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3/12)

1장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조지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쓰레기통은 왜?”

“아니. ……그냥.”

예상대로 쓰레기통은 깨끗이 비워진 채다. 

“뭐 중요한 거라도 잃어버렸어?”

뒤에 선 녀석이 기웃거리며 쓰레기통을 들여다봤다. 조지현이 아니야, 하고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중요하지 않다. 그저 궁금할 뿐이다. 그 강석원이 쓴 편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조지!”

장난기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조지현이 입매를 설핏 굳혔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별명이다. 어느 놈이 시작한 것인지, 할 일도 없는 놈일 게 분명하다. 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지현을 부른 녀석이 조금 겁먹은 듯한 얼굴로 교실 뒷문을 가리켰다. 조지현의 눈에 당혹이 스쳤다. 강석원이다. 이내 조지현은 무표정을 되찾았다.

“부르셨어요?”

겁먹은 티를 최대한 감추었다. 강석원 같은 인간은 상대의 나약함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물어 뜯긴다. 그날 복도에서 눈을 마주친 순간, 깨달았다.

“오늘 몇 시에 끝나?”

잠시 고민하다가 조지현은 한 시요, 하고 대답했다.

“알겠어.”

그뿐이었다. 강석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 조지현은 멍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헉. 너 저 형 알아?”

강석원을 알아본 반 녀석 중 하나가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아니. 몰라.”

“그런데 왜 찾아온 거야? 찍혔냐?”

“모르겠어.”

조지현이 짧게 대꾸했다. 

사실이다. 강석원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어째서 수업이 끝나는 시간을 물었는지. 전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저 형 엄청 무섭다고 소문났던데. 장난 아니래.”

여기저기에서 그 장난 아니라는 소문에 대한 말들이 이어졌다. 듣고만 있어도 피곤해지는 이야기였다. 조지현은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책을 폈다. 글자를 읽고 있어도 내용이 머리로 들어오지 않았다.

“야, 조오지.”

어느새 교실로 들어온 최기열이 알은체하며 앞에 앉았다. 조지현이 설핏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이놈이지 싶다. 자신을 조지라고 부르기 시작한 할 일 없는 인간이.

“진짜냐?”

“뭐가?”

“강석원이 너 찍었다는 거.”

“무슨 소리야.”

“야. 조지. 똑바로 대답해.”

최기열이 주먹으로 책상을 탕, 두드린다. 

“강석원이랑 어제 학교 같이 나갔다며.”

“그래.”

“뭐 했는데?”

“밥 먹었어.”

조지현은 최기열이 싫었다.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집도 잘살고, 자신의 남성성을 폭력적인 성향으로 드러내길 거리끼지 않는, 타입.

“밥만 먹었다고? 그게 말이 되냐? 오늘은 왜 또 찾아온 건데.”

“나도 몰라.”

“그런 게 어디 있어. 이유도 모르고 같이 밥을 먹냐?”

최기열이 시비를 거는 투로 물었다.

“무슨 상관이야.”

조지현이 차갑게 대꾸했다. 최기열이 얼굴을 구겼다.

“이 씨발…….”

막 주먹을 치켜들려는 최기열과 눈이 마주쳤다. 최기열이 다급히 눈길을 피하는 것을, 조지현은 단박에 알아챘다.

“하여튼 싸가지 없는 새끼.”

최기열이 애꿎은 책상에 화풀이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지현은 그가 자신을 때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최기열 같은 녀석들이 전에도 몇 명 있었다. 상대에 대한 호감을 알아채지 못하고 비뚤어진 표현을 일삼는 인간들.

아마 대체로는 그 감정을 깨닫지 못한 채, 학교를 졸업할 것이다.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정제되지 않은 날것의, 보잘것없는 감정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 

조지현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지현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강석원이 옆으로 다가왔다.

“가자.”

“…….”

뭐라고 대답할 틈도 없었다. 강석원이 성큼성큼 앞장서 걸었다. 조지현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라면은?”

“네?”

“라면은 좋아해?”

“……네.”

강석원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조지현은 그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어째서 같이 식사를 했냐는 최기열의 질문에 모르겠다고 말한 것은, 정말 그 답을 알지 못해서였다.

어제는 같이 분식집에서 돈까스를 먹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조지현은 강석원이 무슨 말이든 해주길 기다렸다. 깔끔하게 거절할 수 있도록.

그러나 강석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밥을 먹고 난 뒤에도, 이렇다 할 말도 없이 헤어졌다.

오늘도 결국 허름한 일본 라면집에 마주 앉게 되었다.

“뭐로 할래?”

강석원이 물었다. 조지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메뉴 옆에 베스트가 붙은 그림을 가리켰다. 강석원이 점원에게 주문을 마치고 나자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조지현은 물끄러미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아래에 있는 강석원의 손가락이 불규칙하게 제 다리를 두드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긴장하고 있는 건가.

조지현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강석원이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렸다. 왜 쳐다보느냐는 뜻이다.

“왜 저랑 같이 밥을 먹자고 하신 건가, 해서요.”

머뭇거리던 조지현이 입을 열었다.

“너는 왜 먹는데.”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돌아왔다. 

“글쎄요.”

조지현은 물 잔을 집어 들었다. 미지근한 물이 목구멍으로 들어왔다. 목이 탔다. 절대로 거스르지 말아야 하는 인물로 소문난 상대가 밥을 먹자고 하는데 단칼에 거절할 만큼 겁을 상실하지 않아서요, 라는 말을 머릿속으로 그럴듯하게 각색하는 중이었다.

“누구든 밥 먹자고 하면 같이 가는 건가?”

일순, 상대의 음성에 실린 비난을 읽었다. 조지현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챘다. 그의 원래 별명은 수녀님이었다. 차갑고 금욕적인 외모와 태도 때문이었다. 조지현은 수녀라는 별명을 몹시 싫어했다. 그렇다고 새로 생긴 조지라는 별명이 달갑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쪽이 더 싫었다. George는 카지노에서 종업원에게 아낌없이 관대하게 팁을 주는 손님을 가리키는 통용어였다. 조지 수녀님은 뭐든 다 준다. 성적인 뉘앙스를 담아, 녀석들은 조지현을 놀렸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건 아닙니다. 혹시 그렇게 오해하셨으면 죄송합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앉아.”

“…….”

잡힌 손목이 아팠다. 조지현은 하는 수 없이 도로 자리에 앉았다. 강석원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농담이었어.”

어느 부분이 농담이었는지, 우리가 농담을 나눌 만한 사이인지, 묻고 싶었지만 조지현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점원이 라면을 가져왔다. 

“먹자.”

강석원이 젓가락을 건넸다. 조지현은 엉겁결에 젓가락을 받아들었다.

그날도 별다른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그렇게 식사는 끝이 났다.

“배달 왔습니다.”

“네. 올려 보내세요.”

인터폰에 대답을 한 후, 조지현은 입술을 물었다.

대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배달원이 그 사람인 것을 확인한다면 그 다음에는? 인사라도 건네려는 건가? 반갑다는 말이라도 하려고?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조지현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곧, 벨소리가 울렸다. 문을 여는 손끝이 조금 떨렸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피자 박스를 내려놓았다.

“카드인데…….”

이번에도 배달원은 대답하지 않고 카드 리더기를 꺼냈다. 남자의 손을 바라보던 조지현은 문득 시선을 느꼈다. 

“아,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주머니에서 황급히 지갑을 꺼내 카드를 내밀었다. 리더기에서 기계음이 이어지는 사이, 조지현은 다시 한 번 배달원의 얼굴을 확인 했다.

강석원.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가 맞다.

눈이 마주쳤다.

머릿속의 피가 가시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에 붙들린다. 그날로부터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속절없이 과거의 기억으로 끌려들어가고 만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든가,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는지, 혹은 미안하다는 그런 말을.

조지현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조지현은 본능적으로 움칫 어깨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남자의 손에 들린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카드를 건네준 후, 남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잊은 것인지, 혹은 잊고 싶은 것인지, 강석원의 현재에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동은?”

“괜찮아요.”

“가자.”

강석원이 앞장서 성큼성큼 걸었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일까. 하는 고민은 같이 밥을 먹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 그만두었다.

메뉴를 묻고 같이 식사를 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딱히 이렇다 할 대화도 없었다. 처음에는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만큼 어색했는데, 지금은 그럭저럭 적응했다. 아니, 오히려 말이 없는 편인 조지현에게 강석원은 최적의 식사 상대였다.

“맛은 어때?”

식사를 하는 도중, 강석원이 물었다. 그나마 요즘 말이 늘어 이렇게 꼭 묻곤 했다.

“괜찮아요. 깔끔하고.”

“다행이네.”

젓가락질을 하던 조지현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수업은 어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놀라서 사레들리고 말았다. 조지현은 작게 기침을 하며 네? 하고 되물었다.

“수업은 어떠냐고.”

“…….”

무슨 의도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조지현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꾸했다.

“그저 그렇죠.”

“공부 잘한다고 들었는데?”

“잘은 하는데, ……수업이 좋은 건 아니니까요.”

성공하려면 공부를 잘해야만 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얘기였다.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기에 조지현은 순순히 부모님의 뜻대로 공부에 열중했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누구한테 들으신 거예요?”

“뭘.”

“제가 공부 잘한다는 얘기요.”

강석원의 표정이 일순 멈추었다. 표정이 멈춘다는 말이 맞는지 몰라도, 지금으로서는 딱 그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당황했구나.

무표정에 잠시 어린 감정을, 조지현은 본능적으로 읽었다. 눈치가 빠른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상대의 감정을 모른 척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으니까.

조지현은 말없이 젓가락을 도로 쥐었다. 강석원도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우동 가락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을 때, 강석원이 입을 열었다.

“애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어. 조지가 이번에도 전교 일등이라고.”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 모의고사는 2등이었으니 저번 달에 들은 이야기는 아닌가 보다.

“외국인인 줄 알았는데.”

“……네.”

조지현은 쓰게 웃었다. 별명 때문에 가끔 그런 말을 들었던 터다. 

“아니더라고.”

강석원이 혼잣말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조지현은 눈을 슬쩍 치떴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별명을 제외한다면 자신에게서 외국인다운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새카만 머리색과 눈동자, 옆으로 긴 서늘한 눈매까지 전형적인 동양인의 얼굴이다. 그런데 방금 강석원은 조지현이 외국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말투였다.

눈이 마주쳤다. 깊은 눈매다. 감정이 깃든다면, 몹시도 깊을 것이다. 영원히 침잠할 만큼. 감정의 상대도 장본인도 버거울 게 분명하다.

숨이 막혔다. 조지현은 물 컵을 비웠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이, 조지.”

최기열의 팔이 조지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힘 조절을 하지 않은 우악스러운 장난에 조지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최기열을 밀어냈다.

“어디 가냐.”

“교실.”

“어디 갔다가?”

“교무실.”

“왜?”

“선생님이 부르셔서. 논술 대회 참가 때문에.”

거기까지 대답하고 조지현은 됐지? 하는 표정으로 최기열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역시 전교 일등은 클라스가 다르네. 조지 주제에 말이야.”

조지현은 최기열이 자신을 조지라고 부르는 게 싫었다. ‘조’에 힘을 주어 일부러 발음을 모호하게 흐리는 것이다. 최기열이 자신을 그렇게 부를 때마다 주변 애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조지현.”

“뭐?”

“내 이름은 조지가 아니라 조지현이라고.”

“조지나 조지현이나.”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조지현은 입을 다물고 걸음을 옮겼다. 

“조지. 삐졌냐?”

“아니.”

“오늘 수업 끝나고 뭐하냐.”

“학원.”

“누가 몰라? 학원 수업 끝나고 뭐하냐고.”

불행히도 최기열과 얼마 전 학원 로비에서 마주쳤다. 강남에서 유명한 강사가 초빙된 이후, 원생수가 늘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집에 가야지.”

“넌 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 집, 학원, 학교. 지겹지도 않아?”

누군가 뒤에서 조지현, 이라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언제까지 이 소모적인 대화를 계속 해야 하는지, 지겨워지던 차였다.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은 더 반가운 표정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눈이 마주치자 본인이 불러놓고도 의외라는 눈이었다. 그러나 이내 곧, 강석원은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갔다.

강석원이 다가오자 최기열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최기열도 키가 큰 편에 속했지만 강석원은 그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다른 사람에게 딱히 관심이 없는 조지현도 강석원이란 이름을 알게 된 데에는 저 커다란 체격이 한몫했다.

강석원이 지나는 곳마다 저절로 길이 생겼다. 구멍을 찾아 들어가는 게처럼, 학생들이 흩어졌다.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할 때를 제외하고 강석원이 학교에서 알은체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손끝으로 서늘한 피가 흐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조지현은 자신이 생각보다 강석원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강석원이 조지현 앞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조지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이스크림.”

“……,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그대로 가버릴 줄 알았는데 강석원은 그 자리에 서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지현은 그의 시선이 제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에 머물러있음을 알아챘다. 잠시 생각하다 포장지를 벗겨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그걸 보고 나서야 강석원은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이 자리를 떠났다. 강석원이 건물 안쪽으로 사라지고 나자, 조지현의 옆으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조지, 저 형이랑 친하냐?”

“어떻게 아는 사이야? 대박.”

아는 사이라고 하기에도 모르는 사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조지현은 말없이 아이스크림을 물었다. 

“너 진짜 강석원이랑 친해?”

최기열이 흰 눈을 뜨고 물었다. 차갑고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혀 위에 맴돌았다. 조지현은 글쎄, 하고 대꾸하고 걸음을 옮겼다.

“너 미쳤냐? 저 사람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어울려.”

최기열이 어울리지 않게 정색하며 말했다. 조지현은 잘 몰라, 하고 무심하게 대꾸했다. 

“저 형 입학하자마자 근처 성산공고 애들이랑 싸움 붙었을 때, 장난 아니었다고 하던데. 경찰들 열 명이 달려들어도 못 말렸대.”

“그중 한 명은 아직도 식물인간이라며.”

“소년원도 여러 번 드나들었다던데.”

“시발, 저 덩치에 소년원이 웬 말이냐. 주먹 봤어? 저걸로 맞으면 그날로 세상 하직할걸.”

“학교 졸업하면 들어오라는 조직이 줄을 섰다더라. 시발, 나는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린다.”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이 들은 강석원에 관한 도시괴담 같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진지하게 말하는데 저런 사람하고는 어울리지 마. 알았냐?”

한입 베어 문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다 삼키고, 조지현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뭐?”

“맛있네.”

조지현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베어 먹고는 앙상한 나무막대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왜?”

포크를 내려놓고 강석원이 물었다. 

기름진 음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달고, 짠 음식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담백한 음식을 즐겨 먹는다. 그동안 강석원에 대해 알아낸 사실의 전부였다.

“아니요. 오늘따라 별로 안 드시는 것 같아서요.”

“…….”

강석원의 표정이 또 멈추었다. 미묘하게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강석원이 얼음물을 마셨다. 얼음을 아작아작 씹던 그는, 점원을 불러 얼음물을 한잔 더 갖다 줄 것을 요구했다.

“체중 조절 중이라.”

“네?”

조지현은 제 귀를 의심했다. 강석원 같은 인간이 몸무게에 연연해서 식사량을 조절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조지현의 고개가 슬쩍 옆으로 기울었다. 그 미묘한 몸짓을 강석원은 정확히 읽어냈다.

“운동해.”

어떤 운동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상대가 불쌍하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한 체급 줄여서 출전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셔서. 시합이 며칠 안 남았거든.”

“그렇군요. ……, 지금 식사하셔도 되는 건가요?”

조지현의 질문에 강석원이 애매한 침묵을 흘린다. 조지현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괜찮아.”

“아니요. 배불러요.”

조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석원도 따라 일어섰다.

“제가 계산할게요.”

조지현이 돈을 꺼내려했지만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계산대 앞으로 가서 그는 계산을 마쳤다.

“잘 먹었습니다.”

가게를 나오며 조지현이 인사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했잖아.”

“괜찮아요.”

식사의 반 이상을 남기고 나왔지만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 먹은 음식을 벌충하기 위해 강석원이 얼마나 달려야 할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지현은 시계를 확인했다. 학원으로 가기도 집으로 가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근처 아무 데나 들어가서 책이나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강석원이 입을 뗐다.

“학원 수업 8시지?”

“네.”

기억력이 좋은 편이구나.

강석원에 관한 정보가 하나 더 늘었다.

“그럼 잠깐 들렀다 갈래?”

체육관에 들어서자마자 관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강석원 이 새끼. 너 저녁 먹고 왔냐? 미쳤어? 시합이 내일모레인데, 제정신이야?”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강석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지자 관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괜히 따라왔나.

조지현은 시계를 확인했다. 최소한 30분은 있어야 학원핑계를 대고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넌 누구냐.”

관장이 조지현을 발견하고 위아래로 훑었다.

“안녕하세요. 강석원 선배님 후배입니다.”

“너도 운동하려고?”

조지현은 그 말 앞에 설마, 라는 단어가 생략되었음을 쉽게 짐작했다.

“그냥 구경 온 겁니다.”

대답은 강석원이 대신 해주었다. 어느새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그의 모습에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교복 속에 감추어져 있던 단단한 몸이 얇은 운동복 위로 여실히 드러났다. 평소보다 위압감이 배가 되었다.

“뭐하고 있어. 가서 몸이나 풀어. 오늘 목표 체중 못 채우면 집에 못 갈 줄 알아.”

강석원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앉아 있으면 돼.”

강석원이 구석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조지현은 가방을 무릎에 올려놓고 앉았다. 곧이어 엄청난 타격음이 체육관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고 모두 돌아볼 정도였다. 화를 내던 관장의 얼굴에 어느새 흐뭇한 기운이 흘렀다.

역시 상대가 불쌍하다.

조지현은 공중에서 속절없이 흔들리는 샌드백을 보며 생각했다. 저러다 터지지는 않을까, 할 때 마침 샌드백이 퍽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적당히 좀 하라고 안 했냐.”

관장이 혀를 찼다. 한두 번 있었던 일도 아닌 듯 강석원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주저앉은 샌드백을 치웠다. 그가 샌드백을 가지러 간 사이, 다른 선수 하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괴물이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강석원이 새 샌드백을 걸고 나자 다시 무자비한 타격이 이어졌다. 조지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모두 넋이 나간 얼굴로 강석원을 쳐다보았다.

“뭣들 하냐. 구경났어? 다들 움직여.”

관장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관장 역시 강석원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아는 후배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관장이 툭 던진 물음에 조지현이 잠시 고민하다가 학교 후배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친하냐?”

조지현은 애매하게 웃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저놈이 너 같은 후배를 다 데리고 오고.”

너 같은 후배라는 말 저변에 깔린 의미를 조지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누가 본다 해도 자신은 운동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었다. 굳이 그런 후배를 체육관에 데려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 너도 저런 선배 알아두면 나쁘지는 않겠지. 두고 봐라. 저놈은 세계적인 수준으로 클 거니까.”

강석원을 바라보는 관장의 눈에 욕심어린 투지가 어린다. 반드시 자신이 그렇게 키울 거라는 의욕이 느껴졌다.

“야! 인마 살살해! 샌드백 터진다!”

관장이 소리쳤지만 강석원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주먹을 휘둘렀다.

“짜식, 후배 앞이라고 기합이 잔뜩 들어갔네.”

“그런가요.”

조지현은 샌드백을 두드리는 강석원을 보며 대답했다. 곧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샌드백이 터져 주저앉았다.

“미친 새끼.”

그렇게 중얼거리는 관장의 목소리에 희열과 함께 두려움이 묻어났다.

“저 먼저 가볼게요.”

조지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석원은 손을 올렸다. 스파링 상대의 얼굴에서 이제야 살았다는 안도가 떠올랐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을 던져주었다. 강석원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줄게.”

조지현은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는 링 위를 내려온 후였다.

“가자.”

하는 수 없이 강석원의 뒤를 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조지현은 강석원을 흘끔 쳐다보았다. 옷이 흠뻑 젖을 만큼 땀투성이다.

띵, 하는 알림 음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강석원이 먼저 들어가 버튼을 눌렀다. 조지현은 그의 옆에 섰다. 문이 닫혔다. 비좁은 엘리베이터 안에 남자의 땀 냄새가 물씬 났다.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조지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시선을 느꼈다.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쳤다. 머리카락이 쭈뼛 솟았다. 언제부터 쳐다보고 있었던 걸까. 남자는 잡아먹을 듯한 기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지현의 손끝이 움칫 떨렸다. 입속이 바싹 말랐다. 아래층까지 내려가는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숨소리, 땀 냄새, 시선이 전신을 지배하는 것 같았다. 머릿속이 빙글거리고 속이 울렁였다. 땡, 소리가 울렸다. 라운드의 종료를 알리는 벨소리처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조지현은 뛰어나가듯 발을 뻗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대답은 듣지 않았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거울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가 떠올랐다. 수컷의 눈이었다. 무엇을 바라는지, 명확한 욕망을 담은.

묻지 않은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학원 보강이 있어서요.”

대답을 해놓고도 조지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강석원이 모를 리 없다.

“그래. 알겠어.”

오늘로 연달아 사흘째 거절이다. 화를 내거나 다른 반응을 보일 법도 한데 강석원은 순순히 물러선다. 

조지현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강석원은 이미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조지. 잘 생각했어.”

어느새 다가온 최기열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저런 인간하고 넌 안 어울려. 괜히 엮이지 마.”

조지현은 자신의 어깨에 놓인 최기열의 팔을 떨궈냈다.

“오늘 학원 끝나면 뭐 하냐.”

“독서실.”

“와, 넌 진짜 무슨 재미로 사냐? 음악을 듣는 것도 아니고, 운동도 안 좋아하고, 연애도 안 하고. 시발, 너 진짜 고자 아니야?”

최기열이 낄낄거리며 조지현의 다리 사이를 눈으로 훑는다.

“그러는 너는?”

“뭐?”

“넌 무슨 재미로 사는데.”

조지현이 서늘한 눈으로 최기열을 응시했다. 최기열의 얼굴이 삽시에 달아올랐다. 최기열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걸 일일이 언제 다 말하고 앉아 있어.”

화가 난 사람처럼 최기열이 빽 소리 질렀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초조해 하는 것이다. 제 감정을 들킬까 봐. 

조지현은 나도 그래, 하고 덤덤하게 대꾸했다.

“뭐?”

“나도 일일이 그런 거 너한테 말해 줄 시간 없어. 먼저 간다.”

최기열의 얼굴이 금세 제 색을 찾았다. 조지현은 가방을 메고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씨팔, 싸가지 없는 새끼, 하는 욕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한참을 걷던 조지현은 우뚝 멈추어 섰다. 교문을 나서는 학생들의 얼굴에서 어렵지 않게 행복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뭔가를 좋아할 수 있는 걸까.

며칠 전에 본 남자의 눈이 떠올랐다.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그의 모습에서 조지현은 열등감을 느꼈다.

링 위에 서기도 전에 상대에게 져버린 기분이었다.

딱히 즐거운 기억도 좋아하는 상대도 없었다. 잘하는 것은 성적을 내는 정도다. 특별한 천재도 아니다. 그나마 있는 재주일 뿐이다. 학생의 신분이 끝나고 난 뒤에는 무엇을 해야 좋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끝나버린 길이 보였다. 

순간, 발아래가 아득해졌다. 

속이 좋지 않아.

조지현은 골목 안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자신에게 공황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년 전이었다. 준비하고 있던 외국어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면서였다. 처음에는 가벼운 이명 정도였다. 그러다 점점 증상이 심해졌다. 숨이 가빠오고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구토를 하기까지 했다. 긴장이 심해서 그런 거라 여겼다. 아니,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지하철 안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이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자신의 증상이 정확히 어떤 병명인지, 도서관에서 빌린 심리학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두려웠다. 공황발작은 결국에 도화선이 될 것이다. 정신의 불균형이 끝내 닿고 마는 결말을 이미 알고 있다. 

조지현은 골목에 서서 숨을 골랐다.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사소한 이유로도 스위치는 켜진다. 문제는 본인도 그게 언제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손끝에서부터 차가운 피가 올라온다.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머릿속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그때 뒤에서 사나운 음성이 들려왔다.

“고딩 존마니 새끼가 감히 형님들 구역에서 얼쩡거려.”

역한 담배 연기가 확 다가왔다. 평소였으면 고개를 돌렸겠지만 정신이 없었기에 조지현은 고스란히 연기를 들이마셨다. 속이 뒤틀렸다. 조지현이 벽을 붙들고 우엑, 하고 헛구역질을 했다. 담배를 피우던 양아치들의 표정이 일제히 구겨졌다.

“이 새끼가 지금 우리 보고 역겹다고 토하는 시늉한 거야?”

“하, 진짜 어이없네.”

조지현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만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을 열면 그대로 토할 것만 같았다.

“이 씨발 새끼가, 끝까지!”

커다란 손바닥이 머리를 후려갈겼다. 조지현의 몸이 날아가듯 벽에 처박혔다. 우악스러운 힘이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 

“심심하던 차에 잘 걸렸다.”

억지로 고개가 들렸다. 담배를 입에 문 양아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 새끼. 사내새끼 맞아?”

“제일고 교복 아니야? 거기 남고 맞는데.”

“확인해 봐라.”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졌다. 교복 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왔다. 미적지근한 타인의 온기에 간신히 억누른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조지현이 상대의 손을 뿌리치려고 손에 힘을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가만히 있어!”

아까보다 더 세게 뺨을 얻어맞았다. 머리가 울리며 시야가 일렁였다. 조지현의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 그의 낯을 내려다보던 양아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너 사카시 해본 적 있냐?”

조지현은 입술을 깨문 채, 눈썹을 찌푸렸다.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가 입술을 핥으며 지퍼를 내렸다. 조지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머저리가 아닌 이상 방금 전의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허튼짓 하면 턱을 빼버릴 거야.”

그가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윽박질렀다. 조지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뇌에서 피가 모두 빠져나가버린 듯, 모든 사고가 일시에 정지했다. 

“시발, 추잡한 새끼. 하여간.”

“야, 잘 빨면 내가 그 다음이다.”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저열한 웃음이 퍼져나갔다. 조지현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죽을 듯한 공포.

혹자는 그렇게 말했다.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끔찍한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까마득한 절벽이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주 조금만 휘청거려도 끈 없는 연처럼 추락해버릴 것만 같았다.

“왜 그래. 좆 많이 빨아봤을 것 같이 생겨서. 아가리 벌리고…….”

상스러운 말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양아치의 머리가 벽에 처박혔다.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시발. 뭐야!”

“뭐하는 새끼야!”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처음에 분노로 대응하려던 사내들의 낯빛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거구의 남자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압도적인 위압감에 그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양아치 일당이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상대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한갓 고등학생을 상대로 이렇게까지 겁을 먹는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뇌를 지배한 공포는 좀처럼 떨쳐낼 수 없었다.

남자의 무심한 눈이 스윽 주변을 훑었다. 그 의미를 그들은 바로 알아챘다. 남자에게 그들은 한갓 벌레였다. 굳이 마음먹지 않아도 손짓 하나에 존재를 으스러트릴 수 있는.

“넌 뭔…….”

금발에 피어싱을 한 남자가 주먹을 움켜쥐고 앞으로 나섰다. 자신이 겁에 질렸음을 들키지 않으려던 허세는 갈대처럼 쉽게 꺾였다. 남자의 손바닥이 녀석의 얼굴을 움켜쥐고 그대로 제 무릎에 내리찍었다. 

“으아아아악!”

비명과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남아있던 두 녀석이 주춤하며 뒤를 확인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두 사람의 몸은 공중으로 솟구쳤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깨닫지도 못했다. 차로 받히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배를 갈랐을 뿐이다.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순식간에 양아치 패거리를 제압한 남자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엎드린 조지현을 부축했다.

“괜찮아?”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병원으로…….”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조지현의 몸이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

조지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칠게 숨을 내쉬던 그는 간신히 손으로 이마를 더듬었다. 꿈이다.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아니, 눈을 감으려 했다.

“…….”

자신이 낯선 곳에 있음을 깨닫고 그는 휘둥그레 눈을 치떴다. 설마, 아직도 꿈인 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방문이 열렸다. 커다란 남자가 들어왔다.

“깼어?”

강석원이었다.

조지현은 아직도 지금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표정에 어린 당혹감을 읽었는지 강석원이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

“…….”

천천히 머리에 피가 돌았다. 기억이 이어졌다. 어째서 자신이 강석원과 좁은 방에 단 둘이 있게 되었는지 깨달았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였다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조지현은 몸을 덮고 있던 시트를 치우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시트 아래가 맨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바지는 사라진 채고 입고 있는 속옷은 자신의 것도 아니었다.

조지현의 얇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토사물이 묻어서 드라이클리닝 보냈어. 속옷까지 모두 버려서.”

조지현의 얼굴이 한층 더 붉어졌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 변화를, 강석원은 찬찬히 하나하나 살피듯 느릿하게 시선을 움직였다.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사과했다. 엉뚱한 오해를 한 것이다.

“상관없어.”

강석원이 대꾸했다. 정말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투였다.

“그래도 옷, 버리셨을 텐데…….”

“내 것도 같이 맡겼어. 저녁쯤에 찾으러 가면 돼.”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원래도 말이 없는 성격이었지만, 한마디도 내뱉기 힘들었다. 뇌에서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이 마비된 것 같았다.

“어차피 맡기려고 했어. 신경 쓰지 말고 한숨 더 자.”

“학원가야 하는데, …….”

시계를 흘깃 쳐다보았다. 이미 수업 시간에서는 한참 지나 있었다. 여러모로 일진이 좋지 않은 날이었다. 조지현은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뭐라도 먹을래?”

강석원의 물음에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속이 좋지 않았다. 

“물은?”

“……감사합니다.”

방을 나섰던 강석원이 컵에 물을 담아 가져왔다. 손을 뻗으려던 조지현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강석원의 팔이 조지현의 등을 받쳤다. 조지현이 몸을 움츠렸다. 강석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컵을 조지현의 입가에 대었다.

“제가…….”

컵이 입술에 닿았다. 차가운 물이 왈칵 입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저도 모르게 조지현은 입을 벌리고 물을 받아 마셨다. 조지현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습을 강석원이 지켜보았다. 

물을 반쯤 마시고 나자 강석원은 컵을 치웠다. 조지현은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누워있어.”

강석원이 조지현을 눕혔다. 어린아이를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 조지현은 강석원과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 누군가가 강석원이라는 사실이 더욱 거북했다.

불편해.

“속 편해지면 죽이라도 먹을래?”

“괜찮습니다. 선배님이 먼저 식사하세요.”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어차피 난 못 먹어.”

강석원의 대답에 조지현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시합 얼마 안 남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일.”

남 일처럼 여상한 어투였다. 오히려 물어본 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러고 계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안 되지.”

“…….”

“농담.”

강석원이 가볍게 덧붙였다.

“말씀드려놨어. 오늘은 어차피 가볍게 몸만 풀려던 차였고.”

강석원의 말을 듣고도 조지현은 좀처럼 표정을 풀지 못했다. 운동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어도 시합 전날이 몹시 중요하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정말 괜찮으니까 가셔도 돼요.”

강석원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그가 말했다.

“정말 괜찮으니까, 신경 쓸 거 없어.”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인다. 내가 원해서 있는 거야, 하고.

원한다는 단어가 조지현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혼자 자취하시는 건가요?”

간신히 떠올려낸 질문이었다. 

“응.”

“밥도 해 드세요?”

“가끔.”

세 번째 질문까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너는?”

머리 위로 질문이 툭, 던져졌다. 조지현이 눈을 위로 치떴다.

“가족이랑 같이 살아?”

“네.”

강석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질긴 음식을 씹어 삼키듯, 천천히.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턱선을 타고 움직였다. 그의 시선이 덧그린 곳마다 열기가 퍼졌다. 피부 위가 따끔했다. 아슬아슬한 긴장이 조지현의 장기를 팽팽하게 부풀렸다. 

강석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 시합을 하루 앞두고 싸움에 뛰어들었을 만큼, 며칠 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거절을 당해도 다음날 찾아올 만큼, 구토를 하고 쓰러진 상대를 집으로 데려와 씻기고 눕혀놓을 만큼,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알겠다. 

탐욕스럽고 집요하게 살갗을 훑는 시선이 그 욕심을 말해준다.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남자의 질척한 욕망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아랫배가 당겼다. 두렵다. 도망갈 곳 따윈 없다. 그의 요구에, 고백에, 혹은 강요에 무엇이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머릿속에 강석원이 골목에 서 있던 사내들의 머리통을 계란처럼 박살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강석원의 숨소리가 오르내렸다.

“조지현.”

나직한 음성이 울렸다. 조지현은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검은 눈동자에 짓눌렸다. 무력하게 그의 눈빛에 깔려, 다음 말을 기다렸다. 

“취미는?”

“야, 몇 년 만이야. 신수가 훤하다. 우리 허니.”

“그렇게 부르지 마.”

조지현이 질색했지만 김선우는 조금도 괘념치 않는 듯한 얼굴로 웃어 넘겼다.

“여전히 냉기가 뚝뚝 떨어지네. 한국 언제 들어온 거냐?”

김선우가 자리에 앉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조지현은 몇 주 됐어, 하고 대꾸하며 커피를 마셨다.

“몇 주나 지났는데 이제야 연락 하냐?”

“바빴어.”

“여러 의미로 넌 참 한결같구나.”

“이제 알았다는 듯이 말하네.”

“아니, 그래서 기분 좋다고.”

김선우는 유학 시절 조지현의 대학교 룸메이트였다. 물과 기름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두 사람의 성격은 대조적이었다. 주변 사람의 예상을 깨고 둘은 꽤나 오래 어울려 다녔다. 김선우가 조지현의 성격을 제법 좋아했던 터다.

“일하면서 겉 다르고 속 다른 놈만 상대하다 보니, 너 같은 놈 만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조지현이 입에 머금었던 커피를 삼켰다.

“나도 겉 다르고 속 달라.”

“그렇게 대놓고 말하는 점이, 훌륭한 부분이지.”

조지현은 여전히 소년처럼 웃고 있는 김선우를 바라보았다. 솔직하고, 용감할 만큼 자신만만하다.

“야 왜 그렇게 쳐다보냐. 사람 설레게.”

조지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대학 시절 김선우가 조지현에게 고백했던 적이 있다. 조지현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늘 이 일이 앞으로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거 같으니 집에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김선우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했다. 약속한 대로 그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과 변함없이 흘렀다. 가끔 이런 식으로 김선우가 장난을 치는 정도였다.

“유경 씨한테 전화한다.”

결혼을 이 주 앞둔 김선우가 정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서라. 유경이 뒤로 넘어간다.”

“그러니까 헛소리 마.”

“하여간. 농담도 안 통해요. 그나저나 웬일이야. 몇 주 전에 오셨는데 이제야 연락하신 친구님.”

조지현이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눈을 슬쩍 아래로 내리감았다가 치뜨며 그가 입을 열었다.

“나 선 봤어.”

“뭐?”

김선우는 갑작스런 친구의 말에 사레들리고 말았다. 작게 기침을 몇 번이고 하고 나서야 그가 무슨 소리야, 하고 고개를 들었다.

“말 그대로야. 선 봤다고.”

“언제? 이번에 들어와서 본 거야?”

“아니. 저번에.”

“저번은 또 언제인데. 너 설마 한국 들어와서 선만 보고 그냥 들어갔냐?”

“응.”

담담한 대답에 김선우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넌 그런 일이 있는데 연락도 안 하고, 아니, 한국에 왔는데 말도 안 하고 그냥 나가?”

“그렇게 됐어.”

조지현이 커피를 마시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요란한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 붉은색 배달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뭘 그렇게 쳐다 봐.”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서, 이번에도 또 선보러 들어온 거야? 언제 보는데? 어떤 여자야?”

“아니, 저번에 만난 사람 때문에. 네 결혼식도 있고, 겸사겸사 들어왔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난다.”

가게 앞에 서 있던 오토바이가 요란한 엔진소리를 내며 떠났다. 조지현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움직였다.

“너 아까부터 뭘 그렇게 쳐다보냐? 밖에 누구 있어?”

김선우가 몸을 일으켜 밖을 내다보았다.

“김선우.”

조지현이 친구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긴 속눈썹 아래의 검은 눈동자가 가만히 상대를 응시했다.

“야, 이 새끼야. 진짜 설렌다니까. 왜 그렇게 불러.”

“너 피자 좋아해?”

“좋은 데 사네.”

“경원 기업 막내아들에게 들을 소리는 아닌데.”

조지현의 타박에도 김선우가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혼자 지내는 거야?”

“그럼 누구랑 지내.”

“선 본 여자라든가.”

조지현이 헛웃음을 삼켰다. 

“그 여자가 여길 왜 와. 뭐 마실래.”

“물이나 한 잔 줘.”

김선우가 침실을 보고 휘파람을 부는 시늉을 했다.

“침대가 크다?”

“내가 고른 거 아니야.”

“어머니가 고르신 거야?”

조지현이 침실 문을 닫아버렸다.

“야, 내가 태수랑 애들한테 연락했다. 조금 있으면 여기로 온대.”

“뭐? 언제?”

“아까 네가 화장실 간 사이에.”

모두 유학 시절 만났던 친구였다. 정확히 말하면 김선우의 친구들이었다. 조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인간들이 다 모이면 얼마나 시끄러운지, 이미 몇 번의 파티를 통해 알고 있었다.

“김선우, 너 진짜.”

“너 한국 들어와 놓고 이제 와서 연락한 벌이라고 생각해라.”

김선우가 지그시 웃었다.

“다들 안 바쁘대?”

“허니 집들이 하자니까 다들 닥치고 온다던데.”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허니(Honey)는 조지현의 유학 시절 별명이었다. 조지현이라고 이름을 말하면 열에 아홉은 조지라고 알아들었다. 결국 조지현은 자신을 현이라고 소개했다. 그게 외국인들에게는 허니라고 들렸던 것이다. 몇 번이고 정정해줘도 다들 그를 허니라고 불렀다. 그때마다 인상을 찌푸리는 친구를 보며 김선우는 차라리 그럼 조지라는 이름을 쓰라고 했다. 그게 더 부르기 쉬울 거라고. 그리고 김선우는 그날 처음으로 친구가 진심으로 화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럼 뭐라고 불러.”

“조지현.”

조지현이 짧게 덧붙였다.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 뭐라고 부르든.”

김선우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조지현이 그렇지, 하고 대꾸했다. 

“피자는 시켰냐?”

김선우의 물음에 조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시킬게. 오랜만에 피자 좀 먹어볼까.”

“아니, 내가 할게.”

조지현이 휴대전화를 꺼내려던 친구의 말을 잘랐다.

“뭐?”

“내가 주문한다고. 번거롭잖아.”

“번거로울 게 뭐 있어. 어플로 하면 금방인데.”

“아니야. 그래도 내가 할게.”

김선우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조지현을 바라보았다. 커피숍에서도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 것처럼, 잔뜩 진지한 목소리를 깔더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피자 좋아하느냐는 말이었다.

“뭐야. 너 사실대로 말해.”

김선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피잣집 차렸지?”

“……. 주문한다.”

조지현이 핸드폰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김선우는 다시 집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로, 이틀에 한 번 꼴로 피자를 주문했다. 그때마다 강석원이 피자를 배달하러 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는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쳐도 말을 건네거나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기억을 잃은 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자신을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알은척을 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열 번. 

그렇게 정했다. 열 번 내에 강석원이 말을 건네지 않는다면, 그가 자신과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문제는,

“……. …….”

조지현은 냉장고를 쳐다본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음식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닌 데다, 기름진 피자는 전혀 취향이 아니었다. 한 판을 시키면 한 조각을 먹는 게 전부였다. 남은 피자들은 차곡차곡 냉동실에 쌓여갔다. 원래는 김선우를 불러다가 냉동실에 있던 피자를 해동시켜 먹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에 피자를 주문한다고 하니 저도 모르게 내가 하겠다고 나서버렸다. 

다른 녀석들도 온다고 했으니 적당히 냉동실에 있는 것을 섞어서 내놓을까, 하던 차에 인터폰이 울렸다.

“왔나보다.”

김선우가 반가운 얼굴로 인터폰을 들고 문을 열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이 시끄러워졌다. 

“야 오랜만이다. 김선우, 이 새끼.”

“새 신랑 인물이 훤해졌어.”

“아직 신랑 아니다.”

“곧 있으면 신랑이지. 야, 죽어서만 지옥 가는 거 아니라더라. 넌 이제 곧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가장 먼저 결혼을 한 정태수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악담을 해라, 악담을.”

김선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악담이 아니고 사실이라니까. 아니, 며칠 뒤에 소행성이랑 지구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데, 넌 결혼이 하고 싶냐?”

“꼭 한 놈들이 저러더라.”

“해본 자의 지혜라는 거지. 여, 허니.”

“오랜만이다.”

조지현이 짤막하게 인사를 건넸다.

“넌 어째 얼굴이 그대로냐. 나이는 우리가 대신 다 먹어줬나.”

이재경이 조지현의 뺨을 움켜쥐며 말했다. 조지현은 그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그런데도 이재경은 싱글벙글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김선우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시끄러웠고 제멋대로였다. 조지현은 이마를 손으로 꾸욱 누르며 김선우를 노려보았다.

“벌이라니까.”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고 김선우가 눈을 찡긋해 보인다.

“뭐 먹을래? 허니가 사준댄다.”

“피자 사준다고 부른 거 아니야. 오는 길에 시켰어.”

“뭐?”

조지현이 설핏 입매를 찡그렸다.

“아파트 입구에 피자가게 간판 보이길래 거기에 시켰어. 왜? 선호 브랜드라도 있냐?”

이재경이 물었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피자 가게라면 강석원이 배달을 하는 그곳이었다. 조지현은 됐어,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명규는?”

“오고 있대. 맥주 사갖고 온다더라.”

조지현은 곧 거실에 벌어질 술파티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모인 멤버들은 그간의 회포를 푸느라 시끄러워졌다. 조지현은 흘깃 현관문을 쳐다보았다.

“명규? 그 새끼 곧 온다니까.”

조지현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인터폰 벨소리가 울렸다. 

“명규 왔나보다.”

김선우가 열림 버튼을 누르고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미리 열어두었다. 곧 이어 엘리베이터 알림음이 복도에 울렸다. 

“야, 김명규. 왜 이렇게 늦…….”

정태수가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다. 따라 나왔던 김선우도 헉, 숨을 삼켰다. 조지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일순 굳었다. 강석원이 현관에 서 있었다. 피자 박스를 들고 서 있는 것뿐인데도 위압감이 엄청났다. 

“저기, 피자, ……니들이 시켰냐?”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모양인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김명규가 뒤에서 걸어오며 말했다.

“어, 시키긴 했는데…….”

정태수가 뒷말을 삼켰다. 그의 시선이 피자 박스를 든 거구의 배달부에게 향했다. 조지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김명규가 신발을 벗고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오며 리더기를 든 강석원을 힐끗 쳐다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현관에 몰려 있었다.

조지현은 말없이 계산이 끝나길 기다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강석원은 무심한 얼굴로 리더기를 내밀었다. 조지현은 손톱으로 대충 선을 그어 사인을 대신했다. 강석원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을 하고 있었다.

“야, 그건 그렇고 내가 빅뉴스 하나 알려줄까?”

김선우가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는 그의 성격을, 조지현은 익히 알고 있었다.

“뭔데? 네 결혼에 관련된 이야기는 빼라. 하도 들어서 지겨우니까.”

정태수가 간신히 고개를 돌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 결혼이 아니고 우리 허니 결혼 소식이다.”

“뭐? 조지현이 결혼한다고?”

조지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영수증이 올라오는 기계음이 지짓지짓, 들려왔다. 

“조지현 너 진짜 결혼하냐? 대박. 그래서 한국 들어온 거야?”

“그게 아니라…….”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긴, 저 새끼 저번에 들어와서 우리 몰래 선 봤다더라. 그리고 그 여자 만나러 다시 들어온 거래.”

김선우가 나쁜 짓을 고자질하는 어린아이 같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야 그럼 내가 결혼식 때 부토니에 던질 테니까 네가 받아라.”

“말도 안 돼. 지현이 저놈이 나보다 먼저 결혼을 하다니.”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꿈처럼 멀게 느껴졌다. 조지현은 손끝이 떨렸다. 강석원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뇌리에서 지웠더라도. 

영수증이 나오자 뜯어내어 강석원이 내밀었다. 조지현은 작은 종이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습니다.”

“…….”

오래간만에 듣는 목소리에 조지현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그가 나가고 나자 화제의 중심은 피자 배달부로 옮겨졌다.

“봤냐? 허, 무슨 격투기 선수인 줄 알았다. 백구십은 훌쩍 넘겠는데?”

“엘리베이터 같이 타고 올라오는데 심장 멈출 뻔했다고. 무슨 배달부가 저렇게 살벌하게 생겼냐. 클레임 안 들어오려나?”

“혹시 아냐. 이 아파트 아줌마들이 일부러 저 집 피자만 시켜먹을지.”

“사모님들이 환장을 하고 시켜먹겠네.”

왁자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현아. 뭐하냐. 피자 식는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조지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피자도 오랜만에 먹는 것 같네. 옛날 생각난다.”

“그때가 그립다. 클럽에서 밤새 놀다가 피자로 해장하던 그 시절.”

“지금도 할 수 있어.”

“그랬다간 마누라한테 맞아 죽는다고. 니들 결혼은 되는 한 늦게 해라. 조지현, 너 말이야. 잘 생각하라고.”

멍한 얼굴로 앉아있는 조지현의 어깨를 김선우가 툭 쳤다.

“야, 뭐해. 피자 안 먹어?”

“너희들끼리 먹어.”

“왜? 맛있는데.”

“입맛 없어.”

“하긴, 그러고 보면 미국에서도 너 한 조각 먹는 게 전부였지. 그런데 왜 갑자기 피자를 사준다고 집으로 부른 거야.”

김선우의 말에 다들 낸들 아나, 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그는 강석원을 보았다. 아니, 그의 입가에 걸린 비틀린 미소를.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모두를 보내고 난 후, 쌓여있던 피자 박스와 쓰레기봉투를 모두 내다버렸다. 냉동실에 쌓여있던 피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조지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모두 버리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기분만 더 복잡해졌다. 열 번을 채우기도 전에 강석원이 말을 건넸다. 고작 들은 말이 괜찮습니다, 라니. 안 듣느니만 못한 말이었다. 무엇보다 문이 닫히기 전에 보았던 강석원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상대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고스란히 드러난 눈빛과 웃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가 서늘하게 식었다. 다시는 피자를 주문하지 못하겠지. 강석원은 왜 운동을 그만두고 그런 일을 하는 것일까. 혹시, 하고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고개를 내젓는다. 괜한 생각이다. 자의식 과잉이다. 몇 년이나 지난 일이다. 편지를 보냈지만 답신을 받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한다. 강석원도 그러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내내 조지현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오늘은 아무래도 약을 먹고 잠들어야 할 것 같았다. 

땡.

텅 빈 복도에 차가운 기계음이 울렸다. 한 층에는 두 개의 세대가 전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바로 복도가 나눠지기 때문에, 이곳에서 보름가량을 지냈지만 옆집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지현은 인기척을 느낀 순간,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속에서 커다란 몸이 천천히 일어섰다.

조지현은 처음에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커다란 형체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어…….”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는다. 피자 주문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와 마주칠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나.

강석원이 조지현의 앞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 계산을 잘못 하셨나요?”

조지현이 떠올린, 가장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강석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돌에 꽃이 돋아난 것 같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본 누군가가 했던 말이, 무심코 떠올랐다.

강석원이 눈을 내리감았다가 치떴다.

“조지현.”

강석원의 입에서 불린 이름은 끔찍할 만큼 달콤해서 소름이 돋았다. 

“여전하다.”

뭐가 여전하냐고 물으려던 순간, 조지현의 몸이 공중에 들린 채로 벽에 처박혔다. 당혹감보다 공포가 앞섰다. 강석원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의 팔다리쯤은 쉽게 부러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목을 움켜쥔 악력을 통해 깨달았다. 

“사람 쥐고 흔드는 거, 여전해.”

목이 졸린 채라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조지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윽.”

눈앞이 흐려졌다. 산소가 공급되지 않는 뇌는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의식의 끈을 놓으려는 순간, 강석원이 조지현을 놓았다.

조지현은 물 밖으로 막 끌려나온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들이켜며, 기침했다. 산소가 머릿속에 돌고 나서야 조지현은 고개를 들 수 있었다. 강석원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적나라하게 드리운 적의와 욕망이 조지현의 폐부에 꽂혔다. 커다란 손이 조지현의 얼굴을 쥐었다. 손가락이 조지현의 입술 사이로 들어왔다.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안다.

호흡이 막혔다. 뜨거운 살덩이가 입속을 침범했다. 점막을 핥고, 물러서려는 혀를 짓눌렀다. 쑤셔주면 여자의 질에서 나오는 애액처럼, 입술에서 타액이 흘러내렸다. 혀로 강간하듯, 남자는 조지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뒤통수를 움켜쥔 손은 조지현의 거부를 봉쇄했다. 껄떡껄떡 숨넘어가는 소리가 울렸다. 단단한 허벅지가 조지현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거칠고 천잡하게 이어지는 자극에 아래로 빠듯하게 피가 몰렸다. 조지현은 급박한 요의를 느꼈다. 두려웠다. 제 욕망을 고스란히 들킨 것이, 끔찍할 만큼 수치스러웠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잡아 당겼다. 성기가 강석원의 허벅지에 마찰되기 시작했다. 도망가고 싶었다. 끝없이 아래로 추락할 것 같은 감각에 조지현은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었다. 숨이 막혔다. 무엇이든 붙잡아야만 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 조지현은 자신이 강석원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석원이 웃었다. 피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래가 뜨끈하게 젖었다. 

실금이 아닌 사정이었다. 

정액이, 조지현의 가느다란 허벅지를 핥듯이 흘러내렸다. 조지현이 몸을 가늘게 떨었다. 

“잘 지냈어?”

지독히 비현실적인 말을 들은 듯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