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눈을 떴다. 사위가 어둠이다. 식은땀이 흘러 한기가 스몄다. 시트를 몸에 두르고 숨을 골랐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다. 협탁 서랍에서 약통을 찾아 약을 삼켰다.
서서히 머리에 피가 돌자 기억이 돌아온다. 현관 앞에서 강석원을 마주치고, 그 뒤에 발작을 일으켰다. 어떻게든 문을 열었는데 그러고 나서……, ……. 자신의 옷이 갈아입혀 진 상태임을 알아챘다. 침대에서 뛰어내려 거실로 나갔다.
“선……!”
차가운 공기가 감도는 공간은 사람의 온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조지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당연한 일이다. 강석원이 지금까지 자신을 기다려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소파에 앉았다. 손바닥으로 목을 쓸어내렸다. 자신의 목을 조르던 강석원의 섬뜩한 눈빛이 떠올랐다. 조롱하듯 입을 맞추고 성기를 주무르던 남자는 이전에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변한 게 아니었다. 그게 그의 본모습이다. 자신에게는 드러내지 않았던 날것의 잔인함을 고스란히 보여준 것뿐이다.
조지현은 다리를 끌어안았다. 강석원의 본성을 들쑤신 것은 자신이다. 그의 손을 놓아버린 것도, 등지고 떠난 것도, 결국 모두 자신의 선택이다.
모두를 위한 일이었다고 자위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럴듯한 이유로 비겁함을 포장했을 뿐이다. 포장지를 벗겨내면 이기적인 열여덟 소년만이 오롯이 남는다.
잘 지냈어?
그렇게 묻던 강석원이 어떤 표정이었던가.
조지현은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고요함을 가르고 날카로운 전화벨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발작을 일으키면 강석원은 옆에서 시간을 두고 지켜보거나 전화를 걸곤 했다. 아닐 것이다. 당연히 아니다. 집안으로 데려와 눕히고 옷을 갈아입혀 준 것만으로도, 그는 그가 가진 모든 친절을 베푼 셈이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너무 늦게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조지현이 자리에 앉자 여자가 단아한 웃음을 짓는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어요. 이 근처에 계신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그 이야기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조지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보란 듯이 비싼 동네,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를 마련해둔 어머니의 저의를 이미 알고 있었던 터다.
“잠시 지내는 겁니다.”
웨이터가 다가오자 조지현은 차가운 커피를 주문했다. 그러고는 여자를 돌아보고 묻는다.
“차가 식은 거 같은데, 다른 거 주문하시겠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조금 이따가 일어날 건데요, 뭐.”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이 아니고 지현 씨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조지현이 이세영을 바라보았다. 병색이 완연한 그녀의 모습은 그 나이대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다. 찻잔을 들고 있기도 벅차 보일 정도로 가느다란 손목이었다.
“말씀하세요.”
조지현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 내일 수술하러 미국으로 가요.”
“…….”
“이번이 열세 번째 수술이에요. 일본에서 있다가 지현 씨 한국 들어왔다는 말 듣고, 겨우 시간 내서 들어온 거예요.”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알아요. 지현 씨가 알고서 귀국한 거란 생각은 안 했어요.”
이세영이 나긋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선도 다 부모님이 등 떠밀어서 온 자리였잖아요.”
“죄송합니다.”
조지현의 사과를 듣고도 그녀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사실 저도 그랬어요. 다 죽어가는 여자 만나러 온 사람이 누구인가 궁금하기도 했고요. 당연히 재산 노리고 온 놈팡이인 줄 알았죠.”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할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랴부랴 한국에 들어왔을 때, 그를 기다리던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여자와의 선 자리였다. 바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넌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냐는 어머니의 힐난이 쏟아졌다. 어머니와는 애초에 논리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알기에 조지현은 만나고 오겠다고 대답했다. 직접 가서 얼굴을 마주 보고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이세영을 만났다.
어마어마한 자산가의 무남독녀 외동딸. 희귀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를 시한부 인생.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일까. 조지현은 죽는 순간까지 어머니를 이해하는 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파리한 얼굴로 자신을 보며 웃는 이세영에게 차마 무례한 언행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바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것으로 제 본분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이세영에게서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지현 씨 만나기 전에 몇 번 선 봤었거든요. 다들 제 말이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것처럼 굴더라고요. 뭐, 몇 년만 살면 그 많은 재산으로 정말 별을 살 수도 있을 테니까요.”
조지현은 가슴이 아팠다. 그녀는 본인의 죽음을 누구보다 가장 밀접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지현 씨 같은 분은 처음이었어요. 눈도 안 마주치고,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처음에는 오기가 나더라고요.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웨이터가 조지현이 주문한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조지현이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이세영이 눈을 구부리며 가늘게 미소 지었다.
“왠지 슬프더라고요.”
“제가요?”
“아니요. 내가.”
“저 때문에 기분 상하셨던 거라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게 아니라 저렇게 예쁜 남자를 꼬셔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하다니. 아, 정말 아깝다, 싶어서요.”
그녀의 농담에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조지현은 가만히 눈을 내리감은 후에 죄송합니다, 하고 사과했다.
“뭐가 죄송해요. 본인이 예쁘다고 사과하는 거예요?”
이세영이 해사하게 웃었다. 미국에서 몇 번 통화를 했다. 조지현은 그녀를 좋아하게 됐다. 이성적인 호감이 아니라, 이세영이란 인간 자체에 대한 호감이었다. 삶 전반에 대한 의연함을 존경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연애감정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조지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죄송합니다, 하고 말했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온 이유는 이세영 때문이었다. 직접 만나서 거절해야 했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최소한의 예의였다. 친구의 결혼식도 겹쳐있던 터라 이삼 주가량 지내다 갈 생각이었다. 어머니에게도 직접 만나 거절했다는 뜻을 밝혔다. 웬일로 어머니는 알겠다고 정상인다운 반응을 내비쳤다. 이세영 씨 쪽에도 연락해두고 지낼 곳도 마련해두겠다고 했다.
한국으로 들어와 이세영에게 연락했을 때, 그녀는 부재중이었다. 급히 일이 생겨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대답만 비서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이세영이 수술을 받으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위험한 수술인가요?”
“위험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사는 게 그렇죠. 당장 내일 내가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그녀의 시선이 창가에 머문다. 유난히 붉은 달이 구름 끝에 걸려있다.
“며칠 뒤에 큰 혜성이 지구 방향으로 온다는 얘기 들으셨어요?”
그녀가 차를 마시며 묻는다.
“네.”
“뉴스에서 온통 그 얘기더라고요. 아주 아슬아슬한 차이로 지구를 비켜난대요. 만약 그게 지구로 떨어지면 북반구의 절반이 날아간다고 하더라고요. 아슬아슬한 차이예요. 삶과 죽음을 가르는 건.”
“그렇군요.”
“그러니 살 수 있다고 믿어야죠.”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지현 씨는 지구가 내일 당장 멸망한다면 뭐하실 거예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을 타입은 아니신 거 같은데. 그런 생각해본 적 있긴 해요?”
이세영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조지현은 무덥던 여름날을 떠올렸다. 아득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갈급증이 일어 물을 삼켰다.
“제주도에…….”
조지현이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네?”
“제주도에 갈 겁니다.”
이세영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치떴다.
“제주도요? 거기에 누구 살아요?”
“아니요.”
“그런데 웬 제주도요?”
“가본 적 없어서요.”
둘 다.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비 오는 바다를 보며 그런 비슷한 말을 나누었다. 잠 못 들던 비좁은 방에 누워, 내도록 그리던 섬이다.
그때는 그곳이 가장 멀리 느껴졌다. 멀리 떠나고 싶었다.
둘이.
“가끔 보면 엉뚱해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지현 씨는.”
“그런가요.”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조지현은 흐릿하게 웃었다.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이 시간에 돌아다니면 안 되거든요.”
“저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죄송합니다.”
“미국에서 돌아와서 다음번에 다시 만나면, 제주도에서 뵀으면 좋겠네요. 지현 씨 시간이 괜찮으시면요.”
이세영이 손을 내밀었다. 앙상한 가죽만 남은 그녀의 손을 조지현은 가만히 맞잡았다.
수술대에서 다시 눈을 뜰 확률이 20%가량이라고 말하던 그녀에게 이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느 쪽이 더 잔인한 것일까. 아들을 병든 여인에게 팔아치우지 못해 안달이 난 어머니와 애매한 친절로 진실을 숨기는 자신.
언제까지 동정심으로 사람을 만날 수는 없다. 그녀가 미국에서 돌아온다면, 전화로라도 말을 해야 한다. 혹은, 그러지 못할 수도 있지만.
당장 내가 내일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머리를 맴도는 그녀의 말에 입맛이 지독히 쓰다.
로비를 지나가는데 데스크에 있던 관리 직원이 조지현을 불러 세웠다.
“실례지만 혹시 4802호 입주민 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아까 올라갔었는데 댁에 안 계시는 것 같아서요.”
조지현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가요?”
“친구분께서 전화를 주셔서요. 혹시 올라가 봐 줄 수 있느냐고.”
“네?”
“집에 계신지 확인만 해달라고 해서요. 하하, 두 번이나 더 전화가 와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지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연락할 친구라면 김선우뿐이다.
“알겠습니다.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관리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자 가장 왼쪽에 있는 등에 불이 들어온다.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48층 버튼을 눌렀다. 빠른 속도로 바뀌는 숫자를 바라보던 조지현은 문득, 입술을 깨물었다.
김선우가 아니다. 핸드폰 번호를 아는 그가 자신이 집에 있는지 확인을 부탁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눈앞이 아렸다. 목을 조를 만큼 미워하면서, 곁에 머물지도 못하면서, 그런데도 잊지 못하는 서로가.
눈을 감는 것만으로 벅차오르는 그날들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저 핸드폰 사면 안 될까요.”
식사를 하던 어머니의 눈초리가 대번에 사나워진다.
“그게 무슨 소리니.”
“그래. 너도 많이 불편하지. 친구들하고 연락도 해야 할 텐데. 아빠가 한번 알아볼게.”
“알아보긴 뭘 알아봐요. 친구랑 연락할 일이 뭐가 그렇게 많다고. 친구는 대학 가서 사귀어도 돼. 너 고2야. 정신 못 차리고 다른 애들 하는 것처럼 하면 금방 고3되고 성적 떨어져.”
조지현은 물을 마셨다. 괜한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애들도 다 갖고 있을 텐데 지현이만 없으면 좀 그렇잖아.”
“그럼 당신은? 다른 남편들은 다 벌어다주는 돈 못 벌어오는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다음 달에 착수하는 일만 잘되면 돈 금방 들어와. 이번에는 진짜라구.”
“그놈의 진짜는 내가 몇 년째 들었는지 알아!”
조지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잘 먹었습니다.”
“아니, 반공기도 더 남았는데 더 먹지 않고.”
아버지가 안타까운 얼굴을 한다. 어머니는 제 뜻을 거스른 아들을 벌주기라도 하려는 듯이 밥공기와 반찬을 들고 모두 개수대에 쏟아버렸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망치듯 현관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길, 햇살이 뜨거웠다. 처음 하복을 입는 날이었다. 작년보다 이 주가량 일찍 하복을 입게 되었다. 전례에 없는 폭염이 계속 될 거라고 뉴스에서는 떠들어 댔다.
강석원과의 통화는 간간이 이어졌다. 악몽을 꾸고 깬 날에는 어김없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화가 오고갈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었다. 전화기 너머의 숨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 때도 있었다.
학교나 학교 밖에서 따로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강석원이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처음에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저 정도의 거구는 흔치 않다. 교복을 입은 그를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무더운 초여름인데도 그의 주변의 온도만 몇 도는 낮아 보일 정도였다.
눈이 마주쳤다. 강석원은 따로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어제도 통화를 하다 잠들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낯선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천천히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넸다. 강석원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광판에 곧 버스가 도착한다는 안내 문구가 떴다. 조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말을 건넸다.
“어쩐 일이세요?”
강석원이 버스를 타는 곳은 여기보다 세 정거장 전이었다. 그때 버스가 도착했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버스 앞으로 몰려갔다. 강석원도 걸음을 옮겼다.
“오늘부터 하복이라고 해서.”
거기까지 말한 강석원은 먼저 버스에 탔다. 버스카드를 손에 쥔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듣지 않았지만 그 뒷말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복 입은 모습으로는 처음이었다. 어젯밤 셔츠를 다려놓고 잠들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버스에 오르니 자리가 모두 차 있었다. 조지현은 뒷문 근처에 가서 섰다. 강석원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주머니에서 단어장을 꺼냈다. 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사람이 늘었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버스는 금세 가득 찼다. 처음에는 두 걸음가량 떨어진 거리였는데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로 팔이 스칠 정도로 바짝 붙게 되었다.
stalwart 건장한, stealthy 몰래하는…….
반팔 셔츠여서 맨살이 닿았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차가 움직일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살이 닿았다. 강석원의 시선이 자신의 팔 부근에 머물러 있었다. 긴팔에서 반팔로 바뀐 것뿐인데 발가벗은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단어장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
버스가 덜컹, 하고 기울었다. 기사가 욕설을 퍼부으며 앞차에 대고 삿대질했다.
“괜찮아?”
강석원이 물었다. 조지현은 자세를 바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찜통 같은 더위에도 버스는 에어컨을 켜지 않았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에 시큼한 땀 냄새가 실렸다.
stolid 둔감한, ……. stolid, stolid, stolid.
열 때문인지 머릿속이 엉겨 붙은 듯했다. 한참 동안 같은 페이지만 노려보았다. 수십 번, 같은 단어를 되뇌어도 자극이 뇌세포의 주변으로만 맴도는 것처럼 외워지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서 식은땀이 흘렀다.
삐이, 하는 알림음이 울리고 버스가 정차했다. 뒷문으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조지현도 쫓기듯 버스에서 내렸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숨을 내뱉었다. 강석원도 버스에서 내렸다. 그의 셔츠도 땀으로 젖어 있었다.
“덥네요.”
“그러게.”
정류장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에 나눈 대화는 그게 전부였다. 학교 계단 앞에서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시끄러운 교실로 들어오니 오히려 시끄럽게 쿵쾅거리던 심장이 차분해졌다. 자리에 앉아 단어장을 다시 폈다.
stolid 둔감한.
눈으로 한 번 읽은 후에, 다음 장으로 넘길 수 있었다.
체육관이 공사 중이라 오늘은 운동장에서 수업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모두들 입을 모아 야유했다. 하지만 운동장에 나가자마자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운동장을 누볐다. 체육 선생은 반장에게 알아서 하라는 말을 남기고 시원한 에어컨을 찾아 사라졌다.
조지현은 그늘을 찾아 앉았다. 운동에 소질도 없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책이라도 가지고 나오는 건데, 하며 후회를 곱씹을 무렵 저 멀리 검은색 운동복이 눈에 들어왔다. 설핏 눈가를 찌푸려 얼굴을 확인했다. 강석원이었다. 회색 체육복 때문에 그의 검은색 운동복이 유독 눈에 띄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존재 사이에서 오롯이 혼자 온점을 찍은 듯한 모습이었다. 저 정도 체격이면 시중에 나온 학교 체육복 중 맞는 사이즈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공놀이에는 흥미가 없는지 혼자 벤치에 앉아 있었다.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대척점에 위치한 탓에 강석원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조지현은 가만히 강석원의 행동을 관찰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항상 강석원이 자신을 발견하고 알은체를 해왔던 터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뺨에 닿은 차가운 감촉에 조지현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조오지. 뭐하냐.”
최기열이 음료수를 손에 들고 농을 걸었다. 금세 주변에 그의 패거리가 몰려 앉았다.
“그냥 있어.”
“너 이번 모의고사 전교 1등이더라? 너 요즘 과외하지?”
최기열이 히죽거리며 묻는다.
“그런 거 안 해.”
“학원도 안 나오잖아. 데스크에 물어보니까 너 지난달부터 등록 안 했다고 하던데 야, 과외 좋은 거 있음 같이 받자.”
적당히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최기열이 그때 음료수 캔을 조지현에게 내밀었다.
“마셔.”
“…….”
하필이면.
미술 선생과의 일이 있은 이후로 이 음료수 캔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방금 뽑아 와서 존나 시원해.”
최기열이 조지현의 뺨에 음료수를 갖다 댔다. 조지현이 몸서리를 치며 숨을 삼켰다. 최기열의 표정이 굳었다.
“장난이다, 장난. 시발.”
“나 먼저 들어간다.”
조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에서 키득거리며 최기열 병신 새끼, 하고 그를 놀렸다. 최기열이 열없이 조지현의 뒤를 쫓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최기열이 조지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앉아. 새끼야.”
“…….”
“내가 주는 게 드럽냐? 시발. 니가 그렇게 잘났어?”
최기열이 들고 있던 음료수 캔의 고리를 뜯었다. 그러고는 조지현의 앞으로 내밀었다.
“마셔. 한 방울이라도 남기면 한 방울에 한 대씩 맞을 줄 알아.”
억지였다. 본인도 자신이 억지 부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최기열의 자존심상 그걸 굽힐 리가 없었다. 하지만 조지현도 그걸 받아줄 상황이 아니었다.
“속이 안 좋아서 그래.”
조지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음료의 냄새를 맡자 자신의 몸을 쓸어내리던 남자의 축축한 손이 떠올랐다.
“마시라고!”
최기열이 조지현 입에 음료수를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공이 최기열의 머리통을 맞혔다. 최기열이 흰 눈을 뜨고 누구야, 하고 소리 질렀다. 조지현은 설핏 인상을 찌푸리고 체육복에 쏟아진 음료수를 닦아냈다.
“시팔, 공 던진 새끼 누구냐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주변에 앉은 애들이 일제히 다급하게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사람을 본 순간 최기열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얼굴이 분노와 수치심으로 시뻘겋게 익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최기열이라고 해도 강석원 앞에서는 숨소리도 내지 못했다.
강석원이 말없이 허리를 숙여 농구공을 집어 들었다. 미안하다든가, 실수였다든가 하는 말 따위도 없었다. 그의 발치에 내용물을 꿀렁꿀렁 뱉고 있는 음료수 캔이 닿았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캔이 납작하게 짓밟혔다. 최기열은 제가 짓밟히기라도 한 듯이 새파랗게 질렸다. 강석원이 주는 경고를 최기열은 확실히 느낀 것이다. 그의 연심은 깨닫기도 전에 박살났다.
음료수를 뒤집어쓴 조지현이 미안, 하고 입을 열었다.
“먼저 들어간다.”
달큼한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본관 뒤편에 있는 수도가로 달려갔다. 수도꼭지를 열자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얼굴에 들러붙은 끈적한 음료를 닦아냈다. 목덜미와 머리카락까지 모두 물에 적셨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울렁이던 속이 가라앉았다.
수도꼭지를 잠갔다. 강석원이 서 있었다.
언제 온 걸까.
조지현은 눈을 깜빡였다. 물기가 눈썹에 어려 떨어졌다. 조지현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나 머리카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져 금세 다시 젖고 말았다.
강석원이 입고 있던 운동복 윗도리를 벗었다. 조지현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내며 어제 세탁한 거야, 하고 나직하게 말했다.
강석원의 맨몸이 보였다. 눈 둘 데를 몰라 조지현은 고개를 숙이며 괜찮습니다, 하고 중얼거렸다.
“감기 걸려.”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녹을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이런 정도로는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역시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둘 다 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매미가 폭염에 젖어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다녀왔습니다.”
우산을 현관에 내려놓는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냉랭하고 날카로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조지현.”
소파에 앉아있던 어머니가 이름을 불렀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했다.
“학원 잘 다녀왔니?”
“네.”
“수업은?”
“좋았어요.”
“아참, 오늘 숙현이 아줌마한테 전화 왔었다. 너 하고 있는 과외 있으면 자기 아들이랑 같이 좀 받게 해달라고. 소개비도 두둑이 챙겨준다는 거야. 네가 저번 모의고사에 전교 일 등 했다는 소문을 들었나 봐.”
어머니가 웃었다. 젊은 시절 그녀를 공짜로 학교에 태워다 주겠다고 택시 기사들이 집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는 얘기를 아버지로부터 숱하게 들었다. 세월이 훼손한 신경질적인 아름다움이 그녀의 얼굴에 가느다랗게 남아 있었다.
“개새끼.”
날아드는 유리컵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어머니가 눈을 뒤집고 달려들었다.
“내가 어떻게 마련한 돈인데 그걸 어디다 써! 어! 니까짓 게 감히, 엄마를 속여? 이 개 같은 새끼야.”
강석원에게 자존심을 짓밟힌 최기열이 어떤 비열한 수법을 썼는지, 조지현은 깨달았다. 엉망으로 휘두르는 손에 뺨을 얻어맞았다. 입에 거품을 물 기세로 어머니는 발광하기 시작했다.
“학원비 어디다 썼어! 너! 바른 대로 말해. 학원비 어디다 썼냐고!”
어머니가 옷자락을 쥐고 흔들었다.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안 해? 이 좆같은 새끼야. 너 이러라고 내가 열 달 너 품어서 너를 낳은 줄 알아! 너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됐는데!”
그녀의 목에 핏대가 섰다. 어머니는 아름다운 여자였다. 저를 꼭 닮은 아들을 사랑했지만, 그 아들이 제 아름다움을 빨아먹어 자신이 흉해졌다고 믿는 여자였다. 뒤늦게 달려온 아버지가 어머니를 붙들었다.
“지현아, 얼른 바른대로 말하지 않고 뭐해.”
“……. 죄송합니다.”
학비로 냈다고 하면 내일 당장 학교로 쫓아가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는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부었다. 뼈째 갈아서 개 사료로 줘도 시원찮을 새끼, 지 어미 보지 찢고 나와서 거짓말 하는 더러운 새끼, 돈에 환장한 악마 같은 새끼.
“조지현! 얼른 말해.”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외쳤다. 그 사이에 어머니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손에 들린 가위를 보고 조지현의 몸이 얼어붙었다.
“네 입을 가위로 찢어버릴 거야. 거짓말만 하는 혀를 잘라버릴 거야. 내가 못할 줄 알아!”
그녀가 가위를 휘둘렀다. 아버지가 그녀의 몸을 끌어안고 막았지만 간발의 차였다. 조지현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윗날을 타고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엉겁결에 손으로 가윗날을 붙든 것이다.
“놔! 혀를 잘라버릴 거야. 개새끼야. 다시는 거짓말 못하게, 다 잘라버릴 거라고!”
어머니가 닥치는 대로 가위를 휘둘렀다. 피가 흐르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막아냈다. 섬뜩한 예기가 손가락을 타고 스쳤다.
“죽여 버릴 거야!”
어머니의 눈은 광기에 물들어 있었다. 끔찍한 공포에 손발이 떨렸다. 어떻게 도망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현관까지 쫓아 나온 어머니가 엘리베이터 틈사이로 가윗날을 쑤셔 넣으려 했다. 아버지가 간신히 붙든 틈을 타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밖으로 나와 내달렸다. 당장에라도 어머니에게 머리채를 붙들릴 것 같은 공포가 바싹 그의 뒤를 쫓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자 자신이 우산도 쓰지 않고 신발도 한 짝밖에 신지 못하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손바닥의 고통은 공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지현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끔찍했다. 온몸을 벌레가 파먹고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건네거나, 다가가지 않았다.
비에 젖어 날카로운 한기가 스몄다.
경찰서로 간다 해도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이미 수차례 겪은 일이다. 부모가 있는 미성년자는 갈 곳이 명확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 …….
조지현의 눈에 공중전화가 들어왔다. 주머니를 뒤졌다. 백 원짜리 하나가 있었다. 절뚝거리며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수화기를 들었다.
피가 발 아래로 뚝뚝 떨어져 고였다.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밖에 없었다.
받지 마. 제발, 받지 마세요. 제발, ……제발, 받아주세요.
조지현은 눈을 감으며 기도했다.
“조지현!”
강석원이 우산을 집어 던지고 달려왔다. 그의 얼굴이 대번에 얼어붙었다. 공중전화 박스에 쭈그려 앉아 있던 조지현이 고개를 들었다. 교복이 온통 피투성이였다.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끝이 울음으로 뭉개졌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밖에 없어서…….”
“…….”
“선배님 전화번호밖에 외우는 게 없어서, ……, 정말 죄송합니다.”
조지현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강석원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가 손을 뻗어 조지현을 안아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안긴 조지현은 강석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연신 사과의 말을 되뇌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락하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하지 마.”
섬뜩할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어. 앞으로도 계속.”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안긴 몸이 뜨거워 눈물을 참지 못했다.
“흉 지지는 않겠네.”
강석원이 붕대를 감으며 말했다. 상처는 다행히 그리 깊지 않아 꿰맬 필요 없이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는 수고만 하면 됐다. 강석원이 진통제와 항생제를 가져와 조지현에게 먹였다. 물을 마시게 하며 강석원은 한마디 덧붙였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그의 괜찮다, 라는 말은 무거운 울림이 있었다.
조지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원이 수건에 뜨거운 물을 적셔와 조지현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몇 번이나 수건을 빨아와 발가락과 손을 차례대로 닦아 주었다. 한껏,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어머니에게조차 받아보지 못한 보살핌이었다.
“샤워는 못 하니까, 일단 옷만 갈아입어.”
강석원이 옷을 내밀었다. 조지현은 욕실로 들어가 젖은 옷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강석원이 빌려준 옷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컸다. 조지현은 바지를 움켜쥔 채 자리에 앉았다.
“내일 옷 사다줄게.”
“아니요. 괜찮습니다.”
“속옷도 안 맞잖아.”
조지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장 난감한 부분이 속옷이었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붙들지 않으면 아예 줄줄 내려갔다. 결국 조지현은 바지 안에 아무것도 입지 못하고 나왔다. 속옷은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였다. 그걸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워.”
강석원이 깔아놓은 이불을 가리켰다. 그의 말에 다른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강석원이 시트를 끌어다가 조지현을 덮어주었다. 강석원은 그 옆에 모로 누웠다.
“미안해.”
예상치 못한 말에 조지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올 줄 알았으면 세탁해뒀을 텐데.”
겸연쩍은 듯한 그의 말투에 긴장이 풀렸다.
“괜찮아요.”
조지현이 시트에 얼굴을 반쯤 묻고, 웃으며 대답했다. 순간, 강석원의 달뜬 시선이 열기에 젖었다.
아까 삼킨 항생제 때문인지 조지현은 입이 말랐다. 메마른 입술을 슬쩍 물었다 놓았다.
강석원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좁은 방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겼다. 조지현은 속이 울렁거렸다. 평소처럼 토기가 느껴지는 메스꺼움이 아니었다. 뱃속이 근지럽고 발끝이 오싹, 떨렸다.
“지현아.”
“네.”
“자야지.”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말투와 한껏 열기 어린 그의 시선이 묘한 괴리감을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강석원의 숨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긴 악몽을 꾸고 난 뒤의 한밤중의 전화통화 같았다.
숨소리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나간 강석원은 아침이 되어 돌아왔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던 강석원은 양손 가득 장을 봐 왔다. 봉투 안에는 요리 재료뿐만 아니라 속옷과 옷, 칫솔 등이 담겨 있었다.
“돈 너무 많이 쓰신 거 아니에요?”
쇼핑 봉투 안을 들여다보던 조지현이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비싼 거 아니야.”
“죄송, ……아니, 감사합니다.”
집에 잠깐 갔다 오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렇지만 구태여 그걸 입에 담지 않았다.
낮에 아버지께 연락을 드렸다. 당분간 친구 집에 있겠다는 말에 아버지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셨다. 오늘 학교에 가지 못한 것은 당신이 미리 전화를 해두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친구가 누구인지, 언제 돌아올 것인지, 친구가 어디에 사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최우선은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매일 매일 저주와 욕설을 퍼붓는 여자를 놓지 못했다. 비틀린 사랑이었지만 아버지는 최선을 다했다. 그것이 조지현에게는 불행이었다.
“집에는 연락 드렸어?”
“네.”
뭐라고 하셨는지는 묻지 않는다. 강석원은 장본 것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지현은 옆에서 그를 도왔다.
불행 중 다행은, 다음 주부터 여름방학이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카레할 건데.”
강석원이 조지현을 쳐다본다. 먹을 수 있는지, 좋아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드릴까요?”
“아니. 손 다쳤잖아.”
단호한 거절이 돌아온다. 상처가 덧나면 더 큰 민폐였다. 조지현은 가만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작은 부엌이 강석원의 큰 체격 때문에 더 비좁게 느껴졌다. 그의 요리는 간단하고 단조로웠다. 군더더기 없는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강석원은 순식간에 저녁상을 차렸다. 야채가 큼직하게 든 카레를 보며 조지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 제가 먹던 카레랑 좀 다르게 생겨서.”
강석원의 눈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그건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음식이고.”
“그러게요. 잘 먹겠습니다.”
한입 크게 떠서 먹었다. 맛있어요, 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강석원은 숟가락을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강석원은 라디오를 꺼내 주었다. 구석에 박혀있던 라디오는 안테나를 몇 번을 매만진 다음에야 제대로 된 전파를 잡을 수 있었다.
조지현은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라디오를 들었다. 온몸의 신경이 나른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려던 기척에 조지현은 잠에서 깼다. 조지현이 몸을 일으키자 강석원이 현관에서 몸을 돌렸다.
“나가세요?”
“한 바퀴 돌고 오려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세 시였다. 어제도 강석원은 이 무렵에 나가 아침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운동하러 가시는 건가요?”
“응.”
“저도 가면 안 될까요?”
강석원이 곤란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잠이 안 와서.”
어제도 강석원이 밖으로 나간 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눈을 감기만 해도 서늘한 날붙이가 살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운동하고 오세요.”
조지현이 다시 자리에 누웠다. 강석원이 그럼, 하고 입을 열었다.
탕, 탕, 탕.
빈 체육관에 타격음이 크게 울렸다. 강석원이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두드렸다. 링 사이드에 걸터앉은 조지현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강석원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땀방울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운동으로 단련한 밀도 높은 근육이 폭발적인 힘을 냈다.
터엉.
큰 소리와 함께 샌드백이 휘청거렸다. 강석원이 샌드백을 잡아 고정시키고 조지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심심하지?”
“아니요.”
강석원이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걸어왔다.
링 위에서 저 남자와 마주치게 된다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본능적인 공포를 느낄 거라고 조지현은 생각했다.
“왜.”
시선을 느낀 강석원이 물었다.
“……, 정말 크신 거 같아서요.”
강석원이 그렇지, 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는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는 조지현에게 단서를 덧붙였다. 체육관에 같이 가는 것은 좋은데, 조금 떨어져 있어달라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당부에 조지현은 조금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 키가 어떻게 되세요?”
“정확히 몰라.”
백구십오는 넘겠지,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부모님이 크신가 봐요.”
“아버지께서 크셨다고 들었어.”
여러 의미가 내포된 대답이었다.
“얼굴을 본 적이 없어서.”
“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위로를 건네기에는 강석원의 말투가 지나치게 건조했다.
“신경 쓸 필요 없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석원은 시기적절한 순간에 명료한 말을 내뱉었다. 단순한 게 아니라 분명한 성격이었다.
강석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흘끔 쳐다보았다.
“들어갈래?”
들어가자, 가 아니었다.
“선배님은요?”
“좀 더 하다가 가려고.”
새벽 다섯 시였다.
“안 주무세요?”
“…….”
강석원이 눈을 슬며시 아래로 내리감았다. 그의 속눈썹을 타고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한참동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땀이 바닥을 적셨다. 석상처럼 단정하고 단단해 보이는 그의 얼굴에 언뜻 당혹감이 스몄다. 마치 무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광경을 보는 것처럼, 기이한 느낌이었다.
조지현의 머리에 그날 밤의 일이 떠올랐다. 일순간 무너지듯 제 욕망을 드러내며 뜨거운 숨을 내뱉던 모습이.
자신의 생각을 들킬까 두려워 조지현은 얼른 눈을 돌렸다.
“자신이 없어.”
나직한 목소리가 제 본심을 드러냈다. 그가 커다란 손을 천천히 쥐었다 펴며 말을 이었다.
“자고 있는 너한테 손대지 않을, 자신이 없어.”
“…….”
“미안하다.”
강석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려다줄게.”
조지현은 말없이 강석원을 올려다보았다. 저는, 하고 입술을 질근 물었다.
“괜찮아.”
“……아니요.”
조지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뱃속의 내장이 일제히 긴장한 듯, 팽팽하게 근육을 당겼다.
“제가 안 괜찮아요.”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모든 감각이 뜨거웠다. 의아함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 체향이 섞인 땀 냄새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모든 게 안에서 뜨겁게 엉켰다.
“선배님이 없으면, ……, 선배님 숨소리를 듣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가 일었지만 그런 생각은 금세 끝낼 수 있었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고 거칠게 입을 맞추었다.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확인할 수는 없었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강석원이 달려들 듯이 끌어안고 몸을 겹쳤다.
체육관에서 집으로 오는 내내 강석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조지현의 손목을 쥐고 화가 난 사람처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집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달리는 듯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입술을 빨았다. 오는 길에 손대지 않은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급한 몸짓이었다. 얼결에 손으로 벽을 짚었다가 조지현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강석원이 미안, 하고 사과하며 조지현의 손을 들어 제 목에 두르게 했다.
“이렇게 하고 있어.”
그러고는 몸을 바싹 붙인다. 다시 키스가 이어진다. 체육관에서 선 채로 수십 번은 했을, 키스가.
타액이 넘나들었다. 급박한 갈구가 느껴졌다. 그것이 말로 형용하기 힘든 황홀감을 느끼게 했다. 몸이 느슨하게 풀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리 사이에 제 다리를 끼워 넣었다. 단단한 허벅지가 샅에 닿았다. 조지현의 몸이 흠칫, 떨렸다. 가로막힌 입술에서 숨이 터져 나오고 그의 몸이 작게 바르작거렸다. 그 사소한 몸짓에 밴 의미를 읽은 강석원이 입술을 떼었다.
“지현아.”
낮은 울림이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강석원의 시선이 자신을 살핀다. 샅샅이, 얼굴에 띤 감정을 모두 읽기라도 하려는 듯이.
“싫으면 지금 밀어내.”
“…….”
“지금이 아니면, 나도 못 멈출 것 같으니까.”
조지현이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그게 아니라, ……, …….”
조지현의 낯빛이 흐려진다. 어려운 고백을 하려는 듯 그가 입술을 길게 물었다 놓는다.
“……, 처음입니다.”
강석원이 가만히 조지현을 바라본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이다.
“처음입니다. 키스를 하는 것도, 다른 사람과 이렇게, ……, ……, 잠들지 않은 상태로 사정하는 것도……. 해본 적 없습니다.”
강석원의 얼굴에 언뜻 의아함이 스친다. 조지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짤막한 침묵 뒤에 혼자서도? 하고 물음이 뒤따른다. 조지현은 물에 젖은 새처럼 작게 몸을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첫 몽정을 경험했다. 그 기이하고 수치스러운 감각은 다음날 어머니의 신경질적인 고함으로 씻겨 내려갔다. 얼룩진 시트를 보고 어머니는 다짜고짜 아들의 뺨을 내리쳤다. 더럽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자연스럽게 찾아온 변화는 그렇게 가로막혔다. 컴퓨터도 하지 않았고 마음을 터놓는 친구도 없었다. 혼자서 욕구를 달래는 법을 알지도 못했고,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열에 들뜬 것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잊고 있었다. 아니, 잊은 거라 믿었다.
“왜?”
강석원이 묻는다.
“무서워서요.”
어머니가 자신을 노려보던 눈이 잊히지 않는다.
어쩌다 몽정을 하는 날이면 조지현은 스스로 속옷을 세탁했다. 속옷을 문질러 얼룩을 지우면서, 얼른 이 불결함이 씻겨 내려가길 바랐다. 자신이 더럽고 불결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무서워?”
조지현이 입을 다문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것이 무섭지는 않다.
다만, …….
강석원과 시선이 마주쳤다. 열에 들뜬 눈이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온몸이 아플 정도로 느끼고 있었다. 남자를 만나고 난 뒤, 잊고 지내던 열기를 깨달았다. 내장 구석구석, 근육의 결을 따라, 털 한 올 한 올에 열기가 스몄다. 생경하고 낯선 감각에 속이 울렁였다. 끝을 알 수 없는 우물에 발을 내딛는 기분이다. 어디까지 빠지게 되는 것일까. 타인의 감정에 얽히고 싶지 않았다. 폭우처럼 쏟아 붓던 감정도 어느 날은 멎는다. 메마른 감정들만 남은 풍경이 얼마나 삭막해지는지는 부모님을 평생을 봐온 터라 잘 알고 있다.
다시, 메마르고 비틀린 채로 숨을 쉴 수 있을까.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을 쥐었다. 부드럽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맹세할게.”
“…….”
“너를 혼자 두는 일은 없을 거야.”
강석원의 입술이 차례대로 눈 밑과 이마, 뺨에 닿는다. 고결한 성체에 제 맹세를 각인하듯.
조지현은 고개를 들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남자의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커다랗고 사나운 야수가 제 모든 것을 내어주고 기다리는 것이다. 자신의 대답을.
시큰한 통증이 피를 타고 심장에 모였다가 다시 온몸으로 퍼진다. 강석원으로부터 시작한 감정의 파편이 몸 구석구석에 꽂힌다.
“아까 한 말, 취소해야 할 것 같아요.”
강석원의 낯빛이 흐려진다. 그가 느릿하게 몸을 떼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조금, 무서운 거 같기도 합니다. 처음이니까, 그러니까…….”
어떤 말을 덧붙인 것도 같다. 정확치는 않다. 다시 시작된 폭풍 같은 입맞춤에 기억이 흐려진 터다.
“아……!”
터져 나오는 소리가 낯설었다. 조지현은 숨을 삼키며 소리를 참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아래를 움켜쥔 채, 움직이고 있었다.
소름끼칠 만큼 생경하고 섬뜩한 감각이 아래로부터 올라왔다.
강석원의 뜨거운 숨이 얼굴에 닿았다. 그의 시선이 낱낱이 조지현을 살핀다. 그의 흥분하는 얼굴, 표정, 숨소리, 몸짓을 모두 눈으로 핥고 있다.
“선, ……배님, ……아, 잠깐…….”
조지현은 밭은 숨을 헐떡였다. 수음조차 경험하지 못한 소년에게 모든 것이 격렬한 감각이었다. 강석원은 그에게 하나하나 가르치기라도 하려는 듯이 손을 움직였다.
처음 강석원의 손이 바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조지현은 각오하던 바였지만 몸이 굳었다. 손가락이 음모 사이를 헤치고 성기를 쥔 순간, 그 낯선 감각에 몸에 인 열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아마도 부들부들 떨었을 것이다.
괜찮아.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스몄다. 그렇게 다시 열기가 일었다. 아니, 일었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열이 치솟았다. 성기를 그러쥐고 가볍게 살갗을 문지르는 단순한 동작에 눈앞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이 강석원의 팔을 붙든 채로 거의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배……님, 아……, 아, 이상, 잠깐……, …….”
몸이 저릿저릿했다. 아랫도리가 오싹오싹 수축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뱃속이 근질근질하고 가려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을 빠르게 껌뻑거렸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조지현은 그가 자신의 흥분에 몹시 욕정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자를 흥분시켰다.
그걸 인지한 순간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뜨끈한 감각이 아래를 적셨다. 조지현의 입술에서 아, 하고 가느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발끝까지 힘을 주었다.
울컥, 울컥, 미지근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황홀한 사정감에 몸이 잘게 떨렸다. 그 뒤에 잇따르는 것은 본능적인 수치였다.
늘 한계치까지 자신을 방치해왔다고 해도 발목까지 주르륵 흘러내린 액체의 양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자신이 사정을 했는지, 실금을 했는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가느다란 발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발목을 타고 흐르는 희뿌연 액체를.
바짓단을 적신 액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투툭, 떨어졌다.
그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탁한 욕망을 집어 삼키는 그 소리에 조지현은 남자의 흥분을 온몸으로 느꼈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안은 채로 바닥에 눕혔다. 반쯤 걸쳐있던 바지가 벗겨졌다. 속옷도 마찬가지였다. 강석원 역시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졌다. 어둠 속에 드러난 남자의 거구에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움칫, 어깨를 떨었다.
“지금도, 무서워?”
강석원이 허리를 굽히고 묻는다. 조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금은요, 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쥐어 제 왼쪽 가슴에 대게 했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그의 흥분과 두려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조지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떨어진다. 자신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 익숙해지면, ……괜찮을지도 몰라요.”
용기를 내어 입 밖으로 중얼거린 말에 남자의 눈매가 느슨해진다. 허락을 알아들은 것이다.
그가 조지현의 손을 아래로 천천히 내리게 했다. 손끝에 남자의 성기가 닿았다. 움찔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천천히, 느릿하게.
어린아이에게 학습시키듯이 남자는 조지현의 손을 잡고 제 살덩이를 수음(手淫)케 했다. 별것 아닌 동작이었음에도 조지현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도 남자의 단단한 얼굴이 흐트러졌다.
강석원의 찌를 듯한 시선이 조지현을 응시했다. 조지현은 어쩔 줄 몰라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남자의 성기가 아슬아슬하게 아래를 스치고 있었다. 게다가 점점 그 속도를 더해가 조지현의 손놀림은 그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급기야는 한 손으로 쥐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살덩이가 자신의 손을 범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강석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서늘하고 단정한 그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 있다.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이 한 방울 툭, 조지현의 입술로 떨어졌다. 조지현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핥은 순간,
“……!”
강석원의 몸이 무너지듯 조지현에게 다가왔다. 아래가 바싹 맞닿았다. 그제야 조지현은 자신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니 몇 배는 더 흥분한 상태임을 알아챘다.
강석원의 성기가 조지현의 아래를 문질렀다. 뜨거웠다. 머리도 몸도, 머릿속에 인 생각마저 뜨거워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저 밭은 숨을 내뱉으며 떨리는 입술로 강석원을 하염없이 부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선배님, ……선, ……하아, 아……, 선배, 나……아아.”
먼저 절정에 다다른 것은 조지현이었다. 온몸의 신경이 경련하듯 젖어드는 쾌락에 숨을 헐떡였다. 강석원이 그런 조지현은 보며 이를 사리물었다. 물리적인 자극보다 조지현의 흥분에, 강석원은 뚜렷이 흥분했다.
그가 짐승 같은 탁음을 내며 허리를 놀렸다. 허벅지 사이가 아플 만큼, 살덩이가 거칠게 비벼졌다.
“――!”
강석원이 조지현의 몸을 바투 끌어안았다. 허벅지가 젖었다. 그것이 제가 쏟아낸 음액이 아님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타인의 욕망으로 아랫도리가 젖어가는 경험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감각이었다.
조지현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피가 머리로 돌기 시작했다. 강석원의 낯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그의 눈은 가만히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싫어하지는 않는지,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혹은 거절하려는 마음이 이는지 살피는 것이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조지현의 이마를 문질렀다. 땀에 엉킨 머리카락을 넘겨주고, 조지현의 손바닥에 입을 맞춘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듯이.
울컥, 뜨거운 것이 치솟아 오른다. 누구에게도 받아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치기어린 호감이나 어중된 연심 따위가 아니었다.
소중히 여겨진 적이 없기에 더 잘 알겠다.
조지현은 강석원과 눈을 마주했다. 서늘한 눈가에 언뜻 웃음이 어린다.
가슴 아릴 만큼, 다정한 감정이 내비친다.
조지현은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턱을 만졌다. 웃고 있던 눈이 멈칫, 한다. 처음이었다. 조지현이 먼저 손을 댄 것은.
차가워 보일 정도로 단단한 남자의 얼굴이 손이 닿은 것만으로 잔뜩 굳어버린다. 그의 긴장이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괜찮……습니다.”
조지현이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선배님하고는, ……, ……, 괜찮아요.”
바스러질 듯이 끌어 안긴다. 강석원의 숨이 귓가에 닿는다. 그것이 곧 맹세의 말처럼 들린다. 너를 절대로 혼자 두지 않겠다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입맞춤이 시작되었다.
의식보다 감각이 먼저 돌아왔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이 몸을 닦아냈다. 그것이 뜨거운 물에 적신 수건이라는 사실을 한참 뒤에 깨달았다.
의식이 수면의 경계에서 들락날락거렸지만 기분이 좋아 그대로 두었다. 따스한 수건이 발을 감쌌다.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닦아낸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조지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미안. 깼어?”
강석원이 수건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시트를 몸에 덮어주었다. 조지현은 그제야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임을 깨달았다. 얼른 시트 끝을 손으로 쥐고 물었다.
“몇 시예요?”
“한 시.”
창밖이 어두웠다. 조지현은 머릿속으로 드문드문 이어지는 기억을 더듬었다. 얼굴이 붉어졌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그것만 했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면 강석원은 다시 입을 맞추고 몸을 겹쳤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는 조지현만을 취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보낸 것이다.
강석원이 시트째 뒤에서 끌어안았다. 조지현이 저도 모르게 흠칫 떨며 몸을 웅크렸다.
“미안.”
강석원이 침묵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몇 번이고 사정을 하고 나서도 강석원은 눈만 마주쳐도 발정 난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조지현은 사람의 몸에서 그렇게 많은 정액을 사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나중에는 나올 것이 없는데도 절정에 다다르는 기이한 경험까지 했다. 결국, 조지현이 울면서 도저히 못 하겠다고 한 후에야, 강석원은 행위를 멈추었다.
강석원의 이마가 어깨에 닿았다. 미안해, 하고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트를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등 뒤로 강석원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단정하고 규칙적인.
문득, 메트로놈을 떠올렸다.
어릴 때 잠시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었다. 건반을 두드릴 때 나는 소리보다 단조로운 메트로놈 소리를 좋아했다.
조지현은 눈을 감았다. 가물가물, 눈꺼풀 사이로 잠이 밀려들었다.
창밖 너머로 빗소리가 들려왔다. 먼 곳에서 나는 듯한 물 냄새에 마음을 빼앗겼다.
돌아갈까.
아니, 그래도 인사는 해야 한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하지. 찾아온 것을 썩 반기지 않을 텐데.
……돌아갈까.
가게 앞에서 십여 분을 서성거리던 조지현은 숨을 깊게 삼켰다. 결심을 굳히고 그는 피자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려 보이는 아르바이트생이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했다.
“저, …….”
조지현은 가게 안을 언뜻 둘러보았다. 주방 안까지 훤히 보이는 작은 가게였다. 어디에도 강석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피자 주문하시게요? 지금 하시면 한 삼십 분은 걸려요.”
아르바이트생이 껄렁거리며 대꾸했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예? 뭔데요?”
“혹시 여기, 강석원 씨라고 계시지 않나요?”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어 부른 것이, 얼마 만일까.
“강석원? 어, 누구지?”
아르바이트생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린다.
“키 크고…….”
짧은 첨언이 붙자 아르바이트생이 아, 하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 무섭게 생긴 형이요? 그 형 이름이 강석원이에요?”
“네.”
대답하면서도 조지현은 의아했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인상이 희미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 형은 왜요?”
아르바이트생이 조지현을 위아래로 훑으며 노골적인 궁금증을 드러낸다.
“아는 분인데, 혹시 연락될까 해서요.”
“아는 분인데 연락처도 없어요?”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기분 나빴다.
“모르시는 거면 됐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가게를 나서려는 조지현을 아르바이트생이 저기요, 하고 부른다. 종이에 뭔가를 적어 그가 내밀었다.
“번호요.”
“……. 무슨 번호요?”
“그 형 핸드폰 번호요. 맞을 거예요.”
조지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종이에 적힌 숫자를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 형 근데 여기서 일하는 거 아니에요. 사장님 아는 사람이라 며칠 도와준 거라 들었어요. 어제 무슨 일인지 안 나온다고 하던데요. 되게 살벌한 얼굴이던데. 그런데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친구 맞아요? 사장님 오면 뭐라고 말할까요?’
아까부터 귓가에 윙윙거리는 울림이 인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면서 종이에 적힌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열한 개의 숫자.
“…….”
자신의 이기심을 비난이라도 하듯 기억 속의 숫자와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구정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입맛이 지독히 쓰다. 결국, 모든 게 내 책임이란 것일까.
조지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오르자 속이 울렁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로비에 있는 화장실로 달려갔다.
속에 있는 것을 모두 게워냈다. 어제부터 거의 먹지 못해서 쓴 액체만 울컥 울컥 넘어왔다.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눈이 자신을 들여다본다. 거울 속의 눈마저 자신을 스스로 비난하고 있다. 최선이란 단어로 외로움을 깎아냈다. 어쩔 수 없다고 믿으며 그리움을 억눌렀다. 하지만 결국에 모든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지금은 그 선택이 남자의 앞길을 망칠 만큼, 연약한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은 두려움이 자아낸 견고한 세계에서 강석원이란 존재를 외면하고 있었다.
열한 개의 숫자.
언제든 연락할 수 있었음에도.
“…….”
차가운 물로 몇 번이고 세수했다. 현기증이 어느 정도 가셨다. 로비로 나왔지만,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잠시 사용할 용도였기에 저장된 번호는 몇 개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조지현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뭐가.”
“네가 다 먼저 연락을 해서 술을 마시자고 하고.”
“그럼 안 돼?”
“아니. 신기하니까.”
김선우가 술잔에 술을 채우며 말을 잇는다.
“너 처음 봤을 때, 벙어리인 줄 알았어. 애들이랑 내기도 했는데. 내가 이겼지만 말이야. 나는 말은 할 줄 아는 자폐아에 걸었거든.”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고 술잔을 비웠다.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자 김선우가 머리를 긁적였다.
“너 혹시 기분 안 좋은 일 있냐?”
“…….”
이번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너, 근데 진짜 결혼 하냐?”
“아니.”
“그런데 그 여자 보러 한국까지 들어온 거야?”
“사정이 있어서.”
조지현은 그렇게 말을 하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럴 때는 어차피 캐물어 봤자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김선우는 잘 알고 있었다. 김선우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잘 생각했다. 너 결혼한다고 해서 솔직히 걱정했잖아.”
“무슨 걱정.”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사람이랑 결혼하는 거, 너랑 안 어울려.”
조지현은 빈 술잔을 기울였다. 얼음이 카랑, 유리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럼, 뭐가 어울려?”
“뭐?”
“난 뭐가 어울려?”
친구의 난데없는 질문에 김선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지현이 씁쓸하게 웃었다.
“너 취했냐?”
“그러게. 취했나 보다. 헛소리가 나오는 거 보니.”
조지현이 열 오른 제 얼굴을 문질렀다.
“슬슬 일어나긴 해야겠다.”
김선우가 시계를 확인하며 슈트 재킷을 집어 들었다. 조지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계산할게. 내가 불렀으니까.”
조지현이 카드를 내밀었지만, 김선우가 그를 막아섰다.
“나 이렇게 자유롭게 술 마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냥 사게 해주라. 그날 일도 있고.”
김선우가 친구들을 불러서 피자 파티를 한 날, 조지현은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속이 좋지 않다며 물조차 입에 대지 못했다. 룸메이트였던 김선우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고마워.”
조지현이 인사했다.
“고맙긴. 이렇게라도 우리 허니 얼굴 한 번 더 보는 거지.”
김선우가 장난스럽게 조지현의 뺨에 손을 뻗었다. 조지현이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냈다.
“미안. 잠을 못 자서 신경이 날카로운 거 같아.”
김선우가 설핏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지현. 너 괜찮은 거야?”
“괜찮아.”
“약은……, 잘 먹고 있어? 상담은 잘 받고?”
“응.”
조지현에게 정신과 상담을 권한 것은 룸메이트였던 김선우였다. 밤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땀에 흠뻑 젖어 일어나는 조지현을 몇 번 보고 난 후에, 그는 자신이 아는 의사라며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
“미안하다. 괜히 이 밤에 불러내서.”
“미안하긴. 친구 사이에. 그리고 넌 내 첫사랑이잖아.”
김선우가 장난스럽게 덧붙인 말에 조지현의 표정이 굳는다.
“알았어. 장난 안 칠게. 하여간, 새끼. 까칠하기는.”
“썩 유쾌하지 않아, 그런 장난.”
“근데 모르긴 몰라도 너 좋아하는 놈들 몇은 있었을걸. 넌 좀 뭐랄까.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 법한 첫사랑 이미지거든. 그 서늘하고 까칠한 성격만 빼면.”
“들어가. 헛소리 그만하고.”
조지현이 택시를 가리켰다. 김선우가 웃으면서 그래, 하고 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 맞다. 아까 그 얘기 말이야.”
“뭐.”
“결혼할 상대. 어울리고 자시고 하는 문제가 아닌 거 같아.”
“…….”
“만약 너에게 단 하루가 남는다면 그 하루를 누구하고 보내고 싶은지 생각해 봐. 가족을 제외한 사람이 떠오르면, 그 사람 곁에 있어야지. 단 하루라도.”
“……. 그래.”
“그럼 나 결혼하기 전에 볼 수 있으면 한 번 더 보자.”
조지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택시가 떠났다.
걸음을 옮겼다.
인생에 하루가 남는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해 여름이 생각난다. 가슴이 묵직해졌다. 흘러가지 않는 감정이 오래 머물면 무엇으로 변하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고 나자 취기가 돌았다. 고요에 압사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텔레비전을 켰다. 전쟁, 핵, 전 세계적인 우주 쇼, 잔인한 존속살해. 관심도 없는 뉴스들이 줄줄이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소파에 깊숙이 앉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층고가 높은 아파트의 천장이 유난히 쓸쓸히 느껴진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간신히 억누르던 것들이 비죽이며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손을 뻗으면 상대의 등이 닿았던 작은 방이 떠오른다. 방안을 감돌던 쌉싸래한 모기향 냄새, 털털털 돌아가던 선풍기 모터 소리, 악몽을 달래주던 커다랗고 넉넉한 손과 온기에 안겨 잠들던 많은 여름밤들.
다시는 가지지 못할 것들에 대한 감정이 밀려든다.
그 순간, 정적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휴대폰 벨 소리였다. 화면을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잠시 입술을 깨물었지만, 조지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목소리 대신 어색한 숨소리가 들린다. 조지현은 다시 한 번 여보세요, 하고 상대의 대답을 재촉했다.
「조지현 씨 핸드폰인가요?」
조지현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네. 맞습니다. 누구신가요?”
불길한 침묵 뒤에 나야, 최기열,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핸드폰을 쥔 손부터 피가 싸악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너무 늦게 전화했나? 너 한국이라며.」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입술 끝이 떨렸다. 상대가 자신에게 손톱만큼의 위해도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리적인 공포와 혐오가 밀려왔다.
「너희 엄마가 우리 엄마랑 연락해서 내가 알려달라고 했어. 미국에서 좋은 대학 가고 잘나가고 있다며. 한국에는 아예 들어온 거야?」
“너하고 할 말 없어. 끊는다.”
「야, 조지현! 잠깐!」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넌 예나 지금이나……, 하여간 싸가지 없는 새끼. 나 결혼했어. 작년에. 너도 결혼한다며. 언제 한번 만나서…….」
조지현은 핸드폰 전원을 눌렀다. 그러고는 구석에 내던졌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미친 여자다. 고작 생각해낸 방법이 이런 것이라니. 아들이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것 같으니 이런 식으로 경고하는 것이다. 네 주제를 알라고. 네가 어떤 인간인지, 너를 낳은 것이 누구인지, 결국에 너도 어떻게 될지, 똑똑히 알고 있으라고. 사나운 여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귓가에 울린다.
할 수만 있다면 몸속에 흐르는 그 여자의 피를 모두 빼내고 싶다. 똑같이 닮은 이 얼굴도, 미쳐가고 있는 이 불안정한 정신도, ……제발.
시야가 일렁였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약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귓가에 날카로운 울림이 인다. 벌레가 온몸을 뒤덮는 소리다. 모든 것이 약하고 병든 정신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끊임없이 되뇌지만, 본질적인 두려움을 떨쳐내진 못한다.
“하아……, …….”
숨을 내뱉었다. 꽤 긴 시간 동안 숨도 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폐가 찢어질 듯한 고통을 통해 깨달았다. 입고 있는 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죽기 전까지 끝나지 않을 고통을 감내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못하고 털어놓지 못할 끔찍하리만치 외로운 고통이다.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 가벼운 음악 소리가 끼어들었다.
“…….”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나서야 그게 인터폰 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간신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안녕하세요. 로비입니다. 배달 확인 부탁드립니다.」
잘못 걸었다고 대답하려던 조지현은 멈칫, 입을 다물었다.
“……올려보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인터폰이 끊겼다.
48층까지 올라오는 데는 한참이 걸린다. 승강기 리프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층,2층,3층,4층,………. 머릿속에서 카운트가 올라갈수록 심장도 요란하게 울렸다.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잘못 걸린 인터폰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병들고 이기적인 외로움은 그를 기대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복도에 저벅저벅 발소리가 퍼졌다. 심장에 발자국이 찍힌다. 우뚝, 멈추어 선다. 조지현은 숨을 삼켰다.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현관으로 나가려 했지만 현기증 때문에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게 전부였다. 조지현은 인터폰 통화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들었다. 언뜻 화면으로 남자의 가슴팍이 보인다.
“…….”
「…….」
두 사람 다 입을 열지 않았지만,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이전과 같이. 하지만 이전과 다르다. 그의 숨소리를 듣고 있음에도 손발이 얼음장처럼 차다.
“선배님…….”
조지현이 먼저 입을 뗐다.
지현아, 다정한 부름이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조지현.」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조지현은 두 사람을 가로지르는 그간의 아득한 세월을 느꼈다.
「문 열지 말고 들어.」
“…….”
「네가 날 버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5년 걸렸어.」
인터폰 화면으로도 강석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선배님, 저는…….”
손끝이 움칫 떨렸다. 문을 열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을 버려두려고 한 게 아니라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고 싶었다.
「그냥 들어.」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강석원이 단호하게 말한다. 항상 그랬다. 그는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말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5년 동안 온갖 곳을 다 헤맸어.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까. 절대로, 혼자 두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맹세하듯 강석원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악몽에 진저리를 치며 깨는 자신을 끌어안고 강석원이 밤새 속삭여주던 말이다. 혼자 두지 않겠다고.
「오해하지 마. 너를 찾는 데 지쳐서 그만둔 게 아니야. 내가 찾는 네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것뿐이니까.」
차갑고 단단한 그의 눈빛이 떠오른다. 거기에 머문 몰두는 무엇으로도 깨트릴 수 없는 것이었다.
조지현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일 년이면 그가 자신을 흘려보낼 줄만 알았다. 저조차 하지 못한 일을, 그가 하길 바랐다. 잔인하게도.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하지 마.」
기억 속의 목소리와 같은 울림이다.
「정신병원에 없는 거 확인했으면 됐어.」
정신병원이란 단어에 머리가 아찔했다. 뭔가 잘못됐다는 불길한 느낌이 가슴을 뒤덮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조지현은 수화기를 들고 선배님, 잠깐만요, 하고 그를 다급히 불러 세웠다.
지현아.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듣는 순간, 조지현은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그뿐이었다. 강석원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수만 번, 아니 수억 번 머릿속으로 그리던 부름이다.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겨주며, 등을 도닥이며, 뺨과 눈가에 입술을 덮으며, 몇 번이고 불렸던 이름이다.
「만나지 말자. 앞으로.」
“…….”
절대로 혼자 두지 않을게. 앞으로.
다정한 목소리에 차가운 현실이 덧씌워진다.
「그러니까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 다음에 널 만나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린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저변에 깔린 위험을 느끼게 한다.
「널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위험한 짐승이 이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잔인한 충고가 충분한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현관에서 마주친 날, 목을 졸린 감촉이 생생히 기억났다. 숨이 막혔다. 꿈속에서 자신의 위에 올라타 목을 조르던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꿈속의 얼굴과 강석원의 얼굴이 교차한다. 누군가 뇌를 커다란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토기가 치솟고 귀에서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결혼 축하한다.」
그 말을 끝으로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를 불러 세우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득하게 멀어지는 시야에 입술을 깨물었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피 냄새가 입안에 가득 퍼졌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강석원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벽을 잡고 현관까지 걸어갔다.
선배님.
작은 속삭임이 입술에 머물렀다. 발아래가 무너지듯 몸의 균형이 뒤바뀌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넘치는 아나운서의 음성이 현실 세계의 것들을 알려주었다. 눈을 천천히 한 번 깜빡였다. 뒤틀린 현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창밖의 커다란 달이 소롯이 밝았다.
새카만 어둠이 의식을 잠식했다.
“잘 지내고 계세요?”
전화기를 붙든 손이 미약하게 떨렸다.
「그래. 여기는 별일 없다.」
여기는, 이란 단어가 어김없이 조지현을 유리시켰다.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밥은 잘 챙겨먹고?」
“네.”
「미안하다. 못난 부모 때문에 네가 고생이구나.」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이 넘어온다. 조지현은 얼른 이만 끊을게요,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집을 나온 지 보름가량이 지났다. 아버지와 몇 번 통화했지만 매번 비슷한 말들을 주고받다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돌아오라는 말도 없었다. 그걸 확인하는 통화일 뿐이다.
도서관으로 돌아와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창밖이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시계를 확인했다. 얼른,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니 강석원이 벤치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님.”
조지현의 부름에 강석원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얼마 안 기다렸어.”
그의 셔츠가 온통 땀투성이였다. 조지현은 미안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핸드폰도 시계도 없어 집중하다보면 깜빡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사과하지 마. 앞으로도.”
이전에도 들었던 말이다. 자신이란 존재에 면죄부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뻐근한 통증이 가슴을 가르며 스쳤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괜찮아요.”
“아무거나란 음식은 없어.”
무뚝뚝한 목소리로 던진 우스갯소리에 조지현은 가만히 웃음을 삼켰다. 문득, 시선이 닿았다. 무엇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진중한 남자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엿보였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잡았다. 건물 뒤 구석진 곳으로 끌려갔다. 입술을 겹쳤다. 한순간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절박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맞물린 입술에서 뜨거운 숨이 넘나들었다.
강석원이 천천히 뒤로 몸을 물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조지현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입술이 화끈거렸다. 얼굴처럼 입술도 색이 변한다면 아마도 새빨갛게 달아오를 것이라고, 조지현은 생각했다.
“갈까.”
“……, 네.”
집으로 가는 길에도 많은 말을 하진 않았다. 강석원은 저녁 반찬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조지현도 거기에 대해 묻지 않았다. 강석원의 걸음이 집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이 닫히자마자 강석원은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신발을 벗을 새도 없었다. 조지현을 안아든 채로, 강석원이 신발을 벗겨 현관에 내던졌다. 계속 입을 맞추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몸이 엉켰다. 땀에 젖은 피부를 마디가 견고한 손이 더듬었다. 온몸의 세포가 오싹 오그라드는 듯한 긴장을 느꼈다.
“샤워…….”
조지현이 간신히 용기를 내어 입을 뗐다. 강석원뿐만 아니라 자신역시 도서관의 고장 난 에어컨 때문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샤워할래?”
강석원이 묻는다. 잔뜩 성이 난 그의 다리 사이와는 상반되게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이다.
“네.”
강석원이 조지현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속옷과 수건을 챙겨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자 차갑게 식어버린 땀 때문에 몸이 오소소 떨렸다. 얼른 샤워콕을 열었지만 차가운 물만 쏟아졌다. 그제야 보일러 전원을 켜지 않은 것이 떠올랐다.
“선…….”
강석원을 부르기도 전에 욕실 문이 열렸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강석원의 혀가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아……!”
욕실 벽이 등에 닿았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카락에 손을 찔러 넣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열렬한 구애였다. 그는 온몸으로 들끓는 연심을 드러냈다. 숨을 헐떡이며 조지현은 그의 열기를 받아냈다. 타액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욕실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단단한 강석원의 몸이 젖은 옷 아래로 여실히 두드러졌다.
강석원은 조지현의 다리를 벌리고 제 성기를 그 위에 문질렀다. 조지현의 입술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졌다. 그 흥분어린 소리에 강석원은 미칠 듯이 욕구했다. 익숙하지 않은 자극에 조지현은 금세 토정했다. 물줄기에 섞여 흘러내리는 정액을 보며 강석원은 이를 사리물었다. 그의 입술이 조지현의 뺨과 목덜미, 어깨를 마구 더듬었다. 조지현은 그의 팔에 안겨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지현아.
나직한 부름에 조지현의 몸이 잘게 떨렸다. 뜨거운 혀가 조지현의 팔을 애무했다. 손가락을 빨고 손목을 핥았다. 다디단 것을 맛보듯이 강석원은 조지현의 살을 머금었다.
“아, ……선배……, 아, ……. 읏.”
여리고 가냘픈 살갗에 금세 피가 몰렸다. 커다란 손이 작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조지현이 퍼뜩 허리를 세웠다.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유회했다. 조지현은 몸을 앞으로 웅크렸다. 얼굴과 목덜미가 금세 붉어졌다. 남자들끼리 어떻게 관계하는지 며칠 전 도서관 구석에서 컴퓨터로 찾아본 기억이 났다. 충격적인 사진에 놀라 황급히 화면을 꺼버렸지만 그날 하루 종일 머릿속에 그 장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굵직한 손가락이 엉덩이 안쪽의 살을 어루만졌다. 조지현은 몸을 한층 더 웅크렸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른다. 초조해 입안이 바싹 말랐다. 발끝이 오싹오싹 떨렸다.
“아직도 무서워?”
강석원이 묻는다. 조지현이 고개를 들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이 그의 서늘한 얼굴을 적셨다. 음영을 드리운 콧대에 물방울이 맺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조지현은 아니요, 하고 작게 중얼거린다.
“많이 떠는 것 같아서.”
“……, …….”
항상 그랬다. 강석원과 눈만 마주쳐도 몸 깊숙한 곳의 근육까지 일제히 긴장해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선배님을 보면, ……, 떨립니다. 무서운 것은 아닌데, 계속…….”
강석원의 팔이 조지현을 당겼다. 그 뒤에는 어떤 대화도 없었다. 강석원은 짐승 같은 숨소리를 내며 조지현의 몸에 제 욕망을 마찰했다.
얼마나 그가 자신을 갈구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그는 자신을 필요로 했다. 아름드리나무 같은 팔에 매달려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그를 꽉 끌어안았다.
옷이 엉망으로 젖고 구겨졌고, 그는 조지현의 다리 사이에 사정했다. 차가운 물이 온몸을 두드렸지만 열은 식지 않았다.
작게 재채기를 하자 뒤에서 끌어안은 손이 힘을 더한다.
“미안해. 온수를 켰어야 했는데.”
멋쩍은 듯한 사과에 웃음이 났다. 강석원이 어깨에 코를 묻고 한껏 숨을 들이켰다.
“운동하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따가.”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식단을 조절하고 있었다. 조지현은 몸을 앞으로 돌렸다.
“시합 있으시잖아요.”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보듬어주었다.
“그러다 지면 어떡해요.”
“질 것 같아?”
잠시 생각하다 아니요,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강석원이 그래, 하고 대답했다. 여유나 오만이 아니었다. 그는 담담히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지는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힘드시지 않아요?”
강석원이 눈썹을 살짝 휘어 올린다.
“운동하는 거요.”
“할 만해.”
그렇게 말하고는 너는, 하고 묻는다.
“전 운동 안 하는데요.”
눈을 깜빡이면서 대답하자 강석원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진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조지현은 그의 웃음을 알아챘다.
“공부하는 거.”
“아, ……할 만해요.”
엉뚱한 대답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지현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어물어물 말을 이었다.
“그냥 습관 같은 거라서 힘들지는 않아요. 어차피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아무 생각 없이 하다보면 그냥 마음도 편해지고요.”
한심하고 씁쓸한 이야기지만 공부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적어도 공부를 하고 있을 때는 누구하고도 엮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얻었다.
“그래. 편하긴 하더라. 네 이름 찾는 거.”
“제 이름이요?”
“게시판에서. 거의 앞줄에 있잖아.”
교장은 시험이 끝나면 본관 현관에 학년마다 일 등에서 삼십 등까지의 전교 석차를 붙여 놓았다. 일각에서는 지나친 경쟁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이 있었지만 정작 교장은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제 이름 찾아보셨어요?”
강석원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가 응, 하고 대답했다.
“왜요?”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니라 단순히 이름을 보기 위해 매번 시험이 끝나면 게시판을 확인하는 행위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우연히 봤어. 옆을 지나가는데 이번에도 조지가 전교 일 등이라는 말을 들어서. 그 다음에는,”
강석원의 시선이 기억을 더듬는다. 입가에는 느슨한 웃음이 걸린다.
“궁금하더라고. 이번에는 몇 등일지. 얼마나 노력했을지. 그냥 그런 사소한 것들이.”
사소한 이유로, 사소한 것들이.
조지현의 마음에 강석원의 말이 쌓인다.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강석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강석원의 입가에서 미소가 스러진다. 뻗어온 손이 뒤통수를 끌어안았다. 한껏 서로의 입술을 맛보다 정신을 차렸을 때, 자정이 지나 있었다.
그날 강석원은 처음으로 연습에 가지 못했다.
“―――!”
소리 없는 비명이 정신을 짓누른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어둠을 노려보았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밝아졌다.
“정신이 들어?”
강석원이다. 그를 확인한 순간 저릿저릿하던 몸에 피가 돌았다. 진득한 구정물에 처박혀 있다 건져진 기분이었다. 강석원의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맑아졌다.
“꿈 꿨어?”
조지현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꾸지 않았던 악몽을 요즘 들어 부쩍 꾸고 있었다. 다음 주면 방학도 끝이었다. 집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괜찮아. 꿈이잖아.”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고 말했다. 그가 가만가만 등을 도닥였다. 무심한 듯 단조롭게 박자를 맞춰주는 메트로놈의 움직임처럼.
조지현은 그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더운 여름밤이었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두 사람 모두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낡은 선풍기로는 피 끓는 두 남자의 몸을 식히기에 역부족이었다.
“덥지?”
“……, 네.”
그렇게 대답하고도 강석원의 품에서 벗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다. 허리 부근에 강석원의 살덩이가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하지만 그는 조지현이 악몽에서 깬 날은 손을 대지 않았다. 자다 깬 어린아이를 어르는 어미처럼, 품에 안고 도닥여주기만 했다.
조지현은 조금 웃음이 났다.
“왜?”
웃는 기척을 느낀 강석원이 물었다.
“그냥, 그날 같아서요. 수학여행 마지막 날.”
“…….”
강석원이 잠시 곤혹스럽다는 표정을 짓는다. 본인의 성급한 실수를 떠올린 것이다. 이따금 남자가 이런 식으로 감정을 내비칠 때의 표정이, 조지현은 퍽 마음에 들었다.
“선배님은 수학여행 어디로 가셨어요?”
“경주. 너희는?”
“제주도요. 못 가긴 했지만.”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던 손이 잠시 멈칫한다.
“가고 싶어?”
“네?”
“제주도. 같이 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지현은 멍하니 강석원을 바라보았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그럼에도, 방금 강석원의 입에서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가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였다.
“괜찮습니다.”
그런 마음을 들키기 전에 얼른 다잡았다. 왕복 차비만 해도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 식비까지 하면 강석원의 부담이 너무 컸다. 지금도 강석원에게 오롯이 신세를 지는 형편이었다.
“이번 주말에 알바비 나와.”
새벽마다 강석원은 일을 나갔다. 원래는 일주일에 두 번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거의 매일 나가고 있었다.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조지현은 잘 알고 있었다.
“됐습니다. 너무 멀고…….”
“여행은 원래 멀리 가는 거야.”
“그래도…….”
커다란 손이 조지현의 이마를 덮었다.
“가자. 방학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공부만 했잖아.”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먹고 조지현은 도서관으로 갔다. 거기서 강석원이 데리러 올 때까지 공부를 했다.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거기에 의문을 갖거나 불만을 품은 적도 없었다.
“정말 괜찮아요.”
조지현이 힘을 주어 말했다. 강석원의 손이 아래로 내려온다. 턱 부근을 쓸어내리던 손이 입술을 문지른다.
“그럼, 부탁할게.”
“…….”
“나랑 여행 가자.”
대답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자 손가락 끝에 스쳤다. 조지현은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감은 채로, 대답했다.
“선배님, 부탁하시는 게 아니잖아요.”
“부탁 맞아.”
“…….”
강석원의 입술이 가볍게 이마를 누른다. 부탁할게, 낮은 속삭임이 뒤따랐다. 강석원의 말들은 묵직한 중량감을 가지고 전해졌다.
“……, 나중에 갚겠습니다.”
“나중에?”
그렇게 묻는 강석원의 음성에 슬쩍 웃음기가 묻어난다.
“왜요? 안 갚을 것 같은가요?”
“아니.”
강석원이 조지현의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을 손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래. 꼭 갚아. 나중에.”
나중에, 라고 말하는 표정이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다. 조지현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강석원이 다시 말없이 조지현의 등을 도닥이기 시작했다.
열대야였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무더운 여름밤에, 비좁은 방에 누워 열없이 바다 건너의 섬을 그렸다.
우르르르릉.
하늘을 찢어발기는 듯한 소리가 창문을 울렸다. 흡사 누군가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비가 내렸다.
강석원은 무심한 어투로 금방 그칠 거야, 하고 중얼거렸다. 조지현은 짐 가방을 흘깃 쳐다보았다.
“여름비는 새벽에 내리고 금방 그쳐.”
“그런가요.”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조지현은 어젯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넣을 짐도 없는데도 가방을 몇 번이나 쌌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강석원은 체육관 관장에게 빌려왔다는 카메라를 만지며 여상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았다.
그러기를 삼십여 분.
그칠 기미는커녕, 빗줄기가 한층 더 거세어졌을 뿐이다. 비행기를 타려면 지금쯤엔 나가야 했다. 그때 강석원의 핸드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강석원이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갔다.
다시 가방을 풀어야 하나.
조지현은 망연히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며칠간의 무더위를 씻어주는 다디단 비였지만 지금 그에게는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통화를 마쳤는지 강석원이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어디예요?”
“항공사. 오늘 결항이라고. 내일 새벽쯤에나 가능할 거 같대.”
내일 오후에는 강석원의 연습 시합이 있었다. 오전 비행기를 타고 와야만 빠듯하게 맞출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럼 안 되겠네요.”
조지현이 선선히 대답하며 가방에 손을 뻗었다. 강석원의 손이 먼저 가방을 움켜쥐었다.
“가자.”
“비행기 취소됐다고 했잖아요.”
“거기 말고.”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괜찮습니다.”
괜히 감기라도 걸려서 내일 있을 연습 시합에 무리가 갈까 걱정이었다. 조지현의 말에 우산을 챙기던 강석원이 고개를 돌린다.
“내가 안 괜찮은데.”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와 눈빛이 진지해서 조지현은 조금 놀랐다.
“네가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되지만.”
“아닙니다.”
조지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발을 신었다. 강석원이 사다준 신발이었다. 운동화 끈을 매려는데 강석원이 허리를 굽힌다.
“괜찮아요, 제가…….”
강석원은 말없이 운동화 끈을 매주었다. 감사합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인사했다.
발끝에서부터 그의 다정함이 파고들어 순식간에 심장에 닿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나는 넝쿨나무 같다. 강석원이 손을 대는 곳마다 감정이 퍼져가는 기분이었다.
언젠가는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무성하게 자랄 것이다. 단단한 줄기에 휘감겨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조지현의 물끄럼한 시선을 느낀 강석원이 눈썹을 슬쩍 올린다.
“나갈까요.”
강석원이 대답 대신 우산을 챙겨들었다.
버스의 승객은 두 사람을 제외하고 몇 되지 않았다. 오는 내내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을 잡아주었다. 창밖으로 지나는 풍광보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신경 쓰여 한숨도 자지 못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한 버스는 두 시간 반가량을 달려 종착지에 도착했다. 거기서 시내버스를 타고 또 이십여 분을 들어갔다.
펜션 주인은 학생 둘뿐인가? 하고 조금 마땅찮은 얼굴을 했지만 주의사항을 알려주고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바닷가를 앞에 두고 독채로 지어진 펜션은 제법 운치가 있었지만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에 손님은 두 사람이 전부였다.
“들어가자.”
강석원이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는 조지현의 손을 잡아끌었다. 복층 구조의 펜션은 아담한 크기이긴 했지만 깨끗하고 예쁘장했다.
“옷 갈아입어. 감기 걸려.”
강석원이 가방에서 여벌의 옷을 꺼내 내밀었다. 버스에서 내려 5분 거리를 걸었을 뿐인데, 우산을 쓰는 의미도 없이 둘 다 옷이 흠뻑 젖었다.
조지현은 몸을 뒤로 돌렸다. 같은 공간에서 등을 돌리고 옷을 갈아입는 행위보다 더 심한 것도 했는데, 이상하게 손이 떨렸다. 먼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바지를 벗었다. 훤하게 드러난 맨살에 소름이 올랐다.
“속옷.”
“네?”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티셔츠를 벗은 강석원의 맨몸이 보였다. 눈 둘 데를 몰라 조지현은 얼른 시선을 내렸다.
“속옷은 안 젖었어?”
“네.”
강석원의 시선이 몸에 닿는다. 조지현은 얼른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젖은 옷을 벗어낸 것만으로도 체온이 한결 올라간 느낌이었다. 강석원이 수건으로 조지현의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주었다. 그는 조지현이 샤워를 하고 나올 때마다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려주었다. 괜찮다고 몇 번 거절했지만 그때만큼은 강석원은 고집스레 말을 듣지 않았다.
“비가 더 오는 거 같은데요?”
뒤에 선 강석원의 기척이 신경 쓰여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그러게.”
“이제 뭐 하죠?”
여행을 다녀 본 적도 없었다. 학교에서 간 소풍이 고작이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거 있어?”
조지현은 글쎄요, 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무섭게 퍼부었다.
“나가볼까.”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빗소리가 무섭게 들렸다. 바닷바람까지 불어 기세가 한층 더 굉장했다.
차양 아래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부유물과 흙이 섞인 바닷물의 색은 탁하기 그지없었다. 성난 파도가 꿈틀거리며 모래사장에 부서졌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조지현은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무심히 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아슬아슬하게 닿은 손끝이 차다. 심장이 제 존재를 주장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근육을 당기며 뛰었다.
좋다.
조지현은 눈을 껌뻑였다. 그냥 이 남자와 이곳에 온 게 좋았다. 어디였더라도 상관없이 그저 좋았다.
그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귓가에 열이 올랐다.
“비가 많이 오네.”
강석원의 목소리가 유난히 낮게 들렸다. 바람소리와 같다. 서늘하게 어느새 가슴에 닿는다.
조지현은 그러게요, 하면서 바다로 시선을 두었다. 바람에 실린 비가 얼굴을 때렸다. 턱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갈아입은 노력이 허망하게 어느새 옷이 젖어들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쏟아지는 거 처음 봤어요.”
“나도 그래.”
침묵이 흐른다. 별스럽지 않은 침묵인데도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조지현은 떠오르는 대로 주워섬겼다.
“오천 년 뒤에는 빙하가 다 녹아서 해수면이 육십 미터 이상 상승하고, 다 물에 잠긴대요.”
지금 이 기세라면 며칠 안 걸릴 것 같지만, 하고 열없이 덧붙였다. 강석원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웃었다.
“왜요?”
“말 많이 하는 거 처음 본다.”
조지현은 제 긴장을 들킨 것만 같아 고개를 숙였다.
“그럼 오천 년 뒤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네?”
“우리나라도 잠길 텐데.”
“그렇겠죠.”
잠시간의 침묵 뒤 강석원이 물었다.
“내일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할래?”
“내일이요?”
복권에 당첨된다면 뭘 할래, 만큼이나 엉뚱하고 소모적인 질문이었다.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던 조지현은 한참이나 걸린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제주도에, 가고 싶어요.”
“제주도?”
의외의 답이라는 듯이 강석원이 되물었다.
“네.”
탁한 바다가 넘실거렸다.
무더운 여름날 밤, 좁은 방에서 그리던 섬이 떠올랐다.
“선배님은요?”
조지현의 물음에 강석원이 망설임 없이 나도, 라고 대답했다. 어디에 누구와 간다는 정확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한마디가 가리키는 감정이 무엇인지 안다. 감정이 거세게 밀려들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무겁고 사나운 물소리가 두 사람을 세계로부터 가두었다.
“둘만 있는 것 같아요.”
조지현이 문득 입을 뗐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길 바랐다. 아무도 없었으면 했다. 그저 지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게.”
강석원이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빗소리가 시원했다.
“우욱…….”
뒤에서 등을 쓸어내려주는 손이 멈칫한다.
“병원 갈래?”
“아니요. 괜찮습니다.”
모조리 쏟아내고 나니 차라리 시원했다. 세면대로 가서 입을 헹궜다. 강석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런 조지현을 지켜보았다. 조지현은 수건으로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거울로 확인한 안색이 창백하다.
“체한 거야?”
“네.”
저녁을 먹다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다음 주면 개학이구나, 강석원이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조지현은 말없이 젓가락만 움직였다.
개학을 하면 집으로 돌아간다.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가슴이 콱 막힌 듯 둔통이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통증은 계속되었고 결국에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게 되었다.
“물 마실래?”
“아니요. 그냥, …….”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을 잡아끌어 소파에 앉혔다. 길게 숨을 몰아쉬던 조지현이 강석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모처럼 여행 와서…….”
강석원이 조지현의 옆에 앉는다. 그가 손을 뻗었다. 몸이 저절로 이끌리듯 조지현은 그에게 안겼다.
높은 바람소리가 들렸다. 바다를 세차게 매질하는 소리다.
조지현은 숨을 몰아쉬며 가까스로 통증을 참아냈다.
“지현아.”
다정한 부름에 천천히 시선만 움직였다.
“같이 살래?”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아니었다. 너 하나 고생시키지 않고 살게 해주겠다는 반짝이는 약속의 말도 없었다.
꾸며내지 않은, 모자람 없이 온전한 진심 그 자체를 건네고 남자는 묵묵히 기다린다. 초조함을 뒤로한 채.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맺히기가 무섭게 후드득 떨어진다. 무릎에 얹은 손이 가늘게 떨렸다.
“선배님, 저는…….”
숨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조지현은 입술을 길게 물었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 아프세요.”
강석원은 대답 대신 조지현의 등을 쓸어내렸다.
“평소에는 괜찮아 보이는데 정신이 온전치 않으세요. 어릴 때부터, 계속, ……아마도 계속 그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실 거예요.”
강석원이 괜찮아, 라고 나직이 말했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괜찮지 않아요. 전혀. 외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지현이 너는 엄마랑 쏙 빼닮아서 걱정이라고. 어릴 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조지현의 눈에 두려움이 일렁였다.
“정신병은 유전되는 거 아세요?”
가득 고인 눈물이 와르르 무너지듯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결코 끝까지 감추지 못할 비밀이다.
“외할아버지도 외삼촌도 자살하셨어요. 이유도 없이, 그냥 갑자기요. 모르겠어요. 저도 언젠가는, ……, 그러지 말자고 노력하지만, ……. ……. 저도…….”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런 조건 없이 강석원은 자신을 소중히 대해주었다. 그 다정함 뒤에 언제까지 비겁하게 자신을 숨길 수는 없다. 그것이 이 사람에 대한 예의였다.
하지만, 두렵다.
별것 아닌 사소한 이유로 시작된 감정이, 이토록 타당한 이유로 끝날까봐.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이고 연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죄송합니다. 선배님.
속삭이는 말들이 떨리는 입술 안으로 사그라진다. 침묵이 두려워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뺨에 닿았다. 흠칫, 놀라는 얼굴을 쥐고 강석원이 저를 바라보게 했다. 묵직한 시선이 마음을 붙든다.
“같이 살자.”
“…….”
“계속.”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할까봐 몇 번이고, 계속,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아이처럼 끌어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비가 거세게 세계를 뒤흔들었다.
둘뿐이었다. 그날만큼은, 오롯이 둘이었다.
좁은 자취방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쾌활하게 웃으며 아들을 맞이했다.
개학을 하고 학교를 나갔다. 아무렇지도 않게 병든 일상으로 돌아왔다. 좁은 자취방에서 보낸 한 달간의 시간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득하다.
그렇지만 전과 같지는 않았다. 약속의 말이 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같이 살기로 했다. 미성년자에게는 쓸데없는 굴레가 덧씌워지기에 조지현은 졸업을 기다리기로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던 강석원이 자신을 알아보고 눈인사를 건넸다. 조지현은 짧게 묵례했다.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계단 앞에서 다시 인사를 했다.
그뿐이었다. 가슴에 어스름한 열기가 퍼진다.
교실로 들어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책을 펴고 한참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다가와 어깨를 감쌌다.
“오! 조지. 방학 끝나자마자 공부냐?”
최기열이었다. 조지현은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돌렸다.
“방학동안 뭐하고 지냈냐? 보충 수업도 안 나오고.”
어깨를 감싼 손이 유난히 거슬렸다. 최기열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뭐야.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도 안 해? 어머니한테 많이 혼났냐? 새끼, 사내가 쪼잔하기는. 조지는 그 나이 먹고 아직도 엄마 무서워하고 그러나 봐.”
조지현은 최기열의 팔을 뿌리쳤다.
“최기열.”
조지현의 입에서 제 이름이 불리자 최기열이 어, 어, 하고 말을 더듬었다.
“말 걸지 마.”
“뭐?”
“나한테, 앞으로 말 걸지 말라고.”
단호하고 차가운 거절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하고 어버버, 입만 벙긋거리던 최기열의 얼굴에 수치와 분노가 번갈아 스쳤다.
“이 씨발, 새끼가.”
최기열이 조지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눈이 마주쳤다. 조지현의 시선이 무서우리만치 고요하고 냉정했다. 최기열은 거절당했다는 당혹감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내둘렀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조지현이 쓰러졌다. 때맞춰 들어온 담임이 그 모습을 보고 눈을 부라렸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이 녀석들이 개학하자마자! 당장 따라와!”
조지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터진 입가를 닦아냈다. 최기열의 어쩔 줄 몰라 하는 시선을 느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교무실로 들어서자 담임이 씩씩거리며 손짓했다. 나란히 손을 뒤로 모으고 서서 담임의 훈계를 들었다.
“개학 첫날부터 왜 그래? 어? 누가 먼저 그랬어.”
최기열도 조지현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진짜.”
담임이 출석부 모서리로 두 사람의 머리를 번갈아 밀었다. 슬쩍 돌아간 고개에 조지현은 그제야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들어온다.
“조지현. 너 뭐하냐.”
“……, 죄송합니다.”
담임이 삐딱하게 앉아 형식적인 말을 늘어놓았다. 최기열의 어머니는 학부모회 회장이었다. 그에게는 어떤 위해도 돌아가지 않을 게 분명했다.
조지현은 묵묵히 담임의 말이 끝나길 기다렸다.
“어휴, 진짜. 아무튼 잘해라. 아침에 개학 조회 방송으로 하니까 가서 반장한테 준비시키라고 하고.”
“알겠습니다.”
최기열이 대답했다.
“둘 다 나가.”
조지현은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을 걸어 나왔다. 뒤에서 닿는 시선이 따가웠다. 교무실을 나와 모퉁이를 돌자마자 최기열이 조지현, 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얘기 좀 해.”
“할 얘기 없어.”
“내가 그 얘기 한 건, 그냥, ……, 아무튼 미안한데, 존나 그렇다고 다짜고짜 애들 앞에서 그딴 식으로…….”
그때 커다란 손이 뻗어와 조지현의 턱을 감싸 쥐었다. 놀란 조지현이 눈을 부릅떴다. 단단한 거구가 최기열과 조지현의 틈을 가로질러 섰다. 강석원의 시선이 터진 입술을 훑는다. 그러고는 천천히 최기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섬뜩하고 잔인한 살의를 띠고.
최기열이 숨을 삼키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양호실 가.”
“괜찮습니다.”
조지현의 대답을 듣고도 강석원은 손을 놓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거리였다. 조금만 얼굴을 내밀면 입술이 닿을 만큼.
저 입술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이름을 부르는 순간을 알고 있다. 조지현은 열 오른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말을 이었다.
“들어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따 가도 돼.”
얼마 전에 한 시합에서 강석원은 우승했다. 자세히는 몰라도 제법 이름이 있는 시합이었던 터라, 학교에서도 거기에 관해 표창을 한다고 들었다. 경쟁과 명분을 좋아하는 교장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지현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강석원은 손을 놓았다. 최기열은 옆에서 입술만 질근질근 깨물었다.
몸을 돌리려던 강석원이 문득 지현아, 하고 조지현을 불렀다.
“네?”
“이따 보자.”
언제, 어디서 보자는 말도 없었지만 조지현은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강석원이 알아서 따로 말해주겠거니 생각했다.
강석원은 금세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교실로 돌아가려던 조지현은 옆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최기열의 기척을 알아챘다. 질투와 분노, 수치와 패배감이 뒤섞인 눈빛이 시퍼렇게 일렁였다.
조지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최기열을 지나쳐 복도를 걸었다.
“그럼 당분간은 보기 힘들겠네요.”
음, 닷새가량, 하고 강석원이 중얼거린다.
“…….”
그리 길지도 않은 시간이다.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합숙 훈련이 드문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하세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마땅찮다는 그의 표정에 조지현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왜 그러세요?”
“걱정 돼서.”
“제가요?”
조지현이 되물었다. 요즘에는 그나마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성적도 전교 일 등을 유지했고, 어머니도 그날 이후로 무슨 생각인지 잔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나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인 최기열은, 가끔 눈이 마주치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슬아슬한 평화였지만, 조지현으로서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나날이었다.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이 아니 나, 하고 대답했다.
“선배님이요?”
뜻밖의 말에 조지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본인을 걱정하기에 강석원은 지나치게 강건했다. 잠시 눈을 껌뻑거리던 조지현이 시합 때문에요? 하고 재차 물었다.
“시합은 별로 신경 안 써.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
“그럼 왜…….”
강석원이 물끄러미 조지현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기억하기라도 하려는 듯 샅샅이 훑는 시선에서 조지현은 강석원이 던진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된 이후로, 단 하루도 얼굴을 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강석원은 늘 조지현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운동을 하러 갔다. 벌써 갈급이 묻어나는 남자의 시선에 조지현은 얼른 열이 오른 얼굴을 떨구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남자의 손목이 들어왔다.
“다치셨어요?”
연습을 할 때 복싱 밴디지를 한 것을 보았지만 저렇게 손목에만 붕대를 감아둔 것은 처음 보았다.
“아니.”
그렇게 대답하는 표정이 조금 미묘했다. 어딘지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멋쩍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
이유를 물어보려던 조지현을 누군가 휙 잡아당긴다. 상대를 확인한 조지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지현아. 지금 오니?”
“…….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 아들 기다리고 있었지.”
어머니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강석원을 위아래로 훑는다. 강석원이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지만 그녀는 본 체도 하지 않는다.
“학교 선배님이세요.”
“그래? 3학년이면 공부할 시간도 없을 텐데.”
“그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선배님 안녕히 가세요.”
조금 있으면 성적에서부터 집안 재산까지 조사하고 들어올 게 뻔했다. 조지현은 얼른 어머니께 들어가세요, 하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이 지나면 닷새 뒤에나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집으로 가는 걸음이 무거웠다.
“누구야?”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어머니가 바로 묻는다.
“학교 선배님이요. 저 앞에서 만나서요.”
“그래? 썩 공부 잘할 것 같은 느낌은 아니던데.”
“잘 모르겠어요.”
조지현은 얼른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가길 기도했다.
“그나저나 이번 시험 전국 퍼센티지 많이 올랐더라. 엄마는 우리 아들이 정말 너무 자랑스럽다.”
“……, 감사합니다.”
숨이 막혔다. 지금도 거울로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눈이 소름끼쳤다. 땡, 엘리베이터 문이 드디어 열렸다. 조지현은 작게 숨을 몰아쉬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갔다.
“지현아. 너 요즘 여자 친구 사귀고 그러는 건 아니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심장이 쿵쿵 뛰고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알고 하는 소리가 아닐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잔등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갑자기 핸드폰 얘기를 하지 않나. 요즘 항상 늦는 것 같아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오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공부를 하다 강석원이 오면 집까지 같이 걸어오는 게 전부였다.
“그래. 여자는 대학가도 많아. 사실 대학에서도 굳이 여자를 사귈 필요는 없지. 나중에 좋은 직장 구하고 나면 엄마가 좋은 여자 소개시켜줄게.”
말만 들어도 지치는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말없이 신발을 벗었다.
“아참, 그리고 숙현이 아줌마라고 알지?”
불길한 예감이 섬뜩하게 가슴을 질렀다. 조지현이 네, 하고 대답하자 어머니는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 집 남편이 너희 아버지랑 알고 보니 같이 사업하시는 분이라고 하더라. 그 아들이 너랑 같은 학교 다니지?”
알면서도 묻는 것이다. 조지현은 네, 하고 짧게 대꾸하고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래. 잘됐어. 이번 주 주말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거든? 같이 가자.”
“네? 이번 주요?”
이번 주 주말이면 당장 내일모레다. 조지현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다들 아는 사이니까 어색할 거 없고 잘됐어.”
“……, 저는, 가고 싶지 않아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같은 학교 친구끼리.”
친구도 뭣도 아니었다. 조지현은 최기열이 싫었고 되도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저는 도서관에서 공부나 할게요.”
“안 돼.”
어머니가 단호하게 말하며 눈을 부라린다.
“나도 보일 것은 하나쯤은 있어야지. 내가 숙현이보다 못난 것도 없는데.”
“…….”
조지현은 그제야 어머니가 자신을 앞세워 그 집에 입성하려는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튼 모레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라. 알았지?”
“저녁만 먹으면 되나요.”
맥없이 묻는 아들의 말에 어머니가 당연하지, 하고 웃는다.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조지현의 얼굴이 한층 파리해졌지만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콧노래를 부르며 안방으로 사라졌다.
제 방으로 들어와 조지현은 문을 닫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펼친 뒤 의자에 앉았다.
당장 닷새가, 까마득했다.
“어머, 얘. 오랜만이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현관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그녀가 뒤에 선 소년을 알아채고는 어머, 하고 눈을 빛냈다.
“네가 지현이구나. 너희 엄마 젊었을 때랑 어쩜 그리 똑같니?”
“안녕하세요.”
“그래. 우리 기열이하고 같은 반이라며. 얘는 아침부터 옷 갈아입고 그러더니 왜 안 내려왔지? 기열아.”
위층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조지현을 발견한 최기열이 얼굴을 붉히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하고 제 어머니를 타박했다.
“내 정신 좀 봐. 얼른 들어오세요.”
안내받은 거실은 조지현의 식구들이 살고 있는 집보다 더 넓었다. 고급스러운 소파와 가구들을 둘러보는 어머니의 심기가 뒤틀리고 있음을 조지현은 어렵지 않게 알아챘다.
“이거 선물입니다.”
아버지가 와인을 내밀자 최기열의 아버지가 온화한 얼굴로 받아들었다. 둘은 이내 사업 얘기로 빠져들었다.
조지현은 소파 끝에 앉아 얼른 이 어색한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사모님, 식사준비 다 되었습니다.”
안에서 다소곳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화로운 대리석 식탁에는 맛깔스러운 요리가 놓여 있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엄마. 차린 게 없긴요. 대리석 식탁 부러지겠다.”
최기열의 말에 그의 어머니, 이숙현이 눈을 살짝 흘기며 웃는다. 조지현은 말없이 식탁 끄트머리에 앉았다. 최기열이 그 앞에 앉았다.
식사 시간 자체는 평범했다. 대화가 오고갔고 요리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조지현은 말없이 젓가락만 움직였다.
“지현이는 입맛에 안 맞니? 왜 그렇게 적게 먹어?”
“아닙니다. 맛있습니다.”
“생긴 것도 예쁜데 목소리도 참 예쁘네. 공부도 그렇게 잘한다면서?”
“그냥 뭐 그렇지.”
어머니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이번에도 전교 일 등이라며. 기열이가 그러던데?”
“제가 언제 그랬어요.”
최기열이 팔짝 뛰며 투덜거렸다.
“조지가 일 등 했다고 네가 그랬잖아. 이름 때문에 별명이 조지야? 너무 귀엽다.”
“어머, 그래? 난 처음 들어보는데. 정말 귀엽네.”
이번에도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입에 넣은 쌀밥이 모래처럼 버석하게 느껴졌다.
“따로 다니는 학원이라도 있어? 우리 기열이도 내년에 고3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우리 지현이는 요즘 혼자 해.”
“아니, 혼자 어떻게 그래? 따로 과외 같은 거 받는 거 아니야? 얘, 너 좋은 선생님 있으면 같이 좀 공유하자.”
어머니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진다.
“그냥 혼자 해도 워낙 잘해. 애가 순하고 머리가 좋아서. 제 아빠 닮아서 그렇지. 내가 그래서 이 사람이랑 결혼했잖아.”
입맛이 싹 달아났다. 조지현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 먹은 거야? 그것밖에 안 먹어도 돼?”
이숙현이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다.
“얘 원래도 조금밖에 안 먹어요. 그냥 둬요.”
최기열이 끼어들었다. 조지현은 말없이 물을 마셨다. 시선이 느껴졌지만 조지현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다과가 이어졌다. 사업 얘기와 교육 얘기가 오고갔다. 어머니는 그럴 듯한 가정을 꾸며내 떠들었다. 조지현은 섬세한 공예품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두통을 참아냈다.
“어머, 너희는 지루하겠다. 기열이 네가 방 좀 구경시켜줘.”
“괜찮…….”
어머니가 조지현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래. 둘이 같은 반이니까 친하게 지내야지.”
어머니가 거들었다. 최기열이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지현은 한숨을 삼키며 그의 뒤를 따랐다. 2층과 이어지는 계단은 모두 38개였다. 의미 없이 숫자를 되뇌며 조지현은 계단을 올랐다.
최기열이 흘깃 조지현을 돌아보았다.
“여기, 내 방이야.”
그가 문을 열어젖혀 방을 안내했다. 청소를 해뒀는지 모든 물건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2층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최기열의 방은 눈이 부실 만큼 으리으리했지만 조지현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다. 조지현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의 방 앞에 우뚝 서 있을 따름이었다.
“들어 와. 책이나 읽든가.”
차라리 그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조지현은 방으로 들어갔다.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장서를 둘러보는 조지현에게 최기열이 다가왔다.
“음료수 마실래?”
“아니.”
“그럼 뭐 과일이라도 가져다줄까?”
“아니.”
최기열의 들뜬 표정이 구겨졌다.
“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조지현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최기열은 열병을 앓는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의 목울대가 꿀꺽 느리게 움직였다.
“조지현.”
그가 조지현의 어깨를 붙들었다.
“놔.”
조지현이 단호하게 그의 손을 쳐냈다. 아니, 쳐내려고 했다. 최기열이 조지현의 어깨를 쥔 채로 그대로 끌어안았다.
“미쳤어? 뭐하는 거야!”
“잠깐, 가만히 좀 있어 봐.”
“무슨……!”
최기열이 조지현을 그대로 침대로 쓰러트렸다. 그의 눈이 욕망으로 번들거렸다. 조지현은 아연실색해서 눈을 부릅떴다. 최기열이 멍청한 줄은 알았지만 아래층에 부모님을 두고 이런 짓을 벌일 정도로 멍청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지현아, 나 진짜 미칠 거 같단 말이야.”
최기열이 입술을 가져다대며 열에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름이 돋았다. 조지현은 그를 밀어내려고 팔을 휘둘렀다. 최기열이 무릎으로 조지현의 몸을 누르고 그의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더듬었다. 구역질이 밀려왔다. 조지현은 필사적으로 최기열을 밀어냈다.
“가만히 좀……!”
셔츠 안을 더듬던 최기열의 눈이 그 순간 크게 벌어진다. 그러더니 하하, 웃으며 제 이마에 손을 얹는다.
“강석원이한테 이미 대줬냐?”
그렇게 묻는 최기열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가라앉았다.
“무슨 소리를…….”
최기열이 조지현의 옷자락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여기 그 새끼가 만든 쪼가리 아니야? 시발, 한두 개도 아니잖아.”
조지현이 황급히 옷을 아래로 내렸지만 최기열의 시선은 이미 하얀 몸에 남은 순흔을 낱낱이 확인한 후였다.
“하긴 그 새끼가 지금까지 널 안 따먹었을 리가 없지. 그 새끼가 널 어떻게 쳐다보는 줄 알아?”
“비켜.”
“당장에라도 네 다리를 벌리고 네 보지에 박고 싶어 죽으려는…….”
최기열의 말은 뺨을 후려갈기는 손에 가로막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얼어붙은 최기열을 조지현이 밀어내고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조지현!”
최기열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따라 나왔지만 조지현은 계단을 내려온 후였다. 사업 얘기로 바쁜 아버지들은 일찌감치 서재로 자리를 옮겼고 거실에 있던 것은 어머니들뿐이었다.
“어머. 지현아. 무슨 일 있어?”
이숙현이 깜짝 놀라 물었다. 뒤에 앉은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다. 그저 짜증이 섞인 눈으로 아들에게 다시 올라가 오늘의 아들 노릇을 마치라고 종용할 뿐이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뭐? 아니, 왜 벌써? 좀 더 놀다가지 않고.”
“아닙니다. 오늘, …….”
차마 즐거웠다는 말은 가식이라도 할 수 없었다. 조지현은 감사했습니다,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집을 나왔다. 최기열이 혹시 자신을 잡지는 않을까 두려워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달렸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 묶지도 못한 신발 끈을 밟고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의 한심함에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조지현은 몸을 일으켜 신발 끈부터 묶었다. 손에 지끈한 통증이 느껴져 확인하니 엉겁결에 짚은 손바닥이 까져 있었다. 한 달 전에 입은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새겨진 것이다. 차라리 낫다. 다른 사람이 입힌 상처보다 자신이 만든 상처가 훨씬 보기 좋았다. 손바닥에 뭉글뭉글 솟아오른 피가 제각각 괴이한 모양으로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조지현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셔츠 안을 더듬던 최기열의 손이 아직까지 붙어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머니가 자신을 쳐다보던 눈빛이 떠올랐다.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참아냈다.
며칠이 지났지. 며칠이 더 남은 거지.
속으로 남은 날짜를 헤아리다가 조지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단 며칠도 이렇게 지옥 같은데, 앞으로 남은 일 년 반은 대체 어떻게 버티려는 것일까. 게다가 강석원은 반 년 뒤 이 학교를 졸업한다.
“…….”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린다.
서늘한 얼굴과 단정하게 이어지는 콧날, 단단한 턱, 마디가 분명한 손가락, 그리고 눈동자. 엷게 열기를 띠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보고 싶어.
처음 느끼는 강렬한 충동에 심장이 울렁거렸다. 조지현은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통렬하리만치 벅찬 감정에, 가슴이 저몄다.
탕, 탕, 탕.
미트를 내리치는 사나운 소리가 체육관 안을 가득 메웠다.
“오른쪽으로 더 깊게. 몸 숙여서, 그렇지, 그래.”
관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의 몸은 한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그걸 바라보는 관장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스파링 상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방어만 하고 있다.
“더 깊게, 그렇지. 그렇게, 뭐하는 거야?”
관장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남자가 잠시 움직임을 멈춘 사이 스파링 상대가 틈을 노려 주먹을 날렸다. 동시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종잇장처럼 날아갔다. 강석원이 피스와 글러브를 빼고 링 위에서 내려왔다.
“강석원. 너 왜 그래.”
그렇게 말하던 관장의 시선이 곧, 강석원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 거기에는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한 소년이 서 있었다. 언뜻 스치는 기억에 관장이 눈가를 찌푸렸다.
강석원이 성큼성큼 관장의 곁을 지나 소년에게 다가갔다.
“웬일이야.”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다. 멍하게 앞을 바라보던 조지현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숨을 들이켰다. 강석원이 관장을 돌아보았다.
“5분간 휴식.”
관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뱉었다. 강석원은 조지현을 데리고 건물 계단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조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맞잡은 손끝이 떨리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아 손을 뒤로 감추었다. 최기열의 집을 나오고 나서 정신을 차려보니 이곳이었다.
머리 위에서 낮은 한숨이 들려왔다. 조지현이 고개를 들었을 때, 강석원은 체육관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어쩌지. 훈련 중에 찾아와서 화가 난 걸까. 사과를 해야 하는데. 무례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과하고 돌아가자.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할까.
조지현이 고개를 들었을 때, 관장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야! 미쳤어? 어딜 나가!”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고 나온 강석원을 향해 관장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제정신이야. 시합이 코앞인데 어딜 나갔다 온다는 거야.”
“내일 오겠습니다.”
“내일 같은 소리하고 있어. 당장 와. 당장 안 오면…….”
강석원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열린 문으로 조지현을 밀어 넣고 저도 탄 후로 문을 닫는다. 강석원 이 새끼야, 하는 벼락같은 외침이 머리 위로 멀어졌다.
땀도 제대로 닦지 못한 강석원의 몸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자신을 샅샅이 살피고 있는 걱정스러운 시선에 조지현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땡,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지현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선배님.”
조지현이 입을 열자 강석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간을 망쳐서는 안 된다. 비록 내 시간이 뒤틀린 채라도.
조지현은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일은 사과드려야 할 것 같아서 사과드립니다.”
“…….”
“죄송합니다. 오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는데, …….”
최기열과의 일을 입 밖에 낼 수 없다. 그랬다가 강석원의 중요한 시합을 그르치게 된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그냥 보고 싶어서……. 선배님께, 제가, ……쓸데없이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서, ……, 죄송합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숨소리가 이어질 뿐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가만히 자신을 어르던 그 규칙적인 숨소리다.
조지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미묘한 표정이었다. 조금 놀란 듯하고 어딘지 기쁜 듯하기도 한 엷은 기색이, 그의 눈에 스쳤다.
눈을 깜빡일수록 그 감정이 진해지는 것 같다. 조지현은 어물어물 시선을 다시 내리고 말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럼 들어가 보세요. 관장님 많이 화나신 거 같은데.”
강석원이 조지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낡은 계단으로 올라 2층 상가 안쪽으로 그는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비어있는 상가 사무실로 들어가 그는 몸을 돌려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그는 흐린 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라면 마음껏 부려.”
“…….”
“얼마든지 받아줄 테니까.”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지현은 강석원의 등을 끌어안았다. 너르고 단단한, 이 세상에 유일하게 붙들 수 있는 존재를.
사람을 끌어안고 있는 와중에도 그 사람이 그리운 애달픈 감정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라, 조지현은 말없이 뜨거운 것을 삼켜냈다.
“아……!”
발가락을 핥는 뜨끈한 감각에 조지현은 설핏 눈가를 찌푸리며 탄식 같은 소리를 내뱉었다.
조지현의 발목을 움켜쥔 강석원이 발가락에서부터 발목까지 입을 맞추었다. 정사의 흔적이 길게 늘어진 흔적들을 따라 그는 천천히 혀로 핥고 이를 세웠다.
그 관능적이며 야성적인 행위에 조지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선배님, 제발, 하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자 강석원이 고개를 들었다.
“……더는 못하겠어요.”
사정을 거듭한 아래가 잔뜩 예민해져 아주 작은 자극에도, 저릿저릿할 만큼 아팠다. 강석원이 고개를 주억거린 후 느릿하게 허리를 숙였다. 체격이나 신장 차이는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이렇게 직접 몸을 마주 대할 때는 강석원의 거구를 신랄할 정도로 느끼게 된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그의 묵직한 중량에 어느새 조금씩 몸이 안도를 찾아간다. 강석원의 얼굴을 바라보던 조지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체중, 많이 감량하신 거예요?”
강석원이 십 킬로쯤, 하고 여상하게 대꾸했다.
어제 시합이 끝났다. 무서운 신예의 등장이란 제목을 앞세워 여기저기에서 기사가 났다. 백 년만의 천재라는 칭송을 들은 신인은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도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굉장하시네요.”
조지현의 말에 강석원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린다.
“금방 다시 올라가.”
“그래도요. 저는 절대 못할 거 같은데…….”
“나도 전교 일 등은 못해.”
엉뚱한 대꾸에 조지현은 작게 웃음을 삼켰다. 강석원의 눈에 금세 어릿어릿한 열기가 인다.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강석원이 미안, 하고 속삭였다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머리카락을 끌어안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선배님.”
조지현이 밭은 숨을 내뱉으며 그를 불렀다. 부추기는 것인지 제지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음성에 강석원이 눈가를 살짝 좁혔다.
“저, 가야 하는데…….”
강석원이 벽에 걸린 시계를 돌아본다. 지금쯤 나서야 조지현이 평소에 들어가는 시간이다.
“그래.”
강석원이 몸을 일으켰다. 정으로 쳐내 만든 조각처럼 단단하게 붙은 근육들이 움직였다. 사람의 몸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조지현은 강석원을 보며 알게 되었다. 조지현은 얼른 시선을 거두고 시트로 몸을 감았다.
샤워를 하려고 일어서는 그의 손을 강석원이 잡아챈다.
“누가 그랬어.”
조지현의 표정이 흐려졌다. 가리려고 했는데 보이고 만 것이다. 강석원의 차갑고 서늘한 눈빛이 조지현의 엉덩이 아래 허벅지를 훑는다. 불그죽죽하게 피가 터진 상처가 뱀이 지나간 자리처럼 남아있다. 조지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시트로 마저 다리를 감쌌다.
“깜빡 잊고 숙제 안 해가서 맞았어요.”
“…….”
어머니는 아들을 때렸다. 아버지가 말려도 소용없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부모를 망신시키는 아들의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피가 튀고, 살이 터지도록 때리고 나서 그녀는 아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사랑해서, 너무나 사랑해서 네가 잘못될까 봐 걱정된다고,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모든 게 진심이다. 그래서 더 진저리나게 무거운 진심.
“저희 수학 선생님 무섭잖아요.”
강석원은 무표정하게 조지현을 응시할 뿐이었다.
“저 먼저 씻을게요.”
조지현은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강석원은 옷을 갈아입고 앉아 있었다. 할 말이 있다는 기색이었기에 조지현은 가만히 그의 앞에 앉았다.
“이번 시합 우승 상금 제법 나왔어.”
“……, 축하드립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에 강석원이 입을 뗐다.
“집 나오지 않을래?”
“…….”
강석원이 모를 리 없다. 애당초 그를 속이겠다는 생각이 잘못이었다. 그는 늘 보고 있다. 자신을, 낱낱이.
“졸업하고요.”
강석원의 턱이 단단하게 굳는다.
어쩔 수 없다. 부모를 가진 미성년자에게는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의 신고를 통해 배웠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아이가 겁이 많아서 그런 거라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부모를 보며, 경찰들은 허허 웃으며 아이의 등을 떠민다. 법적인 신분을 사지 않고는 네가 그 집을 절대 탈출하지 못할 것이라고, 매번 통렬히 깨닫게 한다.
“졸업하고 집 나올 거예요.”
무릎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칫 강석원까지 휘말리게 되면, 안 된다. 일 년 반만 버티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할게요. 꼭 그렇게 할 거예요. 힘들어도 참을게요.”
강석원이 손을 뻗어 조지현의 손을 움켜쥐었다. 떨리는 손끝이 차다.
“내가 힘들어서 그래.”
“…….”
누구에게도, 무엇에게도 침범당하지 않을 그의 지극한 강건함이 자신으로 인해 흔들린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심장에 아련한 둔통이 퍼진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강석원이 손목에 두른 붕대를 풀어냈다. 조지현은 눈을 껌뻑거리며 드러난 그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어, …….”
“다음번 전국 체전에서 우승하면, 동양권이고, 그 다음은 세계선수권이야.”
어려운 단계를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한다.
“우승할 때마다 새겨 넣으려고 했어.”
강석원의 손목에는 Dear, 가 새겨져 있다. 빈자리를 차지할 나머지 글자들이 무엇일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왜…….”
George란 별명을 조지현이 싫어한다는 사실을 강석원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하필 그걸 새겨 넣으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편지가 아니었으면, 너한테 말도 못 붙이고 끝났을 테니까.”
열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구겨버린 편지가 떠올랐다. 조지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송합니다. 정말, 장난인 줄 알고…….”
“반은 장난이었어.”
“…….”
“그렇게 해서라도 말 걸어보고 싶었어.”
조지현은 남자의 손목을 바라본다. 글자는 손목의 동맥을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별거 아닌 이유로 장난처럼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계절이 지나면 한 글자씩 새겨 넣을게.”
강석원이 담담하게 말한다.
여섯 번의 계절이 지나고 나면, 졸업이다. 약속의 말을, 남자는 제 몸에 새겨 넣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겠습니다, 거스러미가 인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였다.
한 때의 치기일 수도, 앓고 지나가는 열병일 수도 있다. 제 손목의 글자를 지우려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달큼한 열기에 취해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게, 전부였던 시간이었다.
“열흘이요?”
“응.”
조지현은 눈을 껌뻑이다가 손등을 타고 아이스크림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허둥대며 손수건을 찾는 그의 손을 강석원이 붙들었다. 제 교복 셔츠자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닦아주었다.
“괜찮습니다.”
조지현이 뒤늦게 손수건을 꺼냈지만 강석원은 신경 쓰지 않고 마저 닦는다. 어차피 세탁할 거야, 강석원이 평연한 어투로 말한다.
“감사합니다.”
조지현은 남은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었다. 목이 아플 만큼, 달큼한 아이스크림의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 언제부터 가시는 거예요?”
“다음 주.”
다음 주에는 9월 모의고사가 있다. 그러나 이미 대학이 내정된 상태인 강석원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 친선 경기도 유명한 상대가 신인인 강석원을 먼저 지목해왔을 만큼 이례적인 경우였다.
“비행기 타시겠네요.”
“그렇겠지.”
일찌감치 아이스크림을 모두 먹어버린 강석원이 막대를 손끝으로 쥐고 흔들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힘들 거 같아. 한숨처럼 어린 그의 말에 조지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무엇이 힘들다는 말인지, 알 수 있었다. 목덜미가 뜨끈했다.
수업종이 울렸다. 강석원이 몸을 일으켰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저도 모르게 흠칫할 만큼 엄청난 체구였다.
“이따 보자.”
“네.”
두 사람은 서로의 교실로 헤어졌다.
이따금 강석원은 교실로 찾아왔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거나 하지도 않고 음료수를 주고 가거나 아이스크림을 건네고 갔다.
그것만으로 좋았다. 강석원이 졸업한다면 이런 소소한 만남은 없을 테지만, 시간이 지난다. 그러면 같이 살 수 있다. 내일이 지나면 또 다른 내일이다. 그런 생각만으로 마음이 느슨하게 풀렸다.
앞문을 열자 교실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조지현은 한참을 눈을 껌뻑였다.
“음악실이야.”
교실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조지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자리로 가서 음악책을 챙겼다. 교실을 나가려는데 최기열이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조지현. 미안해. 내가, 그날은……. 정말 미안하다.”
최기열이 손바닥으로 제 머리를 흩트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날 이후 최기열은 몇 번이나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조지현은 무시로 일관했다. 조지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복도를 따라 걸었다.
“강석원이랑 사귀냐?”
“…….”
최기열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조지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사귀는 거냐고.”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거야…….”
최기열이 제 입술을 짓씹는다. 최기열, 하고 부르는 조지현의 목소리가 몹시 차가웠다.
“그날 일은 없는 일로 할게.”
최기열의 눈이 언뜻 커진다. 조지현은 무심한 투로 말을 이었다.
“미친개한테 물린 셈 칠 테니까, 부탁인데 서로 없는 듯이 살자.”
“왜 내가 미친개야. 왜 강석원은 되고 나는 안 되는데!”
최기열이 분하다는 듯이 외치며 조지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그때 복도 저쪽에서 최기열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뭐하냐. 최기열. 음악실 안 가?”
“어, 응.”
최기열의 손이 황급히 떨어져 나간다.
“너 또 조지 괴롭히고 있었냐?”
“괴, 괴롭히긴 누가 괴롭혀.”
최기열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하긴 우리 조지가 요즘 들어 존나 섹시해지긴 했지. 너 조지 좋아하는 거 아냐?”
개중 하나가 키득거리며 최기열을 놀렸다. 최기열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개소리 하지 마. 내가 미쳤다고 사내새끼를, 역겹게.”
“크크크. 미친 놈. 빨리 가기나 하자.”
다들 음악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최기열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조지현은 무표정히 서 있다.
최기열은 비참함에 고개도 들지 못했다. 조지현은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최기열의 말에는 그런 가치조차 없다는 얼굴이었다.
조지현이 옆을 지나갈 때까지 최기열은 꼼짝하지 못했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던 강석원을 발견하고 조지현은 눈을 껌뻑였다. 뛰듯이 걸어갔다.
“오늘 가시는 거 아니었어요?”
“응. 잠깐 들렀다 가려고. 서류 제출할 것도 있고.”
겸사겸사, 라고 말을 하며 강석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지현은 일부러 그가 들렀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버스 왔다.”
학교로 가는 버스가 정류장에 들어섰다. 버스에 올라탔다. 뒷자리가 비어 있어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습관처럼 단어장을 꺼내들었지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은 없었다.
오늘이 지나면 열흘 뒤에나 보는구나.
조지현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턱을 괸 채로 이쪽을 바라보던 강석원의 눈이 언뜻 가늘어진다.
얼마 전에 체육관 관장이 강석원을 보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돌에서 꽃이 피는 걸 본 기분이라고 했던가. 운동을 마치고 나온 강석원이 저를 기다리던 조지현을 발견하고 지었던 표정과도 비슷하다.
창 밖에서 바람이 불어들었다. 하복 아래의 팔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강석원이 창문을 닫았다.
“다음 주부터는 춘추복 입는대요.”
아마 돌아오시면 춘추복일 거예요, 조지현이 덧붙이는 말에 강석원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계절이 변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며 두 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학교 현관에 도착하자 조지현은 여느 때와 같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잘 다녀오세요.”
인사는 어젯밤에도 나누었는데 한 번 더, 작별 인사를 나누자니 마음이 쌉싸래하다.
“할 얘기 있는데.”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조지현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강석원이 아무 말 없이 앞장서 걷는다. 조금 굳은 듯한 기색에서 조지현은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나 싶었다. 복도 끝 미술실로 들어간 강석원은 문을 닫았다.
“무슨…….”
강석원의 입술이 조지현의 입술을 덮었다. 뜨거운 손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학교에서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던 그의 급작스러운 행동에 조지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혀가 부드럽게 입술을 핥고 치열을 더듬었다. 더없이 열중한 남자의 얼굴이다. 조지현은 어느새 눈을 감고 강석원의 목을 끌어안았다. 강석원이 조지현을 안아들어 책상에 앉혔다.
강석원이 허리를 숙여 몸을 바싹 끌어안고 한참동안 입을 맞추었다. 한숨 같은 숨소리가 이어진다.
“가기 싫다.”
강석원이 낮게 중얼거린다. 그답지 않은 말에 조지현은 눈을 껌벅이다가 대답한다.
“중요한 자리잖아요. 가셔야죠.”
“그래.”
그렇게 대답하는 입술이 연신 조지현의 뺨에, 눈가에, 입술에 닿는다. 조지현은 목구멍에 뜨거운 덩어리가 가득 찬 듯이, 가슴이 답답했다.
매일 아침 정류장에서 만나 같이 학교에 왔고, 가끔은 같이 저녁을 먹고 집에 오는 길을 함께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게, 전부인데, 마치 그게 자신이 가진 전부인 듯 느껴진다.
“몇 시 비행기예요?”
“저녁.”
아무리 그래도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은 없을 것이다. 둘 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누구도 손을 놓지 않았다.
“전화해.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강석원이 말하며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내민다. 조지현이 정색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못 받습니다. 이런 거.”
“내가 듣고 싶어서 그래.”
“…….”
“국제 전화 카드 사면 돼.”
강석원이 기어이 조지현의 교복 주머니에 지폐를 구겨 넣었다. 조지현이 돌려주려고 했지만 강석원은 끝끝내 받지 않았다. 조지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카드 사고 남은 돈은 돌려드릴게요. ……돌아오시면.”
강석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오늘따라 더 무덥다고 생각하며 조지현은 애써 평연한 투로 말했다.
“엄청 멀리 떠나는 거 같네요, 이러니까.”
“멀리 가는 거 맞아.”
합숙 훈련을 하는 게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 일이 있은 후, 강석원은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틈을 내어 조지현을 만났다.
눈앞의 남자가 바다 건너로 사라진다는 사실이 선뜻 와 닿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좋지 않다. 커다란 벌레가 심장 귀퉁이를 사각사각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네요. 미국이니까.”
조지현이 힘없이 웃으며 책상에서 내려왔다. 그때 강석원이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썰렁한 복도에는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그는 무표정히 복도를 살피고는 아니, 아무것도, 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지현아.”
다정한 부름이다. 조지현이 네, 하고 대꾸했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전화해.”
조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강석원이 손목에 두른 밴드를 풀어냈다. 그의 손목에 G가 새겨져 있다.
“안 아파요?”
“응.”
“아플 것 같은데.”
조지현이 손가락으로 슬며시 글자 위를 어루만진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살갗이 우둘투둘 글자를 따라 올라와 있다. 다섯 개의 글자가 남았고, 다섯 번의 계절이 지나면 된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강석원의 목소리가 유난히 다감하다.
“다녀올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강석원의 팔을 붙들었다. 결국, 그날 조지현은 처음으로 아침 보충 수업시간에 지각하고 말았다.
“그럼 내일 모의고사 준비들 잘하고, 청소 당번은 청소하고 가라. 오늘 일찍 끝났다고 옆길로 새는 놈들 보이면 혼날 줄 알아. 이상.”
담임의 종례가 끝나자 아이들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피씨방 가자! 피씨방!”
“미친 새끼. 내일 시험 죽 쑤려고 지랄 똥을 싸네.”
“다 같이 죽자 이거지.”
조지현은 읽던 책을 덮고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어물거리면서 조지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조지.”
조지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 저기, 강석원 형이 아까 너 찾았어.”
“선배님이?”
조지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아까 인사를 하고 갔다. 충분히.
충분하다는 단어를 떠올린 순간 열이 올랐다. 조지현은 손바닥으로 괜스레 얼굴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선배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아, 이따 두 시에 구관 체육관으로 오라고.”
말을 마친 애는 제 가방을 들쳐 메고 후다닥 자리를 떴다.
조지현은 설핏 눈가를 찌푸렸다. 이상하다. 누군가에게 말을 전하라고 할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급했던 건가 싶었다.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서 학교 구석에 있는 공중전화로 갔다. 강석원의 전화번호를 누르자 몇 번의 연결음 뒤에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말이 들렸다. 다시 전화를 걸까 하다가 조지현은 1번 버튼을 눌렀다. 메시지를 남기는 것은 처음이라 몹시 어색했다.
“선배님. 저 조지현입니다. 전화 안 받으셔서 메시지 남깁니다. 잘 다녀오세요. 아까도 말씀드린 거지만, 몸 건강하시고요. 그리고, …….”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강석원이 사준 운동화가 눈에 들어온다. 가슴께에 번연히 열기가 퍼진다.
“……기다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동전이 툭, 내려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지현은 이따 봬요, 하고 얼른 덧붙였다. 별표를 누르고 나서 수화기를 내렸다. 얼굴이 더웠다.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해도 무더운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남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디에 있든 적당히 공부하며 기다리면 되니까.
조지현은 학교 구관에 있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조지현은 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고 후다닥 가방을 챙겼다. 가방을 둘러메고 복도를 뛰다시피 걸었다. 약속한 시간에서 이미 십 분이나 지나 있었다. 비행기 시간도 있는 사람인데.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복도 안쪽에 있는 체육관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
조지현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체육관에는 묵직한 적막이 기분 나쁘게 흘렀다. 그때 뒤에서 철컥,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최기열이 서 있었다. 잔등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침부터 귓가에 들리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또렷해진 느낌이었다. 조지현은 체육관 밖으로 나가려고 최기열을 지나쳤다. 최기열이 조지현의 어깨를 잡아 강하게 밀어냈다.
“뭐하는 거야.”
“뭐하는 거긴, 네가 잘하는 짓 좀 하려고.”
최기열이 웃으면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뿌렸다. 지폐가 팔랑거리며 조지현의 위로 떨어졌다.
“돈 받으면서 강석원 새끼 좆 빨아주고 있었냐?”
“뭐?”
“그런 거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시발.”
조지현의 머릿속에 미술실에서의 장면이 떠올랐다.
“뭔가 오해 하는가 본데……, 윽.”
최기열이 조지현의 배를 걷어차고는 그의 몸에 올라탔다.
“돈 받으면서 하는 주제에, 뭐가 그렇게 고고해.”
그가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고개를 젖혔다. 조지현은 시퍼런 눈으로 최기열을 노려보았다.
“놔.”
공중으로 올라가는 손을 최기열이 가볍게 막아냈다.
“시발, 내가 두 번 맞아줄 거 같아?”
최기열이 조지현을 체육관 바닥에 짓찧었다. 쿵, 하는 충격이 머리에서부터 일었다. 조지현이 신음을 삼키는 사이 최기열이 벨트를 끌러냈다.
“호모 새끼 주제에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어.”
“최기열! 하지 마!”
조지현이 손을 휘둘렀다. 최기열은 이미 분노와 질투심으로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조지현의 몸을 몇 번 더 바닥에 짓눌러 내리찍었다. 늘어진 채로 허우적거리는 조지현의 턱을 손으로 쥔 채, 최기열이 말했다.
“빨아. 한두 번 빨아본 거 아니잖아.”
최기열이 거뭇하게 일어선 성기를 끄집어내 조지현의 입술에 갖다 댔다.
“제대로 빨아. 안 그러면 사진 찍어서 네 부모님께 보내드릴 테니까.”
“……!”
최기열이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셔터음이 연달아 터졌다. 조지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싫어, 안 해.”
조지현이 고개를 돌리자 최기열이 억지로 머리통을 붙들고 제 성기를 입에 밀어 넣었다.
“――!”
토기가 올라왔다. 조지현이 욱욱거리며 온몸을 바르작거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최기열의 목울대가 꿀꺽,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시발, 제대로 빨라고, ――하아. 지현아.”
그가 조지현의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조지현의 눈에 눈물이 왈칵 맺혔다. 숨이 막히고 토기가 올라와 최기열을 밀어내려고 발버둥 쳐도 그는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바닥을 긁어낸 손톱이 부러지고 피가 맺혔다. 손가락 끝에 박힌 가시가 혈관을 타고 움직이는 것처럼 온몸이 욱신욱신 아팠다.
“윽――!”
목구멍 깊숙이 왈칵 뜨거운 것을 쏟아낸 최기열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조지현은 우엑, 하고 입에 담은 것은 모두 쏟아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쏟아냈지만 구역질은 멈추지 않았다.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우욱――, 욱――.”
조지현의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뿌연 액체를 바라보던 최기열의 시선에 언뜻 욕망이 서렸다. 그가 조지현의 몸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조지현의 바지에 손을 뻗는다.
“하지 마, 너 미쳤어? 최기열……!”
조지현이 필사적으로 최기열을 거부했지만, 최기열의 귀에는 그런 소리조차 모두 흥분을 돋우는 기제로 작용했다.
“맞아. 나 미쳤어. 니 생각만 나서 밤에 잠도 안 온다고. 너 요즘 사람 미치게 하는 거 알아? 애들이 너 지나가면 다 너만 쳐다보는 거 아냐고.”
최기열이 조지현의 셔츠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조지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기열이 조지현의 목덜미를 입술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강석원 새끼도 이렇게 꼬셨냐?”
“하지 마……, 하지, …….”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 온몸에 퍼졌다. 조지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최기열은 그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조지현의 몸을 더듬고 빨아대며 헉헉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조지현의 바지를 벗기려고 하는 순간,
쾅.
체육관 걸쇠가 그대로 공중에 날아가 바닥에 두어 번 퉁긴 후, 떨어졌다. 최기열이 새하얗게 질려 저기, 이건, 하고 입술을 뗀 사이 남자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엄청난 거구인 그는 몇 걸음 걷지 않고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써늘하게 얼어붙은 남자의 시선이 최기열과 널브러진 조지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입가가 슬쩍, 뒤틀린 것과 동시에 그는 최기열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하얀 이 조각과 피가 공중에 흩뿌려졌다. 으으, 하고 신음을 내뱉으며 꿈틀거리는 최기열의 머리통을 쥐고 남자는 바닥에 짓찧었다.
“으억!”
코와 입에서 터져 나온 피로 체육관 바닥이 흥건히 젖었다. 학년 내에서는 싸움깨나 한다는 최기열이었지만 그의 앞에서는 어린애 수준이었다. 압도적인 차이였다. 그는 최기열의 어깨를 붙들고 그대로 뒤틀었다.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최기열의 검은자가 뒤로 돌아갔다.
“으아아악!”
최기열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닥에 널브러진 최기열의 발목을 그가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저번에 말했잖아.”
나직한 음성으로 뇌까리듯 남자가 중얼거린다.
“윽, ……, 요, 용서…….”
“한 번 더 지현이 건드리면 뭐든 부러트려버린다고.”
부득, 하고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최기열이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아악, 하는 비명이 체육관 천장까지 울려 퍼졌다.
남자의 눈에 구석에 접힌 의자가 들어왔다. 그는 망설임 없이 의자를 집어 들었다. 의자를 공중에 치켜 올린 그의 팔을 뒤에서 달려온 조지현이 잡아끌었다.
“선배님! 하지 마세요.”
“놔.”
강석원의 입에서 나온 단호한 목소리에 조지현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강석원을 놓지 않았다.
“안 돼요. 선배님. 죽어요, ……정말 죽어요.”
이대로 놔두면 강석원은 최기열을 죽이고 만다.
“그래. 죽여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는 강석원의 눈빛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조지현이 강석원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안 됩니다. 선배님, 그러면 안 돼요. 절대로, 그러시면…….”
강석원의 미래가 뒤틀린다. 그것만큼은 절대 막고 싶었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앞에 무릎 꿇었다.
“선배님, 제발요. 저 때문에 그런 짓 하지 마세요. 제발…….”
강석원의 턱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가 이를 낮게 사리문 채로, 최기열을 바라본다. 최기열은 짐승같이 울부짖으며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강석원이 들고 있던 의자를 있는 힘껏 바닥에 내리 찍었다. 의자는 최기열의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나무 바닥을 박살냈다.
최기열이 토악질을 하며 온몸을 비틀었다. 강석원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바닥에 무릎 꿇은 조지현을 안아 세웠다. 제 옷을 벗어 조지현의 입가와 얼굴을 닦아주고 반쯤 벗겨진 옷을 입힌다.
단추를 채우는 그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음을 눈치챈 조지현은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죄송합, ……제가 조금 더 생각했더라면…….”
비행시간에 맞춰 떠난 그가 구태여 지금 이 시각에 보자는 말을 할 리 없다.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녀석을 앞세워.
“전화했잖아. 잘했어.”
조지현은 그제야 강석원이 지금 여길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따 봬요. 그 석연찮은 한마디에 그는 발길을 돌린 것이다. 강석원의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이 지옥 같은 순간에조차, 깨닫고 만다.
가혹하기 그지없는 짐승이 가진 온전한 마음을.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미칠 것만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금세 입에 비릿한 피 맛이 퍼져나갔다. 흰색 셔츠 자락에 피가 떨어졌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입술을 닦아준다.
그때 체육관 앞에서 웅성거리는 기척이 들려왔다.
“너희들 뭐하는 거야? 몇 학년 몇 반이야?”
누군가에게 신고를 받았는지 체육 선생 하나가 뛰어 들어온다. 그러고는 바닥에 쓰러진 핏덩이를 발견하고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한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져갔다. 구급차 불러! 당장! 하는 고함 소리와 여선생들의 비명이 뒤섞여 엉켰다.
사각거리던 소리가 뚝, 멈추었다. 발밑이 무너지는 소리가 설컹, 심장을 가로질렀다.
“대체 학교에서는 뭐하는 겁니까! 저게 학생이에요? 깡패지!”
“기열이 어머님, 제발 진정하시고…….”
“진정하게 생겼어요? 우리 기열이가 지금 어떤 상태인데. 얼마나 곱게 키운 아들인데!”
최기열의 어머니가 오열하며 소리 질렀다.
어깨뼈와 발목뼈가 부러지고 타박상에 이까지 부러져, 최기열은 현재 병원 응급실에 누워 있었다.
“어머님, 일단 이렇게 소리 지르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진정하세요.”
경찰이 최기열의 어머니를 가로막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결합니까? 그래요, 법대로 해요. 변호사 부를 테니까, 내 저 새끼 꼭 빨간줄 가게 만들 거예요.”
빨간줄이란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조지현이 눈을 치떴다.
“학생들 간의 일이니까 최대한 좋게 해결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 학생 얘기도 좀 들어보고…….”
“얘기? 무슨 얘기요? 무슨 이유가 있어서 사람을 그렇게 때려요? 이유 있다고 사람을 때리는 게 짐승이지 인간이에요?”
“말씀이 너무 심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은 누군데요, 누군데 나서서 그래요.”
“얘 보호자입니다.”
부모님 대신 보호자로 불려온 체육관 관장이 대답했다.
“보호자? 그럼 당신이 이 짐승 같은 새끼 부모예요?”
“체육관 관장입니다.”
“부모는 왜 안 왔어? 부모 없어요? 너 부모 없냐고.”
“없습니다.”
강석원의 딱딱한 대답에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하는 짓이 딱 그래. 이래서 가정교육 못 배워먹은 애들은 안 된다는 거야.”
그런 모욕을 강석원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조지현의 눈가가 확 뜨거워졌다.
“그런 말씀 마세요.”
조지현이 처음 입을 뗐다. 그를 발견한 최기열의 어머니, 이숙현이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그래. 지현아. 너 그 자리에 있었다며. 네가 얘기해 봐. 네가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조지현이 저는, 하고 입을 열려고 하자 옆에 앉은 강석원이 말했다.
가만히 있어.
나직한 목소리다. 조지현에게는 분명히 들릴 만큼.
“지현아, 얼른, 응?”
그녀는 조지현이 제 편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였다.
“그래. 지현이 네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말씀드려라.”
땀만 뻘뻘 흘리던 담임도 얼씨구나 조지현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조지현의 얼굴은 멍투성이였고, 교복 자락은 뜯어진 채였다. 누가 봐도 싸움에 휘말린 흔적이었다.
“응? 지현아.”
이숙현이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가…….”
오는 내도록 물어뜯어 바싹 타버린 입술이 달싹이며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숙현이 얼른 해보라는 듯이, 고갯짓을 했다.
“최기열이 저에게…….”
“조지현.”
강석원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섬뜩할 만큼 살벌한.
강석원이 무엇을 경고하는지 조지현은 알고 있다. 떨리는 손을 뒤로 하고 고개를 돌렸다. 결심을 굳히고 입을 떼려는 찰나 이숙현이 조지현에게 말했다.
“걱정 마. 지현아, 너희 어머니한테도 연락했으니 곧 오실 거야.”
조지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스러진다. 그녀가 다정한 음성으로 겁낼 거 없어, 하고 조지현을 달랜다.
어머니가 이곳에 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조지현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상태를 알아채고 가만히 그의 등을 다독였다.
그 느릿하고 규칙적인 손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괜찮아.
그 순간, 머리카락 끝까지 치솟은 불쾌감이 느른하게 풀린다.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간신히 엉겨 붙은 피딱지에서 다시 핏물이 배어나왔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기열은 저에게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래서 선배님께서 도와주신 겁니다. 무엇보다 최기열이…….”
강석원이 조지현의 팔을 거칠게 잡아 당겼다.
“하지 마.”
강석원의 눈에 시퍼런 불꽃이 튀었다. 조지현이 제 입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 것이다.
“다 얘기할 겁니다.”
조지현이 강석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였지만 조지현의 얼굴이 얼마나 파르라니 질렸는지, 그의 손이 얼마나 떨리는지, 강석원은 알고 있었다.
“지현아,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기열이가 너를 왜 때려. 집에서 네 얘기를 얼마나 자주 하는데. 지금 쟤한테 협박 받아서 말 꾸며내는 거니? 그렇지?”
이숙현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물었다.
“꾸며낸 거 아닙니다. 최기열이 저를…….”
강석원이 조지현을 잡아채서 끌어냈다.
“나와.”
경찰 두 명이 강석원을 말리려고 뛰어들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관장까지 달려들어 그를 만류했다.
“석원아. 이러면 너한테 도움될 거 하나도 없어. 할 얘기 있으면 여기서…….”
“그깟 도움 필요 없습니다.”
강석원이 짓씹어 뱉듯 대꾸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이었다. 그의 살벌한 기세에 무장한 경찰조차 몸을 움찔했다.
“오 분이면 됩니다. 잠깐 얘기하고 오겠습니다.”
그가 반듯하게 말하고 조지현을 끌고 경찰서 밖으로 나왔다. 건물 뒤에 있는 벤치 앞에서 강석원은 손을 놓아주었다.
“어차피 다 말할 겁니다.”
“말할 필요 없어.”
“왜 필요가 없어요. 그 필요 누가 정하는데요.”
차분한 조지현이 언성을 높인 적은 처음이었다. 그의 눈이 시뻘겋게 울음으로 짓뭉개져 있었다.
“학교 어떻게 다니려고.”
강석원이 조용히 말한다.
어떤 화인이 찍힐지 불 보듯 훤한 일이다.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수치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될, 모순적인 일이다.
“그게, 지금, 그게 중요해요?”
조지현이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눈물이 맺힐 새도 없이 흘러내렸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손을 뻗었다. 조지현이 그의 손을 쳐냈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 선배님 인생을, 내가 망치게 생겼는데, 그까짓 학교가 뭐가 중요해. ……나 따위가, ……나 같은 인간 때문에, 지금 선배님이…….”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강석원의 인생은 상명했을 것이다. 묵묵히 운동하며, 차근차근, 그 어려운 단계를 밟아 정상에 올라섰을 것이다. 간간이 크고 작은 파랑은 있을지언정, 이토록 근간이 뒤흔들리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건데.”
“네?”
“너 같은 게 어떤 거냐고.”
강석원이 묻는다. 천천히 감았다 뜬 눈에 억누른 분노가 묻어났다.
“왜 네가 그런 걸 정해.”
“…….”
고개를 떨구자 운동화가 눈에 들어온다. 강석원이 사다 준 운동화다. 그는 무표정히 운동화를 내밀고 사이즈가 맞는지, 마음에 드는지, 묵묵히 조지현의 말만을 기다렸다.
발끝에서부터 북받쳐 오르는 감정이 숨통을 조였다.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조지현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잠겨든다. 이토록 깊은 감정은 처음이다.
“지현아.”
강석원이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하고 말하는 목소리가 여상하여 눈물이 났다. 강석원을 팔아서 남을 학교라면 다니지 않아도 좋다. 그를 쫓아내고 차지한 자리라면 앉고 싶지도 않다
“안 괜찮습니다, 하나도…….”
강석원이 조지현의 뺨을 그러쥐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최기열의 뼈를 부러트리던 남자의 손이다. 뜯어진 단추를 채워주며 떨리던, 그 손이다.
“제발.”
강석원이 나직이 속삭인다. 이어질 뒷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조지현은 고집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눈이 마주쳤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에 입술을 갖다 댔다.
매번, 강석원은 자신을 구원했다. 부모에게조차 귀애받지 못한 망가진 인간을 성인(聖人)처럼 여겼다.
조지현이 강석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 순간,
“거기 지현이니?”
머리에서 피가 새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뭐하는 거야, 지금?”
“……, …….”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조지현은 숨도 쉬지 못했다.
“둘이 지금 거기서 뭐하는 거냐고.”
신경질적인 여자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로질렀다. 조지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새하얀 손이 그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리 와. 가자.”
“잠깐만요, 저 가면 안 돼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소리야. 네가 가면 왜 안 돼? 누가 막는다고?”
어머니가 눈을 치떴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강석원이 서 있었다.
“저 우선 경찰서 가서…….”
매서운 손이 어김없이 뺨을 후려갈긴다.
“네가 경찰서에 왜 들어가.”
“어머니…….”
“너같이 착한 애가 경찰서에 왜 들어가! 들어가지 마!”
앞뒤 논리도 없는 악다구니였다. 어머니가 조지현의 팔뚝을 세게 움켜쥐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어머니, 잠깐만요. 이러지 마세요. 제발, …….”
“입 다물어. 찢어버리기 전에.”
어머니의 눈이 광기로 번뜩인다. 조지현의 낯빛이 희게 질린다.
“집에 가자. 집으로, 가서, 가만 안 둬. 드러운 새끼, 어디서, 감히, 드러운 짓을…….”
염불을 외는 중처럼 중얼거리며 그녀의 손을 강석원이 막아섰다.
“뭐야.”
어머니가 고개를 올려 강석원을 노려보는 모습에 조지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어머니. 오 분, 아니 일 분만요. 일 분 뒤에 집으로 갈게요. 갈 테니까 제발, 부탁…….”
어머니가 아들의 뺨을 다시 한 번 후려갈겼다. 그거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연거푸 후려친다.
“사내새끼가 어디 할 짓이 없어서……!”
강석원이 여자의 팔을 붙들었다. 그만 하라든가, 이러지 말라든가, 하는 말조차 없다. 새카맣게 가라앉은 시선이 여자를 응시했다.
제아무리 미친 여자라도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고 흠칫 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을 괴롭히는 재주가 탁월했다.
어머니가 손을 뿌리치고 아들의 머리채를 보란 듯이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질질 인도까지 끌고 간다. 조지현이 어머니, 제발이요, 이러지 마세요, 하고 부탁해도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강석원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그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부탁드립니다.”
강석원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는 순간, 여자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그려진다.
“그만 놔주세요.”
그 말이 가진 깊은 의미를 여자는 기민하게 알아챘다.
“내 아들이야.”
머리채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가 열 달 품어 낳은 아들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 내 귀한 아들이라고. 누구한테도 안 줘.”
또박또박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이 소름끼쳤다. 조지현은 힘을 주어 그녀를 밀쳐냈다.
“제가 원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머니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조지현을 바라보았다. 순종적인 아들이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거스르지 않는.
그녀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 뭐라고…….”
“원해서, 어머니 아들로 태어난 거 아니라고요.”
속이 뒤틀리고 메슥거렸지만, 조지현은 필사적으로 참으며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집에 가서 두들겨 맞고 욕을 듣는다 해도 지금은, 끌려갈 수 없었다.
“지현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니가 지금 경황이 없고 놀라서 그러는가 본데…….”
꿀을 바른 듯 달콤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아들을 얼렀다. 조지현이 몸을 뒤로 젖히며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다시는.”
어머니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어느덧 웃음을 그린 입술이 무시무시한 욕설을 퍼붓는다.
죽여버릴새끼,더러운호모새끼,개랑홀레붙을새끼,다리벌려서붙어먹은남자때문에지어미도버리는후레자식같은새끼,벌레만도못한새끼.
조지현의 얼굴에서 천천히 표정이 스러진다. 보다 못한 강석원이 손을 뻗어 조지현의 팔을 잡으려는 그때, 어머니가 아들의 셔츠자락을 움켜쥐었다.
“나도 너 같은 아들 필요 없어!”
그러고는 있는 힘껏 잡아끌어 아들을 밀어냈다. 몸의 균형이 뒤로 무너지는 순간, 조지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을 보았다. 그렇게 아주 짧은 찰나에, 조지현은 어머니의 세심한 악의를 깨닫는다.
강석원이 보는 앞에서, 바로 그 앞에서, 소중한 것을 빼앗는 것이다.
날카로운 클랙슨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조지현은 눈을 감았다. 묵직한 충격이 몸을 덮었다. 퍽하고 솟아오른 몸이 차체에 부딪쳐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삽시에 벌어진 일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조차 손을 쓰지 못했다.
“구, 구급차 불러요. 구급차!”
누군가 소리쳤다. 바닥에 누운 채로 조지현은 흐린 눈을 껌뻑였다. 피가 눈동자 위로 떨어진다. 따가운 눈을 몇 번 껌뻑인 후에야, 조지현은 그게 제 피가 아님을 알아챘다.
차체에 부딪치는 동시에, 둔탁하게 울리던 소리가 떠오른다. 타격이 전해지는 순간 단단히 몸을 감싸던 온기도.
“……, …….”
온기가 미끄러져 떨어진다. 눈으로 봐도 그 광경이 인식되지 않아 조지현은 한참을 내려다보았다.
왜 강석원이 여기 있는 거지.
어째서 강석원이 피를 흘리며 있는 거지.
왜, ……어째서. 왜…….
서걱, 서걱서걱서걱.
심장이 갈리는 소리가 들린다. 피가 빠져나간다. 온몸이 서늘하게 식는다. 세계가 쿵, 내려앉았다.
“내가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뛰어들었다고요. 진짜예요.”
사색이 된 운전자가 차에서 뛰어내려 소리 질렀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웅성거리는 소리, 뒤에서 빵빵거리는 클랙슨 소리, 저 멀리 들리는 사이렌 소리가 뒤엉켜 날카로운 소음을 만든다.
그러나 조지현은 무거운 적막에 갇혀, 언제까지고 강석원을 내려다보았다.
“지현아!”
저를 부르는 소리에도 조지현은 미동조차 없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달려온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거냐고.”
여기저기에 붕대를 감고 반창고를 붙인 채 수술실 앞에 앉아있던 아들이, 이윽고 고개를 든다.
“아시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알다니.”
조지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쪽을 바라보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본 적 없는 아들의 서늘한 기색에 어머니가 흠칫, 숨을 삼켰다.
“……, 부탁드립니다.”
조지현이 손을 모으고 중얼거렸다.
“……주세요…….”
색을 잃은 조지현의 입술이 달싹이며 작은 소리를 속삭였다.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가자 천천히 말소리가 이어진다.
“선배님 아니었으면 죽었을 겁니다. 아니,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죽었겠죠. 목을 매든, 목이 졸리든.”
아들의 말에 아버지의 표정이 더럭 굳었다.
“그러니까, ……, 부탁드립니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버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지현아, 대체…….”
“부탁드립니다, 제발, …….”
어머니가 달려들어 무릎을 꿇고 조지현의 손을 잡았다.
“지현아, 엄마가 잘못했어. 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엄마가 미안하다. 자식 버리는 부모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어.”
그녀의 고운 얼굴이 눈물로 뒤범벅이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진심임을 조지현은 안다. 하지만 그에게는 손톱만큼도 가치 없는 진심이다.
조지현이 그녀의 손을 떨쳐냈다. 아들의 무표정한 얼굴에 인 멸시와 무감을 그녀는 고스란히 읽었다.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
“저는 남자가 좋아서 부모 버리는 후레자식입니다.”
어머니가 손을 치켜들었다. 조지현이 말없이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소름끼칠 만큼 차갑게 가라앉은 아들의 눈을 본 순간, 그녀는 주춤하고 손을 내렸다. 어떻게 해도 이제는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만 것이다.
“지현아, 일단 집으로 가서…….”
아버지가 조지현의 어깨를 붙들었다. 조지현이 천천히 웃음을 삼켰다.
“아버지.”
“그래, 지현아.”
중년의 남성이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집에 제가 존재하긴 했었나요?”
아들은 하나 있었을 테지만, 하고 힘없이 조지현이 웃으며 덧붙인다.
“……, 지현아.”
조지현이 고개를 떨구고 떨리는 손을 맞잡는다. 그러고는 어깨를 감싼 손이 떨어져 나갈 때까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버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제발. 제발. ……버려주세요.
처음 신께 기도하는 방법을 배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어린 날보다 더욱 간절하게 그렇게 되뇌었다.
병실 보조 침대에 웅크려 새우잠을 청하던 조지현은 움칫, 하며 잠이 깼다.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강석원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치뜨고 말을 걸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평소와는 다르다. 눈이 마주쳤지만, 강석원은 표정의 변화조차 없다. 보통 때의 열기 어린 시선도 아니다.
한참 동안 그렇게 마주한 후에야, 조지현은 깨닫는다. 강석원은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의 온전함을. 몇 번을 느리게 곱씹으며, 조지현이 무사한지 낱낱이 살핀다.
강석원의 손끝이 작게 경련하듯 움직였다. 얕은 그 기척에 조지현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강석원의 침대에 앉았다.
강석원이 손을 뻗었다. 부러지지 않은 왼팔만.
조지현은 거기에 제 몸을 맡기듯 기댔다. 온기를 몸으로 확인한 후에야 강석원은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단단히 붙든 손이 조지현의 등을 쓸어내린다. 그 존재를 더듬고, 더듬어 확인을 거듭한다.
“부탁할게.”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를 이을 말이 무엇이든, 들어줄 거라고 생각했다.
“가지 마.”
“…….”
“내가 어떻게든 할게. 다 할 테니까. …….”
강석원이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삭이지 못하고 뒷말을 삼킨다. 그것은 아마 분노일 것이다. 무력감이 덧씌워진.
오른쪽 다리와 오른쪽 팔, 그리고 오른쪽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다. 조지현을 끌어안고 차체를 막아섰던 쪽이다. 아홉 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마취가 풀려 온몸이 짓밟힌 듯한 고통을 느낄 텐데도, 강석원은 오로지 조지현의 안위만 떠올린다. 그것이 제가 느끼는 전부라는 듯이.
조지현은 천천히 손을 들어 강석원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가지 않겠습니다.”
맹세의 말을 자신에게 새겨 넣듯이, 조지현이 속삭인다. 가지 않겠습니다, 어디에도, ……가지 않을 테니, 선배님도…….
뒷말은 미처 마치지 못하고 조지현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병원으로 실려와 강석원이 수술을 마칠 때까지, 울지 않았다. 절망 어린 소리를 지르거나 비탄 어린 신음을 내지도 않았다. 이 끔찍한 일들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강석원을 기다렸다. 심장이 버석버석 부스러질 것 같은 상실감조차 오롯한 제 몫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처음으로 배운 상실감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짓이겨진 슬픔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리고 수술을 마친 강석원의 곁을 지키며 깨달았다.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라고.
강석원이 조지현을 깊게 끌어안았다. 입술이 겹쳐졌다. 더운 숨결이 드나들며 서로의 열락을 좇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한 밤이었다.
“식사 왔습니다.”
조지현은 얼른 일어나서 식판을 받아왔다. 침대를 돌려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돕고 상을 세워 식판을 내려놓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조지현을 바라보던 강석원이 너는, 하고 묻는다.
“저는 이따가 내려가서 먹고 올게요.”
“그럼 이따 같이 가.”
“뼈도 안 붙었는데 자꾸 돌아다니시면 안 돼요.”
조지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금방 붙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수술을 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강석원은 목발을 짚고 자유롭게 걷는 수준이 되었다. 한쪽 팔과 한쪽 다리, 갈비뼈가 부러진 상황에서 괴물에 가까운 그의 체력과 완력에 의사조차 혀를 내둘렀다. 조지현이 그래도요, 하고 중얼거리자 강석원이 고개를 숙여 조지현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조지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 물 떠올게요.”
조지현이 얼른 물병을 들고 병실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며 조지현은 달아오른 얼굴을 문질렀다.
이전과는 다르게 강석원은 이렇게 종종 스킨십을 해왔다. 마치 귀한 보석을 제 손에 쥐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듯이.
조지현은 물통을 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강석원이 깨어난 날 오후에, 조지현은 최기열이 입원한 병원으로 찾아갔다. 그를 보자마자 최기열의 어머니는 반색했다.
‘지현아. 걱정할 거 없어. 우리도 어떻게 된 일인지 다 알아.’
조지현은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곧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병실 안쪽에 서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온몸을 미끄러운 뱀이 지나가는 듯한 혐오감이 일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지만 헛도는 기계처럼 몸은 싸늘히 식어만 간다.
‘저 선생님도 그 강석원인가 뭔가 하는 녀석한테 맞았다던데? 걔 완전 깡패라며. 너도 협박받고 있는 거지? 가여운 것.’
최기열의 어머니는 동정어린 눈으로 조지현을 바라보았다. 병실에 누워 있던 최기열이 이쪽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조지현은 흠뻑 젖은 손을 움켜쥐었다.
‘아니요. 저는 협박받은 적 없습니다. 협박이라면 최기열이 저에게 했으니 그걸 물어보시면 되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니?’
‘최기열이 저를 구타하고 성폭행하려 했습니다. 선배님은 그걸 도와주신 겁니다.’
조지현은 이쪽을 흘끔거리는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조지현의 말에 최기열의 어머니가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기열이가 왜 그런 짓을 해?’
‘증거도 없이 함부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는 거다.’
그의 아버지까지 거들었다. 조지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증거라면 최기열의 핸드폰 속의 사진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우셔도 상관없습니다. 이미 옮겨두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강석원을 지키려면 이 방법뿐이다.
최기열이 문 닫아요, 빨리,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아들의 발작적인 반응에 어머니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고소하시려면 하세요. 저도 하겠습니다.’
조지현이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 하자 최기열의 아버지가 조지현을 붙들었다.
‘너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니?’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최기열의 부모는 아들의 안위만큼이나 제 위신도 중요시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조지현은 생각한 것을 말했다. 강석원에게 이 일의 법적인 책임을 묻지 말 것, 최기열을 전학시킬 것, 이 일에 자신의 부모님을 끌어들이지 말 것이었다. 최기열의 아버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현은 혹시 말 바꾸실 거면 꼭 언질해달라고 말했다. 자기도 고소 준비를 해둬야 하니까. 그렇게 약속을 받아내고 조지현은 병원을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말간 위액이 나올 때까지.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걸어오면서 문득 웃음이 났다. 정말 쉬웠다. 나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모든 게 쉬워졌다. 강석원이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조지현은 물통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현이 물 뜨러 가는구나?”
“네. 안녕하세요.”
지나던 간호사 하나가 알은체를 했다. 누가 봐도 미성년자인 조지현이 강석원의 간병을 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눈에 띄는 것이다. 그에게 이름과 나이를 묻는 환자나 보호자, 간호사들이 몇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 관심들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사촌형 병간호 하느라 네가 고생이 많다, 얘.”
닮지 않은 외모 때문에 형제라고 할 수도 없었고 학교 선배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대충 둘러댄 변명이 사촌이었다.
“이거 먹어가면서 해.”
간호사가 오렌지 주스 하나를 내민다.
“괜찮습니다.”
“아니야. 너 보니까 내 아들이 생각나서 그래.”
연상되는 자체로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모성이라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 감사합니다.”
조지현이 반듯하게 고개를 숙이자 간호사는 얼굴도 이쁜데 인사성도 바르고, 하면서 웃는다. 불그스레 달아오른 얼굴을 문지르며 물을 떠서 병실로 돌아갔다.
강석원이 찬기를 열지도 않고 조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안 드세요.”
“너랑 같이 먹으려고.”
“제가 환자 밥을 왜 먹어요.”
조지현이 웃으며 물을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강석원의 시선이 조지현의 손에 들린 오렌지 주스에 닿는다.
“아, 간호사 선생님이 주셨어요.”
강석원이 그래, 하고 찬기를 연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무표정한 강석원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지현이 물었다.
“버릴까요?”
강석원이 질투가 많다는 사실을 근간의 일들을 통해 깨닫는다. 병원 사람들이, 특히 간호사들이 조지현에게 예쁜 학생이라 부르며 음료수나 과일 등을 건네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마셔.”
강석원이 찬기 뚜껑을 차곡차곡 옆에 쌓아두며 대답했다.
“……, 나이 많으신 분인데요.”
강석원은 조지현의 손에서 오렌지 주스를 빼앗아 뚜껑을 열어 도로 건넸다. 조지현은 말없이 오렌지 주스를 바라보다가 개수대로 가져가 모두 쏟아버렸다. 눈이 마주치자 강석원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걸로 신경 쓰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요.”
강석원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하지 않았다.
“빨리 나으셔야죠.”
조지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러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강석원의 시선을 알아채고 눈을 깜박였다. 열기 어린 시선이 느릿하게 조지현을 더듬는다. 조지현의 머릿속에 어제 일이 스쳤다.
보조 침대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깼는데 강석원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지현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어루만지면서. 키스를 했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머리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입술이 깊게 맞물리자 강석원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조지현을 끌어안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끌어안으려 했다. 깁스를 감은 팔에 가로막히기 전에. 조지현은 짧게 웃음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보던 강석원이 나지막하게 혀를 차며 한숨을 쉬었다. 조지현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강석원의 자취방에서 두 사람은 시간이 날 때마다 몸을 겹쳤었다. 하지만 끝까지 가지는 못했다. 강석원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면서도 조지현은 그가 엉덩이 사이를 더듬을 때마다, 몸이 굳었다. 강석원은 그때마다 이를 사리물고 한숨을 쉬며 몸을 떼었다. 딱 그 표정이었다. 자신을 낮추어 남자는 항상 한발 물러섰다. 뭔가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았다.
다 나으면 해요.
강석원의 표정이 그대로 멈추었다. 마치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조지현이 어물어물 시선을 돌렸다. 거기서 끝이었다. 그래서 혹시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그래. 빨리 나아야지.”
젓가락을 든 강석원이 혼잣말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조지현은 그가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괜히 무더운 기분이 들어 조지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석원이 나직이 웃는 기척을 느낀 듯도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그녀의 시선이 조지현에게 닿아 있었다. 조지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세요?”
“전화가 왔는데…….”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중 자신에게 연락할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뿐이다.
“알겠습니다.”
조지현은 강석원을 돌아보며 통화하고 올게요, 하고 말했다. 강석원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지 않아도 아버지가 몇 번 병실을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라고. 그때마다 조지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모습을 강석원도 지켜본 것이다.
간호사를 따라 복도를 걷는 조지현의 입맛이 썼다. 아버지에게 큰 악감정은 없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사랑한 것뿐이다. 지나칠 정도로. 매일 욕을 퍼부으며 싸우면서도 두 사람은 절대 이혼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데려가지 않는 이유도 능히 짐작되었다. 공교롭게도 외삼촌이 자살하기 직전에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이었던 터다.
“저기, 그런데, …….”
앞서 걷던 간호사가 말끝을 흐리며 돌아본다. 썩 좋지 않은 예감이 흘렀다. 조지현은 입술을 깨문 채, 데스크로 가서 전화를 건네받았다. 전화를 주는 수간호사조차 표정이 굳은 채였다.
“여보세요.”
「지현아……!」
이성을 잃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조지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는 정신이 나가 있었다. 피 칠갑을 한 옷을 입고 어떻게 하냐, 너희 엄마 어떻게 하냐, 하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정신적으로 무너진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위독하신가요?”
조지현의 물음에 아버지가 덜덜 떨며 고개를 내저었다.
“장애가 남으신대요?”
“아니, 그렇지만…….”
지금까지 어머니는 한 번도 자살시도를 한 적이 없다. 그나마 그것이 아버지에게 마음의 보루였을 것이다.
“괜찮으실 거예요.”
조지현은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눈물로 범벅된 중년의 남자가 엉망이 된 얼굴을 감싸 쥐며 울음을 터트렸다. 너희 엄마 없으면 나도 죽는다, 나도 못살아, 하고 우는 목소리가 떨린다.
“그러니까, 지현아, 네가, 좀……, 제발.”
아버지가 아들에게 매달렸다.
“사업도 지금 잘 풀리고 있고, 다 잘되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제발, ……제발, 응?”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조지현이 씁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같이 살자는 말은 하지 않으마. 부모로서 그래도 어떻게 자식이랑 인연을 끊겠냐.”
결국 도돌이표였다. 조지현은 어머니와 연락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어버리라고 내달리는 차에 아들을 떠다밀어버리는 여자와 더는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고모에게 가 있으면 안 되겠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조지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고모한테 부탁해 둘게. 제발, ……다 잘되고 있어. 너만 그러니까, 너만 도와주면…….”
울며불며 매달리는 아버지의 음성에서 조지현은 희미한 원망을 느꼈다. 너 하나만 참으면 우리 가정은 평화로울 거라는 저의를 알아챈다. 잔인한 이기심. 가족 간에도 서열은 있다. 누가 권력자인지 알면 쉽게 파악이 된다. 어린 자식은 대다수 그 권력에 짓눌려 살 수밖에 없다.
“제발, 부탁이다. 저러다 너희 엄마 죽겠다.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더라. 제발 사람 하나 살리는 셈치고, 응? 무슨 말이든 다 들어줄 테니까…….”
조지현은 제 옷자락을 움켜쥔 아버지의 손을 떨어냈다.
“미국 가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미국에 있는 고모에게 보내자는 생각이 과연 누구에게서 나왔을까, 능히 짐작이 간다. 같이 살지는 않더라도 허울 좋은 아들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며 성공을 위해 발판을 다질.
“지현아!”
아버지가 오열하며 아들의 이름을 부른다. 조지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머니가 죽는 것을 원친 않는다. 아무리 싫은 여자라 해도, 저를 낳아준 어미다.
“지현아. 지금 네가 그러는 거 다, 어려서 뭘 몰라서 그래. 잘해주고 하니까 그냥 착각하는 거라고. 잘 생각해라. 뭐가 중요한지. 응?”
아버지는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린다.
“……, 많이 중요해요.”
조지현이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아버지는 듣지 못했다.
많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어머니를 생각하는 만큼, 저도.
하지 못한 말들이 뱃속에 자갈처럼 무겁게 쌓여만 간다.
“그럼 가서 네 엄마랑 말 좀 해봐. 깨자마자 너만 찾고 있어.”
“…….”
조지현은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아버지 마지막 소원이다, 제발.”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고개를 숙이는 아버지 때문에 조지현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보기만 할 거예요. 아버지, 저도, ……, 그 이상은 힘들어요.”
벌써 옷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날 이후로 꿈에서라도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 화장실로 달려가 속엣 것을 다 게워내야 할 정도였다. 선연한 공포와 혐오가 뒤섞인 감정이 속을 할퀸다.
조지현은 천천히 병실 문 앞에 서서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에 걸터앉은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슬픔에 잠긴 듯한 옆모습이 비극적일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아들이 들어온 것을 알면서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조지현은 느리게 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괜찮으세요?”
“아니.”
그녀가 대답한다.
“……, 그러지 마세요.”
이런 말 따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지현은 그리 말했다.
“아버지는?”
“네?”
예상외의 질문에 조지현은 놀라서 되물었다.
“너희 아버지는 어떠시니?”
손을 긋고 목을 매단 어머니를 안고 병원까지 달리셨다고 들었다. 119에 신고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아버지는 넋이 나가 있었다.
“상심이 크세요.”
“그렇겠지.”
그녀가 사실을 곱씹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는 아들을 향해 손짓한다.
“잠깐만 가까이 와 볼래?”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불길한 예감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온다. 조지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엄마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그녀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목에 남은 자국을 보자 조지현은 고개를 떨구었다. 조지현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한걸음,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조금만 더. 미안하다. 목소리가 잘 안 나와.”
“…….”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괜찮아. 여기서는 아무런 해코지도 할 수 없어. 조지현은 간신히 걸음을 뗐다.
“지현아.”
어머니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았다. 섬칫할 만큼 다정한 그 태도에 조지현은 숨을 삼켰다.
“아버지는 내가 죽으면 말이야.”
사탕으로 어린아이를 꾀어내는 마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어머니가 느리게 속삭였다.
“죽을 거야, 반드시.”
조지현은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몸을 떼어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네 아버지도 자살할 거라고. 살 수가 없거든.”
그녀가 가늘게 웃으며 말한다. 그녀가 손을 뻗어 조지현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제일 소중한 거, 그걸 빼앗기는 기분이 어떤 줄 알아?”
“노, 놓으…….”
어머니가 눈을 부라렸다. 광기로 번뜩이는, 저와 똑같이 생긴 눈을 마주하자 조지현은 구역질이 치솟았다.
조지현은 있는 힘껏 어머니를 떨쳐냈다. 그대로 병실을 나서는 그의 뒤에 대고 어머니가 무겁게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걔도 마찬가지일걸.”
조지현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극도의 불쾌함이 심장을 갉작갉작 긁어댔다.
“……무슨, …….”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지현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가 입을 한껏 당겨 웃었다.
“내가 못할 거 같니?”
“…….”
“몇 년이 걸리든 할 거야. 걔가 보는 앞에서.”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그녀는 아들을 협박했다.
강석원이 보는 앞에서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겠다고.
“……, 못해요.”
조지현이 스스로를 달래듯 그렇게 말했다. 어머니는 못해요, 절대로.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속으로 공포를 삼키며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시키면 돼.”
조지현은 문밖에서 울고 있는 남자를 떠올렸다. 어머니가 죽으면 반드시 저도 죽겠다고 몇 번이고 말하던 남자를.
“두고 봐. 반드시, 그렇게 될 테니까.”
그녀가 제 결심을 되새기듯 짓씹은 말을 내뱉었다. 조지현은 황급히 병실 밖으로 뛰어나왔다.
“뭐라던? 엄마가 뭐라시던?”
아버지가 달려와 아들의 손을 붙들었다.
조지현이 입을 떼려다 멈칫, 입술을 다물었다.
“……, 아무 말도…….”
시뻘겋게 충혈된 아버지의 눈은 독이 오른 어머니의 눈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한 사람은 미움에, 한 사람은 사랑에 미쳐 있다.
“무슨 소리야. 너만 찾았어. 내 아기 돌려달라고, 계속 그 말만 했다고. 지현아, 제발.”
아버지가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너희 엄마 없으면 안 돼, 부탁이니까, 제발, 지현아. 피 묻은 손으로 아들을 부여잡고 아버지는 한없이 울부짖었다.
“지현아…….”
“아버지, 어머니는…….”
이제 포기하셔야 해요.
조지현이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이 아버지가 순간 고개를 바짝 들었다.
“안 돼.”
단호하게 표정을 굳히고 남자가 말한다. 안 돼. 시뻘겋게 충혈된 눈은 더없이 강건한 뜻을 내비친다.
단단한 바위벽에 부딪친 기분이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숙였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이 밀려온다. 결국에는 변하지 않을 것들이다.
조지현은 묵묵히 아버지의 울음을 들어야만 했다.
강석원이 입원한 병원까지 걸어오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죽도록 지친다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병실로 들어가려던 조지현은 안에서 들리는 음성에 발을 멈추었다.
“야, 이 새끼야. 니가 제정신이야? 미쳤어?”
화가 난 음성이 누구의 것인지 곧 알아챈다.
“죄송합니다. 관장님.”
“죄송하고 이게 끝날 일이야? 그러지 않아도 시합 취소된 것 때문에 내 입장이 얼마나 곤란해졌는지 알아?”
남자가 쉬지도 않고 따져 묻는다.
“협회에서 지금 난리치는 거 내가 간신히 설득시켜놨어. 너 같은 놈 다시는 안 나온다고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사과했다구! 내가 너 이러라고 병실도 일 인실 빌려준 줄 아냐.”
“나중에 다 갚겠습니다.”
“갚는 게 문제야? 지금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나중에 다시 할 겁니다.”
“그게 니 맘대로 돼? 운동하는 게 때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떠드는 거냐?”
“죄송합니다.”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하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너한테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서울까지 데려와서 운동시켜놨더니 지금 한다는 말이 고작 운동 그만둔다고?”
“당분간입니다.”
운동을 그만둔다는 말에 조지현은 뒷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게 그거지!”
빽, 하고 내지르는 소리에 조지현은 어깨를 움츠렸다. 관장이 시근덕거리며 숨을 내쉬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대체 왜 그러는지 이유나 들어보자.”
“돈이 필요합니다.”
관장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삼켰다.
조지현은 입술을 길게 물었다 놓는다.
“그 새끼 때문이냐?”
“…….”
“조지현인가 뭔지 하는 허여멀건 새끼 때문에 그런 거냐고.”
강석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팔, 그 새끼 내가 가만 두나 봐라. 잡히면 팔모가지를 확 분질러버릴 테니까.”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나직한 음성이 짐승의 위협처럼 낮게 들려온다. 관장조차 뜸을 들이다가 젠장, 하고 욕설을 내뱉는다.
“정신 차려, 새끼야. 사내새끼들끼리 할 짓이 없어서, 시발.”
“그건 관장님께서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뭐가 상관이 없어! 이 배은망덕한 새끼야! 이런 거 알려지면 너 운동 못해. 이 바닥이 얼마나 말 많은 동네인지 몰라? 운동하는 노친네들 얼마나 보수적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냐구!”
강석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얘기가 통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 관장이 머리나 식혀,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걸어 나온다. 조지현은 문 옆으로 물러서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문을 열고 나온 관장과 눈이 마주쳤다. 관장의 얼굴에 잠시 당혹감이 스쳤지만 이내 뭔가 결심했는지 문을 등 뒤로 닫아버리고는 조지현의 손을 잡아끈다. 조지현은 비상계단으로 그대로 끌려갔다.
“얘기 들었냐?”
다짜고짜 묻는 말에 조지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 강석원은 백 년에 아니, 우리나라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천재야.”
알고 있다. 각종 기사에 오르내리는 헤드라인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조지현은 강석원에 대한 모든 기사를 읽고 있었다.
“저 새끼 운동 그만둔다는 이유가 돈 때문이라는데 너 아는 거 없어?”
“…….”
조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둘이 지내려면 정기적인 수입이 필요하다. 우승 상금은 잘해봤자 일 년에 서너 번이다.
“네가 저러라고 시킨 거 아니야?”
관장이 조지현의 멱살을 움켜쥔다.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거, ……절대로.”
“그런데 왜 하루아침에 저러냐고. 절대 저런 새끼가 아닌데! 시발, 니가 시킨 거 아니면 뭐야!”
고개를 내저으려다 조지현은 그만두었다. 어쩌면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강석원을 그렇게 몰아붙인 것은 결국 자신을 둘러싼 끔찍한 상황이다.
“내가 쟤를 키우려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아!”
남자가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지르자 복도를 지나던 간호사가 비상계단 문을 열었다. 관장이 황급히 조지현을 밀어냈다.
“좀 조용히 좀 해주세요. 환자분들 주무시는 시간입니다.”
“죄송합니다.”
관장이 바로 사과했다. 간호사는 흘깃 두 사람을 쳐다보다가 문을 닫고 사라졌다. 관장이 제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트린 다음에 조지현을 노려보았다.
“너 말이다. 강석원 앞에서 좀 꺼져라.”
“…….”
“네가 지금 강석원 인생 망치고 있는 거라고. 알아? 그 새끼가 얼마나 크게 될 선수인 줄 아냐고!”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는 입술이 부들부들 떨린다.
“죄송한지 알면 꺼져라, 제발.”
관장이 조지현의 멱살을 잡고 한 번 흔든 다음 내동댕이쳤다. 힘없이 벽으로 밀려난 조지현은 희게 질린 얼굴로 죄송합니다, 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관장이 조지현의 옷자락에 침을 뱉었다.
역겨운 호모 새끼.
조지현은 묵묵히 모욕을 들었다. 경찰서에서 강석원이 그러했듯이. 그것조차 온전히 제 몫이었다.
“너 내 눈에 다시 한 번만 띄기만 해 봐라.”
관장이 욕설을 퍼부으며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분노에 찬 발소리가 멀어졌지만 조지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옷자락을 타고 흐른 침이 강석원이 사준 운동화에 떨어진다. 조지현은 얼른 소맷자락으로 운동화를 닦아냈다. 아무리 닦아내도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다.
조지현은 입술을 깨물고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제가 가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 강석원에게 기댈 수 없을 만큼.
강석원이 읽던 책을 덮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설핏 미간을 찌푸린 채 조지현을 돌아본다.
“죄송해요. 좀 늦었습니다.”
여전히 강석원의 미간에 선 주름은 풀리지 않는다.
“기다렸어.”
“죄송합니다.”
강석원이 손을 뻗어 조지현의 얼굴을 감싼다.
“울었어?”
“…….”
세수를 하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 왔는데도 티가 나는 모양이다. 조지현은 애매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부모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
“별 얘기 안했어요.”
감이 빠른 남자다. 최대한 말을 아끼는 편이 낫다. 조지현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꾸하며 보조 침대에 앉았다.
“조지현.”
그의 목소리가 낮게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집에 들어오라고요. 그냥 그 얘기요.”
“그걸 그렇게 길게 해?”
“오는 길에 저녁 먹었어요.”
강석원의 표정이 여전히 서늘하다. 조지현은 가만히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화장실에서 열심히 침이 묻은 흔적을 지워냈지만, 물 얼룩이 남았다. 눈을 껌뻑거리던 조지현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선배님, ……저 학교 그만둘게요.”
“뭐?”
강석원이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그가 눈썹을 치켜 올린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당분간 다니고 싶지 않아요. 이래저래.”
“전학 가, 그럼.”
“그냥 좀 쉴게요.”
“안 돼.”
강석원은 조지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좀 쉬고 싶어요.”
조지현이 흐릿하게 웃었다. 강석원과 눈이 마주쳤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도망갈래요? 저랑 사람 없는 곳으로, 엄마가 절대로 모르는 그런 곳으로 사라질래요? 그래줄 수 있습니까? ……선배님, 인생을 망가트리면서요.
절대로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들을 삼키자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따가웠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등을 쓰다듬는다. 지현아,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다. 그래서 더욱 기댈 수 없다.
“왜 그래.”
따져 묻거나 추궁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걱정할 뿐이었다. 조지현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에요. 그냥 다 지쳐서, ……어디 훌쩍 떠나갔다 올까요.”
“안 돼. 조지현.”
강석원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손이 조지현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내가 할게.”
“선배님…….”
“내가 뭐든 할 테니까, 그러지 마.”
뭐든 하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무엇인가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이 뭐라 하든 강석원은 결국 운동을 그만둘 것이다. 그리고 뭐든 할 터다. 그의 인생이 뒤틀리는 짓들을.
꺼져. 걔 인생 망치지 말고.
관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걔도 마찬가지일걸.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조지현은 고개를 들어 강석원을 올려다보았다. 강석원의 눈빛에 옅은 불안이 스친다.
“감사합니다.”
조지현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배님은, ……, ……, 좋아해요.”
한숨같이 새어나온 한마디에 강석원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조지현은 가만히 웃는 눈으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좋아합니다, 선배님.”
둘 다 입 밖에 내어본 적 없는 말이다. 조지현은 문득 가슴에 퍼지는 더운 열기에 입술이 바싹 말랐다. 사막의 모래처럼 온몸이 버석거렸다.
“저는 선배님을…….”
뒷말은 거세게 부딪쳐오는 입술에 먹혀버렸다. 강석원이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조지현의 입술을 빨았다. 귀가 먹먹했다. 열이 올라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강석원이 한 팔로 조지현을 침대 위로 안아 올렸다. 가느다란 몸이 강석원을 끌어안았다. 얇은 환자복 아래로 불거진 욕망이 조지현의 다리에 닿았다.
강석원이 밭은 숨을 내뱉으며 입술을 깊게 포갰다. 혀가 거세게 움직여 상대의 욕망을 부추겼다. 강석원의 환자복을 붙든 조지현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지현아, 하는 부름이 입속으로 삼켜진다. 발끝까지 오싹한 열기가 훑고 지나갔다.
“선배, ……선배님, …….”
조지현이 흐릿한 눈으로 강석원을 불렀다. 욕망을 조르는 듯한 느낌에 강석원은 낮게 이를 사리물었다.
“……, 하면 안 될까요.”
“뭐?”
강석원의 물음에 조지현이 발간 눈을 아래로 떨구었다.
“지금 하면, …….”
어물어물 시선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던 강석원이 마른침을 삼켰다. 툭 불거진 그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조지현의 귓가에 생경하게 들린다.
“지금 괜찮으시면, ……하고 싶습니다.”
강석원이 지현아, 하고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것이 마치 거절의 의사라도 되는 듯이 조지현이 눈썹을 찌푸린 채, 안 되나요? 하고 묻는다.
강석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지현을 바라보기만 했다. 상대의 의중을 살피는 것이다.
조지현이 그때 강석원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제 딴에는 필사적인 유혹이었지만 입맞춤이라고 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행동에, 강석원은 숨을 삼켰다.
“선배님, ……제발…….”
조지현이 강석원의 다리 사이에 제 것을 대고 슬슬 문지르기 시작했다.
가여울 정도로 어색하고 엉망인 그 행위에, 강석원은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가 조지현의 입술을 물어뜯듯이 삼켰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야만적인 키스였다. 그의 손이 조지현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바싹 잡아당겼다. 하반신이 맞닿은 채로 강석원은 조지현의 바지를 끌어내렸다.
“아……, …….”
바지와 속옷이 한데 엉켜 내려가자 조지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해달라는 듯이 강석원에게 매달려 제 몸을 부비었다. 강석원이 환자복을 끌어내렸다. 젖은 성기가 드러났다.
조지현의 다리 사이에 성기를 밀어붙이고 강석원이 조지현을 붙들고 허리를 쳐올렸다. 젖은 살덩이끼리 질척거리며 부딪쳤다. 조지현의 목덜미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강석원이 조지현의 어깨를 깨물었다. 금세 화인처럼 울혈 자국이 남았다.
조지현이 먼저 절정에 다다라 강석원의 환자복을 적셨다. 파들파들 경련하는 조지현의 몸을 바라보는 강석원의 눈에 황홀경이 찾아든다. 곧이어 강석원도 절정에 다다랐다. 미처 벗지 못한 조지현의 옷 위로 정액이 엉망으로 튀었다.
강석원이 환자복으로 닦아주자 조지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조지현이 다시 허리를 숙여 강석원의 아랫입술을 빤다. 태어나자마자 엄마 젖을 빠는 아이보다 더 서툰 몸짓이다.
그 별것 아닌 행동에 강석원의 몸에 다시 열기가 어린다. 입술이 맞물린 채로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탐했다. 오늘이 지나면 다시는 내일을 맞이하지 못할 사람처럼.
“아프면, 말해.”
강석원의 목소리가 낮다. 조지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숨을 들이켰다. 강석원의 새끼손가락이 틈을 파고들었다.
“――, ――.”
“괜찮아?”
“……, 네.”
고작 새끼손가락이었는데, 손가락 마디까지 아래로 느껴졌다. 발끝이 움칫, 떨렸다. 손가락이 천천히 안을 파고들었다. 그 노골적인 움직임이 고스란히 욕망을 드러냈다. 강석원이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직시하고 있다. 욕망에 사로잡힌 짐승이다.
“하아, ……. 으…….”
조지현이 설핏 눈가를 좁혔다. 강석원은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표정변화가 없다. 하지만 그의 시선만큼은, 집요하게 조지현을 훑었다. 숨결, 표정 변화, 몸의 움직임, 흐트러진 소리 등을.
손가락이 단단하게 맞물려 있던 곳을 꼼꼼하게 펴서 넓힌다.
“하나 더, 넣을게.”
강석원의 말에 조지현은 얼른 하라는 듯이 눈을 꼭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을 참아 내는 가련한 모습에 남자의 성기가 꺼덕, 움직였다.
손가락 두 개가 간신히 들어갔다. 조지현의 잔등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숨을 몰아쉬다가 조지현은 더 해주세요, 하고 강석원을 보챘다.
“천천히 해야…….”
“더요, ……계속해주세요.”
강석원이 눈가를 찌푸렸다. 조지현은 강석원의 옷자락을 쥐었다. 어떻게든 뭐든 해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서요…….”
강석원이 손가락을 빼고 아까보다는 아주 미약하게 말랑해진 입구에 제 살덩이를 가져다 댔다.
“――!”
숨을 들이켤 새도 없이 삽입이 이루어졌다. 조지현의 가느다란 몸이 잘게 경련했다. 얼굴도 희게 질린 채였다.
강석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멈추려면 지금뿐이다. 그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은 그 흉포한 야수 같은 본능을 억누를 수 없을 것이다.
조지현이 손을 뻗어 강석원의 뺨을 그러쥐고 속삭였다.
제발.
미약하게 남아있던 이성이 그대로 증발하는 순간이다. 강석원의 성기가 짓치듯 안으로 파고들었다. 조지현은 몸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에 눈이 한껏 벌어졌다.
작은 틈이 아슬아슬하게 벌어져 커다란 성기를 집어 삼켰다. 조지현에게서 짓눌린 신음이 새어나왔다. 강석원이 한 손으로 조지현의 허리를 틀어쥐고 한껏 욕망을 밀어 올렸다. 조지현의 몸이 반으로 꺾이는 것처럼 풀썩, 강석원의 어깨로 쓰러진다. 그러면서도 강석원의 환자복을 힘껏 붙든다.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되는 생명줄처럼. 강석원이 거칠게 밀어붙여도 조지현은 신음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지현아.”
낮은 부름에 조지현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허겁지겁 입을 맞추었다. 그 작은 반응에 강석원은 미칠 듯이 허리를 박으며, 조지현을 열렬히 탐했다. 뜨거운 피가 엉기고, 몸이 맞물렸다.
숨소리가, 숨소리만이 들렸다. 빠르게 이는 귓가의 맥박이 터질 것만 같다.
“아! 선배……, 선……. 하아! 읏!”
조지현이 강석원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로 울부짖었다. 신음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머리가 저릿저릿했다. 물기 어린 목소리가 몇 번이고 강석원만을 찾는다. 강석원이 흔드는 대로 몸이 흔들리고 그가 짓치는 대로 아래가 젖어들었다. 강석원이 꿈을 꾸는 것처럼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조지현의 심장은 터져버릴 듯 뜨거워졌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가 찌걱거리며 음액의 전초가 흘러내렸다.
“――!”
강석원의 목에서 짐승이 그릉거리는 숨소리가 들리며, 그의 근육이 일제히 긴장했다. 뜨거운 물이 벌어진 틈으로 확, 쏘아졌다. 안이 오싹오싹 떨리며 수축을 반복했다. 허벅지로 뿌연 정액과 피가 섞여 흘러내렸다. 초경을 들킨 여자아이처럼 조지현의 얼굴이 수치로 빨갛게 달아올랐다.
강석원은 말없이 조지현을 끌어안고는, 숨을 골랐다. 입술이 귓바퀴를 부드럽게 물었다 놓는다. 그 결에 속삭이는 아주 작은 소리를 듣고, 조지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참담한 기분이다. 참담할 만큼, 행복해 눈물이 났다.
“――.”
입가에 비릿한 피 냄새가 퍼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조지현의 코를 타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넘어지면서 코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목으로 넘어온 피를 뱉어내고 얼굴을 쓸어 올렸다. 시계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니 이미, 밖이 까만 어둠으로 물들어 있다.
오랜 꿈을 꾼 기분이었다. 갑자기 뼛속을 쑤시는 한기에 몸을 떨며 조지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꿈과 기억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그래. 그러고 떠났었지.
강석원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그를 떠났다. 미국으로 도피하듯 유학을 택했다. 참을 수 없었다. 강석원의 곁에서 그가 자신 때문에 뒤틀린 선택을 하는 모습을, 그로 인해 받게 될 수많은 수모를, 손가락질을, 멸시를, 그리고 무엇보다 언젠가 어머니가 그의 인생을 망가트릴 것 같은 공포를.
참아내기에도 털어놓기에도 버거운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사라졌다.
미국으로 가면서 아버지와 약속했다. 어머니하고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그럼, 전화통화는 해. 어머니는 대단한 관용을 베푼다는 듯이 말했다. 아버지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조지현에게 매달렸다. 조지현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로써 자식 된 도리를 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녹음된 테이프를 틀어주는 것처럼 대응해줄 수 있었다.
미국으로 떠나는 날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에 편지를 들려 보냈다. 편지에는 강석원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몇 십만 원이면 복사폰을 만들어 문자든 통화내역이든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다는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서. 조지현은 편지를 갈가리 찢어버렸다. 하지만 그 섬뜩한 광기마저 떨궈낼 수는 없었다.
잘 다녀오라고 눈물로 배웅하는 아버지에게 조지현은 흰색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 뒤에 꼭 보내주세요.’
편지에는 미국에서 머물 집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한 달이면 강석원도 어느 정도 몸이 나을 테고, 그러면 운동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건강할 때, 서로의 상황을 살펴야만 했다.
‘부탁드립니다.’
고개를 숙이며 아버지께 간청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작 그런 이유로 시작되어, 별것 아닌 것들이 궁금하던, 그 감정들을 감당할 방법을 몰라, 아버지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꼭 그렇게 하마.’
아들의 손을 잡고 그렇게 말하던 아버지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그의 기색은 진실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다고 믿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났다.
미국에 도착한 후 보름가량,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꼬박 앓았다. 그러고 나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강석원의 편지를 기다렸다.
그가 분노를 가다듬고, 이성을 되찾아서, 미국에서 차츰 둘의 행복을 이어갈 수 있게 되기를. 단순하고 어리석은 자신의 믿음은, 한 달이 지나고 그로부터 또 한 달이 지나고, 그로부터 다시 두 달이 지날 때까지 이어졌다. 강석원의 성격상 답장을 보내는 일이 쉽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가 편지를 쓰는 모습은 쉬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편지가 도착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반 년간, 편지는 오지 않았다.
눈이 내렸다. 미국에서 바라보는 눈은 유난히 차고 깊었다.
이듬해 봄, 기숙사로 거주지를 옮겼다. 하루에 한 번씩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편지의 도착 여부를 확인했다. 그러던 것이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일주일, 보름, 한 달, …….
강석원은 아직도 화가 난 것일까. 그래서 내게 연락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을 찾아 미국으로 오는 강석원의 꿈을 매일 밤 꾸었다. 다정히 안아주는 날도 있고, 네가 내 인생을 망가트렸다고 화를 내는 날도 있고, 말없이 몸에 올라타서 목을 조르던 날도 있다. 답장을 기다리다 못해 그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Return to sender(반송)이 찍혀 돌아온 편지 봉투처럼, 그에 대한 마음은 방향을 잃었다.
그리움은 시간에 풍화되어 점차로 잦아들었다. 그렇게 믿었다.
전화를 걸까도 생각했지만, 그의 목소리로 거절을 듣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강석원의 인생을 망쳐버리고도 남을 어머니의 광기가 떠올라 쉽게 실행에 옮길 수도 없었다.
그렇게 보루로 남겨둔 번호조차 기억에서 까마득히 밀려났다.
정신병원에 없는 거 확인했으면 됐어.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떠올라 가슴이 데워진다. 동시에 손끝과 발끝은 피가 통하지 않는 것처럼 얼어붙는다. 휘청거리며 식탁으로 가서 약병을 찾아 물과 함께 삼켰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번호를 누르자 신호음이 규칙적으로 울린다.
「네. 여보세요.」
“아버지.”
「오, 지현이구나. 그래, 무슨 일이냐.」
사업 때문에 어머니와 상해에서 지내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밝고 활기차다. 자신이 사라진 다음 날부터, 거짓말처럼 잘 풀리기 시작한 그의 사업처럼.
“여쭤볼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그래. 말해라.」
“편지, 말입니다.”
미국에 있을 때도, 이미 몇 번 물은 질문이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보냈다고 진중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 질문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것은, 미국에서 지낸 지 일 년쯤 되던 시기다. 어쩌면 강석원이 자신을 찾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다.
「무슨 편지?」
“제가 고모님 댁으로 오기로 하면서 드렸던 편지요.”
전화기 너머에서 음, 하고 기억을 더듬는 소리가 들린다.
“그거, 부치셨나요?”
「하하하, 녀석. 지금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냐? 이 시간에.」
“네.”
심장이 퍼덕거리며 뛴다.
강석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의 분노한 음성과 지난날의 기억이 뒤죽박죽 뒤섞여 엉망으로 구르기 시작한다.
“그거 여쭤보려고 전화 드렸습니다.”
「지현아, 그걸 왜…….」
“말씀해주세요.”
조지현은 이마를 손으로 내리눌렀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버렸다.」
“…….”
누군가 뜨거운 쇳물을 심장 위에 부어버린 듯한 착각을 느꼈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끔찍한 수치와 분노가 심장을 두드린다.
「지 자식 잘못 가는 길을 보고, 눈감아주는 부모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냐.」
“……, 버리셨습니까?”
「그래. 당연히 그걸…….」
이어지는 말은 듣지 않았다.
최악이다.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한 기분이다. 자신의 비겁함에, 나약함에, 멍청함에 어떠한 변명조차 떠올릴 수 없다.
만나야 한다. 만나서 이야기를…….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조지현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외우고 있는 열한 개의 숫자를 차례대로 눌렀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몇 번이고 계속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조지현은 일단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신발을 신었다.
만나서, 얘기하자. 무슨 말이든, 어떤 말이든. 용서받을 수 없을지 몰라도, 뭐라도 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용서받고 싶다. 어제 강석원을 붙들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비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어제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니, 아예 다시 시작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 자신 때문에 어긋난 강석원의 인생을 바로 잡아주고 싶다.
초조하게 이는 사나운 욕심에 조지현은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엘리베이터 옆에 붙은 거울을 보고 흠칫 놀랐다. 피투성이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대충 닦아냈지만 푸르스름하게 질린 안색은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야 하나.
조지현은 핏자국이 묻은 셔츠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이번에도 연결은 되지 않았다.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여자의 경고 뒤에 조지현은 1번을 누르고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 조지현입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과도, 아니,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조지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껌뻑였다.
분명히 나올 때는 하늘이 새카맸는데 언제 저렇게 큰 달이 떠 있던 걸까. 평소 보름달을 보며 느끼는 충만감이 아닌, 오직 소름끼치는 감각만이 온몸을 휘감았다. 마치 커다랗게 확대한 뱀의 눈과 마주하는 기분이다.
조지현은 자신이 메시지를 남기던 도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 ……, 제가 가겠습니다, 가게로. 기다리겠습니다.”
별표를 누르고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달이 한 뼘쯤 더 커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조지현은 설핏 눈가를 좁혔다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헛것이 보이는 것으로 생각했다. 환청이나 환각은 이제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건.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달이 한 뼘씩 다가온다. 조지현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부릅뜬 채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새하얗게 자신을 노려보던 달이 기우뚱, 고개를 모로 세우는 것처럼 기울더니 구궁, 하고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아파트는 물론이고 창밖의 다른 모든 건물의 불이 전멸되었다. 지상에 남아있는 빛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서울 하늘을 집어삼킨 어둠에, 별이 쏟아졌다. 성결한 어둠에 상처를 내듯 빛이 그어진다.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에 압도되어 조지현은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실로 장관이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 빛이 그친 후, 새하얀 달만이 교교히 제 몸뚱이를 대교에 드리웠다.
그 바로 다음 순간, 발밑이 무너졌다.