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초(毒草) : 아로새기다 외전
1. 권태
쾅!
류원은 고가의 촬영 의상을 그대로 착용한 채 메이크업도 지우지 않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현관문이 벽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류원은 현관 앞에 놓인 슬리퍼도 신지 않고 곧장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촬영 의상으로 추정되는 허름한 점퍼를 입은 해원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류원은 손에 쥔 재킷을 소파에 내던지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문해원.”
“…….”
“준희 형이 한 말 사실이야? 네 입으로 말해 봐.”
“…형 진짜 죄송해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어요.”
류원은 목을 죄는 넥타이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인상을 구겼다.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 헛숨을 내쉬었다.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해원은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사건의 발단은 류원의 미국 화보 촬영이었다. 해원과 류원, 둘 다 촬영 스케줄이 빡빡해서 이렇다 할 여름 휴가도 보내지 못한 채 가을을 맞이한 상태였다.
“4박 5일짜리 의류 화보 촬영이야.”
“…그래? 나 지금 당장 급한 거 없지?”
“뭐 당분간은. 이참에 휴가라도 다녀올래? 해원이도 촬영 막바지라며, 하다랑 같이 해서 다녀오면 되겠다.”
류원은 화보 스케줄을 확인하고 날짜를 가늠해 보았다. 그때쯤이면 해원의 스턴트 촬영도, 자신의 영화 촬영도 거의 막바지라 어느 정도 여유가 있을 듯싶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제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루한 통화연결음이 길게 이어지고 한참 만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바빠?”
- 아뇨, 통화 괜찮아요. 형, 식사하셨어요?
“응, 먹었지. 혹시 이번 달 말쯤에 시간 어때? 나 의류 화보 촬영이 잡혔는데 네 일정만 맞으면 같이 가고 싶어서. 하다도 같이.”
- 음……이번 달 말이면 이쪽 현장도 얼추 마무리될 거 같긴 해요. 저는 좋은데 같이 가도 돼요? 괜히 폐 끼칠까 봐서….
그래서 류원은 어렵게 촬영 일정을 조율해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그런데 순조로울 것만 같던 가족 여행은 시작도 전에 파투가 나고 말았다.
“이게 말이 돼? 여권 재발급해 놓은 거 안 찾아서 무효 된 거 알고 있었어, 몰랐어?”
치미는 짜증을 이기지 못한 류원이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리고 언성을 높여 훈계하듯 다그쳤다.
“…알고 있었어요.”
해원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다시 신청해서 여권 찾아야 할 거 아니야. 넌 도대체!”
“…재촬영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 미처 신경을 못 썼어요.”
해원은 고개도 못 들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화내는 류원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진짜 요 며칠 화장실도 갈 시간도 없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이미 촬영을 끝내 놓은 영화 <탈옥> 현장에서 급하게 연락이 와 재촬영을 요청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필 주인공 대역 스턴트를 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 촬영 중인 작품도 주인공 대역이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해원은 현장 두 곳을 오가며 촬영을 소화해야만 했다. 자는 시간까지 쪼개 스턴트 합을 짜고 맞추고 촬영에 돌입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새벽 늦게 촬영이 끝나면 집에 들어가 하다와 류원의 잠든 얼굴만 보고 곧바로 집을 나와야 했다. 잠은 물론 식사할 시간도 없었다.
“문해원.”
“…네.”
“요즘 정신없는 것도 알고 네 상황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번 건 좀 화난다.”
“…죄송합니다. 내일이라도 여권,”
“내일모레 출국이야. 됐어, 쉬어.”
입술을 비집고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류원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재킷을 움켜쥐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드레스룸 문이 쾅, 닫히자 저만치 떨어져서 눈치만 보던 하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해원에게 다가왔다. 하다는 류원이 들어간 드레스룸과 해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새까만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살피는 아이가 안쓰러웠다. 해원은 하다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하다가 손을 뻗어 해원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아빠.”
“하다야, 류원 아빠 화가 많이 났는데 어쩌지.”
“…아빠아, 근데 하다 배고파요.”
“아, 배고파?”
하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6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해원은 하다를 소파에 앉혀 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곧이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현장에 있을 영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너 왜 안 와!
“나, 하다 밥만 차려 주고 갈게.”
- 여기 지금 살벌하다, 최대한 빨리 와. 무술 감독 빡쳤어.
해원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점퍼부터 벗었다. 이모님이 해 놓은 반찬과 국으로 상을 차리고 하다를 의자에 앉혔다. 하다가 숟가락을 드는 걸 보고 해원은 조심히 침실로 다가갔다.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조심히 문을 열었다. 류원은 얇은 무테안경을 쓰고 침대 헤드에 기대어 대본을 보고 있었다.
“형… 저녁 먹어요.”
“생각 없어.”
류원은 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눈도 마주치기 싫다는 듯이 대본에 시선을 두고 차갑게 일갈했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해원은 침대로 다가가 류원의 허벅지에 놓인 대본을 빼앗아 들었다. 그제야 류원이 고개를 들고 저를 바라봤다.
“뭐 하는 짓이야.”
“형은 뭐 하는 건데요.”
“…….”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진짜 시간이 없었어요. 뻔히 며칠째 잠도 못 자고 현장 나가는 거 알면서 꼭 이래야 해요?”
“꼭 이것 때문이 아니라도 넌 매사에 무심하고 무감해. 내가 하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건 기본이고. 항상 나만 바람 불면 바람에 날아갈까, 비가 오면 비에 젖을까 동동거리고 있잖아.”
“…그건.”
“지난주에도 지지난 주에도 너랑 운동 같이하려고 내가 스케줄 뺐다는 거 알 거야. 근데 그거 한 번도 못했어. 정확하게는 네가 일방적으로 펑크 내서 못한 거지.”
“…….”
“하다 핑계로 약속 잊어버리는 건 셀 수도 없고. 올해는 내 생일, 결혼기념일까지 모두 잊어버렸어. 내 말이 틀려?”
해원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류원이 밀리는 일이 잦아진 건 사실이었다. 나이 어린 하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보단 어른인 류원이 이해하는 쪽이 나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류원의 말처럼 올해는 류원의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까맣게 잊고 지나갔다. 뒤늦게 알아채고 류원에게 사과했지만, 그는 담담한 얼굴로 괜찮다고 했다.
“바쁘면 잊을 수도 있지…….”
그 말을 믿었는데, 아마 저 혼자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었다.
“가끔은 네가 날 사랑하긴 하는지 의심스러워.”
“…형!”
“그만하자, 언성 높이기 싫다.”
해원은 침대에서 내려와 저를 지나치려는 류원의 손목을 붙잡아 돌려세웠다.
하다의 양육을 위해서 되도록 무리하게 일정을 잡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사정이 있었다. 그렇다고 류원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제 사랑은 절대 가볍고 쉬운 감정이 아니었다. 마음 속을 까서 보여 줄 수도 없고…….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형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
“저 진짜 형이 그런 생각까지 하는지 몰랐어요.”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당연히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감정도 변하겠지. 예전에는 권태롭다는 의미가 뭔지 몰랐는데 요즘에 그걸 느껴. 아무래도 우리 사이에 권태기가 온 것 같다.”
해원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깨물었다. 제가 누리는 모든 시간은 다 기적이었다. 류원이 아니었다면 보지도, 겪지도, 느낄 수도 없는 일들이다.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무뚝뚝하고 살갑지 못한 성격 탓에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러 먼저 다가서지도 못했다.
그래도 류원을 만나고 많이 고쳐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많이 모자란 모양이었다.
“형이 그런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더 노력해 볼게요.”
“…사랑을 노력한다는 말이 너무 웃기지 않니? 이번 여행은 하다랑 둘이 다녀올 테니까 그렇게 알아.”
류원은 해원의 손을 떨쳐 내고 몸을 돌렸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에 심장이 발아래로 툭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해원은 머리를 벅벅 문지르며 짜증이 차오른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일도 바쁘고 어린 하다까지 신경 쓰려니 심적인 여유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건 류원에게는 변명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무조건 자신이 잘못한 거였다. 제게 중요한 건 일이 아니라 류원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 버렸는지 마음이 심란했다.
* * *
“문해원, 집중 안 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현장에서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질 건데. 아 씨팔, 몸 망쳐서 한 번 쉰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어!”
“…죄송합니다.”
“감독님, 10분만 쉬었다가 가시죠.”
성난 황소처럼 콧김을 뿜어내는 감독의 옆으로 조감독이 달라붙어 그를 달랬다. 조감독이 해원에게 어서 나가라고 눈짓했다.
해원은 사방으로 허리를 숙이고 촬영라인을 빠져나왔다.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몸도 제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에 두른 장비를 풀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다시 운동을 시작하면서 담배를 끊었지만, 오늘따라 담배가 너무 당겼다.
해원은 흡연 구역으로 다가가 안면이 있는 스태프에 담배 한 개비를 얻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자, 반사 작용처럼 입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쿨럭, 쿨럭!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기침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주위에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해 몸을 돌리고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두어 번 담배 필터를 빨고 나자 그럭저럭 연기를 삼키는 게 수월해졌다. 해원은 손가락에 끼운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류원을 떠올렸다.
류원과의 말다툼이 명치끝에 고여 있었다. 생각을 곱씹을수록 속이 쓰렸다. 입술을 비집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해원은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류원이 저를 얼마나 배려하고 아껴 주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는 하다에게도 다정하고 헌신적이었다.
항상 문제는 저였다. 무뚝뚝하고 고지식하기까지 한 성격을 고쳐 보려고 해도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하다에게는 늘 다정다감한 아빠이면서 류원에게는 그러질 못했다.
“문해원 담배 안 끊었어?”
“아…….”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영우가 인상을 찡그리며 담배 연기를 없애려는 듯 허공에서 손을 휘적거렸다. 해원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담배 필터를 빨았다. 길게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무슨 일 있지?”
“…일은 무슨, 그냥 피곤해서 그래.”
“스턴트 한다는 새끼가 정신은 빠져 있고 담배까지 꼬나물고 있는데 이게 피곤해서라고? 지나가는 개가 웃겠네. 지랄하지 말고 이야기해 봐.”
해원은 새빨갛게 불이 붙은 담배를 벽에 살살 문지르며 하얗게 일어난 담뱃재를 털어 냈다. 그러다가 이내 짜증이 치밀어 세게 문지르자 불똥이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바람에 날린 재를 툭툭 털어 내며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실은 형이랑 하다랑 가족 여행 가기로 했는데 내가 탈옥 현장이랑 여기랑 두 군데 뛰느라 여권 발급을 못 받았어. 그래서 형이 화났는데.”
“화났는데?”
“내 사랑이 의심스럽대, 자기를 사랑하긴 하냐고 묻더라. 우리 진짜 권태기인가?”
영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원을 흡연 구역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캔커피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캔커피를 받아 고리를 잡아당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영우가 등짝을 세게 후려갈겼다. 그 바람에 커피가 쏟아져 손을 흠뻑 적셨다.
“아파!”
“와 이 나쁜 새끼!”
“…….”
“짱돌 굴리지 말고 빌어, 새끼야. 땅바닥에 대가리 처박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뭘 생각을 하냐.”
영우는 주머니에서 휴지 뭉치를 꺼내 해원에게 던졌다. 해원은 휴지로 손에 묻은 커피를 수습하고 인상을 썼다.
“…알지. 아는데 너도 알다시피 요즘 현장이 바빠서 정신이 없었잖아. 나도 할 말은 있다 뭐.”
“그럼, 일을 줄이든가. 제발 부탁하는데 챙길 건 챙기고 살아. 이 일이 너한테 무슨 부귀영화를 가져다준다고 가족까지 내팽개치냐.”
그 순간 무언가 제 뒤통수를 세게 후려갈긴 기분이었다. 캔커피를 움켜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모영우의 말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손톱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의 말은 단 한마디도 틀리지 않았다. 저는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류원도 하다도 다 내팽개치고 이러고 있는 건가. 스스로 물음을 던졌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해원은 허탈하게 웃었다. 스턴트맨으로 복귀하고 난 뒤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공백을 채워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부담감이 심했다.
더 혹독하게 훈련하고 몸을 만들었다. 남들보다 항상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혼자 액션 스쿨에 남아서 실수를 복기하고 연습 영상을 분석했다.
현장에서 작은 실수가 치명적인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액션 스쿨 선배 중에는 반신불수가 된 사람도 있고 뼈가 조각나 여러 차례 수술대에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혼자일 때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제게는 사랑하는 류원과 하다가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실수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다. 다치지 않기 위해서.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귀가는 늦어졌고 류원과 대화 한마디 못 하고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류원이 종종 서운함을 토로했지만, 그때는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쉬는 날에는 하다를 돌보고 신경 쓰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류원과 섹스를 한 지도 벌써 몇 개월이 지나 있었다. 계속 강도 높은 촬영이 이어지고 있어 체력 안배를 위해서 류원이 참아 주고 있었다.
“네가 아주 배가 불렀지?”
“…또 뭐!”
“솔직히 류원이 형 만한 사람이 어딨냐. 너 작품 들어가면 항상 현장 스태프들한테 운동화 돌리고, 격주로 밥차 보내 주고, 간식 차 보내 주고. 이 바닥에서 주연배우보다 밥차 더 많이 오는 스턴트맨은 너밖에 없을 거다.”
“…….”
“그게 다 너 무시하지 말라고 형이 외조하는 거잖아. 형은 항상 너한테 신경 쓰고 챙겨 주는데 넌 형한테 뭐하냐. 고맙다는 말이나 제대로 하긴 하냐?”
해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절반쯤 남은 캔커피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커피가 사방으로 튀며 쓰레기통을 더럽혔다.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애꿎은 어깨만 주물럭거렸다.
모영우는 아예 작정한 듯 해원의 뼈 마디마디를 찰지게 후려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말이 다 맞아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야, 권 감독 자리에 앉았다. 가자.”
해원은 옷을 툭툭 털면서 영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말로 실컷 두들겨 맞아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매번 작품을 들어갈 때마다 류원이 제 기를 살려 준다는 명목으로 바쁜 시간을 쪼개 촬영장에 방문했다.
그러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감독들은 항상 류원에게 다음 작품을 같이 하자며 귀찮게 굴었다. 그 상황이 귀찮고 불편할 법도 한데 그는 단 한 번도 얼굴을 구기거나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항상 ‘우리 해원이 잘 부탁드릴게요, 감독님.’하고 살갑게 굴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밥차나 간식 차를 보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촬영장에서 텃새를 당한 적이 없었다. 저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갑자기 류원이 보고 싶었다. 해원은 코끝을 문지르며 새까만 밤을 환하게 밝히는 불빛을 빤히 바라봤다. 이번에는 꼭 류원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해야겠노라고 다짐했다.
“스탠바이할게요!”
해원은 벗어 둔 장비를 다시 착용하고 촬영라인 안으로 들어섰다. 최종적으로 배우와 합을 맞추고 촬영에 돌입했다. 최대한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한 덕분이었는지 단번에 OK 사인이 떨어졌다.
* * *
준희는 동선을 확인하고 차 문을 열었다. 카메라 앵글이 일제히 까만 밴으로 향했다.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전에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지기 시작했다. 류원은 차분한 얼굴로 차에서 빠져나와 하다를 품에 안았다.
꺄악-.
팬들의 고함과 카메라 셔터 소리, 기자들의 질문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하다는 류원의 목을 꼭 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류원은 불안해하는 하다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아이를 달랬다.
“괜찮아, 아빠 있잖아.”
“히잉, 무서워.”
하다는 처음 겪는 상황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울먹였다. 류원이 부드러운 손길로 하다의 등을 쓸어 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취재진과 팬들이 뒤엉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준희와 채현이 양옆에 서서 가까이 붙는 사람들을 밀어내며 공간을 만들었다.
“형, 조금 더 빨리.”
류원의 말을 알아들은 준희가 보폭을 크게 해 빨리 걷기 시작했다. 무리를 둘러싼 가드들도 재빠르게 움직이며 보폭을 맞추기 시작했다. 원래는 잠깐 시간을 내 인사를 할 예정이었지만 하다가 무서워하는 통에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냥 들어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잠깐 멈춰서 인사라도 해.”
준희의 지시를 받은 가드들이 주위에 몰린 사람들을 뒤쪽으로 밀어내며 크게 공간을 만들었다. 하다는 여전히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칭얼거렸고 류원은 제자리에 서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좀처럼 언론에 하다를 공개하지 않았기에 취재 열기가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강류원 씨, 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요.”
“낯선 사람들과 환경이다 보니 아이가 겁을 먹은 모양입니다.”
“문해원 씨는 왜 동행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아, 해원 씨는 스턴트 촬영이 있어서 이번 일정에는 부득이하게 동행하지 못했습니다.”
“팬들에게 한마디만 해 주세요.”
“조심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인사가 끝나고 류원은 여권을 꺼내 수속 절차를 밟았다. 수속 절차를 밟느라 잠시 대기하는 사이에도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류원은 게이트를 통과하면서 팬들과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때서야 하다가 고개를 빼꼼 내밀어 주위를 살폈다. 하다의 귀여운 모습에 다시 한번 탄성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조용해진 주변을 살피고 류원은 하다의 뺨에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하다가 간지럽다는 듯이 류원의 얼굴을 밀어냈다.
“애 놀라게 기자는 왜 이렇게 많이 불렀어.”
“내가 불렀냐, 자기들이 온 거지. 이게 다 강류원 아직 안 죽었다는 증거지 뭐.”
준희가 심드렁하게 대꾸하고 하다의 손에 막대 과자를 쥐여 주었다. 하다는 생글생글 웃으며 막대 과자를 입에 넣었다.
“하다야 삼촌한테 올래?”
“…아니요.”
아직은 주변이 낯선 모양인지 하다는 익숙한 준희의 손길도 거부했다. 준희는 아쉽다는 듯이 하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시간을 확인했다.
“해원이는?”
“…몰라. 촬영하느라 바쁜가 보지.”
“혹시 싸웠어?”
싸웠느냐는 물음에 류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냥 투정이고 심술이었다. 권태기라는 말을 하고 나서 후회했다. 적어도 그 말은 하지 말걸. 해원이 들어오면 사과를 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아쉽게도 그는 밤샘 촬영을 한다며 잘 자라는 짧은 메시지를 보내왔을 뿐이었다.
“문해원 무심한 거 하루 이틀도 아닌데 요즘엔 왜 이렇게 조바심이 나는지 모르겠어.”
“사랑싸움은 살살 해라. 안 그래도 이번에 하다랑 너랑만 출국한다고 벌써 불화설이 어쩌고저쩌고하더라.”
“이것들은 무슨 떨어져 있기만 하면 불화설이네. 샴쌍둥이처럼 한 몸처럼 다니라는 거야 뭐야.”
준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짧게 혀를 찼다. 류원의 심기가 좋지 않았다. 어쩐지 이번 미국 출장에서는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할 것 같았다.
“아빠, 해님한테 전화해 주세요.”
류원은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하다를 바닥에 내려놓고 휴대폰을 쥐여 주었다. 아이는 두 손으로 휴대폰을 야무지게 쥐고 류원의 다리에 머리를 기댔다. 멀리 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 여보세요.
“해님.”
- 하다야?
“아빠 나 무서웠어요. 사람들이 엄청 많았는데 막 사진 찰칵찰칵했어. 어… 근데 안 울었어! 막 무서운데 안 울었어.”
하다는 해원의 목소리를 듣자 히잉, 소리를 내며 울먹였다. 공항의 풍경과 있었던 일을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해원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 정말? 우리 아들 씩씩하네. 잘했어. 너무 잘했어. 아빠도 하다가 울면 어쩌나 걱정 많이 했거든. 그런데 다행이다. 우리 하다 너무 착해.
하다는 류원의 다리에 이마를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어 류원을 바라봤다. 류원이 저를 올려다보는 하다의 동그란 눈이 귀여워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자, 아이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 하다야, 류원 아빠 말 잘 듣고 잘 다녀와. 같이 못 가서 미안해. 해님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 걸어 달라고 해. 알겠지?
“응… 우리 몇 밤 자면 만나요?”
- 아빠가 하다 손가락 몇 개라고 했지?
하다의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펼쳐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하나, 두울, 세엣 하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류원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손가락을 다 접은 하다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다섯 개요!”
- 이야, 우리 하다 진짜 똑똑하다. 아빠랑은 하다 손가락 다 접히면 만날 수 있어.
“아, 그렇구나. 해님 보고 싶어요.”
- 아빠도 하다 보고 싶어.
“히잉.”
하다가 우는 소리를 내며 손에 쥔 전화를 더 꽉 움켜쥐었다. 류원은 불안해하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주며 쓰게 웃었다.
- 류원 아빠 말 잘 듣고 씩씩하게 잘 놀다 와. 알겠지?
“응!”
- 대답도 잘하고 우리 아들 다 컸네. 하다야 이제 류원 아빠 좀 바꿔 줘.
하다는 휴대폰에 짧게 입 맞추고 류원에게 내밀었다. 당연히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통화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계속 숫자가 바뀌고 있었다.
“해님이 바꿔 달래요.”
하다는 팔랑팔랑 준희에게 달려가 두 손을 야무지게 내밀었다. 그러자 준희가 막대 과자를 꺼내 하다의 입에 넣어 주었다. 류원은 숨을 삼키고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 형,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어.”
- 반성하고 있을게요. 다녀오면 저랑 대화해요.
“그래.”
류원은 짧게 대답하고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 휴대폰을 의자에 내려놓고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건 뭐랄까. 화가 난다기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컸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족 여행이었다.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제 상식선에서는 해원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렇게 가 버리면 해원의 마음이 불편할 걸 뻔히 아는데도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어쩜 이리 속이 좁을까.
하지만 이번 일은 해원이 무조건 잘못한 거였다. 아무리 바빠도 신경 쓰려면 충분히 신경 쓸 수 있는 일이었다.
“아빠, 아빠!”
입에 초콜릿을 잔뜩 묻힌 하다가 방긋방긋 웃었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하다의 입가를 닦아 주며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비볐다.
“하다는 아빠랑 단둘이 여행 가는 거 괜찮아?”
“우웅, 근데 해님도 있으면 좋겠어.”
“아빠도.”
“해님이 이만큼 자고 나면 볼 수 있대.”
하다가 손가락 다섯 개를 야무지게 펼쳐 류원을 향해 흔들었다. 고사리손이 귀여워 손바닥에 쪽쪽 입 맞췄다.
일정은 10박 11일이었다. 류원은 하다에게 넓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연예인 아빠를 둔 덕분에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던 아이가 해외에서는 좀 자유롭게 돌아다니길 원했다. 그래서 조금은 무리하게 스케줄을 조정해 체류 기간을 늘렸다.
그런데 해원을 두고 가려니 입 안이 영 쓰다. 류원은 애써 복잡한 마음을 털어 내고 하다의 머리카락에 짧게 입 맞췄다.
“가서 사진도 많이 찍고,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게 놀다 오자. 알겠지?”
“응!”
“아빠 촬영할 동안은 삼촌, 이모들 말 잘 들어야 해.”
“응!”
* * *
촬영은 순조로우면서도 순조롭지 않았다. 류원의 컨디션이 분 단위로 급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직업정신이 있어서 카메라 셔터가 눌릴 때는 얌전했다.
“OK, 다음 의상 준비합시다.”
사진작가의 말에 류원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 버리고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준희에게 재킷을 넘겨주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준희는 류원이 의상 체인지 전에 잠시 쉴 수 있도록 작가에게 양해를 구했다. 류원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꽉 눌렀다.
해원과 떨어진 여파인지 아니면 시차와 컨디션 난조 때문인지 잊고 있던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류원은 사흘 동안 3시간밖에 못 잤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기분이었다. 모든 게 문해원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갔다.
푸석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메이크업은 두꺼워졌고 입 안은 모래를 씹은 것처럼 버석하기만 했다. 씹어 삼키는 게 고역이었다. 포도당 캔디 몇 알로 무식하게 버티고 있었다.
“너 괜찮아?”
“전에는 일주일도 버텼는데 뭐. 아직은 버틸 만해.”
“…화보 일정만 소화하고 들어가자. 휴가 보내려다가 너 송장 치르겠다. 내일 오전이면 촬영 마무리되니까…….”
“호들갑 떨지 마. 고작 사흘밖에 안 지났어.”
준희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한동안 걱정하지 않았던 류원의 수면 패턴에 문제가 생기면서 그 역시 생각이 많아졌다.
이 일로 인해 문해원이라는 사람이 강류원의 삶에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둘이 헤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강류원은 연예계 생활뿐만 아니라 인생을 접어야 할 판이었다.
“커피 마실래?”
“어, 투 샷 추가해 줘.”
피곤한 눈가를 문지르며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채현과 놀고 있는 하다를 바라봤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앉아 블록을 조립하고 있었다.
그림 같은 모습에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실행했다. 네모난 화면에 담긴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채현이 아니라 해원이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잠시 했다.
‘보고 싶다. 문해원.’
돌이켜 보면 유치하고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었다. 해원이 얼마나 바쁜지, 요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속 좁게 굴었다. 그깟 여행이 뭐라고.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 버린 생각에 스스로가 어이가 없어 허허 웃어 버렸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더니 이 관계에서는 자신이 약자였다.
류원은 자조하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류원이 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시차를 상기하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현지 시각은 오후 4시 20분 한국은 오전 8시 20분이었다. 지금쯤 해원은 일을 하고 있거나 바쁘게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전화 대신 메시지를 작성하려는데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해원이었다.
“…여보세요.”
- 형, 저 아무것도 안 했는데 기사 그렇게 난 거예요. 진짜 아무 일도 없었고, 그분이 어지럽다고 하셔서 잠시 부축을 해드린 것밖에 없어요. 진짜예요.
“해원아……?”
- 아… 기사 보고 전화하신 거 아니에요?
“기사? 무슨 기사. 끊어 봐. 다시 전화할게.”
포털 사이트를 열자 실시간 검색어 해원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류원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다급하게 기사를 검색하자 상단에는 [문해원♥연지우 심야의 데이트]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저와의 불화설 기사가 떡하니 올라와 있었다.
“씨발.”
작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연지우는 현재 해원이 참여 중인 영화의 주연배우였다. 류원은 차마 기사를 클릭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강류원!”
커피를 사러 간 준희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류원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류원은 기사를 클릭했다. 빠르게 스크롤을 내리자, 해원이 연지우의 허리를 감싸 부축하고 있는 사진이 보였다. 그리고 어디론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여러 장 찍혀 있었다.
[배우 강류원의 배우자로 알려진 스턴트맨 문해원과 신예 배우 연지우가 심야에 은밀한 데이트를 즐겼다.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거리를 걸었고 애정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문해원은 강류원과의 불화설이 대두된 가운데…….]
조금 더 스크롤을 내리려는 순간, 준희가 휴대폰을 빼앗아 들고 커피를 손에 쥐여 주었다.
“뭐 하는 짓이야. 이리 줘.”
“오보야. 이미 연지우 쪽에서 정정 보도 내고 있고, 우리 쪽에서도 대응 중이야.”
“…….”
“뭐하러 이런 거 찾아봐. 속만 상하게.”
“오보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최초 보도한 기자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댓글이나 게시글, 파생된 기사도 봐주지 말고 법적 조치, 하 씨발.”
해원은 공식적인 류원의 배우자였다. 결혼도, 아이 입양 사실도 일부러 언론에 밝혔다. 혹시나 이런 문제가 대두될까 봐. 그런데도 이것들은 공식적인 유부남과 신예 배우의 열애설을 보도한 거다. 부아가 치밀어 머리가 뜨거웠다.
류원은 촬영을 위해 세팅해 놓은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뜨리며 짜증을 부렸다. 화가 났다가 짜증이 났다가, 걱정을 하다가 기분이 엉망진창이었다. 그 새벽에 뭐 하느라 여자와 단둘이 거리를 걷고, 다정하게 허리까지 감싸 부축하느냔 말이다.
으드득, 이가 갈렸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걱정이 밀려들어 머리와 가슴을 꽉 채웠다.
혹시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오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지, 댓글이나 게시글에 상처받은 건 아닌지……. 위험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괜한 일에 신경 쓰느라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류원은 주위를 서성거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류원아 일단 촬영부터 마무리하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스태프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류원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준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류원의 어깨를 끌어다가 의자에 앉혔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은 끝내야 했다. 준희는 류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 스태프들에게 괜찮다며 넉살 좋게 웃었다.
준희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직원들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채현과 블록 놀이에 집중하던 하다가 류원을 향해 달려왔다. 류원은 그제야 표정을 조금 풀고 하다를 번쩍 들어 올려 무릎에 앉혔다.
“아빠, 집에 가고 싶어.”
“…집에 갈까?”
“응, 해님 보고 싶어. 해님…….”
하다가 류원의 품을 파고들며 울먹였다. 방금까지도 블록을 만지며 잘 놀던 아이가 울먹이자 채현이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마침 전화를 끊은 준희가 다가왔다.
“형, 내일 밤 비행기로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해 줘.”
“후, 알았다. 알아볼게.”
대화가 마무리되자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류원의 머리를 만지고 의상과 액세서리를 대보기 시작했다. 그사이 하다는 좀 더 칭얼거리다가 류원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들었다.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자 하다가 으응, 소리를 내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목으로 따뜻하고 간지러운 숨이 쏟아졌다. 고른 숨을 내쉬며 다시 잠든 하다를 확인하고 커피가 든 컵을 집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문해원의 열애설이라니……. 다시 곱씹어 봐도 기가 막혔다. 아깐 너무 당황해서 화가 났지만, 지금은 어이가 없었다.
해원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열애설이 터진 거라 감정 조절이 되지 않았다. 해원이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그건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촬영 준비를 마친 류원이 잠시 양해를 구하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지루한 통화연결음이 길게 이어지고 ‘여보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밥은 먹었어?”
- 아직이요. 형, 그 기사 다 거짓말이에요. 진짜예요. 믿는 거 아니죠? 형!
“어디서 찍힌 거야. 촬영장 아닌 거 같던데.”
- 사실은 제가 어제 촬영을 하다가 조금 다쳤어요.
“뭐?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데.”
다쳤다는 말에 류원의 언성이 높아졌다. 잠든 하다를 품에 안은 준희가 목소리를 낮추라며 류원에게 눈치를 주었다.
- 심한 건 아니고, 착지하면서 땅을 잘못 짚었는데 손목을 삐끗했어요. 그래서 병원에 좀 다녀오려고 했는데. 그날 하필 연지우 씨 매니저가 배탈이 나서 병원에 갔거든요. 감독님이 가는 길이니까 데려다주라고 해서 병원까지 동행한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영우가 운전해서 간 거라 영우도 있었는데 사진을 그렇게 잘랐더라고요.
횡설수설 변명하는 해원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류원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기사가 보도되고 나서 해원이 얼마나 당황했을지 불 보듯 뻔했다. 사납게 날뛰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내일 밤 비행기로 들어갈 거야. 하다가 네가 없어서 그런지 많이 불안해하네.”
- 형은요? 형은… 괜찮으세요.
“…아니, 나도 안 괜찮아. 잠을 못 잤어. 사흘 동안 세 시간쯤 잤나.”
- 아, 어떡해요. 잠도 못 주무셨는데 신경 쓰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해. 촬영은 얼마나 남았어?”
- 저녁때 다 마무리될 거 같아요.
“너 이유 불문하고 열애설 난 건 혼날 각오해. 나 강혜지랑 열애설 났을 때 너 나한테 화냈던 거 기억하지? 한국 가서 보자.”
류원은 비죽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부스스 웃어 버렸다. 한껏 풀이 죽어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해원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함께 살면서 콩깍지가 몇 꺼풀은 벗겨진 줄 알았더니 문해원 한정 슈퍼 콩깍지는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권태기라고 말했던 자신을 속으로 비웃었다. 권태기는커녕, 눈이 아릴 만큼 해원이 보고 싶었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돌아가면 해원을 품에 안고 온몸 곳곳에 키스를 퍼붓고 싶었다.
류원은 피곤한 기분을 털어 내고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얼굴로 촬영에 돌입했다.
* * *
새벽 6시가 다 되어서야 현관문을 열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해원의 나무 냄새가 저를 반겼다. 류원은 비로소 집에 왔음을 실감했다. 곤히 잠든 하다를 방에 눕혀 놓고 곧장 침실로 향했다.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한 류원은 피곤한 눈가를 비비며 조심히 문을 열었다.
조도가 낮은 수면 등을 켜 놓은 방 안은 온화하고 평화로웠다.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로 다가가 잠든 해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불 속에 갇힌 손목을 꺼내 이리저리 살폈다. 그의 왼쪽 손목에는 압박붕대가 감겨 있었다.
류원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다치는 게 일상인 그 직업이 싫지만, 해원이 좋아하는 일이라 그만두라 말할 수도 없었다. 붕대 위에 짧게 입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제 마음의 안식을 가져다주는 해원의 체취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처음 해원을 만났던 그날처럼 졸음이 쏟아졌다. 마음이 벅차오르고 예민한 신경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해원의 품을 파고들고 싶지만, 씻는 게 먼저였다. 옷을 벗으며 욕조에 물을 채웠다. 그사이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욕조에 몸을 뉘었다. 적당한 온도의 물과 제게 안정감을 주는 집에 류원은 긴 한숨을 내쉬며 제가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을 만끽했다.
“형……?”
갑자기 욕실 문이 열리며 얇은 파자마 하나만 몸에 걸친 해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잠이 덜 깨 정신이 없는 듯 잠시 몸을 비틀거렸지만, 곧 안정적인 걸음으로 제게 다가왔다.
혀엉,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했다. 류원은 가까이 다가온 해원의 등을 감싸고 욕조 안으로 끌어당겼다. 갑자기 물속으로 끌려 들어온 해원이 투덜거릴 만도 했지만, 그는 얌전히 제 목을 팔로 감고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조금 전까지 하다가 안겨 있던 품에 이젠 해원이 안겨 있었다. 류원은 고개를 약간 돌려 귓불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더 자지 않고.”
“4시까지 눈뜨고 있었는데, 깜박 잠들었나 봐요.”
“고개 좀 들어 봐. 얼굴 좀 보게.”
해원이 졸린 눈을 연신 깜박이며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했다. 류원은 새까만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뒤통수를 감싸 품으로 당겼다. 문해원의 눈 속에 제가 있고 제 눈 속에는 문해원이 있었다. 이보다 더 이상적인 삶은 없었다.
“형, 눈 빨개요.”
해원의 체취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졸음이 쏟아지고 기운이 빠졌다. 류원은 해원을 끌어안고 작게 속삭였다.
“꼭 너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한숨도 못 잤어. 너는 몰라도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해원아.”
“…저도 형 없으면 안 돼요.”
“이번에 확실하게 느꼈어. 네가 없으면 난 안된다는 거. 권태기라고 말한 거 취소야.”
류원은 해원의 등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그의 온기에 파묻히려 애썼다. 마음이 추웠다. 며칠 동안 방치당한 마음이 너무 차갑고 딱딱했다. 해원이 온기로 마음을 모두 녹이고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게 해 주면 좋겠다.
해원은 안달하는 류원의 마음을 눈치채고 천천히 입술을 맞물렸다. 톱니바퀴가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두 입술이 꼭 맞아 들어갔다.
해원도, 류원도 서로의 입 안을 부드럽게 휘저으며 그간의 불안했던 마음을 천천히 위로받고 있었다. 떨어져서도 안 되고, 떨어질 수도 없는 두 개의 마음이 서로를 향해 더 단단하고 뜨거워졌다.
“형, 불안해하지 마세요.”
“…하아, 해원아.”
“형 아니었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는 이 목숨, 내가 아니라 형 거예요.”
“…….”
“나는 형 거예요.”
욕실의 습한 공기와 해원의 나무 냄새, 그리고 양귀비의 짙은 향이 뒤섞여 오묘한 향을 만들어 냈다.
류원은 눈을 감은 채 해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쩐지 왈칵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이토록 뜨거운 사랑을 받는다는 건 가슴이 터져 버릴 만큼 벅차고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제가 노력하겠다고 한 말은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아니라 제 무심하고 무신경한 성격을 고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었어요.”
“…네 맘 다 알아. 나도 그땐 홧김에 화가 나서 그랬어. 미안해. 안 그럴게.”
“…늘 과분할 정도로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원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류원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시원스레 웃었다. 잔잔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서 기뻤다. 문해원과 함께라서 다행이다.
“…그래도 열애설은 열 받아. 누가 여자 허리에 팔을 그따위로 감으래.”
“아, 넘어지실 거 같아서 저도 모르게…….”
“다음에 또 그래 봐, 그땐 팔 하나쯤 부러질 각오 해야 할 거야. 알겠어?”
“네. 다음부터는 그냥 넘어지게 내버려 둘게요.”
류원은 해원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웃었다. 무뚝뚝하지만 솔직하고, 솔직하지만 또 눈치는 더럽게 없는 문해원이 정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