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한사코 사양했지만 강석원은 조지현의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조지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감사하고 죄송했습니다.”
고개 숙여 인사했다. 진심이었다. 강석원이 아니었다면 오늘 곤란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탁소에서 교복까지 찾아서 건네받았다. 여러모로 빚을 졌다.
“도와주신 거 갚도록 할게요.”
괜찮다든가 신경 쓰지 말라는 답이 돌아올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미묘한 침묵이 이어졌다. 조지현은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는 오늘의 일에 대한 대가를 원하고 있었다.
조지현은 자신이 강석원이란 인간을 과소평가, 아니 과대평가했음을 깨달았다. 그가 선의로만 자신을 도와줬다고 믿어버린 것이다.
“……, 세탁비는 내일 드릴게요. 다른 건, 원하시는 게 있으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강석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문제집을 풀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모든 풀이가 끝나고 간단한 계산만 하면 답이 나오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조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 같이 먹을래?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던 강석원이 내뱉은 한마디였다. 잠시 생각하던 조지현은 정말 그거면 되냐고 물었다. 강석원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밥 한 번 먹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조지! 담임이 부른다.”
교실 앞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조지현은 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교무실로 가니 담임이 상담실로 가자며 손짓했다. 상담실과는 인연이 먼 인생을 살아왔기에 조지현의 눈빛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말없이 담임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거기 앉아라.”
조지현이 담임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요즘 공부는 잘 되냐?”
“네.”
“그래. 이번에도 성적 잘 나왔더라. 뭐, 우리 지현이야 늘 잘하니까 선생님이 걱정이 없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굳이 부르지는 않았을 텐데. 조지현은 가만히 본론이 나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지현아.”
담임이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조지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급식비가 안 들어왔다고 하던데. 저번 분기 수업료도 그렇고.”
어지간한 일로 당황하지 않는 조지현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숙였다. 잠시 숨을 고른 후에 그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렸는데 아무래도 깜빡하신 모양입니다.”
“그래. 그럼 오늘 가서 꼭 말씀드려라.”
“네.”
“다음 주에 수학여행인 거 알지? 아직 신청서 안 냈던데, 그것도 말씀드리고.”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 수업 준비해야 해서요.”
“어, 그래라.”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무실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의 찬 기운이 달아오른 뺨을 스쳤다. 몸이 오싹 떨렸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수업종이 울렸다. 복도에서 소리를 지르던 아이들이 일제히 제자리를 찾아 달려갔다. 조지현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깊게 숨을 몰아쉰 후에야 그는 천천히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당신이 대체 하는 게 뭐가 있는데? 한 달? 그놈의 한 달 타령을 한 지가 대체 얼마나 됐냐고!”
“내가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한 달만 지나면 큰 건이 해결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지긋지긋해! 맨날 똑같은 소리 듣기도 질린다고!”
제발 좀 그만해! 하는 소리와 어머니의 비명 같은 고성이 오고간다.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잇따랐다. 현관 앞에 선 조지현은 머뭇거리다가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다녀왔습니다.”
조금 전까지 목대에 핏줄을 세워 소리 지르던 어머니가 일시에 표정을 풀며 달려왔다. 조지현은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아버지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어머, 우리 아들 왔구나. 피곤하지? 배는 안 고파?”
“괜찮아요.”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 정리하고 조지현은 제 방문을 열었다. 방까지 따라 들어온 어머니가 연신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너 숙현이 아줌마 알지? 오늘 그 아줌마가 전화해서 너희 아들 이름이 지현이 맞냐고 물어보더라. 학원에서 네가 이번에 모의고사 성적으로 2등 했다며.”
조지현은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피곤했다.
“네. 그런가 봐요.”
“왜 엄마한테 말을 안 했니.”
말 안 해도 어차피 아실 거잖아요.
조지현은 그 말을 쓴 약처럼 삼켰다.
“숙현이 아줌마가 얼마나 네 칭찬을 하던지. 뭐 특별과외 같은 거 따로 하냐고 묻는데 엄마 곤란해 죽는 줄 알았다, 얘. 우리 아들은 너무 착하고 성실해서 학교 공부랑 학원만 다니는데 그렇게 잘한다고 말해줘도 영 믿지를 않아서 말이야.”
곤란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곤란한 척 웃으며 내도록 아들의 자랑을 늘어놓았을 게 분명하다. 기쁨을 간신히 억누르고 통화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번에는 1등을 하면 엄마는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때, 우리 아들 생각은?”
“죄송합니다. 더 노력할게요.”
“죄송하긴, 그것도 정말 잘했어. 그냥 더 잘하면 좋겠다는 것뿐이야. 그래. 지현이, 피곤하겠다. 얼른 씻고 자야지.”
조지현은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돈 이야기를 꺼내기가 죄송했다. 아버지의 사업이 요즘 상황이 좋지 않아 몇 달째 생활비를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 ……저, …….”
머뭇거리는 아들을 본 어머니가 뭔가 떠올랐는지 아, 하면서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미안했다. 없는 살림에 어떻게든 수업료를 마련했을 어머니를 떠올리자 가슴 한켠이 욱신거렸다.
“이거 학원 특강비야. 너희 학원에 강남에서 알아주는 수학 선생님 오셨다며. 엄마한테 왜 말 안했어. 숙현이 아줌마가 얘기 해줬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잖아. 넌 수학이 좀 약한데 잘됐어.”
조지현은 잠시 멈칫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학교 수업료와 급식비가 밀렸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그래, 그럴 수도 있다.
“혹시 학교에서 연락 못 받으셨어요?”
아들의 물음에 어머니가 어머, 그거, 하고 웃는다.
“응. 받았어.”
조지현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어머니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너희 학교는 참 웃긴다. 너처럼 공부 잘하는 애가 학교 이름을 빛내주는데 수업료를 받아? 솔직히 네가 학교에서 배우는 게 뭐가 있어? 이미 학원에서 다 알려주는 거 복습하는 건데. 안 그래?”
어머니는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말이 길어진다. 스스로 납득하기 위함이다. 조지현은 물끄러미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돈을 받았으면 받았지, 그런 학교에 돈을 주고 다닐 수는 없는 거야. 네 수준에 한참 안 되는 학교잖아. 급식비도 그렇고. 엄마가 그건 교장 선생님께 직접 전화 드려서 말씀드릴게. 넌 장학금을 받고 다녀도 마땅한 학생이라고.”
“그러지 마세요.”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공교육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시면 자퇴하고 검정고시 공부할게요.”
“무슨 소리야. 학교를 왜 자퇴해! 너 검정고시 꼬리표 붙으면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아? 이름이나마 졸업한 고등학교가 있어야 하는 거야.”
수업료 내는 것조차 아깝다고 했던 학교의 가치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묻고 싶었다.
“아무튼 넌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 성공할 수 있어. 우리 집에 판검사 하나는 나와야지. 남자는 성공 못하면 아주 비참하게 사는 거야. 알겠니?”
마치 너희 아버지를 보렴, 하는 듯한 말투에 조지현은 신물이 났다. 아버지의 사업이 호황이었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를 왕처럼 여겼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반찬을 만들고, 식사가 끝나면 제철 과일을 세 종류씩 내었다. 그러나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자 반찬의 가짓수가 조금씩 줄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예 밥을 차리지도 않았다. 사과 한 알조차 남편의 입으로 들어가는 게 아깝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녀의 모든 애정과 노력은 오롯이 아들에게 향했다. 공부를 잘하는, 성공해서 자신의 지위를 다시 세워줄 아들에게.
조지현은 어머니의 지나친 관심과 애정이 부담스럽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 수학여행은요?”
조지현이 물었다.
“꼭 가야 하니?”
어머니의 물음에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네, 하고 대꾸하고 말았다. 아들의 단호한 대답에 어머니가 잠시 생각하더니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내가 교장선생님께 말씀드려볼게. 알았지? 넌 그냥 걱정하지 말고 있어. 학원 특강은 엄마가 미리 다 말해뒀으니까 돈만 드리면 돼. 알았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가 알았지? 하며 한 번 더 채근했다.
“네.”
“그래. 우리 아들. 그럼 영어 듣기 공부 좀 하고 있어라. 엄마는 가서 마저 할 일이 있으니까.”
영어 듣기로 아들의 귀를 막은 다음, 자신의 남편에게 미처 하지 못한 저주와 욕설을 쏟아 부으러 간다는 말이었다. 조지현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제 귀에 꽂았다. 아들의 등을 두어 번 쓰다듬은 후에 어머니는 방에서 나갔다.
고성이 이어졌다. 조지현은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였다. 귀가 찢어질 듯이 큰 소리가 울렸다. 우체국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3번 출구로 나가서 왼쪽으로 돈 다음 직진을 하시면 됩니다!
미국인이 자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는 것만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차가운 손바닥이 이마를 감쌌다.
“입맛에 안 맞아?”
건조한 목소리에 설핏 걱정이 묻어났다. 젓가락을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조지현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다른 데 가도 돼.”
강석원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잠깐, 딴 생각 하느라.”
학생의 신분으로 오기에 과분할 만큼 고급스러운 초밥집이었다. 강석원이 오늘의 식사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메뉴판을 보는 순간 알아차렸다. 다른 가게로 가자는 말조차 하지 못할 만큼, 강석원은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일단 사과했다. 상황이 어떻든지 간에 방금 자신의 태도는 무례했던 터다.
“죄송할 건 없어.”
강석원이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언뜻 차가울 만큼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틈틈이 조지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빙빙 돌리는 말없이 단도직입 묻는다. 조지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은 있지만, 강석원에게 털어놓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어머니에게 받은 봉투의 돈은 수업료로 내버렸다. 어머니에게는 교장 선생님께 직접 찾아가서 수학여행비와 수업료를 감면받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학원 특강비로는 수학여행비까지 낼 수 없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해둬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어머니는 교장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펼쳤을 테니까.
어머니는 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신이 나서 끊임없이 늘어놓다가도 아주 사소한 일에 불같은 분노를 쏟아 붓는 증상이 딱 그러했다. 그런 어머니를 상대로 논리적인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긴 시간 동안, 깨닫게 되었다.
“죄송해요. 집안일이라.”
“그래.”
강석원은 예상대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조지현은 찬물을 마셨다. 일단 저질러 놓았지만, 뒷감당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머리가 아팠다. 뜻대로 아들이 움직여주지 않을 때, 어머니가 보여주는 반응은 가히 걸작이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통곡하며 욕을 퍼붓는다. 거기에서 그치면 다행인데 칼을 들고 다 같이 죽어버리자고 휘두른다. 자신에게 단 하나 남은 희망이 아들인데 그마저 어긋나버리면 자신은 살 의미가 없다는 폭력적인 이유를 들이대곤 했다. 옆집에서 신고가 들어와 경찰이 찾아오면 평범한 가정에서 있을 법한 모자의 다툼을 연기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사춘기를 맞이해 너무 힘들다며 신세한탄을 늘어놓는다.
싫다.
발끝에서부터 까만 물이 차오른다. 숨이 막힌다. 세계가 일그러진다.
“……어?”
“네?”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도와줄 일 없을까, 물었어.”
강석원이 물 잔에 손을 뻗었다. 마디가 분명하고 견고한 손이었다. 조지현은 홀린 듯이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며칠 묵어도 될까요?”
“……?”
물 잔을 입에 댄 채, 강석원이 슬쩍 눈썹을 휘어 올렸다. 조지현이 내뱉은 말을 미처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선배님 댁에서 며칠 있어도 될까요?”
강석원이 쿨럭, 잔기침을 뱉었다. 그가 손으로 턱을 쥔 채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붉히거나 눈을 휘둥그레 뜬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작은 기침 한 번에, 조지현은 강석원이 몹시 당황했음을 알았다.
“우리 집?”
강석원이 슬쩍 입매를 찌푸린 채 물었다.
“네. 거절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조지현은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대답했다. 강석원은 턱에 힘을 주었다. 단단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당혹이 스미었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종업원이 들어왔다. 참치 요리입니다, 하고 검은색 접시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나갔다.
“언제.”
“다음 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요.”
“그래.”
강석원은 다시 젓가락을 움직였다. 조지현은 잠시 강석원을 바라보았다.
“왜.”
“제가 선배님 댁에 있어도 괜찮으신 건가 해서요. 지금이라도 거절하셔도 됩니다.”
도와줄 일이 없느냐고 묻는 말에 저도 모르게 불쑥 던진 말이었다. 왜 그러냐고 무슨 일이냐고 물으면 대충 얼버무리고 실없는 농담이라고 해버릴 요량이었다. 그런데 강석원이 물은 것은 언제, 였다.
강석원이 젓가락으로 접시 중앙에 놓인 붉은색 초밥을 집었다. 군더더기 없고 정확한 젓가락질이었다. 그가 조지현의 앞 접시에 초밥을 놓아주었다.
“내가 걱정되는 건,”
그가 말끝을 늘이며 조지현에게 시선을 두었다. 호흡이 멎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채집용 박스에 눌려 날개에 핀이 꽂힌 나비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피부의 신경이 따끔하고 오싹했다.
“내가 아니라 너야.”
강석원이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아랫배에 자릿한 통증이 일었다. 이해하지 못할 급박한 요의가 일었다. 자다가 실수를 하고 깨버린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남자의 시선이 등에 닿았다. 등이 불붙는 듯 뜨거웠다. 조지현은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았다.
“차 조심하고, 사람 조심하고, 이불 꼭 덮고 자야 한다. 그리고 돌아다니면서 심심하면 영어 듣기 틈틈이 하면 좋을 거야.”
“네. 알겠어요.”
조지현은 현관에 서서 삼십 분째 같은 말을 반복되는 어머니의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늦겠다. 빨리 가 봐라.”
보다 못한 아버지가 한마디 건네자, 어머니가 표정을 구겼다.
“가볼게요. 정말 늦겠어요.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혹시라도 차 놓치면 그냥 와도 돼.”
어머니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붙들어 세우고 같은 말을 반복한 이유를, 조지현은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려는데 아버지가 따라 나왔다.
“지현아. 그래도 수학여행 가는데 용돈은 있어야지.”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넨다. 조지현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번에 받은 용돈 남았어요.”
“아니다. 가서 친구들이랑 맛있는 거 사 먹어라.”
하는 수 없이 받아들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럼 잘 다녀와. 핸드폰 있으면 연락이라도 자주 할 텐데.”
“어쩔 수 없죠.”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학업에 방해된다는 그럴듯한 명목하에 휴대전화를 없앴다. 지금도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녀오겠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얼른 올라탔다. 조지현은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도 가방을 들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시계를 확인했다. 수학여행 버스에 오르지는 않지만 약속한 시각에 늦은 건 사실이었다. 모퉁이를 지나 큰길로 갈 때까지 뛰다시피 걸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석원이 보였다. 인구밀도가 높은 정류장에서 그의 주변만 한산했다. 교복을 입은 모습이 어색할 만큼 위압감이 엄청난 남자였다.
“늦어서 죄송해요.”
조지현이 다가가서 고개 숙였다. 강석원이 가자, 하고 몸을 일으켰다. 여행 가방을 들고 학교로 갈 수 없었기에 짐을 그의 집에 두고 가기로 했다.
“지금 가면 지각할 거 같은데요.”
딱 한 번 가보았던 곳이라 정확한 거리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마, 십 분쯤.”
강석원의 대답을 듣고 조지현이 걸음을 멈추었다. 강석원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여러모로.”
사실 오늘 아침까지도 고민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부탁을 한 것인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강석원이 조지현이 들고 있던 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피차 마찬가지야.”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이 눈을 치떴다.
“십 분이 아니라 삼십 분이야. 지각.”
“…….”
“뛸래?”
강석원이 물었다.
빈 교실에 종소리가 울렸다. 조지현은 가방을 챙겨들었다. 2학년 중에 이런저런 이유로 수학여행을 가지 않는 학생은 자신을 포함해 총 세 명이었다. 그중 둘은 이미 일찌감치 사라진 후였다. 1학년 미술 선생이 수업 시간이 끝나면 오늘은 알아서 집에 가라는 말을 하고 간 터였다.
교실을 나오자 갈 데가 없었다. 아침에 강석원에게 열쇠를 건네받긴 했지만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근처의 시립 도서관으로 갔다. 한참 공부를 하고 있는데 월요일은 6시에 열람실 문을 닫는다는 방송이 나왔다. 하는 수 없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커피숍에라도 들어갈까. 주머니에 있는 돈을 확인했다. 전 재산 이만삼천 원. 커피값으로 오천 원을 쓸 여유는 없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집으로 걸어갔다. 집 근처 놀이터 벤치에 앉아 책을 꺼냈다. 아직 강석원은 집에 오지 않았는지 불이 꺼진 채였다. 근처에서 떠들던 아이들도 하나둘 사라졌다. 어둑어둑한 가로등 불에 의지해 글자를 더듬듯이 읽어내려 갔다. 진한 그림자가 책장에 드리워졌다. 처음에는 눈이 피로한 탓이라 여겨, 눈가를 몇 번 비볐다. 그러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 서 있었다.
“여기서 뭐해.”
“아, …….”
조지현은 읽던 책을 덮었다.
“계속 안 들어가고 있었던 거야?”
그렇게 묻는 강석원의 목소리에 난색이 묻어난다. 조지현은 어물어물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가방을 들었다. 조지현이 건네받으려 했지만, 이미 어깨에 단단히 둘러멘 후였다.
“운동 끝나셨어요?”
“응.”
“보통 몇 시까지 하세요?”
“9시.”
조지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개인 운동할 때도 있어, 강석원이 뒷말을 덧붙인다. 그가 자신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보내다 온 것을 깨달았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강석원이 난색을 보인 이유도 더불어.
“먼저 들어갈래?”
집 앞에서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이 의아한 얼굴로 강석원을 올려보았다.
“샤워도 해야 하고.”
“……, 괜찮아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듣고 보니 신경이 쓰였다. 강석원이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조지현에게 돌려주었다.
“편의점 들렀다 갈게. 생수가 떨어져서.”
“저 때문에 그러신 거면 괜찮습니다.”
“아니야.”
강석원은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저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빨리 가서 샤워를 마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조지현은 계단을 올라갔다. 어두운 공간을 더듬어 불을 켰다. 가방을 내려놓고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욕실로 들어갔다. 옷가지를 벗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타인, 그것도 그다지 친하지 않는 상대의 집에서 옷을 벗은 건 처음이었다. 샤워 콕을 열었다.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깜짝 놀라서 샤워기에서 떨어져 레버 위치를 확인했다. 시간이 지나도 물은 뜨거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집주인을 언제까지 밖에 세워둘 수 없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머리를 감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최대한 빨리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강석원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온수…….”
강석원이 얕게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 생각에 여기까지 내달린 모양이었다. 찬물로 샤워한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조지현은 미안함에 괜찮아요, 그냥 씻었어요, 하고 아무렇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이거 누르면 돼.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생각을 못했어.”
조지현은 눈으로 스위치의 위치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생수를 냉장고에 넣었다. 냉장고 안에는 아직 뜯지 않은 생수가 두 통이나 있었다. 조지현은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냈다. 등 뒤로 시선이 닿았다.
“안 씻으세요?”
입 밖에 내놓고 나니 민망한 질문이었다.
“체육관에서 씻고 왔어.”
강석원이 앉으며 대답했다.
남자가 자신을 여러모로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몸에 한기가 스몄다. 소름이 돋은 팔을 손바닥으로 문지르자, 강석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얇은 시트를 꺼내주었다.
“덮고 있어.”
거절할 새도 없이 시트에 폭 감겼다. 조지현은 감사합니다, 하고 순순히 인사했다. 아직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할 날씨는 아니었다.
침묵이 흘렀다. 텔레비전이라도 있으면 켜두고 보는 척이라도 하련만, 강석원의 방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살풍경했다.
“저녁 먹었어?”
“아까…….”
대충 먹었다는 말을 하려는데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조지현은 뒤집어쓴 시트를 잡아끌어 얼굴을 가렸다.
“잠깐 기다려.”
강석원이 부엌으로 갔다.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데 배에서 아까보다 더 크게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조지현은 시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라면이라도 끓이는 것인가 싶었던 강석원은 야채를 다듬기 시작했다.
“뭐하시려고요?”
“저녁.”
“요리할 줄 아세요?”
“대충.”
솜씨를 보니 대충은 아니었다. 조지현은 가만히 앉아 도마에 칼질을 하고 있는 강석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남자의 어울리지 않는 일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강석원은 그럴듯한 오므라이스를 내밀었다. 노오란 달걀지단 위에 케첩으로 스마일 표시까지 그린.
조지현은 스마일 표시를 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간은 맞을 거야.”
강석원이 무심한 투로 말했다. 조지현은 잘 먹겠습니다, 하고 작게 중얼거리고 숟가락을 받아들었다. 스마일 표시를 망가트리지 않게 귀퉁이를 떠서 한입 먹었다.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평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골목에서 양아치들의 머리통을 무표정한 얼굴로 짓이기던 남자가, 긴장을 억누른 채, 자신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맛있어요.”
강석원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팽팽한 공기가 느슨하게 풀렸다.
다행이네.
그가 툭 던지듯 말한다. 문득 가슴부근이 묵직해졌다. 조지현이 손바닥으로 가슴을 문지르자 강석원이 물을 따라 건넸다.
“천천히 먹어.”
“네.”
조지현은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였다. 마지막에 케첩으로 그린 스마일을 헤집었을 때 느꼈던 죄책감을 제외하면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오늘은 끝나면 바로 와.
교문 앞에서 강석원은 그렇게 말하고 제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을 마치고 강석원의 집으로 바로 돌아갔다. 오늘은 제대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저녁때쯤, 강석원이 왔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조지현은 강석원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장, 보셨어요?”
“응.”
파가 삐죽하게 검은 비닐봉지 사이로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독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랐다.
“김치찌개 끓일 건데.”
“예. 괜찮아요.”
어제 자기 전에, 혹시 좋아하지 않거나 못 먹는 음식이 있냐고 물어본 연유가 여기 있었나 보다. 도와줄 건 없냐고 물었다. 강석원은 고개를 내저었고 조지현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쌀을 밥솥에 안치고 야채를 송송 썰어 보글보글 끓는 찌개에 넣는다. 일목요연한 그의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강석원은 금세 상을 차려냈다.
김치찌개와 계란말이, 버섯볶음까지. 완벽한 한상이었다.
조지현은 상을 앞에 두고 미안했다.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수저와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은 것뿐이었다.
“왜.”
조지현이 숟가락을 든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강석원이 물었다.
“아니요. ……죄송해서요. 왠지.”
강석원이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는 안다. 둘 다 입 밖에 내지 않고 있을 뿐. 그걸 이용하는 기분이 들었다.
강석원이 별스러운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됐어. 먹어.”
“잘 먹겠습니다.”
조지현이 숟가락을 움직였다. 찌개도, 계란말이도, 버섯 요리도 특별할 거 없었지만 나무랄 데도 없었다.
강석원이 가만히 조지현을 바라본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맛있어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는 젓가락을 집었다. 대화는 없었지만 전처럼 어색하진 않았다.
편안한 식사였다.
“정말 괜찮으세요?”
어제와 똑같은 질문을 오늘도 했다. 괜찮아. 거푸집에 넣고 찍어낸 것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거기서 잘게요.”
혼자 사는 집이니 이불도 당연히 한 채다. 강석원은 조지현에게 그걸 내어주고 자신은 얇은 담요만 덮고 누웠다.
“잘 자.”
강석원이 등을 돌리며 대답했다.
조지현은 미안했다. 자신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이곳에 올라와서 같이 자자는 말도 할 수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할 만큼 무신경하지는 않다.
천천히 자리에 누웠다. 시트를 얼굴 가까이 끌어당겼다. 빨래를 해뒀는지 섬유유연제 향이 얇게 스며있다. 눈을 감았다. 멀찌감치 누운 남자의 숨소리가 들린다. 짐승의 숨소리다. 언제든지 자신의 목줄기를 물어뜯을 수 있는. 조지현은 가만히 눈을 떠서 강석원의 등을 확인했다.
손을 뻗으면 닿는다. 하지만 남자는 거리를 유지한 채, 절대 그 거리를 좁히려 들지 않는다. 자신은 그 거리를 믿고 남자의 호의를 이용한다.
조지현은 다시 눈을 감았다. 어제보다는 빨리 잠들기 바라며.
검은 그림자가 머리맡에 드리워졌다.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손이 다가왔다. 목이 졸렸다. 컥컥, 숨넘어가는 소리가 입에서 났지만 상대는 손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강하게 아귀힘을 더해갈 뿐이었다. 너 때문이야. 상대가 그렇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달싹이는 게 전부였다. 죽어야 해. 네가 죽어야 해. 너 때문에 나도 죽을 수가 없잖아. 그러니 너부터 죽어야 해. 목을 쥔 손아귀 힘을 통해 악의와 살의가 전해진다. 간신히 눈을 떴다. 시커먼 그림자가 시야에 일렁인다. 죽어야 해, 너부터 죽어야, 그래야 나도 죽을 수 있어. 너부터, 그러니까 너부터…….
어머니와 눈이 마주친다.
꿈에서조차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누구든,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조지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사위가 고요하다. 짐승 같은 숨소리만 귓가에 울린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 숨소리를 내는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아?”
걱정스러운 목소리다. 괜찮다고 대답하려고 몸을 일으키던 조지현은 휘청, 바닥이 일렁이는 것을 느꼈다.
또다.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일었다. 해일에 휘말리는 사람처럼 숨이 막혔다. 코와 입으로 서슬 퍼런 공포가 밀려들어왔다. 컥컥거리며 숨을 내뱉다가 사지에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조지현. ……조지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도 대답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죽을 만큼 무서웠다. 아무 데로나 도망치고 싶은데 갈 데가 없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무서웠다.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게 악몽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꿈속에서 확인해야만 했다.
“지현아!”
단단한 팔이 몸을 받쳤다.
그 순간, 누군가 자신을 뭍으로 끌어당긴 것만 같았다. 조지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땀이 들어가 따끔거리는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강석원이 보였다.
잔뜩 화가 난 것처럼 얼굴을 찌푸린 채.
“선배…….”
“병원 갈까?”
강석원의 물음에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숨 쉴 수 있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물 줄게.”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려던 강석원이 의아한 눈으로 조지현을 내려다 보았다. 조지현은 그제야 자신이 강석원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음을 깨달았다. 강석원이 아무 말 없이 도로 앉았다.
조지현은 옷자락을 쥔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공황 발작이었다. 책에서 본대로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맘처럼 쉽지 않다.
그때, 강석원이 팔을 내밀어 조지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
조지현이 몸을 흠칫 작게 떨었다.
“괜찮아.”
그가 조지현의 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눈앞이 알싸했다.
“괜찮아.”
강석원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민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성실하고 끈질기게 조지현을 달랬다.
차츰, 성나게 일렁이던 공포감이 잦아들었다. 돌처럼 단단하고 차가울 거라 생각했던 남자의 품은 안온했다. 그 안에서 숨을 쉬었다. 땀 냄새와 섬유유연제 향이 뒤엉켜 코끝에 닿는다.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그의 짧은 머리카락과 목덜미가 보였다. 단단한 턱과 콧날, 그리고 눈매.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이상하게도 전처럼 어색하거나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악몽 꿨어?”
“……네.”
등을 도닥이는 손은 여전하다. 심장소리처럼 규칙적인 울림이 등을 타고 일었다.
“괜찮아. 꿈이니까.”
꿈은 현실을 해치지 않아. 수없이 되뇌던 말이다. 잠든 자신을 어머니가 목 조르는 악몽을 종종 꿨다. 처음에는 꿈이라고 여겼는데, 꿈속에서 보이는 어머니의 표정과 목소리, 날것의 고통들이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음을 알려주었다. 퇴색되었지만 미처 사라지지 못한 어린 날의 기억이다. 악몽을 꾸고 혼절을 반복할 때마다, 조지현은 흠뻑 젖은 시트 안에서 꿈이 자신을 좀먹어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까요.”
조지현의 혼잣말 같은 물음에 강석원의 손이 멈칫했다가 다시 움직인다.
“응.”
강석원이 짧고 심심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조지현은 작게 웃었다. 미사여구가 붙은 틀에 박힌 말을 들었다면, 아마도 흘려 넘겼을 것이다. 강석원다운 답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가 그렇게 말하니 괜찮을 것만 같았다. 미쳐있는 어머니가, 그리고 그 피를 받아 언젠가는 미쳐버릴 것 같은 자신이.
가슴속의 둑이 와르르 풀렸다. 고개를 숙이자 눈물이 떨어졌다. 고일 새도 없이 흐르는 눈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강석원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눈이 마주쳤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강석원이 말없이 바싹 끌어안아주었다. 사람의 온기에, 등을 두드리는 작은 울림에, 처음으로 위안을 받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어두운 방안에 낮은 숨소리가 가득 찼다. 조지현은 문득 허벅지 근처에 닿는 이물감에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은 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건가.
“왜.”
강석원이 눈을 감은 채 물었다. 조지현이 아니요, 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강석원의 트레이닝 바지가 들릴 정도로 아래가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제 몸이 아니라는 듯이 무심한 태도였다. 정색하고 몸을 뒤로 빼기도 민망한 상황이었다.
그때, 강석원의 숨소리에 미묘하게 밴 열기를 느꼈다.
모를 리 없는 것이다. 모른 척하는 것일 뿐.
조지현은 눈을 감았다. 그 감정에 응해줄 수 없으면 최소한 알은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자꾸 가슴이 답답했다.
“걱정 말고 자. 다시 그러면 내가 깨워줄 테니까.”
강석원이 다시 등을 도닥인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속이 울렁거렸다. 소화시키지 못한 감정들이 쌓여만 갔다.
조지현은 문득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아이들은 3교시가 끝나기 전에 가방을 들고 사라진 터에, 오늘도 혼자 빈 교실을 지키게 되었다.
다른 학년의 체육시간인지 운동장은 떠드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가끔 이 교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고 혼자만 남는 상상을 하곤 했다. 비현실적인 상상이 이루어진 느낌이었다. 조지현은 가만히 빈 교실의 적막감을 곱씹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눈꺼풀이 느슨하게 풀어졌다. 어젯밤 잠을 설쳤던 것이다.
아직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있는데.
조지현은 턱을 괸 채로 그렇게 생각했다. 책상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누군가의 시선 때문이었다.
얼굴선을 따라 시선이 움직였다. 입술에 머문다. 눈을 떠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위에 눌린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무언가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다. 빈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꿈이구나.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 올리던 그의 눈에 책상에 놓인 음료수가 들어왔다. 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온전한 구형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떨어진다. 가져다 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조지현은 벌떡 일어섰다. 복도로 달려 나갔지만 사람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왔다. 잠은 싹 달아났지만 문제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
책상에 놓인 음료수 캔을 집어 들었다. 청량한 색으로 타이포그래피가 된 캔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가방에 집어넣었다.
수학 문제를 푸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입술에 손이 올라갔다.
만진 건가. 거스러미의 감촉이 생경하게 손에 닿았다. 괜스레 얼굴이 붉어졌다.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열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문제 하나를 가지고 한 시간가량을 끄적거리다 교실을 나왔다. 강석원의 자취방으로 와서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고 있을 무렵, 강석원이 장을 봐서 돌아왔다.
“운동은 안 나가세요?”
“오늘까지 쉬어.”
그래도 되는 건가요? 차마 묻지 못한 말들이 쌓여갔다. 조지현은 선풍기 버튼을 눌렀다. 털털거리며 돌아가던 모터소리가 소거되자 미지근한 침묵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도와드릴까요?”
강석원이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장벽처럼 느낄 만큼 거대한 등이 싱크대를 가로막고 있었다.
“저도 돕고 싶습니다.”
얻어먹기만 하는 것 같아 스스로가 염치없게 느껴졌다. 강석원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콩나물 다듬을 줄 알아?”
“왜?”
시선을 느낀 강석원이 물었다. 조지현은 아니요, 하고 시선을 떨군다.
똑, 똑, 똑.
콩나물 꼬리가 떨어지는 소리만 이어진다.
“원래부터 요리 잘하셨던 건가요?”
“아니. 하다 보니.”
타인에 대한 무관심한 조지현의 귀에도 강석원에 대한 소문은 심심치 않게 들려왔다. 비현실적인 목격담까지 섞여 거의 도시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가 강석원이란 이름을 둘러쌌다.
이거야말로 정말 괴담일 텐데.
콩나물을 능숙하게 다듬는 강석원을 바라보며 조지현은 생각했다.
“그거 머리인데.”
“……, 죄송합니다.”
딴생각을 하다 콩나물의 대가리를 뜯어버린 것이다.
“이런 거 안 해봐서요.”
덧붙인 말이 변명처럼 들려 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강석원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웃는다, 고 하기엔 애매한 변화였지만 그가 기분 좋은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열이 몸을 휘감았다.
“다 했네.”
강석원이 콩나물을 넣어둔 볼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콩나물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더 도와드릴 건 없나요?”
“쉬고 있어.”
조지현은 하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가 상을 닦았다.
강석원은 금세 콩나물국과 어묵 볶음, 시금치 무침을 차려왔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반찬그릇을 조지현의 앞으로 밀어준다. 감정이라고는 스밀 틈도 없이 단단해 보이는 남자가 다정한 호의를 내비칠 때마다, 조지현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이 간지러웠다. 잔기침을 두어 번 하자 강석원이 컵에 물을 따라 건넸다. 물을 받아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몸으로 흘러들어갔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되는 열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지현은 문득 강석원이 자신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그러세요?”
“입술.”
“네?”
“아까부터 계속 만지네. 아픈 건가 해서.”
조지현은 그제야 자신이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딪쳤어?”
강석원의 시선이 입술에 머무른다.
“아닙니다. 그냥, 좀 간지러운 거 같아서요.”
“약 줄까?”
“괜찮아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조지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음료수요, 하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음료수?”
“아까 선배님이 주신 거요.”
강석원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조지현은 가방에서 음료수 캔을 꺼냈다.
“선배님이 주신 거 아닌가요?”
“내가?”
그렇게 되묻는 그의 표정은 꾸며낸 게 아니었다. 조지현은 눈가를 설핏 찌푸렸다.
그럼 누구라는 거지.
“누가 놓고 갔어?”
강석원의 물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언제?”
“아까. ……잠깐 자고 있는 사이에요.”
당연히 강석원일 거라 생각했다. 2학년은 수학여행을 갔고 1학년 중에는 아는 사람도 없다.
대체 그렇다면 누가.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거짓말처럼 열감이 사라졌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묵묵히 식사를 재개했다. 밥상을 물리고 나서 조지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제가 설거지할게요.”
“왜?”
예기치 못한 대답이었다.
“……,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솔직한 속내를 털어놨다. 잠시 생각하던 강석원이 그럼, 하고 손을 까닥거렸다.
“대신 그거 줄래?”
“네? 음료수요?”
강석원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좋아하는 음료인가 싶어 조지현은 망설이지 않고 캔을 건넸다. 강석원은 망설임 없이 캔의 고리를 뜯었다. 바로 마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그대로 음료를 개수대에 흘려버렸다.
“…….”
당황한 조지현이 눈을 홉뜨고 바라보았지만 강석원은 심상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모두 쏟아 버렸다. 말끔히 비워낸 캔을 와작, 구겨 쓰레기통에 던지고 나서야 그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의 다른 일면을 엿본 기분이었다. 문득, 청동 조각 같은 저 얼굴에 감정이 가득 차오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으며 책을 꺼내 못다 푼 문제를 풀어 나갔다.
자리에 누운 지, 한 시간가량이 지났지만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었다. 몇 번 뒤척이고 나자 저쪽에서 왜,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이 안 와서요.”
“원래 수학여행 마지막 날은 잠이 안 오지.”
조지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일부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
고개를 돌리자, 벽을 보고 누운 강석원의 너른 등이 보였다. 그 순간 무슨 생각에서인지 불쑥, 욕구가 치솟았다.
“언제 처음 보신 거예요?”
치기 어린 호기심이었다.
“뭘.”
“저요.”
자신은 강석원처럼 유명인사가 아니었다. 강석원이 자신을 알고 있는 게,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건. …….”
강석원이 입을 다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두 사람 모두 모를 리 없다. 숨소리가 가만히 이어졌다. 조지현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냉장고 안의 차가운 생수 생각이 간절했다.
“조지라는 이름을 들었어.”
강석원이 몸을 이쪽으로 돌렸다. 잠기운이라고는 한 터럭도 느껴지지 않는 멀끔한 얼굴이었다. 마치 수학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것처럼.
“아, 그거요.”
조지현이 어색하게 맞장구쳤다. 이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어. 외국인이 학교에 다니는가 했지.”
강석원이 머리 밑에 팔을 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복도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 조지, 라고.”
“제가 대답하던가요?”
“아니.”
그러면 그렇지.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자신은 그 부름에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돌아 봤어.”
마치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처럼 강석원의 시선은 어둠을 더듬었다. 설핏 풀린 입매에 웃음기가 어렸다.
“동양인이더라고. 너무.”
“……, 그게 다예요?”
엄청난 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사건 정도는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것이다.
“그게 다야.”
특별하지도 않고 맥락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게 뭐예요. 너무 동양인이라니.”
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지현은 베개에 고개를 댄 채, 작게 웃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말을 잇지 못했다. 강석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느릿하게 어둠속에 희뿌옇게 드러난 실루엣을 핥았다.
강석원이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기회였다. 도망을 치려면 지금 일어서야 한다. 조지현은 그걸 알면서도 꼼짝하지 않고 누워 강석원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입술을 뗐다.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잊고 있던 열감이 몸에 일었다. 입술을 만지던 손이 치열을 더듬었다. 성스러운 존재를 대하듯 조심스럽고 천천히 손가락이 입속을 탐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인다는 것이 손가락을 가볍게 머금고 말았다. 강석원이 설핏 눈가를 찌푸리며 낮은 탄성을 냈다. 그의 눈이 욕망으로 혼탁하게 흐려졌다. 위험하다.
강석원의 단단한 몸이 조지현을 눌렀다. 입술이 비벼진다. 처음 느끼는 생경한 감각에 조지현은 놀라서 숨을 삼켰다. 그와 동시에 혀가 깊숙이 들어왔다. 벌리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는 내밀한 공간이 처음 느끼는 이물감이었다. 의지를 가진 듯한 살덩이가 입안을 핥았다. 몸이 오싹 떨렸다.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머리로 결정하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강석원의 손이 조지현의 뒷머리를 받쳤다. 그의 손바닥이 뜨거웠다. 입을 범하는 혀도 뜨거웠고, 허벅지를 누르는 무릎조차 뜨거웠다. 목구멍으로 타액이 흘러들어왔다. 열기가 몸속으로 퍼져나갔다.
“아…….”
벌어진 입술 틈으로 흐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단단한 사내의 표정이 작은 신음에 그대로 무너졌다.
커다란 몸이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조지현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고 벌어진 틈으로 제 샅을 밀어 붙였다. 얇은 옷 사이로 남자의 욕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살덩이가 맞닿았다. 조지현은 그제야 자신의 흥분을 인식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강석원의 몸을 밀어낸 후였다. 어이없을 만큼 강석원은 쉽게 밀려났다.
“저는…….”
강석원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망칠 수 있었다. 얼마든지 거절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비겁하게 거절할 필요는 없던 것이다.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머리 좀 식히고 올게.”
강석원이 옷을 걸치며 말했다. 자신이 비겁함을 곱씹으며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조지현.”
신발을 신던 강석원이 문득 그를 불렀다.
“네?”
심장이 퍼덕거렸다. 자신도 흥분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다. 무너지듯 자신에게 달려들던 강석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아팠다. 두려웠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직시했다.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낸 그의 시선은 늘 단조로울 만큼 정직했다.
“맞아. 고작 그런 이유였어.”
“…….”
“잘 자.”
현관문이 닫혔다.
강석원은 그날 돌아오지 않았다.
“조지. 우리 수학여행 다녀오는 동안 뭐 했어? 존나 심심했지?”
최기열이 조지현의 앞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조지현은 식판에 남은 밥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녁을 못 먹을 테니 점심만큼은 남기지 않고 먹어둬야 하는 터다.
“뭐했냐? 학교에서?”
“공부했어.”
“공부만 했어?”
알고 묻는 게 아닐 텐데,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조지현은 속이 울렁거렸다.
“그럼 달리 할 게 뭐 있어.”
“존나 재미없는 녀석.”
그렇게 말하면서도 최기열은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야, 내가 재미있는 거 보여줄까?”
대답을 하기도 전에 최기열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여학생이 교복 자락을 슬쩍 풀어 젖힌 사진을 내밀며 그가 히죽 웃었다.
“어때?”
“뭐가.”
조지현은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대답했다.
“죽이지 않냐? 이번에 수학여행 가서 만난 애들인데 지들이 먼저 이런 사진 보내더라. 졸라 어이없지?”
“그러게.”
“더 있는데 보여줄까?”
최기열의 얕은 수가 빤히 보였다. 이런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굴며 제 우월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니. 안 봐도 돼.”
조지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왜? 진짜 끝내주는 사진은 아직 안 나왔는데?”
여자가 가슴을 거의 드러낸 사진을 보이며 최기열이 득의만면하다. 조지현은 눈길도 주지 않고 물을 마셨다. 최기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넌 시발 사람이…….”
조지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최기열이 죄지은 것 마냥 얼굴이 시뻘게진다. 그러고는 괜한 화풀이를 하듯 테이블을 걷어찬다. 식판에 놓인 젓가락 한 짝이 떨어졌다. 최기열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그러나 미안하다든가 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조지현이 저만치 떨어진 젓가락을 확인하고 허리를 굽혔다. 손을 뻗기 전에 지나가던 사람이 먼저 젓가락을 집어주었다.
“감사…….”
끝말을 잇기 전에 젓가락이 테이블에 놓인다. 멀어지는 남자의 등을 조지현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누군데?”
최기열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씹, 하고 욕을 삼켰다. 그러고는 재빨리 조지현에게 눈짓한다.
“못 본 척해.”
“…….”
조지현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날 이후로 강석원은 조지현에게 알은척도 하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는 것이다.
화가 난 것일까. 그렇다면 사과해야 하는데. 아니, 적어도 며칠간 머물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 한다. 사실 아직 열쇠조차 돌려주지 못했다.
“야, 조지! 내말 듣고 있어?”
최기열이 조지현의 얼굴 앞에 손을 흔들면서 외쳤다.
“무슨 말.”
“이번 주말에 뭐하냐고. 여자애들이 만나자는데, 어때?”
“마음대로 해.”
“정말?”
최기열이 눈을 번쩍 빛냈다. 조지현은 저 멀리서 자리를 잡고 앉은 강석원의 등을 바라보았다.
“진짜 나올 거야? 뭐야. 너도 그런 사진 보니까 꼴리냐?”
“내가 거길 왜 가.”
조지현이 반쯤 눈을 내리감고 대답했다.
“뭐? 방금…….”
“네가 나가든가 말든가 네 맘대로 하라는 얘기였어.”
최기열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너 혹시 고자 아니야?”
최기열은 제 분노를 공격적으로 표출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조지현이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최기열은 비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여자 사진 봐도 꿈쩍 안 하는 거 보면 말이야. 아예 그런 쪽으로 관심도 없는 거 아니냐고.”
조지현은 숟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원래도 음식을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지만 식욕이 싹 사라진 것이다. 조지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바싹 약이 오른 최기열이 버럭 소리 질렀다.
“좆까, 씹냐? 이 새끼야.”
“…….”
“시팔, 너 혹시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야?”
주변에 앉은 학생들 여럿이 이쪽을 힐끔거린다.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강석원의 등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 거리면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속이 좋지 않다.
“말해 보라고.”
최기열이 조지현의 팔을 움켜쥐었다.
“내가 그렇게 보여?”
조지현이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최기열이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다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님 아닌 거지. 시발.”
조지현은 식판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강석원은 끝까지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식은땀이 흘렀다. 귓가가 윙윙거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그날의 일이 매일 밤 악몽을 대신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였다.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눈을 감으면 서늘하고 단단한 강석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해하지 못할 열기가 피에 스민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복도 창가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누군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조지현, 이라고 했나.”
조지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수학여행 때, 교실에 몇 번 들어와서 안내 사항을 전달하던 1학년 미술 선생이다. 인상이 흐릿한 사람이었다. 그 안내 사항이라는 내용도 들으나마나한 것들이었다. 네, 조지현은 짧게 대답했다.
“아직 확인서 안 준 거 같은데.”
“무슨 확인서요?”
“수학여행 불참에 대한 학부모 확인서. 어제까지 제출해야 한다고 했는데, 못 들었어?”
조지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기억에 없는 내용이다. 미술 선생이 이런, 하고 혀를 찬다.
“오늘까지는 내야 하는데. 너만 안 냈어.”
“내일 가져오면 안 되나요?”
“오늘까지 서류 제출해야 하는데.”
미술 선생이 곤란하다는 듯이 웃는다. 조지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인 9시까지는,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오늘까지 제출 못 해?”
“……네. 죄송합니다.”
“그럼 부모님께 전화해서 구두로 확인받아도 되는데.”
조지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수학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들통 나면 자연히 수업료 문제까지 나오게 된다.
“뭐야. 너 이 녀석. 설마 너 수학여행비 꿀꺽하고 말씀 안 드린 거 아니야?”
미술 선생이 놀리는 투로 말했다. 조지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릿속이 까마득했다.
“안 되겠네. 모범생인 줄 알았더니.”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오늘까지 보고는 해야 하는데. 부모님께 연락드릴 수밖에 없겠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식은땀이 났다. 어머니는 학원을 맹신했다. 비싼 학원이 일류 대학으로 향하는 티켓을 보장해준다고 믿었다. 자신이 한 거짓말을 어머니가 알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일단 그럼 수업 끝나고 1학년 교무실로 와라.”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 아직 안 했거든. 녀석.”
미술 선생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조지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선생의 손이 떨어져 나가길 기다렸다.
“그럼 이따가 보자.”
조지현은 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미술 선생이 사라지고 나자 조지현은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창가 난간에 기대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날의 일 때문에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못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정신 차리자. 어차피 끝난 일이다. 자신의 거부를 강석원이 모를 리 없다. 그리고 그는 그 거부를 받아들였다. 끝난 문제였다. 끝내야만 했다.
교실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다.
“…….”
복도 반대편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강석원이다.
포식자를 앞둔 것처럼 온몸의 감각이 일제히 곤두선다. 바지 주머니에 든 열쇠가 손에 닿았다. 손끝에 전기가 오른 것처럼 찌릿했다.
건네야 한다.
사과든, 감사인사든, 아님 열쇠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과를 먼저 해야 하는 건가.
생각이 뒤엉켰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강석원이 서 있었다. 조지현이 어렵게 입을 떼었다.
“선배…….”
강석원이 말없이 조지현을 응시했다.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입술에 닿던 뜨거운 살덩이의 감각이, 허벅지를 쓸어내리던 손의 감각이, 샅에 비벼지던 단단한 성기의 감촉이, 선연히 일어났다.
벌레가 온몸을 파고드는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괜찮아.”
낮은 목소리가 건네졌다. 조지현은 고개를 들었다.
그 말뿐이었다. 강석원은 이미 멀어졌다. 다시 그를 불러 세울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조지현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수업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가방을 챙겼다.
“조지, 학원 가냐?”
최기열이 말을 걸었다. 아까 식당에서 그런 식으로 군 것에 대해, 제 딴에 사과하려는 모양이었다. 조지현은 응, 하고 짧게 대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 요즘 잘 안 보이던데? 어느 강의실에서 듣냐?”
조지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했다.
“너랑 다른 강의실.”
“그래? 이상하다.”
최기열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조지현은 그대로 교실을 나왔다. 1학년 교무실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확인서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부모님께 전화를 드려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 지현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미술 선생이 교무실 문을 열고 나온다.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확인서를 내가 차에 뒀거든? 일단 거기로 가자.”
“네? 알겠습니다.”
조지현은 묵묵히 미술 선생을 따라 걸었다.
“너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전교 5등 밖으로 벗어난 적이 없다며.”
“네.”
“아주 착하고 성실한 학생이라고 다들 그러시던데. 이러는 거 아시나 몰라?”
뭐라고 변명을 늘어놓을 생각도 없었기에 조지현은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그러게 죄송할 짓을 왜 했어.”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조지현은 점점 상대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그럼 수학여행 기간 동안 집에 안 들어간 거야?”
“…….”
“생긴 거답지 않게 아주 대담하네.”
미술 선생이 웃으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조지현은 한걸음 그에게서 물러섰다.
“아, 담배 연기 싫어해? 쏘리.”
그가 담배를 꺾어 바로 던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담배를 보며 조지현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주차장은 저쪽 아닌가요?”
“응, 거긴 정교사만 주차하라고 하더라고. 난 기간제라서 저기.”
미술 선생이 공터 방향을 가리켰다. 눈이 마주쳐서 무슨 말이든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불편하시겠어요.”
“비오는 날만 빼면 뭐 그럭저럭. 오히려 다른 차들이 없어서 주차하기 편하다는 장점도 있고. 뭐, 생각하기 나름 아니겠어?”
흐릿한 인상에 비해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미술 선생의 차는 공터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조지현은 차 앞에 서서 미술 선생이 확인서를 가지고 나오길 기다렸다. 뒷좌석에서 서류를 뒤적거리며 찾던 그가 종이를 들고 싱긋 웃었다.
“찾았다. 여기 사인만 하면 될 것 같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잠깐 얘기 좀 할까?”
“…….”
“왜 수학여행을 빠졌는지는 들어봐야지, 선생으로서. 합당한 이유면 대충 사인하고 주임 선생님께 드리도록 할게.”
미술 선생이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조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수석에 앉았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미술 선생이 들어왔다.
“그래. 수학여행 기간 동안 그럼 뭐하고 지낸 거야?”
“학교에 와서 공부하고, 끝나면 도서관에서 공부했습니다.”
“밤에는? 잠은 어디서 자고?”
이유를 묻지 않는다고 해놓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거슬리긴 했지만 조지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친구 집에서 잤습니다.”
“친구? 친구 누구? 다 수학여행간 거 아니야?”
잠시 고민하다가 다른 학교 친구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강석원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흐음, 그래. 다른 학교 친구. 근데 그 친구는 부모님 안 계시나? 상대방 부모 허락도 없이 아들 친구를 며칠씩 재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돈은?”
“네?”
“수학여행비 받았잖아. 그건 어쨌어?”
미술 선생의 눈이 웃고 있다. 걱정을 한다거나 훈계를 하려는 투가 아니었다. 시종일관 놀리는 듯한 태도에 조지현은 당혹스러웠다.
“그건, ……안 받았습니다.”
“에이. 거짓말을 하려면 그럴듯하게 해야지.”
미술 선생이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차안이 금세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조지현이 작게 기침하자 미술 선생이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내 건넸다.
“감사……, 합니다.”
파란색 바탕에 타이포그래피.
등덜미가 오싹했다. 그날 받은 음료수였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가고 싶었다.
조지현의 시선이 차문에 닿는 순간 찰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지현이 너 돈 필요하지?”
“네?”
“돈 필요해서 수학여행비도 빼돌리고 그런 거잖아.”
“아니요. 전 그런 게…….”
“돈 필요하면 선생님이 줄게.”
조지현은 차문을 잡고 흔들었지만 꼼짝하지도 않았다. 옆에서 뻗어온 손이 조지현의 팔을 붙들었다.
“솔직히 너 이런 거 처음 아니지?”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문 열어주세요.”
“딱 보면 알아. 너 같은 애는 남자 미치게 하는 그런 타입이거든.”
조지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걸 본 남자가 제 입술을 핥았다.
“너 사람 볼 때 어떤 표정인지 알아? 따먹어 달라는 얼굴이야.”
“놔, 놔주세요.”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꼼짝하지도 않았다. 조지현은 어떻게든 나가려고 발버둥 쳤다.
“나가기만 해봐. 너 수학여행 안 가고 딴짓한 거 부모님께 바로 전화 드릴 테니까. 학생부 찾아서 전화번호도 다 따놨다고.”
그가 느물거리고 웃으며 제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가만히 있어. 힘 뺄 필요 없잖아. 응?”
손이 다리 사이를 주물렀다. 역겨웠다. 조지현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남자의 입술이 조지현의 목덜미에 닿았다. 뿌리치고 도망가야 하는데 숨을 쉴 수 없었다.
“하아, 우리 학교에서 니 생각하면서 딸치는 새끼들이 수십 명은 있을 거야. 안 그래? 이미 몇 번 당했지? 응? 익숙할 거 아니야. 아다 아니지?”
더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지현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미술 선생이 제 바지 지퍼를 내리고는 조지현의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빨아 봐. 응? 선생님 자지 잘 빨아주면 용돈도 줄게.”
조지현이 필사적으로 그를 밀어냈지만 역부족이었다. 머리채를 움켜쥐고 그가 조지현을 제 다리 사이에 끌어당겼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수백, 수천 마리의 벌레가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누군가 목줄기를 있는 힘껏 쥐고 짜부라트리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제발, 어떻게든, 뭐라도, ……제발.
조지현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휘저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피가 흘렀다. 미술 선생이 머리통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차 유리가 와장창 박살났다. 조각난 유리가 미술 선생의 얼굴에 박혔다. 그러나 비명을 내지를 틈도 없었다. 부서진 유리를 뚫고 뻗어온 손이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그대로 운전대에 내리찍었다.
퍽. 퍽.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으깨진 상처에서 터진 피가 조지현의 하얀 얼굴로 튀었다.
“무, 무슨…….”
커다란 손이 잠겨있던 차문을 열고 미술 선생을 끌어냈다. 교복이 보였다. 조지현은 그제야 밖에 선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으악, 너, 뭐야, 악……!”
코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석원은 말없이 남자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짓밟는다, 는 표현 외에는 쓸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얼굴이건 몸통이건 보이는 대로 걷어차고 짓이겼다. 거리낌도 망설임도 없었다. 타고난 잔인함이었다. 저건 꾸며내거나 연습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강석원에 대한 무성한 소문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제바, 사, 사려…….”
이가 부러진 미술 선생은 살려달라는 말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그의 바지는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지린내가 진동했다. 이대로는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제 지위나 나이를 앞세워 권위에 호소할 시간조차 없었다. 압도적인 힘의 우위였다.
강석원이 허리를 천천히 굽혀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손끝 하나라도 대봐.”
나직하고 조용한 음성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미술 선생이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강석원이 그의 머리를 바닥에 강하게 내리찍었다. 약을 뿌린 바퀴벌레처럼 남자는 사지를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강석원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그가 조지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다. 강석원은 말없이 앞서 걸었다. 유리 파편이 박힌 강석원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한참을 걷다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간 후에야, 그는 손을 놓아주었다. 가느다란 조지현의 손목에 각인을 새긴 것처럼 손자국이 남았다.
“다친 데는?”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손에 닿았다. 부러진 손톱을 확인한 그의 턱이 딱딱하게 굳는다. 강석원의 무심한 얼굴에 서늘한 분노가 스민다.
“괜찮아요. 이건 제가 그런 거라…….”
강석원이 가방을 내려놓고 복싱 밴디지를 꺼냈다. 손끝을 잡고 그는 붕대로 빠르게 상처를 감아주었다.
“병원 가봐.”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끝이 닿았던 부분이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저릿저릿하다.
강석원이 손을 뻗었다. 저도 모르게 조지현은 숨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잠깐만.”
강석원이 소맷자락으로 조지현의 얼굴에 튄 피를 닦아주었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보석을 닦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강석원은 꼼꼼하게 핏자국을 닦아냈다.
조지현은 눈을 떴다. 강석원의 열중한 얼굴이 보인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어떻게…….”
침착해지려고 노력해도 묻고 있는 목소리 끝이 떨렸다. 강석원이 그 순간 나타나지 않았다면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소문이 안 좋은 사람이야. 전에 있던 학교에서도 사고 쳐서 쫓겨났다고 했어.”
복도에 서서 얘기를 하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조지현은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그러다 강석원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님 손이…….”
강석원은 무심한 얼굴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하고 그가 손을 두어 번 털어냈다. 파편 몇 개가 발치로 떨어진다. 조지현은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강석원은 물끄러미 손수건을 바라보다가 받아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피 닦으셔야 할 거 같은데요.”
“더럽히고 싶지 않아.”
가슴이 지끈거렸다. 아무것도 아닌 손수건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대단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대하는 남자의 말에 뜨끈한 통증이 퍼졌다.
울컥했다. 대체 내가 뭐라도 된다고.
잔인한 남자였다. 그럴 상황에 처한다면 사람의 목숨 따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꺾어버릴 사람이었다. 잔인함 속에 도사리는 다정함이 오롯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위험했다.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집에 데려다 줄까?”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에서 시간을 때우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강석원이 가만히 서서 조지현을 지켜보았다.
조지현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시선을 이해했다.
그는 지켜보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로 괜찮은지.
두 번이나 그의 앞에서 공황발작을 보였다.
“괜찮아요. 정말로.”
차안에서는 죽을 것 같았는데 강석원이 손을 잡아 끌어준 순간부터, 숨을 쉴 수 있었다. 강석원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말없이 조지현을 지켜보았다.
그의 조심스러운 시선이 닿는 곳에, 열이 번졌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가 뜨끈했다.
“핸드폰 있어?”
강석원이 문득 묻는다. 조지현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강석원이 가방을 열고 펜과 종이를 꺼냈다. 뭔가를 적어 내려가더니 그가 한 번 접은 종이를 내밀었다.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언제든지.”
언제든지, 라는 말이 갈급증을 일으킨다. 작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조지현은 제 주머니에 든 열쇠를 떠올렸다. 건네줘야 한다. 그리고 그날의 일을 사과해야 한다. 그러면 끝낼 수 있다.
“갈게.”
강석원이 가방을 들고 걸어갔다. 주머니에 든 열쇠를 움켜쥔 채로, 조지현은 강석원의 등을 바라보았다.
강석원의 각인이 남은 손목에 열이 올랐다.
“지현이 왔니?”
“네.”
조지현은 후다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피가 튄 교복 상의를 세면대에서 빨긴 했지만, 혹시나 해서였다.
옷을 갈아입고 교복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방문 고리가 덜컥덜컥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는 거야? 문 잠그고?”
방문을 열어주자 어머니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오면 바로 인사해야지. 문부터 걸어 잠그고,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죄송합니다. 옷 갈아입으려고 그랬어요. 땀이 많이 나서요.”
어머니가 미심쩍다는 눈으로 아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교복 셔츠를 든 조지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손은 왜 그래?”
“넘어져서 좀 까졌어요.”
“필기는 할 수 있어?”
“네. 전혀 상관없어요.”
어머니의 얼굴에 안도가 스친다.
“오늘 수업은 어땠니? 새로 온 특강 선생님은 어때?”
“잘 가르치세요.”
“다다음 주에 모의고사 본다며. 공부는 잘 되고?”
“네.”
“그래. 그럼 복습이랑 예습 좀 하다가 자렴. 커피 타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열심히 해야 해. 엄마는 아들만 믿는다. 알지?”
가슴이 답답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욕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방문을 얼른 닫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상에 앉았다. 영어 문제집을 펼치고 나서야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가 아프다.
책상에 가만히 고개를 댔다. 문득 주머니를 뒤져 강석원이 준 종이를 꺼내 펼쳤다. 숫자만 나열된 쪽지였다.
조지현은 속으로 숫자를 읽어 보았다. 공 일 공…….
열한 개의 숫자를 차례대로 읽고 나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종이를 다시 접어서 지갑 안에 끼워 넣었다.
두통이 한결 가셨다.
목에 서늘한 것이 닿았다. 어깨를 움츠리며 피하려 했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서늘한 감촉이 천천히 목을 감싸 쥐었다. 숨을 내쉬려는 순간, 단단한 힘이 목을 옥죄었다. 죽어야 해. 네가 먼저 죽어야 내가 뭘 해도 할 수 있어. 네가 있으니까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그러니까 네가, 네가……!
저주를 퍼부으며 목을 조르던 손이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축축한 손이 피부 위를 더듬는다. 커다란 달팽이가 궤적을 그리며 지나가듯 축축한 물기가 남는다. 소름이 돋는다. 죽을 수 있다는 공포와는 또 다른 공포가 몸을 덮는다.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아?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축축한 손이 몸을 더듬는다. 구역질이 올라오며 위가 뒤틀렸다. 몸에 올라탄 남자를 뿌리치려고 손을 휘젓지만 소용없었다. 흐릿한 형체가 몸을 짓눌렀다.
사람 미치게 하는 얼굴이야. 너는 사람을 미치게 할 거야. 그리고 너도 미칠 거야.
“헉…….”
몸을 일으키고도 한참 동안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으로 시트가 흠뻑 젖었다. 오한이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머리가 무거웠다.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눈을 감아도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어둠에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부스러져 마모되어 간다. 이대로는 언젠가 미치고 말 것이다.
조지현은 시트를 끌어안고 좋은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햇살. 바람. 빳빳한 새 책에서 나는 냄새. 향긋한 섬유유연제의 향.
강석원의 등이 떠올랐다. 좁은 방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던 너른 등이.
얼마 되지 않은 그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미술 선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교통사고를 당해 휴직계를 냈다고 했다. 이유야 어떻든 상관없었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무엇보다 강석원에게 피해가 없어 다행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3학년 교실로 찾아가려 했지만, 자신은 그가 몇 반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지나가는 3학년에게 물어 강석원의 교실로 찾아갔다. 그의 손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강석원은 여상하게 한마디를 내던졌다.
괜찮아.
그 목소리가, 낮은 울림이, 서늘한 온도가, 잊히지 않는다.
목소리가 듣고 싶다. 불현듯 거세게 열망에 사로잡혔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 들어왔다. 조지현은 전화기의 다이얼패드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걸어본 적 없지만 이미 번호는 외우고 있었다. 악몽을 꾸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핸드폰 번호를 적은 종이를 펴서 읽었다. 한 번 읽고 외운 번호였지만 그냥 그 숫자를 바라보는 게 기분 좋았다. 거칠지만 단정한 글자가 곧, 그와 같았다.
공. 일. 공…….
조지현은 천천히 버튼을 눌렀다. 열한 자리의 숫자를 누르자 신호음이 이어졌다. 심장이 뛰었다. 벌써 자괴감이 밀려왔다. 늦은 시간이다.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차라리 그냥 받지 않았으면…….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나른한 음성이 들려왔다.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밤중에 미안하다고, 잠을 깨워서 죄송하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여보세요.」
다시 한 번, 강석원의 목소리가 밀려든다. 조지현은 가만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강석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고, 전화를 끊지도 않았다. 숨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았다. 온기가 등에 닿는 듯했다. 허물어지던 정신을 규칙적인 숨소리가 다독였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조지현은 자리에 누웠다. 귓가에 닿는 숨소리가 끌어안긴 그날 밤과 같았다. 숨을 쉴 수 있었다.
위로받은 어둠이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