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셋. 안녕?
해원은 조금 긴장된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희망보육원, 간판은 눈으로 훑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대한이의 입양 절차가 마무리되고, 드디어 어제 입양 승인이 떨어졌다. 이제 합법적으로 대한이를 데리고 올 수 있게 되었다. 어젯밤, 류원과 해원은 한숨도 자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입양을 신청하고 꼬박 1년 만에 입양 승인이 떨어졌다. 그러는 사이 류원은 서른네 살이 되었고 해원은 서른한 살이 되었으며 대한이는 네 살이 되었다.
아이와의 처음 만났던 날은 하늘이 높고 청명한 어느 가을날이었다. 재잘거리는 아기 새들 가운데 눈꼬리를 반쯤 접어 웃는, 누가 봐도 저를 쏙 빼닮은 아이……. 해원은 단박에 대한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는 경계심 없이 성큼 다가와 앞에 섰다.
“안녕?”
“아저씨 아녕!”
대한이는 부정확한 발음이지만 야무지게 대답하고는 장난감 기차를 붕붕 밀었다. 원장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온 류원을 발견한 대한이가 뒤뚱뒤뚱하는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풀썩 안겼다.
대한이는 또래보다 성장이 조금 느린 편이라고 했다. 말도, 걸음마도 조금 부족해 보였다. 류원은 아이를 번쩍 안아 들고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마구 비볐다.
아이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숨이 넘어갈 듯 웃는 아이와 그 아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류원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류원을 따라 아이들을 목욕시키고, 청소하고, 식사를 챙겨 주었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하늘이 예쁜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갑자기 품에 안긴 대한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해원은 영문도 모른 채 대한이를 어르고 달랬지만 아이는 더 서럽게 울기만 했다. 요란한 울음에 활동 선생님이 다가와 대한이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대한이도 알거든요, 해가 지면 봉사자들이 돌아간다는 걸…….”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울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뺨을 타고 눈물이 떨어졌다. 따뜻한 정보다 이별의 아쉬움을 먼저 알아 버린 아이들, 매일 낯선 사람에게 정을 붙이고 시간을 보내다가 이별을 맞이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상상을 해 보려고 해도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그래도 이 아이들은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고 했다.
“대한아 울지 마.”
“가지, 마.”
해원의 소매를 꽉 움켜쥐고 도리질하는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러워서 마음이 아팠다. 해가 지면 텅 빈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일 아이의 모습이 제 마음을 괴롭혔다. 대한이를 꽉 안은 팔에 힘을 주고 울음을 삼켰다.
소매를 잡고 놓지 않는 대한이를 선생님 여럿이 달려들어 억지로 떨어뜨려 놓고 돌아서는 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쇳덩이를 매달아 놓은 것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빨리 가세요.”
“대한아, 선생님이랑 어야 갈까?”
선생님이 말을 시키고 달래도 대한이는 막무가내로 울기만 했다. 결국 해원은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대한이가 잠들 때까지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펑펑 울어 버렸다.
“대한이, 대한이 입양 생각하시는 거죠?”
“…사실은 그래. 너는 어때?”
해원은 사실 자신이 없었다. 아이를 키워 본 적도 없고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아이를 데리고 와 키우는 건 아이에게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어 신중해야 하는 일이었다.
“저한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그래. 그래도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마. 네가 싫으면 나도 싫어. 아무리 아이가 예뻐도 나는 네가 더 중요해.”
해원은 일주일 동안 현실적인 육아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과연 남자 둘이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판단이 필요했다. 마침 촬영이 없어 시간을 낼 수 있었다.
현실적인 자문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을 방문했다. 선생님과 차분하게 아기 인형으로 직접 젖병을 잡아 보고 기저귀를 갈아 보는 등 육아를 직접 체험해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심리 상태 역시 상담을 통해 확인했다. 상담 결과 해원 역시 가족에 대한 경계가 무너진 상태였다.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가족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가기로 했다.
“입양은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생각해야 하고, 또 자신이 입양아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도 고려해야 합니다. 입양할 아이가 3세라고 했죠? 그럼 아직 많이 어리니 입양이라는 개념을 모를 거예요. 하지만 아이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지 아니면 미움받고 있는지 또는 누가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다 알고 있어요.”
“…처음부터 입양아임을 밝히고 키우면 안 될까요. 어차피 강류원 씨가 유명 배우다 보니 어떤 식으로든 알려질 게 분명한데. 나중에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알게 되면 그게 너무 아플 거 같아서요.”
“음, 그것도 나쁘지 않아요. 하지만 거기에는 전제가 붙어요. 아이를 많이 사랑하고, 아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노력하고 있음에도 입양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전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으니까요. 아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세요. 더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알려 주시고요.”
“네……. 근데 아직 자신이 없어요. 제가 정말 아이를 입양해도 될까요.”
“저는 해원 씨 같은 사람들이 입양을 해 줬으면 좋겠어요.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육도 받고 상담도 소홀히 하지 않았잖아요. 밤에는 위탁 가정에서 아이를 지켜봤다고 하셨죠?”
해원은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상담을 진행했다. 그리고 기관에서 소개해 준 위탁 가정을 방문해 아이를 관찰했다. 언제 우는지, 언제 웃는지, 아이가 배변하면 어떻게 해 줘야 하는지, 훈육은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모두 기록하고 눈에 담았다.
“입양 전 기관을 찾아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몇 명 없어요. 사실 시간도 없을뿐더러 자신을 맹신하기 때문이죠. 아이 하나쯤 못 키우겠어?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에요.”
“…….”
“그리고 입양을 결정한다고 해서 바로 승인이 나는 게 아니니까요. 약 한 달에서 두 달가량 시간이 걸리니 그 기간 동안 기관에서 더 교육받으시고 아이를 찾아가 교감을 해 보세요.”
그리고 그날 류원에게 대한이를 입양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류원은 매우 기뻐했다. 저렇게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를 안겨 주지 못한다는 게 조금 서글펐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입양 절차는 조금 까다로웠다. 아이가 특수한 상황 그러니까 유명 배우에게 입양되어야 하는 상황이라 더욱 속도가 더뎠다. 보통 한두 달이면 승인이 난다는데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심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는 동안 해원은 보육원을 주기적으로 방문해 대한이와 거리를 점차 좁혀 나갔다. 생일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등 기념일에는 빠지지 않고 아이를 찾아갔다.
류원은 류원 나름대로 아이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해원처럼 기관에서 상담을 받고, 현실적인 육아를 경험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해원이 보육원에 방문하는 날에는 모든 스케줄을 제쳐 두고 함께했다.
입양 절차가 길어질수록 해원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입양 때문에 혼인신고만 우선 먼저하고 결혼식은 미뤄 둔 상태였다.
해원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였을 때 간신히 입양 승인이 떨어졌다. 그 대신 조건이 따라붙었다.
2년간 두 달에 한번 아이의 발육 상태를 기관에 보고하라는 부가적인 조건이 따라붙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원은 마냥 기뻤다. 대한이의 아빠가 될 수 있어 기뻤다.
“아빠가 되는 기분이 어때?”
“떨려요.”
류원이 해원의 코트를 가지고 나와 어깨에 걸쳐 주었다. 다급하게 차에서 내리느라 코트도 입지 않고 얇은 셔츠 차림으로 나왔다. 따뜻한 온기가 묻은 옷감이 부드럽게 몸을 감쌌다.
보육원 마당에는 아이들이 나와 눈을 맞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하나하나 다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해원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런데 재잘대는 아기 새들 가운데 대한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 대한이가 없네.”
“빨리 가 봐요.”
해원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원장실 앞에 서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혹시 아이가 아프거나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류원이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인자한 얼굴의 원장 선생님이 책상 앞에 앉아 계셨다. 그리고 그의 무릎 위에 대한이가 품에 안겨 잠이 들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오셨어요. 대한이가 기다리다가 잠들었어요.”
“저희가 너무 늦게 온 건가요.”
“아뇨, 대한이가 눈이 오면 꼭 이렇게 자더라고요. 대한이 친부모가 보육원 앞에 아이를 놓고 갈 때 눈이 많이 왔었는데 그 기억 때문인 거 같아요.”
“아…….”
해원은 나지막하게 신음을 뱉어 냈다. 온 마음이 상처투성이인 아이였다.
사랑으로 보듬어 주고 안아 줘야지. 더 아프지 않게, 아픈 기억 따위 다 잊어버리게.
해원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류원이 가볍게 어깨를 두드렸다. 원장 선생님이 대한이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리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아이가 작게 투정을 부리며 몸을 움직였다.
해원은 초조한 얼굴로 대한이를 바라봤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해원이 어색하게 아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대한이가 해원을 향해 팔을 쭉 내밀었다. 해원은 얼른 몸을 일으켜 대한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는 안아 달라는 듯이 팔을 흔들었다. 몸을 낮춰 팔을 벌리자, 아이가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우리 대한이 잘 잤어?”
“웅. 아저씨 왜 이제 왔어요.”
대한이가 작게 칭얼거리며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고 뺨을 가슴에 댔다. 작게 하품을 하며 류원을 향해 씩 웃었다. 류원은 말없이 손을 흔들었다. 아빠가 된다는 기분이 조금 묘했다.
“저희가 그동안 대한이를 돌보면서 기록해 둔 노트예요. 알레르기나 무서워하는 것도 여기에 상세히 적혀 있으니까 보시면 도움되실 거예요.”
원장 선생님이 내미는 노트를 받아 앞장을 넘겼다.
[17.1.20 함박눈이 쏟아지던 예쁜 날 온 천사]
손으로 글자를 가볍게 훑었다. 천사라는 말이 썩 마음에 들었다. 아이는 날개만 없을 뿐 천사였다. 예쁜 미소를 가진 천사.
“대한이는 출생 신고도 되어 있지 않아 여기에 온 날로 출생 신고를 했어요. 태어난 지 한 열흘쯤 된 거 같았으니까……. 얼추 비슷할 거예요.”
“여, 열흘이요?”
“믿기 어렵겠지만, 탯줄도 채 갈무리되지 않은 아이가 대문 밖에 놓여 있을 때도 있어요.”
해원이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이를 악물었다. 천하의 몹쓸 인간들, 어떻게 어린 생명을 그렇게 찬 바닥에 버릴 생각을 하는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래도 대한이가 좋은 부모님을 만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아요. 우리 대한이 예쁘게 키워 주세요. 어련히 알아서 잘해 주시겠지만…….”
“그동안 대한이 예쁘게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원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서류를 챙겨 들고 몸을 일으켰다. 활동 선생님들이 모두 나와 대한이를 배웅했다. 해원의 품에 안긴 대한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생님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대한이 잘 가. 아프지 마.”
“대한아, 선생님이 많이 사랑해. 나중에 꼭 보자.”
애틋한 인사를 끝으로 해원은 미리 준비해 둔 카시트에 대한이를 앉히고 차 문을 닫았다. 해원이 선생님들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 * *
대한이가 집으로 오면서 류원과 해원의 일상은 많이 바뀌었다. 아이는 며칠 동안 갑자기 바뀐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잘 먹지 못했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늘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해원의 눈치를 보곤 했다.
해원과 류원은 끈기 있게 대한이와 눈을 마주치고 이곳이 안전하다는 걸 아이에게 말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도 차츰 마음을 열고 다가섰다.
한 달쯤 지났을 무렵 이제는 해원의 옆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류원과 투닥거릴 정도가 되었다. 류원도 적당히 대한이의 장난을 받아 주며 아이 아빠로서 해야 할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고 있었다.
대한이가 곤히 잠들고 해원과 류원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개명신청서 서류가 올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대한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너무 아파서, 이름을 바꿔 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작명소에서 거금을 들여 이름을 지었지만 대한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류원은 막대 사탕을 입에 물고 고심했다. 류원은 두 달 전부터 금연 중이었다. 처음에는 금단 현상에 손을 떨기도 했지만, 지금은 무난하게 극복 중이었다. 그래도 가끔 이렇게 머리를 써야 할 때는 막대 사탕으로 허전한 입안을 채웠다.
“강준영이라는 이름, 예쁜데 왜 대한이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까요?”
“취향이지 뭐. 애들도 나름 취향이 있는 거야.”
류원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고 해원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늘 대한이와 의도치 않게 해원을 두고 툭탁거렸다.
처음에는 장난으로 그런데 이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은근히 질투가 났다. 해원 역시 저보다는 대한이를 더 많이 챙기는 것 같고… 그래서 이런 틈이 생길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해원을 독점했다.
네 살과 서른네 살의 유치한 애정 쟁탈전이었다.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보자.”
“전 사람들한테 알려지기 전에 바꾸고 싶어요.”
강류원이 아이를 입양했다는 소문은 방송가에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다. 준희가 아이의 정서적 문제를 이유로 들어 언론 공개를 막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문제였다. 그럼 아이의 이름을 밝혀야 할지도 모르니,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전에 얼른 이름을 바꾸고 싶었다.
“있잖아. 절대 장난으로 지은 이름은 아니고.”
“……?”
“음… 강하다, 라는 이름은 어때?”
“강하다요?”
류원은 누운 채로 해원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기 중 대한에 버려졌다고 해서 대한이라 이름한 아이가 강하게 잘 커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지은 이름이었다. 나름대로 촬영 중간중간 엄청나게 고민해서 지은 이름이었다.
“하다야, 하다.”
입안에서 굴려지는 이름이 퍽 마음에 들었다. 부르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은 이름이었다. 유명인의 아들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라면 많은 사람에게 기억될 이름을 짓는 것도 나쁘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내일 대한이 일어나면 물어볼게요.”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나 속상할 거 같은데.”
류원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늘 불안하고 안정되지 못한 삶을 영위하던 자신이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또한, 가정을 꾸리면서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천천히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
회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공과금과 비용 처리를 하고, 해원과 함께 장을 보러 가고, 계절에 맞는 옷을 사는 소소한 일들부터 차근차근히 해 나가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늘 내가 아닌 타인이 해결해 주는 삶을 살던 류원에게는 크나큰 발전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나름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일하느라 대한이 돌보랴 힘들지 않아?”
“…아니요. 하나도요.”
“나 이번 영화 끝나면 두 달 정도 쉴 거니까 그때는 내가 대한이 돌보고 할게. 조금만 참아 줘.”
류원은 요즘 영화 촬영이 한창이었다. 거기에 조금 미뤄졌던 다른 영화가 곧 개봉할 예정이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영화 프로모션이나 언론 인터뷰, 시사회 등 헉 소리 나는 스케줄을 소화 중이었다.
“아, 내일 VIP 시사회 잊지 않았지?”
“…네, 하영 누나랑 같이 들어가기로 약속했어요.”
“고하영이랑?”
“…누나가 저 혼자 들어가면 뻘쭘할 거라고.”
류원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고하영은 가끔 아군인지 적군인지 헷갈리게 행동했다. 그래도 해원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보단 낫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포토 월에 끌려들어 가서 사진 찍히지 마.”
“대한이도 데려가면 좋을 텐데 아쉬워요.”
“또 기회가 있을 거야. 준희 형이 백방으로 언론 보도 막고 있는데 네가 대한이 데리고 나타나면 우리 둘 다 죽어. 그리고 아주머니도 계시잖아.”
해원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한이를 데려오면서 혼자서는 아이를 돌볼 수가 없을 것 같아 보육원에서 추천해 주신 아주머니를 도우미로 쓰고 있었다. 보육원 봉사를 오시던 분이라 대한이도 곧잘 따랐고 육아 초보인 해원이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내일 입을 옷 채현이 통해서 보낼 테니까 그거 입고 와.”
“아니요. 준비 안 해 주셔도 됩니다. 저 옷 많아요.”
옷이 많다 못해 드레스 룸이 터질 지경이었다. 류원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옷을 사다 날랐다. 기분이 좋아서 혹은 우울해서, 영화가 슬퍼서, 좋은 시나리오를 봐서, 촬영 컨디션이 좋아서, 준희한테 혼나서 등등 이유도 다양했다.
그러면서 한 벌, 두 벌 사다 나른 옷들이 드레스 룸 하나를 꽉 채웠다. 아니 옷걸이가 모자라 류원의 드레스 룸 한 귀퉁이까지 해원의 옷이 점령한 상태였다. 해원이 손사래까지 치며 거절하자, 류원은 눈꼬리를 축 내리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형…….”
“자자, 나 새벽부터 스케줄이야.”
류원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터덜터덜 침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쩐지 애처로워 보였다.
* * *
“하다야.”
“하다아?”
“강하다.”
“응! 하다!”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을 했다. 해원은 기쁜 얼굴로 아이를 품에 안고 보드라운 뺨에 입맞췄다.
“류원이 아빠가 지은 이름인데 마음에 들어?”
“…응?”
“이제 대한이 아니고 하다. 강하다.”
“하다?”
“응. 강류원, 문해원의 아들 강하다.”
아이가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해원의 뺨을 감싸고 환하게 웃었다. 해원은 한쪽 팔로 아이를 안고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아저씨이.”
- 어? 우리 아들 일어났어?
“일어나써.”
아직은 아빠라는 호칭이 불편한지 아이는 류원에게 아저씨라고 불렀다. 품에 안긴 아이가 발을 버둥거렸다. 해원이 바닥에 내려 주자,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자동차를 손으로 밀며 작은방으로 사라졌다.
“여보세요?”
- 어, 무슨 일 있어?
“대한이가 하다, 라고 부르니까 대답했어요.”
- 그래? 다행이네.
“준영이라고 부를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하다라고 하니까 얼른 돌아봤어요.”
해원은 신이 나서 조잘조잘 떠들어 댔다. 그러다가 문득 주변이 좀 소란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뭐, 하고 있어요?”
- 인터뷰 중이야. 잠깐 촬영 끊고 전화받은 거야.
“아… 죄송합니다. 얼른 일 보세요.”
해원은 화들짝 놀라 류원의 말도 듣지 않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쥔 손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이 류원이라서…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에 앞뒤 가리지 않고 전화부터 건 게 화근이었다.
손에 쥔 휴대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발신자는 채현이었다. 해원은 힘없이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형, 저 시간 없어요. 얼른 문 좀 열어 주세요.
해원은 다급한 목소리에 얼른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대문을 열고 마당을 가로 지르는 채현의 손에는 짐이 잔뜩 들려 있었다.
“이게 다 뭐야.”
“형 시사회 참석하실 때 입을 옷이랑 구두랑 타이, 시계랑 각종 액세서리 기타 등등이요.”
“뭐?”
“액세서리는 재영이가 심사숙고해서 고른 거니까 꼭 착용하셔야 해요. 그럼 전 형 픽업하러 가야 해서. 이따 봬요.”
채현은 홀가분한 얼굴로 짐을 현관에 내려놓고 숨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집을 나섰다. 류원의 스케줄이 많다는 소리가 괜한 소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요즘 류원은 영화 홍보 때문에 이곳저곳 얼굴을 많이 비추고 있었다. 류원이 좀 한가해지면 채현을 불러 식사라도 한번 해야겠다.
* * *
지하 4층에 주차를 하고 하영을 기다렸다. 한 십 분쯤 지나자 주차장 안으로 익숙한 차량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해원의 차 옆에 주차한 하영이 차에서 내려 차창을 두드렸다.
해원은 얼른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하영이 해원을 보자마자 낮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오늘 너무 근사한 거 아냐?”
“…형이 너무 과하게 입혀 주신 거 같아서.”
해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콧등을 긁었다. 하영이 해원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그의 옷을 감상했다.
그는 안에 검은색 셔츠를 입고 버건디 컬러의 세련된 쓰리피스 슈트를 입었다. 광택이 나는 검은색 타이를 착용해 약간 포인트만 주었고, 손목에는 슈트와 언밸런스한 느낌을 주는 클래식한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그 언밸런스함이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와 강류원 센스 장난 아닌데?”
“장난치지 마세요.”
“이리 와 봐, 피부톤 좀 잡고 입술도 도톰하게 바르자.”
“어, 어! 아니요. 시, 싫은데.”
눈앞에서 플래시가 펑펑 터졌다. 하영은 연신 간드러진 웃음을 지으며 방향을 바꿔 가며 포즈를 취했다. 해원은 어설프게 웃으며 절반 정도 하영의 장단에 맞춰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해원은 입술에 바른 제품이 어색해서 자꾸만 혀를 날름거렸다. 그럴 때마다 하영이 타박을 주며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형이 포토 월 가서 사진 찍히지 말랬는데.”
“거짓말도 잘해. 이렇게 근사하게 입혀 놓고 포토 월에 가지 말래? 강류원 뻥이 과하네. 일단 들어가자. 무대 인사 시작하겠다.”
막 포토 월을 벗어나려는 찰나, 기자들 서넛이 모여 해원을 바라보며 속닥거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묘하게 사람들이 저를 한 번씩 힐끗거리는 기분이었다.
“뭐해 빨리 와.”
하영의 재촉에 얼른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류원의 시사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었다. 지난번에 한 번 기회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자신의 촬영 스케줄이 겹치면서 부득이하게 참여하지 못했다. 하영을 따라 들어가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데 주변에 앉은 사람들이 해원을 힐끗거렸다. 괜히 민망한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주연 배우와 감독이 무대에 올라와 영화를 소개하고 인사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곧 시사회가 시작된다는 안내 멘트가 들리고 해원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박수 소리와 함께 감독과 주연 배우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사회자가 감독을 소개하고 주연 배우를 소개하고 있음에도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류원은 코발트블루 컬러의 슈트에 노타이 차림이었다. 안에 받쳐 입은 흰 셔츠의 단추를 두어 개 풀어놔 움직일 때마다 은근히 벌어지며 시각을 자극했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으며 류원만 바라봤다.
드디어 류원의 인사 차례가 되었다. 류원은 마이크를 넘겨받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신선호 역을 맡은 강류원입니다.”
꺄아, 뒤쪽에서 요란한 함성이 들려왔다. 류원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환호에 응답했다.
“영화 정말 재밌을 겁니다. 작년 겨울 엄청나게 추웠잖아요. 그 추위에 우리 배우들, 감독님, 스태프들이 몸 사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만든 영화입니다. 부디 예쁘게 봐 주세요. 감사합니다.”
류원의 인사를 끝으로 영화가 시작되었다. 무대를 빠져나가는 류원과 언뜻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영화는 강류원의 입이 마르고 닳도록 재밌다고 이야기한 만큼 정말 몰입도가 높았다.
시사회가 끝나고 해원은 하영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조심해서 들어가고 나중에 또 봐.”
“네, 누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하영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해원은 주머니 속에 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류원에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이후에 스케줄이 있을까 봐 잠시 망설였다. 아까도 인터뷰 중에 전화를 해 류원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터라 더 내키지 않았다.
결국, 전화 거는 걸 포기하고 차에 올랐다. 막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 찰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류원이었다.
해원은 지하 3층까지 올라온 차량을 잠시 정차시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벌써 나갔어?
“아니요, 저 지하 주차장이에요.”
- 몇 층?
“지하 3층이요.”
- 거기 있어. 내려갈게.
전화를 끊고 건물 입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시동을 끄고 잠시 기다리자, 류원이 건물을 빠져나와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짧게 클랙슨을 울렸다. 그제야 류원이 차를 발견하고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수석으로 올 줄 알았던 그가 운전석으로 다가와 차 문을 열었다.
벌컥, 문이 열려 놀랄 새도 없이 류원은 해원의 뺨을 감싸고 입술을 부딪쳤다. 입술을 가르고 혀가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입안을 들쑤셨다.
해원은 잠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몸에 안전벨트가 채워져 있어 불편했지만, 적극적으로 입맞춤에 응했다. 입안 구석구석 그의 꽃 냄새가 닿고, 냄새가 닿는 곳마다 타액으로 젖었다.
한참 만에 입술이 떨어지고 해원의 눈가를 가볍게 쓸며 작게 속삭였다.
“아까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러고 싶었어.”
“…저도요. 형 오늘 정말 멋있어요.”
“문해원도 오늘따라 더 요망하고 근사하네.”
서로 얼굴을 맞댄 채 웃음을 터뜨렸다. 류원은 다시 한번 해원의 입술을 물었다가 놓았다.
“마음 같아선 같이 집에 가고 싶은데 다음 스케줄 있어. 집에서 봐. 일찍 들어갈게.”
“네, 식사 챙겨 드세요.”
류원은 운전석 차 문을 닫아 주고 손을 흔들었다. 해원은 못내 아쉬워 차장을 내리고 손을 내밀었다. 류원이 작게 웃으며 손등에 입을 짧게 맞췄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같이 살아서인지 가끔 이런 이별의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서로에게 더 애틋하고 애절했다.
“아, 보내기 싫다. 그냥 펑크 내고 집에 갈까?”
“이 팀장님한테 정말 죽을 수도 있어요.”
“이따 봐.”
둘은 서로를 향해 애틋하게 손을 흔들며 헤어졌다. 두어 시간 후면 볼 사인데도 왜 이렇게 애틋한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석 달 후, 대한이의 이름을 ‘강하다’로 바꿔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류원은 개명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아이의 입양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어차피 밝혀질 일이니 오래 끌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하다의 입양 사실은 류원 스스로 직접 밝히고 싶었다. 나중에 하다가 커서 이 기사를 접했을 때, 혹시라도 숨겨진 건 아닌지 의심하거나 실망하지 않도록. 네 존재가 절대로 부끄럽거나 버겁지 않았다고 꼭 직접 말해 주고 싶었다.
강류원이 아이를 입양했다는 소식으로 세상이 시끄러울 때, 하다네 세 식구는 강원도의 한 펜션에서 따뜻하고 오붓한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다는 류원의 허벅지에 올라앉아 류원이 읽어 주는 동화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페토 할아버지는 꼭두각시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어요. 너는 이제부터 피노키오란다.”
“피노키오.”
하다는 입을 살짝 벌리고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침이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르고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형, 이 팀장님 전화요.”
류원은 동화책을 내려놓고 전화기를 넘겨받았다. 하다는 류원의 품에 안겨 가슴팍에 붙은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아이 특유의 부드럽고 간지러운 냄새가 풍겼다.
“무슨 일이야.”
- 기자회견 한 번 할래?
“아니.”
- 생각하는 척이라도 좀 하고 대답하면 덧나냐. 혹시나 하고 물어본 내가 등신이지.
“더 할 말 없으면 끊어. 하다 동화책 읽어 줘야 해.”
류원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 버리고 하다의 엉덩이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이는 잠이 오는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아직 저녁도 안 먹었는데…….
“아들 졸려?”
“으응, 졸려.”
“맘마 먹고 코 잘까?”
“시러.”
아이가 의사 표현을 하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해졌다. 좋고 싫음이 명확했다.
“나 해님한테 갈 거야.”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힘겹게 류원의 품에서 빠져나온 하다는 곧장 거실을 가로질러 해원에게 달려갔다. 하다는 아빠라는 말은 아직 잘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해원을 해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류원도 몸을 일으켜 해원의 곁으로 다가갔다.
해원의 앞에 선 하다가 두손을 앞으로 모으고 해원을 올려다봤다.
“해님, 안아 주세요.”
“그럴까?”
해원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몸을 숙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다가 품으로 풀썩 안겨 들었다.
“해님, 저도 좀 안아 주세요.”
막 몸을 일으키려던 해원이 류원을 올려다보고는 피식 웃었다. 하다가 하는 건 다 따라 하는 강류원이 철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또 그게 귀엽기도 하고…….
입가에 드리워진 웃음기가 지워지지 않았다. 행복하다는 게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행복함이 밀려들었다.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이런 행복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빨리요.”
“하다 안고 있잖아요.”
“그럼 내가 안지 뭐.”
류원이 두 팔을 벌려 하다를 품에 안은 해원을 감싸 안았다. 하다는 류원과 해원의 품에 갇혀 몸을 버둥거렸다.
“저리가아, 저리가!”
“해님, 하다만 예뻐하지 말고 나도 좀 예뻐해 주라.”
류원이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해원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장난스럽고 요란한 저녁이 지나가고, 하다는 해원의 품에서 곤히 잠들었다. 해원은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 하다를 아기 침대에 눕혀 두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서는 류원이 소파에 앉아 시나리오를 뒤적이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작품 있어요?”
“…아니. 다 눈에 안 차. 그냥 자꾸 쉬고 싶네.”
“…쉬세요. 제가 벌면 되잖아요.”
“그럴까? 이참에 은퇴나 할까?”
“그렇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류원은 흥미로운 눈으로 해원을 바라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이고 제 곁에 앉았다. 해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저는 형이 행복하고 좋아하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
“예전에 형이 잊히는 게 두렵다고 했잖아요. 이제 두려워하지 마세요. 저랑 하다가 계속 기억할 거예요. 형이 배우든 아니든. 너무 힘들고 지치면 그만하셔도 돼요.”
조곤조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으며 류원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마음에 따끈한 열기가 꽉 들어찼다. 이 기분을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 문해원으로 꽉 찬 마음은 이제 더는 외롭거나 공허하지 않았다.
“고마워, 너 없으면 잠도 못 자는 반푼이를 예뻐해 주고 사랑해 줘서.”
“…전, 형을 만나지 않았다면 벌써 죽었을지도 몰라요.”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사람들이 운명적으로 만났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돌연사를 했을 피스틸과 일주일에 다섯 시간을 간신히 잠드는 스테먼이 만나 서로를 치유하고 보듬었다. 그리고 오직 죽음만이 갈라놓을 수 있는 그런 뜨겁고 진한 사랑에 빠져들었다.
운명은 두 사람 관계를 확신하는 계기였을 뿐, 서로를 사랑하는 건 각자의 의지였다.
조용히 서로에게 스며들어, 꼭 닮아가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서로를 생각만 해도 빙그레 미소 지어 지는 그런 사랑을 받고, 주고 있었다.
공허한 가슴에 대중이 주는 사랑을 필사적으로 새겨 넣던 강류원이 이제는 문해원이 주는 뜨겁고 단단한 사랑을 가슴속 깊이 아로새겨 넣었다.
아로새기다 외전 (에필로그)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