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출산 그 후, 짧은 후일담
어스름이 내려앉은 방 안의 공기는 따뜻하고 포근했다. 방 한쪽에는 아기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고 천장에는 작은 모빌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아기자기함과는 동떨어진 음탕한 기운이 잔뜩 묻은 옷가지와 속옷이 난잡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흣, 형 잠깐만…….”
평화로운 정적을 깨듯 들려온 낮은 신음에 류원이 목을 울리며 큭큭 웃었다. 해원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침대에 누워 류원에게 가슴을 내어 주고 있었다. 해원은 신음이 새어 나갈까 싶어 손등을 꽉 깨물었다.
“젖이 부풀었어.”
“윽, 그만, 그만해요.”
해원이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하지만 류원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는 듯이 해원의 유두를 한 움큼 베어 물고 혀를 굴렸다. 입 안을 꽉 조여 유두를 빨면 그 속에서 꿀 같은 액체가 흘러나와 입 안을 적셨다.
남성 피스틸은 출산 후 유선이 발달해 젖이 돌긴 하지만 아기에게 먹일 정도로 양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방치를 해 둘 수만은 없었다. 충분히 마사지해서 풀어 주고 안에 고인 모유를 빼 줘야 했다.
대부분은 유축기를 사용해 빼내지만, 류원은 자신이 직접 해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매일 밤 그에게 유두를 빨리고 있었다. 작디작은 유실이 어느새 통통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는 능청스럽게 둘째가 빨리 생기는 이유를 알겠다며 속살거렸다.
류원은 입 안을 채운 액체를 혀로 굴려 맛보고 목울대가 크게 일렁일 만큼 꿀꺽 삼켰다.
“비릿한데 묘하게 맛있어.”
“흣, 이제 그만 해요.”
류원은 그만하라는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유두를 물고 빨았다. 춥춥, 난잡한 소리와 함께 야릇한 기운이 차올라 하체가 뜨거워졌다. 해원은 손을 내려 발기한 성기를 쥐고 천천히 문질렀다. 미끈한 액체가 선단을 타고 흘러 손을 적셨다. 류원이 입 안을 꽉 조여 유두를 빨 때마다 손속이 빨라졌다.
“흐윽, 으, 읏, 으.”
“공주님들 깨겠어. 소리 좀 죽여.”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혓바닥으로 유두를 세게 밀어 올렸다. 싹싹 핥아대는 느낌에 저절로 허리가 비틀렸다. 목구멍까지 사정감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몸을 모로 눕혀 성기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등 뒤로 류원이 달라붙어 제 손을 밀어내고 성기를 잡아챘다. 포피를 걷어 올리고 귀두를 슬슬 문질렀다가 그대로 빠르게 흔들기 시작했다. 탁탁, 살을 치는 난잡한 소리에 눈앞이 핑 돌았다.
“입 벌려 봐.”
신음을 죽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던 입술을 모양 좋은 손가락이 톡톡 두드렸다. 힘없이 입술을 벌리자 뜨거운 숨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그의 손이 입 안 깊숙이 밀려들었다.
그의 손끝이 장난을 치는 것처럼 입천장을 문지르고 치열을 훑었다. 그런데 그게 엄청 자극적이었다. 이를 세워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고 목을 울리며 뜨겁게 신음했다.
“흐으, 으, 못, 참겠어. 으응.”
“싸도 돼. 괜찮아.”
류원은 고개를 숙여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살을 베어 물고 성기를 쥔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입 안을 문지르는 손도 멈추지 않았다. 해원은 약간 높은 신음을 내지르며 몸을 굳혔다. 해원의 성기에서 정액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으앙, 하는 아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 딸 우는 타이밍 좀 봐. 보통 효녀가 아니라니까.”
류원이 놀리듯 말하며 해원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그리고 얼른 몸을 움직여 욕실로 들어갔다. 비누로 손을 깨끗이 씻고 나와 앙앙 울어 대는 봄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효녀, 왜 울어.”
“하아, 형 봄이 이리 주시고 분유 좀 타 주세요. 아니다, 저도 손부터 좀 씻을게요.”
해원은 물티슈로 대충 아래를 수습하고 속옷과 파자마를 챙겨 입었다. 아직 사정의 여파가 남아 몸이 나른하고 무거웠다.
그렇다고 아이가 우는데 가만히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해원은 류원의 품에 안긴 봄을 힐끗거리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아래가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봄이가 깨는 바람에 류원은 제대로 빼지 못하고 분위기가 깨지고 말았다. 좀 곤란할 텐데……. 아기들이 잠들고 나면 기회를 봐서 다시 해 줘야겠다. 해원이 밖으로 나오자 류원은 해원의 품에 봄을 안겨 주고 침실을 빠져나갔다.
봄이는 배가 고픈지 입을 오물거리며 자꾸 칭얼거렸다. 해원은 봄을 어르면서 계속 침대에 누운 여름을 살폈다.
평소에는 이모님들이 봄이와 여름이를 돌봐 주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류원과 해원이 아기들을 데리고 잤다. 이런 날은 좀 덜 치근덕거리면 좋으련만 그는 일주일 내내 저를 물고 빨아야지 속이 시원한 모양이었다.
곧 문이 열리고 젖병 두 개를 든 류원이 침대로 다가왔다. 젖병 뚜껑을 열고 봄이 입술에 대자, 작고 앙증맞은 입이 조금 벌어졌다. 젖병을 빨기 시작하는 봄을 보고 나서야 류원은 하나 남은 젖병을 침대 근처의 온장고에 넣었다. 침대로 다가온 류원이 작게 감탄사를 뱉었다.
“와, 진짜 귀여워.”
“목소리 낮춰요. 여름이 깨요.”
류원은 입을 꾹 다물고 봄이 손을 만지작거렸다. 처음에 아기들이 태어났을 때 류원은 봄이와 여름이를 만지지도, 안지도 못했다. 그저 눈으로만 보다가 용기를 내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입을 오물오물하며 젖병을 빠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류원이 피식 웃었다.
“왜요?”
“내가 네 젖 빠는 거랑 똑같잖아.”
“으… 형 저리 가요.”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어쩜 날이 갈수록 저리 능글맞아지는지…….’
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똘망똘망하게 눈을 뜬 봄이와 눈을 마주쳤다. 일란성 쌍둥이긴 한데 봄이는 류원의 눈매를 닮았고 여름이는 해원의 눈매를 닮았다. 그리고 이상하게 봄이는 저를 더 좋아하고 여름이는 류원을 더 좋아했다.
분유가 줄어들수록 봄이의 눈도 스르륵 감기기 시작했다. 잠이 든 듯하다가 다시 입을 움직여 젖병을 빨고 또 눈을 감았다. 해원도 작게 하품을 하고 봄이가 완전히 잠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
“여름이 깰 거 같은데.”
“봄이 잠들었어요. 잠깐만요.”
해원은 봄이 입에서 자연스럽게 젖병이 빠지자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입술을 삐죽이며 울음을 터뜨릴 준비를 하는 여름을 안아 들었다. 류원은 온장고를 열어 젖병을 꺼냈다.
“우리 둥이들은 참 착하단 말이야. 순서대로 이렇게 깨 주니까 얼마나 좋아.”
해원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신기하게도 봄이가 분유를 먹고 나면 여름이가 잠에서 깼다. 여름이가 2분 언니라 그런가? 더 의젓한 느낌이었다.
배 속에 있는 내내 여름이는 봄이가 아래로 흐르지 못하게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준호는 여름이가 참 기특하다며 초음파를 볼 때마다 칭찬했다. 그런데 세상 밖으로 나와서도 언니 노릇을 톡톡히 했다.
류원과 해원은 밤새 아기들에게 시달리다가 해가 뜨고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아빠! 아빠!”
류원의 품에서 눈을 뜬 해원이 팔을 뻗자, 하다가 류원의 배를 올라타고 몸을 굴렸다. 품으로 와락 쏟아지는 하다를 안은 해원이 하다의 얼굴이며 머리카락에 쪽쪽 입 맞췄다. 간지럽다고 깔깔대며 웃는 하다의 웃음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렸다.
해원이 아기 침대를 힐끗거렸다.
이미 아기 침대는 비어 있었다. 보모가 들어와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걸 잠결에 본 것 같기도 하다.
류원도 슬며시 눈꺼풀을 올리고 뽀뽀 세례에 동참했다. 하다는 아예 몸을 일으켜 문 쪽으로 도망쳤다. 류원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걷었다. 그러자 해원은 류원의 몸을 팔로 막고 엄한 표정을 지었다.
“형, 잠깐만요.”
“응?”
“강하다 숙제한 거 가지고 와 봐.”
해원의 말에 하다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터덜터덜 침실을 빠져나갔다. 하다는 일곱 살이지만 올해 초등학교에 조기 입학했다. 해원은 조기 입학 자체를 반대했지만, 아이가 고집을 부렸다.
조기 입학이라는 게 워낙 흔한 일이고 하다의 절친인 지운이 조기 입학을 결정했기 때문에 하다는 거의 막무가내였다. 며칠을 울며불며 학교에 가겠다고 떼를 쓰는 통에 해원은 몸 져눕기까지 했다. 하다는 지운이가 하는 건 다 따라 하고 싶어 했다.
결국 해원은 아이의 학습 능력을 테스트받고 조기 입학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소견서까지 받고 나서야 입학을 허락했다.
매일 아침 귀여운 교복을 입고 앙증맞은 가방을 넙죽 매달고 총총 달려 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심장이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예상한 대로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었다.
며칠 전에는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아 혼이 났다는 선생님의 메시지도 받았다. 그 메시지에는 가정에서 조금 더 아이에게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내포되어 있었다.
“아침부터 애한테 왜 그래.”
“훈육은 제가 할 테니까 형은 이따가 하다나 안아 주세요.”
팔까지 걷어붙인 해원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류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아 당겼다.
“숙제 좀 안 하면 어때, 넌 학교 다닐 때 꼬박꼬박 숙제해 갔어?”
“형은 아역배우로 일하느라 학교가 아닌 방송국을 다녀서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그냥 가만히 계세요. 하다 처음부터 저렇게 풀어놓으면 나중에 힘들어요.”
“공부도 자기가 느껴야지 하는 거야. 무턱대고 하라 마라 하는 건 애 교육에 안 좋아.”
“형! 하다 내 아들이에요.”
“내 아들이기도 해. 그리고 아무리 자식이라고 해도 부모 마음대로 애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리 없어.”
“어떻게 학교가 애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일이에요. 그건,”
해원이 막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문이 조금 열리고 노트를 손에 든 하다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류원은 인상을 구기며 방을 나가 버렸다. 해원은 하다를 가까이에 앉히고 노트를 받아 들었다.
휴대폰으로 알림장 내용을 확인하고 노트를 펼쳤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정성스럽게 써 내려간 노트를 바라보며 해원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다야, 고개 들고 아빠 봐봐.”
“…나 숙제 다 했어요.”
“응, 잘했어. 앞으로도 이렇게 숙제는 하고 노는 거야. 아무리 놀고 싶어도 숙제 먼저, 알겠어?”
“네에.”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하다가 노트를 가슴에 안고 몸을 일으켰다. 해원은 또 그게 못내 미안해서 하다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안아 들었다. 해원의 품에 얌전히 안긴 하다는 뺨을 가슴에 대고 팔 사이에 제 팔을 끼워 넣었다.
“아빠가 우리 하다 미워서 그러는 거 아니야. 아빠는 하다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 친구와도 잘 어울리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응, 알아요.”
“아빠가 하다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하는 것도 알지?”
“응!”
사랑한다는 말에 환하게 웃는 하다 때문에 해원도 피식하고 웃어 버렸다. 쌍둥이에게 신경 쓰느라 하다를 잘 챙기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다는 단 한 번도 떼를 쓰거나 어리광을 부리지 않았다. 늘 대견하고 기특한 내 아들, 해원은 하다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 주며 엉덩이를 토닥였다.
“해원아.”
류원은 입에 쪽쪽이를 문 봄이와 여름이를 양팔에 안아 들고 침실로 들어왔다. 아기들은 언제 깼는지 류원의 품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해원의 품에 안겨 있던 하다가 아기들을 발견하고 몸을 뒤척거렸다. 내려 달라는 표시였다.
하다를 바닥에 내려 주자, 하다는 류원의 발아래에서 깡충깡충 뛰며 아기들에게 장난을 걸었다. 봄이와 여름이도 그런 하다가 좋은지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해원은 침대에 걸터앉아 이 행복한 기분을 만끽했다. 이토록 완벽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게 늘 꿈만 같았다.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신께 감사했다. 분에 넘치는 행복을 선사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왜 또 그런 표정이야.”
류원이 해원의 청승맞은 표정을 읽어 내고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해원이 이 행복을 온전히 누리고 만끽 할 수 있을까. 해원의 표정이 일그러질 때마다 제 마음도 철렁 내려앉았다.
욕심 같아서는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보고, 듣고, 누리게 해 주고 싶은데 해원은 늘 거절만 했다. 됐다고, 지금도 충분하다고 여기서 더 욕심내면 이 행복마저 사라져 버릴 것 같다고…….
해원은 괜히 붉어진 눈가를 손으로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저 진짜 행복해서 그래요. 아이들과 형이 이렇게 있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라 꿈꾸는 거 같아요.”
류원은 아이들을 안은 채 몸을 기울여 제 이마에 짧게 입 맞췄다. 따뜻한 온기에 불안한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갑자기 하다가 침대를 뛰어 올라와 해원의 이마에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야무지게 뺨까지 비빈 하다가 류원을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어쭈, 강하다. 지금 아빠한테 결투를 신청하는 거지? 해원아, 봄이랑 여름이 좀 받아 봐.”
류원이 냉큼 아기들을 해원의 품에 안겨 주고 한쪽에 놓인 장난감 칼과 방패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하다도 삐용삐용 소리가 나는 장난감 총을 집어 들었다. 두 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오호, 강하다 좀 똑똑한데? 하지만 내 방패는 총알도 막을 수 있지!”
“내 총은 방패도 뚫을 수 있거든요!”
류원이 방패를 치켜들고 하다를 향해 달려들자 하다가 총을 요란하게 쏘아대며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요란한 효과음에 봄과 여름이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삐용삐용 울려 대는 총소리와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난장판이 되었다. 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품에 안긴 봄과 여름을 어르기 시작했다.
“형 그만해요.”
“안 돼. 오늘은 기필코 이 결투의 승부를 보고 말 테다.”
하다보다 더 신난 류원이 칼과 방패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하다를 낚아채 침대를 굴렀다. 하다는 마냥 이 상황이 재밌고 신나는지 숨이 넘어갈 듯 웃어 댔다.
결국 보다 못한 이모님이 봄과 여름을 서둘러 방 밖으로 대피시켰다. 해원은 뻐근한 어깨를 빙빙 돌리며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아직도 둘이서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며 장난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러다가 다치지…….’
해원이 막 고함을 치려는 순간, 류원이 하다를 안은 채 침대 아래로 쿵 떨어졌다.
“형! 하다야!”
사색이 된 해원이 달려가 상태를 살폈다. 류원이 먼저 떨어지는 바람에 하다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류원은 하다의 손톱에 뺨이 긁혀 피가 나고 있었다. 해원은 이마를 감싸 쥐고 치미는 화를 억지로 참았다. 그러고는 한껏 낮은 목소리로 일갈했다.
“둘 다 일어나.”
“…해원아. 나 여기 따끔거리는데.”
류원이 상황을 모면해 보려고 제 딴에는 열심히 불쌍한 척 연기를 해 보지만, 해원은 무시무시한 얼굴로 다시 한번 일갈했다.
“당장 일어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하다가 빠릿빠릿하게 몸을 일으키고 류원의 손을 붙잡아 당겼다. 류원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자, 장난치다가 그런 거잖아.”
“…해님, 잘못했어요.”
“형도 차라리 하다처럼 잘못했다고 해요. 뭘 잘했다고 변명이야.”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류원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하다가 류원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해원은 입술을 꾹 말아 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켰다. 진짜 귀여워 죽겠네.
“또 방 안에서 장난칠 거야?”
“아니요.”
“아니요.”
“한 번만 더 그래 봐. 다음엔 확 쫓아내 버릴 거야. 하다는 얼른 가서 세수하고 학교 갈 준비해.”
류원과 눈빛을 주고받은 하다가 얌전히 몸을 돌려 침실을 빠져나갔다. 류원은 뻘쭘하게 서 있다가 슬금슬금 해원의 옆으로 다가갔다.
“화났어?”
“…얼굴 좀 봐요. 배우 얼굴이 이게 뭐야. 진짜 내가 형 때문에 못 살겠어요. 애랑 노는 건 좋은데 적당히 해야지. 적당히! 왜 사람이 적당히라는 걸 몰라.”
와다다 잔소리를 쏟아 내며 해원은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흉지면 안 되는데…….’
류원의 턱을 손으로 쥐었다. 해원은 진중한 눈빛으로 이리저리 각도를 틀어가며 상처를 살피고 서랍에서 습윤밴드를 꺼내 뺨에 붙여 주었다. 상처가 깊진 않은데 그래도 속이 상했다.
“내가 애를 넷을 키워요.”
“그래도 하다 웃으니까 좋잖아. 요즘 쌍둥이들 돌보느라 하다한테 신경 못 써 준 게 미안해서 그랬어. 한 번만 봐줘.”
류원이 해원의 품으로 머리를 꾹꾹 들이밀며 장난을 걸었다. 해원은 그런 류원의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고 고마워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올려 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얼굴이 이게 뭐야. 속상하게.”
“앞으로는 조심할게. 응?”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한껏 애교를 부려대는 통에 이내 해원도 웃어 버렸다.
밖에서는 온 세상 근엄을 다 씹어 먹은 것처럼 점잔을 빼는 류원이지만 집에서는 장난기 많은 아빠로, 야릇하고 정력 넘치는 배우자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해원은 그 차이를 좋아했다. 배우 강류원의 소탈한 모습은 오직 저만이 누릴 수 있으니까.
해원은 습윤밴드를 붙여 놓은 자리를 조심조심 매만지다가 볼을 꾹 잡아 늘였다.
“한 번만 더 얼굴에 상처 나면 진짜 가만 안 둬!”
“아! 아파, 해원아! 아파!”
“대답해요. 얼른!”
“어! 알겠어, 아악, 아파, 알았다고!”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는 류원의 등짝을 세게 때리고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을 열기 무섭게 봄이와 여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환하게 웃던 해원의 얼굴이 점점 굳어지더니 발걸음이 빨라졌다. 보모의 품에서 와앙 울어 대던 봄이가 해원을 발견하고 짧은 팔을 쭉 뻗었다. 울먹거리느라 쪽쪽이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봄아, 왜 울어 응?”
해원이 봄을 품에 안았다. 하루도 쉴 새 없는 해원의 어깨와 손목이 오늘도 열일을 한다. 해원의 품에서 울음을 멈춘 봄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류원이 여름이를 안고 있었다.
“기저귀 갈아야 하나.”
“아까 갈았어요.”
해원이 손을 뻗어 여름의 이마를 슬쩍 문질러 주자, 언제 울었냐는 듯이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해원은 벽시계를 힐끗거리고 하다의 방 쪽으로 다가갔다.
“하다야, 이러다가 늦겠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다가 교복을 입고 방 밖으로 나왔다. 사립 초등학교답게 교복이 따로 있었다. 챙이 둥근 노란 모자까지 야무지게 쓴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우, 예뻐. 누구 새낀지 진짜 예쁘네.’
류원은 여름이를 보모 품에 안겨 주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현관 앞에 놓아둔 차 키를 한참 뒤적이던 류원이 하다와 은밀히 눈빛을 교환했다. 하다가 해원과 뽀뽀하기 위해 발꿈치를 들었다. 해원이 몸을 낮춰 주자, 하다가 뺨에 짧게 입 맞췄다.
“잘 다녀와.”
“가자, 아빠가 데려다줄게.”
류원이 자연스럽게 차 키를 주머니에 넣으며 하다를 번쩍 안았다. 하다가 류원의 품에서 손을 흔들었다.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류원을 해원이 붙들었다.
“강류원, 동작 그만.”
“왜.”
“차 키 내놔요.”
류원은 손가락을 세워 목을 살살 긁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차 키를 꺼냈다. 류원이 꺼내 놓은 건 수 억대의 슈퍼 카 열쇠였다. 문이 위로 열린다는……. 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직접 바구니에서 차 키를 골라 내밀었다.
“제발 애 학교 데려다줄 때는 정상적인 거 타고 가요.”
“하다도 슈퍼 카 좋아해.”
“맞아! 나도 슈퍼 카 좋아. 부아아아앙!”
해원이 입술을 말아 물고 인상을 쓰자, 류원은 하다의 뒤통수를 꾹 눌렀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다가 우렁차게 인사하고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집안으로 따스한 햇볕이 스며들었다.
가슴 속 깊이 아로새겨질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독초: 아로새기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