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둘. 흔한 일상
해원은 보호대를 착용하고 영화 의상팀이 준비해 놓은 흰 와이셔츠와 정장 바지로 갈아입었다. 특히 배우에게 걷어차여야 하는 정강이에는 푹신한 보호대를 겹겹이 둘렀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아예 아픔이 안 느껴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충격 정도는 줄여 줄 수 있었다. 보호대를 고정하고 천막을 빠져나오자, 영우가 목을 낚아채고 매달려왔다.
“문해파리, 너 죽을래.”
“안 떨어져!!”
“회식 누가 째래. 어! 아주 연애한다고 이게 빠져서.”
“어제는 정말, 윽, 사정이 있었어.”
한참을 원숭이가 나무에 매달린 것처럼 들러붙어 저를 괴롭혀 댔다. 어제는 <밤의 거리>팀 단체 회식이었다. 감독과 배우를 비롯해 전체 스태프가 참여하는 회식이었는데 해원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사정이 뭔데.”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하기가 좀 곤란해.”
“혹시 나쁜 일 있는 건 아니지? 강류원이랑 헤어졌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해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공식적으로 열애를 인정한 뒤 강류원은 조금 더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변했다. 거리낌 없이 밖에서 손을 잡거나 허리를 감싸는 등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행동을 서슴지 않게 했다.
괜히 민망해서 그의 손길을 거부하는 건 해원이었다. 밖에서는 조심해 달라고 이야기했지만 류원은 열애를 인정한 대가니까 즐기라는 말만 했다.
가끔 SNS에 데이트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류원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는 대한이를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이라 부득이하게 감독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 촬영 시작하나 보다.”
“가자.”
영우를 따라 촬영 라인 쪽으로 다가갔다. 성 감독이 주연 배우인 신재하에게 몇 가지 주의와 당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건성건성 대꾸했다.
배우보다 더 전전긍긍하는 매니저의 얼굴이 보였다.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며 죄송하다며 사과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스턴트 준비됐습니까?”
“예, 여기 있습니다.”
감독이 대본을 둘둘 말아 쥐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해원은 입술을 한번 말아 물었다가 놓고 감독을 주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감독의 뒤에 서 있던 신재하가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러고는 해원의 턱을 손으로 쥐고 이쪽저쪽으로 돌려 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해원이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한참 만에 상황을 파악하고 그의 손을 밀어냈다.
“뭐하시는 겁니까.”
“네가 강류원 이거냐?”
신재하가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무례한 행동에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의 손이 닿았던 턱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감독을 바라봤다.
감독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해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길게 감았다가 떴다. 대충 박자 좀 맞춰 주라는 신호였다. 해원은 인상을 찡그리고 신재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묻고 있잖아. 너 강류원 이거냐고.”
“그게 촬영이랑 상관있는 일입니까?”
“어, 매우.”
신재하가 건들대며 해원의 얼굴을 다시 잡아채려 했다. 행동을 미리 감지해 몸을 뒤로 물린 해원이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바로 했다. 그는 제법이라는 듯이 이번에는 어깨를 세게 움켜쥐고 몸을 흔들어 댔다.
“잡소리 하지 말고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지?”
“대답할 이유 없습니다.”
해원은 어깨를 꽉 잡은 손을 낚아채고 한 바퀴 돌려 뒤에서 그의 목을 감싸 끌어당겼다. 그에게서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붙이고 남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한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허무하고 가볍게 제압당하실 거면 그만 무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 뭐, 이 좆같은 새끼가 안 놔? 너 이거 당장 안 놔?!”
“…보기 추합니다.”
“이 씨발놈이 내가 누군지 알고!! 나 신재하야! 놓으라고!! 놔!!”
신재하가 길이길이 날뛰며 몸을 버둥거렸다. 진짜 혈 자리를 눌러 기절시키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고 다시 한번 신재하에게 경고했다. 그만 패악 부리라고, 그런데 신재하가 그 말에 뿔난 망아지처럼 날뛰어 댔다.
머리를 앞뒤 좌우로 흔들어 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바람에 신재하의 머리가 해원의 얼굴을 강타했다. 예상치 못한 가격에 코를 감싸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해원아!”
“괜찮아요? 손 좀 치워 봐요.”
감독이 해원의 손을 끌어내리자,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코피가 터진 모양이었다. 신재하는 덩치 큰 매니저가 꽉 붙잡고 있었다. 말려 줄 사람이 있으니 더 미친놈처럼 날뛰었다.
코가 얼얼했다. 감독이 얼른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해원은 극구 사양하며 휴지를 찾았지만, 감독은 고집스럽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이 손수건으로 코피를 수습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 코에 쑤셔 넣고 손수건을 빨았다. 붉은 피가 배어나는 걸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물을 꽉 짜 수건걸이에 걸어 두고 코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 이상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멍이 들 거 같은데 이걸 강류원한테 어떻게 말하지. 해원은 한숨을 푹 내쉬고 손수건을 걷어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 앞에는 영화의상팀 스태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흰 와이셔츠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해원은 셔츠를 내려다봤다. 군데군데 핏자국들이 남아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이걸로 갈아입으세요.”
“…감사합니다.”
해원이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셔츠를 갈아입고 나오자 그녀가 셔츠를 받아서 촬영장 뒤쪽으로 달려갔다. 후,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다졌다. 저 때문에 촬영장 분위기가 엉망이 되었을 테고 수습 역시 제 몫이었다.
해원은 발소리를 죽이고 촬영 라인 쪽으로 다가갔다. 감독이 촬영 라인에서 멀찍이 떨어져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담배를 뻑뻑 피워 대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다가가 곱게 접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감독이 인기척을 느끼고 얼른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 괜찮아요?”
“네.”
“해원 씨가 맡은 역할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기로 했어요. 재하한테 정강이 걷어차이는 건데 괜히 앙갚음이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저 괜찮은데.”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해원 씨는 이따가 덩어리 촬영할 때 투입해요.”
감독은 해원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리며 촬영 라인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역할은 영우가 대신하기로 했다. 보호대를 영우의 정강이에 감아 주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신경 쓰지 마! 인마.”
영우가 호탕하게 웃으며 등짝을 팡팡 두드렸다.
“…그래도 괜히 나 때문에.”
“신재하 저 새끼 성격 나쁘다고 소문 자자하잖아.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고 괜히 너한테 지랄이다.”
해원은 고정 클립을 끼우고 몸을 일으켰다. 다리 부근을 두드려 체크한 영우가 씩 웃어 보이며 촬영 라인 안으로 들어갔다.
* * *
승합차를 타고 액션스쿨로 향했다. 차 안에서 오후에 있었던 신재하와 제 이야기가 화두로 떠올랐다. 다들 입을 모아서 신재하를 씹어 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해원과는 촬영이 겹치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었다.
이 바닥에 있으면서 느끼는 건 연예인은 모두 만들어진 이미지로 화면에 나온다는 거였다. 성격이 개차반인데도 바른 이미지로 콘셉트를 잡아 활동하는 연예인이 수두룩했다. 신재하 역시 바르고 건실한 청년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잠시 신호에 걸린 사이 옥외광고판에 신재하의 광고가 재생되고 있었다. 시커먼 속내를 감추고 하얀 양의 탈을 쓰고 양인 척 가증스럽게 웃어 대는 꼴이 역겨웠다.
“다들 수고 많았다. 내일은 쉬고 모레 오후 4시 30분까지 영상 단지로 집합한다. 이상.”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해원은 어깨에 가방을 메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콧대를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파랗게 멍이 올라오기 시작한 게 눈에 확 띄었다. 이 정도면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류원에게 들킬 게 뻔했다.
뭐라고 말하지. 솔직히 말하면 류원이 불같이 화를 낼 텐데.
해원의 한숨이 깊어졌다.
“문해원.”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해원이 고개를 돌렸다. 아이보리색 코트를 입은 류원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아… 해원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차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문, 해원.”
저를 보고도 도망치듯 몸을 돌려 걷는 해원의 뒤통수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뒤를 따라 걸었다. 해원은 불러도 대답도 하지 않고 차를 향해 걷기만 했다.
“뭐야, 왜 이래.”
류원이 팔을 뻗어 해원을 낚아채듯 몸을 잡아 돌렸다. 그 순간 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며 두 사람을 비추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해원의 얼굴을 본 류원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얼굴 왜 이래.”
해원이 낭패감에 인상을 팍 찌푸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가 제 턱을 세게 움켜쥐고 고개를 들게 했다. 오늘 참 여러 번 턱이 잡히는 것 같다. 눈을 질끈 감고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코를 가렸다.
“손 치워.”
“…형, 제발요.”
“이거 누구한테 항의해야 하는 건데?”
“제가 실수로…….”
“문해원한테 항의해야 하는 거야?”
“…네.”
류원은 험악하게 구긴 인상을 풀지 않은 채 해원의 손을 내리게 하고 얼굴을 살폈다. 어두워서 제대로 확인할 수 없지만, 코에 붓고 시퍼렇게 멍이 든 것처럼 보였다. 류원은 턱을 쥔 손에 힘을 주고 이리저리 돌렸다.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일단 타.”
운전석 쪽으로 먼저 걸어간 류원 탓에 조수석 문을 열었다. 류원은 차에 타자마자 실내등을 켜고 해원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정말 실수로 다친 거야?”
“…네.”
“내 눈 보고 이야기해. 거짓말하지 말고.”
해원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류원의 눈을 마주 봤다. 미간에 주름이 진 게 선명하게 보였다. 지난번 상황을 모면하겠다고 대충 말을 둘러댔다가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 실컷 물고 빨렸던 가슴이 괜히 지끈거렸다. 입술을 질끈 물었다 놓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고.”
“…정말이요?”
“무슨 일 있었어?”
해원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순순히 오후에 있었던 작은 사건을 두루뭉술하게 말했다. 다만 사건의 가해자가 배우 신재하가 아니라 같은 스턴트맨 동료라고 말했다. 말이 끝나자 류원은 표정을 풀고 시동을 걸었다.
“일단 집에 가서 마저 이야기해.”
“…할 이야기 이제 없는데.”
“헛소리하지 말고 눈이나 붙여.”
해원은 잠시 차창을 응시하다가 이내 도롱도롱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류원은 잠든 해원을 힐끗거리고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연예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몇 다리만 건너면 금세 인맥을 찾아낼 수 있는 게 이 바닥이었다. 거기에 스태프들 인맥까지 동원하면 아주 쉽게 연줄이 닿았다. 문해원은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광고 촬영이 있어 경기도 모처에서 스튜디오 촬영대기 중이던 류원에게 재영이 허겁지겁 달려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점점이 떨어진 핏자국이 선명한 와이셔츠 사진이었다. 이게 왜?
“제 친구가 <밤의 거리> 영화의상팀에 있거든요. 근데 조금 전에 신재하가 해원 오빠 잡도리했나 봐요.”
“뭐?”
“해원 오빠한테 네가 강류원 이거냐면서 막 시비 걸고 그랬다는데.”
재영이 어설프게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빌어먹을 새끼, 감히 누굴!
할 수만 있다면 당장 현장을 쫓아가 신재하의 멱살을 쥐고 흔들고 싶었다.
“그래서 이 피가 문해원 피라고?”
“네, 신재하가 업계에서 유명하잖아요. 막 시비 걸고 다니고 근데 회사가 알아서 다 막아 주니까 이게 무서운 게 없어서, 어머! 오빠 죄송해요.”
재영이 스스로 입을 틀어막고 류원에게 사과했다. 류원은 사진을 제 휴대폰으로 전송받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인맥 자체가 좁다 보니 사실 확인이 필요해도 마땅히 연락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하영을 떠올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전 연예 뉴스에서 신재하와 함께 광고 촬영을 했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고하영은 신재하의 이름을 듣자마자 노발대발 화를 내며 쌍욕을 내뱉었다.
- 그 쌍놈 새끼, 위아래도 없고 아주 제멋대로라니까. 회사가 크니까 지가 큰 줄 알고 나대는 놈이야. 근데 왜?
“그놈이 문해원한테 잡도리했다는데, 뭐하는 새낀가 싶어서.”
- 해원이를? 미친놈 신재하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 아니지 이참에 강류원이 손 좀 봐주면 좋은 일이지.
“그 정도야?”
- 안하무인이야. 근데 소문에는…….
전화기를 들고 자리를 옮기는지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들렸다. 마땅한 자리를 찾았는지 그녀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작게 속삭였다.
- 아이케이 홍 회장이 뒤 봐준다는 소문도 있어. 홍 회장이랑 신재하랑 같이 있는 거 봤다는 사람도 있었고. 확실하진 않으니까 확인 한번 해 봐.
고하영이 준 정보를 땅개에게 넘겨주고 사실 확인을 부탁했다. 아마 내일쯤이면 확실한 답이 나올 것이다. 류원은 운전대를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며 입안의 연한 살을 깨물었다.
해원의 촬영 기간은 아직도 석 달이나 남아 있었다. 매일 참여하는 현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동안 놈이 해코지하거나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어 잡도리를 할 수도 있었다.
한 번 해 봤는데 두 번이 어려울까. 흠.
류원의 고민이 깊어졌다.
“고개 들어 봐.”
해원은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류원에게 붙잡혀 고개를 들어야 했다. 어차피 숨겨지지도 않을 멍 자국이라, 체념하듯 고개를 들었다. 류원이 코 부근을 손끝으로 쓸며 인상을 찡그렸다.
멍이 심하게 든 건가?
“병원 안 가 봐도 돼?”
“…네, 뼈에는 이상 없는 거 같습니다. 며칠 지나면 가라앉을 거라서.”
“내가 다쳐도 그렇게 말할 거야?”
“…아 그건, 형이랑 저는 조금 다르니까.”
“씻어.”
류원은 못마땅한 얼굴로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향했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방 안으로 들어가 코트를 의자에 걸쳐 두고 침대에 주저앉았다.
류원이 화를 내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현장에 있다 보면 예기치 못한 일을 겪기도 했다. 이번 일도 그런 맥락의 일이었다.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서랍을 열어 속옷과 편안한 옷을 꺼냈다. 일단 먼저 씻고 나서 생각해 봐야겠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머리에 묻은 물기를 툭툭 털어 내며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 익숙한 향이 제 코끝을 자극했다. 머리를 덮은 수건을 끌어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류원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주무셨어요?”
“이리와.”
류원이 손을 내밀었다. 해원은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손에 쥔 수건을 빼앗아 해원의 머리 위에 뒤집어씌우고 머리카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마른 수건이 금세 축축해졌다.
“나는 보는 것도 아까워서 열 번 볼 거 두 번 보고 세 번 보는데, 다치고 들어오면 내 마음이 어떻겠어?”
“…….”
“거기에 거짓말이나 살살하고, 아주 미운 짓만 골라서 하지?”
해원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애꿎은 손톱 옆 거스러미만 쥐어뜯었다. 류원이 저를 얼마나 끔찍하게 챙기고 아끼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류원이 저와 똑같은 상황을 겪었다면 크게 분노했을 것이다.
“죄송해요.”
“…죄송하면 이리 와서 안기든가.”
류원이 머리를 문지르던 수건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 심드렁한 얼굴로 두 팔을 벌렸다. 해원은 이마를 손가락으로 긁적거리고 그의 옆에 앉아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문해원 답네.”
백 마디의 말보다 불퉁한 말 한마디가 어쩐지 위로가 되는 기분이었다. 강류원의 곁에서 천천히 흘러가는 게 좋았다. 온종일 혼곤했던 마음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류원이 어깨를 감싸고 뒤로 몸을 눕혔다. 순식간에 제 몸 위로 기어 올라온 그가 목에 입술을 묻었다.
“내일 쉬지?”
“…오후에 운동 가야 합니다.”
“운동은 여기서 나랑해.”
그가 샤워 가운을 벌려 손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서늘한 손이 단번에 젖꼭지를 꼬집듯 쥐어 비틀었다. 해원이 다리를 오므리며 낮게 신음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그와 뜨거운 밤을 보냈다. 둘 다 체력이라면 손으로 꼽히는 사람들이라 무난한 성생활이 이어졌다.
“하드 트레이닝 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이걸로 마음이 풀리신다면 얼마든지요.”
해원은 작게 속삭이듯 말하고 류원의 목에 팔을 감아 입술을 맞물렸다.
방 안의 공기가 뜨거워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해원은 어느새 반라의 상태가 된 채 그의 아래에서 뜨거운 숨을 뱉어 내고 있었다. 류원은 젖꼭지를 핥고 물고 빨아 댔다. 젖꼭지가 퉁퉁 부어오를 때까지 그는 집요하게 입을 움직였다.
“하읏, 아, 그만… 그 정도만 해요.”
갈색 반점으로 젖꼭지를 둘러싼 유륜을 이로 세게 깨물고 류원이 고개를 들었다. 아예 상체를 세우고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침대 아래로 떨어뜨렸다.
잘 짜인 근육들이 흉포하게 움직였다. 해원은 이를 사리물고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그의 몸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내일치 운동해야지?”
“…흣, 아뇨, 안 해도 돼요.”
류원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숙여 그의 복부에 입술을 묻었다. 근육이 크게 일렁이며 요동쳤다. 밋밋한 뱃가죽도 좋지만 이렇게 단단한 몸도 제법 취향이었다. 물론 문해원에 한해서. 뭐 문해원이 말라깽이라도 아니면 비대한 몸을 가졌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뭐 어떤 모습이든 제 눈에는 예뻐 보이기만 할 테니.
시트를 세게 움켜쥔 손을 겹쳐 쥐고 성기 주위를 혀로 핥았다. 이미 힘을 받아 꺼떡거리는 성기를 일부러 뺨에 비볐다. 곧추선 성기가 제 뺨을 사납게 두드려 댔다.
“요망한 주인을 닮아 좆도 요망해.”
류원의 힐난에 해원이 손을 아래로 내려 성기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성기를 마구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오른 귀두가 그의 손에 의해 모습을 감췄다가 색을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눈앞에 드리워진 아찔한 광경에 류원은 몸을 물리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해원이 성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시트를 세게 움켜쥐고 신음을 내질렀다.
“흐앗, 아, 하, 윽, 흣!!”
사정이 임박해져 오는지 해원이 괴로운 신음을 쏟으며 목을 뒤로 젖혔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성기를 훑는 미묘한 소리가 뒤엉켜 야릇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거기에 곁들여지는 해원의 억눌린 신음은 클라이맥스를 달려가는 연주곡의 고음 같았다.
마침내 희뿌연 액체가 해원의 고운 손을 적셨다. 류원은 고개를 숙여 그의 손을 핥았다. 혀끝에 닿는 비릿한 맛을 익숙하다는 듯이 삼키고 그의 성기까지 샅샅이 훑었다. 고환 아래까지 그의 혀가 닿았을 때 해원은 높은 교성을 내질렀다.
“흣, 그만하세요!”
“비려.”
해원이 발버둥을 치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 입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해원은 가쁜 숨을 색색 내쉬며 류원을 바라봤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육욕이 드리워져 어쩐지 음란하게 느껴졌다.
“난 문해원이 자위할 때가 꼴리고 좋더라.”
“변태.”
류원의 손이 사타구니의 연한 살을 은근히 주물렀다. 그러면서 다른 한 손을 제 바지 속에 넣어 성기를 주물렀다. 바짝 달아오른 놈이 성을 내며 맑은 물을 흘려 댔다.
좋은 구경을 하느라 꽤 오래 참았더니 아래가 욱신거렸다. 류원은 해원의 침대 서랍을 열어 콘돔 하나를 꺼내 침대 위로 던졌다. 콘돔 껍질에는 노골적인 손가락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안을 풀어 주다 보니 손톱에 긁혀 의도치 않은 상처가 생기는 경우가 있어 얼마 전부터 손가락 콘돔을 애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콘돔에 묻어 있는 윤활제 때문에 삽입이 수월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유용했다.
콘돔 껍질을 벗겨 손가락에 씌우고 해원의 뒤를 매만졌다. 주름을 손끝으로 훑고 약간 힘을 주어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두 개가 한꺼번에 안을 파고들었다.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내벽을 부드럽게 더듬으며 안을 넓혔다.
안은 뜨거웠고, 해원의 몸은 자극적이었다. 류원은 전혀 여유롭지 못한 손놀림으로 곧장 해원이 가장 느끼는 포인트를 손끝으로 짓눌렀다.
“아흑! 아, 자, 흣, 잠깐, 흐윽!”
“좀 참아 봐.”
류원은 부어오르기 시작하는 전립선을 자극하며 두 다리를 접어 밀어 올렸다. 두 다리가 애처롭게 허공을 휘저었다. 깊은 안쪽까지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을 때까지 류원은 인내심을 가지고 안을 들쑤셨다.
마침내 손목까지 흘러내리는 애액을 확인하고 다급하게 바지를 벗어 던졌다. 드로즈를 입은 채 해원의 아래를 비볐다. 그 바람에 애액이 드로즈에 흡수되며 앞이 진하게 물들었다.
류원은 멈추지 않고 천을 뚫어 버릴 듯 기립한 성기를 그의 구멍에 문질러 댔다. 해원이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고 허리를 들썩였다. 류원이 욕을 뇌까리고 드로즈를 아래로 끌어내려 성기를 밖으로 꺼냈다. 기세가 등등한 성기가 금방이라도 구멍을 꿰뚫을 것처럼 꺼떡거렸다.
“흣, 내가, 하윽, 내가 넣을래.”
류원은 어금니를 사리물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해원이 몸을 굴려 류원의 몸 위로 기어올라 자리를 잡았다. 그의 몸 위에 쪼그리고 앉아 허리를 띄웠다. 빳빳하게 발기해 위로 솟은 성기를 붙잡아 아래에 맞추고 천천히 내려앉았다.
“으읏, 아, 아, 흣!”
구멍이 넓게 벌어지는 느낌에 해원이 숨을 삼키고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앞이 뭉뚝한 귀두가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느낌이 생경했다. 억지로 허리에 힘을 주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앉았다.
점점 제 속을 점령해 나가는 성기의 느낌에 숨을 몰아쉬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배어났다. 이 순간이 힘들면서 미치도록 짜릿했다. 뭐랄까. 강류원의 성기를 스스로 삼킬 때 마치 그를 잡아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야금야금,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보면 침샘이 자극되어 군침이 흐르는 것처럼 제 구멍도 미끈한 애액을 흘려 대며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해원은 손을 아래로 내려 삽입 정도를 가늠했다.
“윽.”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무식하게 좆만 큰…….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류원이 재밌다는 듯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문해원이 난감한 표정 지을 때 정말 꼴리더라.”
“흣, 꼴릴 것도 많네.”
“그리고 문해원이 침대에서만 반말하는 것도 꼴리고.”
“아윽, 가만, 흣, 가만히!”
갑자기 류원이 허리를 감싸 쥐고 그대도 허리를 쳐올렸다. 해원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어느새 그의 하체에 엉덩이를 붙인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숨을 돌릴 새도 없이 류원이 두 손으로 엉덩이를 꽉 붙들고 앞뒤로 몸을 흔들었다.
“흐앗, 으, 아, 잠깐, 흣, 아!”
해원이 다급하게 류원의 가슴을 두드려 보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기로 내벽을 문질렀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저릿한 감각에 발가락이 저절로 곱아 들었다.
류원의 복부에 두 손을 올리고 버텨 봐도 그는 우악스럽게 몸을 흔들어 댔다. 이미 실컷 손가락으로 자극해 놓은 포인트가 성기에 짓눌릴 때마다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흣, 아, 아! 제발, 흣!! 강, 류원!!”
“응, 말해.”
류원은 유유자적한 얼굴로 해원의 일그러진 얼굴을 아래에서 감상하고 있었다.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한껏 움츠린 어깨와 뒤로 젖힌 목을 눈으로 희롱했다. 동공이 풀려 눈매가 느슨해진 그를 볼 때가 가장 성욕이 들끓었다.
류원은 상체를 약간 들어 올리고 해원을 침대에 눕혔다. 두 다리를 넓게 벌리고 몸을 파고들었다. 머리를 대고 누운 해원이 헐떡이는 숨을 뱉어 내며 시트를 움켜쥐었다.
“키스해 줘.”
“흐응, 으, 형이, 흣, 해 줘.”
‘형’이라는 단어가 묘하게 자극적이었다. 곧 죽어도 반말은 못 하겠다고 버티는 해원과 극적으로 합의 본 게 호칭이었다. 해원이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아니, 한두 명 있을까 말까였다. 거의 선배, 아니면 직책을 부르는 타입이었다. 언젠가 준호가 이제 형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는 지금도 꼬박꼬박 ‘소장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다시 불러 봐.”
“아, 아읏! 아, 혀, 엉!”
붉어진 입술을 덮치듯 삼키며 허리를 움직였다. 깊숙이 박혔다가 빠져나올 때마다 붉은 속살이 바깥까지 딸려 나왔다가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나무의 묵직하고 짙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여름 나무 특유의 싱그러움 담은 냄새, 오직 문해원에게서만 나는 냄새였다.
“흣, 아, 어, 엎드릴, 엎드릴래.”
류원은 몸을 물리고 해원이 엎드릴 수 있도록 도왔다. 둥그렇게 벌어진 구멍이 입을 다물기 전에 귀두를 쑤셔 넣었다. 흣, 울퉁불퉁한 성기가 내벽을 세게 긁으며 박혀 드는 짜릿한 감각에 크게 비명을 내질렀다.
류원은 해원의 등에 새겨진 주홍색의 양귀비를 손으로 훑으며 빠르게 안쪽을 드나들었다. 해원의 나무는 완벽하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희미하고 흐릿하기만 한 나무의 색이 이제는 짙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짙은 갈색의 나뭇가지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류원이 허리 짓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꽃마다 짧게 입을 맞췄다. 무슨 수를 써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은 낙인이었다.
“사랑해.”
류원이 몸을 겹치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이미 짙은 쾌락을 흠뻑 뒤집어쓴 해원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길게 빼냈다가 단숨에 깊숙이 밀어 넣었다. 내벽을 긁는 느낌이 제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해원은 고개를 저으며 침대를 쿵쿵 내리쳤다.
“하읏, 아, 아앗! 하! 그만, 흣.”
몸이 흐물흐물 녹아 버릴 지경이었다. 안쪽 깊은 곳을 집요하게 두드리고 귀두를 쑤셔 박았다. 마치 더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것처럼, 류원은 연신 허리를 들썩였다.
해원의 목소리가 완전히 쉬어 버릴 때까지 집요하게 몸을 들쑤시고 온몸 구석구석 물고 빨아 댔다. 시트를 움켜쥘 힘도 없었다. 종이 인형처럼 이리저리 쥐고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허리를 잡아당겨 고정하고 빠르게 안쪽을 드나들었다. 귀두가 보일 때까지 길게 빼냈다가 단숨에 쾅 때려 박았다. 포인트를 세게 긁고 처박히는 성기에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경련하듯 몸을 떠는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반동 때문에 성기가 안쪽 깊숙이 박힐 때마다 작살에 꽂힌 싱싱한 생선처럼 몸을 파드득거렸다.
“하읏, 아, 앗! 자, 흣, 강류원, 흐윽!”
“여기가 좋아?”
“장난, 하지, 흐읏, 아, 마, 천천히. 아읏!”
손자국이 남을 만큼 세게 허리를 쥐고 얕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류원은 스퍼트를 서서히 올리며 숨을 헐떡였다.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성욕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퍽퍽, 성기를 박아 넣던 류원이 성기를 깊숙이 밀어 넣고 몸을 굳혔다.
파정의 순간은 언제나 짜릿했다. 엉덩이 근육이 잔뜩 좁아 들었다.
류원은 해원의 등에 매달려 꽃을 핥았다. 맛이 느껴질 리 없는 꽃을 핥으면 핥을수록 단맛이 나는 기분이었다. 혀가 완전히 녹아서 없어졌으면 좋겠다. 느긋하게 후희를 즐기며 해원의 몸을 어루만졌다.
침대 아래에는 언제 벗겨졌는지 손가락 콘돔이 널브러져 있었다.
“해원아.”
“…말 시키지 마요. 졸려.”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씻어야 하는데 씻을 기운이 없었다. 이렇게 늘어지면 류원이 알아서 뒤처리를 해 주고 깨끗하게 씻겨 눕혀 놓을 것이다. 해원은 허공으로 손을 휘적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 * *
“카메오요?”
“성 감독한테 넌지시 운을 띄우니까 배역하나 뚝딱 만들어 주던데?”
“시간 없으시잖아요.”
“시간은 준희 형이 알아서 만들어 주겠지.”
류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오늘 아침 <밤의 거리> 제작사 측에서 정식으로 전달받은 대본을 내밀었다. 류원이 맡은 배역은 주인공을 쫓는 검사 역할이었다. 예상대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역할은 아니었다. 하지만 류원이 카메오로 출연한다는 것만으로 큰 화제가 될 것 같았다.
두 장짜리 대본을 읽어 내려가던 해원이 못마땅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하필 신재하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장면이 두 번이나 들어가 있었다.
벌써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너구리같은 신재하가 강류원한테 엉겨 붙으면 이번에는 참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아, 니요. 촬영 일정은요?”
“…준희 형이 시간 만들어 주면?”
“아…….”
“아마 사흘 안에 스케줄 잡을 수 있을 거야. <밤의 거리> 촬영장 분위기는 어때?”
“여느 촬영장이나 다 똑같죠.”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습니다.”
신재하가 있으면 나쁘고 없으면 좋습니다. 해원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류원은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 앉아 대본을 들여다보는 그의 머리꼭지를 바라봤다. 재영을 통해 <밤의 거리> 촬영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상세히 보고받고 있었다.
신재하는 해원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시비를 걸고, 배역에 대한 트집을 잡아 시도 때도 없이 잡도리해 댄다고 했다. 해원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싶어 그냥 두고 보려고 했지만, 그 정도가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류원은 고심 끝에 직접 성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말을 꺼내기가 쉬웠다.
“저 감독님 팬입니다. 아시죠? 그래서 말인데… <밤의 거리> 카메오 출연 좀 시켜주세요.”
- 류원 씨가? 류원 씨가 출연해주면 나야 고맙지. 근데 시간이 되겠어?
“그건 걱정 마세요. 근데 저, 신재하 보다 우위에 있는 인물로 좀 부탁드릴게요.”
성 감독은 눈치 빠르게 제 말을 알아듣고 흔쾌히 알겠다고 말했다. 그 역시 신재하의 꼴이 못마땅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작사와 말까지 마치고 연락을 해 왔다. 비열하고 악랄한 타입의 검사로 캐릭터를 설정해 그와의 대립이 격렬해도 상관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준희가 크게 반대했다. 스케줄 빼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그의 말도 틀린 게 없었다. 못해도 이틀 정도는 풀로 시간을 빼야 하는데, 지금 촬영도 빠듯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형, 휴가 가고 싶댔지?”
“야, 그게 왜 여기서 나와.”
“휴가 다녀와. 이것만 처리해 주고.”
* * *
류원은 오후 늦게 밥차를 끌고 <밤의 거리>촬영장을 찾았다. 촬영이 끝나길 잠시 기다렸다가 감독의 컷 소리가 나자 류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류원 씨 왔어?”
성 감독은 지친 얼굴로 류원의 손을 맞잡았다. 속으로 혀를 차며 방금까지 촬영 중이던 신재하를 찾았다. 그는 어느새 촬영 라인을 빠져나가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선 매니저는 무슨 죄를 진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개인 스태프로 보이는 일행들 역시 일렬로 서서 신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감독님, 주연 배우 소개 좀 해 주세요.”
“아, 그럴까? 재하 씨, 현우 씨, 진경 씨. 잠시만.”
감독이 부르는 소리에 신재하를 제외한 배우 둘이 다가와 류원에게 고개를 숙였다. 남자 배우는 류원의 팬이라며 눈을 반짝였다. 류원은 예의상 미소를 짓고 고맙다며 인사를 건넸다.
대충 인사를 받아넘기고 신재하를 주시했다. 매니저가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재하를 재촉하고 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저 건방진 놈이 저런다니까, 류원 씨가 이해해.”
“…내버려 두세요.”
성 감독이 신재하를 힐끗거렸다. 노골적인 시선에 고개를 한 번 돌릴 법도 한데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거만한 자세로 커피만 쪽쪽 빨고 있었다.
“저 의상부터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어, 그래. 다녀와.”
류원은 입가에서 미소를 지워 버리고 욕을 뇌까렸다. 건방진 새끼, 실제로 보니 더 가관이었다. 튼튼한 동아줄을 붙잡고 있으니 그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동아줄을 싹둑 잘라 버리면 어떻게 되려나.
“형, 찍었어요.”
“줘 봐.”
채현의 손에서 카메라를 넘겨받아 사진을 확인했다. 다른 배우들과 인사를 나누는 류원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커피를 마시는 신재하의 모습이 한 장에 다 담겨 있었다.
“잘 가지고 있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네, 옷 갈아입으실 거죠?”
“해원이 얼굴만 보고 올 테니까 가 있어.”
류원은 액션스쿨 차량이 주차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통화했을 때 해원은 졸린 목소리로 차에서 자고 있다고 했다.
낡은 승합차의 문을 살며시 열자, 짙은 나무 냄새가 훅 끼쳐 왔다. 해원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었다. 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심히 차에 올라 해원의 옆에 앉았다.
“으응?”
좌석이 푹 꺼지는 느낌에 해원이 한쪽 눈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류원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고 멍하니 바라보던 해원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형이다. 아, 우리 형 냄새난다.”
“피곤해?”
해원은 꽃 냄새를 쫓아 품으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팔이 제 몸을 감싸 안았다. 익숙한 품과 체향에 몸이 저절로 늘어졌다. 아침부터 신재하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사람 속을 박박 긁어 댔다. 치밀어 오르는 혼자서 삭히느라 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도 류원이 오니 좋았다. 뺨을 가슴팍에 비비며 작게 신음을 내뱉었다.
“왜 어리광이야.”
“…피곤해요.”
“언제 끝나는데?”
“신재하가 형한테 뺨 맞는 장면 있죠. 그거 대역 써 달래요.”
류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해원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히며 빠져나가는 느낌이 기꺼웠다.
“내기할까?”
“……?”
“신재하가 대역을 쓰는지 안 쓰는지?”
“형이, 신재하를 몰라서 그래요.”
그 새끼는 쌍놈 중에 개 쌍놈이거든요.
해원은 뒷말은 생략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최근 스태프들 사이에서 ‘예또’라는 이름으로 신재하를 부르고 있었다. 뜻은 예상을 뛰어넘는 또라이. 말 그대로 정말 상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스태프들을 괴롭혀 대고 있었다.
“소원 들어주기 콜?”
“…후회하실 겁니다.”
해원은 호기롭게 콜을 외쳤다. 정상인이 또라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건 절대 불변의 법칙이었다.
하지만 해원은 강류원이 전직 강또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강력한 또라이 강류원.
“컷! 류원 씨, 더 악랄하게 표현되어야 한다니까.”
감독은 라인 안으로 들어와서 열변을 토했다. 류원의 캐릭터가 비열하고 악랄한 검사인데 그 느낌이 살지 않는다며 더 리얼한 연기를 부탁했다. 류원은 가슴까지 풀어헤친 단추를 채우며 피식 웃었다.
“똑바로 좀 하시죠.”
재하는 나무 의자에 몸이 결박된 채 시근덕거렸다. 특수분장을 해 놓은 끈적한 피가 뺨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내가 이런 비열한 역할은 처음이라서.”
류원은 산뜻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촬영 시간이 지연되고 있지만, 스태프들 그 누구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다.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의도가 다분한 NG임을 이 촬영장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배우라면서 이런 간단한 연기도 못합니까?”
“연기도 좆도 못하는 게 배우랍시고 지랄 육갑을 떨어 대니까 몰입이 잘 안되네? 그리고 너,”
사정없이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자 손잡이를 양손으로 짚었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자, 신재하가 본능적으로 얼굴을 뒤로 물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뭐, 뭐하는 짓입니까.”
“뭐하긴 그 잘난 얼굴 좀 자세히 보려는 거지. 네가 문해원 잡도리했다며? 나는 한번 보는 것도 아까워서 잘 보지도 못하는 얼굴에 파랗게 색칠까지 해서 보냈더라?”
“…그건, 저 새끼가 사람을 개무시하니까.”
류원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그 모습을 본 신재하가 재밌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피스틸 하나에 벌벌 떨어 대는 꼴이라니.
“정말 선배님 이거.”
신재하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찰나, 류원이 새끼손가락을 움켜쥐고 낮게 일갈했다.
“난 너 같은 후배 둔 적 없다. 호칭 똑바로 해라.”
설렁설렁 웃어 보이며 촬영장 분위기를 주도하던 류원의 변화에 모든 사람이 움직임을 멈추고 이쪽을 주시했다. 신재하는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능글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정말 세기의 사랑이십니다. 피스틸 하나 지키려고 베놈스테먼 연구소 비리까지 까발리셨다면서요? 나는 언제쯤 그런 사랑 해 보나.”
신재하의 말에 류원이 갑자기 성 감독을 불렀다. 성 감독이 대본을 손에 말아 쥐고 가까이 다가왔다.
“감독님, 말로만 하니까 분위기가 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뒤쪽에 있는 장면을 앞으로 끌어와서 제가 뺨을 때리는 걸로.”
“…대역 써! 나 못해!”
“신재하 씨가 프로 정신이 없네. 여기서 끊어서 대역 앉히고 가면 퍽이나 흐름이 좋겠습니다. 안 그래요? 시간도 없는데 한 번에 끝냅시다.”
류원이 일부러 큰 소리로 분위기를 조성했다. 스태프들이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수군거렸다.
“그래 재하 씨, 류원 씨도 일부러 시간 내서 와 준 건데 이렇게 시간 끌면 곤란하지.”
“내가 와 달라고 사정했냐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분위기가 불리한 쪽으로 쏠리자, 신재하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누구도 신재하를 옹호하지 않았다. 강류원이 일부러 시간 내서 와 준 것도 맞고, 흐름을 끊어 가면서 대역을 써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촬영장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해원은 촬영 라인 뒤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약 신재하가 류원의 손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곧장 달려가 손목을 짓밟아 버릴 작정이었다. 저한테 해코지를 하고 잡도리를 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강류원은 아니었다.
류원은 짜증스러운지 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기고 인상을 구겼다. 판세는 이미 강류원 쪽으로 기울었다.
“나도 개차반이지만 너도 만만치 않다?”
순식간에 류원의 손이 신재하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겼다. 일촉즉발의 순간에 다들 숨을 죽이고 상황을 주시했다. 의자에 몸이 묶여 있는 상태로 끌려온 신재하가 놓으라고 소리쳤다.
“이 새끼야 잘 들어.”
류원은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다른 사람은 절대로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경고했다.
“아이케이 홍 회장이 언제까지 네 뒷배가 되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
홍 회장이라고 언급하는 순간, 재하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고하영이 흘려 준 정보는 사실이었다. 땅개는 사진 몇 장과 함께 USB 하나를 보내왔다. 홍 회장의 노트북을 해킹했는지 USB에는 그들의 난잡하고 은밀한 성생활이 담겨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이름이었는지, 그는 당황한 얼굴로 류원을 올려다봤다.
“과연 홍 회장이 너만 예뻐하고 있을까? 금이야 옥이야 밑 닦아 주는 게 너뿐이겠냐고.”
“무, 무슨……!”
“근데 그게 얼마나 갈까? 노인네 서지도 않는 좆 빨아 주면서 이 바닥에 네가 얼마나 클 거 같냐고.”
신재하는 치부를 들켰다는 생각 때문인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몸을 부들부들 떨어 대는 그를 놓아주자, 아까처럼 의자에 결박된 채로 주저앉았다. 류원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으며 양손으로 의자의 손잡이를 짚었다.
“잘 들어, 홍 회장은 스폰 정리할 때 아예 눈앞에서 치워 버려. 다시는 안 보이게. 그래야 뒤탈이 없거든. 과연 너라고 다를까?”
“회, 회장님이, 그러실 리가 업, 없어.”
“그건 네 생각이고, 얼마 후에 신재하 마약, 성 추문, 아니면 스태프 성폭행, 그것도 아니면 음주 운전 뺑소니 이딴 헤드라인으로 만나게 될 것 같은데.”
이건 사실이었다. 홍 회장이 잠시 데리고 놀았던 연예인치고 이 바닥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다 똑같은 절차를 밟아 연예계에서 퇴출당했다.
“신재하 내가 더 소름 끼치는 이야기해 줄까?”
류원이 비열하게 웃으며 재킷 앞 포켓에 꽂힌 만년필 하나를 꺼내 눈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었다. 만년필 뒤쪽 액정에는 째깍째깍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신재하는 그 물건이 일반 만년필이 아님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홍 회장이 널 데리고 놀다가 팽하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내가 이걸 언론에 공개하는 게 빠를까?”
신재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놓았다.
“…제가, 제가 어떻게 하면.”
“한 번만 더 문해원 건드리면 이거 바로 언론에 터뜨린다. 기자까지 갈 것도 없어, 내 라이브 방송에서 실수인 척 공개해 버릴 거니까 그렇게 알아. 그리고 촬영은 대역 없이, 가겠다고 해.”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류원은 의자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몸을 세웠다.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스태프들을 둘러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감독님 이제 진행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신재하 씨가 롱 테이크로 촬영하겠답니다.”
* * *
류원의 카메오 촬영은 신재하의 NO 대역 선언으로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촬영을 지켜보는 해원의 속은 쓰렸다.
밤늦게까지 촬영이 예정된 스턴트 팀과 달리 류원은 감독의 배려로 예정된 분량을 소화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메신저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강류원 win!]
정상인이 또라이를 이기다니…….
해원은 머리를 감싸 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건 또 무슨 신종 지랄이야?”
“…말 시키지 마.”
“밥 먹자, 네 애인님께서 밥차 대기시켜 놓고 갔더라.”
영우는 특수분장으로 얼룩진 티셔츠를 벗어 쓰레기통에 넣고 가방을 열었다. 정글 같은 가방을 뒤적여 보호대를 꺼내 의자에 내려놓았다. 다른 현장으로 지원을 가는 모양이었다.
해원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메신저 앱을 열고 대화창을 띄웠다. 그리고 조심조심 글자를 찍어 넣었다.
[무슨 소원 빌 거예요?]
보냄과 동시에 1이 사라지고 곧 대화가 떠올랐다.
[집에 오면 알려 줄게.]
단호한 대답에 손톱을 질근질근 물어뜯으며 인상을 구겼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그의 변태력이 날로 상승하는 중이었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가방을 손에 움켜쥐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대문을 밀었다. 대문에서 현관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왔어?”
류원이 차 소리를 들었는지 현관 앞에 나와 있었다. 벽에 삐딱하게 몸을 기대고 선 그의 입가에 웃음기가 잔뜩 묻어났다.
“아, 안 주무셨어요?”
“11시밖에 안 됐는데?”
류원은 손을 뻗어 해원이 쥔 가방을 넘겨받았다. 순순히 가방을 넘겨준 해원이 체념하듯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벗어.”
해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얌전히 그가 시키는 대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겉옷을 벗고 티셔츠를 머리 위로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안에 받쳐 입은 흰색 반팔티를 밑단을 붙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불쌍한 표정으로 류원을 바라봤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해원이 흰색 티셔츠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순간, 그대로 허리를 감싸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맨몸에 옷감이 닿아 버석거렸다.
“형, 잠깐만요.”
티셔츠가 팔에 걸린 채 시야를 완전히 덮고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답답함을 호소하며 몸을 버둥거려도 류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몸을 더 꽉 옥죄었다.
“형, 류원이 형!”
“왜, 자꾸 불러.”
류원은 손을 아래로 내려 해원의 버클을 풀어냈다. 바지 속으로 손으로 넣어 엉덩이를 주물렀다.
“흐읏, 아, 이거, 반칙이야.”
“왜 반칙이야. 내 거 내가 만지겠다는데 뭐가 어때서.”
갑자기 시야가 확 밝아졌다. 류원이 머리 위로 티셔츠를 벗겨 내고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해원은 투덜거리며 바지 버클을 채웠다.
“촬영장에서 별다른 일은 없었고?”
“네. 무난했어요.”
무난하다 못해 평화롭기까지 했다. 저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인간이, 오늘은 아예 저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도대체 강류원이 무슨 소리를 했기에 사람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신재하한테 뭐라고 했어요?”
“내 거 건드리면 죽인다고.”
“네?”
류원이 애써 채워 놓은 버클을 풀고 바지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현관 앞에서 드로즈 한 장만 덜렁 걸친 채 서 있는 게 민망해 얼른 얼굴을 가렸다.
“그것도 벗어.”
“여기서요?”
류원은 대답 대신 드로즈 밴드에 손가락을 걸어 아래로 끌어내렸다. 민망한 기분에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씻고 나와.”
류원이 짓궂게 엉덩잇살을 쥐었다 놓으며 웃었다.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할 것처럼 분위기를 끌어가던 류원이 금세 몸을 돌리고 제 시야에서 총총 멀어져 갔다.
해원은 그가 시킨 대로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카락을 툭툭 털며 거실로 나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좀 담갔더니 컨디션이 한결 나아졌다.
“형……?”
거실은 조용했다. 주방까지 둘러봤지만 류원은 보이지 않았다. 슬리퍼를 끄는 소리만이 고요한 거실을 울렸다. 침실에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실 앞으로 다가갔다.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형 들어가도 돼요?”
천천히 문손잡이를 비틀어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커다란 곰 인형과 함께 류원이 서 있었다. 그는 상의를 입지 않고 공룡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이게…….”
“내 소원은.”
“……?”
“네가 나랑 결혼해 주는 거야.”
해원은 낮은 숨을 뱉어 내고 그를 바라봤다. 사실 얼마 전, 두 사람은 아이의 입양 문제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식만 안 올렸지 두 사람은 법적인 부부였다. 그런데 류원은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혼인신고도 류원이 촬영 중이라 해원이 혼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결혼이라는 인생 일대의 최대 이벤트를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넘어가기 싫었다. 그래서 류원은 오늘 청혼을 하기로 했다.
“내 옆에 있는 이 곰은 대한이야. 지금은 이 자리에 없지만, 함께한다고 생각해 줘. 난 지금도 네가 없으면 잠도 못 자. 가끔 된장찌개에 설탕을 넣기도 하고, 가끔은 짓궂은 이벤트로 널 놀라게 할 때도 있어. 그런데 내 마음은 늘 진심이었어. 내가 앞으로 살아갈 모든 날에 네가 함께였으면 좋겠어.”
“…형.”
“근사한 레스토랑도 아니고, 멋진 옷차림도 아니지만 결혼해 줘. 넌 내가 이 앞치마만 입으면 웃잖아.”
“…….”
“네가 웃으면 나도 좋아.”
공룡 앞치마를 펄럭이며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류원의 모습에 해원은 환하게 웃었다. 얼굴은 분명 웃고 있는데 자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 세상의 온갖 불행은 자신이 다 가졌다고 생각했다.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거라고. 그런데 이 빌어먹을 거지같은 운명이… 강류원을 만나게 해 주었다.
강류원을 만난 이후로 모든 것이 다 달라졌다. 끔찍하기만 했던 피스틸이라는 운명이 참 다행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양귀비를 나무에 품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만약 불법 시술만 아니었다면 아마 그의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류원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사랑해요.”
수많은 말 중에 생각나는 말이 저것밖에 없었다.
류원은 눈이 퉁퉁 부을 때까지 펑펑 운 해원을 침대에 앉히고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심플한 느낌의 반지였다. 하지만 반지 안쪽에는 해원과 류원의 이니셜이 각인 되어 있었다.
류원은 해원의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반지를 끼니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이번에는 해원이 류원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두 사람의 손에 같은 반지가 반짝였다.
영원히 두 사람의 손에서 빛날 마음의 증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