폐가 있었다. 해원의 일거수일투족은 다 알고 싶어 아등바등하면서 자기 일은 일언반구조차 하지 않으니 해원이 제게 저런 말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은가.
“제가 피스틸이기 전에 남자고, 성인이라는 점을 꼭 알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해원 씨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저도 충분히 강 배우님을 보호할 힘 정도는 있습니다. 지금도 강 배우님은 제게 보호를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해원은 차분한 얼굴로 조곤조곤 따져 물었다. 류원이 걱정하는 부분은 충분히 알겠으나 두 사람은 서로 원해서 밴딩까지 한 사이였다. 그런데 강류원의 일을 본인이 아닌 타인의 입에서 듣는 게 꽤 불쾌하고 못마땅했다. 류원은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채현이 촬영에 들어가야 한다고 알려 올 때까지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손목시계를 한번 힐끗거린 류원이 차창을 내리고 ‘5분만’이라고 말하고 해원의 손을 움켜쥐었다.
“암묵적으로 쉬쉬거려 온 일이에요. 나 역시 이 일을 터뜨리는 게 사실은 부담스러워요. 그들은 가진 힘과 권력으로 베놈스테먼을 억압하고 멋대로 휘두르려고 하고 있어요. 그게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고.”
“…….”
“고인 물은 썩어서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나는 그 고인 물에 발을 담그고 싶지 않아요. 퍼낼 수 있다면 퍼내서 깨끗한 물로 채워 넣어야겠죠.”
“…그래도 강 배우님께서 직접 나서는 건 위험해 보입니다.”
“그쪽에서 협조적으로 나와 준다면 나 역시 조용히 이 일을 묻고 넘어갈 생각입니다. 내가 원하는 건 베놈스테먼의 처우 개선이에요.”
류원은 해원의 어깨를 붙잡아 품으로 끌어당겼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처럼 짙은 나무 냄새가 코끝을 적셨다. 손바닥으로 제 꽃이 새겨져 있을 법한 자리를 감쌌다.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그러나 아무 일도 없길 바라는 류원의 마음과 달리, 다음 날 아침 포털사이트에는 류원의 열애에 관한 악의적인 기사가 보도되었다. 수십 장의 파파라치 컷과 함께.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촬영장은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오죽하면 감독이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내용 수정을 요청할 정도였다. 야외에서의 촬영은 거의 불가능한 수준으로 보였다.
류원은 차 안에서 대기하며 기사를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열애설의 흐름이 이상했다. 포커스가 류원이 아니라 열애 상대인 해원에게 맞춰져 있었다. 아주 빠른 속도로 해원의 신상이 떠올랐고 그가 불법 시술을 받아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 역시 빠르게 번졌다.
스타온엔터테인먼트는 빗발치는 전화로 업무 마비에 시달렸고, 준희는 발 빠르게 류원의 열애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그리고 악의적인 댓글과 루머에는 강경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 역시 확실히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성 댓글과 저격은 멈추지 않았다.
류원의 팬들은 강류원 팬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열애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생식이 불가능한 피스틸과 베놈스테먼의 열애에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고 있었다.
“최초 보도한 기자는 연예부가 아니라 사회부 소속이야. 넌 파파라치 붙었다는 거 눈치 못 챘어?”
“어, 전혀.”
“후, 미치겠다. 드라마는 야외 촬영은 다 빼고 세트 촬영으로 돌린다니까 그렇게 알고 있고.”
준희는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제일 급한 건 급속도로 퍼진 해원의 신상이었다. 해원의 학교 친구였다는 놈까지 나서서 해원이 어릴 때부터 음침했다는 말 따위로 음해하고 있었다. 이 어린놈의 새끼가 고소장의 고소한 맛을 모르고 있었다.
이를 으드득- 갈며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먼저 법무팀으로 연결해 팬들이 보낸 PDF검토부터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그 다음은 기획실이었다.
일단 기획 1팀과 2팀을 인터넷 대응팀으로 꾸리고 전방위로 기사에 댓글을 달도록 지시했다. 회사 아이피나 직원의 집 아이피가 아닌 회사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공용 아이피나 피시방 아이피를 이용해서 옹호하는 댓글을 달도록 지시했다.
소위 말해 물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제부터는 심리전이었다. 어떤 놈이 더 심리전을 잘하느냐에 따라 물길이 달라질 것이다. 그동안 술 사 주고 밥 사 주고 하며 친분을 쌓아 둔 기자들에게도 전화를 걸어 옹호 기사를 부탁했다.
류원은 공허한 눈으로 차창 밖에 모여든 기자들을 바라봤다. 저마다 손에 마이크와 카메라를 든 채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게 마치 칼과 총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수십의 사람이 제게 칼과 총을 겨누고 달려들 것 같았다. 류원이 소리 없이 웃었다.
“나 계약 기간 얼마나 남았지?”
“…그건 갑자기 왜.”
준희가 전화번호부에서 기자 이름을 찾아내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바빠 죽겠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계약 기간을 묻나 싶었다.
“위약금 물테니까 계약 조기 종료하자.”
“무슨 개소리야. 너 지금 이 상황에서 회사까지 없으면 너 정말 치여 죽어 알아?”
“이거 베놈스테먼 연구소랑 분명히 연관 있어. 매니저나 스태프와 연애를 하는 사람치고 밝혀진 꼬라지를 본 적이 없어. 장진명이 3년째 매니저랑 연애 중인데 밝혀지기는커녕 라이브 방송에 같이 출연하고 그래. 팬들도 눈치는 까고 있지만, 암묵적으로 쉬쉬거려 주는 느낌이지.”
준희는 류원이 하려는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회사 관계자도 잘 모르는 게 스태프와 연예인의 연애였다. 그들이 서로의 집을 방문해도 의심을 하기에는 좀 무리수가 있었다.
류원의 집에 해원이 머무는 게 이상하다고 하지만 그건 매니저이기 때문에 충분히 덮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걸 집요하게 파고들어 언론 보도까지 했다는 건 어느 정도 관계를 짐작한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회사 주가 떨어질 거야. 지금도 소폭 하락세고.”
“헛소리 하지 마. 너랑 계약 해지했다고 하면 주가 내려가는 수준이 아니라 폭락할 테니까. 그냥 있어. 지금 우리도 시선 돌릴 만한 이슈 있나 찾고 있으니까 조만간 잠잠해질 거다. 하루 이틀 이 장사 하냐. 걱정하지 마.”
“앞으로 일도 스타온이 감당하기에는 몸집이 너무 커.”
“누구 덕에 10년 넘게 대형기획사 명성 얻으며 버틴 회사다.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1년 연장 계약서에 사인할 준비나 해. 그게 회사 살려 주는 거니까.”
준희는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기사 잘 좀 부탁한다고 굽실거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류원은 쓰게 웃었다. 속이 답답해서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 * *
“컷!”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단체 사진 촬영하겠습니다. 다들 모여 주세요.”
스태프들이 세트장을 돌아다니며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었다. 드디어 <수상한 커플> 드라마 촬영이 모두 끝났다. 준희는 세트장 곳곳을 누비며 스태프들에게 고가의 화장품 세트를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넌지시 SNS에 홍보도 부탁했다.
류원은 세트장 소파에 기대어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하루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저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종방연 올 거지?”
“…가야지.”
“그동안 반가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이하동문이다.”
하영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류원은 젖힌 몸을 일으키고 손을 맞잡았다. 노멀이 아니고서야 굳이 성별을 나누진 않았다. 스테먼과 피스틸로만 나누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영 역시 여자보다는 스테먼이었다. 붉은 장미를 고유의 꽃으로 가진 스테먼.
“근데 너 정선우 감독 신작 들어올 건 아니지?”
“…왜.”
“거기 여주인공 나거든! 너 들어오지 마.”
“이슈 몰이 하기는 편하겠네.”
류원이 심드렁하게 대꾸를 하고 하나둘씩 모여드는 세트장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기념 촬영은 언제나 그랬듯이 싱겁게 끝났다.
사진 촬영을 마치자, 원로 배우들이 류원을 향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트장 주변이 류원을 취재하겠다고 몰려든 기자들로 엉망이 되어, 각 배우들의 차량이 주차장으로 진입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류원은 원로 배우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개중에는 아이도 낳지 못하는 피스틸과 연애는 해서 뭐할 거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이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차별이었다.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너도나도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미 번식력이라고는 바닥을 보인 것들이. 류원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구기고 세트장 입구로 향했다.
세트장 밖에는 경호원 몇 명이 달려들어 배우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고 있었다. 준희는 기자들을 밀어내면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되자, 준희가 안으로 들어와 류원의 머리 위에 재킷을 뒤집어 씌웠다.
“내가 죄지었어?”
“…제발 둥글게 둥글게 가자. 지구는 둥그니까.”
류원은 사나운 기세로 재킷을 걷어 냈다가 이내 스스로 덮어쓰고 걸음을 옮겼다. 준희와 경호원이 양쪽으로 달라붙어 류원이 다치지 않게 보호했다.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이런저런 소리가 뒤섞여 난리였다.
“비키세요! 다칩니다.”
“불법 시술 사실을 알고 만나셨습니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던데 사실입니까? 강류원 씨 한마디만 해 주세요.”
“아이를 낳으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다니시면서 아이를 좋아하신다던 말은 다 거짓말이십니까.”
갑자기 류원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재킷을 끌어내렸다. 수많은 플래시가 코앞에서 펑펑 터져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한 류원이 환하게 웃으며 기자들을 한번 훑었다. 눈에 익은 기자들도 몇몇 보였다.
“제 연애가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범법자도 아니고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돌아가세요.”
“피스틸의 불법 시술 사실을 알고 만나셨습니까?”
류원의 시선이 목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질문한 기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불쾌함이 잔뜩 묻어났다.
“저와 친한 기자님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불면증이 정말 심각한 편입니다. 일주일에 열 시간밖에 못 잘 때도 있고 그것보다 못할 때도 훨씬 많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제 옆에 있으면 거짓말처럼 잠이 옵니다.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관계, 그 사람과 저는 주파수가 일치하는 피스틸과 스테먼입니다.”
주변이 일순간 소란해졌다. 강류원이 운명의 상대를 만났다고 고백한 것과 진배없었다.
“주파수가 일치하는지 확인은 하셨습니까?”
“정말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겁니까?”
류원은 미묘하게 아이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는 게 못마땅했다. 마치 의도라도 한 것처럼 열애설의 꼬리표로 아이가 따라붙었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게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까? 아이를 낳지 못하는 피스틸과 만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느냔 말입니다.”
“…….”
“아이를 낳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이고, 그렇게 인구 걱정이 되면 나 말고 기자님들이나 하나씩 더 낳아요. 인구에 아주 큰 보탬이 되겠네.”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빈정거리는 말을 흘리고 반쯤 열린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 * *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은 적막감이 짙게 깔려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후, 공기 중에 부유하는 나무 냄새에 깊게 숨을 마셨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류원은 거실 소파에 주저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해원은 잠이 들었는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 놓은 휴대폰이 지잉-, 소리를 내며 진동했다. 발신자는 땅개였다.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휴대폰을 집어 들어 귀로 가져갔다.
“용건만 간단히 해.”
- 하경원 잡아 놨다. 이거 맷집이 없어서 금방 술술 불던데.
“확인은 했고?”
- 어, 확인까지 했다. 혀, 협 뭐라더라.
“협죽도, 연락할 때까지 잘 데리고 있어.”
- 돈은?
“내일 보낼게.”
평소라면 지랄 쌈 싸먹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보내라며 악다구니를 할 놈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얌전히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아마 기사를 본 모양이었다.
류원은 발소리를 죽이고 침실로 다가갔다. 작은 탁자에 올려놓은 조명이 어두운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침대 위에는 해원이 모로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해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낮은 신음이 작게 들렸다. 류원이 놀라 해원을 안아 들려는 찰나, 입술을 비집고 ‘아빠’ 라는 단어가 작게 새어 나왔다. 류원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다만 내색을 하지 않았을 뿐…….
무심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를 치는 일에 신경을 쏟아붓느라 해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오늘 일도 그랬다. 열애 기사가 터지고 해원의 신상이 까발려졌을 때 가장 상처를 많이 받은 건 해원일 텐데, 사태를 수습하느라 그를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안 그래도 아이를 가지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많이 힘들어하는 사람인데.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게 울렸다.
류원은 욕실로 들어가 수건에 물을 적셔 가지고 나왔다. 해원은 잠결에도 낮게 흐느껴 울었다. 아빠를 찾으며 애처로운 울음을 쏟아 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도 좀 하고, 울고 싶으면 펑펑 울기라도 하지. 미련하게…….”
작게 핀잔을 주며 이마를 적신 땀을 조심스럽게 닦아 냈다. 젖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려 주고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조금만, 더 버텨 줘. 정리되면 그때는 정말 잘할게.”
눈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 내고 그의 곁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 * *
오늘은 <수상한 커플> 마지막 회가 방송되는 날이자 종방연이 예정된 날이었다. 전체 스태프와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지막 회를 함께 보는 것으로 드라마의 대미를 장식하기로 했다.
그런데 스타온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 팀장실에는 불청객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준희는 심각한 얼굴로 사무실 소파를 차지한 불청객을 바라봤다. 아직 열애설이 잠잠해지지 않아 골머리를 앓는 중인데 예상치도 못한 방문자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열애설이 보도된 지 이틀이 지났음에도 강류원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였다. 그만큼 강류원이 톱 배우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강류원 씨는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왜 하필 오늘입니까. 바빠 죽겠는데.”
“난 강류원 씨가 만나자고 해서 이 자리까지 온 겁니다.”
류원은 애초부터 이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모든 건 류원의 주치의 자격으로 참석하는 준호가 알아서 하기로 미리 합의되었다. 준희는 경호팀과 법무팀을 한층 아래에 대기시켜 놓았다. 이미 류원과 입을 맞춘 일이라 대응은 어렵지 않았지만, 짜증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갑자기 사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노크도 없이 벌컥 열린 문으로 일제히 시선이 쏠렸다. 하지만 이내 시선이 흩어졌다. 그들이 오매불망 기다리는 강류원이 아니니 당연한 결과였다. 준호가 한 손에 재킷을 움켜쥐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준,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준호는 버럭 화를 내려다가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을 알아보고 얼른 인사를 건넸다. 중앙에 앉은 남자가 몸을 일으키고 준호와 악수를 했다. 맞잡은 손에서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준호의 학교 선배인 하경민은 베놈스테먼 연구소 소속 특수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오랜만이네.”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류원 씨 주치의 자격으로 온 건가?”
“네, 그렇습니다.”
깍듯하게 존대를 하며 준호는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 긴장감에 입술이 말랐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다. 하경민은 워낙 학교 다닐 때부터 유명했던 인사였다. 차갑고 냉철하고 거기에 베놈스테먼 연구소장의 아들로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다.
하경민이 베놈스테먼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한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마주칠 줄은 몰랐다.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선배가 직접 현장에도 다 오시고 별일이네요.”
“비꼬는 건가?”
“아니요, 신기해서 그럽니다.”
“강류원 씨는?”
“아마 류원이 안 올 겁니다. 용건은 주치의인 저랑 이야기 하시죠. 류원이 몸 상태는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사실 용건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프로그램 대상자인 류원을 설득… 아니, 강제하기 위해서일 테니까. 준호는 타이를 느슨하게 당기고 경민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하경민은 못마땅한 얼굴로 손목시계를 힐끗거리고 옆에 앉은 연구원에게서 가방을 넘겨받았다. 이미 시간을 많이 허비해 버려서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기밀문서라도 되는 양 두꺼운 하드케이스의 번호를 맞추고 가방을 열었다. 하경민은 안경을 밀어 올리고 서류 한 장을 준호에게 내밀었다.
“강류원 씨가 처음 베놈스테먼으로 각성했을 때 작성했던 서류야. 한번 확인해 봐. 이 종이 한 장이면 상황은 충분히 설명될 것 같은데.”
준호가 서류를 넘겨받아 눈으로 훑었다. 일반적인 각서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은 경악스럽기 짝이 없었다. 내용을 읽어 내려갈수록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베놈스테먼은 국가가 원할시 이유 불문하고 응해야 하며, 그 조건이나 요구는 상황에 따라 비인간적인 행위일 수도 있다. 연구소는 그에 응당하는 대가를 지급한다.]
준호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막 각성통이 가라앉은 열여덟 살짜리 소년을 데려다가 부모의 동의도 없이 이따위 각서를 받았다고? 아주 기가 막혔다. 이제야 베놈스테먼 연구소가 뭘 믿고 이렇게 뻔뻔하게 구는지, 그 의문이 제대로 풀렸다.
이따위 말도 안 되는 각서 따위를 손에 쥐고 국가기관이 개입해 나서면 한낱 개인이 어떤 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말 그대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준호는 은밀히 준희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준희는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고 내선 버튼을 눌렀다. 삐익, 소리와 동시에 사무실 문이 열렸다. 검은색 슈트를 차려입은 경호팀 대여섯과 법무팀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혼란한 틈을 타 연구소 직원이 준호의 손에서 각서를 낚아채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경민은 재빨리 가방을 닫고 비밀번호를 돌렸다. 가방을 신줏단지처럼 안고 있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그는 심히 불쾌하다는 얼굴로 준호를 바라봤다.
“무슨 짓이야!”
“서류는 제가 아니라 변호사가 검토하는 게 더 정확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강류원 씨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한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연예인이라서요. 이쪽에서도 감당해야 할 부분은 감당하겠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 각서 이리 주세요.”
“뭐하자는 거야. 베놈스테먼 연구소 문서는 외부 유출 안 된다는 거 몰라?”
“저 같은 의사 나부랭이가 뭘 알겠습니까. 서류 들고 오신 거 보면 법적으로 뭘 해 보시겠다는 거 같은데. 검토할 수 있게 자료부터 주시죠.”
베놈스테먼 연구소는 국가 최상위 기관이면서도 굉장히 폐쇄적이었다. 내부 문건이 외부로 유출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언론도 함부로 베놈스테먼 연구소를 언급할 수도 없었다. 그 덕분에 연구소 직원 역시 뭐라도 되는 양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무례하군.”
“무례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베놈스테먼 연구소를 상대로 무례를 저지를 수가 있겠습니까? 전 그냥 강류원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는 방어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베놈스테먼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이지 않습니까.”
준호는 재킷을 집어 안주머니에서 우편물을 꺼내 법무팀장에게 내밀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 직인이 찍힌 봉투를 바라보는 경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류원이 받은 베놈스테먼 연구소 출석 독촉장입니다. 이게 과연 법적 효력이 있는지 좀 확인해 주시죠.”
“이준호!!”
경민은 벌떡 몸을 일으키고 법무팀장 손에 들린 우편물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온 힘을 다해 종이를 박박 찢어 허공에 날렸다. 폐쇄적인 집단인 만큼 문서 하나에도 바들바들 떠는 꼴이 볼만했다.
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종이봉투를 꺼내 흔들었다. 이번에도 경민이 우편물을 낚아채고 찢으려고 폼을 잡았다.
“선배, 그거 강류원 개인이 받은 우편물입니다. 이리 주시죠?”
준호는 가방을 열어 몇 개의 봉투를 꺼내 흔들었다. 경민은 호흡을 가다듬고 나직이 속삭였다.
“강류원 씨한테 똑똑히 전해, 다음 주까지 연구소로 출석하지 않으면 강제로 연행하겠다고.”
“강제로 연행한다는 게 민주주의 국가에서 가능한 이야깁니까? 언제부터 이 나라에서 ‘강제’라는 말이 자연스러웠습니까?”
경민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준호가 강류원의 주치의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학교 다닐 때부터 아가리파이터로 명성이 자자했던 놈이었다.
경계가 극에 달해 어이없이 허점을 보이고 말았다. 이준호의 페이스에 말려들었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아직 본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이 가방에 든 서류 강류원 씨가 직접 작성한 서류고 명백한 법적 효력이 있는.”
갑자기 문이 열리며 검은색 슈트에 커다란 선글라스를 쓴 류원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준희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류원의 앞을 막아섰다.
“너 왜 여기 있어!”
“숍 갔다가 나왔는데 시간이 좀 많이 남잖아. 그래서 시간이나 좀 때울까 하고 왔지.”
류원이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준호가 회사로 출발하기 전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려 왔다. 경민의 뒤쪽에 서서 그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짚었다.
“그 서류 내가 내 정신이 아닐 때 작성된 거잖습니까. 그리고 그 서류 작성할 때 나는 미성년자였습니다.”
“미성년자이면서 고아였죠. 법적 보호자가 없는 상태. 강류원 씨가 각성통을 겪을 때 어머니께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지 않으셨습니까?”
류원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소파를 크게 돌아 준호의 곁에 앉았다. 그의 말처럼 류원이 각성통에 괴로워할 당시, 어머니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매고 계셨다. 그리고 류원이 독을 삼키고 상태가 호전되어 갈 무렵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다.
“그래, 말 한번 잘하셨네. 내가 각성이 끝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 당신들이 나를 베놈스테먼 연구소로 강제로 데려갔지.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건 연구소의 방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베놈스테먼으로 각성했으면 응당 거쳐야 하는 절차 같은 거죠.”
“하, 절차. 그래서 열여덟 살짜리 애를 발가벗겨 생식 능력을 검사한답시고 정액을 쥐어짰나 봅니다.”
내부가 술렁거렸다. 적나라하게 베놈스테먼 연구소에 관해 듣는 건 모두가 처음일 테니 그 반응은 당연했다. 하경민이 당황한 듯 주위를 둘러보고 얼른 가방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류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준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근데 저거 하경민 아니야?”
“맞아. 나도 하경민이 현장에 직접 나올 줄 몰랐어.”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준호와 마주 보며 실없이 웃었다. 말단 연구원이나 보내서 일을 들쑤실 줄 알았더니 특수 연구원이자 소장 아들이 직접 올 줄이야. 류원은 아까보다 더 거만한 자세로 다리를 꼬고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다음에, 다시.”
“앉으시죠.”
“다음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오늘은 보는 눈이 많군요.”
하경민과 연구소 직원들이 몸을 움직이자 경호팀이 문 앞을 봉쇄했다. 연구소 직원과 경호팀 간의 작게 실랑이가 벌어졌다. 하경민이 당장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준희가 씩 웃었다.
“내 사무실에는 그런 게 있어요. 들어올 때는 자유롭게 들어와도 나갈 때는 절대로 쉽게 못 나갑니다. 그게 기자든, 내 직원이든, 쥐새끼든, 불청객이든.”
“당장 비켜! 이거 명백한 불법 감금이야!”
“아이고, 무서워라. 불법적인 짓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위대한 베놈스테먼 연구소 직원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나?”
준희가 한껏 말을 비꼬며 빈정거렸다. 경민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지금껏 베놈스테먼 연구소의 직원을 이렇게 대접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는 국가 최상위 기관이었다. 경민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거만하게 앉아 있는 강류원의 반반한 낯짝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경민은 휴대폰을 꺼내 단축 번호를 꾹 눌렀다. 막 통화가 연결되려는 찰나, 류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CCTV는 잘 돌아가고 있어?”
“초고화질로 바꿨더니 화질이 아주 기가 막히더라.”
준희는 과장된 말투와 몸짓으로 책상 위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테이블 앞에 놓인 커다란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화면에는 지금 상황이 고스란히 보였다. 류원이 보란 듯이 손을 번쩍 들어 카메라를 향해 흔들었다.
경민은 입술을 깨물고 CCTV가 있을 법한 자리를 노려봤다. 그리고 지금까지 오간 대화를 천천히 되짚었다. 언론에 공개되어서 문제가 될 법한 이야기가… 젠장, 분명 존재했다. 낮은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상황파악 되셨으면 앉으세요.”
“…….”
“협조할 마음이 없어 보이네. 형 라이브 방송 준비하라고 연락해. 타이틀은 강류원이 직접 폭로하는 베놈스테먼 연구소의 실체라고.”
류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경민이 대치 중인 연구소 직원들에게 앉으라고 짧게 말하고 자신 역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경민은 처음부터 강류원을 대상자로 선정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생식이 가능한 베놈스테먼은 한정적이었고 연구소는 단 한 명의 베놈스테먼에게라도 정자를 기증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일단 CCTV부터 끄고 이야기합시다.”
류원은 몸을 일으켜 시계로 위장해 놓은 CCTV를 꺼내 발로 짓밟았다. 퍽,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 화면 역시 까맣게 물들었다. 경민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걸 말하기 전에, 최규진 감독과 베놈스테먼 연구소의 은밀한 거래부터 이야기해 볼까 하는데.”
“뭐, 뭐라고?!”
내부에서 은밀히 준비해 들어간 작전이었다. 뭐, 결과적으로는 최 감독이 발을 빼면서 망해 버린 일이지만, 그래도 이걸 류원이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낱 연예인 따위가… 기가 막혔다. 헛숨을 내쉬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당신들 최 감독 아들이 안티스테먼이라는 걸 알고 일부러 접근한 거 맞지?”
“…….”
“그의 아들이 해외로 도주한 것도, 그걸 무마해 주는 조건으로 나를 낚시질한 것도, 그것도 모자라 내 연인에게까지 미끼를 던진 것도. 그리고.”
류원은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봉투 겉면에는 미국 스테먼 연구소 직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경민은 저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가 손톱을 질근질근 씹었다.
“그쪽이 노멀이 아니라 베놈스테먼이라는것도 알고 있습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노, 노멀이야.”
하경민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문질렀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는 연구원들을 향해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베놈스테먼과 피스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노멀이라, 이게 말이 되는 겁니까? 그럼 베놈스테먼 연구소에서 미친놈처럼 내 정액을 받아 갈 이유가 전혀 없는데?”
류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빨리 실토를 하라는 듯이 은근한 압박을 곁들였다. 이미 하경민의 혈액 샘플을 넘겨받아 미국 연구소에서 그가 베놈스테먼이라는 확답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하경민의 동생인, 하경원은 아예 땅개가 잡아 놓고 있었다.
약 10분 후쯤이면 땅개가 하경원을 데리고 나타날 것이다.
“베놈스테먼과 피스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둘 다 노멀이라니. 이거 당신들이 말한 확률에 반하는 짓이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
“당신 아버지가 베놈스테먼이 아닐 리는 없을 테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 걸까요. 정말 재밌네.”
“화, 확률적으로 베놈스테먼이 태어나지 않는 경우, 경우도 있어!”
“형제가 둘 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건 학회에 보고해서 연구 자료로 사용해도 될 사안인데?”
준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첨언했다. 베놈스테먼과 피스틸사이에서 형제가 모두 노멀로 태어나는 경우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보고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확률적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언젠가 하경민에 관한 이슈가 포털사이트에 뜬 적이 있었다. 그가 왜 베놈스테먼이 아닐까에 대한 다큐멘터리 비슷한 영상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유명 배우의 불륜 사실이 터졌다. 기사는 조용히 묻혔고 지금은 그 영상을 찾아보고 싶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게 권력의 힘이었다. 언론까지도 암묵적으로 찍어 누르기를 시도하는 집단이었다.
입술을 혀로 핥으며 하경민의 표정을 살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연구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언젠가 준호가 서프라이즈라며 넘겨준 자료에는 하경원과 하경민 형제의 진료 기록이 담겨 있었다. 노멀이라고 신고를 해 둔 것과 달리 그들은 스테먼 검사를 주기적으로 받고 있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럼 이 자리에서 그쪽이 베놈스테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세요. 그쪽이 노멀이라면 허벅지에 꽃이 없겠지. 안 그래요?”
“…….”
“그것도 싫다면 다들 보는 앞에서 정액을 쥐어짜 피스틸 몸속에 넣어 볼까요? 베놈스테먼 연구소는 그런 거 좋아하잖아.”
류원은 쉴 새 없이 그를 몰아쳤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신사적으로 대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틀 동안 열애설을 역추적하면서 얻은 결과들을 확인하며 그런 생각을 싹 지워 버렸다.
열애설을 최초 보도한 곳은 데일리 일보라는 파파라치 전문 업체였다. 그런데 이 업체는 정치 거물급 인사들의 파파라치를 주로 다루는 곳이었다.
류원의 열애설은 연예계 파파라치를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음에도 사회부 기자 이름을 달고 보도되었다. 이것부터 수상했다. 그런데 파고 들어갈수록 재밌는 게 발견되었다. 열애설을 보도한 강서정 기자가 몇 년째 파헤치는 인물은 베놈스테먼 연구소장인 하재운이었다.
“원하는 게 뭐야.”
“겉으로는 베놈스테먼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서 설립되었다고 하지만 그 속은 그게 아니잖습니까. 인권을 유린하고 권리를 빼앗는 집단, 그게 베놈스테먼 연구소 아닙니까?”
“…….”
“난 그 더러운 집단이 영원히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류원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혀로 필터를 느리게 핥았다. 나른하지만 날카로운 눈으로 경민을 주시하고 있었다. 경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류원은 진심으로 베놈스테먼 연구소가 사라지길 바라고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베놈스테먼이라고는 절대로 실토할 수는 없었다.
“내가, 내가 베놈인지 아닌지가 왜 중요해!!”
“왜냐고? 그쪽은 이 더러운 각서 따위 안 썼을 테니까. 열일곱, 열여덟 먹은 아이들이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을 때 그쪽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이따위 종이에 사인하지 않았잖아. 게다가 무엇보다도 당신이 그렇게 바라던 스테먼 증가에 기여 하는 일인데 이게 안 중요합니까?”
경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응 매뉴얼을 숙지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깨끗한 백지 같았다. 그저 지금 이 상황이 짜증스럽고 기가 막혔다.
“어차피, 당신 피스틸은 아이도 가질 수 없다며! 그럼 그 쓸모없는 정자, 사회에 좀 쓰라는데 뭐가 문제야!! 어차피 하수구로 흘러들어 갈 거 인구 증가에 이바지하라고! 그게 뭐가 잘못된 거냐고!!”
“…….”
“씨발, 내가 나 잘 먹고 잘 살자고 이래?! 이건 이 나라를 위한 거라고.”
이준호가 베놈스테먼 연구소에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그의 피스틸은 분명 생식이 가능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저런 루트로 추적하다 보니 그의 피스틸이 불법 시술을 받은 정황을 포착했다. 교묘하게 서류를 조작해 보고한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아이도 낳지 못하는 피스틸에게 베놈스테먼의 정자는 필요 없을 테니 더 회유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기사도 그 부분을 부각시킨 건데…….
“애국자 나셨네. 그리고 누가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까?”
“…뭐?”
준호의 말에 류원이 먼저 반응했다. 눈을 크게 뜨며 준호를 바라봤다.
“각성하고 10년이 지난 후에 자궁이 자리 잡는 케이스가 꽤 있었는데 그건 자료로 보신 적 없습니까?”
“…그건 불법 시술을 받지 않았을 경우야! 이미 자궁이 망가졌다고 문해원을 시술했던 의사가 증언했어.”
“그건 두고 볼 문제 아니겠습니까? 불법 시술로 밑동이 까맣게 썩어 가던 피스틸의 나무가 재생되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준호는 휴대폰 화면에 사진을 띄워 경민의 앞으로 밀었다.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준호를 바라봤다.
“강류원은 불면증으로 꽤 오래 고생을 해 왔습니다. 제 연구소로 들어온 수면제의 절반 이상은 류원이가 다 가져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사람이 지금은 수면제 없이 잠을 잘 자고 밥도 잘 먹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주파수가 맞는 피스틸을 만난 후부터 일어난 일입니다. 주파수라는 거, 그거 우습게 볼 게 아니더라고.”
준호가 산뜻하게 웃었다.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지 않는 그런 일들이 강류원과 문해원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솔직히 이 상태라면 아이까지도 기대해 볼만했다.
삐익-!
갑자기 내선이 울렸다. 준희가 버튼을 눌러 연결했다.
“무슨 일이죠?”
- 여기에 어떤 사람이, 꺅!
우당탕,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문이 열렸다. 땅개가 이에 이쑤시개를 꽂아 넣고 후비적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발에 채며 한 남자가 사무실로 굴러 들어왔다. 드로즈 한 장 덜렁 입은 채, 벌벌 떠는 모습이 아주 가엾기 짝이 없었다.
“이게, 이게!”
허망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하경민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 하경원. 경원아!”
바닥에 널브러진 경원의 앞으로 다가갔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경민은 류원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씨발놈아. 너도 이렇게 만들어 주랴?”
“당장 경찰 불러. 씨발놈아! 이거 폭행이야! 폭행 사주한 놈도…….”
땅개가 몸을 낮춰 앉아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 파며 이쑤시개를 퉤 하고 뱉었다. 이쑤시개 경민의 얼굴에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땅개는 짜증스럽다는 얼굴로 경민의 이마를 툭툭 밀었다.
머리가 뒤로 밀리는 게 기분이 나쁜지 경민이 작게 인상을 썼다. 그러나 철썩, 차진 소리와 함께 경민의 고개가 돌아갔다. 류원이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땅개의 손이 경민의 뺨에 날아들었다.
“거참, 씨발 목청 한번 더럽게 좋네. 작게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고 이 새끼야. 이 방에 귀먹은 새끼 있어? 뭐 잘났다고 떽떽거려. 시끄럽게.”
“…….”
“고매하신 연구원 양반, 저기 앉아 있는 새끼는 잃은 게 많은 새낀데 나는 잃을 게 좆도 없어요. 씨발, 마음만 먹으면 너 하나쯤 인천 앞바다에 공구리쳐서 수장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야. 사람 봐 가면서 빽빽거려.”
거나하게 퍼부어지는 욕설에 류원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작게 흥얼거렸다. 언젠가 해원이 흥얼거렸던 그 멜로디였다. 땅개까지 밀고 들어오니 쪽수가 엄청났다.
“쪽수로 밀어도 이기겠네.”
작게 중얼거리며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강류원! 당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베놈스테먼이라고 인정하기가 그렇게 싫습니까? 그런데 어쩌나 이 친구가 돈만 주면 다하는 스타일이라.”
류원이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땅개가 눈알을 번들거리며 경민의 머리채를 휘감아 뒤로 젖혔다.
“뭘 어떻게 해 줄까?”
“바지 벗겨 봐.”
“내가 또 벗기는 건 도가 텄어요.”
땅개가 낄낄거리고는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붙잡고 경민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댔다. 경민이 비명을 질렀다.
“마, 말할게. 말한다고!!”
“그건 아까, 기회를 줄 때 말했어야지, 씹새야.”
함께 온 연구원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지가 벗겨지길 기다렸다. 방 안의 모든 시선이 하경민의 하체로 모여들었다. 몸을 감싼 천이 서서히 아래로 끌어내려 지고 그의 허벅지를 감싼 붕대가 보였다. 하, 누군가의 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에이 씨발, 귀찮게 하네.”
땅개가 고정핀을 제거하고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붕대가 풀어지고 그의 허벅지에 새겨진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다. 경민은 발버둥을 치며 거칠게 저항했지만, 땅개에게 발목을 짓밟히고 나서는 잠잠해졌다. 류원이 몸을 일으켜 그의 허벅지를 살폈다.
“맞네, 독초.”
“이게 독초라고?”
“복수초. 노란 복수초.”
이로써 하경원과 경민은 베놈스테먼임이 밝혀졌다. 탄식 같은 숨이 터져 나왔다. 그 숨은 아주 의외의 곳에서 흘러나왔다. 바로 경민과 함께 온 연구원들의 입에서였다. 개중의 몇 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류원은 준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슬슬 자리를 파할 예정이었다.
“제가 다 말하겠습니다.”
경민을 보좌하던 남자가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는 차분한 얼굴로 비밀번호를 맞추고 가방을 열었다. 그러고는 가방을 돌려 류원의 앞쪽으로 밀었다.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나는 종이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이 미친 새끼야 너 그게 뭔지 알고!!”
경민이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가방을 낚아채려고 허우적거리는 손이 간신히 가방에 닿았지만 땅개가 멱살을 들어 올려 바닥에 내던졌다. 우당탕,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요란했다.
“입 닥치고 짜져 있어라. 뒤지기 싫으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하경민의 목을 땅개가 발로 지그시 밟았다. 계속하라는 듯이 허공에 손을 휘적였다.
“강류원 씨를 비롯한 현재 생식이 가능한 베놈스테먼들의 각서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걸로 협박을 했고, 그들에게서 정액을 체취했습니다. 지금도 연구소에는 몇 명의 베놈스테먼이 갇혀 있습니다.”
류원은 제일 위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고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15년 만에 자신이 사인한 각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슬픔에 갇혀 정신이 없는 소년에게 각서에 사인할 것을 종용했다.
내용 한 줄 읽지도 못한 채 아무렇게나 휘갈긴 제 사인이 하단에 남아 있었다. 각서는 준희 손으로 넘어갔다. 준희는 책상에 앉아 노트북 전원을 켜고 문서창을 열었다.
“여기 있는 연구원 모두가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가난해서 하루하루 먹고사는 게 버거운 사람들의 자식들이죠. 그런데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갑자기 연구소에서 입사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이 국가기관에 들어가는 게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니까요. 마냥 기뻤습니다.”
“맞아요. 저 역시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학교를 졸업했고 연구소에서 입사제의를 받고 입사했습니다.”
한사람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안에 있던 모든 연구원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입 다물어! 미쳤어? 베놈스테먼 연구소는 나라를 위해서 일한 것밖에 없어! 스테먼과 피스틸의 균형을 맞춘 거라고!!”
갑자기 날아든 경민의 벼락같은 고함에 다들 어깨를 움츠러뜨렸다. 땅개는 경민의 턱을 거세게 차올리고 류원의 앞 포켓에 꽂힌 행커치프를 뽑아 그의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목구멍을 울리며 발악을 하는 하경민을 무시하고 류원이 입을 열었다.
“괜찮으니까 계속해 보세요.”
“…일주일에 몇 명씩 어린 학생들이 막 각성을 마치고 잡혀 옵니다. 저는 그들을 협박해서 각서를 받아 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가끔 그 일이 너무 끔찍해서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이곳이 아니면 저에게 이렇게 높은 보수를 주는 곳이 없습니다.”
류원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길게 빨았다. 속이 헛헛해서 이거라도 채워 넣어야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계획에도 없었고 예상범주에도 속하지 않은 일이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는 악질이었다. 일부러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졸업한 사람을 연구원으로 삼아 자기들 입맛대로 부리고 조종했다. 가난한 자들에게 거액의 월급을 주면서…….
“…그리고 이건 소문이긴 한데, 연구소를 그만둔 직원들이 하나같이 다 실종이 되었어요. 아닌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퇴사한 연구원 하나도 실종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류원이 땅개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땅개가 발언한 연구원의 곁으로 다가가 질문을 하고 무언가를 받아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베놈스테먼에 대한 처우 개선 따위나 요구하려고 했는데 이건 파면 팔수록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탕이었다.
법무팀장이 연구원들 앞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촬영 동의서라고 시작하는 문서였다. 연구원 하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류원을 바라봤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지만 지금 이방에는 수십 대의 카메라가 숨겨져 있습니다. 발언하신 부분도 편집 영상에 들어가야 할 것 같으니 서류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불편하시면 작성하지 않으셔도 되니 편하게 생각하세요.”
류원이 다정한 말투로 어르듯 말을 내뱉었다. 연구원들은 잠시 당혹스러운 듯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에게 서류를 검토할 시간을 충분히 주고, 자발적으로 사인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법무팀장이 서류를 거둬들이는 동안 준희는 빳빳한 종이에 출력한 각서를 땅개에게 내밀었다.
“인주를 사 둔다는 게 깜박한 거 있지. 스탬프용밖에 없는데 이걸 어쩌나.”
책상 위에 인주가 버젓이 놓여 있는데. 류원이 작게 실소하며 담배를 비벼 껐다. 강류원이 강제로 사인한 각서 내용을 그대로 베껴서 만든 각서였다.
“베놈스테먼님들 이제 당신들도 사인해야지.”
“열여덟 살 때 못한 생식 능력 테스트도 지금 해 봐야 하는 거 아니야?”
준희가 빈정거리며 킥킥거렸다. 생각보다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의도치 않은 연구소 내부의 일도 알게 되었고, 여러모로 소득이 많았다.
땅개는 바닥에 널브러진 경원의 엉덩이를 걷어차 일으켜 세웠다. 땅개가 데리고 있으면서 얼마나 겁을 줬는지 말을 잘 들었다. 경원의 엄지손가락에 스탬프용 잉크를 묻히고 종이 위에 꾹 눌렀다. 땅개는 허망한 표정을 짓는 경원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씨부랄, 너도 당해 보니까 좆같냐? 아무것도 모르던 그 애들은 얼마나 더 좆같았겠냐. 저기 보이는 연구원들이 니 좆대가리 막 주물러도 찍소리도 하지 마라. 알겠냐?”
“…흐윽, 네.”
경원이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서러워서 우는 것인지 아니면 분해서 우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땅개는 아랑곳하지 않고 베놈스테먼인 그에게서 각서를 받아 냈다. 그리고 이제 남은건 하경민이었다. 준호가 각서를 들고 하경민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선배, 나가시거든 고소하세요. 우리 기자 양반들이 국민의 알 권리를 정말 중요시하거든요. 그러니까 저희가 했던 일 그대로 까발리세요. 저희도 이거 편집해서 내일 당장, 영상부터 올릴 겁니다.”
“…….”
준호가 하경민의 손을 붙잡아 도장을 찍는 동안 류원은 그의 머리꼭지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오랫동안 고인물이 썩어 고약한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그의 앞에 허리를 숙이고 앉았다. 경민의 허망한 눈을 마주하고 피식 웃었다.
“사람들이 국가기관을 상대로 싸운다고 하면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근데 그 싸움의 끝은 청동투구를 쓰고 창을 든 골리앗이 아니라 고작 막대기와 돌멩이를 든 다윗이 이깁니다.”
“…….”
“지금은 개인이 혼자서 낸 작고 미약한 소리일지 모르지만, 이 목소리에 힘을 보태 줄 사람들이 분명히 나타날 겁니다. 세상을 뒤흔들 만큼 큰 목소리가 되어서 그쪽 숨통을 움켜쥐겠죠. 더 나아가서는 베놈스테먼 연구소의 존폐를 두고 논할 겁니다.”
“베놈스테먼 연구소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아! 우리가 나라에 기여한 게 얼만데! 넌 틀렸어!”
“아니요, 정의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 * *
류원은 아침부터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어제 무리해서 마신 술 때문에 속이 좋지 않았다. 입가를 문지르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종방연에는 얼굴만 비춘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후, 집에 들어와 해원의 기분을 풀어 준답시고 흥청망청 술을 마신 게 화근이었다.
드라마도 끝났고 당분간 스케줄도 없을 예정이라 제대로 고삐가 풀려 버렸다. 둘이서 주종을 가리지 않고 신나게 퍼부어 댔다. 소주, 맥주, 양주, 와인… 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해원 역시 침대에 널브러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물을 찾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무, 물 좀…….”
“기다려 봐요.”
류원은 거의 기다시피 걸어가 문 앞에 굴러다니는 생수를 집어 내밀었다. 머리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허겁지겁 물을 마신 해원이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속이 안 좋기는 해원도 마찬가지였다.
“좀 괜찮아요?”
“아니요. 정말 딱 죽을 거 같아요.”
류원은 해원의 팔을 베고 누웠다. 천장이 빙글빙글 눈앞에서 돌았다. 아우 죽겠다. 류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해원의 뱃가죽을 슬슬 문질렀다. 갑자기 류원이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탄탄한 복근을 자랑하던 그의 뱃가죽이 어느새 판판하고 밋밋하게 변해 있었다. 해원도 고개를 들어 자신의 배를 문지르고 피식 웃었다.
몸이 참 정직했다. 며칠 운동을 쉬었다고 이렇게 티가 나나, 작게 중얼거리고 류원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드로즈 한 장 덜렁 걸친 몸이 품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해원은 몸을 모로 굴러 류원을 꽉 껴안았다.
“어제 해원 씨 등에 꽃 안 핀 거 알아요?”
“…강 배우님과 밴딩을 했으니까 당연히 꽃이 안 피겠죠.”
“아주 요망해.”
류원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어젯밤 술에 취한 육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그의 등에는 꽃이 피지 않았다. 다만 등이 뜨겁게 타는 듯한 고통에 쾌감이 뒤섞여 정액을 토해 내는 해원만이 있었다.
이제야 정말 해원과 밴딩을 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이제 그 누구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근데 팀장님한테 전화 안 해 보셔도 돼요?”
“왜요?”
“어젯밤에 통화하셨잖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전화 달라고 막 당부하셨던 거 같은데.”
류원은 해원의 몸을 끌어안고 고개를 저었다. 휴대폰도 다 꺼두고 잠수를 탄 상황이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그냥 아무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준희와 준호가 어련히 알아서 잘해 주겠거니 생각했다.
둘이 끌어안고 침대에서 뒹굴다가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늦은 오후가 되어 간신히 샤워하고 거실로 나왔다. 그사이 속은 많이 가라앉았고 식욕도 돌기 시작했다.
아직 욕실에서는 물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리모컨을 집어 들어 텔레비전 전원을 켰다. 예상대로 세상은 시끄러웠다. 뉴스 시간이 아님에도 속보로 베놈스테먼 연구소 사건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영상은 어젯밤에 올렸을 것이다. 얼추 시간을 계산해 봐도 사건 진행이 조금 빠른 것 같았다.
류원은 휴대폰을 집어 준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루한 통화 연결음이 길게 이어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이씨! 너는 아주 팔자가 폈지? 어!
“속보까지 뜨던데 이거 뭔데.”
- 하경민이 멍청한 짓을 한 덕분에 아주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다.
“무슨 짓을 했길래?”
류원은 어깨와 뺨 사이에 전화기를 끼우고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게 있나 살폈다. 냉장고 안은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고작 두유 몇 개와 해원이 먹는 프로틴바, 냉동실에 있는 닭가슴살이 전부였다. 류원은 괜히 심술이 나서 프로틴바를 모조리 꺼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 하경민이 입장 표명한 거 링크 보내 줄 테니까 한번 봐라. 웬만한 코미디 프로그램 저리 가라야. 아무튼, 그거 역풍 맞아서 지금 국민 청원 들어가고 난리다.
“잘됐네.”
- 아, 그런데 그 연구원들 말이다. 오늘 아침에 사직서 제출하고 기자회견 열었거든. 그거 안타까워서 어쩌나 싶다. 그래서 말인데…….
류원은 별 볼 일 없는 냉장고 문을 닫고 다용도실을 열었다. 시리얼이라도 있으면 씹어 볼까 했더니 그것도 마침 똑 떨어지고 없었다.
“그래서 뭐.”
- 너 허 대표한테 투자 좀 안 할래?
“투자? 무슨 투자.”
- 허 대표가 얼마 전에 인수한 그 뭐냐 특이 식물 연구하는 거 그거, 내가 연구원들 안타까워서 동동거리니까 허 대표가 넌지시 그러더라고. 투자 좀 하면 직원들 더 채용할 의향 있대. 알다시피 나는 박봉이고…….
연구원 대부분이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다들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끔찍해도 연구소를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류원은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처럼 높은 보수는 주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면 괜찮겠다 싶었다.
“허 대표가 원하는 만큼 투자한다고 해.”
- 예스!! 나중에 이거 미담 기사로 내줄게.
“됐어, 그나저나 이거 언제쯤 잠잠해질까?”
- 잠잠 같은 소리하고 있다. 이거 못해도 한 달짜리다. 너는 꼼짝 말고 한 달간 쉬어. 허 대표도 너 한 달간 스케줄 잡지 말고 쉬게 내버려 두라고 했어. 어디 해외 나갈 거면 신고서 작성해 줄 테니까 전화하고.
“응, 계속 수고해.”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희에게서 영상 링크 하나가 날아왔다. 류원은 정수기 아래에 컵을 내려놓고 버튼을 눌렀다. 졸졸졸, 물이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영상을 켰다.
영상을 보는 내내 어이없는 웃음이 피식피식 터져 나왔다. 하경민은 구구절절 자신의 잘못은 아니며, 베놈스테먼임을 밝히지 않은 게 아니라 행정상 착오가 있었다며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나불거렸다. 모든 잘못을 행정기관과 베놈스테먼에게 돌리고 있었다.
아직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마지막으로 현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연구원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상은 마무리되었다.
정수기 아래에 놓인 컵을 집어 들어 목을 축였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자 베놈스테먼 연구소를 옹호하는 댓글과 비난하는 댓글이 뒤섞여 난장판이었다.
류원은 아예 식탁 의자에 앉아 기사 내용을 다 검색해 보기 시작했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관련 기사는 페이지를 셀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을 차지했다. 경제, 사회, 연예면 할 것 없이 메인 기사에는 베놈스테먼 연구소 관련 기사가 올라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파장이 컸다. 갑자기 화면이 통화 화면으로 전환되며 낯선 번호가 떠올랐다. 아… 류원은 짧게 신음하며 통화 거부를 했다. 기사 내용을 훑어보려고 해도 자꾸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결국, 전원 버튼을 끄고 휴대폰을 소파로 던졌다.
사실상 이제 류원이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한낱 개인이 나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딱 여기까지였다. 이제 남겨진 몫은 대중과 관계 기관들이 나서야 할 문제였다.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제 국회의원들이 나서서 피 터지게 싸움을 해 대고, 적폐청산하겠다며 나댈 것이다. 그러다 보면 그들 사이에서 콩고물을 얻어먹는 세력이 존재할 것이고, 그 세력이 기회를 잡아 연구소의 존폐를 논할 것이다. 이건 어느 쪽으로든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는 일이었다.
류원의 공식 입장은 준희가 알아서 척척 기사를 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노트북을 켜서 다시 검색해 볼까 하다가 머리 아픈 일은 좀 접어 두고 싶어 관뒀다.
그 대신 아직 욕실에서 꾸무럭거리는 해원을 찾아 나섰다. 욕실에서는 아직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해원 씨.”
류원은 욕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안에서 해원이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번 쓸어 주고 욕실 안쪽을 힐끗거렸다. 류원이 샤워 가운의 매듭을 슬쩍 풀고 힘주어 문을 열었다.
“으악!”
“같이 좀 씻읍시다.”
“다 씻으셨잖아요. 빨리 나가세요.”
“할 말도 있고 나 어깨가 뭉쳐서 그런가? 목이 뻣뻣하고 아파요. 뜨거운 물에 몸 좀 담그면 괜찮을 거 같은데.”
류원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며 욕조로 다가갔다. 막 욕조로 발을 들이는데 해원이 기겁을 하며 류원의 팔을 붙잡았다.
“무, 물 새로 받아드릴게요. 잠깐만요.”
허리를 숙여 허겁지겁 욕조 안으로 손을 넣고 물을 휘저었다. 통통한 엉덩이가 눈앞에 살랑거렸다. 어젯밤 술기운에 엉덩이를 좀 때렸는지 한쪽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또 그게 묘하게 음심을 자극했다. 입술을 혀로 핥으며 그의 뒤태를 눈으로 실컷 희롱했다. 뜨겁고 음탕한 시선을 느꼈는지 해원이 작은 대야로 엉덩이를 가려 버렸다.
물을 빼내고 새로 물을 받는 동안 류원은 해원과 나란히 욕조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운동을 시작하면서 잠시 담배를 끊었던 해원이 어젯밤 술을 마시면서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다시 운동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끊게 될 거라는 말과 함께.
“준희 형이 나 한 달간 쉬라던데 뭐 하고 싶은 거 없어요?”
“…저 어제 좀 경황이 없어서 말씀 못 드렸는데.”
해원은 담배 연기를 길게 빨았다가 훅 뱉어 내고 머리를 긁적였다. 어제 말을 한다는 게 흥청망청 취해서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사실은.”
“……?”
“저 다음 주부터 액션스쿨 정식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어? 그런 이야기 없었잖아요.”
담배를 빨다 말고 고개를 돌려 해원을 바라봤다. 전혀 전달받은 사항이 없었다. 아직 회사에 사표도 제출하지 않았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좋았던 기분이 축 가라앉았다.
“…그게 갑자기 결정이 된 거라서요. 다음 달에 성학기 감독님 영화 크랭크인 하시는데 저도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아니 스턴트맨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른다면서 벌써 출연 계약까지 했어요? 하, 나 참.”
류원이 유리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 어느 정도 물이 차오른 욕조에 몸을 담갔다. 해원이 하는 일을 말리진 않을 생각이었다. 물론 다치면 마음이 아프고 속상하겠지만, 그것도 그 사람의 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신이 드라마나 영화를 하면서 원치 않는 키스신이나 애정신을 찍는 것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해 보니 그것도 감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아야지. 두 번 사는 것도 아니고 한 번밖에 못사는 인생인데.
그래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작은 일이라도 저와 상의해 주면 좋으련만 해원은 늘 혼자서 무언가를 해결하고 결정했다. 아직은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게 어색해서 그렇다는데, 어쩐지 입안이 쓰다.
“화나셨어요?”
해원이 욕조 안으로 몸을 들이며 다리 사이에 앉았다. 괜히 토라진 척 입술을 삐죽이자 해원이 물을 가르고 가까이 다가왔다.
“주인공의 배역을 맡은 것도 아니고 해 봤자 조폭 1, 2, 3 중 하나일 겁니다. 분량도 많지 않을 것이고 다칠 일도 없을 거예요.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그것 때문에 지금 이러는 게 아니라.”
“그럼 뭐 때문에 그러십니까.”
류원은 제 입으로 말하기가 민망해서 뜸을 들였다. 괜히 속이 좁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머리를 긁적이고 해원을 한번 힐끗거렸다.
“난 해원 씨랑 데이트다운 데이트 한번 못하고 밴딩까지 한 게 마음에 걸린단 말입니다.”
“…저희 신해에도 가고 가끔 새벽에 드라이브도 다녔는데.”
“그래도! 이제 공개 연앤데 낮에 단둘이 거리도 걸어 보고 밥도 같이 먹고. 우리 숨기느라 근사한 식당에서 식사 한 번 못했잖아요.”
저절로 불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생각하니까 속이 좁은 게 아니라 진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주부터 해원이 액션스쿨을 다니면 한 몇 주는 체력을 보강한다는 명목하에 강행군을 할 것이고, 그러면 집에 들어온 후에는 시체가 될 게 뻔했다. 자는 모습이나 보고 다시 새벽같이 나가 버리면 얼굴도 제대로 못 볼게 뻔했다.
“일주일만 더 미루면 안 돼요?”
“…그건 좀 곤란해서. 저만 훈련하는 게 아니고, 또 저는 처음부터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열심히 체력 끌어올려야 합니다.”
“어쩔 수 없죠.”
류원은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고 샤워 가운을 걷어 몸에 걸쳤다. 잠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서른세 살이면서 세 살짜리 아이처럼 투정을 부려 대고 있었다. 담뱃갑을 챙겨서 막 욕실을 나가려는데 류원을 불러 세웠다.
“강 배우님.”
“…왜요.”
“하루나 이틀 정도는 감독님께 말씀드려서 일정을 조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화 푸세요.”
해원을 등지고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속으로는 좋아 죽겠으면서 괜히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문을 열었다.
하루나 이틀 정도 일정을 미룬다고 했으니까 꽉 채운 일주일 정도를 해원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일주일이면 만리장성을 쌓고도 남지. 음흉하게 웃으며 가운의 매듭을 세게 조였다.
* * *
류원과 툭탁거리며 배달 음식으로 한 끼를 때웠다. 해원은 배달 포장지를 정리하는 류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방을 벗어나 거실 바닥에 엎드렸다. 소파에 누우라고 류원이 늘 잔소리를 하지만, 대리석 바닥이 시원해서 좋았다.
바닥에 뺨을 대고 까만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류원이 당분간 휴대폰도 꺼 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두드리고 전원 버튼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감독님께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하고 일정을 미루려면 어쩔 수 없이 전화기를 켜야 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곧 통신사 로고가 뜨면서 배경화면이 떠올랐다. 배경화면은 신해에서 찍은 청량감 넘치는 류원의 사진이었다.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속보 기사 하나가 알림으로 떴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림을 확인했다. 그리고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속보] 베놈스테먼 연구소 파문, 존폐위기
열애설 기사 이후 수많은 악플에 시달리면서 며칠간 포털사이트를 아예 접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몰랐다. 해원은 조용히 휴대폰을 손에 쥐고 욕실로 향했다. 변기통 위에 올라앉아 포털사이트를 터치했다.
실시간 검색어 3위에 류원의 이름이 랭크되어 있었다. 이름을 클릭하자 수많은 기사가 화면에 떠올랐다. 드라마를 끝내고 휴식기에 돌입한 류원의 일상이 담긴 소소한 기사들이 상위를 차지했고 그 아래로는 베놈스테먼 연구소 관련한 기사가 줄이었다.
그중에 영상이 링크된 기사를 클릭했다.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으며 재생 버튼을 클릭했다.
- 그래, 말 한번 잘하셨네. 내가 각성이 끝나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충격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 당신들이 나를 베놈스테먼 연구소로 강제로 데려가서 어떻게 했지?
- …그건 연구소의 방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베놈스테먼으로 각성했으면 응당 거쳐야 하는 절차 같은 거죠.
- 하, 절차. 그래서 열여덟 살짜리 애를 발가벗겨 생식 능력을 검사한답시고 정액을 쥐어짰나 봅니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풀렸다. 퍽, 소리와 함께 휴대폰이 욕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후에도 계속 말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껏 ‘종족 번식’이라는 이름마저도 끔찍한 프로그램의 대상자로 선정되어서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했을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열여덟 살이면 미성년자였다. 만 나이로 따지면 고작 열여섯 살, 열일곱 살인 아이를 데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류원이 이렇게 올바르게 잘 자라 준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해원은 떨어진 휴대폰을 그대로 두고 욕실 문을 열었다. 주방에서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유리컵을 씻는 그의 뒤로 다가가 와락 껴안았다.
류원이 컵을 문지르던 손을 멈추고 작게 웃었다.
“뭐야, 왜 또 이렇게 귀엽게 구는 건데.”
“…….”
“나 컵만 씻어 놓고 갈게요. 거실에 가 있어요.”
“…….”
“해원 씨?”
류원이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수도꼭지 손잡이를 들어 올려 손을 씻었다. 손을 탈탈 털고 허리에 둘린 손을 풀어 앞으로 당겼다. 얼굴을 마주하자 온몸의 피가 차게 식는 기분이었다. 해원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강 배우님도 저한테 다 말씀 안 해 주시잖아요.”
“제발, 나 이럴 때마다 미치겠어. 왜 우는데. 알아듣게 좀…….”
“…영상 봤단 말이야!!”
해원은 류원의 품 안으로 푹 안겨 들어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냥 눈물이 쏟아졌다. 류원이 느꼈을 치욕이 분노가 되어 제 속을 파먹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헛헛한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큰 세상 안에 존재하는 작은 세상이 무너지고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진 기분, 그런 슬픔에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데려다가…….
평소 같았으면 소리도 내지 않고 흐느껴 울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해원은 소리를 높여 목 놓아 엉엉 울었다. 슬펐다. 강류원이 당했을 그 상황들이 가슴 아팠다. 한참을 펑펑 울던 해원의 울음소리가 잦아질 때쯤 류원이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해원 씨는 울고 있는데 나는 왜 행복한지 모르겠네.”
“…….”
“나는 그렇게 못 울었거든. 근데 나 대신 해원 씨가 펑펑 울어 주니까 나 진짜 행복하다.”
서른 살이나 먹은 성인 남자가 엉엉 울어 대는 게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류원은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해원은 그의 품으로 깊게 파고들어 얼굴을 묻었다.
“…얼마든지 대신 울어드릴게요.”
“나는 해원 씨만 내 옆에 있으면 다 괜찮아요.”
“…있을게요. 절대 안 떨어질게요.”
류원은 해원을 품에서 떼어 내고 눈을 마주했다. 눈물이 아직도 눈가에 그득하게 고여 일렁였다. 어디서 이런 게 나타나서 사람을 이렇게 맥도 못 추게 하는지, 류원은 한도 끝도 없이 부풀어 오르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해원을 끌어안아 버렸다.
“내 슬픔에 공감해 줘서 고마워.”
“…….”
“문해원 없으면 잠도 못 자는 반푼이랑 밴딩해 줘서, 인생을 몽땅 나에게 걸어 줘서 고마워.”
“…….”
“늘 대본으로밖에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을 확실하게 알려 줘서 고마워.”
“…….”
“이런 고백을 하는 장소가 주방이라서 미안해.”
진지한 고백 뒤에 이어지는 어이없는 말에 해원이 풉, 하고 웃어 버렸다.
피스틸로 각성하고 난 뒤 끔찍한 재앙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늘이 꼭 끔찍한 일만 제게 선사해 주지는 않았다. 강류원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해 줬으니까.
해원은 호흡을 가다듬고 코를 한번 문질렀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핥고 크게 심호흡도 했다.
“…제 운명으로 태어나 주셔서 고맙습니다.”
류원은 대답 대신 해원의 뺨을 감싸고 고개를 숙여 짧게 입 맞췄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분에 넘치는 사랑 주셔서 고맙습니다.”
“…….”
“…제 아버지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 주실 거 아니까 미리 고맙습니다.”
류원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요망해서는. 두 사람의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이 드리워졌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해원의 눈가를 가볍게 쓸어 주고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류원은 다시 한번 해원을 향한 변치 않는 사랑을 맹세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 준다는 말은 못해요. 근데.”
“예?”
“남들 느끼는 만큼은 행복하게 해 줄게요. 최선을 다해서.”
입꼬리를 슬쩍 끌어당겨 웃는 게 어쩐지 음흉하게 느껴진다 싶더니 갑자기 류원이 몸을 숙여 해원을 어깨에 들쳐 멨다. 해원이 발을 버둥거리자, 류원이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해원 씨도 남들 느끼는 만큼 나 행복하게 해 줘요. 이제 꽃도 안 피잖아!”
음울한 기운이 가득했던 집안이 어느새 따뜻하고 포근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오직 죽음밖에 갈라놓을 수 없는 서로의 심장이 된 류원과 해원의 웃음소리가 집안에 가득했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이 관계가 지금은 서로의 가슴속에 아로새긴 짙은 나무와 꽃이 되었다.
독초(毒草): 아로새기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