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현실과 이상의 그 어디쯤
“못 가!”
해원은 씻느라 빼놓은 결혼반지를 끼며 소란스러운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에는 류원과 아들 하다가 신경전 아닌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아침마다 벌어지는 익숙한 풍경에 해원은 팔짱을 낀 채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해원을 발견한 하다가 짧은 팔다리를 쭉 뻗어 류원과 해원의 사이를 호기롭게 가로막았다. 하다가 결연한 표정으로 류원을 올려다봤다. 류원은 하다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여 줄 법도 한데 그는 콧대 높은 사자처럼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눈을 내리깔았다.
“강하다, 아빠 출근해야 해.”
“알아! 근데 해님은 가지 마. 해님은 하다랑 놀아야 해.”
하다가 양팔을 양옆으로 뻗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해원은 입술을 꽉 말아 물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동그스름한 뒤통수가 귀여워 슬쩍 손을 뻗자, 류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치를 줬다.
“너의 해님은 오늘 아빠의 일일 매니저란다.”
“매니저?”
“그래, 아빠가 티브이에 아주 많이 나오지? 티브이에 나오는 사람을 지켜 주는 사람을 매니저라고 하는데 오늘 해님이 그걸 하기로 했어. 오늘 하루는 해님이 아빠를 지켜 주는 거야.”
류원이 턱을 살짝 치켜들며 얄밉게 말했다. 그러자 하다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아이의 작은 뒤통수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다는 도움을 청하는 듯이 고개를 돌려 해원을 바라봤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뽀얗고 통통한 볼을 씰룩거렸다. 하다는 억울한 표정으로 류원과 해원을 번갈아 바라봤다. 맨날 제게 가장 소중한 해님을 독차지하는 류원 아빠가 미웠다.
“해님…….”
하다가 잔뜩 울상을 지으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해원을 불렀다. 해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하다와 시선을 맞추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조심히 문질러 주고 아이를 품으로 당겨 뺨에 입을 맞추었다.
“하다야, 할머니랑 잘 놀고 있어. 말썽 부리면 안 돼. 알겠지?”
“해님, 가지 마세요.”
“우리 하다는 언제 씩씩해져서 해님 지켜 줄 거야? 어리광쟁이는 해님을 지킬 수 없는데.”
“아냐! 나는 지금도 해님을 지킬 수 있…….”
하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원이 해원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곤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방비하게 앉아 있다가 완력에 끌려간 해원이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도 모자라 류원이 얄밉게 혀를 쏙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하다가 입술을 비죽거리다가 이내 와앙, 울음을 터뜨렸다. 기어코 애를 울리고 출근한다.
해원은 인상을 찡그리며 류원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하다가 서러운 눈물을 토해 내자, 이모님이 현관으로 나와 하다를 안아 들었다. 하다는 이모님 목에 매달려 엉엉 서러운 눈물을 쏟아 냈다.
“어휴, 하다 아빠. 애 좀 울리지 말라니까.”
“…죄송해요. 하다가 울면 너무 귀여워서요.”
기어이 아이를 울린 류원이 멋쩍게 웃으며 하다의 작은 머리통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하다는 이모님 목에 매달려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하다야, 아빠가 미안해. 잘못했어.”
“싫어! 흐어어, 아빠 미워.”
“아빠는 하다가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은데?”
“흐앙, 내가 첫 번째가 아니야?”
하다가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로 류원을 돌아봤다. 류원은 눈물로 엉망이 된 하다의 얼굴을 소매로 닦아 주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이 잘게 흔들릴 때마다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고 예쁠까. 류원은 하다가 커 가는 게 대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아쉬웠다.
하다가 손을 뻗어 류원의 소매를 붙잡고 흔들었다. 어서 대답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음, 아빠한테 첫 번째는 해님이지. 아빠가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해님이야.”
간신히 울음을 그친 하다가 다시 와앙,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하다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굵은 눈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보다 못한 해원이 철없는 류원의 팔뚝을 세게 때리고 하다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다가 양팔을 뻗어 해원의 목에 매달려 왔다. 아이 특유의 순하고 부드러운 냄새를 한껏 빨아들이고 하다의 등을 어루만졌다.
토닥토닥, 등을 두드릴 때마다 하다는 욕심껏 해원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약 올리는 듯 류원을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류원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해님.”
“씩씩한 내 아들, 오늘 하루도 씩씩하게 잘 놀고 있어.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우리 하다 공룡 사 줄게.”
“응! 그런데 해님, 해님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요?”
하다는 해원의 목을 끌어안은 손을 풀고 눈을 반짝이며 순진하게 물었다. 해원은 눈물이 아롱아롱 맺혀 반짝이는 눈망울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질문을 상기하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연히 우리 아들 하다지’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어쩐지 오른쪽 뺨이 델 듯 뜨거웠다. 류원이 삐딱하게 서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원은 퍽 곤란한 얼굴로 하다와 류원을 번갈아 바라봤다. 둘 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어서 대답하기가 꽤 어려웠다. 잠시 고민하던 해원이 하다를 조심히 바닥에 내려놓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빨리요, 해님.”
해원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얼른 하다의 귓가에 ‘당연히 하다지’라고 간지럽게 속삭였다. 그리고 곧장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가만히 서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류원이 눈을 부라리며 해원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문해원! 너 거기 안 서?!”
“형, 빨리 오세요. 촬영 늦겠어요.”
씩씩대는 류원의 뒤로 하다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눈물을 쏟아 낸 탓에 발그스름해진 얼굴로 웃는 게 예뻐서 마음이 미어졌다.
하다를 입양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었다. 아이를 하루라도 더 빨리 데려오지 못한 게 너무 후회스러울 만큼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아이가 주는 행복은 류원이 제게 선사하는 행복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다. 하다를 떠올리면 마음이 간질거렸다. 사랑하는 내 아들. 저 아이가 제 아들이라는 게 너무 행복하고 기뻤다.
해원이 싱그럽게 웃으며 하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다야, 아빠는 오늘 밤에 허리가 아작이 날지도 몰라. 그래도 우리 하다가 좋으면 아빠도 좋아.
해원이 숨을 고르며 대문을 열자,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던 스태프들이 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봤다. 해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전지적 참견 영상>이라는 프로그램의 윤정환 PD였다. 해원은 얼른 손을 맞잡았다.
“안녕하세요, 강류원 씨 전前 매니저 문해원입니다.”
“반가워요, 해원 씨. 이 대표님께 상황은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이 하도 간곡히 부탁하셔서요. 그런데 프로그램 취지에 안 맞는 거 아닌가요?”
“아니요, 저희야 조금 더 리얼한 류원 씨 일상도 보고 너무 좋죠. 벌써 기사가 몇 개나 나갔는지 몰라요.”
윤 피디는 즐거운 얼굴로 해원을 바라봤다. 강류원이 먼저 프로그램 출연 의사를 밝혀 왔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는 그냥 스타도 아니고 특A급이었다. 강류원을 섭외하려다가 물먹은 예능 피디만 해도 거짓말 좀 보태서 한 트럭이었다. 예능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강류원의 출연이라니.
강류원의 출연 확정 기사가 뜬 날부터 이미 화제성은 어마어마했다. 식상하다는 반응만 가득하던 시청자 게시판에 섭외력에 대한 칭찬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붙었고 기대된다는 글도 수십 개 아니 수백 개에 달했다.
강류원 급의 배우가 출연만 해 준다면 프로그램 포맷쯤이야 수십 번 바꿀 수 있었다. 모든 일에는 예외라는 게 존재했다.
이 바닥은 어차피 시청률 싸움이었다. 시청률 보증 수표를 모시는데 프로그램 취지? 그런 건 필요 없다.
“문해, 어? 피디님 일찍 오셨네요.”
류원이 씩씩대며 해원을 부르려다 말고 윤 피디를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윤 피디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류원과 악수를 했다. 촬영 시작 전부터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해원은 촬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전달받고 운전석에 올랐다. 차 안에는 카메라 여러 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뒷좌석을 힐끗보니, 뒤쪽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류원이 탈의실처럼 사용하는 커튼 너머를 제외하고는 다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해원은 운전대 근처에 고정된 카메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강류원이 난데없이 이 관찰 프로그램에 출연하겠다며 폭탄을 안고 들어온 날, 준희는 아예 몸져누웠다. 안 그래도 회사를 설립하고 얼마 안 된 시점이라 정신도 없는데 저 화상이 사고를 쳤다며 준희는 우는소리를 해 댔다.
원래대로라면 류원의 메인 매니저인 채현이 출연해야 했다. 하지만 채현이 카메라 앞에 서느니 차라리 일을 그만두겠다며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해원이 일을 떠맡게 된 것이다.
잘해야 할 텐데…….
어색하게 카메라를 흘끗거리고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똑똑, 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해원이 차창을 내렸다.
“매니저님 사전 인터뷰 좀 진행할 수 있을까요?”
“사전, 인터뷰요?”
“네, 간단한 소개랑 질문 몇 개만 하려고요.”
해원은 어리바리한 얼굴로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류원을 찾아 움직였다. 류원은 햇빛을 피해 벽에 몸을 기댄 채 윤 피디와 대화 중이었다. 슬쩍 눈이 마주치자 류원이 옅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민망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이며 제작진 차량에 올랐다.
작가는 종이 한 장을 해원에게 내밀었다. 종이에는 질문 몇 개가 적혀 있었다. 다행히 간단한 질문이라서 쉽게 대답이 가능했다.
“원래는 스튜디오에서 촬영하는 게 일반적인데, 오늘 강류원 씨 스케줄이 화보 촬영에 CF 미팅이 잡혀 있더라고요. 이동 시간이랑 촬영 시간 계산하면 촉박할 것 같아서 부득이하게 차량에서 진행하는 점 양해 부탁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해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카메라가 온전히 저만 비춘다고 생각하니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후, 실수하지 말아야지.’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편안하게 하시면 돼요. 자, 갈게요. 먼저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저는 강류원 씨 매니저이자 스턴트맨인 문해원입니다. 그리고 쑥스럽지만 강류원 배우님의 배우자이기도 합니다.”
“배우자분이 매니저로 출연한 건 처음이라 좀 새로운데 어색하진 않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실제로 제가 강류원 씨 매니저 생활을 해서 어색하진 않습니다.”
“평소 일할 때 강류원 씨를 어떻게 부르세요?”
“처음에는 강류원 씨, 강 배우님 하다가 지금은 편하게 형이라고 합니다.”
“강류원 씨는 주로 이동 시간에 뭘 하시나요?”
“주무실 때도 있고 음악을 들으실 때도 있고 뭐, 주로 대본을 보시는 편입니다.”
제게 집중된 시선이 좀 불편했다. 괜히 머쓱한 기분에 귀 뒤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자, 작가가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일상적인 질문이 몇 가지 이어지고 마지막 질문을 하겠다며 작가가 눈을 반짝였다.
“강류원 씨를 다섯 글자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하고 싶으세요?”
해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본을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대본에는 없는 질문이었다.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섯 글자로 강류원을 표현해 본 적이 없으니 대답이 나오기까지 당연히 오래 걸렸다. 하지만 작가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해원에게 대답을 갈구했다.
한참 만에야 해원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 *
오늘은 <전지적 참견 영상>이 방영되는 날이었다. 류원은 보기 싫다는 해원을 억지로 다리 사이에 앉히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늦은 시간에 방송되는 터라 하다는 일찌감치 잠들어 집 안은 고요했다.
손을 뻗어 협탁에 놓인 맥주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갑자기 해원이 몸을 돌리고 류원의 손목을 잡아채고 냅다 입술을 부딪쳤다. 막무가내로 혀를 밀어 넣고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몸을 더듬었다.
류원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의연하게 해원의 손길을 받아 냈다. 대담하게 젖꼭지를 문질러대는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류원이 아예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어 던지자, 해원은 벌게진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투덜거렸다.
“형! 이걸 꼭 봐야겠어요?”
“이것도 모니터의 일환이야. 내가 어떻게 찍혔고 화면에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지. 그리고 너도 나오는데.”
“형 차라리 나랑 섹스해요. 전 진짜 못 보겠어요.”
해원이 몸을 버둥거리며 류원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하지만 류원이 단단히 허리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았다. 도리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해원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같이 보자. 응?”
류원이 관찰 예능에 출연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단지 충동적이고 즉흥적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생각 없이 결정한 건 아니었다.
석 달 전 준희는 스타온 엔테인먼트에서 나와 ‘원앤원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마침 계약이 만료된 류원도 준희를 따라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준희는 지금 당장은 류원에게 올인하며 신인 배우를 키우고 싶다고 했다. 류원은 그게 못마땅했다.
이 바닥에선 나름 잔뼈가 굵은 인물이지만 간판 배우 하나만 데리고 회사를 꾸려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강류원을 영입한 이상 대응팀이나 법무팀도 꾸려야 했고 여기저기 연이 닿는 곳에 접대도 해야 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류원이 일에 애착이 있고 좋아해서 다작을 하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회사 대표라는 양반은 뭘 믿고 저리 태평한지 모르겠으나, 결정적으로 류원은 준희가 노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매일 대표실에서 게임만 주야장천 해 대는 꼴이 보기 싫었다.
고로 이 관찰 예능은 준희에게 일거리를 물어다 줄 겸 결정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아주 재밌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채현이 출연만큼은 절대로 못 한다고 차라리 회사를 그만두겠다며 엄포를 놓으면서부터였다.
그렇다고 회사 대표인 준희가 출연을 하는 것도 모양 빠지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출연 못 하겠다고 말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준희가 손가락을 딱 부딪치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준희는 이 일의 적임자를 찾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곧 스피커를 타고 익숙한 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원도 처음에는 싫다고 거부했지만, 준희가 하다의 영어유치원 입학 신청서를 히든카드로 빼 들자 대번에 하겠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류원에게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꿩 먹고 알 먹고, 마당 쓸고 돈 줍고, 님도 보고 뽕도 따고의 상황이었다. 가만히 있다가 가장 비싸고 맛있는 떡을 입에 넣어 퍽 만족스러웠다.
가끔 채현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해원이 일을 봐주기도 하고 컨디션이 저조한 날에는 동행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카메라를 달고 예능을 찍는 건 처음이라 색달랐다.
촬영은 유쾌하고 순조로웠다. 가끔 일상적인 애정 표현들이 툭툭 튀어나와 곤란하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류원은 직접 컷을 외치며 손가락 두 개로 자르는 표시를 해 보였다. 아예 방송에 쓰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제작진 속이 타들어 가거나 말거나 류원은 오랜만에 옛날 기분이 나서 좋았다.
해원이 제 매니저로 처음 면접을 보러 왔던 날,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며 모든 게 다 짜증스러웠던 제 앞에 정말 기적처럼 나타난 문해원. 불법 시술을 받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던 그에게서 저만이 맡을 수 있는 짙고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났다.
지독한 불면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었던 그 향이 지금도 제 곁에 머물러 있었다. 그 생각 때문에 조금 머리가 뜨거워지긴 했지만, 촬영은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형 우리 드라이브 갈래요?”
“…드라이브?”
“오랜만에 청평호 가요.”
해원이 리모컨을 집어 들어 티브이 전원을 꺼 버렸다. 잠시 침음하던 류원은 한껏 귀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팔을 벌렸다.
그러자 얼굴색이 밝아진 해원이 품으로 덥석 안겨 왔다. 그것도 모자라 뺨에 입술을 붙이고 쪽쪽, 입 맞췄다. 해원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고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숙여 옷 위로 살짝 도드라진 유두를 입술로 가볍게 쓸었다.
“그럴까?”
본방송을 못 본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 살갑게 굴어 오는 해원을 밀어내고 싶지 않았다. 방송은 해원이 없을 때 따로 결제해서 다시 보기로 보면 되고. 생각을 정리한 류원이 해원의 뺨을 한 움큼 베어 물고 쪽 빨았다. 간지럽다는 듯이 웃는 얼굴이 예뻐 한참을 물고 빨아 댔다.
순진하고 귀여운 문해원. 류원은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하다는 이모님 방에서 놀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류원은 텅 빈 하다 방 대신 이모님 방을 가볍게 노크했다. 잠시 외출하겠다는 말에 이모님은 아주 흔쾌히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드셨다.
해원은 잽싸게 집을 빠져나와 얼마 전 새로 뽑은 V사의 차량 운전석을 차지했다. 새 차 냄새에 기분이 한껏 들떴다. 아직 100km도 뛰지 않은 따끈따끈한 새 차였다. 하지만 곧 뒤따라 나온 류원이 인상을 구기며 다가와 운전석 문을 열었다.
“문해원 내려.”
“형 피곤하시잖아요. 제가 운전할게요.”
“내리라고 했다?”
“부려 먹을 때는 잘도 운전시키더니 완전 치사!”
해원이 투덜거리며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을 빠져나왔다. 차체를 크게 돌아 조수석에 오르면서도 연신 툴툴거렸다.
류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동을 걸었다. 경쾌한 엔진소리에 해원이 눈을 반짝이며 홀린 듯 운전대를 만지작거렸다. 찰싹, 류원이 해원의 손등을 매섭게 때리며 눈을 흘겼다.
“너 운전 험하게 하는 버릇 안 고치면 차 키 다 압수야.”
“험하게 하는 게 아니라!”
해원은 변명하려다 매서운 눈초리에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드라이브하자고 말을 꺼냈다가 혼만 나고 있었다.
차는 부드럽게 차고를 빠져나와 곧장 도로로 들어섰다. 해원은 안전벨트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괜히 배시시 웃었다. 오붓하게 둘만의 시간을 가져 본 게 얼마 만이더라.
혼이 난 것과 별개로 기분이 조금 들떴다. 일에 치이고, 육아에 치이다 보니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이 줄었다.
“이번에 김현 감독 영화 들어간다며?”
“아, 그거 저는 빠지기로 했어요.”
“왜?”
류원은 잠시 신호에 걸린 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원을 바라봤다. <택시>라는 제목의 김현 감독의 신작은 이미 인기배우 유건주가 주연으로 낙점되며 화제가 되었다. 고난도의 스턴트 액션이 많이 들어가는 영화라 스턴트맨 비중이 꽤 큰 작품이었다.
게다가 김현 감독이 액션 스쿨이 아니라 문해원에게 다이렉트로 스턴트 제의를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빠지기로 했다니. 혹시 해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은 저…… 스턴트맨 은퇴를 하려고 해요.”
“뭐, 뭐라고?!”
깜짝 놀란 류원이 목소리를 높이며 곧장 비상등을 켜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해원은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문질렀다.
위험해서 안 된다고 아무리 말려도 스턴트가 하고 싶다고 류원을 끈질기게 설득하던 해원이었다. 그런 그가 은퇴를 입에 올린 것이다. 류원은 안전벨트까지 풀고 몸을 돌려 해원을 바라봤다. 걱정이 한층 가중되었다.
“너 무슨 일 있어?”
해원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얼마 전에 친한 선배가 스턴트 촬영 중에 다리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어요. 근데 형수님이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손만 벌벌 떨고 계시더라고요. 근데 그 모습을 보는데 너무 가슴 아팠어요.”
“…왜?”
“어쩌면 저 상황을 형이랑 하다가 겪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져서.”
“…….”
“그리고 이제 나이도 있고… 은퇴하고 좀 쉬면서 다른 일 찾아보려고요. 하다도 좀 돌보면서 형한테도 제가 조금 더 신경 쓰고 싶어요.”
류원은 가슴이 먹먹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한참 만에 류원이 팔을 뻗어 해원의 어깨를 붙잡아 품 안으로 당겼다. 앉은 자세라 조금 불편하지만, 해원은 군말 없이 류원의 어깨에 뺨을 대고 팔을 둘러 안았다.
“해원아.”
“…….”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스턴트맨이라는 직업이 절대 안전한 직업은 아니지만 네가 하고 싶다면 해도 돼. 물론 네가 다치면 속상하고 힘들 거야. 그래도 그건 내 몫이니까.”
“…형.”
“그리고 넌 전처럼 무모하지 않잖아. 나 때문에, 그리고 하다 때문에 더 조심하고 더 신중하게 점검하고 또 점검한다는 거 알고 있어.”
해원은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코끝이 찡해졌다. 일 자체가 워낙 험한 일이고 아무리 조심해도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일어났다. 보호 장비를 차도 찢어지고, 긁히고, 멍들고 몸에 상처가 남기 일쑤였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기 전에 상처를 한번 싹 살피고 류원의 앞에서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걱정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류원은 그럴 때마다 귀신같이 제 다친 부위를 알아차리고 약을 발라 주거나 얼음찜질을 해 주었다.
어두운 낯빛을 마주할 때마다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놓을 수가 없었다. 남들은 얼굴도 나오지도 않는 일을 왜 하느냐고 하지만 오직 나만 알 수 있는 묘한 희열이 있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그 일을 자신이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수님의 두려운 얼굴을 마주하자 생각이 많아졌다. 제게도 가족이 있었다. 버거울 만큼 사랑을 퍼부어 주는 류원이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었다.
작은 상처만으로도 가슴 아파하는 류원인데 혹시 현장에서 크게 다치거나 최악의 경우 죽기라도 한다면, 그건 정말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사랑하는 제 가족을 위해서.
“형, 저 집에서 먹고 놀까 봐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죠?”
“…뭐?”
“저 조금만 놀게요. 조금만.”
류원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꽉 끌어안은 몸을 놓아주고 아프지 않게 이마를 콕 쥐어박았다. 해원이 멋쩍게 웃으며 이마를 문질렀다.
“평생 놀아도 돼. 나 너랑 하다 먹여 살릴 자신은 있어. 인기 떨어져서 아무도 안 찾아주면 그땐 막노동이라도 해서 먹여 살릴 테니까 놀고 싶으면 실컷 놀아.”
“…감사해요., 형.”
해원은 류원이 했던 것처럼 손을 뻗어 류원의 어깨를 감싸 품으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몸을 맡겨 오는 류원을 꽉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몸에서 오직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진한 양귀비의 꽃내음이 피어올랐다. 중독적이면서도 유혹적인 그 향에 몸이 동했다. 마른 입술을 느리게 핥으며 류원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우리 드라이브 말고 호텔,”
류원은 해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품에서 몸을 떼어 내고 안전벨트를 당겨 해원의 몸에 채워 주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차를 몰았다. 해원이 잔뜩 굳은 류원의 표정을 살피며 계속해서 말을 걸었지만 그는 운전에만 집중했다.
차가 미끄러지듯 호텔 로비로 들어서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운 류원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발레파킹 직원이 다가와 류원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지만, 인사를 받아 줄 여유조차 없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는 조수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젖혔다.
“내려.”
목구멍을 긁으며 간신히 흘러나온 목소리에 해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원이 눈만 크게 뜬 채 움직이지 않자, 류원이 허리를 숙여 차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채워 준 안전벨트를 풀고 해원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형…….”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올라가서 이야기해.”
체크인을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도 류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빠르게 바뀌는 숫자판만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원하는 층에 당도한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렸다. 류원은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와 빠른 걸음으로 객실을 향해 걸었다.
“형, 왜 그래요.”
“…….”
“형! 내가 뭐 잘못했어요?”
류원은 도어 록에 카드키를 접촉해 문을 열고 해원을 거의 쑤셔 넣다시피 객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악스러운 힘에 스텝이 꼬여 넘어질 뻔한 해원을 가까스로 잡아채고 그대로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빠르게 입 안을 침범한 혀가 순식간에 열기를 높였다.
해원은 류원의 체격과 힘으로 인해 몸이 이리저리 떠밀려야 했다. 두 뺨을 감싸고 입맞춤에 열중하던 그의 손이 조금씩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아, 형… 강류원.”
“나 여기 있으니까 그만 좀 불러.”
“화났어요?”
“내가? 너한테 왜 화가 나. 차에서 일 치를까 봐 일부러 입 닫은 거야. 네가 싫어하니까.”
쪽쪽-.
류원의 입술이 낯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뺨에 찰싹 붙었다가 떨어졌다. 류원은 해원의 코트를 벗겨 바닥에 떨어뜨리고 허리를 당겨 엉덩이를 받쳐 안아 들었다.
두 다리가 허공에 뜨자, 해원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이내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류원의 뺨을 감싸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긴 입맞춤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류원은 해원의 입 안에 꿀이라도 숨겨 놓은 것처럼 게걸스럽게 점막을 핥고 혀를 빨았다. 해원이 숨이 막혀 류원의 어깨를 밀어내자, 그가 해원을 가죽 소파 위에 내려놓고 두 손을 잡아챘다.
류원은 경건한 의식이라도 하듯 손가락 사이 마디마디에 입을 맞추고 셔츠를 벗겨 침대 아래로 떨어트렸다. 향긋한 살냄새에 흉포한 성욕이 속에서 날뛰었다. 저릿한 손을 쥐었다가 펴며 쇄골 아래를 진득하게 빨았다.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이 바닥나는 게 느껴졌다.
“내가… 내가 할래요.”
“응?”
해원이 몸을 일으켜 류원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드러나는 살결에 정성스레 입을 맞추며 육체를 달구었다. 수도 없이 몸을 섞었음에도 오늘따라 기분이 조금 묘했다.
객실 안 공기가 뜨거웠다. 해원은 소파 아래에 무릎을 꿇고 그의 다리 사이를 차지했다. 그리고 천천히 허벅지에 새겨진 양귀비를 핥기 시작했다. 후각이 마비될 만큼 강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해원은 흐드러지게 핀 양귀비 꽃잎을 혀로 핥으며 손으로는 류원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윽, 류원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해원은 꽃 위에서 요사스럽게 혀를 놀리며 성기를 쥔 손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해원이 숨을 쉴 때마다 뜨겁고 습한 숨이 새어 나와 양귀비 위로 쏟아졌다. 류원은 소파에 몸을 기대고 해원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가끔 눈앞이 아찔할 만큼 극심한 자극에 힘 조절을 하지 못해 머리채를 잡아당길 때도 있었지만, 해원은 그것마저도 기껍다는 듯이 정성스럽게 혀를 놀렸다. 지독하게 뜨거운 혀가 꽃잎에 닿을 때마다 허벅지 근육이 저절로 꿈틀거렸다.
“그만, 문해원, 윽!”
“하아… 향이, 너무 진해요. 마약을 하면 이런 기분일까요.”
해원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한 눈을 깜박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코끝을 파고드는 양귀비 향이 너무 진해서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허벅지를 핥을 때마다 입 안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입술이 녹아 없어질 것 같았다. 그는 이 뜨겁고 대단한 걸 늘 허벅지에 품고 다녔다. 그의 허벅지에 새겨진 이 양귀비는 오직 해원만이 보고, 누릴 수 있었다.
류원은 혀를 움직이는 해원의 뺨을 톡톡 두드리고 크게 숨을 삼켰다. 당장이라도 해원의 몸속 깊은 곳에 자신을 찔러 넣고 마구잡이로 범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원은 아직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어느새 꽃잎을 핥던 혀가 성기로 옮겨 갔다.
선단을 가볍게 핥은 새빨간 혀가 기둥을 길게 훑었다. 수분감이 없는 혀에 포피가 딸려 올라갔다.
류원은 해원의 머리채를 쥔 손에 힘을 주고 끌어 올렸다. 느슨하게 풀린 눈매에 나른함이 묻어났다.
류원은 상체를 세우고 천천히 입술을 머금었다. 건조한 입술을 부드럽게 핥고 입술 새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해원이 순순히 입을 벌려 입 안을 파고드는 혀를 빨기 시작했다.
혀가 질척하게 뒤엉켰다. 혀끝이 입천장을 부드럽게 문질러대며 희롱하자, 해원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짙다, 황홀할 만큼 향이 너무 짙다.
짙은 나무 냄새와 지나치게 중독적인 양귀비 냄새가 절묘하게 뒤섞여 오묘한 향을 만들어 냈다.
“향이 너무 짙어.”
“…양귀비, 흐윽. 내 꽃.”
타액으로 흠뻑 젖은 입 안을 혀로 한번 둥글리고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그러자 해원이 고개를 처박고 다시 양귀비를 핥기 시작했다. 류원은 그 모습에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듯해 한쪽 눈을 찡그렸다.
“해원아, 하아, 그만…….”
꽃을 파헤치듯 혀에 힘을 주고 핥아대는 통에 눈앞이 아찔했다. 류원은 해원의 턱을 붙잡아 고개를 들게 하고 잔뜩 성이 난 성기를 그의 얼굴에 문질렀다. 딱딱한 기둥이 그의 보드라운 뺨과 입술을 난잡하게 문질렀다. 해원의 입이 자연스럽게 벌어졌다. 빨갛게 익은 혀가 요망하게 귀두를 핥아 올렸다.
“윽.”
해원은 매끈한 귀두를 입술을 모아 빨고 그대로 깊숙이 삼켰다. 좁고 습한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간 성기가 사납게 꿈틀댔다. 늘 저를 놀리듯 기둥을 야금야금 물어 가던 것과 달리 단박에 목구멍 깊숙이 머금었다. 두툼한 귀두가 좁고 연한 목구멍을 벌리고 쑤셔 박혔다. 류원은 숨을 삼키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얕게 쳐올렸다. 귀두가 목구멍 안쪽을 찔러 올렸다. 해원이 성기를 문 채로 헛구역질을 했다. 목구멍이 잔뜩 좁아지면서 귀두를 조였다. 연한 살들이 귀두에 달라붙었다. 아래를 쑤실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에 류원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해원은 연신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성기를 뱉지 않고 찔꺽찔꺽,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움직였다. 이건 오럴이 아니라 고문에 가까운 행위였다.
아랫배가 조이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해원의 머리채를 잡아 강제로 성기를 뽑아냈다. 주르륵, 성기와 함께 뽑혀 나온 액체들이 난잡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억, 허윽, 으, 아.”
“괜찮아?”
해원이 손등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드는 순간 류원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선액과 타액이 뒤섞여 포말이 일어난 액체를 손등으로 쓱 닦는 해원의 몽롱한 눈에 음탕한 기운이 묻어났다. 양귀비에 취하고 저에게 취한 모습이 눈이 시릴 만큼 어여뻤다.
타액에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성기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류원은 해원의 팔을 붙잡아 소파에 눕히고 곧장 아래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이제 젖기 시작한 입구가 별 저항감 없이 벌어지며 두꺼운 손가락을 삼켰다.
“으윽, 으, 자, 잠깐만.”
류원은 해원의 손목을 한 손으로 감아쥐고 빠르게 아래를 들쑤셨다. 몇 번의 추삽질 만으로도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음란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전에는 잘 안 젖어서 걱정했더니 이젠 너무 젖어서 탈이네.”
“아, 아, 아! 흣, 그만!”
“쉿, 난 아직 시작도 안했어.”
손끝에 힘을 주고 내벽을 짓누르는 통에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손끝이 애매하게 부어오른 안을 스쳤다.
“흣.”
해원은 미간을 찡그린 채 허리를 들썩였다. 그러자 류원의 손이 부어오른 살덩이를 콱 찍어 눌렀다. 뇌를 울리는 저릿한 감각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크게 벌렸다. 허벅지 안쪽이 달달 떨렸다.
류원과의 섹스는 항상 저돌적이고 강렬했으며 뇌를 지근지근 밟아 대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다 때문에 자주 몸을 맞추진 못하지만 이렇게 기회가 생기면 그는 가감 없이 성욕을 드러내며 강한 수컷 냄새를 풍겼다.
류원이 해원의 두 다리를 붙잡아 위로 치켜들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손가락 크기만큼 벌어졌다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한 구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흣! 하지, 흐응, 하지 마!”
해원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저항해 보지만, 그는 도리어 밀어 올린 허벅지를 더 짓누르며 깊숙이 혀를 밀어 넣었다. 뜨겁고 물컹한 혀가 안을 헤집었다.
“흣, 형! 그만, 하윽, 그만해요!”
해원은 눈을 질끈 감은 채 허공에 뜬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의 혀가 주름을 파헤치고 안으로 파고들 때마다 왈칵 울음이 터졌다.
“더러워, 더럽다고!”
아무리 소리치고 그의 머리를 밀어내도 류원은 고집스럽게 해원의 안으로 혀를 쑤셔 넣었다. 수치심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제게 해 주는 행위가 싫은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몸이 좋아지면서 아래가 젖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간신히 움직일 정도여서 젤을 사용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아래가 흠뻑 젖을 만큼 애액이 흘렀다. 어떨 땐 류원과 좀 야릇한 분위기로 이어지기만 해도 뒤가 젖어서 곤란함을 겪기도 했다.
“흣, 그만! 흐윽.”
류원이 혀를 뾰족하게 만들어 안을 들쑤실 때마다 난잡하고 요란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신히 고개를 든 류원이 입술에 묻은 액체를 혀로 핥고 달뜬 숨을 헐떡였다.
“후, 이제 넣어도 돼?”
“흐윽, 묻지 말고… 그냥,”
“해원아, 나 못 참겠어. 빨리 대답해 줘.”
해원의 귓불을 혀로 감아올리고 곧장 귓속으로 혀를 밀어 넣어 들쑤셨다. 혀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극대화되어 귀 전체에 울렸다. 혀와 함께 밀려든 뜨거운 숨에 허리가 뒤틀렸다. 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리며 그의 허리를 제 쪽으로 당겨 봐도 류원은 꼼짝하지 않고 귀를 애무했다.
“얼른, 말해 줘.”
“흣, 넣어… 아윽!”
해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멍이 크게 벌어지며 귀두가 안으로 밀려들었다. 구멍이 확장되는 느낌에 양손으로 류원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수없이 몸을 섞었음에도 늘 삽입하는 순간은 생소하고 낯설었다. 류원은 해원의 심장 부근에 입술을 묻고 내벽의 살을 헤치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침입을 환영이라도 하듯 벌어지는 은밀한 속살이 요망을 떨어 댔다. 귀두를 세게 조였다가 느슨하게 풀었다가, 안쪽 깊은 곳으로 흡착하듯 빨아들였다. 류원은 아찔한 느낌에 입술을 깨물고 반쯤 삽입된 성기를 뽑아냈다.
음란한 구멍으로 제 성기를 받아 내던 해원이 의아한 눈으로 상체를 약간 세웠다. 그 순간, 류원이 해원의 두 다리를 활짝 벌리며 단숨에 안쪽까지 성기를 쑤셔 넣었다. 성기에 돋아난 단단한 힘줄이 내벽을 사정없이 긁으며 안쪽으로 쿡 처박혔다.
해원은 경련이 일어난 사람처럼 몸을 파들파들 떨며 울컥울컥 정액을 토해 냈다. 복부를 적시는 정액을 느낄 새도 없었다.
“벌써 쌌어?”
“…흣, 아, 아, 아, 흐읏.”
“해원아.”
류원은 짓궂게 웃으며 사정을 마친 해원의 성기를 훑어 올렸다. 성기를 쥐고 흔들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낸 류원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 쪽, 소리 나게 빨았다. 비릿한 맛이 입 안을 채웠다.
“야한 맛이야.”
“흣, 변태, 으윽, 같아.”
느리게 안쪽을 출입하던 성기가 불시에 안쪽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귀두가 부어오른 곳을 세게 밀고 깊게 쑤셔 박혔다. 아찔한 둔통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입에선 비명도 신음도 아무것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숨 쉬어.”
“흐읍, 으, 읏!”
“쉬이, 착하지.”
류원의 손이 부드럽게 해원의 가슴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가느다란 숨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숨통이 트였을 때 류원이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같은 자리를 비비고 문지르며 안으로 진입했다.
“흐윽, 으! 싫어, 흣, 하지 마.”
해원은 도리질 치며 비명을 질렀다. 이성을 잡아먹을 듯한 강렬한 쾌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가 단숨에 발끝으로 떨어졌다. 숨을 헐떡이며 류원의 목을 감싸 쥐었다. 붉어진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음험한 욕구가 제 머리 위로 검게 드리워지는 기분이었다.
“후, 너무 뜨거워. 해원아.”
성기를 물릴 때마다 음란한 액체가 구멍 밖으로 새어 나왔다. 류원은 해원의 두 다리를 접어 올려 접합부를 바라봤다. 흥건하게 젖어 주름 하나 없이 크게 벌어진 구멍이 검붉은 기둥을 물고 있었다. 머리가 뜨거웠다.
이 음란한 몸으로 스턴트 현장을 뛰고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그를 파괴하고 싶었다. 제 아래에서 더 심하게 울리고 싶었다. 이 쾌락에서 못 헤어나게……. 이 모습은 오직 저만이 누릴 수 있는 자극적인 모습이니까. 이 세상 누구도 해원의 나른하게 풀어진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허리를 뒤로 물리며 성기를 뽑아내자, 유백색의 액체와 안쪽의 살들이 요동치며 성기로 잔뜩 달라붙었다.
윤활제가 없으면 삽입조차 힘들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너무 잘 젖어서 탈이었다. 그만큼 해원의 몸이 좋아졌다는 증거라서 류원은 그걸 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허리를 들썩일 때마다 액체가 흘러나와 해원의 엉덩이골을 타고 등으로 흘렀다.
언젠가 한 번은 액체의 맛이 궁금해서 곤히 잠든 해원의 바지를 벗기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들쑤셔 애액을 받아먹은 적이 있었다. 당연히 비리고 맛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맛은 정말 믿을 수 없게도 달았다. 마치 꿀 같았다. 혀끝이 녹아 버릴 만큼 다디단 액체에 발정이나 기어코 잠든 해원의 다리를 벌려 성기를 밀지 속으로 밀어 넣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흣, 형! 아읏, 집중해. 무, 흐윽,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 미안… 네 구멍에서 줄줄 흐르는 물이 맛있어 보여서.”
“으윽, 미친!”
빨갛게 달아오른 해원의 뺨을 핥고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안쪽 깊은 곳에 유난히 도드라진 부분을 귀두로 푹 찍어 올리자 해원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만 질끈 감은 채 몸을 굳히는 게 귀여워서 다시 허리를 길게 빼서 같은 자리에 찔러 넣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수없이 몸을 섞어 왔음에도 해원과의 섹스는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할 때마다 새로웠다. 저릿한 감각에 곱아드는 발가락도, 빨갛게 익어 가는 뺨도, 신음을 참느라 엉망이 되어 버린 입술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방황하는 손도 모든 게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흐윽, 형, 형! 하으읏! 거기, 읏.”
허리를 얇게 쳐올리다가 빠르게 속도를 붙이자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무렇게나 벗겨 처박아 놓은 옷가지를 세게 움켜쥐었다. 도드라진 손마디를 눈으로 핥으며 빠르게 안을 쳐올렸다. 살이 부딪치는 소리와 해원의 교성이 객실 안을 울렸다.
집에서는 아무리 방이 떨어져 있다고 해도 집안에 아이와 보모가 있다 보니 요란하게 섹스할 수가 없었다. 늘 소리를 삼키고 죽이느라 급급하던 해원도 오늘만큼은 마음껏 소리를 높이며 제게 매달려 왔다.
해원의 골반을 움켜쥐고 아래로 당기며 허리를 쳐올리는 순간, 귀두가 몸 안쪽 어딘가에 감겨드는 느낌이 들었다. 해원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들고 류원을 바라봤다.
“…후으, 뭐지.”
“윽, 자, 잠깐만! 움직이, 아윽, 지마.”
해원이 다리로 류원의 허리를 감싸고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내벽이 오물대며 살을 씹어 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류원은 하체로 피가 몰리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허리를 들썩였다. 해원이 자지러지는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흐윽, 이상해, 하윽, 이거.”
류원도 평소와 다른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해원의 몸속 깊은 곳에 닿은 귀두가 어딘가와 꽉 맞물려 있는 것 같았다. 해원의 뱃가죽을 손으로 문지르며 허리를 조금씩 들썩였다. 그러자 잔뜩 발기한 해원의 성기에서 왈칵 정액이 쏟아졌다.
류원은 결합을 풀지 않은 채 해원의 몸을 소중히 안아 들었다. 등허리를 단단히 받쳐 안아 침대에 눕혔다.
해원은 고개를 뒤로 젖혀 목을 다 드러낸 채 뜨겁게 신음했다. 여전히 은밀한 안쪽 살이 류원의 성기를 씹어 대고 있었다. 류원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멍하게 눈만 깜박였다.
“괜찮아?”
“흐읏, 형, 하윽, 나 좀, 흣.”
오늘따라 하얀 침구 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새까만 머리카락까지 야릇하게 보였다. 류원은 해원의 뱃가죽을 꽉 잡아 누르고 성기를 반쯤 뽑아냈다가 들이받듯 쑤셔 넣었다. 내벽이 탄력적으로 벌어졌다가 좁아지는 느낌에 류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해원의 허리 옆을 양손으로 짚고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해원이 숨이 넘어갈 듯 신음을 내지르며 헐떡였다. 안쪽을 찔러댈 때마다 귀두가 어딘가에 쑤셔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데 묘하게 야릇했다.
“흣, 아응, 강, 흣, 강류원! 아, 아,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후, 보채. 안쪽도 그렇고.”
허리를 길게 뺄 때마다 내벽의 살들이 엉겨 붙어 늘어졌다. 다시금 안을 헤치고 쑤셔 넣으면 접착하듯 착 달라붙었다. 아니, 빨아 당긴다고 해야 하나. 마치 입 안을 꽉 조여 빨아 대는 것처럼 내벽이 성기를 빨았다.
참을 수 없는 사정감이 차올랐다. 류원은 크게 허리 짓하며 서너 번 내리 쑤셔 박다가 빠르게 허리를 쳐올렸다. 안을 쑤실 때마다 짙은 나무 향이 코끝에 달라붙었다.
“윽, 그만 조여. 쌀 거 같아.”
“윽, 으응, 으! 빨리, 흐윽.”
해원이 안달을 내듯 허리 짓에 박자를 맞추며 사정을 유도했다. 류원은 몸을 숙여 해원의 목에 이를 박아 넣으며 사정했다.
하아, 하아, 객실 안은 거친 숨소리로 가득 찼다. 류원은 해원의 몸을 뒤집어 등에 새겨진 나무와 양귀비를 핥았다. 나른하고 진득한 후희를 즐겼다.
해원의 손목을 뒤집어 그의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씻고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류원이 나무의 밑동을 핥고 아쉬운 기분을 담아 느슨하게 풀어진 구멍에 슬쩍 성기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뿌리까지 푹 찔러 넣었다.
“흐악, 강류원!”
“집에 가야 하는데, 가기 싫네.”
류원이 느리게 허리를 움직이며 내벽을 문질러대자, 해원은 무릎을 접어 엉덩이를 높게 들어 올렸다. 마찰로 인해 붉어진 엉덩이가 탐스러운 과실 같았다. 한입 베어 물고 싶은 욕구를 허리 짓으로 대신했다.
“흣, 빨리… 형, 빨리.”
“움직여 봐.”
류원은 해원의 엉덩이를 마구 주물러 대며 툭툭 안쪽을 쳐올렸다. 그러자 해원이 안달하듯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느끼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찍어 올리고는 엉덩이를 빙글빙글 돌려댔다. 뜨겁게 울어 대며 쾌락에 안달 내는 해원은 정말 사랑스러웠다.
“흣, 거기, 하윽, 악!”
성기가 안쪽을 푹 찍어 올리고 귀두가 어딘가에 꽉 맞물렸다. 류원이 당황한 듯 허리를 물리려고 했지만, 안쪽에서 꽉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해원아, 흣, 힘 좀 풀어 봐.”
“으응, 안돼, 흣, 아파, 흣, 안 돼.”
해원은 이마를 침대에 대고 몸을 웅크렸다. 그가 성기를 뽑아내려고 할 때마다 밑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왈칵 울음이 터져 나왔다.
“후, 크게 숨 쉬어 봐. 응?”
“아파, 흣, 아파요.”
“이걸 빼야지, 으윽!”
류원의 눈썹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내벽의 살들이 탄력적으로 움직이며 성기를 씹어 댔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데 안쪽의 느낌은 아찔해서 꼬리뼈가 찌르르 울렸다.
류원은 더운 숨을 토해 내며 해원의 등을 핥기 시작했다. 나무의 밑동을 핥고 나뭇가지에 매달린 양귀비를 핥았다. 조여 대는 내벽의 힘이 강해질수록 류원은 해원의 등을 찍어 누르고 게걸스럽게 혀를 움직였다.
조금 전 그의 목구멍에 성기를 쑤셔 넣었을 때와 비슷했다. 내벽이 꿈틀거리며 성기를 자극하고 있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어딘가에 꽉 물린 듯한 느낌은 그대로였다.
밑도 끝도 없는 사정감이 차올렸다. 점차 기분이 아득해지고 뱃속이 우글거리며 천박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내벽이 느슨하게 풀렸다가 다시 한번 세게 성기를 조였다.
“으으, 윽! 으, 아파, 형, 흣.”
“하아, 아, 후으, 윽.”
몸속 깊은 어딘가로 귀두가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맥없이 정액이 터져 나왔다. 목덜미가 뻣뻣하게 당기고 온몸의 핏줄이 붉어졌다. 류원은 목을 젖히고 해원의 허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사정은 길었고 조이는 힘 역시 굉장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목을 울리며 성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쥐어짜이고 난 뒤, 거짓말처럼 결착이 풀렸다. 류원은 그대로 해원의 몸 위로 쓰러졌다.
해원은 류원의 손에 몸이 씻겨지는 와중에도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처럼 간헐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끙, 낮게 신음을 흘리고 배를 감싸 쥐었다.
배 안쪽이 너무 뜨거웠다. 정액이 아니라 새빨갛게 달군 쇳물을 들이부은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직 몸 안에 성기가 삽입된 것처럼 아래가 묵직하고 불편했다.
“다리 좀 벌려 봐.”
해원은 도리질 치며 류원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류원은 안겨드는 몸을 소중히 안고 아래로 손을 넣어 입구를 더듬었다. 그런데 구멍이 단박에 꽉 조여들며 그의 침입을 거부했다. 손가락 하나도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해원의 등을 쓸어 주며 그를 달랬다.
“정액 빼자. 힘 좀 풀어 봐.”
“흐응, 형, 나 배가, 흣, 배가 아파요.”
“배앓이하나 보다. 힘 빼 봐.”
해원의 이마와 얼굴에 짧게 입 맞추며 아래를 더듬었다. 하지만 아래는 꽉 닫혀 있었다. 아무리 해원을 어르고 달래도 요지부동이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라 덜컥 겁이 났다.
해원을 욕조 안에 앉혀 두고 류원은 욕실을 빠져나왔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코트에서 휴대폰을 꺼내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준호의 수면보다 중요한 건 해원이었다. 지루한 통화연결음 끝에 잠에 취한 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 미친놈아,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지랄이야.
“형, 해원이가 좀 이상해.”
- 어?
“섹스할 때도 좀 이상했는데 끝나고 정액 빼려고 하니까 아래가 닫혀서 손가락이 안 들어가.”
- 아래가 닫혔다고?
“어. 새끼손가락 하나도 안 들어가. 애는 자꾸 떨고 있고. 어디 안 좋은 건가?”
- 근육 경련인 거 같은데. 해원이 잠들면 다시 시도해 봐. 억지로는 하지 말고. 다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재웠다가 일어나는 대로 연구소로 데려와.
“혹시 문제 있는 건 아니지?”
- 내일 이야기해.
류원은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고 다시 욕실 문을 열었다. 수증기가 자욱한 욕조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해원은 아까보다 혈색도 돌아오고 편안해 보였다. 류원이 욕조 안으로 들어가 해원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해원아.”
“형, 나 졸려요.”
“정액 빼 줄게, 빼고 자자.”
해원이 순순히 다리를 벌렸다. 뜨거운 물에 몸이 풀려 살이 말랑거렸다. 물속으로 손을 넣어 아래를 더듬었다. 하지만 아래 상태는 아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새끼손가락으로 틈을 벌려 보려고 했지만, 해원이 아프다고 하는 바람에 손을 거둬야 했다.
류원은 해원을 고쳐 안고는 등에 핀 양귀비를 천천히 혀로 핥았다. 부드럽게 살결을 핥고 나뭇가지를 따라 혀를 움직였다. 해원이 탁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목덜미까지 뻗은 나뭇가지를 핥아 주자, 해원이 앓는듯한 신음을 흘렸다.
“해원아 혹시 어디 불편해?”
“…아뇨, 아깐 배가 좀 아팠는데 지금은 그냥 졸려요.”
해원을 반쯤 일으켜 세우고 욕조 테두리에 배를 걸치게끔 상체를 밀었다. 해원이 놀라 손으로 땅을 짚어 몸을 지탱했다. 배가 눌리며 아래가 약간 벌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류원의 손이 닿자 귀신같이 구멍이 좁아졌다. 아무래도 정액을 빼내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류원은 해원의 몸을 씻기고 샤워 가운을 입혀 밖으로 내보냈다.
유리문 사이로 해원이 침대에 눕는 게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해원의 상태가 안 좋아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단 여기서 재우고 내일 준호까지 보고 들어가는 거로 계획을 수정했다.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해원이 곤히 잠든 침대에 조심히 앉았다. 새근새근 간지러운 숨소리를 내며 잠든 해원의 뺨에 짧게 입 맞추고 엉덩이를 덮은 샤워 가운을 위로 밀어 올렸다. 뽀얗고 동그란 엉덩이를 보자 하체로 열이 몰렸다.
류원은 조심히 아래를 더듬어 입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런데 아까와 달리 구멍이 부드럽게 벌어지며 손가락을 머금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어깨가 축 늘어지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물감에 해원이 몸을 뒤척였다. 손가락을 움직여 내벽을 더듬었다. 안은 애액과 정액이 뒤엉켜 푹 젖어 있었다. 수건을 끌어와 해원의 엉덩이 아래에 펼쳐 두고 정액을 긁어내기 시작하자 희멀건 액체가 구멍을 타고 느리게 흘렀다.
류원은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을 깊이 찔러 넣었다. 마찰로 인해 잔뜩 부은 부분을 손끝으로 툭 건드리자 잠든 해원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2차전을 하기에는 시간도 늦고 해원의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욕실로 들어가 온수에 수건을 적셔 나왔다. 정액을 다 긁어내고 수건으로 닦아 냈다. 깨끗해진 아래에 코를 박고 마구 문지르고 싶었다.
류원은 샤워 가운을 가르고 빳빳하게 고개를 내면 제 성기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치 없는 새끼.
* * *
“류, 류원 씨?”
“아. 안녕하세요, 감독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에요? 아, 해원 씨 보러 왔구나.”
“하하, 네.”
신 감독의 눈이 자연스럽게 한창 합을 맞추는 중인 스턴트맨 무리로 향했다. 그중에서 긴 생머리 가발을 쓰고 검은색 가죽 스커트에 가죽 재킷을 입은 해원을 빤히 바라봤다.
해원은 오늘 여자주인공인 김유경의 대역을 맡았다. 본래는 여배우의 스턴트는 스턴트우먼이 맡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영화에서만큼은 김유경의 대역을 문해원이 맡고 있었다.
팔자에도 없는 여배우의 스턴트 대역을 맡아 해원은 영화를 준비하면서 거의 절식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먹으라고 옆에서 권해도 해원은 요즘 여배우들이 얼마나 말랐는지 아냐면서 일절 음식을 거부했다.
“왜 김유경의 대역을 문해원이 하는 겁니까?”
“아, 그게… 처음에는 스턴트우먼으로 테스트를 봤는데 내가 원하는 그림이, 그러니까 강렬하고 절도 있는 동작이 안 나와서 부득이하게 해원 씨가 하고 있어요.”
“의상도 너무 짧고, 마음에 안 드네.”
류원이 작게 중얼거리자 신 감독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문해원은 원래 바로 은퇴하려고 했지만 신 감독의 간곡한 부탁에 이번 작품을 마지막으로 스턴트맨 은퇴를 선언했다.
업계에서는 아쉬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해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원은 쉬는 동안 하다와 캠핑을 하러 가겠다며 캠핑용품 사들이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곧 촬영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 감독은 이만 가 보겠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류원은 멀찍이 떨어져서 촬영을 구경했다. 해원이 몸에 와이어 장비를 착용하고 촬영라인으로 들어섰다.
류원은 마른 입술을 손끝으로 훑으며 간밤에 꾼 꿈을 떠올렸다. 꿈에서 해원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산을 오르고 있었다. 땀에 흠뻑 젖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거의 정상쯤 다다랐을 때 해원의 앞에 커다란 복숭아 두 개가 뚝 떨어졌다. 그러자 해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을 열고 복숭아를 넣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 개가 아니라 하나만 담는 게 아닌가. 다시 가방을 멘 해원이 바닥에 떨어진 복숭아를 주워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과즙이 줄줄 흘러나오는 복숭아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해원의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잠에서 깼다. 꿈이 참 묘했다. 지금도 꿈에서 본 해원의 웃는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덕분에 괜히 해원이 보고 싶어져서 촬영도 미루고 해원을 보러 온 참이었다.
곧 촬영이 시작되려는지 해원이 건물 위로 올라가 장비를 확인했다. 해원은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어 보며 와이어 줄을 잡은 팀원과 합을 맞추었다.
“자, 레디! 액션!”
감독의 큐 사인에 해원이 앞을 향해 달렸다. 합을 맞춘 배우들과 몸을 부딪치고 쫓기듯 옆 건물로 몸을 던졌다. 날렵하게 몸을 한 바퀴 굴러 착지한 해원이 다음 건물을 향해 뛰려는 찰나였다. 힘껏 달리던 해원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해원이 풀썩 쓰러졌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
감독은 주저하지 않고 컷, 을 외쳤고 액션 스쿨 사람들이 건물을 마구 뛰어올랐다. 류원도 촬영 현장을 주시하다가 해원이 쓰러지자 건물을 향해 달렸다. 탁탁, 계단을 밟아 오르는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7층까지 단숨에 뛰어오른 류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허리를 숙였다. 그런데 안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원아, 해원아! 정신 좀 차려 봐.”
“야, 119 불러. 119! 빨리!”
류원은 무리를 헤치고 바닥에 쓰러진 해원의 곁으로 다가갔다. 온몸에 경련이 난 것처럼 덜덜 떨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고요하게 눈을 감은 해원의 다리 사이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촬영 의상이 짧은 가죽 치마라서 피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숨이 덜컥 막혔다. 류원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해원의 몸을 쥐고 흔들었다.
“해, 해원아. 원아.”
“류원 씨, 잠깐만요. 119 불렀어요. 벼, 별일 없을 겁니다.”
눈앞이 까맣게 점멸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소음도 류원의 귀로 들어오지 않았다. 류원은 해원의 몸을 끌어안고 위태롭게 숨을 내쉬었다.
해원이 각혈을 하던 그때의 악몽이 재현되는 기분이었다. 울컥 피를 토해 내던 해원을 떠올리고 류원은 두려운 듯 몸을 떨었다.
* * *
“강류원. 너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준호는 무테안경을 밀어 올리며 정신을 반쯤 놓은 류원을 상담실로 불렀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간신히 상담실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준호는 녹차티백을 넣은 종이컵을 류원의 앞에 놓았다. 류원은 컵을 저만치 밀어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낮게 신음했다. 생각보다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류원아.”
“…해, 해원이는 괜찮은 거야?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건데. 이제 건강해진 거 아니었어? 마음 놓아도 된다며! 이건 또 무슨 부작용인데.”
“강류원,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아, 나는 이제 못 살아. 문해원 없으면 못 산다고.”
준호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책상 위에 엎드린 류원의 머리통을 바라봤다.
“누가 보면 문해원이 금방이라도 죽는 줄 알겠네.”
작게 중얼거리고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야, 강류원. 내 말 좀 들어.”
“…죽을병은 아니지? 해원이 죽으면 나도 죽어.”
“안 죽어. 안 죽는다고!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겠냐. 차 좀 마시고 정신 차려 봐. 진짜 중요한 이야기해야 하니까.”
류원은 그제야 옆으로 밀어 놓은 녹차로 입을 축이고 깊게 숨을 마셨다. 엉망인 머리도 손으로 빗어 넘기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이내 괴로운 듯 머리를 엉망으로 문지르며 책상에 엎드렸다. 준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야 강류원!”
“잠깐만, 형 나 잠깐만.”
“지랄하고 있네! 진짜. 고개 들고 나 봐.”
준호가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벗어 책상 위로 던지고 인상을 찌푸렸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왔다. 삽질도 어느 정도 해야지 귀엽게 봐 주지 이건 원맨쇼 수준이었다. 혼자 진정했다가 또 괴로워했다가 아주 지랄염병을 떨었다.
“너 내가 해원 씨 나무 건강해졌다고 말한 거 기억하지.”
“…어. 그게 뭐.”
“그래서 내가 가족계획 없으면 피임하라고 했어, 안 했어.”
“…했어.”
“근데 너 피임했어, 안 했어.”
“…안 했어. 근데 그게 왜!”
류원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리다가 머리에 스치는 생각 한 자락을 붙잡았다.
혹시, 에이 설마…….
류원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호는 씩 웃으며 손을 뻗어 류원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나무가 좋아지기 시작한 건 꽤 됐고 그의 몸에 어설프게 자리 잡았던 자궁 역시 나무의 기운을 받아 눈에 띄게 좋아진 상태였다.
그래서 준호는 아이를 원치 않는다던 류원의 말이 생각나 그에게 주의를 주었고 당연히 피임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문해원이나 강류원이나 의사 말 안 듣는 건 어디 가서 안 빠질 위인들이었다.
“…형, 노, 농담이지?”
“따뜻한 밥 처먹고 내가 왜 실없는 농담을 하냐. 아무래도 그때 같은데… 한 달 반전쯤에 네가 새벽에 전화 건 적 있었잖아. 그게 근육 경련이 아니라 결착이었나 봐.”
“하, 거짓말하지 마. 말도 안 돼. 해원이가 아이를 가졌다고?”
“그래.”
준호의 간결한 대답에 류원이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상담실 내부를 돌아다녔다. 허탈하게 웃기도 했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문해원이 아이를 가졌다니. 강류원과 문해원의 아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형, 하, 한 번만 더 말해 봐.”
“해원이 임신했다.”
류원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가 다시 앞으로 확 쓸어내렸다. 그리고 이내 입 근육을 풀고 바보처럼 허허, 하고 웃었다. 가슴이 벅차올라서 금방이라도 뻥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어서 숨이 가빴다. 머리 지잉, 하고 울리면서 속도 괜히 안 좋은 거 같고, 그런데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보처럼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하고 계속 허허, 하고 웃었다.
“형, 나 진짜 어떡하냐.”
“뭘 어떡해.”
“…너무 좋아서 미치겠어. 진짜 좋아 죽겠다.”
“해원 씨 아픈 것도 싫고 힘든 것도 싫다고 하던 놈 어디 갔냐, 그거 감당할 자신 없다며? 근데 너 아주 입 찢어지겠다?”
준호의 타박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이 하도 발랑거려서 저도 모르게 가슴을 꽉 잡아 누르고 있었다.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문이 막히고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기적, 그냥 이건 기적이었다. 문해원이 아이를 낳는다고?
“형. 이거 꿈인가? 나 한 대만 때려 봐.”
류원이 너른 등짝을 준호에게 들이대고 말했다. 준호는 팔까지 걷어붙이고는 류원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퍽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얻어맞은 류원이 살포시 인상을 찡그렸다가 금세 바보처럼 웃었다. 입을 크게 벌리고 환하게 웃는 모습에 준호는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실컷 좋아해라.”
“아, 진짜 좋아죽겠다. 와 나 어떡하지.”
“강류원. 축하한다.”
류원은 발소리를 죽이고 병실로 다가갔다. 문을 슬며시 열자, 묵직한 나무 냄새가 훅 끼쳤다. 환자복을 입고 눈을 감은 해원의 얼굴이 평화로워 보였다.
류원은 침대 가까이 다가가 이불 위로 해원의 판판한 배를 쓸었다. 이 배 속에 해원과 자신의 아이가 있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긴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해원이 아이를 가졌다는 소리에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했더니 준호는 ‘태몽이네’ 하며 웃었다. 태명은 무조건 복숭아다.
“…형?”
“깼어?”
누군가 제 배를 문지르는 느낌에 해원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류원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며 눈가를 문질렀다. 그의 반응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 몸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해원은 차분한 얼굴로 상체를 세우고 앉았다. 제게 닥칠 불행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게 너무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그걸 류원의 앞에서 티를 낼 수가 없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몸이 무겁고 미약한 두통에 감기 기운이 있는 것처럼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상태가 조금 심각해졌다. 속이 매스껍고 헛구역질이 났다. 물만 마셔도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아 아무것도 삼키지 못했다.
그리고 촬영 직전, 스탠바이 사인이 떨어지고 나서는 기어이 속을 게워 냈다. 마냥 긴장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형, 나 괜찮으니까 말해요. 나 어디가 많이 안 좋아요?”
“해원아… 진짜 어떡하냐.”
“왜요. 저 또 부작용이래요?”
“…….”
“그럼, 뭔데요.”
초조함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류원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손을 뻗어 해원의 볼을 어루만졌다. 열감이 묻어나는 손바닥이 뺨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희미하게 웃었다. 물기가 어린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형, 나 괜찮으니까 말해 봐요. 더한 것도 겪었는데 뭐… 나 진짜 괜찮…….”
“너, 아이 가졌대.”
“…네?”
“이 둔탱아. 8주나 됐대.”
순간적으로 사고회로가 멈추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류원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자,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뭐, 라고요?”
“아이 가졌다고.”
“에이, 거짓말.”
“진짜야. 강류원, 문해원 2세가 네 배 속에 있다니까.”
해원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만 빠르게 깜박였다.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말도 안 돼.’
주춤주춤 엉덩이를 뒤로 밀며 도리질을 치던 해원은 두 다리를 모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등에 새겨진 나무의 밑동이 다 썩어 악취를 풍기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던 삶을 살아왔던 자신이 강류원을 만나 건강을 회복한 걸로도 모자라 너무 사랑스러운 하다의 아빠가 되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기적이었다.
그런데 아이라니…….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하다를 데려오기 전 아역배우들에게 살갑게 굴며 다정한 면모를 보여 주던 류원의 모습도 떠오르고, 환하게 웃는 하다의 얼굴도 떠올랐다. 너무 행복해서 진짜 죽고 싶었다. 이 기분 그대로 영원히 눈감고 싶었다. 제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테니.
“…형, 혹시 이거 꿈이에요?”
“아니. 꿈 아니야.”
“…진짜 기뻐요. 형은… 어때요?”
류원은 대답 대신 해원의 몸을 당겨 안았다. 따뜻한 품에 안기자 간신히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끅끅, 소리를 내며 서럽게 우는 해원의 등을 쓸어 주며 저 역시 뜨거운 눈물을 쏟았다. 카메라 앞에서 쏟는 가식적인 눈물이 아닌 정말 마음이 뜨거워서, 가슴이 벅차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해원은 대중에게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피스틸로 낙인찍혀 조롱거리가 되곤 했다. 배우 강류원의 배우자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평범한 스테먼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면 이런 조롱 따위 받지 않았을 텐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안 좋았다.
해원은 일부러 티 내지 않고 애써 밝게 웃는 낯으로 괜찮다며 위로했다. 앞에서는 괜찮다고 씩씩하게 웃어 보이지만 뒤에서는 혼자 숨죽여 운다는 걸 알고 있었다. 뾰족한 가시가 심장을 찔러 대는데 아프지 않다는 건 거짓말일 테니까.
그런데 해원이 임신함으로써 모든 게 다 해결이 됐다. 문해원은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피스틸이 아니었다. 애초에 남의 가정사에 주제넘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새끼들이 잘못된 거지만 이제 그 시선에 당당해질 수 있었다. 이제 해원이 늦은 새벽,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지 않아도 되고 저는 그걸 보면서 마음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
“진짜 꿈같다. 해원아, 고마워.”
“…형, 저 좀 꼬집어 주세요. 진짜 믿기지 않아서.”
류원은 품에 안긴 해원을 떼어 내고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가 놓았다. 그러자 금세 울상을 지으며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난감함에 류원이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준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얼씨구, 아주 둘이 난리가 났네.”
“…저 진짜 임신한 거 맞아요?”
투덜대며 병실 안으로 들어오던 준호가 해원의 물음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옆에서 해원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지켜보았기 때문에 더 마음이 찡했다. 류원에게는 잔소리를 퍼부어도 해원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진짠가 봐요. 아무튼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하니까 해원 씨는 첫째도 안정 둘째도 안정이에요. 일도 그만두고 하다도 막 안아 주지 말고.”
“네, 그럴게요.”
“류원이 너는 밤마다 들이대지 말고, 안정기 접어들 때까지 섹스 금지야.”
섹스 금지라는 말에 류원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류원이 이마를 문지르며 준호를 바라봤다.
“그럼 가벼운 페팅도 안 돼?”
준호와 해원은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해원은 요즘 부쩍 응석이 늘어난 하다를 식탁에 앉히고 시리얼과 요거트가 든 그릇을 밀어 주었다. 하다는 생크림 같은 요거트를 숟가락으로 툭툭 건드리기만 할 뿐 도통 입에 대지 않았다. 해원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하다를 불렀다.
“강하다, 이리 와.”
하다는 입술을 삐죽이며 의자에서 일어나 해원의 앞으로 다가왔다. 노란색 티셔츠에 멜빵바지를 입은 하다의 걸음이 무거웠다. 해원이 팔을 뻗자 기다렸다는 듯이 해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해원의 무릎을 차지하고 가슴에 뺨을 댄 채 숨을 색색 내쉬었다.
“요즘 우리 하다가 왜 이렇게 기운이 없을까?”
밤톨 같은 머리통을 가만히 쓸어 주며 묻자 하다는 도리질 치며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아빠는 하다가 말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몰라.”
“하다도 해님이 말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몰라.”
“응?”
“아니. 나는 알아.”
하다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언젠가부터 해님의 배에 무언가 느껴졌다. 처음에는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아기라는 걸 알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해님을 안으면 따뜻한 느낌이 배가 됐다. 아가를 안는 느낌이라 기분이 몽글몽글하고 좋긴 하지만 해님이 아기만 좋아하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친구 지운이도 동생 지유가 생겨서 좋긴 하지만 아빠가 잘 안 놀아 준다며 투덜거렸다.
하다는 다정한 손길에 기분이 좋아진 듯 가슴에 머리를 대고 문질렀다. 하지만 다정한 손길과 달리 해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이가 뭘 알고 있는지 덜컥 겁이 났다.
“우리 하다가 아는 게 뭘까?”
“해님 배에 아가 있어. 아가.”
하다는 손가락을 두 개를 펼치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다의 말에 해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직은 하다에게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나름 조심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하다의 담담한 말투에 어쩐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사랑이 고픈 아이는 늘 애정을 갈구했다. 확인받고 싶어 했고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럴 때마다 해원과 류원은 아이를 정말 사랑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표현해 주곤 했다. 그러면 아이는 안도하며 제 곁으로 다가와 눕곤 했다. 몸집이 작은 아이의 마음에 너무 큰 상처가 있어 늘 조심스러웠다. 머릿속에서 말을 고르고 골라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하다야, 아빠 배 속에 아가 있어서. 그래서, 슬펐어?”
“…슬픈 건 아니야. 나도 지운이처럼 아가랑 잘 지낼 수 있어. 근데 해님이 아가만 예뻐하는 건 싫어.”
“아닌데, 아빠는 하다가 너무 예뻐서 주머니에 쏙 넣어 다니고 싶은데.”
“거짓말, 지운이가 그랬어. 아가가 울면 아빠가 재밌게 놀다가도 가 버린다고.”
하다는 모양 좋은 눈썹을 한껏 늘어뜨리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하다의 반응에 충격을 받은 건 해원이었다. 아이가 이렇게 생각할 줄은 정말 몰랐다. 어떤 말로 아이를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할지 눈앞이 캄캄했다.
해원은 나름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며 불안해하는 하다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손길에 안정감을 느끼는지 하다는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손을 꼼지락거렸다.
“하다야, 하다는 배고프면 아빠한테 뭐라고 해?”
“해님 배고파요.”
“그럼 아가는 배고프다고 말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
“…없어.”
하다가 고개를 들고 해원을 빤히 바라봤다. 해원은 하다와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웃었다.
“우리 하다는 아빠한테 밥을 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아기는 그러지 못해. 으앙 하고 우는 것 밖에 못 해.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봐, 우리 하다가 으앙, 하고 울면 아빠가 어떻게 했지?”
“음, 해님이 어디선가 나타나서 나를 번쩍 안아 줬어.”
하다는 간지럽게 웃으며 조그마한 손을 뻗어 해원의 뺨을 감쌌다. 따뜻한 온기에 정신없이 날뛰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아이가 주는 안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다가 우는데 아빠가 안 나타나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싫어, 너무 싫어.”
하다는 인상을 팍 쓰면서 고개를 저었다. 해원이 손을 뻗어 하다의 미간을 문질렀다.
“아가도 그럴 거야. 아가도 막 우는데 아빠도 하다도 안 나타나면 너무 슬플 거야. 그치?”
하다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응. 그러면 아가가 울면 하다가 이렇게 안아 줘도 돼?”
하다는 짧은 팔을 버둥거리며 해원을 안으려 애썼다. 해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하다의 통통한 팔을 쥐고 목에 둘러 주었다. 그러자 안정감 있게 목에 매달려 오며 푸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그럼, 당연하지. 하다가 오빠가 될 수도 있고 형이 될 수도 있어. 아빠는 우리 하다랑 아가랑 잘 지냈으면 좋겠는데.”
“…잘 지낼 거야. 근데 아빠가, 아가만 예뻐하면 너무 슬플 거 같아.”
해원은 하다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혔다. 정情, 거기에 더해진 사랑愛, 그게 얼마나 따뜻하고 달콤한 것인지 해원도 알고 있었다.
온전히 제게만 쏟아지던 사랑을 나눠 가져야 한다는 게 하다를 버겁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아껴 주면 될 줄 알았다. 아직은 부모로서 너무 서툴고 모자라는 걸 다시 한번 상기했다.
“하다야. 아빠는 우리 하다를 제일 사랑해. 이건 아기가 태어나도 마찬가지일 거야.”
“진짜?”
“그럼, 우리 하다는 아빠한테는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아들이야. 아빠는 하다가 아빠 아들이라서 너무 행복하고 좋아.”
“나두 아빠 사랑해.”
“누가 뭐라고 해도 하다는 강류원과 문해원의 아들이야. 알겠지?”
하다는 대답 대신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며 간지러운 숨을 뱉어 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지혜와 노련함을 요했다. 어느 상황에 시한폭탄처럼 펑 하고 터져 버릴지도 모르고 어쩔 땐 도화선을 태우며 소리 없이 타오르기도 한다.
하다는 항상 신경을 쓰고 눈길을 두어야만 하는 소중한 존재였다. 하다를 입양하고 지금껏 키우면서 아이를 통해 느낀 행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류원과 지내면서 느끼는 행복과는 다른 종류의 행복이었다. 하다는 알까, 그때 입양하겠다고 마음먹은 저 자신을 수없이 칭찬했다는 걸, 하다로 인해 너무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걸.
더 많이 사랑해 주고 더 많이 안아 주어야겠다. 아이가 외롭지 않게 사랑받고 있음을 더 많이 느끼게. 하다의 머리카락에 짧게 입 맞추고 엉덩이를 토닥였다.
“하다야 아빠 왔다.”
제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고 환하게 웃었다. 해원이 하다를 바닥에 내려 주자, 뽈뽈뽈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아빠아-!”
힘껏 달려와 품에 안기는 하다를 번쩍 안아 든 류원이 하다의 뺨에 입술을 마구 문질렀다. 하다는 류원의 이마를 탁, 때리고 양 뺨을 작은 손으로 야무지게 감싸고 입술에 짧게 입 맞췄다.
“이야, 오늘 우리 아들 서비스가 장난이 아니네.”
“아빠, 다녀오셨어요.”
“이쁜 내 새끼 잘 먹고 잘 놀았어?”
“응!”
“강하다, 거짓말하면 안 돼. 오늘 하다 간식도 잘 안 먹고 온종일 시무룩해 있었어요.”
해원이 류원에게 고자질하자 금세 하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류원은 하다를 바닥에 내려놓고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류원은 아직 현관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상태였다.
“누가 우리 아들을 시무룩하게 만들었어. 누구야. 아빠가 혼내 줄게.”
하다가 빤히 류원을 바라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해원을 향해 집게손가락을 쭉 뻗었다. 류원이 놀란 얼굴로 해원을 바라봤다. 그러자 해원은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해님 말고, 해님 아기.”
“아…기?”
“응, 해님 배에 아기 있어요.”
류원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좁혔다. 하다는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씩 늦되지만 영특하고 영민한 편이었다. 그리고 보육원에서 자란 탓에 쓸데없이 눈치가 빨랐다.
해원과 가벼운 말다툼을 해 집안 분위기가 안 좋으면 아이는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가 눈치를 보는 게 싫어서 최대한 집에서는 안 싸우려고 조심하는데, 그게 마음처럼 안될 때가 있었다.
그러면 하다는 방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마치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해원이 제일 마음 아파하는 순간이었다.
“하다야. 오늘은 아빠랑 코코 할까?”
“아니이, 하다는 씩씩해서 혼자 잘 수 있어!”
하다의 대답에 해원은 고개를 돌려 눈가를 훔쳤고 류원도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다는 가만히 류원을 바라보다가 제 방으로 총총 뛰어가 버렸다. 류원은 그제야 몸을 일으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해원을 돌려세우고 품에 안았다.
“해원아, 괜찮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다가 힘들어하니까, 이 아이를 낳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후,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그런 말은 하지 말자. 우리한테 축복처럼 찾아온 아이잖아.”
괜히 해원이 부담스러울까 봐. 그리고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을 했지만 제 마음속 한구석에는 아이를 열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정말 기적처럼, 축복처럼 아이가 찾아왔다.
아이가 찾아와서 너무 행복하고 기쁜데 마음에 걸리는 건 하다였다. 하다가 버거워서가 아니라 아이가 동생이란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스럽고 우려되었다. 그래서 최대한 늦게 알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아이는 영민하게도 벌써 아기의 존재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다와 태어날 아기를 차별해서 키울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제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해서 아들이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하다는 해원과 함께 마음으로 낳은 자식이었다. 제가 지어 준 이름에 반응하고 환하게 웃던 하다가 아직도 기억 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아이를 무슨 수로 외면하고 차별해서 키운단 말인가.
“아기가 태어나면 하다가 강류원과 문해원의 아들이 아닌 게 되는 거야?”
“아니요, 하다는 제 아들이고 형 아들이에요.”
“그럼 된 거야. 하다 똑똑하고 속 깊은 아이니까 이해할…….”
“형!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아이는 아이일 뿐이에요. 아이는 절대 어른이 될 수 없어요. 이해는 무슨, 제걸 빼앗아 가면 화내고 욕심내고 떼를 쓰고 우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냥 하다는 어린아이인데…….”
류원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문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원은 늘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원은 류원이 아역배우 생활을 하느라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 했던 상황을 가슴 아파했다.
“…해, 해원아.”
류원의 몸을 세게 밀치고 해원이 다이닝룸으로 들어갔다. 류원은 머리를 감싸 쥐고 낮게 신음했다.
이놈에 입이 방정이네.
발소리를 죽이고 해원이 들어간 다이닝룸으로 들어가자, 해원이 식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해원의 울음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해원아, 나 좀 봐봐.”
“…나중에요.”
잠시 침음한 류원이 바짓단을 둘둘 말아 올려 다리를 의자 위에 올렸다. 그의 무릎에는 시퍼런 멍이 커다랗게 들어 있었다. 류원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잔뜩 우는 소리를 냈다.
“해원아, 이것 좀 봐봐. 나 무릎에 멍들었어.”
“…예?”
식탁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해원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류원을 바라봤다. 류원은 속으로 웃으며 최대한 불쌍하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 해원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쩌다가 이랬어요.”
류원은 속눈썹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 제 무릎을 바라보는 해원의 시선에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제 몸이 다치는 건 매일 숨기고 감추기 급급하면서 저나 하다가 다친 건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마음 아파했다.
지금도 멍 주위를 손으로 살살 매만지며 저보다 더 울상을 지었다. 류원은 손을 뻗어 해원의 턱 아래를 붙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 하나도 안 아파. 그런 표정 짓지 마.”
“조심 좀 하라니까 또 어디에 부딪힌 거예요.”
“해원아, 하다가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알아요. 저도 형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 했는지. 제가 요즘 이래저래 예민해서 그래요. 죄송해요.”
요즘 해원은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짜증이 수시로 툭툭 튀어나왔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이 눈에 거슬리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준호는 임신하고 난 뒤, 호르몬이 변하면서 일어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자꾸 류원에게 짜증을 내는 자신이 못마땅했다. 류원은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듯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눈가를 문질렀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먹고 싶은 거요?”
류원의 말에 해원은 곧바로 곱창을 떠올렸다. 수철과 가끔 소주잔을 기울이던 액션 스쿨 근처 곱창집, 그 집 곱창이 먹고 싶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킨 해원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그곳에서 만난 최규진이 떠올랐다.
그곳은 규진과 다시 만난 곳이었다. 그것도 류원이 일본 촬영을 하러 간 사이 거짓말까지 해 가며 몰래 만난 그 일이 떠오르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 먹고 싶은데.”
“형, 화낼 거예요?”
“응? 네가 먹고 싶은 게 있다는데 내가 왜 화를 내. 뭐 먹고 싶은데?”
“저… 곱창 먹고 싶어요.”
해원의 예상대로 류원의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임신하고 난 뒤 해원이 특정 음식이 먹고 싶다고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 뒤늦게 입덧이 시작되면서 입이 짧아지기도 했고 류원이 힘들까 봐 말을 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런데 처음으로 요구하는 음식이 곱창이라니. 치미는 짜증을 억지로 삭히며 해원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이모님한테 하다 맡기고 나갔다 오자.”
“…정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해원이가 먹고 싶다는데 당연히 먹으러 가야지.”
해원은 벌써 생각만으로도 침이 고이는지 목울대가 일렁일 만큼 침을 꿀꺽 삼켰다. 빨리 먹고 싶다. 류원은 잠시 하다를 보기 위해 하다 방으로 들어갔고 곧 하다를 품에 안고 나왔다.
짧은 다리를 파닥거려 류원의 품에서 벗어난 하다가 해원의 앞으로 다가와 해원을 올려다보았다. 목을 뒤로 한껏 젖혀도 해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대뜸 물음을 던졌다.
“해님, 곱창이 뭐예요.”
“어, 그건…그러니까 아무튼 음식이야.”
“해님 곱창 먹고 싶어요?”
하다도 해원이 먹고 싶다는 음식이 있다는 게 신기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했다. 해원은 그런 하다가 귀여워서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하다 할머니랑 자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투정을 부릴 줄 알았던 하다는 얌전하게 손을 흔들었다. 류원과 해원은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빠져나왔다.
퇴근길 정체가 끝나지 않은 도로 위는 해원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빨리 먹고 싶은데 길이 막혀서 가질 못하니 답답한 모양이었다. 한쪽 다리를 달달 떨어 대며 손톱을 물어뜯는 모습이 귀여웠다. 류원은 운전대를 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먹고 싶어?”
“네!”
“이런 모습은 또 처음이라 신선하네.”
신선하다는 말에 해원의 뺨이 붉어졌다. 최대한 솔직하게 류원에게 다가가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아직 그에게 보여 주지 못한 모습이 많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어 눈가가 뜨거워졌다. 감정 기복이 심해서 사소한 것에도 이렇게 울컥하는 일이 잦아졌다. 해원은 일부러 시선을 창밖에 두고 눈물을 삼켰다. 늘 올곧게 사랑을 퍼부어 주는 그가 좋았다.
“형, 제가 많이 좋아하고 있어요.”
“…갑자기?”
잠시 신호가 걸린 사이 류원이 손을 뻗어 해원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머리칼이 좋아서, 예상치 못한 수줍은 고백이 좋아서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나도, 문해원이 없는 강류원의 삶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하, 정말.”
“그러니까 나 몰래 울지 마. 내 앞에서 속 시원하게 울어 버려. 자꾸 참는 거 안 좋아. 나는 네가 내 앞에서 물구나무를 서서 춤을 춘다고 해도 헤벌쭉하고 좋아할 놈이니까.”
억지로 참고 참았던 눈물이 소리 없이 흘렀다. 자꾸만 너무 많은 걸 선물해 주는 그가 있어서, 사랑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하다가 있어서, 기특하게도 제 품으로 와 준 배 속의 아이가 있어서, 행복했다. 아니 행복하다는 말로 다 표현되지 않았다.
“준희 형이 걱정 많이 하더라.”
“왜요?”
“나 때문이지 뭐. 나 안 그래도 일하기 싫어하는데 애까지 태어나면 더 일하기 싫어할 거라고. 걱정이 많아.”
해원이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하다를 입양한 후 류원의 작품 활동이 눈에 띄게 줄었으니 준희의 걱정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해원은 하다와 많은 시간을 함께해 주려고 노력하는 류원에게 늘 고마웠다.
흘러내린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고 운전대를 잡은 류원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몇 년이나 본 얼굴인데도 볼 때마다 괜히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저도 형이 열심히 일하는 거 싫어요. 집에도 자주 못 들어오고 연락도 잘 안 되고…….”
“아무래도 그건 그렇지.”
해외 로케이션 촬영이 있으면 못해도 보름은 해원을 보지 못한다. 마음 같아선 어디를 가든 해원을 데리고 가고 싶은데 아이가 있고, 해원이 직업이 있다 보니 그건 현실적으로 조금 힘들었다.
“아… 맞다. 저 <혼자 지는 달> 봤어요.”
“어?!”
놀란 류원이 하마터면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보지 말라고 그리 당부했는데. 하, 입술을 비집고 작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키스 신이 정말 많더라고요.”
“…보지 말라니까.”
“나는 형이 그렇게 키스를 잘하는지 진짜 몰랐잖아요. 아주 잡아먹겠던데? 그 감독은 키스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었대요? 아니 무슨 키스 신이, 나 참 기가 막혀서.”
류원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고 해원을 힐끗거렸다.
<혼자 지는 달>은 류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연한 격정 멜로 장르의 영화였다. 평소 좋아하던 감독이기도 했고, 또 그가 처음 기획했을 때부터 류원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이라며 출연을 간곡히 부탁했기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계약서에 사인하고 말았다.
해원에게는 잘 숨기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눈치 없는 이준희가 격정 멜로를 찍는다며 나불거리는 바람에 해원이 알게 되었다. 그 바람에 거의 한 달 동안 해원과 각방을 써야 했다.
“형이 VIP 시사회도 못 오게 하고 보지 말라고 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이건 뭐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던데요.”
“…지금 질투하는 거야?”
“아뇨! 저는 배우인 형의 배우자로서 그런 감정 하나도 없이……. 없기는 개뿔! 아니 없을 수가 있겠어요? 형이 다른 여자 입술을 그렇게 물고 빨아 대는데, 보는 내내 진짜 빡쳐서 내가…….”
“아 진짜, 문해원 질투하는 것도 귀여워.”
류원은 호탕하게 웃으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애썼다. 격정 멜로답게 수위가 높았기에 내심 해원이 보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또 이렇게 질투하니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기분이 좀 복잡미묘했다.
류원은 신호가 걸린 사이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고개를 푹 숙인 해원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손을 뻗어 턱을 쥐고 들어 올리자 손마디를 스치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해원아.”
“…아, 죄송해요. 제가 지금, 감정 기복이 심해서 별것도 아닌 일에 마음이 좀 그래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해원이 중얼거렸다. 류원은 혀를 짧게 차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가 이리도 죄송하고 미안한 게 많은지. 해원은 늘 받기만 했다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정말 해원이 제게 선물해 준 것들을 하나씩 다 꼽아 보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랐다.
특히 일과 관련된 부분이 그랬다. 예전에는 인기가 떨어질까 봐, 작품을 쉬게 되면 잊힐까 봐 전전긍긍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해원으로 인해 마음에 여유라는 게 생겼다. 해원이 아니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감정이었다. 류원은 손을 뻗어 해원의 미처 다 훔치지 못한 눈물 자국을 지워 내며 희미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네가 질투해 줘서 좋은데.”
“…질투 아니에요.”
“그럼 신서준 감독 <화차> 출연계약서 쓴다?”
<화차>라는 말에 해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얼마 전 류원이 시나리오를 한 아름 안고 집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모두 류원의 앞으로 들어온 시나리오였다. 해원은 잠이 안 올 때마다 시나리오를 하나씩 읽기 시작했는데 그중에 <화차>는 손에 꼽힐 정도로 수위가 높은 작품이었다.
상대 배우와 수위 높은 애정 신이 열 손가락으로도 꼽아도 모자를 만큼 엄청나게 많았다. 어차피 나오는 거야 몇 장면 안 나올 테지만 몇 장면 안 나오는 그 애정 신을 찍기 위해서 수차례 리허설, 촬영, 그리고 거기에 NG까지 있을 거라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나 출연해도 돼?”
채근하는 류원의 말에 해원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마지못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질투 맞네! 뭐.”
류원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꽉 막힌 도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도심으로 들어서자 정체는 더 심해졌고 차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갔다.
“진짜, 찍으려고 했어요?”
“아니.”
해원은 우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으로 류원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류원의 대답에 안심한 듯 잔뜩 솟아오른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 전방 1km 앞에 목적지가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해원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이제 곧 목적지였다. 류원은 주차를 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같은 자리를 두어 바퀴 돌고서야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다. 차가 멈추자 해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 나갔다.
류원이 주차를 하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곱창 특유의 누린내와 함께 피어오른 연기가 자욱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해원은 가게 구석에 앉아 집게로 곱창을 뒤적이고 있었다. 집게를 든 손으로 마구 손을 흔들어 댔다.
반달로 부드럽게 휘어진 눈이 류원에게 잠시 시선을 던졌다가 금세 불판에서 지글지글 익어 가는 곱창으로 향했다. 류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해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줘.”
“예? 아니에요. 제가 할게요.”
류원은 해원의 손에서 가위와 집게를 넘겨받아 곱창을 자르기 시작했다. 적당한 크기로 잘린 곱창을 불판 위에 가지런히 놓고 익어 가는 걸 구경하던 해원이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 먹고 싶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빨리빨리!
해원은 젓가락을 야무지게 움켜쥐고 눈으로 익혀 버릴 기세로 곱창을 노려봤다.
“이제 먹어도 되겠다.”
류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릇노릇 익은 곱창 한 점을 호호 불어 입에 넣었다. 눈을 감고 음미하듯 씹던 해원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우와, 진짜 맛있다.”
“하, 그렇게 맛있어?”
“네! 형도 드셔 보세요.”
해원이 곱창 한 점을 류원의 입가에 대 주었다. 하지만 류원은 한사코 거절하며 손을 밀어 해원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야무지게 곱창을 씹고 꿀꺽 삼키는 해원이 퍽 예뻤다. 뭐든 이리 잘 먹어 주면 좋을 텐데.
류원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실감했다. 해원의 입 안으로 사라지는 곱창을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배가 부르고 기분이 좋아졌다. 해원은 쉴 새 없이 쌈을 싸서, 부추와 곁들여서, 소스에 푹 찍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곱창을 즐겼다.
꽤 많은 양의 곱창이 있었는데 금세 불판의 바닥이 보였다. 해원은 하나씩 하나씩 먹어 치우면서 입맛을 다셨다. 더 먹고 싶은데 더 먹으면 너무 미련해 보일까 봐 살짝 망설이고 있었다.
“더 먹을래?”
“…아니에요.”
“진짜?”
“…저 더 먹어도 돼요?”
류원이 웃으며 2인분을 더 주문했다. 이미 익은 곱창을 해원의 접시에 놓아주고 불판 위에 곱창을 올렸다. 해원은 치익, 먹음직스러운 소리를 내며 불판 위로 올라간 곱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물우물 익은 곱창을 씹으면서도 연신 불판에서 곱창이 익어 가는 걸 구경했다.
“진짜 맛있다.”
“많이 먹어.”
고작 이런 곱창에 함박웃음을 짓는 해원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류원의 마음이 간질거렸다. 순식간에 곱창 4~5인분을 해치운 해원이 티슈를 툭툭 뽑아 입가를 닦고 잔뜩 부른 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맛있게 먹었어?”
“…하하, 저 좀 많이 먹었죠?”
“아니.”
해원은 멋쩍게 웃었다. 실컷 먹고 나니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류원이 계산서를 들고 일어나자 해원은 불판에 남은 곱창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쏙 넣었다.
* * *
류원은 핼쑥해진 얼굴로 촬영장에 복귀했다. 예정보다 십 분 정도 늦은 탓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죄송하다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채현이 익숙한 듯 빨대를 꽂은 생수를 가지고 와 류원에게 내밀었다. 류원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빨대를 입에 물었다.
“이번에는 뭐였어요?”
“신포시장 닭강정.”
“인천까지 다녀오신 거예요?”
“어.”
채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류원의 손에서 생수를 넘겨받았다.
“근데 열 받는 게 뭔 줄 알아?”
“……?”
“인천까지 다녀왔는데 냄새도 맡기 싫다고 쫓겨났어.”
“와, 해원이 형 너무하다.”
해원은 임신 8개월 차에 들어섰음에도 입덧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준호도 이런 경우가 거의 없다며 신기해했다. 입덧도 아주 골고루 겪고 있었다. 초기에는 먹덧이었고, 그다음은 토덧이었다. 그다음은 양치덧이었고 지금은 토덧과 먹덧이 동반된 복합적인 입덧을 겪고 있었다.
진짜 미칠 거 같았다. 그렇다고 먹고 싶다는데 안 사다 줄 수도 없고 부랴부랴 사다 주면 먹기 싫다고 하니… 속이 터졌다.
“그래도 입덧하는 형은 오죽하겠어요.”
“…그건 나도 알지. 요즘에 해원이 몸무게 자꾸 줄어서 걱정이다.”
“아기는 괜찮아요?”
“응, 우리 복이, 숭이 잘 크고 있지.”
아기 이야기에 류원의 입매가 사르르 풀어졌다. 해원은 놀랍게도 쌍둥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초음파 사진으로 두 개의 아기집을 확인하고 류원은 해원과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준호가 나가서 울라고 소리를 쳐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정말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그대로 딱 죽고 싶었다. 제 인생에서 그만큼 감격스럽고 좋은 날이 없었다.
류원은 휴대폰에서 입체 초음파 사진을 찾아 채현에게 보여 주었다.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채현이 대뜸 입을 크게 벌리고 기괴한 감탄사를 뱉어 냈다.
“왁! 이목구비 대박.”
채현이 호들갑을 떨며 엄지를 척 세웠다. 초음파로만 봐도 아기의 눈코입이 범상치 않다는 게 느껴졌다.
“장난 아니지? 태어나면 여럿 후리고 다닐 거 같은데 벌써 걱정이다.”
류원이 가슴을 쭉 내밀며 허세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역시 입체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들고 연방 감탄사만 뱉어 냈다. 이건 제 자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얼굴형이며 코며 입이며 진짜 손으로 빗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예쁘고 잘생겼다.
“준희 형이 전속 계약서 들고 오는 거 아니에요?”
“아서라, 난 절대 내 새끼 연예인 안 시킨다. 하고 싶다고 해도 도시락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거야.”
“왜요.”
“내가 해 봐서 알아. 이 바닥이 얼마나 좆 같은지. 이 시궁창을 내 새끼들이 밟는다고? 절대 안 돼.”
류원이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흔들었다. 진짜 배운 게 도둑질이라서 배우를 계속 해 먹고 있지만, 돌파구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다. 류원은 턱을 문지르며 씁쓸한 입 안을 혀로 굴렸다.
“아 참, 하다는 벌써 케일릭 각성했다면서요.”
“뭐, 빠른 것도 아니지. 벌써 일곱 살이니까.”
해원은 내심 하다가 케일릭 각성을 안 하길 바라고 있었다. 가혹하고 고된 운명을 겪어 봤기 때문에 제 아이들은 그 운명에서 벗어나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하다는 얼마 전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케일릭으로 각성했다. 해원은 하다를 끌어안고 한참이나 울었고 류원은 묵묵히 옆자리를 지켰다.
노멀로 자랐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리는 해원을 토닥이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류원은 그저 하다에게 향할 운명이 부디 고되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하다가 벌써 일곱 살이네요.”
“시간 참 빠르다.”
“해원이 형은 언제 아기 낳아요?”
“…해원이는 주 수 꽉 채워서 낳고 싶어 하는데 아기들이 좀 큰가 봐. 아마 못해도 다음 달에는 출산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형도 다둥이 아빠네요.”
류원은 해원에게 닭강정 박스를 든 채 문전박대를 당한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멍하게 허허, 하고 웃었다. 다둥이 아빠라니… 생각만으로도 가슴 안쪽이 간질거리는 게 기분이 좋았다.
“형 전화 와요.”
채현이 내미는 휴대폰을 넘겨받은 류원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여보세요.”
- 형… 제가 또 변덕 부려서 죄송해요.
“괜찮다고 했잖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
- 네. 근데 있잖아요…….
말꼬리가 늘어지는 게 심상치 않았다. 류원은 괜히 초조해지는 기분에 얼른 촬영 스케줄부터 확인했다. 앞으로 무조건 두 시간은 촬영장에 꼼짝없이 붙어 있어야 한다. 멀리 가면 안 되는데…….
- 그 닭강정 다시 가져다주시면 안 돼요?
“하, 다행이다. 그럴 줄 알고 현관 앞에 두고 왔어.”
- 진짜요? 역시 제 마음 알아주는 건 형밖에 없어요.
“복이, 숭이는 잘 놀아?”
- 네, 낮잠 자고 싶은데 태동 엄청 심해요. 축구 선수가 되려나 봐요.
누굴 닮아 이리도 활달하고 활동량이 많은지 해원은 밤에도, 낮에도 태동이 심해 통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자다 보면 옆자리가 허전했다.
해원은 촬영 일정이 빡빡한 류원을 배려하느라 거실에 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 모로 누워 쪽잠을 자곤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짠하고 안쓰러운지, 어제는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올 정도였다.
“요놈 자식들 나오기만 해 봐라, 내가 혼구멍을 내 줘야지.”
- 에이, 거짓말.
작고 낮은 웃음이 귓가로 흘러들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숨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문전박대는 너무했어.”
- 그땐 진짜 속이 뒤집혀서. 형… 진짜 미안해요.
“미안하지? 그럼 이따가 같이 샤워해.”
- …….
해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류원도 딱히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임신하고 난 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몸이 변하기 시작하면서 해원은 제 앞에서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몸의 대화가 가능해졌지만, 류원은 해원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있었다. 제법 나온 배에 손이라도 댈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 통에 손은커녕 눈길조차 줄 수 없었다.
- 싫어요. 형한테 이런 모습 보여 주는 거 싫어요.
“이런 모습이 뭔데.”
- 형은 진짜 제 마음 하나도 몰라요.
갑자기 뚝 끊어진 휴대폰을 들고 류원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울컥 화가 치밀었다가 금세 표정을 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도 해원에게는 자신이 믿음직한 사람이 아닌 모양이었다. 해원이 괴물이 되어도 예뻐해 줄 자신 있는데…….
“호진이 스탠바이할게요!!”
류원은 휴대폰을 대본 위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 * *
해원은 남산 만하게 부른 배를 요리조리 거울에 비추어 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쌍태아를 품은 몸은 단태아를 가진 이보다 훨씬 배가 많이 나왔다.
몸이 자꾸 변하는 게 너무 낯설고 무서웠다. 유선이 발달해 가슴이 나오고,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류원에게 몸을 보여 주는 게 꺼려졌다.
준호는 류원이 이해할 거라며 도움을 받으라고 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몸뚱이가 저도 이렇게 싫은데 류원은 오죽할까 싶었다. 자꾸 류원만 생각하면 기분이 울적해졌다.
갑자기 배를 걷어차는 느낌이 들었다. 우울한 제 기분과 달리 배 속의 아이들은 신나게 뛰어노는 모양이었다.
똑똑-.
“해님, 하다예요.”
“잠시만 기다려.”
해원은 허둥지둥 걷어 올린 옷을 내리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하다와 이모님이 서 있었다. 해원은 배가 나와 몸을 숙이지 못하고 간신히 손만 뻗어 하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그게, 우리 딸이 갑자기 서울에 올라왔다고 해서, 좀 다녀오려고 하는데.”
해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당장 문제는 하다였다. 하다 유치원도 보내야 하고 유치원 다녀오면 돌봐야 하는데 지금은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었다. 내일 형 스케줄이 어떻게 되지. 해원이 잔뜩 울상을 짓자, 이모님이 ‘혹시…….’ 하고 말을 꺼냈다.
“하다 아빠만 괜찮으면 내가 하다 우리 집에 데리고 가서 재우고 내일 데리고 오면 안 될까?”
“…진짜요? 저야 너무 감사한데 괜찮을까요?”
“나도 하다 아빠 상황을 아니까. 우리 딸도 아들 있어서 같이 놀게 하면 돼. 또 하다가 착해서 괜찮을 거야.”
“이모님 진짜 감사합니다.”
해원은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다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지금은 이모님이 안 계시면 하다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하다야 할머니 집에 놀러 갔다 올래?”
“응! 난 좋아요.”
“하다야, 아빠가 정말 미안해. 아기들 태어나면 아빠가 꼭 우리 하다 하고 싶은 거 하게 해 줄게. 알겠지?”
“응!”
하다가 씩씩하게 대답하고 불룩 나온 배를 끌어안았다. 얼굴로 배를 비비고 옷 위로 짧게 입 맞춘 하다가 침대를 밟고 올라와 해원에게도 입 맞췄다. 그리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해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입술에 입을 맞춰 주자 하다가 뿌듯하다는 듯이 웃었다.
“아빠 잘 자.”
“응, 우리 하다도. 잘 다녀와.”
“응, 아빠 안녕.”
“이모님 잘 부탁드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다는 신경 쓰지 말고 몸이나 신경 써. 어휴, 배가 많이 나왔네.”
해원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하다와 이모님을 배웅하고 소파에 앉았다. 텅 빈 집안을 눈으로 훑고 리모컨을 집어 티브이를 켰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류원의 영화 소식이 화면에 나오자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 이곳은 영화 방백 촬영 현장인데요. 저쪽에 강류원 씨가 촬영 준비를 하고 계시네요. 제가 다가가 보겠습니다.
리포터가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자, 류원의 얼굴이 좀 더 또렷하게 보였다. 류원은 카키색 카고바지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입고 감독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영화 배경이 2000년대 초반이라 의상이 조금 촌스러운 감이 있었다. 옷만 놓고 보자면 그랬는데 류원이 입어서 그런지 시대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류원이 카메라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리포터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류원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 안녕하세요., 강류원 씨. 연예가 산책입니다! 짧은 인사 한마디 해 주세요.
- 반갑습니다. 배우 강류원입니다.
365일 쉬지 않고 잘생김을 뽐내는 얼굴이 유독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였다. 곧 화면이 바뀌고 류원은 영화에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과 나란히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해원은 소파에 등을 편안하게 기대고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인터뷰는 순조로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배우들이 인사를 나누고 영화에서 맡은 배역과 간략한 줄거리 설명이 이어졌다.
배를 힘차게 차며 노는 둥이들 때문에 해원은 가만히 배를 문질렀다. 태동이 심할 때는 뱃가죽을 뚫고 나올 것처럼 발이나 손이 보일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 무섭고 두려워서 많이 놀랐지만,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비좁은 배 안에서 둘이 엉겨 붙어 있으려니 답답하기도 하겠지.
“복아, 숭아, 아빠 나온다. 얌전히 있어야지.”
배를 문지르는 사이 영화 이야기가 끝나고 인터뷰는 조금 사적인 질문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류원은 리포터 옆에 앉아 분위기에 맞춰 조금 웃기도 하고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을 하기도 했다.
- 아 참, 저희 연예가 산책에서 강류원 배우님 선물 하나 준비했거든요.
리포터가 작은 상자를 꺼내 류원에게 내밀었다. 류원은 조금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손바닥 만한 작은 모자와 아기 옷이 들어 있었다. 류원은 조그마한 아기 옷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 다둥이 아빠 되신 거 너무 축하드립니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기분이 어떠세요?
- 너무 기쁘고 행복합니다.
- 요즘 호진이가 굉장히 우울해하는 장면을 찍고 있는데 호진이를 연기하는 류원 씨는 기분이 좋아서 자꾸 NG가 나고 있어요.
류원의 옆에 앉은 남자 배우가 말을 거들었다. 그의 말에 와하하, 큰 웃음이 터지고 류원은 입을 가리고 멋쩍게 웃었다.
- 이거 보세요. 아니라고 말을 못 한다니까요.
투덜거림이 가미된 장난스러운 말투에 류원이 또 웃었다. 평소라면 아니라고 해명이라도 할 텐데 오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밝게 웃는 류원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화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클로즈업된 류원의 얼굴을 매만지는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보고 싶다.
- 곧 태어날 아기에게 한마디 해 주세요.
- 아… 안 하면 안 될까요?
- 나중에 아기들이 태어나면 이 영상을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러지 말고 한마디만 해 주세요.
리포터의 부추김에도 류원은 한사코 싫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옆에 앉은 배우들도 한마디씩 거들자 이내 자세를 잡고 카메라를 빤히 바라봤다.
곧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To. 태어날 아기들에게]라는 낯간지러운 자막이 떴다. 해원은 괜히 입이 말랐다. 손끝을 마주 비비며 화면을 주시했다. 다정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던 류원이 마른 입술을 한 번 핥고 입을 열었다.
-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만 자라 줘.
해원은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극히 강류원다운 대답이었다.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한 리포터나 배우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류원은 쑥스럽다는 듯이 그저 웃기만 했다. 웃는 모습이 너무 달콤하고 사랑스러워서 마음이 간질거렸다.
“안 잤어?”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해원이 고개를 돌렸다. 흰 셔츠에 슬랙스를 입은 류원이 소파 옆에 서 있었다. 해원은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조금 전까지 텔레비전 속에 있던 류원이 튀어나온 기분이었다.
“해원아?”
“…아, 오셨어요.”
“뭐야,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류원은 해원이 앉은 자리까지 다가와 허리를 숙여 다정하게 입 맞췄다. 그에게서 양귀비 향이 진하게 풍겼다. 눈꺼풀을 내리고 향을 핥듯이 음미했다.
“잘 놀았어?”
“그럼요, 얼마나 잘 노는지 몰라요.”
“아기들 말고 너.”
해원은 벌개진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수줍게 웃었다.
“네.”
류원은 손에 든 상자를 소파를 내려놓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뭔가를 찾는 듯한 느낌에 해원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하다는 이모님이 데리고 가셨어요. 따님이 오셨는데 제가 몸이 이래서 이모님이 봐주신다고.”
“그럼 집에 너랑 나 둘뿐인가?”
“…둘은 아니죠.”
해원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나게 뛰어놀던 복이와 숭이는 곤히 잠들었는지 잠잠했다. 류원은 셔츠 단추를 풀며 피곤한 듯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그의 목이 비틀릴 때마다 우두둑, 뼈마디에서 소리가 났다.
“밥은?”
“…아직이요.”
“뭐 먹을래?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아뇨. 형은요?”
어느새 셔츠 단추를 모조리 푼 그가 몸을 숙여 해원의 귓불을 핥아 올렸다. 흣, 진한 체취에 해원이 목을 움츠리며 낮게 신음했다.
“너.”
“…….”
“섹스하고 싶어.”
노골적인 언사에 해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저 역시 사람인지라 몸이 동할 때가 몇 번 있었다. 특히 호르몬 분비가 많아질 때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런 모습을 류원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몸이 동하긴 하나 남산 만하게 부푼 배를 류원에게 보여 주긴 싫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모호한 성별이 된 것 같아서였다.
귓불을 핥아 올리던 혀가 귓바퀴를 느리게 훑고 곧장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숨과 함께 혀가 밀려들어 안쪽을 헤집었다. 허리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에 다급하게 류원을 밀어냈지만, 몸이 밀리기는커녕 그의 뜨거운 숨이 귓가를 데웠다. 그가 훤히 드러난 목을 핥아 올리며 탄식 같은 숨을 뱉어 냈다.
“후, 못 하니까 죽겠네.”
류원은 음탕한 기운을 애써 밀어내며 작게 웃었다. 해원이 임신 후기로 접어들면서 준호는 저를 불러다가 앉혀 놓고 잔소리를 빙자한 설교를 해 댔다.
몸에 무리를 줄 수도 있고 조기 출산이나 자궁수축 등이 올 수 있어 최대한 피하는 게 좋다고 입술이 마르도록 잔소리를 퍼부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해원을 눕히고 싶지만, 아기와 해원의 몸 상태를 생각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미련 없이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류원을 의아하게 쳐다보던 해원이 왜, 하고 여운 가득한 물음을 던졌다.
“후기에는 섹스하는 게 안 좋대, 자궁수축이 올 수도 있고 애무도 마음대로 못하고.”
“아…….”
“하다도 없고 모처럼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다.”
류원은 해원의 입술에 짧게 입 맞추고 벗어 둔 옷가지들을 챙겨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이 굳게 닫히는 걸 빤히 바라보던 해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살짝 달아오른 몸에서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손으로 귀를 문지르고 입술을 핥았다. 류원만큼이나 해원도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의 말처럼 모처럼 좋은 기회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류원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며 거실로 나왔다. 소파에는 해원이 몸을 모로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배가 불편한지 연신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늘 힘들고 무서운 일은 해원이 다 짊어지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제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라면 좋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안타까웠다. 복이, 숭이가 부디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와 주길 간절히 바랐다.
류원은 소파 아래에 앉아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볼륨을 줄이고 전에 해원과 함께 출연한 <전지적 참견 영상>을 재생했다.
해원이 임신하고 집에 있게 되면서 기회가 마땅치 않았다. 작은 화면으로 보는 건 싫고, 또 보다가 끊기는 건 더 싫고. 마음에 드는 장면은 몇 번이나 돌려보고 싶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일 년이 훌쩍 지나 버렸다.
류원은 아예 양반다리를 하고 턱을 괴었다.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오고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영상이 시작되었다.
패널들 인사가 끝나고 메인 MC 격인 유명 개그맨이 류원의 출연 소식을 전하며 환호했다. 각자 자리에서 일어나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기도 하고, 말장난이 이어졌다. 그러길 한참…….
드디어 류원의 관찰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짧게 프리뷰 영상이 흘러나오고 곧 자신의 인터뷰 영상이 이어졌다. 그리고 뒤이어 해원의 인터뷰 영상도 나왔다. 해원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 아, 안녕하세요. 저는 강류원 씨 전前 매니저이자 스턴트맨인 문해원입니다. 그리고 쑥스럽지만 강류원 배우님의 배우자이기도 합니다.
쑥스럽게 웃으며 배우자라고 소개하는 해원이 괜히 예뻐 보였다. 해원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을 배우자라고 소개하는 건 처음이었다. 리모컨을 집어 들어 그 장면만 두어 번 더 돌려 보고는 씩 웃었다.
- 배우자분이 매니저로 출연한 건 처음이라 좀 새로운데 어색하진 않으세요?
- 네, 괜찮습니다. 실제로 제가 강류원 씨 매니저 생활을 해서 어색하진 않습니다.
- 평소 일할 때 강류원 씨를 어떻게 부르세요?’
- 처음에는 강류원 씨, 강 배우님 하다가 지금은 편하게 형이라고 합니다.
처음 제 매니저로 들어왔을 때 해원은 다른 사람한테는 형형 잘도 하면서 꼭 제게는 딱딱하게 강류원 씨, 강 배우님으로 호칭했다. 그게 불편해 몇 번이나 형이라고 하라고 해도 싫다고 극구 사양하던 그가 이제는 자연스럽게 형이라고 하니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 강류원 씨는 주로 이동 시간에 뭘 하시나요?
- 주무실 때도 있고 음악을 들으실 때도 있고 뭐, 주로 대본을 보시는 편입니다.
류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 평화롭게 곤히 잠든 해원을 바라봤다. 해원과 함께 있으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억지로 잠을 청하고 짜증을 부리기 일쑤였지만 지금은 대본도 보고 책도 보고 그러다가 잠이 오면 대본을 덮어 놓고 잠을 청했다. 푸석해진 뺨에 짧게 입 맞추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상적인 화면이 이어졌다. 카메라 앵글은 주로 자신에게 향해 있었고 간간이 등장하는 해원에게 옮겨가기도 했다. 갑자기 카메라가 해원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해원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밖으로 나가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류원이 턱을 문지르며 의아한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해원은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검색하고는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 어디 가세요?
- 커피 사러 갑니다.
- 어? 이 근처에 커피 전문점이 많은데…….
카메라가 주변을 부드럽게 훑고 다시 해원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그는 수줍게 웃으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이 있었다. 블러 처리가 되어 있지만, 상표가 익숙해서 금세 알 수 있었다.
- 형이 이 브랜드 커피를 좋아해서요.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수줍게 웃는 해원의 모습이 정말 깨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물론 남들에게는 숫기 없는 매니저의 얼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제게는 너무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해원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류원이 즐겨 먹는 스타일대로 주문을 했다. 점원과 눈을 마주치며 싱그럽게 웃는 얼굴이 예뻐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해원의 잠든 얼굴에 입 맞췄다.
자신이 촬영 중이거나 미팅 중일 때 해원은 늘 저를 주시하고 있었다.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언가 필요한 게 생기면 해원이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생수, 대본, 손수건, 하다못해 가끔 피는 담배까지……. 언제 그 물건이 제게 필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해원이 저를 잘 안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카메라가 많고 낯선 사람들이 섞여 있음에도 유독 저 날은 참 편안했던 것 같다. 아마도 해원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또 불편하지 않게 신경을 많이 써 준 덕분일 것이다. 괜히 마음이 벅차올랐다.
- 강류원 씨를 다섯 글자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표현하고 싶으세요?
작가가 던진 질문에 해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본에 없는 질문을 받은 모양이었다. 적잖게 당황한 얼굴로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멋쩍게 웃으며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류원도 흥미로운 얼굴로 화면 속에 비친 해원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머뭇거리던 해원이 희미하게 웃으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 크리스마스.
- 왜요?
- 크리스마스는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잖아요. 예쁜 트리 장식이나 알록달록한 전구가 예쁘게 반짝이는 거리. 음… 강류원 배우님은 그런 사람 같습니다. 늘 언제 어디서나 반짝이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이요.
말을 마친 해원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정말 행복하게……. 류원은 어쩐지 코끝이 시큰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크리스마스라니, 입술을 꽉 말아 물고 코끝을 문질렀다.
류원의 인사로 영상이 끝나고 패널들의 수다가 다시 이어졌다. 리모컨을 집어 들어 티브이를 꺼 버리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눈물을 말렸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으윽.”
갑자기 해원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얗게 질린 류원이 몸을 돌리자 해원은 입술을 꽉 깨물고 인상을 찡그렸다.
“왜, 왜 그래. 어디 불편해? 병원 갈까?”
“…형.”
“어, 말해.”
“복이, 숭이가 축구 선수가 되려나 봐요.”
해원이 인상을 찡그리며 티셔츠 끝자락을 아주 조금 걷어 올렸다. 티셔츠 아래로 드러난 맨살이 크게 꿈틀거렸다. 태동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류원이 해원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배 만져도 돼?”
“…아니요.”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부끄러운 것보다 그냥 싫어요. 형한테 이런 모습 보여 주는 게. 아기들은 너무 좋은데 지금 내 모습이 내가 아닌 거 같아서… 싫어요.”
류원은 해원의 눈가에 짧게 입 맞추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원의 기분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내가 직접 겪어 보지 않아서 네 기분이 어떤지 나도 잘 몰라, 근데 넌 문해원이야.”
“…….”
“네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도 네가 문해원이라는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아. 세월이 흘러 네 얼굴에 주름이 늘어 가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갈 때도 항상 내가 옆에 있을 거야. 그럼 그때도 이렇게 숨기고 도망치기만 할 거야?”
해원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앉아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자세가 불편해 몇 번이나 몸을 뒤척여야 했다.
“세월과 제가 임신한 건 조금 다른 문제인 거 같아요. 임신이라는 게 진짜 보통 힘든 게 아니더라고요. 그러니까 제 행동이나 말투에 너무 서운하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해원은 갑자기 배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태동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류원이 해원의 반응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무릎을 세웠다.
“어디 불편해?”
“흐윽, 배가, 배가 아파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대화를 이어 가던 해원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졌다. 한눈에 봐도 해원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류원은 휴대폰을 꺼내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호는 시간을 가늠해 보더니 연구소가 아닌 산과가 있는 병원으로 해원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해원아, 괜찮아?”
“…흣, 배가 아파요.”
“일단 병원으로 가자.”
류원은 풀어헤친 셔츠 단추를 다시 채우고 방으로 들어가 미리 챙겨 둔 출산 가방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해원을 부축해 차에 태웠다. 부디 가는 길에 급박한 상황만 생기지 않길 바라며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그날 밤 기나긴 산고 끝에 해원은 일란성 쌍둥이 공주님을 낳았다. 정말 눈부시게 예쁜 아기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